"진짜, 중국 분이세요?"
"그럼, 가짜 중국사람도 있어요?... 왜요?"
수원 구운동에 일을 다니면서 울긋불긋한 중국음식점에서 짜장면 시켜 먹고는 여 주인에게 묻는 말이다.
"하! 하~ 요즘 중국 분들 뵙기가 힘들어요? 중국집이 맨 한국사람이고, 다들 어디 가셨는가... 어릴 때 아버지 손에 이끌려 짜장면에 호강하던 추억이 있었는데 말이지요."
"점, 점 살기가 힘들어요... 대게는 미국으로 많이 건너가고 우리는 이 동네에서 삼십 년 이 장사지요. 우리 윗대부터 대대로...."
그러면서 주인은 벽에 걸린 무슨 증 같은 걸 가리키며 확인을 강조하였다.
풍기극장 앞,
삼남당 약방 옆 구석 의성옥 창문 아래서 헌이와 승학이 하고 정신 없이 딱지 놀이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툭툭 친다.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자전거 뒷자리에 타고 실려간 곳은 십자거리의 31번 중국집이었다.
양쪽으로 밀어서 열리는 고급스러운 문에는 주렁주렁 대나무 발이 걸려 있고 두꺼운 주홍색 옷 칠을 한 탁자에는 벌써 형이 와서는 기다리고 있었다.
비릿한 냄세, 온통 붉은 천과 금박 장식들, 길고 무거운 대나무 젓가락, 벽에 걸린 장개석 총통, 한국말로 주문 받고 주방에 대고 소리치는 중국말.
"여~ 와라바시 갖다주소!"
중국에서는 젓가락을 와라바시라 하는 모양이다.
아버지 몫은 시키지 아니하시고 두 형제가 입에 시커멓게
장 칠을 하면서 꾸역꾸역 집어삼키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신다.
형은 와라바시 싼 포장지를 쪼개서는 넓게 펼치고는 그 걸로 입을 닦는다.
"다 먹었으면, 요 걸로 요래 접어서 입을 닦으면 되는 기라!"
형은 이미 여러 번 경험이 있었다는 듯이 으쓱대면서 나에게 이르는 것이다.
아버지는 여러 남매 중에,
아직 막내가 태어나기 전이니 아들인 형과 나만을 몰래 불러서는 짜장면을 먹여 주시며 당신이 그윽한 행복감에 취하시는 것이다.
풍기에는 중국집이 두 집 있었다.
전화번호가 31번인, 십자거리의 31번 집. 태춘당약국 앞의 36번 집.
그 중국인 주인을 때때로 중앙시장에 바구니 들고 장 보는 걸 목격하고는 하는데,
어찌나 뚱뚱한가 나는 늘 무서워서 가까이 가지 않고 피해 다니고는 하였다.
한 번은
그 뚱보가 영신라사 골목에서 마주쳐서는 불룩 나온 큰배로 나를 벽으로 밀어 부처서는 잔뜩 겁을 주고 나서는 나를 쓱쓱 머리를 쓰다듬고는 씨익 웃어 주고는 뒤뚱거리며 사라지던 기억이 새롭다.
아마, 살살 피해 다니는 나에게 딴에는 장난치고 싶었던 모양이다.
고등학교 다닐 때인데,
안동 친구들 대접한다고 31번으로 데려가 술을 시켰다가는 쫓겨나고는, 다시 36번으로 옮겼지만 역시 빼갈과 계란탕은 얻어먹지 못했다.
"학생이 머신 술이가 해?"
쫓겨나는 우리들 뒤통수에 투박한 이국적 어투가 아직도 귀에 생생히 맴돈다.
총각 때,
의성에서 음료수 배달을 다닐 때는 거래처 중에 한 군데가 중국인 분식 집이었다.
주인의 여 동생, 곡도선은 영화 <리칭>의 여 배우 리칭과 꼭 닮았는데, 나는 음료수 활인분 대신에 그 아가씨 먹으라고 쥬스로 대신 주고 해서는 인심을 톡톡히 얻어 놓았다.
뿐만 아니라,
늘 점심은 후배 동료가 싫어하던 말던 거기에서 만두 찜이나 볶음밥, 물만두 등 그 집 식단을 섭렵하고는 해서 꾀나 친해져서는 주위에서 곧 국제결혼이 나오겠다는 농을 듣기도 하였다.
대만에서 유학 온 그 댁 친척 아가씨가 잠시 머문 적이 있어
나는 그녀에게 관심이 생겨났고 그러는 나를 곡도선은 안절부절못해 하였다.
나는 곡도선에게 확실한 영역을 잡아가는 듯 했고....
그러나
그런 환상의 꿈이 여지없이 깨지기로는
곡도선이가 안동에 있는 친척집에 머문다고 해서
역시 안동서 유명한 중국집인 그 댁으로 전화를 했다가 약혼자라고 하는 중국 사내로부터 혹독한 욕설을 들었을 때였다.
중국인들은 반드시 중국인들끼리만 결혼한다는....
그러한 추억이 밴 중국집은 요즘 부쩍, 보기 힘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