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시는 인간의 영원한 속성?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이 있다. 드러난 부분이 전체에 있어 아주 미약함을 말하는 비유적 표현이다. 꼴찌가 되어 바닥을 치는 경험을 했던 내가 매일매일 강도높은 수정, 교정훈련을 받아야했던 시절이 통역학부 시절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면? 생각만 해도 몸이 굳어지는 공포감마저 밀려오지만 나에게는 실제 상황이었다. 운동이라고는 학교와 지척에 있는 집을 오가는 것 외에 손가락운동이 전부여서 몸무게가 무려 8kg이나 늘어 버렸다. 스스로 ‘새끼 돼지’를 떠올릴 정도였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체력만큼은 자신하던 내가 대학원 교학과에 진급시험 신청을 하러 갔다가 갑자기 심한 통증을 느끼며 기절하고 말았다. 깨어보니 병원이었다. 그런데 간호사가 우리나라에서는 ‘희귀한’ 남자 간호사가 아닌가. 호기심이 발동했다. 남자 간호사를 따로 부르는 호칭이 있는지 물었다. 이어 병원을 드나들지 않고는 좀처럼 익히기가 어려웠던 의학관련 용어들을 줄줄이 물어보기 시작했다. 링거 주사를 불어로 무어라 하느냐, 혈압, 맥박, 심전도, 급성, 만성 등등은 뭐냐? 다시 영어로 어떻게 표현하는지 아느냐? 어디서 그런 악바리근성이 나오는지 끝없이 이어지는 나의 질문에 간호사는 토끼같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다행히 과로로 인한 일시적 스트레스에 불과하다는 진단이 나와 싱거운 느낌마저 받았지만 그 때 남자 간호사에게서 익힌 의학상식과 용어를 나는 가장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렇지만 파리 유학 시절이 고난의 행군으로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가능하면 모든 일을 즐겁게 받아들이는 나의 낙천적인 성격도 작용했지만 무엇보다 따뜻한 배려로 대해주던 32개 나라의 ‘다국적’ 친구들을 만나는 단비같은 기쁨을 맛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친구들은 달랐다. 프랑스 태생의 어머니, 영국 태생의 아버지 사이에 태어나 이태리에서 살고 있다는 친구 등 대부분이 어릴 때부터 다국적 문화의 혜택 속에서 자라 3, 4개 국어에 능통했다. 그런데 친구들은 외국 한번 나가본 적이 없었던 ‘촌티 나는’ 나를 더 많이 초대하고, 더 자주 그룹스터디를 제의하는 등 친숙함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아마 헛점많은 내 모습에 더 편안함을 느낀 것이 아닐까. 아무튼 세계 도처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이 친구들은 지금도 나에게 생기 나는 자극제가 되고 있다.
1981년 6월 드디어 통역학부 과정을 마치고 국제회의 통역사 시험에 도전하게 되었다. 3년여간의 피나는 노력이 시험대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편안했다. ‘진인사 대천명이라 했는데 최대한 노력을 기울였는데도 안되면 그건 능력 밖의 일이다, 만약 안되면 미련 없이 다른 길을 택하리라’라는 생각이 들면서 초연해지는 것이었다. 후회 없이 노력한 자만이 성취할 수 있는 경지, 초발심이라 했던가. 그 덕분인지 나는 국제회의 통역사 자격이라는 달디단 열매를 딸 수 있었다. 이어 1986년, 파리 제3대학에서 ‘교육학적 관점에서의 한․불 순차통역’ 연구로 아시아인으로서는 최초로 통역번역학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1982년부터 1987년 사이에는 대학원 교수에 임명되어 강단에 서는 소중한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파리에서의 10년 동안 나를 가장 속상하게 했던 기억은 대학원 강단에 서고, 박사학위를 받고, 굵직한 통역을 맡는 등 화려한 도약을 시도하는 과정에 불거져 나왔다. 나의 성공(?)을 질시하는 눈들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적의마저 드러내는 그들과의 신경전을 이겨낼 수 있을지 막막했다. 차라리 평범한 생활이 그리웠다.
포기와 정면돌파의 사이에서 방황하던 어느 날, 나는 존경하는 은사 셀레스코비치 교수를 찾았다. 조금이나마 기분이 나아질까 문을 두드린 나를 본 순간 셀레스코비치 교수는 입에 손가락을 갖다대며 ‘네가 옳다, 말하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다 알고 있다, 아무 얘기할 필요 없다’며 ‘세, 에테르넬 위멩(C'est eternel humain)', 질시와 모함은 인간의 영원한 속성이라는 말을 들려주었다. 자신도 여성이기에 그런 과정을 겪었다며, 질시의 대상이 됐다는 것은 이미 성공했다는 것이며, 그리고 분명히 얘기하지만 이제부터가 시작이고, 어떠한 역경에 처해도 꿋꿋이 헤쳐나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는 격려도 잊지 않았다. 그 덕분에 나는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속상함을 무한한 신뢰감과 자신감으로 바꾸어 문을 나설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에도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고 지금은 일흔여덟인 셀레스코비치 교수는 변함없이 나의 능력을 믿어주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중요한 진리를 깨달았다. ‘모든 사람을 잠시 속일 수는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항상 속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을 항상 속일 수는 없다’는 링컨의 말이다.
한불정상회담 단골 통역사 외교관이 될 뻔하다
국제회의 통역사 자격을 딴 후 내가 맡은 첫 통역은 1981년 당시 윤석헌 주불대사와 프랑스 미셸 조베르 대외통상부 장관과의 면담이었다. 얼마나 그리던 실전이었던가. 그만큼 멋지고 완벽한 데뷔전으로 기록해야 했다. 사전에 치밀하게 한․불 통상현안을 숙지했다. 통역은 양 당사자는 물론 스스로도 만족할 수준이었다. 그런데 며칠 후 다른 경로를 통해 통역실력을 인정받은 기분 좋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나의 통역실력을 본 윤 대사가 좀더 적극적으로 국가에 기여하는 길이라며 외교관이 되어 직접 국제무대에서 활동해 볼 의사가 없는지 타진해 온 것이다. 그러나 조금의 망설임이 있을 수 없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은 언어 능력뿐이니 통역으로 국가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지만 외교무대에서 일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정중했지만 확신에 찬 대답이 전부였다. 이후에도 통역사로서 이름이 높아지면서 종종 나의 신념을 시험하는 일이 생기곤 했다. 정치계에서의 손짓도 그 가운데 하나다. 물론 이때도 정치인을 만나는 것에 만족하지 스스로 정치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고 밝혔다. 청와대에서의 제의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유혹 앞에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마다 나는 셀레스코비치 교수의 말씀을 떠올린다. 무엇을 원하는지 잘 모를 경우에는 무엇을 원하지 않는지 먼저 생각해 보라는, 그렇게 원하지 않는 것을 하나하나 지워나가다 보면 최종적으로 남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곧 자신이 원하는 것, 혹은 최근사치라는 말씀이었다. 이를 적용했을 때 선택은 언제나 구속보다는 자유로움과 새로움을 추구할 수 있는 통역사로서의 길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데뷔전을 성공적으로 치른 나는 지금까지 국제회의에서는 빠지지 않는 단골이 되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일곱 차례 열린 한․불 정상회담을 모두 통역하는 기록을 세웠고, UPU(만국우편연합), IPU(세계의원연맹),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서울 총회, ASEM 런던 정상회의, APEC 마닐라 정상회의 등 대규모 국제회의를 통역했다. 또 전두환 전 대통령에서부터 김대중 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우리 나라 역대 4대 대통령과 미테랑,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 자크 들로르 전 EU(유럽연합) 집행위원장 등 정․재계, 문화계 인사들의 통역을 지난 20년 동안 1천회 이상 통역을 수행해 왔다. 말 그대로 국제회의 통역과 관련해서는 산증인인 셈이다.
이런 나에게 기억되는 가장 뜻깊은 날 가운데 하나는 지난 1986년 4월 14일, 한․불 수교 1 백 주년 만에 처음으로 양국 정상회담이 열린 날이다. 왜냐하면 그 날의 역사적 의미만으로도 잊을 수 없는 감동을 느끼기에 충분했지만 또 하나, 나만이 기억하는 ‘작지만 아찔했던’ 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테랑 대통령의 통역을 맡아(사실 나를 한불정상회담 통역사로 요청한 쪽은 대부분 프랑스 엘리제궁이었다. 이는 당시 프랑스에 연고를 두고 있었던 것도 이유가 됐지만 실력을 우선으로 하는 프랑스쪽의 결정이 더 크게 작용한 것이다.) 환영 인사들 사이에 자리하고 있던 내가 전두환 대통령 일행을 맞아 프랑스 대통령궁 의전장이 소개하는 내용을 통역해야 할 차례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입은 열심히 움직이는데 목소리가 안 나오는 것이었다. 불과 2-3초 사이에 벌어진 일이어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악몽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평소 얼마나 막중한 책임감과 긴장감을 안고 통역에 임하는지를 알 수 있는 사례이다.
통역사로 가는 첫걸음, 말하는 것을 즐겨라
올해로 마흔 세 살인 나의 하루는 어김없이 새벽 5시에 시작된다. 초등학생 때부터였으니 30년은 족히 이어온 셈이다. 유달리 새벽잠이 없었던 탓도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여명의 시간, 신새벽의 고요함이 좋아 ‘달콤한 새벽잠의 유혹’을 기꺼이 포기했다. 그런데 이 습관이 국제회의 통역사에게는 더없이 유익하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국제회의 통역사에게 요구되는 필수적인 능력 중 하나가 ‘때와 장소, 주제를 가리지 않는’ 순발력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세계사적 쟁점이 하루가 멀다하고 변하는 세태를 어찌 쫓아갈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겠지만 기실 이 순발력이라는 것도 평소 갈고 닦은 노력의 결과라는게 나의 지론이다. 말이란 것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것이기에 날마다 연습하지 않으면 감각이 따라가지 못한다. 그리고 세계의 흐름을 따라잡는 노력은 새벽 5시에 도착하는 4개 중앙일간지를 훑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이어 위성으로 들어오는 불란서 국영방송 뉴스, BBC, CNN, 국내 뉴스를 통해 전세계 사건․사고를 꿰뚫고 나면 대략 8시 30분. 또 정기적으로 프랑스 문화원에서 주요 인터뷰장면이 담긴 테이프를 빌려와 기량이 무디어지지 않도록 연마하는 한편 저녁에는 외국인모임에 자주 참석해 실전 감각을 유지하는 훈련도 잊지 않는다. 여기에다 통역에 임할 때면 필요한 분량의 서너배를 치밀하게 준비한다. 20년의 통역경력을 가진 교수가 되어서도 미루거나 게을리 한 적이 없는 나의 철칙이다.
이 같은 모습을 두고 어떤 사람은 ‘흡사 천하의 검객이 시퍼렇게 날 선 장검을 매일 숫돌에 가는 광경을 떠올리게 한다’고 표현했지만 돌아보면 단 한번의 실수도 기억나지 않는 것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치르는 전세계 뉴스와의 전투를 통해 길러진 내공과 순발력의 또다른 이름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하지만 지적 호기심이 없었다면 통역사는 단순히 생계유지를 위한 도구에 불과했을 것이다. 정치, 경제, 문화, 과학, 심지어 빵 제조과정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통역과 관련없는 분야 자체가 없는 현실에서 이 모두를 ‘정확하게’ 전달해야 할 때 그 분야에 대한 관심이 없으면 일 자체가 고역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면 새로운 것에 민감하고, 배움을 즐기는 이들에겐 통역사라는 직업이 세계와의 대화에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국제회의 자체가 언제나 앞선 정보와 지식의 집결장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분야에 걸쳐 세계 ‘정상’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생각과 경험을 직접적으로 배울 수 있고, 새로운 일과 만나는 기회가 끊임없이 주어지는 ‘매력적인’ 직업이 바로 국제회의 통역사다. 실제로 나는 국내에 컴퓨터가 대중화되기 이전에 이미 여러 회의를 통해 가장 빠르고, 가장 쉽게 컴퓨터 전문용어를 완벽하게 익히고 활용할 수 있었다.
결국 나의 ‘성공’은 중단없는 노력과 철저한 준비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다만 조금 특별하다면 그 과정을 즐겁게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어떤 특성을 가져야 이 같은 ‘고행’을 즐길 수 있을까? 우선 ‘말하는 것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실제로 통역사들이 만나면 언제 천장이 무너질 지 모른다는 우스개소리도 있을 정도다. 이야기하기를 좋아하고, 특히 대화 과정에서 상대를 자연스럽게 이해시키고 설득시키는데 남다른 재주를 가졌다면 일단은 통역사에 도전해 볼 만하다. 다음은 자신이 전공하고자 하는 언어에 대한 ‘본능적인 언어 감각’이다. 어휘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이를 적재적소에 활용할 줄 아는 능력이다. 이와 관련해 많은 이들이 혼동하고 있는 ‘잘못된 진리’가 하나 있다. 외국의 언어환경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모국어처럼 구사할 수 있는 언어 감각을 가질 수 없다는 편견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직접적인 경험이 더 유리하고, 좋은 조건이 될 수는 있지만 필요충분조건은 결코 아니다. 필요에 의해 공부를 했다 하더라도 학습 동기가 분명하고, 어느 정도의 언어감각을 갖춘 사람이라면, 여기에 최선의 노력을 다할 자세가 되어 있다면 통역사의 자질이 충분하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통역사의 세계에 회고록이란 없다
통역사로 길러지는 과정에서는 다기다양한 훈련을 거쳐야 한다. 우선 언제 터질지 모르는 돌발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해 나갈 수 있는 순발력과 기지는 생방송과 같은 통역의 세계에서 최강의 무기다. 지적 호기심과 분석력, 종합력 등도 매우 중요한 능력으로 꼽힌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한가지는 바로 체력이다.
이와 함께 통역사의 덕목과 관련한 질문을 대할 때 내가 빼놓지 않고 강조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원만한 성격’이다. 이유인즉슨 국제회의의 경우 예외없이 2인1조, 3인1조로 짜여진 팀별로 동시통역을 하는데, 이때 ‘껄끄러운’ 파트너로 인해 팀워크에 금이 간다면 그야말로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통역의 역할이 양 당사자의 의견을 원할하게 엮어주는 가교역할이라면 언제나 투철한 서비스 정신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직업이 그렇듯 통역사의 세계에도 직업윤리와 불문율이 있다. 오히려 각광을 받는만큼 더 엄격한 직업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듯 하다. 통역사 직업윤리 강령 1호는 ‘비밀누설은 절대 있을 수 없다’는 사실. 오죽했으면 통역사의 세계에는 ‘회고록’이라는 것이 없다고 할까. 국제회의에 참여하다보면 때로 아주 민감한 외교현안의 가운데 있을 수도 있고, 앞선 정보를 접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때 알게 된 사실을 외부에 흘린다면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비밀보장은 통역사의 생명과도 직결된다. 또 통역을 맡은 이상은 어떤 일이 있어도 완수해야 하는 책임감이 아주 강조되는 직종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중요한 불문율 가운데에는 ‘투명하게’ 처신해야 한다는 것도 있다. 실제로 통역사는 평범한 생활을 한다면 접할 수 없는 화려한 순간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다. 이 때 자칫 통역사 스스로 주인공인 듯 착각할 수 있는데 주인공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하는 것이 본연의 임무임을 망각하는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없는 듯 있는 투명인간을 요구하는 통역사의 길이란 이처럼 까다롭기만 하다.
이렇게 농축된 스트레스를 받으며 해야 할 것도 많고, 가릴 것도 많은 직업, 통역사. 그러나 매력 또한 이에 못지 않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우선 모든 것이 실력으로 판가름나는, 그리하여 성별이나 연령 등 좀처럼 뛰어넘기 어려운 사회적 편견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점은 모든 스트레스를 대신할만한 매력이다. 예를 들어 통역의 세계에서는 20년 경력의 나와 통역사 자격증을 갓 취득한 이가 같이 통역할 경우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 경제적 대가는 물론이고 기타 대우도 국제회의에 참여하면서-준비과정도 포함된다- 만나는 세계의 ‘정상’에 결코 뒤지지 않는 것이 국제회의 통역사의 세계이다.
세계화는 우리를 제대로 알리는 것
오늘의 우리 사회는 분명 세계화의 열풍에 휩싸여 있다. 국제회의 통역사라는 직종도 어찌 보면 세계화에 따른 특수를 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세계화와 관련해 걱정스러운 부분이 있다. 바로 ‘영어 중심의’ 혹은 ‘미국 중심의’ 세계화가 그것이다. 사실 이러한 우려는 몇 해 전부터 현실화되고 있다. 교육방송이 프로그램 개편을 단행하면서 주 2회 방영하던 불어회화 방송을 주 1회로 축소한 것이다. 방영시간 단축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독일어, 스페인어에도 적용되었다. 영어방송 시간을 연장하기 위한 조치였다. 어찌보면 미국의 영향력이 갈수록 확대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해할 수 있는 조치라고 할 수도 있다. 수능시험에서마저 제2외국어가 제외되었으니 관심 있는 이의 수도 상대적으로 적은 현실이기도 하다. 이런 사정을 알고 있기에 영어가 아닌 외국어를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특수 외국어가 반드시 필요하지만 수요가 일시적일 경우가 많기에 전공 외국어를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라도 영어를 잘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하지만 영어 중심의 세계화는 결국 영어권의 사고방식만을 소개하는 편협성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오랜 기간 폐쇄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던 한국사회가 이제 막 외부세계를 향해 문을 열려고 하는 이 때 기존의 기회마저 봉쇄한다면 진정한 세계화와 오히려 멀어지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진정한 세계화는 무엇일까. 나는 이를 상호작용과 순환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획일성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세계 각국과의 의사소통, 서로의 문화에 대해 알려고 하고 제대로 알리는 창조적인 행위 말이다. 이 때문에 통역에 있어서도 모국어를 제대로 구사하는 능력이 더 중요할 수밖에 없다.
언젠가 일본인을 상대로 한 국내 김치관광이 주목을 끌었던 적이 있었다. 이때 일각에서 외국인들의 기호에 맞게 김치를 덜 맵게 만들자는 제안이 나오는 것을 보고 무척 놀랐다. 이 상태로 가다가는 김치가 한국의 고유한 전통음식이 아니라 국적없는 떠돌이 야채 샐러드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던 것이다. 획일적인 사고로 세계화를 동질화라는 측면에서만 볼 경우 세계는 강대국의 놀이터가 되기 십상이다. 세계화는 영어가 우리를 지배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영어를 지배하는 것이고 아울러 영어 외 다양한 세계의 언어, 곧 문화에 대한 지식을 두루 축적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천국보다 밝은 통역사의 미래
외교력과 통역의 수준은 비례해 발전할 것이다. 세계화의 수준도 마찬가지다. 그런 면에서 국제회의 통역사를 대동하는 분위기가 사회적으로 정착되고 있는 것은 분명 바람직한 현상이다. 이와 함께 제도적으로 국제회의 통역사를 양성하는 일도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일 가운데 하나다. 현재 국내에서 국제회의 전문 통역사를 양성하는 공식 기관으로 인정된 곳은 한국외국어대 단 한 곳. 역할의 중요성에 비해 양성기관이 턱없이 부족한 현실이다. 여기에는 하드웨어 중심, 즉 국제회의를 내용적으로 풍부히 하는 소프트웨어 보다는 회의장이나 호텔 신축에 비중을 두는 잘못된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이런 인식을 바꾸고, 교육하는 일이라면 언제든 참여할 계획이다.
오늘도 나는 자문한다. 통역사의 미래는 여전히 밝은가? 일 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렇다’는 대답이 나온다. 가장 오래 된 직종 가운데 하나지만 전문화된 위상에 맞게 체계가 잡히고 발전을 하기 시작한 지는 극히 최근의 일이기 때문에 개발해야 할 부분이 그만큼 많은 것이다. 더욱 복잡 미묘해지는 국제적 현안이 증가하는 현실도 국제회의 통역사의 필요성을 더욱 높이는 요인이다. 왜냐하면 외교적 사안이 단순히 언어적 지식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미묘한 언어를 정확하게 이해해 전달하는 고도의 전문성을 갖추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여러 방식의 통역을 동시에 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 투철한 윤리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점도 전문 회의통역사의 수요가 높아지리라는 예상을 뒷받침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런 통역사에게 주어지는 미래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것 보다 자신감과 자부심, 그리고 고유한 사회적 위치를 갖는, 결코 계산할 수 없는 ‘행복’이 담긴 미래라고 나는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숨가쁘게 달려왔던 통역생활 20년. 앞으로 국제회의 통역을 진행할 통역팀을 조직하는 일에 좀더 비중을 둘 계획이지만 통역 또한 멈추지 않을 것이다. 강단에 서는 역할만 하라는 이도 있지만 통역교육이란 ‘know'가 아닌 ‘know-how'를 전수하는 실용학문인 만큼 현장과의 교감 없이 국제회의 통역 교육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순이 넘어서까지 현장을 떠나지 않는 것이 당연한 분위기가 될 때 국제회의 통역사라는 직종이 당당히 전문직으로 인정받는 때라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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