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두 교구는 성 시제베르토 3세의 왕의 아들인 다고베르트 3세의 축일을 성대히 지낸다.
사람들은 그가 순교자였다는 주장을 하고 있으나 정확한 전기는 모르고 있는 형편이다.
그가 656년에 아우스트라시아의 왕관을 물려받았을 때에는 어린 아이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어린 왕은 그의 후견인이던 그리모알드로부터 축출되었고,
프와티에의 주교인 디도에 의하여 아일랜드로 갔다가 한다.
이때부터 그의 행적은 불확실 하지만,
순교한 성인으로 공경받아온 것을 보면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할 것이다.
♤마르가리따 Margaret 1464년 축일: 12-23 과부 사보이
사보이의 아마데우스 왕과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여동생 사이에 태어난 그녀는
두 자녀를 둔 홀아비인 테오도레란 사람과 결혼하였다.
그녀 자신에게는 자식이 없었지만, 남편을 지극히 섬겼을 뿐만 아니라,
제노아에 기근과 전염병이 극성을 부릴 때에는
자신을 온전히 잊어가면서 주민들을 간호하여 큰 명성을 얻었다.
그러던 중, 1418년에 남편과 사별하니, 그녀의 나이는 36세였다.
이때부터 그녀는 성 빈첸시오 페레르의 도움을 받아가며
기도생활에만 몰두하면서 25년을 살았다.
또한 그녀는 주님의 환시를 보는 도중에,
질병과 증상 그리고 박해 세 글짜가 씌인 화살 세 개를 받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모두 그녀가 받을 고통을 의미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로 나타났는데, 그녀는 위선자란 고발과 동시에 중병에 걸렸으며,
또 발도 이단이라는 누명을 썼다.
그녀는 이 모든 난관을 무난히 극복하고 운명하였다.
♤성 마르도니오 Mardonius 12.23 순교 니코메디아 303년
♤성녀 마조타 Mazota 12.23 동정 아베네티 8세기경
♤성 미그도니오 Migdonius 12.23 순교 니코메디아 303년
♤빅토리아 Victoria 연대미상 축일: 12-23 동정,순교
성녀 아나톨리아는 동정을 지키기 위하여
아우렐리우스라는 청혼자의 끈질긴 청혼을 끝내 마다하자,
그녀의 언니인 빅토리아가 동생을 설득시키려고 애썼으나
오히려 자기 자신도 동생을 따라 자신의 약혼자인 에우제니오란 사람을 물리쳤다.
이에 앙심을 품은 두 사람이 이들 자매들을 크리스챤으로 고발하여
약혼자들을 칼로 죽였다고 한다.
이 두 성녀에 대한 공경은 이탈리아 전역에 두루 퍼져있지만,
그에 따른 역사적인 증거는 거의 알려진바 없다.
#하느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에우제니오 청년과의 청혼을 거부했다.
또한 언니 아나톨리아 역시 아우렐리아 귀족과 파혼하였다.
분노한 두 청년은 빅토리아와 아나톨리아를 죽이려고 납치하여
사비나로 떠났으며 그곳에 가두었다.
그런데 두자매를 죽이려던 청년들은 하늘에서 이상한 표징을 보았고
두자매를 지키던 경비병과 더불어 모두 회심하게 되었다.
신자는 모두 사형에 처하라는 디오클레시아노 황제의 박해속에서
회심한 그들은 빠져나갈 수 없었다.
신앙을 굳게 지킨 두자매와 함께 그들은 모두 순교하였다.
성녀 빅토리아는 페르모와 몬테레오네의 주보성인이시다.
♤성녀 빈틸라 Vintila 12.23 은수자 오랑스 890년
♤세르불로 Servulus 590년경 축일: 12-23 걸인 로마
세르불로는 어릴 때부터 수족이 마비된 걸인이었다.
그는 똑바로 서거나 손을 입에까지 가져갈 수도 없었고,
혼자서 이쪽 저쪽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반신불수였다.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그를 로마의 성 끌레멘스 성당 문앞에 갖다두고
애긍을 청하여 먹고살게 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성경을 한권 구입하였다.
읽을 줄 모르는 그는 주의깊게 성경을 응시함으로써 마음으로 이해하였다고 한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 그는 찬미가와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가를 노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자기에게 희사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찬미가나 시편을 노래로 들려준 것이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천국에서 들리는 이상한 음악"으로 들었다고 한다.
그후 그는 임종했는데, 그의 유해는 성 끌레멘스 성당에 안장되니,
연일 기적이 일어났던 것이다.
성 그레고리오(대)는 세르불로야말로 진정 하느님을 사랑한 사람이며,
불구의 몸으로 그토록 아름다운 찬미가를 노래한 하느님 애찬자로 높이 공경하였다.
♤아나톨리아 Anatolia 연대미상 축일: 12-23 동정 순교
성녀 아나톨리아는 동정을 지키기 위하여
아우렐리우스라는 청혼자의 끈질긴 청혼을 끝내 마다하자,
그녀의 언니인 빅토리아가 동생을 설득시키려고 애썼으나
오히려 자기 자신도 동생을 따라 자신의 약혼자인 에우제니오란 사람을 물리쳤다.
이에 앙심을 품은 두 사람이 이들 자매들을 크리스챤으로 고발하여
약혼자들을 칼로 죽였다고 한다.
이 두 성녀에 대한 공경은 이탈리아 전역에 두루 퍼져있지만,
그에 따른 역사적인 증거는 거의 알려진바 없다.
요한은 폴란드에 있는 크라코프의 큰 대학과 도시에서 훌륭한 일을 한 시골 소년이었다.
우수하게 학업을 마친 다음 그는 사제로 서품되어 신학 교수가 되었다.
성인들이 부딪혀야 하는 반대는 그에게도 있었다.
그는 경쟁자들에게 쫓겨난 다음에 올쿠시의 본당 신부가 되었다.
대단히 겸손한 사람이던 그는 최선을 다했지만
그의 선의는 본당 신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 외에도 그는 자신의 직책에 따른 책임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에 가서 신자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얼마 후에 그는 크라코프로 돌아가서 남은 일생 동안 성서를 가르치며 보냈다.
그는 신중하고 겸손한 사람이었으며 또한 친절하였으므로
크라코프의 모든 가난한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재산과 돈은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이 쓸 수 있었으며
가난한 사람들은 시시 때때로 그것을 이용했다.
그는 자신을 지탱하는 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돈과 옷가지만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잠을 적게 잤으며 그것도 마루에서 자고
음식은 검소하게 먹었으며 고기는 전혀 먹지 않았다.
그는 터키 인들에게 잡혀 순교하기를 바라면서 예루살렘을 순례했다.
의사로부터 건강을 돌보라는 경고를 받았을 때
그는 즉시 사막의 교부들은 그들의 극히 엄격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만큼 오래 살았다는 것을 지적했다.
설명 ;
요한 케티는 전형적인 성인이다.
그는 친절하고 겸손하고 너그러우며 적대자들에게 고통을 당하면서도
엄격한 참회 생활을 했다.
풍요로운 사회에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의 모든 요소를 잘 이해할 수 있지만
운동 선수들이나 무용가들은 마지막에 가서야
안일한 자기 수양 이상의 그 무엇을 준비해야 함을 알게 된다.
성탄절은 적어도 자기 방종을 제어하는 좋은 때이다.
이야기 ;
옛 성무일도에 있는 이 축일의 제2독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요한 케티는 언젠가 한번 강도를 만나서 그의 돈을 빼앗겼다.
강도들은 그에게 더 가진 것이 없느냐고 묻자 요한은 없다고 대답했다.
강도들이 가 버리고 난 뒤에 요한은 외투 속에 끼여 있는 몇 개의 동전을 발견하고는
강도들의 뒤를 쫓아가서 멈추라고 소리치고는 그들에게 동전을 주었다.
그들은 너무나 놀라서 그들이 빼앗았던 것을 그에게 되돌려 주었다.
♤토를락 토르할쏜 Thorlac Thorhallsson 1193년 축일: 12-23 주교 아이슬랜드
아이슬랜드 출신인 성 토를락은 15세 때에 부제, 그리고 18세 때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후 그는 해외 유학을 떠났는데, 런던을 거쳐 1161년에 아이슬랜드로 돌아왔다.
그는 티크비보에르에 수도원을 세우고 원장이 되었으며,
1178년에는 아일슬랜드의 두 교구 중의 하나인 스칼홀트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교구를 개혁하고, 성직자의 규율과 사제 독신제를 강화하는 한편,
성직매매를 추방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는 곧 주교직을 사임하고 그전의 수도원으로 돌아가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하지는 못하였다.
★하트만 Hartman 1164년 축일: 12-23 주교 브릭센
폴링 태생인 그는 파쏘에 있던 성 니콜라오의 아우구스띠노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고 사제가 되었다.
그의 재능과 덕행이 비범하여 살즈부르그의 대주교 콘라도가 교구 내 성직자들에게
공동생활과 규율 교육을 시킬 때 그를 초빙하였다.
1140년, 브릭센 주교좌가 공석이었을 때 주교로 임명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는 한편,
가난한 순례자들을 위한 성 십자가 구호소를 설립키도 하였다.
또한 그는 국왕 콘라드 3세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24년동안 주교직에 봉사하다가 운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