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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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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절 차(茶)란 무엇인가? 우리네 옛 어른들은 본래 천성이 조용하고 질박한 인간성을 가졌으며 소박한 예의는 자연스러웠다.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어버이를 성실히 모시고 형제를 사랑하며 이웃과도 가슴에서 가슴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아기자기하게 나누며 살아왔다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특수한 인간관계를 형성하여 이웃에 좋은 일이 생기면 마치 스스로의 일처럼 즐거워했고 불행한 일을 당하면 슬픔을 나누기도 하였다. 집과 집 사이에 울타리가 있기는 했지만,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을 그런 울타리, 그 사이로 식은 밥 한덩이며 별난 맛나는 음식 그릇이 스스럼없이 오고가는 그런 목가적 서정을 온몸으로 행하며 훈훈하고 밝은 마음에서 스스로와 이웃을 가꾸었으니 그야말로 인간으로서는 그보다 더 아름다운 사회를 이루기는 힘들 정도로 안락한 전통사회를 이루었었다 이런 마음씨 착하고 인정미 넘치는 선조들이 남다른 문화를 아람차게 누리며 살아왔음은 당연지사가 아니겠는가? 그것은 우리나라의 사시사철 기후가 순조로와 봄날에 두텁게 내리쬐는 햇볕에 서 보면 스스로 느끼어지는 온화함에 젖어들고 조금 무덥다 싶으면 또 서늘한 가을 기운이 한없이 우리네 마음 자리를 영글케 했다. 그런가 하면 고추같이 매운 바람이 불기도 하고, …… 하여 사시사철의 날씨 조화가 무릇 평탄한 것에 큰 영향이 있었으리라. 그리고 또 이 나라의 산이며 강이 문자 그대로 수려하여 마치 동양화의 풍경같아 우리네 정신문화 및 우리의 정서생활에 자연 많은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즉 자연발생적으로 우리네 고유 문화는 깨끗하고 개성미 넘치는 일품이 정립된 것이다. 그 가운데 약 이천여년이나 고고히 자리하여온 차문화(茶文化)는 이 땅의 어떤 형태의 문화보다도 우리네 생활에 밀접하였다. 물론 차문화 역시 인도와 중국에서 유입되긴 하였지만 다른 문화나 예술처럼 이 땅에 들어온 뒤 우리네 체질에 맞는 독특한 형태를 이룩하였다. 불교(佛敎)가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왔지만, 불상(佛像)의 모습을 보면 인도 불상과 중국 불상과 한국 불상의 모습이 다 다르듯이. 한잔의 차는 마음의 안정, 정신의 여유를 가지기 위하여 필요한 기호 음식이다. 그리고 약리적(藥理的) 효능 또한 좋은 것이다. 있어도 좋고 없어도 상관없지만 그러나 있어야 할 자리에 으레 있음으로써 그 용처를 다하는 기호 음식. 일찍이 공자(孔子)께서도 차를 『그릇이 아니다(不器)』라고 표현한 바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원효(元曉)스님께서도 평소 별로 크게 쓰임새는 없으나 때에 따라서는 하늘을 두드리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차를 평하였다. 한잔의 차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고 정신의 여유를 얻는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 아닌가? 한잔의 차는 한조각 마음에서 나오며
한조각 마음에 한잔 차가 있나니 마땅히 한잔 차 맛 보면
한 맛에 한량없는 즐거움 나나니
椀椀出一片心
一片心在一椀茶
當用一椀茶一嘗
一嘗應生無量樂
이렇게 차를 칭송한 이조의 선승(禪僧) 함허(涵虛)스님도 계셨다.
초의(草衣)스님은 동다송(東茶頌)에서 또 이렇게 읊었다. 옥화차 한잔 기울여 마시니
겨드랑이에서 바람이 나고
몸은 가벼워
선경(仙境)에 오른 듯하나니.
一頃玉花風生腋
身輕己涉上淸境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에 보면 『차는 남쪽 지방의 상서로운 나무이다』라고 되어 있다.
우리나라 역시 차나무는 지리산(智異山)을 중심으로 따뜻한 남쪽 지방에서 자라고 있다. 어떻든 차의 주산지(主産地)는 아시아이며 식물학적으로 몇가지로 분류되고 있으나 재배상 중국종(中國種), 인도종(印度種), 인도잡종(印度雜種)으로 나눈다. 화란의 「스튜어트(Stuart)」의 형태상 분류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중국소엽종(小葉種)·(Var bohea) …… 잎의 길이는 4∼5㎝에 엽신(葉身)은 굵은 혁질(革質)이며 빛깔은 짙푸르고 6∼8대(對)의 측맥(側脈)이 있다. 중국대엽종(大葉種)·(Var macrophylla) …… 잎의 길이는 12∼14㎝, 너비 5∼6.5㎝, 나무높이는 5m로서 측맥(側脈)은 8∼9대(對)이다. 아샘종·(Var assamica) …… 잎의 길이가 20∼30㎝인 큰 나무이다. 잎의 두께는 얇고 부드러우며 짙푸른 색이다. 우리나라와 일본에 있는 대부분의 차나무는 중국종에 속한다.
차나무는 사시사철 푸른 잎을 한 관목(灌木)으로 자연생장(自然生長)하여도 3∼4m를 넘지 않는다. 기후와 지질(地質)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잎의 끝이 뾰족한 장타원형(長 圓形)으로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고 짙은 녹색이다. 잎사귀는 윤기가 있고, 9∼10월 사이에 흰 꽃이 핀다. 꽃잎은 다섯 잎이다. 꽃받침도 다섯 장이며 녹색이다. 암꽃술 하나에 수꽃술은 여러 개인데 씨방(子房)은 2∼3실(室)이다. 열매는 겨울을 지나 다음해 10월쯤하여 3∼4개 정도 결실한다. 제 2 절 차나무의 전래
삼국유사에 보면 가락국(駕洛國) 거등왕(巨登王)이 선왕(先王)의 어명(御名)에 따라 해마다 정월 3일과 7일, 5월 5일, 8월 5일과 15일, 거등왕이 정한 제일(祭日)인 연중 5일, 정월 3일과 7일, 5월 5일, 8월 5일, 15일에 술, 단술(감주), 떡, 밥, 차, 광일 등의 제물을 차려 삼헌(三獻) 헌작(獻酌)의 예법으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아마 가락국의 김수로왕(金首露王)의 부인이 인도 갠지스강 상류에서 기원전 5세기경부터 있었던 태양왕조인 아유타국(阿踰陀國·Ayodhya)의 공주로 가락국으로 오면서 (서기 48년 7월 27일·음) 비단, 의상, 금, 은, 주옥, 패물, 노리개 등등 많은 물품을 가져올 때 차씨도 함께 가져온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았다. 이능화(李能和)가 엮은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김해의 백월산(白月山)에는 죽로차(竹露茶)가 있다. 세상에서는 수로왕비(首露王妃)인 허씨(許氏)가 인도에서 가져온 차씨라고 전한다.』 이 기록을 그대로 믿어야 좋을지 모르지만 만약 이 기록을 믿는다면 그때부터 차가 있었다는 반증이 나온다. 그러면 인도의 아샘종인 차나무일 게다. 하지만 지금은 흔적이 없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흥덕왕(興德王) 3년(828년) 겨울 12월에 사신(史臣)이 언덕전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사신 김대겸이 차씨를 가지고 왔다기에 임금은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왕(善德王 )때부터 있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성행되었다.
그런데 이때 지리산 어느 곳에 심었는지 확실한 곳은 드러나지 않았다. 화엄사에도 칠불암에도 쌍계사에도 차나무가 있기는 하지만. 김수로왕의 일곱 아들(七王子)이 그의 외삼촌 되는 장유화상(長遊和尙)과 함께 지리산 칠불암(七佛庵)에서 수행하였다. 처음엔 가야산에서, 그 다음엔 의령 수도산에서, 그 다음에 사천 와룡산과 구등산에서 그리고 지리산 운상원(雲上院)에서 지낸 때가 서기 105년 8월 15일 이라고 적혀있다. 칠불암은 차 산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장유화상이 차가 필요해서 그곳에 차씨를 심은게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또 인도 스님으로 화엄사(華嚴寺)를 창건한 연기스님을 생각할 수 있다. 화엄사는 서기 544년에 창건된 절이다. 통도사(通度寺)는 자장(慈藏)스님이 창건했는데, 선덕왕 5년(635년)에 그가 제자 십명을 데리고 중국에 갔다 8년동안 수행하고 돌아왔다 한다. 돌아오는 길에 해남 대흥사(大興寺)에 들른 일이 있다. 그곳의 차나무를 자장스님과 연관지어 보는 게 어떨까. 쌍계사(雙溪寺)쪽에는 최치원(崔致遠·856∼?)이 차나무를 심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진감국사(眞鑒國篩·773∼850)가 중국에서 돌아와서 주석하였던 곳이니 그렇게 상상해 보는게 어떨까. 진감국사 비명에 차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제 3 절 차의 효능
차의 효능에는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에도 밝혔듯이 덕(德)이 있는 사람이 마시는데 가장 적당한 음료수라고 했다. 즉 차는 먹으면 먹을수록 머리를 맑게 하고 차분한 이성(理性)을 회복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초의(草衣)스님의 다신전(茶神傳)에도 차의 아홉가지 이로움을(九德)밝혔는데 첫째 머리에 이롭다고 했다. 한잔의 차를 마시기 위하여 처음 물을 끓이고 차를 넣어 다려 내는데가지 지극한 정성이 깃들기 마련이다. 그러는 도중에 스스로의 마음가짐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그리하여 얻어지는 정신적 안정은 우리네 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이능화씨는 『차는 풀의 성현(聖賢)이다. 곧 선(禪)이다. 현미(玄微)의 도(道), 청화(淸和)의 덕(德)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한잔의 차 그것은 바로 인생(人生)이다. 차 한잔에 쓰고, 떫고, 시고, 짜고 단맛이 있다. 그것은 삶 자체를 웅변하는 게 아닐까? 살다 보면 괴로운 일(쓴맛)도 있고 즐거운 때도 있다. 그리고 언짢을 때도 있고, 시큰둥할 때도 있다. 차는 그 자체가 영묘한 음식물이라 깨끗하여야 하므로 위생학을 알게 하고, 복잡스럽고 사치스러운 것보다는 간소한 것 가운데 질박한 의미가 있어 경제학을 알게하고, 우주 공간에 대한 비례감(比例感)을 정의하는 까닭에 정신기하학이기도 하며 마음의 여유에서 오는 심미(審美)를 깊이 체감함으로 하여 아름다운 삶을 가꾸는 근본을 일러 주기도 한다. 차가 우리의 육체에게 주는 영향에 대하여 살펴보자.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에 『차의 용도는 맛이 매우 차서 행실이 바르고 덕이 있는 사람이 마시는데 가장 적당하고, 머리가 아프고, 눈이 찝질하고, 팔다리가 번거롭고, 뼈마디가 펴지지 않는 데 네댓번만 마셔도 제호(醍 ), 감로(甘露)와 세력을 다툰다』고 하였다. 허준(許浚)의 동의보감(東醫寶鑑)에는 『기(氣)를 내리고 숙식(宿食)을 소화하며, 머리를 밝게 하고, 소변(小便)을 리(利)하고, 소갈(消渴)을 그치고, 잠을 적게 하고, 독(毒)을 푼다』고 기록되어 있다. 도륭(屠隆)은 다전(茶箋)에서 『담을 적게 하고, 걱정을 씻어 주며, 실찌는 것을 막게 한다. 식사가 끝난 뒤 짙은 차로 입안을 가시면 기름기가 말끔히 제거되며 뱃속이 저절로 개운해진다. 이사이에 낀 것도 차로 씻어내면 다 소축(消縮)되어 모르는 동안에 없어지기 때문에 번거롭게 이를 쑤실 필요가 없어지고, 이가 튼튼해져 충( )과 독이 절로 없어진다』고 하였다. 초의(草衣)스님은 동다송(東茶頌)에서 『귀가 밝아지고, 눈이 밝아지고, 입맛이 돋아나며, 술을 깨게 하고, 피로를 풀며 갈증을 멈추며, 추위를 막고, 더위를 물리친다』고 하였다. 또 한의사(漢醫師) 한성호(韓成昊)씨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차는 해독(解毒)이 된다. 차에는 탄린산(Theanine)이 함유되어 있어서 모든 세균의 활동을 제지할 수 있다. 독소 작용을 소멸시키기 때문에 쓴 맛이 있고 해열작용을 하며 피를 맑게 한다. 피를 맑게 함은 균과 독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독(消毒), 살균(殺菌), 해열(解熱)의 효능이 있다. 차(茶)의 살균력은 일본 오오사까 시립 위생소 야마구찌박사의 보고에 따르면 『차에는 위대한 살균력이 함유되어 있다』고 하면서 이질(痢疾)균을 진하고 찬 다즙(茶汁)에 넣으면 홍차에서는 이 균이 20분, 녹차에서는 30분이면 완전히 죽는다고 한다. 그러나 커피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고 한다. 차는 괴혈병(壞血病)을 예방한다. 차는 풍부한 엽록소(葉綠素)와 비타민C의 중요한 영양성분을 함유하고 있다. 엽록소와 비타민C는 괴혈병에 저항하는 작용이 있다. 차는 술을 깨게 한다. 차소(茶素) 가운데 알콜중독에 대해 저항하는 작용이 있다. 초의(草衣)스님이 차의 아홉가지 이로움을 밝혔을 때도 차는 술을 깨게 한다고 하였다. 차는 정신을 들게 한다. 본초비요(本草備要)에는 차는 청신(淸神)이 된다고 하였는데 청신이란 권태나 활동력 감퇴를 다스리고 피로를 몰아낸다는 뜻이다. 탕액본초(湯液本草)에는 『차는 머리와 눈을 맑게 하고 어지러움과 잠이 많고 잘 깨어나지 못하는 것을 치료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차에 카페인(Caffeine)이 있으므로 뇌 신경의 흥분제로 효능이 크다는 말이 된다. 차는 피로를 풀어준다. 차는 적은 양의 흥분제를 함유하므로 대뇌피질(大腦被質), 중추(中樞)의 활동을 강화한다. 본초음식보(本草飮食譜)에서 차는 약간 쓰고, 달며, 심신을 청신하게 하고 졸음을 깨게 하며 번잡함을 제거하고 간(肝)과 담을 시원하게 하며 열을 없애고 담을 제거하며 폐를 맑게 해주고 위열(胃熱)을 풀어주며 눈을 맑게 하고 갈증을 푼다고 했다. 차는 위(胃)를 따뜻하게 한다. 차소(茶素)는 기름기가 식체(食滯)를 제거하고 소화를 돕는다. 위산이 너무 많은 데 대해서도 그 분비를 억제해 준다. 차게 해서 먹는 차는 좋지 않다. 차는 기름기를 풀어준다. 본처서(本草書)에 차는 기름기를 풀어주고 육식(肉食)한 것을 소화시킨다고 했으며, 소영본초(蘇影本草)에는 차는 기혈을 순하게 하고 먹은 것을 소화시킨다고 기록되어 있다. 차에 수렴성(收斂性)이 있어서 지방(脂肪)을 요해할 수 있다 하여 비만중인 사람에게 더욱 이롭다고 했다.
차는 갈증을 풀어준다. 차는 설사를 멎게 한다. 본초(本草)에서 차는 설사를 다스린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차에는 탄닌산과 수렴성이 있기 때문이다. 차는 감기를 고칠 수 있다. 지금도 경남 하동 쌍계사 주이 마을 사람들은 감기가 들면 작설차를 달여 먹는 풍습이 있다. 차는 뱃속의 가스를 제거한다. 차는 두통을 치료한다. 차는 풍치, 충치를 예방한다. 차는 위복(胃腹), 냉통을 치료한다. 차는 기침을 가라 앉히고 가래를 없애 준다. 차는 간열을 제거하며 눈이 빨갛게 부은 것을 치료한다. 차는 가슴이 답답한 것을 풀어주고 간의 활동을 소통시키고 기분을 순조롭게 한다. 차는 인후통, 인후 카다르, 목구멍이 마르는 것, 또는 목이 쉬는 것을 치료한다. 차는 적백이질(赤白痢疾) 또는 설사를 치료한다. 차는 염증과 부은 것을 가라 앉히고 전통작용을 한다. 차는 위경련을 다스린다. 이렇게 차의 효능을 한의학적 견지에서 살펴보았다. 이제는 차의 효능을 현대적 방법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차의 성분은 차나무의 산지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며, 차잎의 채집 시기와 법제의 과정에서도 조금씩의 차이가 있다. 차에는 10가지 성분이 들어 있다. 차잎은 날것(생)일 때 75%가 물이고, 25%가 고형물(固形物)로 되어 있다. 홍사악(洪思岳)박사의 제공에 의하면 차에는 카페인, 프림, 비타민, 탄닌, 단백질, 탄수화물, 방향성유(芳香性油), 각종 식물성 색소(엽록소, 안트라키농)효소, 엽(獵)질, 수지류(樹脂類), 무기질등이 있다. 차의 주요 성분은 카페인과 비타민C 이다. 카페인의 효능은 중추신경에 대한 흥분작용, 지구력을 증가시키는 피로회복작용, 사고력 항진작용 등이다. 정신을 흥분시키는 카페인은 기산징유도체로써 오차 중에는 카페인(Caffeine), 데오피린(Theo Phyline), 하이포기산징(Hypo Xantine), 모노 메칠기산징(Mono methyl xanthine)등이 들어 있고 이것들은 약리작용의 강약은 있지만 거의 유사한 약리작용을 가지고 있다. 차잎에는 3%정도 카페인이 함유되어 있다. 하지만 인체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 오히려 지적(知的)작업을 하는 분들에게는 경쾌하며 사고(思考)의 연합이 보다 안전하게 된다. 또 지각 자각의 감수성이 예민하여져서 그 반응시간이 휠씬 단축된다. 그리고 운동활성도 항진된다. 임상적으로 기산징류가 고혈압성 두통에 좋은 효과를 나타낸다. 비타민C는 괴혈병, 각기, 당뇨병을 예방한다. 이밖에도 식욕증진, 병의 저항력 증강 등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작용을 한다. 탄닌산(Theanine)은 차의 색과 떫은 맛을 내는 역할을 한다. 차잎에는 상당히 많은 탄닌이 들어 있으며 고급차일수록 많이 함유되어 있다. 탄닌은 수렴(收斂)작용이 있으므로 설사를 멈추게 하는 효능을 가졌다. 엽록소(카로징, 기산도필, 후로봉, 안트리키농등)는 품종의 차이를 결정하게 된다. 고급차일수록 엽록소의 함량이 많이 나타나게 된다. 또 방향성(芳香性), 정유(精油)는 차에서 좋은 향기를 풍기게 하며 무기성분(가리, 인산, 망간)에는 혈액에 약한 알칼리성을 유지한다. 이러한 차가 처음엔 약(藥)으로 사용되어 왔다. 야생의 선약(仙藥)으로 연명의 묘술이 있어, 산골짜기에 차나무가 있으면 그 땅을 신령지(神靈地)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중국의 고전(古典) 호북통지(湖北通志)에 보면 믿어야 좋을지 웃어 버려도 될지 모를 이야기 한 구절이 있다. 옛 이야기니 만큼 연대는 알 수 없고 중국 복건성(福建省) 양주(楊洲)에 한산사(寒山寺)란 옛절이 있었다. 그 절 뒤에는 기암 절벽이 계곡을 이루고 있었다. 이 계곡 절벽 위에 기생하는 나무에서 풍겨나오는 독특스런 향기는 한산사 스님들이 즐겨 찾는 휴식처이기도 하였다. 그 절벽에는 원숭이들이 많이 무리지어 살고 있었는데 원숭이들이 그 향기나는 나뭇잎을 따먹고 있었다. 스님들이 돌멩이를 던져 나뭇잎을 따먹는 원숭이들을 골려주자 원숭이들이 화가 나서 나무가지를 꺾어 절벽 아래 있는 스님들에게 던졌다는 것이다. 스님들은 나무가지를 주워다가 향기나는 잎을 따서 달여 먹었더니 향기도 좋거니와 그 맛 또한 일품이어서 이후 스님들이 즐겨 먹었다는 이야기다. 중국의 차 이름 가운데 원후차(猿 茶)가 있다. 원숭이들이 먹었던 것에서 유래된 이름 같기도 하다. 촉(蜀)나라 성도(成都)에 있던 고원사(高猿寺)의 원후공(猿候公)이 원숭이 세 마리를 데리고 천목산(天目山)에 들어가서 차잎을 따서 불로장생의 떡차를 만들어 천제(天帝)에게 바치고 장약상서(掌藥尙書)가 되었다는데 그 차이름 역시 원후차이다. 제 4 절 차의 역사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문화(文化)는 오직 필요(必要)에 의하여 존재하여 왔다. 오랜 시일동안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이용하면 그 문화는 자연히 번창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바로 역사의 뒤안길로 자취없이 사라지기 마련이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문화현상이 아닐까?
우리나라의 차 역사 역시 사람이 살다보니 필요한 것이었기에 아득한 옛날로부터 있었는가 보다. 차는 물과 불의 조화품(造化品)이다. 초의스님의 동다송(東茶頌)에 보면 장백산중에 백산차(白山茶)가 있었다 한다. 석남과(石南科)식물의 잎으로 차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비치고 있다. 백산차는 바위가 있는 깨끗한 곳에서 나며 키가 약 1자(尺), 잎은 유엽상(柳葉狀)이며 향(味香)이 없어 제사에 쓴다. 백두산 근처 산촌에서 음료로도 이용하였다. 청(청)의 건륭제(乾隆帝)때에는 중국에다 조공(朝貢)까지 하였다 한다. 석남차(石南茶)도 있었다. 그때가 삼한(三韓)시절 이었다. 그러고 보면 차가 단순한 차의 구실뿐만 아니라 약용(藥用)으로 겸비된 듯하다. 삼한(三韓)시절부터 지금도 즐겨 이용하는 미싯가루가 있었다. 콩, 보리 등을 볶아서 사용하였다. 그런가 하면 한편으로는 오미자(五味子), 구기자등 열매를 따서 차 또는 약용으로 이용 하였다. 1. 인도(印度)에서의 전래(傳來)
우리나라 역사 서적 중 최고인 상국유사(三國遺事)에 보면 가락국(駕洛國)의 거등왕(居登王)이 선왕(先王)인 수로왕(首露王) 무덤에 제사를 올릴 때 차(茶)와 떡 그리고 과일, 밥을 사용했다고 했다.
이 기록은 우리나라에서 차를 이용하였다는 문헌 가운데 최고(最古)의 기록이 아닌가 싶다. 다만 삼국유사를 정사(正史)로 인정할 수 없다면 문제는 또 달라질 수 있지만 지금으로선 정사이나 야사(野史)이니 하고 이론(理論)을 가질 필요성이 없는 것 같다. 다만 차(茶)에 관한 한은. 그런데 고려 문종(文宗)의 대강년간(大康年間·1075∼1082)에 지금의 김해(金海) 지주사(知州事)김양감(金良鑑)이 지은 가락국기(駕洛國記)가 삼국유사(三國遺事 : 一然 著)에 수록된 것이다. 그것을 어느 정도 믿는 입장에서 이야기를 전개해볼 필요성이 있는 것 같다. 가락국(駕洛國)의 왕은 김수로(金首露)이며 그의 부인은 허황옥(許黃玉)이다. 허황옥은 인도의 갠지스강 상류에서 기원전 5세기경부터 있었던 태양왕조인 아유타국(阿踰陀國·Ayodhya)의 공주(公主)로서 나이 불과 열여섯 살에 아버지 왕의 명령으로 시종들과 함께 가락국에 찾아왔다. 서기 48년 7월 27일. 가야문화(伽倻文化)의 점화는 차(茶)로부터 시작되는 느낌을 준다. 지금 창원(昌原)의 의림사(義林寺)뒷산이 백월산(白月山)이다. 그곳에 죽로차(竹露茶)가 있었다. 세상에서는 수로왕비인 허씨(許氏)가 인도에서 가져온 차씨라고 전한다. 이런 전설을 꼭 믿어야 할 필요성은 없지만 역사의 기록이 빈약한 우리나라 입장에선 안 믿어야 할 이유도 굳이 없는 것 같다. 전설에 더 귀를 기울이면, 김수로왕(金首露王)의 아들 일곱(七王子)이 외삼촌인 인도 스님 장유화상(長遊和尙)을 따라 가야산(伽倻山)에서 수행하다가 의령(宜寧)의 수도산(修道山), 사천의 와룡산(臥龍山)과 구등산(九等山)을 거쳐 지리산(智異山) 운상원(雲上院)에서 수행하기 2년 만에(105년 8월 15일) 밤에 성불(成佛)하였다 하여 이곳을 운상원이라 부르지 않고, 칠불암(七佛庵)이라 부른다고 했다. 지금도 그곳에 칠불암이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차 관게 서적으론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동다송(東茶頌) 역시 초의(草衣)스님께서 이곳에서 집필하였다고 전해진다. 현재 경남 김해군 장유면 대청리에 장유암(長遊庵)이 있다. 이 절 역시 인도 장유(長遊)화상의 전설이 얽힌 곳이다. 물론 전설이긴 하지만 쉬이 웃으며 지낼 수 있는 일이 아닌 듯하다. 이렇게 미루어 보면 차는 인도(印度)에서 바로 수입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불교 전래 역사도 지금의 사실을 뒤집는 격이 된다. 가야문화에서 차의 위치란 대단한 비중인 것 같았다. 앞에서 밝혔듯이 선왕(先王)의 제사에 이용하는 것 같았으며 퍽 희귀하게 다루었으리라 믿는다. 가락국의 두 번째 왕인 거등왕(居登王)이 199년에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마지막 임금 구위왕(仇衛王·532∼562)까지 330여 년간 삼헌(三獻)의 예법으로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 김수로왕의 15대 후손인 제30대 문무왕(文武王) 즉위(661)년 삼월에 김수로왕의 묘(廟)를 신라의 종묘(宗廟)에 합설(合設)하여 제사를 봉행하라는 분부가 있었다. 그래서 해마다 정월 초사흘, 이렛날, 오월 오일, 팔월 오일, 보름날, 그리고 거등왕의 유촉 어명으로 정한날(연중 五日, 정월 三日, 七日, 五月 五日,八月 五日, 八月 十五日)에 차, 술, 단술, 떡, 밥, 과일 등의 제물을 장만하여 헌작(獻酌)의 예법으로 제사를 지냈다. 이런 전설을 들추어 대충 정리해 본다면 차는 인도에서 허황옥과 그의 동생 장유스님에 의하여 우리나라에 전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약 이천여 년의 차문화를 의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한가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은 그 당시 차가 일반서민 사회에까지 사용됐다고 보기에는 어렵지 않을까. 다만 궁중에서 예식으로, 또 특수분야 스님에 의하여 이용하였다고 본다. 2. 중국(中國)에서 전래(傳來)
무슨 이야기나 다 그러하겠지만 특히 학문에 있어서 근거 없는 이야기는 어쩌면 전설(前說)이란 좋은 것으로 밀어붙여 버리면 더 할 이야기가 없어진다.
하나의 사실을 추적해감에 있어 현재 남아 있는 것을 모체(母體)로 하여 형태적(形態的) 입장에서 추리해 보는 것도 무관한 일이 아닐 듯하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나라에서 차(茶)의 전래(傳來)에 있어서 확고 부동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흥덕왕(興德王) 3년(828)조의 기록이 정설이다. 그러면 그보다 앞서 차를 이용하였다는 기록은 어떻게 처리하여야 할까 의문스럽다. 1) 차(茶)와 불교(佛敎)
부처님 생존 당시 수행 수님들은 하루 한끼씩만 음식을 먹어야 했다. 그런데 오후(午後)에는 우유나 과일즙과 차(茶)를 먹어도 좋다고 했다. 그런 유습은 아직도 이 땅에 존속되어 어떤 스님들은 아침에 죽을, 낮(巳時)에 한끼 밥, 그리고 저녁은 먹지 않는다. 그것을 흔히 오후불식(午後不食)이라고 한다. 이런 풍속은 부처님 당시(지금부터 2550년 전)의 풍속 그대로이다.
부처님께서는 육년의 긴 고행(苦行) 끝에 니련선하(泥蓮禪河)에서 선생녀(善生女)가 공양(供養) 올리는 우유를 받아 드셨다. 차의 다른 형태라 볼 수 있다. 부처님께서 처음 도를 이루시고 설하신 화엄경(華嚴經)에 차의 이야기가 나온다. 널리 밝은 빛을 놓아 향기 가득 장엄일세.
가지가지 묘한 향이 모여서 장막되어
온 누리 넓은 세계 고루고루 뿌리면서
모든 큰 스님께 공양코자 하옵네다.
또 광명을 놓으매 차로 가득 장업일세.
가지가지 묘한 차가 모여 장막되어
온 누리 넓은 세계 고루고루 뿌리면서
모든 영가들게 공양코자 하옵네다.
또 밝은 빛을 놓아 쌀로 가득 장엄일세.
가지가지 묘한 쌀이 모여서 장막되어
온 누리 넓은 세계 고루고루 뿌리면서
모든 고혼들게 공양코자 하옵네다.
普放光明香莊嚴
種種妙香集爲帳
普散十方儲國土
供養一切大德尊
叉放光明茶莊嚴
種種妙茶集爲帳
普散十方儲國土
供養一切靈駕衆
叉放光明米莊嚴
種種妙米集爲帳
普散十方儲國土
供養一切孤魂衆
여기에서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부처님 당시부터 의식(儀式)으로서 향(香), 차(茶), 쌀(米)을 중요시하였다는 사실이다. 화엄경은 부처님이 설하신 경전 가운데 최초인 설법 내용이 담긴 중요한 경전이다.
불교 의식으로 차가 등장하였다는 사실이 자명하게 밝혀진 것을 감안한다면 불교가 옯겨가는 곳마다 차(茶)가 필수적으로 옮겨지기 마련이었다. 하나의 종교가 옮겨지면 그 의식(儀式)은 필수적으로 따르기 마련이다. 오늘날 한국불교는 사실상 중국불교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하지만 중국불교와 문화적(文化的) 측면에서는 차이가 현저함을 알 수 있다. 종교의식으로 차가 우리나라에 들어 왔다는 것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게끔 간략히 불교의 전래를 살펴볼 필요성이 있지 않을까?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순도(順道)화상이 불상(佛像)과 경전(經典)을 가지고 고구려에 왔다. 그러나 바로 고구려에 밀착하여 성행하지 못하고 무려 이십여년 후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원년(391)에 불법(佛法)을 믿어 복(福)을 구하라고 선포하였다. 불교의식 가운데는 매일 새벽 3시, 오전 11시, 오후 6시에 대웅전(大雄殿)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 앞에 예불(禮佛) 올리는 관습이 있다. 부처님 앞에는 향로, 촛대 그리고 다기(茶器)를 모신다고 표현하는데, 차를 사용하지 않고 정화수를 이용한다. 부처님에게 올리는 예물(禮物·供養米) 가운데 향(香), 초, 등(燈), 과일(果), 차(茶), 밥(米)을 공양육물(供養六物)이라고 이른다. 그리하여 부처님에게 바치면서 하는 염불(念佛) 가운데 근공(勤供)이 있다. 향 공양은 향을 사르는 공양 등불 공양은 등불 밝히는 공양 차 공양은 좋은 차 공양 과일 공양은 좋은 과일 공양 쌀 공양은 향기로운 쌀 공양 香供養燃香供養 燈供養燃燈供養
茶供養仙茶供養 果供養仙果供養
米供養香米供養 물론 대웅전(大雄殿)을 비롯하여 각 법당(法堂)마다 불공(佛供) 드리는 예식이 조금 다르다.
대웅전에 올리는 불공 가운데는 필히 다기(茶器)를 모셔야 하며 다게(茶偈)라는 염불도 있다. 내 이제 깨끗한 물 올리니 감로수(甘露水)로 변하여지이다. 삼보(三 ) 앞에 봉헌하고자 하나이다. 자비로이 거두어 주소서. 我今淸淨 變爲甘露茶 奉獻三寶前 願垂哀納受 십육나한(十六羅漢)에게 올리는 불공(佛供) 가운데에도 다게(茶偈)가 있다.
이제 감로차를 가져 나한님 앞에 올리오니 애틋한 마음으로 보살펴서 자비로이 거두어 주소서. 今將甘露茶 奉獻羅漢前 鑑察虔懇心 願垂哀納受 부처님 사리(舍利)를 옮길 때 하는 염불(念佛) 가운데에도 다게(茶偈)가 있다. 今將甘露茶 奉獻寶 前 鑑察虔懇心 願垂哀納受 불상(佛像)을 점안(點眼)할 때도 다게(茶偈) 모시는 염불이 있다.
깨끗한 차 한잔 모든 병액 없애소서. 오직 대중들을 옹호하소서. 자비로이 거두어 주소서. 淸淨茗茶樂 能除病昏沈 唯冀擁護衆 願垂哀納受 牧如造出醍 味 成道當時先來獻 我今獻供亦如是 願垂慈悲哀納受 괘불(掛佛)을 옮길 때도 염불하는 다게(茶偈)가 있다. 이제 묘약과 차로써 영산(靈山) 법회에 올리오니 이 간절한 마음 살피시어 원컨대 자비로이 거두어 주소서. 今將妙樂及茗茶 奉獻靈山大法會 府鑑檀那虔懇心 願垂慈悲哀納受 부처님 뿐만이 아니라 영혼을 위로하는 시식(施食) 염불 가운데에도 다게(茶偈)가 있다. 이 다게는 조주(趙州)스님 이후 나타난 것 같다.
갖가지 많은 풀 가운데 싱그러운 한 맛. 조주스님은 많은 사람에게 권하였으니 돌솥에 강물을 달여 바치오니 원컨대 영혼이여 괴로움을 쉬소서. 百草林中一味新 趙州常勸幾千人 烹將石鼎江心水 願使亡靈歇苦輪 스님들이 열반하였을 때에도 염불하는데 다게(茶偈)가 있다.
無底鉢擎禪悅味 穿心椀貯趙州茶 慇勤奉勸禪陀客 薦 南泉玩月華 다만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부처님 앞에 바치는 공양 육물 마다 게송이 다 있다는 사실이다. 차는 다게(茶偈), 향은 알향게( 香偈), 등(燈)은 등게(燈偈) 등등.
2) 부도다례(浮屠茶禮)
불교 의식 가운데 큰 비중이 있는 것은 부도다례가 있다.
부도(浮屠)란 범어(梵語)로 Buddha이다. Stupa 또는 부두(浮頭), 부도(浮屠), 불도(佛圖), 구역가(舊譯家)에서는 불다의 전음(轉音)이라 하고 신역가(新譯家)에서는 솔도파(率堵波), 곧 탑의 전음이라 한다. 후세에는 흔히 솔도파와 통용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스님네의 사리(舍利)나 유골을 넣은 석종(石鐘)을 부도라 한다. 쉽게 이야기하면 스님네의 무덤이다. 스님네의 무덤이라 해서 평범한 스님들의 무덤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스님이 세상을 떠나면 화장을 치른다. 그런데 평소 법력(法力)이 높고 덕망(德望)이 있는 큰 스님, 조사(祖師), 종사(宗師), 대선사(大禪師)등 유력하신 스님네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사리(舍利)나 유골을 모아 적은 석종 모양의 부도에다 안치(安置) 하기 마련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큰 사찰(寺刹) 주위에는 부도만 밀집(密集)시켜 둔 곳이 으레 있기 마련이다. 후손들이 없는 부도이지만 해당 사찰에서는 일년에 한 차례 또는 두 차례 부도다례를 올린다. 부산 금정산 범어사의 경우 음력 9월 9일날은 꼭 부도다례를 올린다. 그날은 큰 절 스님뿐 아니라 산내(山內) 암자(庵子)의 모든 스님들은 하루 일과를 중지하고 부도 앞에 나아가서 부도 다례를 올린다. 그 의식은 경건하고 장중하나 선종(禪宗)에서는 비교적 간단히 모시기 마련이다. 조사영반(宗師靈飯)이란 바로 이즈음을 이른 것이다. 그리고 시식(施食)에 다게(茶偈)가 있다. 옛날에는 차(茶)로써 차례를 올렸는데 요즈음은 현대화되어서 그런지 스님들이 비교적 좋아하는 국수로 차례를 올린다. 3) 소참법문(小參法問) 한국불교는 다행히 대승불교(大乘佛敎)권에 속하여 불교 전래와 더불어 선종(禪宗)이 한국불교의 대종(大宗)을 이루었다.
선(禪)을 수행(修行)하는 선원(禪院)에서 선을 지도하는 방장(方丈), 조실(祖室), 유나(維那), 입승(入繩), 선덕(禪德)이 주축이 되어 후학(後學)을 가르친다. 매일 선에 대한 이론(理論)을 강의하는 곳도 있지만 보통 음력 초하루, 보름날 방장(方丈) 화상(和常)이 선에 관한 법문(法門)을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매일 공양(供養·스님네가 밥 먹는것)뒤에 선원에 모여 간단한 차 한잔 나누면서 방장화상이나 조실스님, 유나, 입승이 선에 관한 이론을 전개하기도 하는 것을 소참법문이라 한다. 이럴 때는 들어도 좋고 듣지 안하도 무방하다. 하지만 처음 입문(入門)한 스님네들은 가르침에 꼭 귀를 기울이기 마련이다. 비교적 온화한 분위기이며 이때 마시는 차(茶)는 보편적으로 산(山)마다 절(寺)마다 다르긴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오대산 상원사 선원에서는 오갈피차, 마가목차, 구기자차 등을 겨울에 많이 이용하고 송차(松茶)를 많이 사용한다. 남부지방인 순천 송광사 선원이나 지리산 화엄사, 쌍계사 같은 곳에서는 죽로차(竹露茶)를 많이 이용한다. 앞에서 밝혔듯이 부처님 앞에, 부도다례로서의 종교 의식에서 차는 종교적인 범주를 벗어나기 힘들었겠지만 이처럼 선원에서 수행하면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차가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4) 발우공양(鉢盂供養)
발우공양을 이야기함에 있어선 단순히 발우공양을 이야기하고자 하는게 아니고 오늘날 차생활이 발우공양에 근원을 두지 않았나 하는 데서 형태론적(形態論的) 입장에서 연구하기 위하여 발우공양을 세밀히 살펴보아야 될 것 같다.
한국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발우공양의 풍속은 아직도 옛모습 그대로이다. 발(鉢)은 범어(梵語)로서 발다라(鉢多羅·patra), 파달라(波 羅·播 羅), 발달라(鉢 羅), 발화란(鉢和蘭)이라고도 쓰며, 발(鉢)이라고 약칭한다. 응기(應器·應量器)라 번역된다. 비구(比丘) 스님이 사용하는 밥그릇이다. 이것을 가지고 돌아다니며 밥을 비는 것을 탁발(托鉢)이라 하며, 비구가 먹는 분량은 이 한그릇에 한한다. 와발(瓦鉢)이 있다. 우리나라에선 목발(木鉢)이 있으나 부처님 계율상 없다. 그런데 발우공양은 큰 절에서 많은 스님네가 공동생활을 하여야 하므로 공양(밥 먹는 일)하는 일을 최대한 줄여 합리적인 수행생활을 목적으로 짜여진 것 같다. 밥 이지만 단순히 밥으로 먹는게 아니다. 밥 먹는 일 역시 수행의 일부(一部)로 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스님네의 밥그릇인 발우(鉢盂)는 선반 위에 올려 놓는다. 발우가 놓인 선반 앞에서 발우를 향하여 합장을 하고 두손으로 발우를 잡고 내린다. 앉은 자세(姿勢)는 단정한 반가부좌(半伽趺坐)로 하고 발우는 몸에서 한 뼘 반쯤 앞에 내 놓는다. 스님들이 모두 자리에 앉으면 유나(維那)스님이 죽비(竹 )를 한번 두드린다. 스님들이 모두 합장(合掌)하고 부처님의 은혜를 상기하며 염불을 한다. 유나스님이 또 죽비를 한번 두드린다. 그러면 발우를 펴는 염불(전발게·展鉢偈)을 한다.
염불이 끝나면 죽비를 세 번 두드린다. 그러면 발우를 펴기 시작 한다. 먼저 발우 수건(鉢巾)을 접되, 반절(半折)하여 다시 삼등분(三等分)으로 접어서 오른 무릎 끝 한뼘밖에 내놓고, 발우 보자기를 풀어 양쪽 끝을 접어 들여놓고, 슬근(膝巾)을 펴서 무릎을 덮는다. 다음 수저집을 들어 발우 수건 위에 거듭 놓고, 발우를 두손으로 들어 앞에 내 놓고, 발단(鉢單)을 들어 수저집 위에 거듭 놓으며, 발우 보자기를 접되 양쪽을 두 번씩 접어 가지고 마지막 가운데를 꺾어 접어서 오른 무릎 바로 앞에 놓으며, 다음 발단을 들어 두 손으로 펴서 오른 손으로 깔면서 왼손으로 발우를 들어 발단의 왼쪽 앞에 놓고, 한쪽씩 두 엄지로서 들어내되, 왼쪽에서부터 차례로 놓는다. 다음 수저집을 잡아 생반대부터 빼어 제1 제2 발우 중간에 놓고, 젓가락부터 빼어 제3 발우쪽 안에 놓되 끝을 먼저 닿게 하여 살며시 놓으며 다음에 수저를 빼어 젓가락 곁 앞에다 놓는다. 수저집은 접어서 발우 보자기 위에다 놓고, 발우 수건을 접어 그 위에 거듭 놓되 옆자리 스님의 발우와 나란히 하여야 한다.
발우를 다 펴면 죽비를 한번 두드린다. 그러면 정중하게 합장하고 염불(十念佛)을 한다. 염불이 끝나면 죽비를 한번 두드린다. 그러면 진지(進旨)가 시작된다. 진지(밥, 국을 나누는 일)할 적에 찬상(饌床)을 들이고 물릴 적에 오른 무릎을 꿇어야 하며 전후에 반배(半拜)해야 하며, 밥통에 주걱은 오른쪽에 꽂으며 밥을 풀 적에 주걱을 엎어서 살며시 눌러 고루어야 하며 국자는 엎어 놓으며, 국은 살짝 돌려 저어서 국물과 건더기를 고루 떠야 하며, 가반(加飯)은 행반(行飯)할 때와 같이 다시 웃자리(上座)로부터 해야 하며, 다과(茶果)를 진지할 적에도 오른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공손히 드리고 일어나면서 반배(半拜)해야 한다.
진지가 끝나면 죽비를 한 번 두드린다. 봉발게(捧鉢偈) 염불을 하면서 두 손으로 발우(밥이 담긴 발우)를 들어 올리되 눈썹 까지 올린다. 죽비를 한번 두드린다. 그러면 발우를 내려 놓고 합장하고 오관상념게(五觀想念偈)의 염불을 한다. 여기까지 염불을 하고 생반대, 일명 여등대로 밥알 일곱낱 이내를 떠서 그대로 발우 수건 위에 놓고 출생게(出生偈) 염불을 한다. 염불이 끝나면 생반대 밥알을 헌식기(獻食器)에 넣는다. 죽비 세 번 두드리면 합장 저두(抵頭)하고 공양하기 시작한다. 공양할때는 수저소리가 나지 않아야 한다. 음식 씹는 소리가 나서도 안된다. 후르룩거리며 국을 먹어서도 안된다. 음식을 떠서 한입에 먹어야 한다. 밥에 있는 뉘는 까서 먹을 것. 어시발우에 비벼 먹지 말 것. 옆눈으로 휘돌아 보지 말 것.
공양이 끝나면 발우를 씻되 어시발우부터 차례로 씻어야 한다. 수저는 제2 발우에서 씻어 제3 발우에 옮겨 놓아야 한다. 발우를 발우 수건으로 닦되 처천히 돌려 닦을 것. 천수물을 깨끗이 버려야 한다. 그리고 죽비 한 번 두드린다. 발우 닦는 것을 놓고 절수상념게(折水想念偈) 염불을 한다. 발우를 거두는 차례는 먼저 숟가락부터 닦아 수저집에 넣고, 다음 젓가락을 넣되 숟가락 입을 밑으로 가게 하며 수저집을 접어가지고 생반대를 끼워 오른 무릎 한뼘 앞에 내놓는다. 다음 어시발우부터 닦아서 차례대로 되게 끼워놓고, 발우를 왼손으로 들고 오른손으로 발단을 잡아 당겨 반을 접으면서 외손의 발우를 한뼘 앞에 내놓고, 발단을 다시 삼등분으로 접어서 수저집 위에 놓고, 다음 발우 보자기를 펴놓고, 발단 놓고, 발우 놓고, 수저집을 놓고, 슬건(膝巾)을 거두어 접어서 수저집 위에 놓고 보를 묶되 세로로 일자(一字)가 되게 묶으며, 끝으로 발우수건을 접어서 위에 덮되 앞을 가지런하게 한다. 그리고 발우를 한뼘 반쯤 앞에 내놓는다. 죽비 한번 두드리면 합장하고 식필상념게(食畢想念偈) 염불을 한다.
염불이 끝나면 죽비 세 번 두드린다. 합장하고 절한다. 발우를 두 손으로 들고 선반 위에 얹어 놓고 합장하여 저두(低頭)한다.
이렇게 하여 공양을 끝마친다. 스님네는 단순히 밥을 먹는 게 아니라 밥을 먹으면서도 엄격한 수행의 일부를 치르는 셈이다. 여기 발우공양에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부분을 점검해 보자. 첫째, 밥을 먹는 마음 가짐, 몸 자세, 이것이 바로 수행이다. 한잔의 차를 들 때도 마찬가지로 단순히 차를 드는 게 아니다. 흩어진 생각, 부질없는 상념을 버리고 깨끗한 마음을 챙긴다. 이게 바로 다(茶)정신과 직결되지 않는가? 둘째, 발우공양에 있어서의 하나 하나 도구가 그대로 차도구(茶道具)이다. 발단(鉢單)은 발우 펼 때 자리에 까는 것으로 찻잔 밑에 까는 차판과 같다. 발우 수건은 발우를 닦는 수건으로 찻잔을 닦는 수건과 같다. 생반대는 귀신 밥 주는 그릇으로 말차(抹茶)에 있어서 차 수저가 바로 그것이다. 발우 보자기는 발우를 묶어 두는 것으로 말차 찻잔을 오동나무 상자에 넣었을 경우 꼭 발우 묶는 식으로 오동나무 상자를 묶는다. 발우를 정중히 다루는 것 역시 찻잔을 소중히 다루는 것과 같다. 이렇게 발우공야의 형태가 바로 오늘날 차생활의 근본형태가 아닌가 싶다. 3. 고대(古代)의 차생활(茶生活)
사람의 몸(肉身)은 어쩔 수 없이 많은 부분의 수분(水分)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물이 많이 필요하다.
사람이 필요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이용하기 마련이다. 필요하지 않다면 언제 어느때 우리들 곁을 떠날지 모른다. 차(茶) 역시 그러하다. 여기서 고대(古代)라 이름 붙인 것은 편의상 삼국시대(三國時代) 이전을 의미한다. 그러니 가야시대(伽倻時代)에 이미 인도(印度)로부터 차가 들어왔다는 사실을 앞에서 잠시 살펴 보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설을 토대로 한 것이다. 그러나 전혀 부인할 수 만도 없는 일이라 간주한다. 설령 그때 차가 들어왔다하더라도 그것은 궁중(宮中)에서 의식(儀式)으로 이용하였을 게다. 아마 일반 서민 사회에서는 엄두도 낼 수 없던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일반 사회에서는 차의 또 하나의 기능이라 볼 수 있는 약리적(藥理的) 효능(效能)을 중요시하여 구기자(拘杞子), 오미자(五味子), 마가목, 생강, 칡 등을 그냥 달여서 마셨다. 그리고 백산차(白山茶)가 있었다. 초의(草衣)스님의 저서 동다송(東茶頌)에 보면 장백상중(長白山中)에 식물의 잎을 따서 달여 마셨던 백산차(白山茶)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산차는 석남과(石南科)의 식물로서 잎으로 차를 만든다. 길림외기(吉林外記)에는 이것을 안춘향(安春香)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바위가 있는 깨끗한 곳에 나며 키는 약한자, 잎은 유엽상(柳葉狀) 이며 미향(味香)이 없어 제사에 쓴다. 그리고 산촌(山村)에서는 음료로도 쓴다. 일명 석남차(石南茶)라 고도 부른다. 이런 사실을 들추어 보면 문화적 입장에서 어떤 형태의 차(茶)이든 차를 즐겨 마시기를 좋아하였나 보다. 4.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차생활(茶生活)
차문화(茶文化)는 어떤 의미로 우리나라 옛 문화의 기층을 이루는 기층문화(基層文化)라 할 수 있다.
고구려에 있어서 차(茶)는 불교라는 봉교에 편승하여 전래되었다. 종교의식 속에 고고히 자리하여 있었다. 종교의식이 일반에게 끼치는 영향이 막대함을 인식한다면 가히 차의 위치를 알 수 있지 않을까? 고려중엽(高麗中葉)의 학자요, 묵객(墨客)이었던 이곡(李穀 : 충열왕 24년·1298년 ∼ 충정왕 3년·1351) 선생은 가정집(家亭集) 20권을 남겼다. 선생은 기행문(紀行文)인 동유기(東遊記) 가운데 신라(新羅)의 화랑(花郞)들이 사용(使用) 하였던 차도구(茶道具)가 동해(東海) 바닷가 여러 지방(地方)에 남아 있는 것을 목격(目擊)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강릉(江陵)의 경포대(鏡浦臺)에도 신라 화랑들이 차를 끓이던 돌솥이 남아 있고, 한송정(寒松亭)에도 화랑들이 차를 달일 때 쓴 돌솥이 남아 있다고 기록 되어 있다. 화랑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신라본기(新羅本紀)에 보면 진흥왕(眞興王) 37년 (576년) 봄에 비로소 화랑도가 생긴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종래부터 있었던 공동체를 국가적으로 편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화랑은 신라때 청소년으로 조직되었던 민간 수양단체이다. 일명 국선도(國仙徒), 풍월도(風月徒), 원화도(源花徒), 풍류도(風流徒)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화랑도를 처음 일으키게 된 목적은 몸과 마음을 단련하고 교양을 쌓아 사회생활의 규범을 가르쳐 필요한 경우에는 전투원(戰鬪員)이 될 수도 있는 사회의 중심 인물을 양성하는 것으로 전통을 존중하고 협동정신과 신의(信義), 용감성을 배양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화랑도의 가장 중요한 수양 방식은 서로 도의를 닦는 것, 시와 음악을 즐기는 것, 명산(名山)과 대천(大川)을 찾아 다니며 즐기는 것 등이다. 화랑의 훈련지도와 자문은 주로 스님이 맡았다. 그 대표적 예로 원광법사(圓光法師)의 세속오계(世俗五戒)는 유명하다. 청소년들이 그 나라의 지도자로 성장하는데 무엇보다도 마음을 수양한다는 사실은 퍽 중요한 과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몸과 마음을 단련하는 의도 역시 주의깊게 주시해 볼 필요성이 있는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오늘날과 같은 과학시대, 기계문명의 소용돌이 속에 대자연과 소외된 도회지 생활의 삶에 있어서는 절실 그 정신을 고찰해 보아야 할 과제인 것 같다. 화랑들의 일상생활(日常生活)은 그대로 수도(修道)와 수행생활(修行生活)의 연속이므로 한잔의 차는 수도자들에게 더 할 수 없는 기호음식이었을 것이다. 일본의 일본서기(日本書記)에 보면 긴메이 천황 13년에 백제(百濟)의 성왕(聖王·523∼533)이 담혜(曇蕙)화상 등 16명의 스님에게 불구(佛具)와 차(茶), 향(香)등 육법공양물(六法供養物)을 일본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시대에 이미 차가 궁중에서 사용되었다는 좋은 반증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보면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632-646)때 어느 스님이 당(唐)에 유학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다(茶) 씨앗을 가지고 와서 경삼남도 하동군 쌍계사(雙溪寺) 근처에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신라본기(新羅本記) 흥덕왕(興德王)조에 나타난 것과 동일하다. 고려(高麗)시대 시인(詩人) 이규보(李奎報·1168∼1241)의 남행월일록(南行月日錄)을 살펴 보면 신라(新羅)의 성인(聖人) 원효(元曉·617∼686) 스님이 차(茶)를 즐겼다는 사실이 보인다. 부안현재(扶安縣宰) 이공(李公)은 다른 나그네 6, 7명과 함께 원효방(元曉房)을 찾았다. 방(房)까지는 나무사닥다리가 있었는데, 높이가 수십척이나 되었다. 후들후들 떨면서 올라가니, 정계(庭階)와 창호(窓戶)가 숲속에 솟아 보였다. 듣건대, 종종 호랑이와 표범이 인연을 구하러 올라 오려다가 올라오지 못했다 한다. 옆에 암자(庵子)가 있는데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사복스님이 머물던 곳이라 한다. 이곳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와 살게 되었으므로 사복스님이 대사(大師)를 모시게 되었다. 그는 대사(大師)에게 차(茶)를 달여 드리려 하였으나 생수(生水)가 없어 딱하던 가운데, 갑자기 바위틈으로 물이 솟아 났다. 그 물맛이 젖과 같아 이로써 차(茶)를 달였다 한다.
이런 기록을 보아 원효스님과 사복스님은 스승과 제자가 아니라 함께 수행하는 도반(道伴)의 사이인 듯 싶다.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한 과부(寡婦)가 살았는데 남편(男便)도 없이 아기를 낳았다. 아기는 열 두 살이 되도록 말도 못할 뿐더러 기동(起動)도 못했다. 그래서 사복이라 불렀다. 어느날 어머니가 죽자 사복은 고심사(高心寺)로 원효스님을 찾아갔다. 원효스님은 그를 맞이하였으나 사복은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대와 내가 옛날 경(經)을 싣고 다니던 암소(사복의 어머니를 뜻함)가 지금 죽었으니, 같이 가서 상사(喪事) 지내자』고 하였다. 원효스님이 좋다하고 같이 집으로 가서 사체(死體)앞에서 설법(說法) 하기를, - 나지 말지어다. 죽는 것이 고통이니라. 죽지 말지어다. 나는 것이 고통이니라- 하였다. 그러자 사복이 그 말이 너무 길다 하면서 다시 고쳐라 하였다. 원효스님이 나고 죽음이 모두 괴롭다 하였다. 두 사람이 상여(喪輿)를 메고 활리산(活里山) 동쪽 기슭으로 갔다. 이런 상황을 보아 오히려 사복의 법력(法力)이 원효스님보다 수승(殊勝)임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원효스님은 함께 수행하며 차(茶)를 즐겨 마셨다는 사실만은 현저하다. 이규보(李奎報)가 원효스님이 계셨던 암자(庵子)를 찾아 갔을 때 원효방(元曉房)에는 한 노스님이 차(茶)와 경전(經典)을 유일한 벗으로 삼아 무연히 수행에 전념하고 있었던 것 같다. 원효방(元曉房)은 여덟자쯤 되는 넓이인데 한 노승(老僧)이 앉아 있었다. 원효대사의 진용(眞容)이었다. 외실(外室)에는 병하나, 차 그리고 경괘가 있을 뿐 취사구(炊事具)도 없었고 또한 시자(侍者)도 없었다. 이런 상황을 보면 노스님은 원효스님의 수행 자리에서 차와 경전으로 원효스님처럼 수행하셨나 보다. 행기(行基) 스님은 백제(百濟)의 스님 이었다. 일본(日本)에 귀화(歸化)한 귀화승(歸化僧)이었다. 일본 천평원년(天平元年)의 성무천황(聖武天皇)시대에 살던 분이었다. 일본의 동대사요록(東大寺要錄)에 말세중생(末世衆生)을 위하여 차나무(茶木)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심상(審祥·?∼740)스님은 신라 스님이고, 원효스님(617∼686)의 십대제자(十大第子) 가운데 한 분이었다. 원효스님의 영향을 입어 화엄학(華嚴學)을 전공하였으며, 당(唐)나라에 가서 현수법사(賢首法師)에게 화엄학을 배웠다. 성덕왕, 효성왕(729∼740)때에 일본에 건너가 대안사(大安寺)에 있으며 왕(王)의 명령으로 화엄경(華嚴經)을 강의하였다. 역시 일본에 차(茶)를 전했다.
신라(新羅) 신문왕(神文王·681∼691)에게 유명한 직언(直言)을 올렸던 설총은 원효스님의 영향이 지대하였다.
신문왕에게 『고량진미로 배를 부르게 하고 차와 술로 정신을 밝게 한다』고 아뢰었다. 이처럼 차를 실생활에 많이 이용하였던가 보다. 그러지 않고 어떻게 일상 생활철학에서 차 이야기가 나올 수 있겠는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진흥왕(眞興王) 33년 겨울, 10월 20일 전사한 장병의 영혼을 달래기 위하여 팔관연회를 외사(外寺)에서 칠일간(七日間) 베풀었다. 제물(祭物)로 차를 이용하였다.
팔관회는 진흥왕 12년(551년)부터 시작되었다. 고려 태조(太祖)의 훈요십조(訓要十條) 중에 그 중요성이 지적되어 성종(成宗) 조를 제외하고는 연등회(燃燈會)와 함께 국가와 이대의식(二大義式)의 하나가 되었다. 팔관회는 중동(仲冬 - 11월 15일)에 왕경(王京) 과 맹동(孟冬·10월)에 서경(西京)에서만 행하였는데, 불교적인 색채는 거의 띠지 않았다. 천령(天靈), 오악(五岳 ), 명산(名山), 대천(大川), 용신(龍神)등 토속신(土俗神)에게 제사 지내는 의식이었다. 고려가 망하자 곧 없어졌다. 우리나라 차문화에 있어서 몸소 실천을 보여 주신 스님이 있었다. 오늘날에도 다도를 거론할 때마다 그분의 존재는 빼놓을 수 없다. 바로 충담(忠談)스님 이다. 신라 향가(鄕歌)에서도 전해오고 있는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와 안민가(安民歌)의 지은이이며 국선(國仙)이자 차생활을 종교적 차원에서 일상생활로 실천하신 분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에 보면 충담스님은 경덕왕(景德王)에게 한잔의 차를 올린다. 경덕왕(景德王·742∼765)이 음력 중양절(重陽節·3월 3일, 9월 9일)에 귀정문(歸正門) 누상에 올라 좌우(左右)에게 이르기를, 『누가 길에 나가 위의(威儀)가 있는 스님을 데려올 수 있겠느냐?』하였다. 이때 마침 위의가 깨끗한 한 대덕(大德)이 있어 길에서 배회(徘徊)하고 있었다. 좌우를 살펴보고 데리고 와서 보이니 왕이 가로되, 『내가 말하는 위의 있는 스님이 아니다.』하므로 그 스님을 되돌려 보냈다. 다시 스님 한 분이 누더기 옷을 입고 앵통(櫻筒)을 지고 남쪽에서 오는 지라 왕이 기뼈하며 누상으로 맞아 들였다. 앵통 속에는 차도구(茶道具)가 담겨져 있었다. 『그대는 누구요?』 『충담(忠談)입니다.』 『어디서 오시오?』 『내가 매양 중삼일(重三日, 3월 3일)과 중구일(重九日, 9월 9일)에는 차(茶)를 달여서 남산(南山) 삼화령(三化嶺)의 미륵세존(彌勒世尊)님께 올리는데 오늘도 공양 올리고 오는 길입니다.』 이에 왕은, 『나에게도 차 한잔 주시오.』 하니 스님이 차를 달여 드렸다. 차맛이 이상(異常)하고 잔 속에서 이상한 향기를 풍기었다. 말차(抹茶) 였으리라. 왕이 다시 『내가 들으니 스님이 기파랑(耆婆郞)을 찬미(讚美)한 사뇌가(詞腦歌)를 읊었다는데 그 뜻이 매우 높다하니 과연 그러하오?』 충담스님은, 『그러하옵니다.』 『그러면 나를 위하여 안민가(安民歌)를 지어주시오.』이에 충담스님이 곧 노래를 지었다. 임금은 아비요, 신(臣)은 사랑스런 어미시라. 백성(民)을 즐거운 아해로 여기시니 백성(民)이 은애(恩愛)를 알지로다. 구물구물 사는 생물(生物)들, 이를 먹여 다스리니 이땅을 버리고 어디로 갈소냐. 나라를 지닐 줄 알지로다. 아! 임금은 임금(君)답게 신하는 신하(臣)답게 백성은 백성(民)답게 살아가노라면 나라는 자연 태평(太平)하리이다. 이 노래를 들은 왕은 스님을 왕사(王師)로 봉하려 하였으나 충담스님은 굳이 사양하며 받지 않았었다. 임금 앞에서 소신껏 이야기할 수 있는 그 고매한 인격, 탁월한 시재(詩才), 돈독한 신앙을 갖춘 충담스님은 가히 우리나라 다례(茶禮)의 종조(宗祖)라 여겨진다.
경덕왕(景德王) 19年에 하늘에 해가 둘이 나란히 나타나 열흘동안이나 없어지지 않았다. 일관(日官)이 왕에게 아뢰기를 인연 있는 스님을 모셔다가 산화공덕(散花功德)을 지으면 재앙(災殃)이 물러나리라 하였다. 그리하여 조원전(朝元殿)에 깨끗한 단(檀)을 설치하고 왕이 몸소 청양루(靑陽樓)에 행행(幸行)하는 스님을 기다렸다. 그때 월명(月明)스님이 긴 두령 남쪽 길을 가므로 왕(王)이 사자(使者)를 보내 불러 단(檀)을 열고 기도문(祈禱文)을 지으라 하였다. 그러나 월명스님은 왕에게 말했다. 『저는 다만 국선(國仙)의 무리에 속해 있으므로 향가(鄕歌)만을 알 뿐이오, 범성(梵聲)에는 익숙치 못합니다.』 왕이 말했다. 『이미 연승(緣僧)으로 뽑혔으니 향가라도 좋다.』 이에 월명스님은 도솔가를 지었다. 오늘 이에 산화(散花) 노래 불러 베푸는 꽃아 너는 곧은 마음의 명(命)을 심부름 하옵기에 멀리 도솔천의 미륵님을 모셔라. 곧 해의 괴변이 사라졌다.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차(茶) 한봉과 수정염주(水精念珠) 108개를 하사하였다. 그런데 홀연히 외양이 깨끗한 한 동자(童子)가 공손히 차(茶)와 염주를 받들고 궁전 서소문(西小門)으로 나갔다. 월명스님은 이를 내궁(內宮)의 시자(侍者)라 했고 왕은 스님의 종자라 했으나 모두 아니었다.
왕이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뒤를 쫓게 하니 동자는 내원(內院)의 탑(塔)속에 숨어 버리고 차(茶)와 염주는 남쪽 벽화미륵상 앞에 있었다. 이와 같이 월명스님의 지극한 덕과 지성이 능히 미륵보살을 감동시켰다. 이런 사실을 들추어 보면 그 당시 궁중(宮中)에서는 차를 많이 이용했다는 반증을 찾을 수 있다. 진감혜소국사(眞鑑慧昭國師·774∼850)는 혜공왕(惠恭王) 10년에 태어나 문성왕(文聖王) 12년에 입적(入寂)한 신라 말기의 고승이다.
당(唐)으로 건너가 신감대사(神鑒大師) 밑에서 수행하고 돌아와 선찰(禪刹)을 짓고자 지리산 화개곡(花開谷)에 들어가 옥천사(玉泉寺)를 창건하였다. 진감국사는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정강왕(定康王)이 최치원(崔致遠)으로 하여금 쌍계사(雙溪寺)로 고치게 하고 시호(諡號)를 진감국사(眞鑑國師)라 내리면서 비(碑)를 세우게 하였다. 최치원봉교찬(崔致遠奉敎撰)으로 된 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는 오늘도 현존하고 있다. 이 비석에도 차(茶)에 관한 기록이 있다. 더듬어 볼 필요성이 있을 것 같다. 진감국사는 차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당나라에서 27년간 수행하였으니 자연스레 차생활에 젖었을 터이다. 혹시 호행(胡行)이 있어 가져다 주는 차(茶)는 환(丸)으로 만들지 않고 기왓장에 얹어 잿불로 뜸 들여 가져오니 내가 이것이 무슨 냄새인지 모르고 또한 한명(漢茗)을 공(供)하는 자 있으면 가루를 만들지 않고 그대로 돌가마에 넣어 나무로 삶아오니 내가 이것이 무슨 맛인지 모르고 배를 적실 뿐이다.
이 밖에도 헌안왕(憲安王·857∼861)은 보조선사(普照禪師)에게 차와 약을 공양올렸으며, 최치원찬(崔致遠撰) 무염국사비명(無染國師碑銘)의 기록에 나타난 것을 보면 달마다 무염국사에게도 차와 향을 보냈다고 되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신라본기(新羅本記) 흥덕왕(興德王) 3년조(三年條·828년)에도 차(茶)에 관한 기록이 있다.
당(唐)에 갔던 사신(使臣) 김대렴(金大廉)이 차(茶)종자를 가지고 돌아오니 왕은 지리산(智異山)에 심게 하였다. 차가 선덕왕(善德王·632∼647)때부터 있기는 했으나 이에 이르러 가장 성행하였다. 최치원(崔致遠·857∼?)의 계원필경(桂苑筆耕) 사심청료전상(謝深請料錢狀)에 보면 흥덕왕(興德王)시대 장보고(張保皐)가 청해진(淸海鎭·金南) 대사(大使)로 있으면서 당(唐)나라와 일본과 무역을 하였다. 당나라의 차(茶)가 상품으로 수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살펴 보면 사실 김대렴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 오기 이전에 신라에는 차가 있었다.
삼국시대 우리나라의 문화는 사실상 스님들의 바랑 속에 묻혀 왔다. 종교라는 위대한 힘에 편승된 것이다. 5. 고려(高麗)시대의 차생활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918∼943)은 나라를 세워 신라의 문화와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으려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태조 즉위 원년(元年)에 팔관회(八關會)를 베풀도록 하였다.
팔관회는 고려 때의 불교의식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팔관회의 시초는 진흥왕(眞興王 12년·551년) 때에 신라에서 비롯되었다. 고려 태조(太祖)는 그의 개국(開國) 훈요십조(訓要十條) 중에도 팔관회의 중요성을 언급하였다. 성종(成宗)때를 제외하고는 연등회(燃燈會)와 함께 국가의 이대의식(二大儀式)이었다. 이 팔관회를 베풀 때 차를 이용하였다. 연등회(燃燈會)는 고려시대에 성행한 봄철의 불교 행사였다. 등불을 밝혀 다보(茶菓)를 베풀고, 음악과 춤으로 임금과 신하가 함께 즐기며, 부처님을 즐겁게 하여 국가와 왕실의 태평(太平)을 빌었다. 연등회는 신라시대부터 있었으리라 추측되나, 고려에 이르러 국가의 중요의식이 되었다. 고려 태조가 훈요십조(訓要十條) 속에서 『짐의 지원(至願)하는 바는 연등과 팔관회(八關會)에 있다.』고 한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고려시대를 통하여 연등회는 겨울의 팔관회와 더불어 중요한 연중행사 였으며, 팔관회가 왕도(王都)에서만 행하여진 것과 달리 연등회는 시골 마을에 이르까지 전국적으로 거행되었었다. 연등회는 원래 2월에 행하던 것을 의종(毅宗)때부터 정월 보름에 행하였다. 성종(成宗·982) 때에는 유학도(儒學徒)들의 반대로 일시 중단된 일도 있으나 현종(顯宗·1010년) 원년(元年) 2월에 다시 행하게 되었었다. 공민왕(恭愍王·352년) 4월 8일에 궁중에서 연등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조 시대에 와서도 4월 8일에 연등회가 있었다. 연등회 때는 대회(大會)가 있을 때만 진다(進茶)가 있었고, 팔관회(八關會)때는 소회(小會)와 대회(大會)일에 다같이 이 예(禮)가 있었다. 진다(進茶)란 주과(酒菓)를 올리기 전에 임금이 차(茶)를 명(命)하면 옆의 신하(臣下)가 차를 먼저 올리는 것을 밀한다. 고려사(高麗史) 69, 예(禮) 11, 상원연등회의조(上元燃燈會儀條)에 자상한 기록이 있다. 임금이 시신(侍臣)에게 진다(進茶)하라 명(命)하면 집례관(執禮官)이 전(殿)을 향하여 국궁 재배(再拜)하며 차(茶)를 올린다. 어주(御酒)를 올리고 수라(食)를 올릴 때 집례관이 거행(擧行)하던 식(式)과 같은 것이다. 이때 임금께서 반드시 태자(太子)이하 시신제관(侍臣諸官)에게 차(茶)를 하사(下賜)하는게 정례(定例)가 되어 있었다. 이렇게 차가 태자(太子)이하 시신(侍臣)에게 이르게 되면, 집례관이 배례(拜禮)를 청(請)한다. 그러면 태자(太子)이하 모두가 임금이 주시는 차(茶)를 마시고, 끝나면 읍(揖)하고 있다. 주식(酒食) 때도 그 예식(禮式)은 이와 비슷하다. 그리고 고려사(高麗史) 67, 예(禮) 9, 책왕자왕희의(冊王子王姬儀)에 보면 왕자(王子)를 책봉할 때도 차(茶)를 이용하였음이 나타나 있다.
주인(主人)과 나그네(客)가 서로 읍(揖)하고 자리에 앉는다. 진다(進茶)의 홀에 따라 술이 나온다. 집례관이 주인과 객의 손을 잡아 각기의 방석에 인도(引導)한다. 주인이 객에게 술을 권한다. 객은 일단 사양한다. 주인이 권하기를 세 번, 객은 사양치 못하고 술을 든다. 재배(再拜)의 홀이 불려지면 각기 비로소 자리에 앉는다. 진다(進茶)한다.
공주(公主)가 출가할 때에도 다례(茶禮)를 베풀었다.
이렇게 차는 엄숙히 의식화(儀式化)되어 생활 깊숙이 침투하였다.
궁중(宮中)에서는 다감(茶監)이란 관청도 생겼다. 그리고 신하(臣下)가 죽었을 때 차(茶)를 하사했다. 성종(成宗)에게 차(茶)를 갈아 부처님에게 공양하는 일을 저지하는 상소를 올렸던 신하 최승노(崔承老)가 성종(成宗) 8년에 죽었다. 임금은 압원차(臘原茶) 2백갑과 대차 열근을 하사(下賜)하였다. 그리고 조공(朝貢)을 바치는데 차(茶)가 필수적인 항목이 되었다. 을사년(乙巳年·1305년)에 홍군상이 원(元) 나라로 돌아 가게 되자 장군 홍세를 같이 딸려 보내여 원(元)에 가서 향(香)과 차(茶)와 모과를 바치게 하였다. 거란국지에는 뇌환차(臘丸茶)가 신라에서 보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정종(靖宗) 4년(1038년)에는 거란에 뇌원차(臘原茶)를 보냈다. 이듬해 7월 김원충이 거란에서 돌아올 때 뇌환차 보내 주기를 바라는 것을 상주하였다. 고려에서 뇌환차는 성종(成宗) 8년부터 문종(文宗) 3년 사이 약 70년 동안 만들어졌다. 임금이 신하(臣下)에게 내리는 선물로 차(茶)를 많이 이용하였다.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에 대각국사가 왕이 내려 주신 차와 약을 고맙게 받고 사례하는 상소문이 보인다.
신승 의천(義天·1055∼1101)은 올리나이다.
이 달 13일에 중사(中使)가 와서 칙지(勅旨)를 받들어 전하였습니다. 성자께서 특히 어다(御茶) 20각(角)과 약 일은(一銀)을 내리시고, 이제 면류관(冕旒冠)을 드리우시고……, 특히 거룩한 사랑을 입었사온데 부드러운 싹(茶)과 신령스런 약은……. 이자현(李資玄·1061∼1125)은 고려예종때의 대학자로서 유교와 불교에 관한 저술을 많이 했다. 성승을 지내다 번거러와서 벼슬을 버리고 강원도 춘성군 청평산 청평사(淸平寺)에 들어갔다. 조주(趙州) 스님의 선맥(禪 )을 더듬으며 나날을 보냈다. 예종이 서울에 행차하였을때 이자현이 있는 곳을 알고 사신(使臣)을 시켜 차(茶)와 약(藥)을 보냈다. 이자현은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서울에 나가 왕에게 차(茶)를 달여 올렸다. 그리고 왕과 왕후에게 청정무구(淸淨無 )한 경지에서 차를 나누시도록 진언하였다.
참고 삼아 고려사(高麗史) 예부(禮部)를 들추어 보면 98가지 의식 가운데 차를 내어야 하는 의식이 무려 11차례이다.
경영전(景靈殿)에서 선왕(先王)을 위하여 차(茶)를 올렸으며,
왕자(王子)를 책봉할 때, 왕자(王子)가 탄생했을 때, 공주(公主)가 탄생했을 때, 공주(公主)가 시집갈 때, 고관(高官) 회의할 때, 대관전에서 군신(君臣)이 회의할 때, 북조(北朝)에서 사신이 왔을 때, 신하(臣下)가 죽었을 때, 감형(減刑)할 때에 차를 이용하였다. 고려 사회는 불교(佛敎)가 국가의 종교였으므로 자연히 불교 문화의 영향은 지대하였다. 고려 성종(成宗·982∼997)은 만승(萬乘)의 지존(至尊)으로 국가의 안녕과 백성의 편안을 위해 스스로 불전(佛前)에 나아가 공덕(功德) 쌓기를 원하여 공덕제(功德濟)를 베풀었고, 부처님께 올리는 불공용(佛供用) 차(茶)를 만들 때 손수 풀매를 잡고 갈았다.
이 광경을 본 신하(臣下) 최승노(崔承老)는 극구 만류하는 글을 임금에게 올렸다. 최승노는 최치원의 직계 후손으로 고려 태조(太祖)의 총애를 받으며 자라 태조의 뒤를 이은 혜종(惠宗)을 비롯하여 정종(正宗), 광종(光宗)을 거쳐 육대왕(六大王)인 성종(成宗)에 이르기까지 다섯 임금을 모신 국가의 원로(元老) 중신(重臣) 이었다. 최승노가 성종 임금에게 상제(上提)한 시무(始務) 28조 가운데 차(茶)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왕은 친(親)히 공덕(功德)을 쌓으려고 손수 차(茶)나 보리를 갈아 정성(精誠)을 다한다고 듣고 있는데, 부질없는 일로 성체(聖體)를 해칠까 두려울 뿐이며, 이런 공덕 쌓는 일은 광종(光宗) 때부터 있는 일인즉, 이것은 불교에서 가르치는 인과(因果)응보(應報)를 그대로 믿는 데서 오는 부질없는 일인 줄 아옵니다. 이렇게 왕이 직접 차(茶)를 풀매에서 가는 일을 못하도록 상소 하였다. 이런 사실을 보면 차(茶)가 우리의 생활에 얼마나 깊숙이 젖어 있는가를 직감할 수 있다.
고려시대 차문화(茶文化)를 이해하는데 간접적으로 도움이 될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40권)이 있다. 흔히 줄여서 고려도경(高麗圖經)이라 불리운다. 송(宋)나라 휘종(徽宗)이 파견한 고려조의 국신사(國信使) 일행 중에 제할인선예물관(提轄人船禮物官)으로 고려 송도에 다녀간 서긍(徐兢·1091∼1153)이 있었다. 고려에서 약 1개월 머무는 동안에 보고 듣고 한 것을 너무 자상히 기록하였다. 고려 인종(仁宗) 2년(1124년) 이다. 차(茶)에 관한 기록은 32권 기명(器皿)편에 다조라 하여 조금 언급되어 있다. 『토산차(土産茶)는 쓰고 떫어 입에 넣을 수 없다』고 평(評)하였다. 이해가 쉽게 가지 않는다. 그때보다 앞서 정종(靖宗) 4년(1038년), 거란에 뇌원차(腦原茶)를 보냈는데 더 보내달라는 부탁이 왔다. 차가 나쁘면 왜 더 보내달라고 하였겠는가. 『오직 중국의 납다(蠟茶)와 용봉사단(龍鳳賜團)을 귀히 여긴다. 하사해 준 것 이외에 상인(商人)들이 가져다 판다.』 사대주의(事大主義)의 우월감을 엿볼 수 있다. 스스로의 것만 좋고 귀한 물건으로 여긴다. 납다(蠟茶)는 중국 건주(建州)에서 생산되는 차로 일명 납면다(蠟面茶)라고도 불리는데 두 가지 설이 있으니, 차잎을 떡같이 굳혀서 그 표면에 밀을 발랐다 해서 납차 또는 납면차라고 한다는 것이 그 하나이고, 이 차를 끓는 물에 넣으면 젖 같은 기름이 뜨는데 그것이 녹인 밀같다 해서 납차라고 한다는 것이 다른 한가지 설이다. 용봉사단(龍鳳賜團)은 북송(北宋) 황제(皇帝)가 내린 용봉다(龍鳳茶)이다. 차잎을 둥그런 떡덩어리같이 만들어 용과 봉새의 무늬를 새긴 틀에 넣어 그 무늬를 찍어낸 것으로, 송(宋)의 인종(仁宗) 때부터 좋은 차의 질을 확보하기 위하여 궁중의 북원(北苑)에서 제조시켰다. 당시에는 최상품의 차로 뽑혔다. 반면에 그 당시 고려에서 자순차(紫筍茶)와 화전차(火煎茶), 유다(儒茶)등의 좋은 차도 있었다. 『차(茶) 마시기를 좋아하여 더욱 차의 제구를 만든다. 금화오잔(金花烏盞 : 금색꽃 무늬가 있는 검은 색의 찻잔), 비색소구(翡色小 : 비취색을 낸 자기로 만든 차 마시는 작은 그릇·키가 낮은 사발 형태의 것으로, 고대에는 그런 그릇으로 차를 마셨다. 일명 고려청자라 부른다) 은로탕정(銀爐湯鼎 : 은으로 만든 화로와 찻물을 끓이는 세 발이 달린 솥)은 다 중국 제도를 흉내 낸 것들이다.』 이런 기록을 미루어 보아 차 마시는 데는 그 도구가 귀하고 값진 물건들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차회(茶會 : 茶禮)때의 모습도 보인다. 『무릇 연회 때면 뜰 가운데서 차(茶)를 끓여서 은하(銀荷 : 은으로 만든 연잎 형상을 한 작은 쟁반)로 덮어가지고 천천히 걸어와서 내놓는다. 그리고 찬자(贊者)가 '차를 다 돌렸고'하고 말한 뒤에야 마실 수 있으므로 으례 냉차(冷茶)부터 마시기 마련이다』 관사 안에는 홍조를 놓고 그 위에다 차의 제구를 두루 진열한 후 홍사건(紅紗巾 : 붉은 색의 사포로 만든 상보)으로 덮는다. 매일 세 차례씩 내는 차를 맛보게 되는데, 뒤이어 또 탕(湯·끓인물)을 낸다. 고려인은 탕을 약(藥)이라고 하는데 사신들이 그것을 다 마시는 것을 보면 반드시 기뻐하고, 혹 다 마셔내지 못하면 자기를 깔본다고 생각하면서 불쾌해져서 가버리기 때문에 늘 억지로 그것을 마셨다. 이로 미루어 보아 고려 궁중의 차 마시는 풍속을 알 수가 있고 의례적으로 다례(茶禮)에 참석한 외국 사신들의 속마음 또한 불편스러웠음을 느낄 수 있다. 서긍(徐兢)이 길을 가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그에게 차를 마시고 가라 하여 상상외로 접대받은 일이 많다고 술회하고 있다. 일반 서민사회에서도 차를 많이 이용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서긍이 어느 관리(官人)의 초대(招待)를 받아 갔을 때 모습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일행(一行)이 열(列)을 지어 앉은 다음, 주인(主人)의 아들이 다과(茶菓)를 올렸고, 예쁜 젊은이가 찻잔(茶盞)을 돌려 놓고 왼손에 차관을 들고, 바른손에는 차선(茶 )을 끌었다. 윗자리부터 차(茶)를 따르고 아랫자리에 이르는 동안 조심하여 난잡(亂雜)함이 없었다. 일반 가정에서 손님이 왔을 때 차를 대접하는 모습이다. 아마 이때 사용했던 차는 말차(沫茶)인 듯하다. 송나라에서도 차를 보내 왔음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입조(入朝·송나라에 조회하러 가는 것)했던 진공사(進貢使) 자량(資諒)이, 계향(桂香), 어주(御酒), 용봉(龍鳳·차이름), 명단(茗團·차이름), 진과(珍菓), 보혈(寶血)을 가지고 돌아왔기로.』 그 당시 차는 국제적 위치에서 좋은 선물거리였나 보다. 고려도경 26권 관회(館會)에도 그 기록이 보인다. 『사방의 좌석에는 보완(寶玩·값나가는 노리개), 고기(古器·골동품), 법서(法書·글씨본), 명화(名畵), 이향(異香·보기드문 좋은 향), 기명(奇茗·진기한 좋은차)을 늘어 놓는데….』 고려도경 27권 향림정(香林亭)에서 일상생활의 차 마시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정사와 부사는 여가 있는 날에는 언제나 상절의 관속들이 차(茶)를 끓이고 그 위에서 바둑을 두며 종일토록 담소하니, 이는 마음과 눈을 유쾌하게 하고 무더위를 물리치는 방편이었다.』 관리가 술(酒)로써 세월을 보냈다면 그 정신이 흩어졌을 터인데 차(茶)로써 몸과 마음의 수양을 삼았다니 슬기로운 백성들의 지도자로서 의당한 일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고려의 차(茶)가 성행함으로 그 차를 만드는 일반민의 노고는 가혹한 시련이었다. 지리산(智異山) 주변의 주민들이 차를 만들어 서울까지 옮겨 가야 하는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규보(李奎報)의 시(詩)에 다음 처럼 나타나 있다. 이야말로 백성들의 기름과 살이니 뭇 사람을 저미고 베어서 얻은 것. 어떻게 보면 서민의 원한의 대상이 된 차(茶)이기도 했다.
차가 생산될 때가 되면 관리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몰아세워 차의 수확에 혈안이 되어 그 주구(誅求)하는 모습은 처참하였다. 차잎을 따기 위해 맹수의 위험 속에서 헤매야 하며 차를 팔고 사는 상인들의 농간에 시달려야 했다. 이를테면 차는 현금을 구고도 구입하기 힘들었다. 이런 정황으로 차문화의 발전은 있을 수 없었다. 6. 이조(李朝)시대의 차생활(茶生活)
이씨왕조(李氏王朝)의 출현은 조선왕조(朝鮮王朝)를 낳았는데 그 국가 건설의 지도적 이념으로 주자학(朱子學)을 택했다.
주자학은 중국 송(宋代)의 학문이었다. 주자(朱子)가 완성했으므로 주자학이라 한다. 주자의 학설은 주돈이(周敦 ), 장횡거(張橫渠),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 나종언(羅從彦)등이 학성를 계승하여 대성했다. 만물의 근원을 이(理), 음양(陰陽)오행(五行)을 기(氣)라 하여, 이(理)는 만물에 성(性)을 주며 기(氣)는 만물에 형(形)을 준다고 하였다. 사람의 성(性)에 있어서는 이(理)는 본연(本然)의 성(性), 기(氣)는 기질(氣質)의 성(性)이 된다. 대학(大學)의 명덕(明德)은 이 본연의 성으로 허령불매(虛靈不昧)하여 중리(衆理)를 갖추어 만사(萬事)에 응하는 것인데, 기질의 성에 있어서는 선악(善惡)의 구별이 있고, 완전한 인격을 가지려면 거경(居敬)과 궁리(窮理)가 필요하게 된다. 경(敬)에 거(居) 한다는 것은 기질(氣質)의 성(性)에 생하는 인욕(人欲)을 끊고, 외부의 유혹을 물리쳐 마음을 항상 조용히 할 것이다. 이(理)를 구명한다는 것은 만물의 이를 구명한다는 것이나 이는 내재(內在)하여 있기 때문에 객관적 사물(事物)에 대하여 그 이(理)를 구명해야 하는데 이것이 격물(格物)이며, 격물에 따라 우리의 지식을 완전히 한다. 이것을 치지(致知)라 한다. 그러므로 성현(聖賢)의 책을 읽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주자는 널리 경전(經典)을 연구 했으나 두 정자(程子)의 설에 쫓아 특히 사서(四書)를 중요시 하여서 주석(註釋)을 가했다.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지어 군신(君臣)의 명분(名分)과 왕조(王朝)의 정윤(正閏)을 바로 잡았다. 우리나라의 주자학은 고려 때 안향(安珦·1243∼1306)이 최초로 받아들였다. 대표적 학자로 이황(李滉), 이이(李珥)등이 있다. 주자학이 건국이념이므로 주자적 가례(家禮)의 영향이 또한 지대하였다. 가례란 주로 관(冠), 혼(婚), 상(喪), 제(祭)의 사례(四禮)에 관한 예제(禮制)이다. 국가 통치의 근본 이념이므로 마땅히 이의 준수한 실천을 강요하였다. 그리하여 불교적 헌다식(獻茶式)도 주자(朱子)의 가례(家禮)에 응용해 버렸다 하여 민속(民俗) 깊숙이 다례(茶禮)를 한다. 처음은 남혼여취(男婚女娶)의 납폐(納幣)를 할 때에 양가(兩家)의 부모 형제들이 차(茶)로써 간단히 예를 한다. 혼인이 결정되면 봉차(封茶)라 하여 차를 봉하여 보냄으로 결혼의 신표(信表)를 삼았다. 그리하여 결혼식을 올린 뒤에 신부가 시가(媤家)로 가서 처음 그 시가댁의 선영을 모신 사당(祠堂)을 배알할 때도 차례(茶禮)를 올렸다. 신부는 친가에서 준비해온 다과(茶菓), 다식(茶食)등의 음식을 차려 놓고 차(茶)를 달여 올린다. 이때의 하나하나 동작을 예절에 맞게 법도 있게 행할 때 신부는 예의범절이 준수한 새댁으로 인정받게 된다. 시댁에 처음 참예(參詣)할 때 차례를 하는 것은 시가댁 선영의 제사(祭祀)는 물론 시부모를 잘 섬기며, 그 가문(家門)을 이어 가는데 아들 두고 딸 두면서 시고, 쓰고, 짜고, 떫고, 단 일에 흔들림이 없이 인내하며 감내하겠다는 서원인 것이다. 차나무는 옮겨 심으면 죽는다는 징크스가 있어, 한 가문에서 차나무처럼 사시사철 푸르게 살아보겠다는 의지가 곁들인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 불교가 역사 속의 검은 그림자 속으로 침잠함과 함께 자연히 차(茶) 역시 생활에서 멀어져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고려시대에 있었던 팔관회, 연등회 등의 국가적 행사는 없어지고 다례(茶禮)란 이름으로 명맥만 남게 되었다. 『다방(茶房)이란 궁사를 이조(吏曹)에 소속시켜 이원(吏員)에게 별감(別鑑), 행수(行首), 부목(部目) 등의 직책으로 나눴고, 종팔품(從八品)의 벼슬을 주었으며, 별감은 좌우번참(左右番參)이라 하여 삼개월에 한번씩 자리를 바꾸기도 하였다. 다방에 근무하는 이를 다모(茶母), 남다모(男茶母)라 하였다. 다방 소속이 아닌 일반관사(一般官司)에서 차(茶), 술(酒)등을 취급하는 잡노동자를 용인(庸人)이라 불렀다.』 이렇게 차에 대한 역사적 퇴장은 많은 의미를 가지게 한다. 가례(家禮)에도 헌다법(獻茶法)이 있다. 이때는 차를 사용하지 않고 술(酒)을 차 대신 이용하였다. 그러나 설날이나 추석같은 명절날의 다례(茶禮)는 민속(民俗)으로 우리의 간접생활에 이웃하였다. 민족의 비극, 임진왜란 당시 명(明)나라의 장수 양호(楊鎬)가 선조대왕(宣祖大王)에게 남원(南原)의 토산차(土産茶) 두 봉지를 드렸다. 『이 차는 남원에서 생산된 것인데 그 품질이 좋습니다. 그런데 왜 귀국인(貴國人)은 차를 들지 않습니까?』하고 물으니 왕이 양호에게 『조선 습속이 본시 차를 마시지 않소.』하였다. 이런상황을 보면 궁중에서 차가 멀어졌다는 반증이 된다. 그런데 양호는 『이 차를 요동(遼東)에 가져다가 팔면 열근(十斤)에 은일전(銀一錢)을 받겠으니 이로써 생활 할 수 있습니다.』 양호는 다시 계속하여 말하되 『서번인(西蕃人)이 고유(膏油)를 먹기 때문에 하루라도 차를 마시지 않으면 죽습니다. 중국은 차를 팔아서 일년에도 만여필(萬餘匹)의 전마(戰馬)를 남깁니다.』 선조(宣祖)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육안다(六安茶·중국의 차)의 종류가 아니고 작설차(鵲舌茶)요.』 양호가 아뢰기를 『맞습니다. 조선인(朝鮮人)이 인삼차를 마시나 이것은 차가 아니고 탕(湯)이외다. 인삼탕을 마시면 속이 번열(煩熱)하여 차(茶)를 마시는 것 같이 상쾌(爽快)하지 못하외다.』 양호가 계속하여 『귀국인(貴國人)이 차를 마시면 마음이 열리고 기운(氣運)이 나서 백사(白事)를 다 잘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 선조께서 대신(大臣)과 비변사유사당상(備邊司有司堂上)을 불러들여 하교(下敎)하되 『양대인(楊大人)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품이 느슨하여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한다고 접견(接見)할 때마다 매양 말하더니 전일에는 나에게 남원차(南原茶) 두봉지를 올리며 하는 말이 귀국에 좋은 차가 생산되는데 왜 취채하여 음용(飮用)으로 쓰지 않고 팔지도 않는가? 귀국의 군신(君臣)이 차를 마시면 기운이 나서 일을 잘 할 수 있다고 하니 이는 우리를 풍자(諷刺) 함이지요?』 하고 말하였다. 이때 대신(大臣) 가운데 정탁(鄭琢)이 아뢰기를 『이는 참으로 모욕하는 말입니다. 게으름이 어찌 차를 마신다고 치료될 수 있습니까?』하였다. 이렇게 하여 차문화 중흥의 계기가 올 뻔하다 돼먹지 못한 간신배의 한마디에 역사의 뒤안길로 다시 접어 들게 되었다. 그렇다고 역사(歷史) 전체가 무관심하지는 않았다.
차(茶)에 대한 세금은 차(茶)로 거두어 들였다. 차세(茶稅)의 악습은 그야말로 백성의 피와 쌀을 요구하였던 모양이었다.
이조 초기의 학자로서 성종(成宗)때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냈으며 야은(冶隱)의 학통(學統)을 이어받아 수백명의 제자를 기렀던 점필제( 畢齊) 김종직(金宗直·1431∼1492) 선생은 젊었을 당시 함양군수(咸陽郡守)로 갔다. 성종(成宗) 2년(1471년)이었다. 그곳은 옛날부터 차의 산지였다. 그러나 차가 아주 없었다. 점필제선생은 민폐를 덜기 위하여 차나무를 심고 가꾸었다. 차의 생산이 없는 곳에서 차를 바쳐야 하는 세금은 있으니 민페가 극심했던 것이다. 함양 군민은 해마다 차를 바쳐야(세금으로) 하므로 전라도(全羅道)까지 가서 차를 구입하여 와서 세금으로 바쳤다. 차의 가격이 너무 높았다. 쌀 한말과 차 한홉이 교환 되었다. 이런 처절한 상황을 익히 알고 있던 점필제 선생은 부임하면서 군민에게 차를 받지 않고 관청에서 구걸하여 중앙에 바쳤다. 점필제 선생은 삼국사(三國史)를 읽다가 신라시대때 차 종자를 당나라로부터 가져와서 지리산(智異山)에 심었다는 것을 알고 어느 노부(老父)에게 물어서 엄천사(嚴川寺) 북쪽의 대나무 밭 속에 차나무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확인해 보았다. 말대로 그곳에는 차나무가 있었다. 점필제 선생은 기쁜 마음으로 그곳을 차밭(茶園)으로 만들었다. 그 뒤 4, 5년이 지나서 자체 생산으로 상공(上供)할 수 있었다. 인조(仁祖) 5년(1627년), 후금(後金-뒤의 淸)의 침입으로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화해한 다음 조선은 후금에게 조공(朝貢)을 바쳐야 했다. 그때(1627년, 1629년, 1636년) 우리나라에서는 작설차(雀舌茶)와 천지차(天地茶) 50봉씩을 예물로 바쳐야 했다. 나만갑(羅萬甲)의 유한록(遺恨錄)에 비친 병차호란(丙子胡亂·1636년)때의 일이다. 병자호란은 만주족이 중국을 지배하기 위하여 우리나라를 먼저 쳐들어 온 전쟁이고 전쟁에는 부산물이 있기 마련이어서 전쟁에 졌으므로 청(淸)나라에서 요구해 온 물품 가운데 엽차(葉茶) 2백담도 바쳐야 했다. 1담의 무게는 역군 한 사람이 질 수 있는 등짐의 무게이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분량인가. 이 차의 조공이 칠년간 계속되다가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돌아오던 1645년에야 면제되었다. 그 많은 차를 청나라에 바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겠는가? 한편 임진왜란(壬辰倭亂) 뒤 수교국사(修交國使)로 일본에 간 사명(泗冥)스님에게는 어린동자(童子)가 시중을 들었다. 사명스님의 다각(茶角)이었다. 그 어린 동자가 사명스님의 차 드시는 모습을 흠앙하여 전하였는데 오늘날 일본에 남은 사명다도(泗冥茶道)가 바로 그것이었다. 사명스님이 지은 그의 문집(文集)을 보면 여섯편의 탁월한 차에 관한 시(詩)가 실려 있다. 그러나 이조 왕실에서도 전혀 차(茶)를 이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외국에서 사신(使臣)들이 왔을 때 대접하는 물품(物品) 가운데는 필히 차도 끼어 있었다. 신숙주(申叔舟·1417∼1475)는 성종(成宗) 2년(1471)에 영의정을 지냈다. 그의 저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의 외국사신(外國使臣) 접대 절차편에서 다음의 기록을 엿볼 수 있다. 『국왕의 사신은 새벽참과 하루 세끼의 식품(食品)은 삼포(三浦) 때와 같다. 그냥 받기를 자원한다면 새벽참만 익힌 것으로 바치지만 그 나머지 세끼의 식품은 5일에 한차례씩 도급으로 준다. 정관 이상은 매 한 사람마다 중미(中米) 두 말, 황두(黃豆) 엿 말, 진맥말(眞麥末) 일곱 되, 마른 생선 150개, 조기 5마리, 청어 20마리, 새우젓 세 홉, 진어(眞魚)가 두 마리, 생선 다서 마리, 소금 다서 홉, 참기름 두 홉, 간장 석 되, 초가 한되 다석 홉, 미역 열 냥, 겨자 두 홉, 차(茶) 한 홉, 스님에게는 고기젓을 제…….』
『사신들이 돌아가는 길에도 식품을 준다. 국왕의 사신과 큰 두목의 사신들은 다같이 세 번씩 이요, 구주절도사의 사신과 특송은 다같이 두 번씩 인데 매양 술, 떡, 과실, 채소, 해채(海菜), 마른 버섯, 죽순, 두부, (진맥말), 꿀, 건어, 생선, 젓갈, 겨자, 오미자, 차, 기름, 간장, 식초, 등과 같은 물건을 급여하되…….』
무인(武人)으로 유명한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차(茶)를 아꼈다는 사실은 참 특이하다. 그의 시(詩)에도 차에 관한 것이 있다.
불교와 함께 생명을 같이 하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차문화가 이조(李祖)에 와서는 국가 정책상 유교가 득세했으므로 차역시 자연 산간(山間)의 스님네의 벗이 되었다.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문헌으로 차에 대한 시(詩)는 주로 스님들의 선게(禪偈) 속에서 발견될 뿐이다. 차의 명맥(命 )을 스님들의 전유물같이 지켜 오다가 이조말엽 해남(海南) 두륜산(頭輪山)의 초의(草衣)스님이 다신전(茶神典)과 동다송(東茶頌)을 지었다. 초의스님을 중심하여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신위(申偉), 홍현주(洪顯周), 김정희(金正喜)등도 차에 관심을 보였다. 다산은 그의 호를 다산(茶山)이라 할 정도로 차를 아꼈고 차에 관한 동다기(東茶記)라는 저서도 펴냈다. 불행히도 아직 발견되지 않아 유감스럽다. 그래도 한국의 차 문화에 한줄기 서광처럼 빛이 서리기 시작한 것은 서유거(徐有渠·1764∼1845)선생이 만년에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라는 차에 대한 불멸의 저서를 남겼기 때문이다. 임원십육지는 1835년경에 저술된 것 같고 우리나라에서 나온차의 저서로는 제일 방대한 양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서유거 선생에 대하여 자상한 기록이 없어 매우 서운하다. 초의스님은 동다송, 다신전을 1840년경에 저술하였다. 해거도인(海居道人)의 부탁으로 이루어졌다. 아무튼 그 당시 그러한 책이 나왔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차문화를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사다리격이다. 범해(梵海·1820-1896)스님 역시 해남 대흥사 스님이었다. 그분께서 다약설(茶藥說)을 저술하였다. 다약설은 차의 약리 효능을 세밀히 기록한 책이다. 그리고 보면 면면히 이어온 이천여년의 차문화인데 뒤늦게나마 위에서 언급한 몇권의 책이 저술되어 우리는 비로소 우리 차문화의 맥락을 찾을 수가 있었으니 그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제 5 절 차의 정신
한잔의 차, 그것은 인간의 영원한 벗이다.
인간의 일상 생활엔 기쁨이나 즐거움보다 슬픔과 괴로움이 많기 마련인 것 같다. 저 맑은 하늘에도 구름이 흐르기 마련인 듯 우리 본래(本來)의 깨끗하고 티없는 청정본연(淸淨本然)의 마음 자리에도 번뇌(煩惱)란 구름이 있기 마련이다. 번뇌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흔히 백팔번뇌(百八煩惱)라 하지만 더 한량이 없다. 또한 번뇌가 일어날 적마다 괴로움은 있기 마련이다. 번뇌란 인간의 근본 욕망 위에 으레 있기 마련이다. 한데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근본 욕망이 없을 수 없다. 있는게 의당하고 당연하다. 그 욕망의 충족을 위한 삶이 인간사가 아닐까. 한잔의 차. 그것은 우리들의 번뇌를, 괴로움을, 안타까움을, 슬픔을 달랠 수 있는 기호 음식이다. 마음이 울적할 때 파아란 한잔의 녹색차를 앞에 두고 명상에 잠겨 보라. 녹색차에서 엷디 엷게 풍겨지는 진향(眞香)에 스스로 닫혔던 마음의 문이 열려지고 생각이 깊이 트여질 게다. 그러면 우울한 감정이 엷은 진향에 씻어지지 않을 수 없지 않는가, 그리고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어금니 사이에서 담담히 아주 고담스럽게 그 맛이 풍겨 온다. 그 차맛에 때묻은 감정을 씻어 버릴 수 있을 게다. 울적한 마음을 상쾌히 할 수 있을 거다. 일찍이 다경(茶經)을 쓴바 있는 육우(陸羽)도 그의 저서에서 『속이 답답하고 머리가 아프고 눈이 찝찝하고 팔 다리가 번거롭고 백절이 펴지지 아니하는 자는 차를 네댓 번만 마셔도 제호와 감로로 더불어 세력을 다툰다.』고 하였다. 『속이 답답하고』란 말은 무언가 생각한 바가, 뜻한 일이 제대로 되지 않으므로 가슴이 막혔을 때 이다. 『머리가 아프고』란 말 역시 일이 잘 안 되고 뜻이 형통되지 않을 때의 증상이다. 우리의 몸 가운데 어느 곳인가 막혀 있으면 속이 답답하고 머리가 아프기 마련이다. 그럴 때 마시는 한잔의 차는 몸을 가쁜하게 하는 청량제이다. 송(宋)의 휘종황제 역시 그의 저서 대관다론(大觀茶論)에서 『산천(山川)의 신령스런 기운이 집중되어 있어 가슴을 열며 체기(滯氣)를 씻으며 맑고 화창한 기분을 내게 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과 어린 아이까지 안다.』라고 서술하였다. 『가슴을 열 수 있는 차』. 그게 바로 작설차이다. 신농씨(神農氏)가 식경(食經)에서, 『차를 오랫동안 복용한 사람은 힘도 있고 뜻도 기쁘다.』고 하였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을 상쾌히 할 수 있는 기호 음식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할 일이 아닐 수 없다. 한잔의 차, 그것은 단순한 차이다. 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차에다 종교적 의미를 부여했을 때 성스런 부처님 앞에 바쳐질 수 있으며, 천지신명에게 올릴 수 있는 깨끗한 제물이 될 수가 있다. 그리고 선조(先祖)의 유훈을 기리고 싶을 때도 차례(茶禮)를 올릴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인간사란 또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 비롯되지 않는가? 그런 중대한 만남과 신표로 우리는 흔히 차(茶)를 쓰기도 한다. 예로부터 남(男)과 여(女)의 만남은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일이요, 거룩한 경사로 여겼다. 그 만남을 우리네는 결혼이라 부른다. 그 결혼에 있어서 신표(信表)로 보내는 예물을 봉채를 보낸다고 했다. 모든 일은 그 시대상황에 따라 바뀌기 마련인 듯 봉채 역시 원래는 봉채가 아니라 봉다(封茶)이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차(茶)를 봉하여 보낸다는 뜻이다. 차란 다섯가지 맛(五味)이 있다. 즉 쓰고, 떫고, 시고, 짜고, 단 맛이다. 그것은 또 우리네 인생의 맛이다. 인간사가 이 오미(五味)에 있다고 본 옛 어른들은 어차피 사람이 한 세상 살아 가자면 그 차의 오미를 극복해야 하니 차를 달여 사당(祠堂)에 제사 올리는 의미 역시 거기에 있다. 그리고 차나무는 옮겨 심으면 죽는다고 했다. 그러므로 한 가문에서 한 세상을 끝낼지언정 다른 가문으로 재가할 수 없다는 여인으로 상징되는 의미도 내포한다.
이토록 한 잔의 차에다 우리는 인생의 깊은 의미를 부여하였다. 참으로 거룩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일상 생활에 틈이 있거나, 마음 무거운 일이 있거나, 반가운 친구가 찾아 왔을 때 가볍게 『차나 한 잔 하자.』고 한다. 한잔의 차, 그것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무방한 기호 음식이다. 그러나 있어야 할 자리에는 의당히 있어야 하지 않는가? 답답할 때 어디서 몰려오는 한줄기 맑은 바람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시원하게 하듯 한잔의 차 역시 우리의 마음을 명쾌하게 하는 가벼운 음료이다. 이 세상은 누구에게나 한계가 있다. 한계가 있다는 이 슬픈 사실 앞에 그 누구도 도전할 수 없어 우리를 철저히 외롭게 한다. 인생사는 이 철저한 외로움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그리하여 예술이 존재한다. 예술이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영원한 아름다운 세계의 지향이다. 그리하여 좋은 작품이란 시간에 구애가 없고 민족이나 이념에 걸림이 없이 가슴이 있는 이는 좋아하기 마련이다. 좋은 것은 누구에게나 좋기 마련이다. 그 좋다는 것 앞에서는 그 어떤 이론이 오히려 무색하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위안을 받는다. 시간과 공간에 걸림이 없는 예술을 낳기 위하여 예술인들은 생명을 건다. 아름다움, 새로운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근본 활력소가 무엇일까. 인간의 예지(叡智)이다. 이 예지를 살찌울 수 있는게 차(茶)가 아닐까. 흔히 우리들은 한국 고유문화를 거론할 때에 신라문화를 이야기 한다. 신라문화는 사실상 불교문화이다. 불교문화는 선 사상(禪思想)이 주축이 되어 있었다. (禪)을 근본적으로 뒷받침하는게 있다면 차(茶)이다. 그러면 한국의 옛 문화는 차문화가 사실상 기층(基層)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간의 절대적 외로움을 벗어나게 하는 데는 또 무엇보다도 덕(德)이 필요하다. 덕(德)이란 누구나 가지고 있다. 어느 만큼 개발하여 누리느냐가 문제이다. 덕이란 마치 산에 묻혀 있는 무한한 광맥과 같은 게 아닐까. 누구나 개발하여 쓰면 된다.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에서도 차는 『덕행(德行)이 높은 사람이 마시는 데 가장 적당하다.』라 했다. 덕행이란 누구나 행하면 된다. 마치 같은 물을 양(羊)이 먹으면 우유를 낳고, 뱀이 먹으면 (毒)을 낳듯이 덕(德)이란 마음을 밝게 쓰는 일이 아닐까. 마음이란 누구나의 가슴에 있다. 어떻게 쓰느냐가 문제이다. 마음에 구김살이 없이 바른 생각으로,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면 그게 덕(德)을 쌓는 일이 아닌가. 초의(草衣)스님은, 『차는 군자(君子)와 같아 성품(性品)이 삿됨이 없다.』고 하였다. 덕(德) 역시 마음에 삿된 기운이 없어야 한다. 신라의 충담(忠談)스님은 중양절(重陽節 : 3월 3일, 9월 9일)마다 남산 삼화령 미륵세존에게 차를 달여 올렸다. 어느 해 미륵세존께 차 공양을 올리고 돌아오는 길에 경덕왕(景德王)과 인연이 있어 함께 자리하였다. 그때 왕의 청으로 차를 한잔 올렸는데 차맛과 그 분위기에 젖은 왕은 충담스님에게 왕과 국민을 위하여 시(詩)를 지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하여 안민가(安民歌)가 지어졌다. 그 안민가의 끝 구절이 다음과 같이 끝난다. 『군(君)답게, 신(臣)답게, 민(民)답게 할지면 나라가 태평하리.』 이 얼마나 명쾌한 이야기인가. 어느 신하가 임금 앞에서 이토록 지순(至純)한 말을 하랴. 이토록 삭된 마음이 없는 지극히 깨끗한 마음에서 울려나온 낭랑한 목소리는 임금의 마음을 감동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았을까? 여기서 차(茶)정신의 본질(本質)을 보는 것 같다. 신라의 신문왕(神文王)은 어느 날 설총과 한자리에 앉았다. 신문왕이 스스로를 위하여 좋은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설총에게 부탁하였다. 그때 설총은 우화적인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리고, 『고량진미로 배를 부르게 하고 차와 술로써 정신을 맑게 하라』고 권유한다. 예로부터 술(酒)은 인간의 마음을 흐리게 하지만 차(茶)는 사람의 마음을 맑게 한다. 그리하여 다산(茶山)은 일찍이 우리 국민에게 경고하기를, 『술을 마시는 민족은 망하고, 차를 먹는 민족은 흥한다.』고 소리 높이 외쳤다. 흔히 말하기를 신라나 고려의 문화를 차의 문화(불교문화)라고 일렀고, 이조(李朝)의 문화를 술(酒)의 문화라고 했다. 한잔의 차. 그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하잘 것 없는 음식이다. 그러나 생각의 저울대를 정해 놓기에 따라 달라진다. 한잔의 차로써 마음을 밝힌다면 그게 바로 차(茶)정신이 아닌까.
인간의 마음은 윈래 깨끗하였다. 티가 없었다. 때(垢)가 없었다. 번뇌(煩惱)가 없었다. 청정무구(淸淨無垢) 그대로였다. 하여 슬기로왔고 영원스러웠다. 그러나 무시이래(無始以來)로 사람들의 버릇으로 하여 마음에 때(垢)가 끼였다. 티끌이 스며들었다. 하여 번뇌로왔다. 번뇌가 있다는 것은 괴로움이 있다는 것이다. 슬픔이 있다는 것이다. 안타까움이 있다는 것이다. 마음이 흐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때를 씻어야 하지 않을까? 흐려진 마음을 흐리지 않게 하여야 하지 않는가. 흐려진 마음을 흐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한잔의 차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 깨끗한 마음, 때묻지 않은 마음은 삶(生)과 행복의 열쇠이다. 마음이 흐려져 있는 상태.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인간은 누구나 탐내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이 있다. 이것을 삼독심(三毒心)이라 한다. 이 때묻은 마음을 어떻게 하여야 깨끗이 할 수 있을까? 신앙이라면 갖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불교(佛敎)를 신앙한다면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시간 있을 적마다 염불(念佛)하고 간경(看經)하고 참선(參禪)으로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면 될 것이다. 천주교 신자라면 묵상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므로 흐트러진 마음, 때묻은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특정 종교를 가졌거나 또 가지지 않았거나 구애없이 내가 나를 다스리는 방법으로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가장 손쉬은 방법은 차(茶)를 가까이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종교라면 오히려 마음을 구속하는 여건이 많다. 무언가 강요하는게 많아 오히려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하지만 녹색차 한잔, 작설차 한잔을 손수 챙겨 허전한 마음을 달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가벼울까? 그래서 마음에 끼어 있는 외로움을 씻고, 근심스러움을 지우며, 번뇌스러운 것을 닦아내고, 삼독심(三毒心)을 지워 마음이 맑아지고 맑아져 슬기롭고 의욕에 넘치는 삶을 구가 할 수 있지 않을까. 괴로운 마음을 되돌리면 즐거운 마음이 된다. 찌푸려졌던 마음을 돌리면 구김살 없이 명랑한 마음이 된다. 흐린 마음을 돌리면 밝은 마음이 된다. 밝은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인생의 최고의 보물을 가지는 것이다. 밝은 마음엔 불행이 없다. 슬픔이 없다. 괴로움이 없다. 안타까움이 없다. 밝은 마음엔 충만한 슬기가 있다. 넘쳐나는 지혜가 있다. 넘쳐나는 자비(慈悲)가 있다. 밝은 마음은 영원하다. 언제 어느 때라도 태야(太陽)같아 밝아 구겨지지 않는다. 한잔의 차. 그 녹색 빛깔을 우리의 마음에 담아 우리의 일상 생활을 밝게 가꾸어 보자. 차나무는 사철 푸르다. 그 싱싱함을 우리의 마음에 심어 그렇게 푸르게 싱싱하게 키워보자. 어두었던 시간이 사라지고 밝고 보람스럽고 희망찬 나날이 될 게다. 제 6 절 차례(茶禮)
한잔의 녹색차, 그 가볍다면 하잘 것 없이 가벼운 차 한잔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였을 때는 우주적 진리를, 절대적 종교를, 보편적 예의를, 현실적 경제를, 일반적 위생을 느낄 수 있다.
차례(茶禮)란 차를 마시는 예의이다. 그 예의를 갖춤이 인간의 슬기로움이 아닌가. 한잔의 차를 놓고 깊은 명상에 잠겨 철학적 입장에서 우주를 넘보았을 때, 그리고 그것을 체득 하였을 때, 우리가 우주의 진리를 얻는 징검다리가 바로 내 앞의 한잔 녹색차 아니겠는가. 부처님을 우러러 한잔의 차를 올렸을 때 나와 부처님과 둘이 아닌 경지의 삼매(三昧)가 성취되었다면 한잔의 차는 얼마나 값진 효능을 나타내는가. 인간은 단순한 한 개체가 아니다. 가깝게는 위로 낳아준 선조, 부모, 옆으로 형제, 아래로 후손 이렇게 종횡으로 얽혀 있기 마련이다. 이 얽혀 있는 관계의 윤리적 균형을 지탱하는 힘이 바로 예의 아닐까. 이 예의를 나타냄에 있어 한잔의 녹색차는 아주 절실한 역할을 한다. 차는 그 담박한 성품이 현실을 느끼게 한다. 그 이상의 것이나 그 이하여 무엇을 요구하지 않는 담담한 품성, 그것이 경제적을 느끼게 한다. 차는 간이 맞아야 한다. 차를 만드는 데도 그렇지만, 달여 먹는 데 역시 간이 알맞아야 한다. 엷어서도 좋지 않고, 짜(진한것)서도 거슬린다. 적절하게 간이 맞음과 그 정결스러움은 현실의 일상 생활에 쉬이 등한히 할 수 있는 위생을 절실케 한다. 그러면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보자. 1. 불교의식
불교가 전래 됨으로써 종교 의식의 한 부분으로 차가 옮겨 졌다는 사실은 앞에서 밝혔다.
큰 절의 대웅전, 대적광전, 관음전 같이 주불(主佛)을 모신 법당에서는 새벽 3시에 예불(禮佛)을 모신다. 예불은 처음 도량석을 하고 큰 종을 친다. 북을 치고, 다음 법당 작은 종을 친다. 큰 종을 칠 무렵 법당의 부전스님은 다기(茶器)를 모신다. 다기를 모신다고 표현하는데, 부처님 앞에 촛불 밝히고, 향을 사른다. 그리고 다기(茶器)를 들고밖에 나가 정화수(淨華水)를 모셔 와서 부처님 앞에 올린다. 이렇게 하여 예불을 올린다. 낮 11시에도 같다. 저녁 6시 예불 때도 같다. 밖에서 가져와서 부처님께 올리는 물건은 다기(茶器) 뿐이다. 공덕제(功德齊)를 올릴 때 역시 다기를 모신다.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처럼 융성하였던 불교의식은 범국가적 행사였다. 그때 부처님에게 올리는 제물 가운데 제일 귀하게 중앙에 올리는게 차이다. 1) 부도다례(浮屠茶禮)
부도란 스님이 세상을 떠난 뒤 그 유덕을 흥모하기 위하여 작은 돌로 만든 탑 형식의 묘이다. 우리나라에선 신라시대부터 부도에 일녕에 한차례씩 다례(茶禮)를 올린다. 스님이 입적(入寂)하신 날마다 제사를 올리기도 하지만 세상을 떠난 지 몇 백년된 분에게는 일년에 한차례 또는 두차례씩 다례를 올린다. 그런 유습은 아직도 우리나라 사찰(寺刹)에 남아 있다.
2) 종사영반(宗師靈飯)
큰 스님이 세상을 떠나 그 의식을 차려 행사할 때 종사영반의 축원을 한다. 그때도 차를 귀하게 사용한다.
그 실례를 들어보자. 함허득통(1376 ∼ ?)스님이 옥봉(玉峰) 각령(覺靈)에게 향과 차와 밥을 드리며 수어(垂語)한 것이다. 『이 향로의 향은 한조각 마음에서 난 것이오. 바라노니 이 향연기 밑에서, 본래의 참 광명을 내시오. 이 한잔의 차는 옛날의 내 정을 표하는 것이오. 이 차는 조로(趙老-조주스님)의 기풍을 머금었나니, 바라건데 한 번 맛보시오. 이 바리의 밥은 향적(香積·갖가지 맛난 음식이 가득 쌓여 있다는 산 이름)의 음식보다 못하지 않소. 한 조각 내 정성 받아, 선열(禪悅) 배불리고 누워 자시오.』 3) 소참법문(小參法門)
선원(禪院) 생활을 하는 스님들은 공양(供養-스님이 일상 밥 먹는 것)을 하고 선실(禪室·선방)에 모여 가벼운 마음으로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큰 스님네의 법문을 들으며 차를 마신다. 아마 이것이 우리네 사회의 차생활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때 다각(茶角·차를 장만하는 일을 맡은 스님)이 차를 준비하여 스님 앞에 차를 드린다. 4) 보다(普茶)
선원(禪院)에서 일련 마지막 날에 사중(寺中) 스님네가 다 모여 가지는 법회(法會)의 하나로 차를 들면서 법회를 한다. 특수한 풍속이다. 그때 그 절의 제일 어른 되는 스님이 법어(法語)를 한다. 여기 그 예 한토막을 옮겨 볼까 한다. 차와 인연있는 법어이다. 허운(虛雲)스님의 법어(法語)이다.
상좌(上座) 여러분, 오늘은 섣달 그믐이다. 그러므로 대중(大衆)들은 모두 한해를 보낸다고 생각할 것이다. 절에는 좋은 공양거리(먹을 것)가 없으니, 여러분들은 차(茶)나 들라. 역서(曆書)의 규정을 볼 것 같으면 일련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네계절이 있고, 12개월이 있으며, 24절기가 있다. 그런데 인간 세상의 제도도 천시(天時)에 상응하여 유래한 것이 많으니, 봄에는 밭을 갈고, 여름에는 김을 매며 가을에는 거두고, 겨울에는 갈무리를 하며, 기술자들은 공사를 착수하고 정지하며, 우리들 출가인은 결제와 해제를 하며, 소임을 맡거나 물러나는 등 어느 한 가지도 천시의 절령(節令)에 근거하여 유래하지 아니한 것이 없다. 일반인들은 해를 보내는 것을 하나의 커다란 전기(轉機)로 여기고 있어서 한해 동안의 일을 마무리하는 동시에 며칠 동안의 휴식을 갖게 된다. 그대들과 나는 인연이 있어 요행히 오늘 운문(雲門·절)에 함께 거처하면서 평안하게 한해를 보내게 되었으니 이것이 부처님과 조사(祖師), 보살네의 가피요, 용왕과 하늘의 보호인 동시에, 여러분들의 오랫동안 심은 공덕의 결과다. 그러나 우리는 한해를 편안히 보낼지라도 저 괴로움을 받는 사람들을 잊어서는 안 되며, 또한 우리들은 환락을 추구해서도 안된다. 우리들은 격외(格外)의 성찰과 참회를 깊이 하며, 정진과 수행을 하여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꾀하고, 널리 복덕과 지혜를 복돋우도록 해야 할 것이다. 늙은이들은 죽음이 눈 깜빡할 사이에 있으니 용맹스럽게 정진하여야 하며, 젊은이들 역시 한가하게 날짜를 보내서는 안된다. 황천길에는 늙은이와 젊은이의 구별이 없으며, 외로운 무덤은 소년의 것이 많은 법이다. 어쨌든 일찍이 노력하여 생사(生死)에서 벗어나는 것으로써 제일의 계책을 삼아야 한다.
우리들은 본래 매일 차(茶)를 마시고 있는데도 어째서 오늘은 보다(普茶)를 마신다고 하는가? 이것은 선배들의 노파심이니, 보다를 마시는 것을 핑계삼아 여러분을 깨우치기 위한 것이다. 옛날에 조주스님은 도풍(道風)이 우뚝하여 시방(十方)에서 참례하는 학자들이 대단히 많았다. 하루는 두 스님이 새로 왔다. 조주는 한 스님에게 『그대는 이곳에 와 본 적이 있는가?』고 물었다. 그 스님은 『와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조주는 『차나 마시게』하였다. 또 다른 스님에게 『이곳에 와 본 일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 스님은 『와 본 일이 있습니다』고 하였다. 조주는 역시 『차나 마시게』하였다. 이를 보고 있던 원주스님이 『와본 적이 없다는 이에게 차를 마시라는 것은 그렇다치고, 와 본 적이 있다는 이에게도 차를 마시라는 것은 어째서 입니까?』라고 물었다. 조주는 『원주!』하고 불렀다. 그러나 원주는 『네』하고 대답하였다. 조주는 『차나 마시게』 하였다. 이처럼 세 사람 모두가 이익을 얻었는데 후세에 이 이야기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조주차(趙州茶)>라고 말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경우에는 운문(雲門) 조사에게도 있었으니, 어떤 학자가 찾아노자 운문은 호빵을 제시했으며, 그 학자는 곧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운문병(雲門餠)·조주차(趙州茶)>라고 전해지게 되었다. 현재 여러분은 바로 차를 마시고 빵을 먹고 있다. 알겠는가? 만약에 알지 못한다면 이 자리에서 차를 마시는 자는 누구인가? 빵을 먹는 자는 누구인가? 대체로 옛 사람들은 깊은 생각이 도(道)에 합했고, 걸음 걸음이 무생(無生)이었으며, 하나의 경전에서 알아챘고, 그 자리에서 곧 깨달았다. 요즘 사람들은 수행이 청청하지 못하고 항상 동요하고 있으며 생각 생각이 생멸(生滅)하며, 업장이 두터우니 어떻게 법을 깨달을 것이며 남을 교화할 것인가?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요컨대 일체를 놓아버려서 범정(凡情)과 망념이 자기의 묘명(妙明)한 진심(眞心)을 더럽히게 하지 말아야 한다. 옛 사람이 설하기를 『다만 범부의 정념만 없애 버려라. 따로 성인의 알음알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다. 그대들은 현재 낙화생을 먹고 있는데, 만약에 낙화생의 향미를 모른다면 나무가 돌과 마찬가지요, 만약에 낙화생의 향미를 안다면 곧 범부이니, 어떻게 하여 이 유무(有無)의 두 길을 떠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납승의 본분사(本分事)다. 비록 이 견해에서 벗어날지라도 귀신의 굴 가운데서 살 궁리를 꾸미고 있는 격이니, 여러분들은 자세히 참구하여라. 신심(信心)을 놓아 버리고 절령(節令)을 쫓아 뒹굴지 말아라. 곧 바로 참구하라. 5) 차담(茶啖)
절(寺)에서 큰 행사를 치르고 부처님게 올렸던 광일, 떡 같은 공양물은 스님네가 고루 나누어 먹는다. 그 공양물을 차담이라 한다.
스님네의 공양은 평등(平等)하게 하는 게 원칙이다. 그런데 다담상(茶啖床)이라 하여 다례(茶禮)와는 정반대의 뜻으로 통하였던 때가 있었다. 이조 때 지방관청에서 감사(監司)나 사신(使臣)에게 올리는 최상의 성찬(盛饌)을 뜻하기도 하였다. 절에서는 오늘날도 차담이 있다. 2. 궁중다례
신라때나 고려시대의 궁중에서는 차를 많이 이용하였다.
앞에서도 밝힌 바 있어 중복을 피하겟지만 전문적인 궁중다례는 많은 연구가 있어야 될 줄 생각한다. 사신(使臣)이 왔을 때 왕자(王子)가 태어났을 때 공주(公主)가 태어났을 때 왕자를 책봉할 때 공주가 시집갈 때 고관회의 때 신하가 죽었을 때 감형(減刑)할 때 경영전에서 선왕(先王)을 위해서 팔관회 때 대관전에서 군신이 연회할 때 연등회 때 3. 일반 다례
사찰(寺刹)에서나 궁중(宮中)같은 특수지역에서만 다례가 있는게 아니라 일반시민들도 다례를 하였다.
1) 다방(茶房)
고려시대에는 마을에서 차를 팔았다. 차와 술을 함께 취급한 것 같다. 2) 차례(茶禮)
정월 초하루, 설날이나 팔월 보름날, 한가윗날에 조상(祖上)에게 제사 지내는 풍속은 지금도 여전하지만 그것을 차례 모신다고 한다. 그것은 일찍이 차례(茶禮)로서 차를 중심으로 제수를 장만하였던 유습 때문이다.
3) 봉차(封茶) 결혼할 때에 남자(신랑) 쪽에서 차를 봉하여 여자(신부)쪽으로 보내던 것이 오늘날의 풍속으로 바뀌었다.
4) 제사(祭祀)
조상(祖上)을 의식한다는 윤리감은 인간으로 지당한 일이다. 그 당연한 일에 제일 가장자리에 맑고 담적한 음식을 올리는 일은 어려한 일이다. 하여 우리네 선조들은 조상의 제사때 술 대신 차를 이용하였다. 그나마 이젠 세월따라 바뀌었다.
이렇게 대충 살펴 본 바와 같이 차례는 우리네 생활속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 7 절 차생활(茶生活)
1. 차의 종류
차의 종류는 산지(産地)마다 다르며 만드는 솜씨에 따라 다르다.
홍 차
발효차 (醱酵茶) 홍단차 포종차(包種茶)
차 반발효차 (半醱酵茶) 오룡차(烏龍茶) 불발효차 찐차 전차(煎茶)
(不醱酵茶) 작설차 춘설차 죽로차 옥 로 말 차 볶은차 녹단차
우리나라에서 생사되고 있는 차는 발효하지 않은 차이다.
1) 죽로차(竹露茶)
경남 하동군 쌍계사 마을 두 곳에서 생산된다. 첫물 차를 흔히 세작(細作)이라 하는데 맛이 일품이다.
지리산 산 속에서 자연으로 야생하고 있는 차잎을 따서 만든 차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차이다. 죽로차란 이름으로 지리산 화엄사에서 절에서 쓰기 위하여 만들고 있다. 2) 반야차(般若茶)
다솔사에서 만들었던 차로 지금도 생산된다.
3) 보정차(寶井茶)
보림사에서 만든 차, 첫물의 차가 일품이다. 많이 생산되지 않는게 결함이다. 보림사는 옛부터 차밭을 스님들의 손으로 많이 가꾸었다. 진담스님이 이름을 붙였다. 4) 춘설차(春雪茶)
광주 무등산에서 나는 차.
한때는 시판도 하였음. 5) 나뭇잎 차
"뿌리 깊은 나무"에서 생산된 차, 대량생산한다.
6) 신록차
생산하는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신통스럽지 못하다.
7) 백양사(白羊寺)차
백양사에서는 해마다 스님들이 필요로 하는 차만 만드는데 질이 좋다.
8) 송광사 차
순천 송광사 선원 스님들이 조금씩 만들어 스님들의 전유물로 쓴다. 비교적 맛이 괜찮다.
9) 감로차(甘露茶)
비구니스님이 해마다 만든다. 너무 양이 적어 탈이다.
2. 차 저장법
아무리 좋은 차라도 여름을 지나게 되면 차의 본래 맛을 잃어 버리기 쉽다.
차는 습기에 약하다. 그러므로 건조한 곳에 두어야 한다. 오래도록 향기와 맛을 잃지 않는 방법으로 즈금 까다롭고 불편 하지만, 비교적 큰 항아리에 재를 담아 그 속에 차를 두 서너겹 포장하여 묻어 두면 일년 내내 좋은 신선한 차를 먹을 수 있다. 큰 항아리에 차를 서너겹 봉하여 넣어 건조한 곳에 두어도 좋다. 3. 차와 물
차는 물과 불의 조화에 의한 걸작품이다.
좋은 물은 그대로 생명수이다. 예로부터 좋은 물에 대한 애착과 집념은 비상하였다. 물은 맑고, 가볍고, 달고, 깨끗한 것을 좋은 물이라 한다. 산물은 위의 것, 강물은 가운데 것, 우물은 아래 것을 쓴다. 천천(天泉) : 가을 물이 제일 좋고, 매우(梅雨)의 물이 그 다음이다. 가을 물은 희고 차며 매우 달다.
달면 차 맛은 약간 덜하지만 차면 차맛이 온전하다. 지천(地泉) : 완만하게 흐르는 유천(乳泉)을 취한다. 영수(靈水) : 산중(山中)의 물로 바위틈에서 나오는 물. 차갑고, 달며 맛이 좋다. 단천(丹泉) : 산중에서 나는 물이지만 흙, 모래, 자갈이 있는 곳에서 나는 물. 양수(養水) : 시중에서 좋은 물이란 구하기 어렵다. 꼭 좋은 산간수(山間水)를 못 구하면 큼직한 항아리를 준비하고 흰 자갈을 항아리의 10분의 1쯤 넣어 수돗물 을 받아 하루쯤 두었다가 차물로 쓰면 좋다. 다기(茶器)에 『양수(養水)함에는 자갈을 독 속에 넣어두면 물이 좋아질 뿐 아니라 흰 돌과 푸른 물과는 서로 맞아 같이 산간에 있는 듯한 유쾌한 연상을 일으킨다』고 하였다. 4. 차와 불(火)
산중(山中)에서는 숯불(참숯)을 이용하면 좋으나 그렇지 못하면 커피포트, 가스불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커피포트를 이용할 경우 되도록 오래된 것이면 좋다.
5. 차 도구
차를 이용하자면 필연적으로 도구가 있어야 한다.
차관 … 차를 우려내는 역할을 한다. 금, 은, 도자기로 된 것이 좋다.
철빈 … 차 물을 끓이는 솥. 무쇠, 도자기 등으로 된 것이 좋다. 오늘날은 커피포트도 무방하다. 찻잔 … 도자기로 된 것이 좋다. 차수저 … 대나무, 상아 등으로 만들며, 차를 옮길 때 쓴다. 차탁 … 찻잔, 차관을 올려 놓는 탁자. 차수건 … 무명배, 가재배, 모시 등으로 만들며, 찻잔을 닦는다. 숙우 … 물을 식히는 그릇. 표주박 … 철빈의 물을 차관으로 옮길 때 쓴다. 화로 … 물을 끓일 때 숯불을 담는 화로. 물통 … 물을 떠 놓는 그릇. 도자기 옹기가 좋다. 물받는 그릇 … 남은 물, 차 찌꺼기를 담는 그릇. 도자기, 목기 등이면 적당하다. 차통 … 차를 조금 옮겨 담는 그릇. 이렇게 준비하면 엽차(葉茶)를 즐길 수 있다.
말차(沫茶)를 할 경우 몇가지 더 있어야 한다. 찻잔 … 보통 사발 정도 큰 그릇. 구경(口徑) 10∼15㎝ 높이 8∼10㎝ 정도 큰 찻잔.
차선 … 대나무로 만든다. 찻잔에 차를 넣고 물을 넣어 젓는 도구. 차보자기 … 말차를 할 경우 차 탁자보다 차보자기를 펴놓고 하는 게 좋다. 이렇게만 준비되면 말차를 즐길 수 있다. 6. 차 달이는 법
먼저 물을 끓인다.
엽차의 경우, 뜨거운 물(100°C )을 차관과 찻잔에 부어 차관, 찻잔을 따뜻하게 하고 부신다. 그리고 숙우로 물을 식힌다. 차를 차관에 넣는다. 세사람을 기준하여 죽로차 첫물일 경우, 10∼15그램 정도면 된다. 물은 90 밀리리터면 적당하다. 100°C 끓은 물을 숙우에 식혀 50°C 정도가 되면 차관에 붓는다. 뚜껑을 닫고 2분 30초 정도 지나서 차물을 숙우에 따른다. 1분쯤 지나면 차 찌꺼기가 가라 앉는다. 다시 차를 찻잔에 따른다. 차 물 온도는 약 35°C 정도가 되며 차의 용량은 20 밀리리터쯤 된다. 좋은 차는 적기 마련이다. 적지만 효능은 크다. 두 번째는 1분쯤 되면 따르도록 한다. 흔히 겨울에는 차를 먼저 넣고 물을 붓고(下投), 여름에는 물을 먼저 붓고 차를 넣으며(上投), 봄, 가을에는 물을 반쯤 붓고 차를 넣고 물을 붓는다(中投)고 한다. 이것은 차를 맛있게 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좋은 차를 들 때 과자, 떡을 먹는 경우가 있다. 차는 그 맛이 아주 고담하여 다른 원색적인 맛이 가미되면 차의 맛을 잃기 마련이다. 차는 맛과 향기를 중요시한다. 과자, 떡을 먹으면 차 맛을 도운다고들 한다. 그렇게 실험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참다운 차맛을 잃기 마련이다. 차가 잘 달여졌을 때 맛이 좋아야 한다. 차는 무엇보다 맛을 제일로 한다. 달고, 향기롭고, 무겁고, 부드럽게 되어야 한다. 차는 향기가 진해야 한다. 진향(眞香)이 스며나와야 한다. 옛 사람들은 표리동미(表裏同味)면 순향(純香)이라 하고, 불생불숙(不生不熟)이면 청향(淸香), 화후균정(火候均停)이면 난향(蘭香), 곡우(穀雨)전에 따서 만든 차면 진향(眞香)이 난다고 하였다. 차의 향기는 어디서, 어느 흙에 자랐으며, 언제 채취하여 어떤 솜씨로 만들었으며, 어떻게 보관하였나에 따라 맛과 향기가 달라진다. 다같은 차라도 한 자리에서 세 사람이 달였을 때 세가지 맛이 나올 수 있다. 조화(造化)가 무궁하다. 그러므로 오랜 숙련이 있어야 제 맛 제 향기가 난다. 앞에서는 제일 첫물의 차를 예로 들었으니 보통 일반적인 차를 예로 들어볼까 한다. 일반 시중에 있는 작설차 보통 수준의 차를 세사람이 달여 먹고자 할 때 물을 100°C 끓인다. 차는 약 25∼30그램, 100°C 끓인 물을 70°C∼75°C 정도 식혀 차관에 넣어야 한다. 차관에 물을 붓고 3분 정도 있으면 좋은 차가 된다. 두 번째는 물을 붓과 1분쯤 있다 따르도록 한다. 세 번째는 1분 30초쯤 있다가 따르도록 한다. 차가 다 끓어 찻잔에 옮겨졌을 때 찻잔을 두 손으로 정중히 들고 천천히 음미한다. 좋은 차 일수록 양이 적으므로 조용히 마시지 않으면 곤란하다. 차를 마실 때는 손님의 수가 적은 게 좋다 한다. 많으면 시끄럽고, 소란스러우며 아취가 적다고 한다. 그리하여 혼자 마시는 것을 유(幽) 또는 신(神)의 경지라 하고, 두사람이 마시는 것을 승(勝)의 경지라 하고, 서너분이 마시면 취(趣)의 경지라 하고, 5, 6인이 마시면 범(汎)의 경지라 하고, 7, 8인이 마시면 시(猜)의 경지라 한다고 동원(東原)의 시다록(試茶綠)이나 초의(草衣)의 동다송에 기록되어 있다. 차는 언제 어느 때 어디서 누구와 마시더라도 무관하다. 사람이 많으면 어떻고 적으면 어떠랴. 다만 차를 마시는 사람의 마음 자리가 문제일 것 같다. 책 다소(茶疏)에 차를 마시기 알맞은 때를 기록해 놓았다. 마음이나 손이 한가할 때(心手聞適) 시를 읽고 피로할 때(披詩疲倦) 생각이 어지러울 때(意緖 亂) 노래가 끝났을 때(歌罷曲終) 집에서 일 없을 때(杜門避事) 거문고를 뜯고 그림을 볼 때(鼓琴看畵) 밤에 이야기를 나눌 때(夜深共語) 동방아각(洞房阿閣)에서 친구 방문하고 돌아와서(訪友初歸) 좋은 친구나 이쁜 사람과(主客小姬) 날씨 좋은 날(風日晴和) 가벼운 구름, 적은 비 내릴 때(輕陰微雨) 숲에서 수행할 때(茂林修行) 더위를 피하며(荷亭避署) 서재에서 향 피우고(小院梵香) 술 먹고 난 뒤(酒蘭人散) 고요한 절에서(淸幽寺觀) 그리고 또 차를 마셔서는 안될 때를 명기하였다. 일을 하면서(作事) 연극을 보면서(觀劇) 편지 읽으며(發柬簡) 소나기나 눈 내릴 때(大雨事) 술자리에서(長筵大席) 서류를 보면서( 閱卷帙) 이런 기록을 보면 오늘날과는 소원하다. 어떤 것은 취해도 좋지만 어떤 것은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도무문(茶道無門)을 이야기하고 싶다. 큰 도는 문이 없듯이(大道無門) 차(茶)생활 역시 정한 게 없다. 언제 어느 때 어디서나 차를 먹고 싶다는 생각이 날 때는 언제나 먹어도 좋을 것 같다. 다만 다례(茶禮)를 할 경우는 예를 갖추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러면 다시 피해야 할 것들도 눈여겨 보자.
나쁜 물(惡水) 볼품이 없는 기구( 器) 놋숟가락(銅匙) 놋가마(銅 ) 나무 물통(木桶) 연한 숯( 炭) 철없는 아이(粗童) 나쁜 노비(惡婢) 불결한 수건(不潔巾 ) 갖가지 과실 향약(各色果實香樂) 이런 기록 역시 기억할 것과 잊어도 좋는 게 있다. 오늘날과 같이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많은 시대일수록 마음자리 하나 깨끗이 챙겨야 할 것 같다. 흔들리는 마음, 안타까운 마음, 불안스런 마음, 번뇌스런 마음을 쉬는 청량제로써 한잔의 녹색차를 마셔보자. 설령 피곤하지 않더라도 한잔의 차는 생활을 활력소가 될 것이다. 퍼온글 원본 : 茶道 [indiannamoo 작성] |
첫댓글 책한권을 다읽고나니 갈증해소에 ,,,녹차 한잔 잘 마시고 갑니다요!!...
..()..^^한잔의 차 그것은 바로 인생(人生)이다... 차 한잔에 쓰고, 떫고, 시고, 짜고 단맛이 다 베어있듯이, 마음의 여유에서 오는 심미(審美)를 깊이 체감함으로 하여 아름다운 삶을 가꾸는 근본을 일러 주기도하지요! ..나무 관세음보살..()
..()..^^답답할 때 어디서 몰려오는 한줄기 맑은 바람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시원하게 하듯.. 한잔의 차 역시 우리의 마음을 명쾌하게 하는 가벼운 음료로서, 편안하게 마시는 기호음료로 마시면 그걸로 충분합니다.^^차나무는 사철 푸르다지요. 그 싱싱함을 우리의 마음에 심어 그렇게 푸르게 싱싱하게 키워보는것도.^^()
다도의 자세한 내용 잘보앗소이다.
어휴장장한글 다보느라 감사합니다^&^
차의 효능을 한의학적 견지에서 살펴보는공부 잘하고 갑니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