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양,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려오는 곳.
여행작가 김강수
언양,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려오는 곳
언양은 오래 전의 기억부터 다가오는 곳이다. 검정고무신의 추억은 누구에게나 있지 않다. 코흘리개 시절, 장날에 어머니를 따라서 장 구경을 하는 게 시골에서는 큰 즐거움이다. 이 동네 저 동네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고 필요한 물건을 사고 파는게 장날의 표정이다. 그 장날의 한 귀퉁이에 고무신을 수리하는 아저씨가 있었다. 찢어진 검정고무신 한 켤레. 접착제를 묻힌 고무를 붙여서 열로 압착을 하는 일이었다. 고무신은 늘상 엄지발가락 옆이 세로로 갈라지는 일이 많았다. 그렇게 수리 된 검정고무신이 싫어서 언제나 하얀고무신을 사 주기를 바랬던 아련함이 있다.
언양장은 지금 이름이 바뀌었다. 참 이상한 이름이다. 언양알프스시장. 그래도 예전의 정서는 남아 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2일과 7일 날에 장이 선다.
가지산에서 흘러 내려온 남천 옆으로 도로가 있고 장 안으로 들어가는 길가에 신발가게가 있다. 여느 장에서 볼 수 있는 검정고무신, 하얀고무신이며 장화 등 많은 신발들이 손님들을 기다린다. 시골 할머니들이 많이 애용을 하기 때문에 색상도 다양한 신발들이 있다. 이곳 언양장에서 신발을 40년 동안 팔아 오셨다는 분이 계신다.
최경호 할아버지. "청색고무신이 제일 먼저 나왔고, 그 다음이 검정색 고무신, 흰고무신이 연이어서 나왔지요."라고 말씀하시는데 신발의 역사를 이토록 잘 알고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라는 생각이 든다. 귀여운 아이들의 앙증맞은 고무신도 있다. 말씀을 듣고나니 다시 한 번 고무신에게로 눈길이 간다. 그리고 느껴지는 마음속의 한마디는 <시간이 많이 흘렀구나>.
"시골에는 꼭 고무신이 있어야 됩니다. 밭에서 일하다가 그냥 흙은 털어버리면 되니까요. 건강에도 좋습니다. 꼭 지압을 하지 않아도 신발을 신고 걸으면 되니까요." 정겨움이 묻어나는 얘기다.
이곳에는 실탄을 보관하는 통이있다. 한국전쟁 때의 유물이다. 직사각형의 긴 통은 안쪽에서의 깊이가 느껴진다. 비바람에 지폐가 날아가는 것을 막아주는데는 이게 최상이라고 말씀하신다. 장터는 자연을 그대로 품고 산다. 비가 오면 비오는 대로, 바람 불면 바람부는 대로 세월이 흐르는 법이다.
이곳 신발가게 주변의 가게들은 오래 전 우리네 장터를 닮아 있다. 5일마다 문을 여는 그대로의 흔적이 남아 있다. 가게가 연이어 있는 사이로 걸어가보면 그 정의 깊이를 알 수 있다. 옆 가게 아주머니의 일상들을 그 앞 가게 아주머니와의 대화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곳이다. 막혀 있지 않은 공간의 힘이 느껴진다. 그래서 이곳은 꼭 가보아야만이 어떤 구조를 가졌는지 알 수 있는 곳이다.
이 거리감이야말로 우리네 정이라는 흐름의 원천이다.
시장 안으로 들어가는 길 중간을 차지한 사람들은 늘상 5일장을 찾아서 떠다닌다. 이곳 언양장은 풍성한 곳이다. 사람으로 물건으로... ... 고소한 참기름 집을 지나면 대장간이 있다. 언양장에서는 이른 아침이면 어김없이 들리던 소리가 있었다.
팅, 탁, 턱...치~~~이...
불에 달구어진 쇠를 모루(쇠를 올려놓고 두드릴 때 받침대 역할을 하는 쇳덩이)에 놓고 망치로 두들기는 소리가 들린다. 불을 지펴 쇠를 달구고 망치로 두드려서 온갖 모양을 만들어 내는 대장간은 서민들의 가슴 속 깊은 향수 샘을 자극 시킨다.
5일장이 서는 것과 상관없이 매일같이 문을 연다는 대장간은 언양장에서는 아직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지금은 5일장에도 대장간이 사라진 곳이 많다. 고령장, 의성장 등은 아직 대장간이 남아있다. 예전에 이 대장간은 장날이면 꼭 들러야하는 곳이었다. 낫이며, 호미 등 여러 농기구들이 이곳을 거쳐야만 온전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지금은 기계화되어서 경운기, 이양기 등은 농기구 수리센타를 찾아간다. 그래도 대장간의 역할은 남아있다. 대장간은 풀무질이다. 풀무로 바람을 불어 넣어야 대장간이 살아 움직인다. 풀무질도 기계의 힘을 빌리고 두드리는 일도 거대한 기계의 힘을 사용할지라도 모양을 만들어 가는 것은 오롯이 사람의 몫이다.
이곳 언양장에서만 30년을 일하고 50년 동안 대장장이 생활을 해온 박병오 할아버지가 계신다.
쇠를 달구고 두드리면서 형태를 만드는 작업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듯이 할아버지의 열손가락은 모두 지문이 닳아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처음 이곳에 가게를 열었을 때만 해도 사람이 많았서 밀려다닐 정도라 엄청난 부자가 되겠다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50여 년 전 처음 일을 배울 때만 해도 사는 게 힘들어서 한 가지 기술을 익히려는 마음에 이 길을 택했다. 17살 되던 해에 일이 너무 힘들어서 그만 두려고 대장간 밖에 나와 앉아 있는데 그의 눈에 보인 건 풀 한포기. 저 풀도 살아가고 있는데 내가 못할 게 없지라고 생각한 이후에 계속해서 이 일을 업으로 살아왔다. 눈대중 하나로 쇠를 달구고 또한 뒤집고 깎아내고 망치질과 담금질을 한다.
낫을 보면 손잡이에 한글로 <오>라는 글자가 적혀 있는데 할아버지 이름의 끝 글자이다. 자신이 손수 만드신 것에는 이렇게 한글 <오>라는 글자가 새겨진다.
장날의 표정 읽기는 하얀 김이 솟아 오르는 가마솥이다. 장터국밥 한 그릇에 시장기를 때우고 막걸리 한 사발에 얘깃 거리가 오간다. 언양장에는 곰탕집이 있다. 50년의 전통을 이어온 곳이다. 30년은 시어머니가 20년은 며느리가 그 맛을 이어 왔다. 지금 주인 김귀자씨는 1992년부터 시어머니에게 일을 배우면서 곰탕을 끓여냈다고 한다. 이 집의 곰탕은 뼈를 7시간 이상 고아서 곰탕을 말아낸다. 주방 안으로 들어가면 가마솥 두 개가 걸려 있다. 펄펄 끓어 오르는 국물의 구수한 향을 느낄 수 있다. 살코기를 뚝배기에 담고, 그 다음으로 뾰얀 국물을 담아 낸다.
이 곰탕 한 그릇에 김치와 깍두기 그리고 국수면을 준다. 먼저 국물을 한 모금 입으로 가져가 본다, 뜨겁다. 뜨거우면서 시원하다. 장날의 표정이 하나의 그림으로 그려진다. 뜨거움이 있어도 입 안에서 후루룩하고 넘어간다. 가볍게 한 잔의 소주가 마음도 달래 준다. 이게 우리의 장날이다.
언양장 뒷길을 따라가면 <언양읍성마을 골목길 갤러리>가 있다. 골목길이다. 좁다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순이와 영이가 고무줄놀이 하던 그 골목이다. 사람이 지나가면 잠시 뛰던 고무줄놀이가 멈춰지는 그 골목. 그곳에 아이들이 그린 그림들이 있고, 걸어서 가는 방향을 노란 발자국으로 표현해두고 있다.
이곳은 그냥 골목이 아니다. 갯마을로 유명한 오영수 작가의 문학세계, 읍성마을의 주민의 역사, 읍성갤러리 등 읍성의 역사를 알 수 있는 벽화골목이다.
고향의 서정을 읊은 한국단편문학의 대표 주자 난계 오영수(1909-1979)선생은 한국적 정서와 심상을 단편소설의 미학에 충실하게 담아낸 서정적 작가이다. 대표작 화산댁이(1952), 갯마을(1953) 이라는 글자들이 적혀있다. 그리고 오영수 작가의 얼굴이 크게 그려져 있다.
난계 오영수의 문학 세계를 그림으로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대문과 대문 사이에 <요람기>라는 글의 일부가 적혀 있다.
"기차도 전기도 없었다. 라디오도 영화도 몰랐다. 그래도 소년은 마을 아이들과 함께 마냥 즐겁기만 했다. 성터 돌무더기 밑에 너구리굴이 있었다."
언양읍성 주민들의 사진들도 벽에 있고, 강아지 한마리와 집, 초등학교 앞에서 찍은 것도 있다.
언양읍성 마을의 옛지도도 그려져 있다. 건물의 벽, 환풍기가 있는 곳에 읍성의 북문 쪽이 뚫려있다.
그림도 전체적인 벽의 모양을 생각해서 지도를 그린 것이다.
시간이 흐림을 느낀다. 몇해전에 그려져 있던 것은 지우개로 지우듯 지워져버렸다. 그 것들을 기억하는 것은 사진이나 그것을 본 사람이다. 그래도 남아 있는 것은 언양초등학교 아이들의 그림이다. 동심으로 그려진 그림은 타일에 그려져서 붙어 있다. 화사하다. 남문인 영화루를 그렸다. 누각의 지붕으로 새들이 날아가고 아이들이 누마루에서 두 팔을 벌리고 활짝 웃고 있다. 그림을 그린 아이의 표정과 닮아 있는 듯 하다. 그 그림 하나로 여행의 즐거움은 매력으로 다가온다. 읍성 골목길을 환한 웃음으로 걸어간다.
골목길을 나오는가 싶으면 그 옆으로 언양읍성(사적 제153호)이 자리하고 있다. 울주군 언양읍 동부리 및 서부리 일원에 자리하고 있고, 평지에 정사각형으로 쌓은 읍성이다. 15세기말 조선시대 평지 읍성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읍성은 군사적인 기능과 행정적인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성을 말한다.
전쟁이 일어나면 성밖에 있던 주민들이 성안으로 들어와서 적과 싸우게 된다. 언양읍성은 둘레 1,559.7m로 성벽의 현재 남아 있는 최고 높이는 4.85m이다.
삼국시대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고, 고려 공양왕 2년(1390년)에 성벽 둘레 1,427척, 높이 8척 규모의 토성으로 축조하였다. 군창이 있고 웅덩이 4곳과 우물이 2곳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석축성은 연산군 6년(1500년) 당시 현감이었던 이담룡이 석성으로 고쳐 쌓았고 그
과정에서 기존보다 더 넓게 쌓은 것이다. 임진왜란 때 무너진 것을 1612년(광해군 4년)에 새로 쌓았다. 1919년 편찬된 <언양읍지>에 동문은 망월루, 서문은 애일루, 남문은 영화루, 북문은 계건문이 있다는 기록도 보인다.
남문 안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남문 옆으로 길게 뻗은 성벽 아랫 부분은 세로로 쎃은 버팀돌들을 볼 수 있다. 언양읍성을 더욱 튼튼하게 쌓기 위한 방식으로 이곳에서 볼 수있는 특별함이다.
남문인 영화루는 성문을 둥글게 감싸 안은 반원형의 옹성을 두었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큰 성문 밖에 쌓은 작은 성이다. 적이 성문을 부수고 들어가기에 힘든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옹성의 안쪽 너비는 약15m이고, 동쪽으로 난 옹성 개구부의 폭은 8.3m이다.
옹성의 안쪽으로 영화루가 있다. 1800년대초 진남루에서 영화루로 이름이 바뀌었고, 1900년 전후에 소실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금은 복원된 모습을 볼 수 있다.
해자가 설치 되었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해자는 성 바깥쪽으로 성벽과 나란히 만든 도랑의 일종으로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시설이다. 폭이 3.5~5m, 깊이90cm 정도였다. 북쪽 성벽의 경우 생토층에서 나무 말목이 촘촘히 박혀 있는 것이 확인되어 성벽의 기초공사를 튼튼히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곽의 전체 구조를 하나 둘 알아가는 즐거움이 있다. 우리의 문화유산을 이해하는 작은 앎이 필요하다. 영화룰 옆에 있는 돌계단을 따라 오르면 영화루로 오를 수 있다. 옹성에 있는 근총안을 통해서 바라보는 영화루의 모습이 마치 한 마리의 학같이 우아하다.
성안에는 관아가 있었다. 동쪽에 동헌이, 서쪽에 객사(옛 언양초등학교 자리)가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11년(1411년)의 기록에 의하면 언양 객사가 불에 타 수리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옛 언양초등학교도 그 흔적을 아직은 남겨두고 있다. 108년의 역사를 가진 학교는 2015년 동부리로 이전했다. 운동장을 바라보자 달리기하던 시절로 되돌아간다. 청군, 백군... ...
성벽을 지나 좁은 마을 길의 끝자락에 옥샘이 있다. 지금은 농업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되돌아 나와서 성안으로 들어간다. 갑자기 시야가 트인다. 시멘트길은 성안의 모든 문으로 갈 수 있는 중심이 나온다. 서문으로 발길을 돌린다, 길옆으로 물길이 있고 밁고 세찬 물줄기가 있다. 미나리의 신선함이 보인다. 성안을 가로지르는 이 물은 미나리가 잘 자라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서문의 흔적은 사람들이 살아 가는 집들과 맞닿아 있다. 어느 집의 담으로도 사용이 되고 있어서 그것 만으로도 과거를 떠올릴 수 있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성벽만 있다면 너무 안타까운 일이 될 것 같다,
이곳을 지나서 북문으로 갈 수가 있다. 너른 읍성 안의 모습을 걸으면서 볼 수 있다. 길을 걸으며 잠시 과거 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볼 수 있다. 언제 가더라도 이 읍성 안을 걸어가는 풍경은 멈춤이다. 사람을 머물게하는 길. 북문은 복원이되지 않고 그 입구만 있다. 이곳에서 긴 성벽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성벽을 따라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큰돌을 지면에 두고 위로 갈수록 잔돌로 마무리되는 성벽을 볼 수 있다. 오랜 시간의 흐름을 눈으로 확인해 보게 된다. 아득한 과거로 돌아가는 문은 서있는 그 자리이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과거로의 길을 찾아서 떠나게 되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치라는 시설을 볼 수 있다. 성벽이 길게 만들어지다가 중간쯤에 돌출된 부분이 있는데 이곳을 치라고 한다. 성벽을 타고 오르는 적을 이곳에서 볼 수 있어서 적이 성벽을 공격하는 모습을 보고 대처할 수 있는 시설이다. 언양읍성은 성벽을 따라서 걸을 수 있어서 좋다. 크기도 각기 다른 성벽의 수많은 돌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이야기를 들려 주는 듯하다. 긴 시간 그 자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고 싶은 것들이 많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니 잠시 발걸음이 멈추게 된다. 언양읍성의 너른 사각형 성곽의 모습 주변으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여행은 기억을 하는 일이다. 그 기억은 추억의 사진을 한 장 남기게 된다. 사진들이 모여서 한권의 사진첩이 내 가슴으로 들어오고 있다. 이제 사진첩을 덮을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