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서각(御 書 閣)
종 목 : 지방문화재자료 제32호
명 칭 : 어서각
지정일 : 1984년 04월 01일 지정
소재지 : 전북 장수군 번암면 노단리 1118-1
번암 어서각 전경
대한민국의 소중한 자산이요 장수의 자랑인 고택 “장재영가옥”을 둘러보니 십년묵은 체증이
뻥 뚤리듯 가슴이 후련해짐은 왜일까? 마치 갈증 심할 때 시원한 냉수 한그릇 마시는듯
상쾌한 발걸음으로 같은 마을에 있는 조선조 영조임금이 직접 친필로 신하 장현경에게 써준
왕의 글을 보관하고 있다는 어서각을 향하여 가련다 가까운 거리이기에 걸어서 가련한다
큰길을 향하여 나오니 번암면사무소와 번암면 종합복지관이 눈에띈다
그 옆으로는 노인들 최고의 인기종목 게이트볼장이 있다 도로 앞쪽으로 빨간 우체통이 보이는
우체국이 있다 빨간 우체통을 보고 있으니 문뜩 유치환 시인의 “행복”이란 詩 구절중
“에메랄드빛 하늘이 훤히 내려다뵈는 우체국 창문앞에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란 구절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이곳 번암도 2007년 개봉된 허진호 감독이 만든 “행복” 이라는
영화 촬영지 이기도 하다 황정민 임수정 두 주인공인 행복의 영화 촬영지는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동화댐 상류지역 지리산 가지라서 지지라는 지지계곡 심산유곡에서 촬영했다.
우체국 지나서 남원쪽으로 조금 가다보면 우측으로 어서각 이란 표지판이 보인다
어서각 하면 조금은 생소할 것 이다 전국적으로 많은 어서각이 건립 되어있다
어서각이란 왕이나 왕비가 친필을 보관하는 장소이다 왕이 친히 내린 어필은 자손과 신하에게
내린 명령이나 가르침 교시, 훈유, 편지, 현판, 시고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임금의
친필을 민간에서 보관하는데 이 곳을 어서각 이라한다
장수군 번암면 노단리 1118-1번지에 위치한 어서각은 추담 장현경에게 하사한 영조의 친필을
보관하기 위해 정조임금 23년(1799)에 세웠 곳이다 전각을 둘러싼 안쪽담 내담은 진흙과 돌로
혼합하여 만든 담이며 담벼락에 이쁜 꽃 문양을 넣어서 만든것이 특징이다
바깥쪽으로 외담이 있고 들어가는 철문이 있는데 잠궈 논듯하지만 시늉만 해놔서 손으로 열고
들어갈 수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홍살문이 보인다.
홍살문 : 홍전문(紅箭門) 또는 홍문(紅門)이라고도 한다 둥근 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이 없이
화살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워 놓았고 그 중간에는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다
이 홍살문이 언제부터 어떤 연유로 해서 세워지게 되었는지는 문헌상 기록이 없어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세워진 장소로 보아서는 경의(敬意)를 표하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지 않나 생각될 뿐이다.
번암 어서각 홍살문과 꽃문양 담벼락
내부로 들어가는 삼문 옆 담벼락(안쪽담)에는 꽃을 수놓아 멋지게 만들었다
어서각은 여러 차례 보수를 해서 오늘에 이른다 삼문을 열고 들어가면 전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어서각이 있다
전각의 중앙에 어서각(御書閣) 이란 현판이 걸려있고 언제 누가 쓴 것인지 기록되지 않았다
어필이 보관된 곳 전각 내실은 들어갈수 없게 자물쇠로 잠궈 놓았다 영조임금의 원본 어서가
이 곳에 보관 되었을리는 없다 국가 중요문화재를 함부로 둘리는 만무하다 다만 이 곳에는
복사본이 잊지 않을까 궁금해서 보고 싶었으나 잠궈져 있어 확인 할수없어 안타깝다
하지만 국가의 귀중한 문화자산을 소중히 보관하고 보호하는게 마땅하다고 사료한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어서각(御書閣)
이곳 어서각 외부는 현판이 있고 건물 보수와 관련된 4개의 현판이 측면에 걸려있고
중앙 안쪽으로 방(전각내실)이 있다 이곳에 영조 임금이 직접 쓴 글씨(어필)를 보존하고
있다고 전한다 예전에는 직접 보관했을 것이라 추측한다
현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특히 중요문화재는 중앙부처 안전한곳에 보관하는
관례로 보아 현재는 영조왕의 친필인 어서가 이곳에 있을지 의문이다
원본은 가로 22㎝×35㎝ 크기로 홍저지에 쓰여진 어서라고 한다
문헌에 의하면 어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고 전한다 1763년(영조 39) 동지에
영조 임금은 입직한 조신(朝臣)들에게 백죽(白粥 :흰죽)과 치육(雉肉 :꿩고기)을 하사하고
친히 정청(政廳)에 나와 신하들과 같이 즐기며 장현경(張顯慶)에게 시 한 수를 하사 하였다
내용을 샆펴보면 아래와 같다.
(七旬領相癸未冬臘 報漏將半君臣同食 奧昔東漢蕉婁豆粥 于今一堂可見泰日)
(찰순영상계미동납, 보루장반군신동식, 오석동한초루두죽, 사금일당가견태일)
“칠순의 영상에게 계미년 동짓날 음식을 내렸도다 파루의 종이 반을 알릴때 군신이
같이 먹노라 옛적 동한에 콩죽이 성하였는데 지금 이 집안에 가히 태평성세를 보겠구나.
훗날 장현경은 어서를 가지고 귀향하여 왕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어서각을 이곳
번암면 노단리에 세웠다 전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영조임금 어필(御筆)은
사언팔구(四言八句 4문장, 8싯구)를 장현경에게 하사 하였으며 장현경은
1798년 이 어필을 고향 장수로 가지고 왔다 이에 상신(相臣) 김상복(金相福)
장첩(粧帖) 군수(郡守) 민종렬(閔鍾烈)이 어서각(御書閣)을 세웠다 전해진다
이 곳의 어서각은 정조 23년(1799) 세워졌다고 한다 세우게 된 동기는 추담
장현경선생이 1798년 겨울에 공직에서 사직을 하시고 고향으로 돌아 오셨다
귀향한 이듬해 1799년 영의정 김상복(金相福)이 이를알고 예조에 기록한 후
첩자(帖子-쪽지)를 만들어주자 군수(郡守) 민종렬(閔鍾烈)이 직접 서둘러서
세우고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다는게 일반적인 설이다.(당시 남원부 관할했음)
보수한 기록을 상세히 남긴 현판들
⊙ 추담(秋潭) 장현경(張顯慶) (1730∼1805)
- 자(字) 사응(士膺), 호(號) 추담(秋潭)
- 아버지 장보명(普明), 어머니 전주이씨(全州李氏)
- 1730년 12월 12일 남원(南原,現在 장수군 번암면) 노단리(魯壇里)출생
- 8세에 소학(小學),사기(史記),한서(漢書),경전(經典) 주야탐독(晝夜耽讀)함
- 성품은 순수하고 용모가 단정하요 준수하고 총명했으며 재예(才藝) 뛰어남
- 1752년(壬申) 9월 정시(庭試) 상위(上位) 합격하고 이조(吏曹)에 봉직함
- 1775년(乙未) 박종갑(朴宗甲) 추천으로 홍문관근무 사관(史官) 겸임
- 1778년(戊戌) 7월에 상운도(祥雲道) 찰방(察訪) 역임
- 1781(辛丑, 正祖5년)호조(戶曹),좌랑(佐郞) 곧 연일(延日)현감(縣監)전임
- 1796년(丙辰) 7월 삼례도(參禮道) 찰방(察訪) 사미인가 등 32구(句)지음
- 1798년(戊午) 겨울에 사직하고 귀향함
- 1805년(乙丑) 7월 21일 묘시(卯時) 별세 향년(享年) 76세
- 1805년(乙丑) 10월 13일 구암(龜巖) 선영(先塋)에 장례(葬禮)함
- 부인(夫人) 성주이씨(星州李氏) 자녀 2남 1녀를 둠.
사미인가(思美人歌) / 추담(秋潭) 장현경(張顯慶)
그리울셔 우리 님금, 뵈옵고져 우리 님금
우리 님금 성명(聖明)하셔 천지(天地)오 부모(父母)이시니
날갓탄 미천신(微賤臣)을 무엇이 가취(可取)라고
이은(異恩)을 자로 닙고 연포(筵褒)가 정중(鄭重)하니
고신(孤臣) 일촌침(一寸枕)이 눈물이 바다히다
천문(天門)의 출입(出入)하야 경광(耿光)을 일시하니
영화(榮華)가 지극(至極)하고 소원(素願)이 여긔잇다
서교(西郊) 육참(六站)의 마관(馬官)을 하이시니
군은(君恩)을 슉샤(肅謝)하고 옥패(玉佩)를 하직(下直)하니
창문(창門) 구중(九重)의 거름 거름 눈물이라
견마(犬馬) 미물(微物)도 제님재를 생각하고
규곽(葵藿) 방지(旁支)도 날빗츨 기우리니
회양이 엷닷말가 금달(禁달)이 내원(內苑)이라
중쇼(中宵)의 창(窓)을 열고 북신(北晨)을 바라보니
오운 깊픈 곳에 우리 님금 계시고나
경루(瓊樓) 옥우(玉宇)에 츄긔(秋氣)난 치워지고
백노(白露) 겸가의 미인(美人)은 머러졌내
진령가 한곡쥬(曲調)로 묘묘(渺渺)한 천일방(天一方)이
슈문(隨門) 슉견(宿견)을 몽매(夢寐)에나 자즐손가
거연(遽然)히 잠이드러 일침(一枕)을 일워시니
의연(依然)한 구일뫼양(舊日模樣) 입시(入侍)에 드렷고나
용루(龍樓)를 노피 열고 옥좌(玉座)가 앙님(仰臨)도다
지척(咫尺) 젼석(前席)의 종일(終日)을 근시(近侍)하니
천안(天顔)이 여작(如昨)하고 옥음(玉音)이 온슌(溫詢)한데
촌겨(村鷄) 한솔의(聲)에 홀연(忽然)히 깨달으니
심신(心神)이 창망(창망)한여 눈물이 오세(衣)젓세
군문(君門)이 여천(如天)하여 다시들기 어려울세
꿈이나 빙쟝(憑藉)하여 우리 님금 뵈난거슬
겨성(鷄聲)은 무삼일노 꿈조차 깨오난고 방황(彷徨) 죵야(終夜)의 이마음
경경(耿耿)하다 종남산 불로(不老)하고 한강슈(漢江水) 도도(滔滔)하니
슬푸다 이내 생각 어느 때 그치일고.
우리 장수군에는 어필을 보관하는 곳이 두 군데 있다 하나는 이곳 어서각이고
하나는 전편에 소개한 산서면 오성리 성재마을에 있는 어필각이다
이곳의 어서각은 영조 임금이 1763년(영조 39) 하사한 친필이고 산서면의 어필각은
태종 임금이 1414년(태종 14) 하사한 친필이다 시대적으로 보면 산서면 오성리
어필각에 있는 “안성강원도관찰사고신왕지”가 약 350년 앞서 받은것이다
선서에 보관중인 고신왕지는 요즘으로 말하자면 인사발령 명령서인 반면에
이곳 번암의 어서각에 보관중인 어필은 시를 적은 것이다.
오늘 어서각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깊은 한숨과 아쉬움이 가득하다
임금의 친필을 보관한 어서각에 누군가 고추와 들깨를 말렸는지 흔적들이
이곳 저곳에 지저분하게 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하여 왕의 친필이 대수롭지
않고 임금님의 친필을 모시는 어서각이 별볼일 없다 하더라도 이곳이 마치
개인의 사택인양 이용한다면 장수말로 쪼까 거시기하다 문화재라는 의미도
점점 퇴색되어 가는 요즘에 나 같은 미친놈도 있어야 한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고 밝은 표정으로 답사길 마치고 돌아가련다.
찿아 오시는 길
번암면에는 장수8경중 제8경인 반계은린이 있다 반계은린은 반계천에 은어떼 노닐다란 뜻이다
반계란 옛날에 번암면의 지명을 일컬은 말이고 “은린”이란 은어떼를 일컷는다
봄이면 진달래 산철쭉이 온산을 붉게 물들이고 여름이면 높은산 깊은 골에 맑은물이 시원하다
가을이면 단풍으로 온 산천이 한폭의 그림이다 은어는 겨울이면 따뜻한 섬진강 하구에서
살다가 늦은 봄 곡우철 이면 번암천(요천)을 찾아온다
이곳에 와서 여름을 지내다가 백로철이 되어 물이 차가워지면 하룻밤 사이에 섬진강 하구로
가버린다 은어의 등은 옅은 노란색이며 배는 은색을 띠고 있다 맛이 특이해서 은어의 맛에서
수박을 먹은 듯한 향기를 느낀다
이 고장 선인들은 여름철이 되면 은어 잡는 것이 효자도 풍류객도 제일가는 낭만이었다
상상해보라 은어떼 노니는 반계천 !!
~ 장수에서 호롱불 최용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