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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부터, 중단했던 ‘천사들과 말하다’ 번역 계속. 아침 밥상에서 효선이 내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말한다, 밝은 생기가 돈다고. 아마도 그럴 것이다. 천사가 나에게 어째서 순간에 죽는 것이 순간을 사는 것이며 그것이 어째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영생(永生)인지를 속삭여주기 때문이다. 천사가 이어서 다짐한다, 그건 네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지만 너의 도움 없이는 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고. 나는 내가 그분을 어떻게 도와드릴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것마저도 그분이 나를 통해서 하시기를 바랄 뿐. 하지만 이런 ‘말’을 듣고 옮기는 것 자체가 내게 힘을 주는 것만큼은 부인 못할 진실이다. 세상이야 알아주든 말든.
용화사 예배. 광주, 전주에서 온 도반들 함께 한 방 가득 둘러앉아 환담. (2017. 7. 16)
⎈ 학교에 두었던 효선의 전자 피아노를 집으로 가져와서 덮개를 열어보니 여러 건반들이 내려앉고 아예 부서져 조각난 것들도 있다. 누군가 무거운 힘으로 충격을 가하지 않았으면 생길 수 없었을 상처들이다. 깨어진 피아노를 보는 순간 효선은 자기 가슴이 깨어진 표정이었다. 어느 녀석이 그런 폭력을 휘둘렀을까?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새벽에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리가 어지러운데 한 말씀 들려주신다. “범인을 찾지 마라. 내가 그랬다!” 순간, 모든 것이 확연해진다. “여태껏 무슨 좋지 못한 일이 발생하면 먼저 범인을 찾아내어 징계하고 물건을 변상하는 것이 정해진 순서였다. 지금도 그러고들 있다. 하지만 머잖아 너희가 맞게 될 새로운 세상은 그런 낡은 방법들로 살 수 없는 곳이다. 범인을 색출하여 벌주고 부서진 물건을 돈으로 변상하는 방법 아닌 다른 수습책을 찾아보아라.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답을 제시하지 말고 아이들이 스스로 답을 찾도록 뒤에서 도와주어라. 지난번에 그랬듯이, 새로운 세상의 주인공인 아이들이 그 답을 찾아내는 광경을 보고 싶구나.― 아침 명상 시간에, 물건(피아노)과 사람(효선과 배움지기들 기타)이 입은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이 사건으로 무엇을 배울 것인가? 비슷한 일이 재발하는 것을 어떻게 방지할 것인가? 이 세 가지 과제를 안겨주고 아이들이 어떻게 답을 찾아가는지 지켜보자고 했다.
봉봉이 자기도 호(號) 하나 지어달라기에 한글로 ‘나무언덕’ 한문으로 ‘목강’(木岡)이 어떠냐 하니 고맙단다. 어릴 때 나무 한 그루 선 언덕이 있었는데 거기가 그렇게 좋았더란다.
점심으로 들기름에 볶은 밥을 나박김치, 오이 피클과 함께 먹는다. 얼마 만에 먹어보는 집밥인가? 애들은 집에서 엄마가 해주는 밥으로 살아야 한다. (2017. 7. 17)
⎈ 아직 멀었다. 애써 내색은 하지 않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다. 퉁퉁 부은 얼굴로 음식그릇을 던져 놓는 식당 종업원, 뷔페 집에서 접시마다 요리를 수북이 담아다가 다 먹지 못하고 남기는 인간들, 쇼핑몰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식료품들… 알고 보면 저마다 그럴 만한 이유들이 있을 터인데, 내 마음은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어 한다. 결국, 마음이 문제다. 세상은 문제 아니다. 정말이지 아직 멀었다. 하지만 하느님 뜻대로 사는 게 별것 아니라고, 모자 쓰고 모자 사러 가지 않는 거라고, 간디가 그랬던가? 그렇다면 아마 간디 선생도 웬만큼 세상이 불편하지 않으셨을까? 모르겠다. (2017. 7. 18)
⎈ 7학년 마음공부 종강. 나는 너희에게 내어준 숙제를 너희가 했는지 안 했는지에 대하여 묻지 않겠다. 너희를 믿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을 믿고 그 믿음으로 살겠다. 누구를 믿었다가 그에게 속는 일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래도, 속을 때 속더라도, 나는 사람을 의심하지 않겠다. 사람에게 속지 않으려고 사람을 의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을 의심하면서 사는 사람보다 사람을 믿으면서 사는 사람이고 싶기 때문이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속느냐 속지 않느냐보다 내가 한 세상을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느냐다. 누가 나를 속인다면 그것은 내 문제가 아니라 그의 문제다. 그 때문에 내가 괴로워할 이유는 없다. 뭐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데 몇 녀석이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지우에게 나를 그려달라고 했더니 기꺼이 그러자며 모델이 되란다. 도서관 걸상에 폼을 잡고 앉아있자니 진지한 자세로 한참 그리던 지우가 연필을 거두면서 점심을 먹어야겠단다. 내 귀에는 들리지 않지만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는 모양이다. 그러자고, 다음에 계속 그리자고, 아무렇지도 않게 약속하고 일어선다. 스스럼없이 자유롭다.
잡역부 ‘최 사장님’이 오늘 자기가 일하던 현장에 좋은 흙이 있어서 한 차 가져왔다며 붉은 황토를 화단에 부려놓고 간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있다. 흙뿐 아니라 빗물받이로 쓰라고 큼지막한 돌확도 가져왔다. 밤이 되어 가로등이 들어왔는데 저녁은 집에서 먹어야 한다며 서둘러 돌아간다. 고맙다는 말로는 모자란다. 참 이상한 사람이다. (2017. 7. 19)
⎈ 꿈에 근사한 말을 많이 들었는데 깨고 나니 한 마디가 기억에 남아있다. “어제의 내일을 버리고 내일의 어제를 잡아라.” 어제의 내일이면 오늘이고 내일의 어제면 역시 오늘이다. 같은 오늘인데 다른 오늘이다. 하나는 어제에 속하고 다른 하나는 내일에 속한다. 하나는 이미 떠나간 것이라 잡을 수 없고 다른 하나는 다가오는 것이라 잡을 수 있다. 그러니까 오늘 하루 할 수 있는 걸 하고 할 수 없는 걸 하지 말라는, 추억과 후회로 살지 말고 희망과 기대로 살라는 그런 얘기? 좋다. 어쩌면 여기에 순간을 사는 비결이 있는지 모르겠다. 희망하되 그 희망에 묶이지 않고 기대하되 그 기대에 갇히지만 않는다면… 그건 그렇고, 혹시 지금 현실로 알고 있는 이 꿈에서 깨어날 때에도 꿈꾸는 동안 경험으로 들은 수많은 말들 가운데 하나가 살아서 남아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나에게 그 한 마디가 무엇일까? 알 것도 같지만 미리 말하면 천기누설일지 모르니 그냥 속에 담아둔다. 인생이란 결국 들어야 할 한 마디 ‘말씀’을 향해서 온갖 희로애락의 안개를 뚫고 가는 멀고 험한 여정인가?
9학년 친구들이 두더지 현빈 동행하여 방문 왔다. “빈손으로 오기가 뭐해서” 지난 학기 농사로 번 돈 8만 몇 천원을 가져왔단다. 효선이 받아 헌금 통에 넣는다. ‘말씀과 밥의 집’을 순천에 열고 처음 들어온 귀한 돈이다. 부서진 피아노 사건을 어른들 세상에서 해결하는 방식 아닌 다른 방식으로 수습하는 것을 이번 방학과제로 삼아보자고 제안하니 그리 하겠단다. 순서와 방법 모두 아이들에게 맡긴다. 이 친구들을 통해서 한님이 우리 모두에게 어떤 가르침을 선물로 주실는지 기대해본다.
폴 틸리히 설교 ‘외로움과 홀로 있기’ 번역. 철학자의 설교는 역시 철학적이다. 그래서 감명이 깊다. “…자기 안에 자기중심을 지니고 있는 것에 인간의 위대함이 있다. 자기가 사는 세계에서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바라볼 수 있다. 그것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비로소 그것을 알고 사랑하고 변형시킬 수 있다. 그를 땅의 통치자로 지으신 하느님은 그를 격리시켜 혼자임 속으로 던져 넣으셔야 했다. 덕분에 인간 또한 하느님과 인간과 말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질문할 수 있고 대답할 수 있고 결단을 내릴 수 있다. 그에게는 선을 행할 자유와 악을 행할 자유가 아울러 있다. 자기 안에 ‘침투되지 않는 중심’(impenetrable center)을 지닌 인간만이 자유다. 혼자인 인간, 그만이 인간임을 스스로 주장할 수 있다. 이것이 인간의 위대함이고, 이것이 인간의 짐이다.”
지난 번 강원도 다녀오는 길에 효선이 전화를 두 통 받았다. 둘 다 세상에 ‘호스피스 수도원’이 있다는 걸 인터넷 카페에서 보고 문의해온 것이었다. 이태가 넘도록 한 번도 걸려오지 않던 전화가 두 번, 그것도 하나는 환자 쪽에서 다른 하나는 환자를 돌보는 사람 쪽에서 연이어 걸려오자 효선은 아무래도 이게 무슨 신호(sign) 같다고 한다. 나도 동의했다. 그런데 어제 그 이야기를 들은 두더지가 “그럼 그것이 마지막 유혹일까요?” 하더라는 거다. 그러자 이것이 신호인가? 유혹인가? 생각이 복잡해졌고 둘 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그 둘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대답한다. 그런가보다 하고 면밀히 깨어서 다음을 기다리면 신호인 거고 드디어 때가 되었구나 하고 나서서 무엇을 시도하면 유혹인 거라고. 무엇을 무엇으로 만드는 건 무엇이 아니라 무엇을 대하는 인간이라고. 그래서 같은 말이 누구에게는 신호가 되고 누구에게는 유혹이 되는 거라고. (2017. 7. 20)
⎈ 이번 집수리 현장에서 만난 잡역부 ‘최 사장님’에게 감사패를 주기로 한다. 다음 문장을 나름대로 정성껏 썼다. <감사패. 건축인 최홍운 선생, 고맙습니다. 선생께서는 저희 헌집을 새집으로 고치는 공사에서 마지막 손질이 끝날 때까지 온갖 허드렛일에 정성과 땀을 아끼지 않으셨고 특히 사람을 존중하며 성심껏 일하는 모습으로 저희에게 큰 감동을 주셨습니다. 이에 감사의 마음을 패에 새겨 드립니다. 2017. 7. 22, 호스피스 수도원 말씀과 밥의 집>
오늘 2017년 7월 21일 오후 6시 50분, 순천 땅 사랑어린배움터에 중요한 일이 벌어졌다. 두 번째 천일기도를 회향하고 천제(天祭)를 드리고 그리고 사랑어린배움터 촌장과 사랑어린학교 교장을 제비로 뽑았다. 한님이 2학년 지안을 통해 두더지를 촌장으로, 3학년 석영을 통해 민들레를 교장으로 뽑으신다. 모두들 환호하며 기뻐한다. 버럭의 춤과 사풍(사랑어린풍물패)의 공연은 말 그대로 신들린 것이었다. 끝으로 한 마디 하라고 해서 말한다, 오늘 우리는 낡은 시대를 매듭짓고 새 시대를 여는 한님의 기념비적인 행사에 참여했다고, 하늘과 땅의 진정한 협치가 우리를 통하여 시작되었다고, 한님의 뜻이 무엇인지 여쭈었더니 이곳에서 아이들과 부모들과 교사들이 모두 함께 어울려 놀면서 몸과 마음과 영혼이 자라는 것 말고는 다른 아무 뜻이 없다 하시더라고, 그러니 우리 안심하자고, 앞으로 이 캠퍼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두려워 말자고, 그 일을 통해서 우리 모두 저마다 성숙할 것이라고, 이 자리를 함께 한 여러분에게 축하를 드린다고… 촌장으로 뽑힌 두더지에게 누가 소감을 물으니 “이제 너 죽었다”고 말한다. 두더지 입으로 그렇게 말하신 분이 또 이렇게 말하는 걸 나는 듣는다, “덕분에 내가 너로 산다.” 멀리 강원도 화천에서 임락경 목사도 와주었다. 말 그대로 신명나는 축제의 한 마당이다. 한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2017. 7. 21)
⎈ 속지 말자. 뭔가 세상에 이바지되는 일, 의미 있는 일, 보람된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 허송세월은 범죄라는 생각. 바로 이런 생각이 지금 나에게 마지막 유혹일 수 있다. 잊지 말자, 너는 죽은 몸이다.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 죽은 듯이 사는 게 아니라 진짜로 죽어서 살아야 한다. 아니, 죽어서 살아야만 하는 건 아니다. 앞에 무슨 단서가 붙더라도 “…야 한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거다. 그러면서 또 그러고 있구나. 어쩔 것인가? 입을 다무는 수밖에.
폴 틸리히 번역. “…외로움(loneliness)은 홀로 있기(solitude)를 견뎌내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우리한테는 홀로 있으려는 자연스러운 욕망이 있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본연의 자기―혼자인 자기―를 아픔과 공포로만이 아니라 기쁨과 용기로도 경험하고 싶어 한다. 홀로 있기를 시도하고 경험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종교란 인간이 혼자서 하는 것’이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이 옳다면 우리는 그 모든 방식을 ‘종교적’(religious)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토요명상 시간. 부산 서울 일산 등지에서 온 나그네들이 함께 한다. 찌는 듯 무더운 날이다. 등줄기로 흐르는 땀을 느끼며 앉아 있다가 자연스레 어제의 잔치 얘기를 나눈다. 부산의 고 관장 왈, 재미있는 구경 했다고, 그 많은 사람이 찜통 같은 방에 두 시간 가까이 앉아있는 데 그들을 에둘러 감싸고 있는 어떤 선한 에너지가 느껴졌다고… (2017. 7. 22)
⎈ 전주 한상렬 목사 내외가 오셨다. 시내 무슨 병원 원장이라는 분과 박소정 선생, 박두규 시인, 향아, 신난다, 두더지, 보리밥 우리 내외 함께 저녁식사. 밥값을 인상 좋은 의사 선생이 내신다. 식사 후 시내 집에서 환담. 향아는 차 시간 때문에 먼저 일어나고 한 목사가 나에게 내가 2042년까지 살아야 하는 세 가지 이유를 말해준다. 재미있다. (2017. 7. 23)
⎈ 잡역부 ‘최 사장님’이 당신보다 젊어 보이는 미장공을 데리고 새벽같이 와서 일을 시작한다. 미장공은 초면인데 인상이 밝지 않다. 무슨 일로 화가 잔뜩 난 얼굴이다. 인사를 해도 받지 않는다. 내가 이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줄 아느냐? 이런 표정이 역력하다. 효선 말을 들으니 최 씨가 툴툴거리는 그를 달래며 일하고 있단다. 최 씨는 미장공 조수 노릇을 하면서 틈틈이 짬을 내어 지난 번 가져온 흙을 마당 한 구석 화단으로 옮긴다. 이른바 고용주가 시키기는커녕 부탁도 하지 않은 일, 그러니까 고용인으로써 할 이유가 없고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저렇게 성심껏 한다.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단 말인가? 무슨 일이든 마지못해 하라는 노자의 가르침을 자주 생각하며 살았는데 그 생각에 이 말을 덧붙여야겠다. 일단 시작한 일이면 기꺼이 몸 아끼지 말고 하자. 그래, 바로 그거다. 일을 스스로 만들진 않되 주어진 일은 지극정성으로 하는 거다. 오후 3시쯤,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미장공 얼굴이 좀 풀려 있다. 그래도 고맙다는 말 한 마디 나눌 새 없이 그냥 가버린다. 참 딱한 사람이다.
서울에서 장모와 처형이 내려왔다. 두더지가 저녁을 대접하는데 이런저런 말로 분위기를 가볍게 해준다. 고맙다. 나는 왜 이 모양일까? 나라는 인간이 태생적으로 입이 무거운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게다가 이런 현상이 갈수록 심해진다. 사람들이 수다 떠는 자리에서 내 입은 언제나 고드름이다. (2017. 7. 24)
⎈ 점심 먹으러 동네 식당에 갔다. 몇 번 가본 곳인데 갈 적마다 주인여자는 당신들 별로 반갑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오늘도 그런다. 네 사람이 3인분을 주문하자 뭐라고 중얼거린다. 물론 내 귀는 그 말을 듣지 못하지만 무슨 뜻인지는 충분히 알겠다. 효선이 “노인 두 분이 워낙 소식(小食)이라 남길 것이 뻔해서 그랬는데 그렇게 말하시면 다시는 못 오겠네요.”라고 하자, “그러시든가…” 이런다. 음식한테 미안했지만 더 먹었다가는 몸에 탈이 날 것 같아서 절반도 못 먹고 숟갈을 놓았다. 내 머리가 남들보다 잘 돌아가지는 않아도 그래도 멍청이는 아니다. 그런데 “나, 이 식당 하고 싶어서 하는 것 아니다.”라는 딱지를 온 몸에 붙이고 밥집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 왜 스스로 그런 불행과 비참을 자기한테 강요하고 그 여파로 남들까지 힘들게 하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그리고 더 모르겠는 건 왜 그런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세상에 더 많아 보이느냐다.
나와 효선, 소리샘 모자(母子)를 포함하여 일행 다섯이 여수공항에서 제주도 가는 비행기를 타는데 장모가 신분증을 지참하지 않았다. 전에는 신분이 확인되면 탈 수 있었는데 지난 7월 1일부터 이유 불문코 신분증 없이는 탑승할 수 없단다. 두더지가 90객 노인과 함께 시청으로 사진관으로 동사무소로 택시를 달려 임시 신분증을 만들었고 가까스로 다음 번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버스나 기차는 신분증 없어도 탈 수 있는데 비행기는 왜 안 되는 걸까? 기차하고 비행기하고 뭐가 다른가? 전에는 신분이 확인되면 탈 수 있던 비행기를 그동안에 무슨 변화가 있었기에 7월 1일부터 신분증 없이는 탈 수 없게 된 건가? 아무리 궁리해도 이유를 모르겠다. 정말 왜들 이러는가?
제주 한살림에서 무위당학교를 개설하고 나를 강사로 불렀다. “예전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무위당의 이 말씀은 “이제는 알겠네, 그대가 나인 것을.”이라는 고백이라고. 이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지금 자기가 따로 존재한다는 착각의 고해바다에서 온갖 고생과 비극을 맛보는 거라고… 뭐 이런 얘기를 나누다보니 두 시간 가까이 흘러갔다.
제주 송 목사가 우리 일행을 식당으로 안내하여 푸짐한 저녁을 대접하고 자기 승용차까지 빌려준다. 이 친구가 왜 우리한테 이러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모름’은 앞의 두 ‘모름’과 질(質)이 다르다. 이런 모름은 몰라서 행복하고 기분도 좋은 이상한 모름이다. 찬송가에도 있지. 나 같은 죄인을 왜 이토록 사랑하시는지 나는 알 수 없다고…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이가 제주 산방산 아래 당신 집을 값없이 빌려주어서 며칠 묵게 되었다. 이 또한 무슨 인연이고 무슨 은덕인지 모르겠다. 오늘은 알 수 없는 일을 겪는 날인가? (2017. 7. 25)
⎈ 새벽 산방산 기슭 산책. 태평양을 내려다보는 산방산 자락에 절 두 채가 나란히 서있다. 그중 한 절 마당에 우리 절은 옆 절과 “무관하다”는 팻말이 서있다. 절로 웃음이 나온다.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라는 부처의 가르침을 따른다면서 하필이면 이웃 절과 “아무 관계가 없다”니? 이른바 종교라는 것이 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교주를 따돌리고 그 가르침을 희석(稀釋)시키거나 왜곡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불교라고 예외일 수야 있겠는가만… 그래도 바람 부는 제주 새벽은 말없이 신선하고 친절하고 그리고 애잔하다. (2017. 7. 26)
⎈ 새벽 탄산온천 목욕. 소리샘이 제 맘대로 창립한 ‘백합-관광’의 가이드를 받아 김영갑 갤러리 다녀오다. 제주에 가면 한 번 찾아보리라 생각했던 곳인데, 그러자는 말을 입 밖으로 내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가게 됐다. 효선이 서울에서 만났던 사진작가 김영갑 씨에 대한 추억을 얘기한다. 음산하고 묵직한 갤러리에서 ‘순간에 붙잡힌 황홀한 영원’을 느낀다.
돌아오는 길에 하멜이 타고 왔다는 네덜란드 상선 모형(模型)을 보았다. 하멜이 못 받은 삯을 받기 위해서 썼다는 ‘표류기’의 빼곡한 육필(肉筆)이 발길을 움켜잡고 놔주지 않는다. 저토록 두꺼운 공책에 깃털 펜으로 지난날 기억을 한 자 한 자 되살려놓는 한 인간의 집요함과 성실함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2017. 7. 27)
⎈ 며칠 만에 돌아온 집이라서 그런가? 조금 낯설다. 도착하는 길로 짐도 풀지 않고 방바닥에 쓰러져 그대로 잠들었다. 밥을 달걀과 간장으로 비벼서 저녁으로 먹자니 비로소 집에 돌아온 느낌이다. 한님은 장차 이 집에서 무슨 놀이를 하실 참인가? (2017. 7. 28)
⎈ 효선은 허리가 아프다고 하면서도 현관에 색을 칠한다. 은은한 하늘색과 흰색이 절묘한 선과 모양을 이루며 벽을 장식하고 있다. 저절로 감탄이 나온다.
토요명상. 촌장과 교장의 임기를 정하는 문제에 대한 의견을 묻는다. 여러 안(案)들이 있을 터인즉 그 모든 안들 가운데 하나를 제비로 정하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인간의 생각을 무시하지 말고 그것에 마지막 결정권을 주지도 말고, 여기에서 하늘을 본(本)으로 하여 하늘과 땅의 어울림이 아름답고 선한 꽃으로 피어나는 것이리라.
강화도에서 고등학교 다니는 하몬이 사박오일 구례길 탁발순례를 마치고 검게 탄 얼굴로 부모와 함께 나를 만나러 왔다. 말 그대로 밥을 빌어먹었느냐고 물으니 그랬단다. 세상에 착한 사람들 많지? 예, 참 많았어요. 그래, 그렇다, 세상에는 나쁜 사람들보다 좋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단다. 귀한 경옥고를 한 병 선물로 놓고 간다. (2017. 7. 29)
⎈ 같은 마을에 있는 순천중앙교회 예배 참석. 오랜만에 상식적이고 복음적인 설교를 교회 강단에서 들어본다. 설교단이 너무 높아 마음으로 고개가 거북했지만 어쩔 것인가? 그래도 대중과 설교자 사이의 거리를 가깝지도 멀지도 않게 조정하는 건 설교자의 몫이다.
구례 모임을 마친 여류(如流)가 두더지와 함께 와서 점심을 나눈다. 자칭 사진작가답게 여류의 사진 찍는 기술이 비범하다. 순간의 변화를 적당한 구도로 포착한다는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가 그랬지, 사진작가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하여 영원을 두 눈 부릅뜨고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근사한 말이다. 찍은 사진을 보내달라고 하니 자기는 아마추어가 아니라 프로기 때문에 사진을 그냥 줄 수 없고 돈을 받아야 준다고 한다. 효선에게 사진 값으로 2백 원을 주라고 하니 아무리 그래도 5백 원은 드려야지 어떻게 2백 원을 드리느냐고 한다. 그래, 그러면 5백 원을 주라고 하니 여류 왈, 그거면 됐단다. 맞다, 그렇다. 제로(0)의 세계를 사는 사람에게 5백이든 5만이든 5억이든 동그라미 앞에 붙은 숫자들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하지만 동그라미(0)와 1의 차이는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을 만큼 무한으로 크고 무한으로 작다. 그래서 영(靈)이 영(零)인 것이다.
오늘 예배에서는 효선의 강론이 많은 사람의 공명을 일으킨다. 주제는 ‘빵점짜리 남편’을 어떻게 교육시켜 ‘괜찮은 남편’으로 만들 것인가? 물론 강사가 본보기로 삼은 ‘빵점짜리 남편’은 본인의 남편인 나다. 창피하고 재미있고 유익했다. 내가 심한 습(習) 덩어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로 집사람을 배려하지 않았다는 건 감당키 힘든 충격이다. 정향한테서 수없이 들은 말을 효선한테서도 다시 들어야 한다는 게 가슴 아픈 일이긴 하지만 이제라도 솔직히 인정하고 어떻게든지 이런 나에게 변화가 있기를 기원할 따름이다. (2017. 7. 30)
⎈ 학교 배움지기들 수련모임이 있다기에 효선이 반찬을 만들어 점심을 함께 나누었다. 며칠 만에 방문하는 학교다. 무더위에 방학이지만 다음 학기를 위해서 준비하는 모습들이 고맙고 착하고 아름답다. 한님의 축복이 있기를 속으로 빌어준다. 당나귀 덕수가 반갑다는 시늉으로 달려들어 옷자락을 물려는 걸 주먹으로 때리는 시늉을 하니 슬그머니 옆으로 비켜선다. 견우의 눈도 그동안 목강이 안약을 잘 넣어주어서 많이 깨끗해졌다. 이번에 뽑힌 촌장과 교장의 임기를 정하는데 제비뽑기로 둘 다 천일씩 주어진 일을 감당하기로 결정되었단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마지막 결정을 제비뽑기로 정하면 참 좋겠다. 그로써 인간의 지혜와 하늘의 경륜이 절묘하게 통합되는 것이니… (2017. 7. 31)
⎈ 점심으로 먹을 샌드위치를 장만하여 학교로 가니 뜻밖에 여류(如流) 내외가 오셨다. 일본사람 한 분이 동행하여 왔다. 인도로 이태리로 다니며 공부에 열심인 분 같았다. 인도에서는 한 선생 밑에서 8년 동안 지내며 그의 모든 것을 배웠단다. 인상이 부드럽고 날카롭다. 묘하다. 식사가 대충 끝나고 아이들 춤추는 얘기를 하는데 느닷없이 그 일본사람 목청을 가다듬어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 첨보는 남자 품에 얼싸 안겨’를 부른다. 그러자 금세 식당이 노래방으로 바뀌고 돌아가면서 노래를 부른다. 술 한 모금 마시지 않고서… 효선이 초등학교 학생처럼 까불며 가수 흉내를 내어 ‘거짓말이야’를 부른다. 재미있다. 두더지가 굵은 저음으로 ‘인생은 나그네길’을 부른다. 음정이 엉망이다. 하지만 그것은 내 귀가 만든 착각이다. 교회 성가대의 찬양도 내 귀에는 음정이 엉망인데 그들이 엉터리로 노래할 리 있겠는가? 세상이 어떻게 보이느냐는 내 눈이 결정하는 거다. 세상은 상관없다. 마지막으로 박 교수가 노래를 한다. 노랫말은 듣지 못하고 소리만 듣는 내 귀에 곱고 아름다운 목소리다.
오후, 낮잠 한 숨 자고 일어나 타라 브라크 번역. 마지막 장(章)이다.
가슴 속에, 모든 것이 만나는 장소가 있다.
나를 찾고 싶거든 그리로 가라.
마음, 감각, 영혼, 영원… 모두 거기에 있다.
광대무변한 사발, 가슴으로 들어가라.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것에 너 자신을 주어라.
일단 네가 그 길을 알면,
깨어서 알아보는 눈이 거듭거듭 너를 부르며
네 입으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 여기에 속해 있다, 나 지금 집에 있다.”
여기 그리고 지금. 누구도 떠날 수 없는 제 가슴에서 우리는 얼마나 멀리 떠나 있지도 않은 황야를 헤매는 것인가? 괜찮다. 거친 방랑도 있을만해서 있는 것이다. (2017. 8. 1)
⎈ 전주에서 유곡(幽谷)이 복숭아 두 상자를 들고 왔다가 일정이 바쁘다면서 점심만 먹고 서둘러 돌아간다. 순전히 복숭아 전해주려고 왕복 네 시간 차를 몰았다는 얘기다. 그만하면 왔다갈 이유로서 충분하다고 했다. 오늘 우리에게 아쉬운 것이 이런 사랑의 낭비 아닌가? 유곡을 보내고서 복숭아 하나 껍질 벗겨 입에 넣으니 과연 맛있다. (2017. 8. 2)
⎈ 수개월 만에 원양 화물선 선장(船長)인 준서 아버지가 왔다. 전에 만났을 때보다 건강하고 단단해진 느낌이다. 효선과 함께 점심을 대접받는데 보리밥 내외와 다슬기가 동석하여 맛있게 먹었다.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은 하나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게 너무나 어려워 삶 자체가 고통이니 이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행복을 위해서 얼마나 사소한 것들이, 행복을 위해서, 필요한지… 참으로 별 것 아닌 것들, 가벼운 것, 부드러운 것, 도마뱀의 살랑거림, 숨쉬기 한 번, 몽당 빗자루, 눈 깜박임…”(프리드리히 니체).
효선과 나란히 저녁 산책을 다녀온다. 박소정 선생이 산다는 연립주택까지 걸었다. 길가에 허물어져가는 빈집들이 보인다. 한 때는 아이와 어른들이 드나들며 삶의 고락을 나누던 곳일 텐데 썩어 무너져 내린 상처들이 가슴에 짠하다. 마찬가지로 머잖아 사라져갈 노인들이 개울가 벤치에 앉아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2017. 8. 3)
⎈ 광주 야마하 악기점에서 온 기술자가 부서진 피아노를 고친다. 이렇게 망가진 악기는 난생처음 본단다. 깨어진 건반과 내려앉은 건반 서른 몇 개를 모두 교체한다. 효선은 부서진 피아노를 보았을 때 이 정도로 피아노가 부서지려면 아주 강한 충격을 가했을 텐데 그 분노의 눈먼 힘이 사람 아닌 물건에 쏟아진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아무튼 건강을 회복한 피아노에서 다시 영롱한 소리가 울리니 고맙고 기분 좋다. 기술자가 여러 시간 수고했다. 단순히 돈 벌자는 행위만은 아닌 것 같아 더욱 고맙다.
타라 브라크 번역. 오늘도 가슴 울리는 대목이 있다.
―수년 전에 나는 바이올리니스트 이작 펄만 이야기를 읽었다. 펄만은 어린 시절에 앓은 소아마비로 평생 발을 절었다. 그래서 연주할 때면 목발에 의지하여 무대로 천천히 들어와 자리에 앉아서 발의 부목(副木)을 풀고 바이올린을 들어야 했다. 1995년 뉴욕 링컨 센터에서도 그랬다. 하지만 이번에는 연주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바이올린 줄 하나가 끊어졌다. 연주장 청중이 모두 줄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까? 사람들은 그것이 궁금했다. 목발 짚고 무대에서 퇴장하여 다른 바이올린을 가지고 나올 것인가?
펄만은 조용히 앉아서 두 눈을 감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다가 지휘자에게 연주를 다시 시작하자는 신호를 보냈다. 그는 곧장 콘체르토 속으로 들어가 상상도 못할 열정과 힘과 순수(純粹)로 연주를 계속했다. 가까이에서 본 사람들은 머릿속으로 열심히 악보를 고치고 바꾸면서 조(調)를 옮기는 그의 진지함을 읽을 수 있었다. 연주가 끝나자 한 동안 무거운 정적이 연주장을 가득 메웠다. 하지만 이내 뜨거운 박수와 함께 모든 청중이 기립하여 환호성을 질러댔다. 펄만이 웃는 얼굴로 이마의 땀을 닦고 손을 들어 사람들의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러고 나서 조용하고 우수(憂愁)에 찬 그러나 조금도 우쭐거리지 않는 음성으로 말했다. “아시다시피 음악가들에게는 아직 남아있는 것으로 어떻게 음악을 만들 것인지 그 방법을 찾으라는 임무가 주어져 있습니다.”
부서진 피아노가 다시 연주할 수 있게 된 오늘 하필 이 대목을 옮기는 것은 무슨 인연(因緣)일까? 분명 의미 없는 우연(偶然)은 아니리라. (2017. 8. 4)
⎈ 점심을 콩국수로 먹는데 효선이 박소정 선생을 초대했다. 그에게서 엊그제 오프닝 행사에 다녀왔다는 부여 송정마을 이야기를 들었다. 마을 늙은이들에게 삶의 보람과 즐거움을 안겨주는 공동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다. 흐뭇한 소식이다. 이런 사업들이 자연발생으로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기를 바란다. 마음도 중요하지만 물질(돈)도 중요하다. 둘 다 없어서는 안 된다. 다만 하나, 그 둘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을 잊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러느니 아예 시도하지 않는 게 낫다. 무엇이 마음보다 물질보다 중요한가? 순서다. 마음이 먼저고 앞이다. 돈은 나중이고 뒤다. 이 순서를 잊지 않고 지키면 거기가 지상낙원이다.
타라 브라크의 ‘참 도피처’(True Refuge) 번역 마침. 일 년 반 동안 글을 옮기면서 행복했다. 인연이 닿으면 책으로 나온 뒤에 다시 읽어볼 수 있겠지. 타라가 맨 마지막 페이지에 옮겨놓은 다이안 애커맨의 시(詩)가 가슴을 울린다. 그렇다, 내가 내 인생이다.
새벽의 이름으로,
눈꺼풀 열리는 아침과
나그네의 한낮과
작별하는 밤의 이름으로 맹세하노라.
눈먼 증오로 내 영혼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겠다고,
자연의 지킴이로
자비의 치유자로
평화의 건설자로
경이의 메신저로
나 자신을 겸손히 내어주겠다고.
태양과 그 거울들과
칠흑 같은 밤의 이름으로,
개똥벌레와 능금의
어김없는 계절의 이름으로,
어디에서 어떤 모양으로 펼쳐지든지
내 삶의 존엄을 지키겠다고.
토요명상. 반디와 마주보고 앉았다. 둘 사이에 촛불 하나 밝히고… (2017. 8. 5)
⎈ 효선과 함께 순천중앙교회 예배 참석. 설교 시간에 홍 목사가 가짜 ‘자비의 집’ 베짜타에서 베짜타의 선착순 경쟁논리를 부정하고 전혀 다른 생명의 길을 가리키는 예수를 차분하게 소개한다. 한국교회 보수파의 보루임을 자긍하는 전라남도 순천 어머니교회 강단에서 이런 설교를 듣다니! 우선 반갑고 감회가 새로웠다. 한편 저 옛날 우리 스승께서 그러셨듯이 낡은 교리에 길들여진 기성교회로부터의 저항이 적잖을 텐데… 쓸데없는 걱정이 드는 걸 어쩔 수 없다. 마당에서 인사하는 홍 목사의 땀에 젖은 손을 잡고 진심으로 들리지 않게 말해주었다. “고맙소. 우리 스승이신 큰형님이 뒤에서 흐뭇이 지켜보신다는 것 잊지 맙시다.”
목우가 ‘말씀과 밥의 집’ 간판을 세 개씩이나 보냈다. 둘은 이 집 앞문 뒷문에 걸고 하나는 임계에 걸어야겠다. 3시 예배에 반디 가족이 왔다. 내가 너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하신 예수, 그 약속을 의심치 말고 최선을 다하여 그분을 따르고자 애쓰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일의 전부라는 이야기를 나눈다. 반디가 내 편을 들어줬으면 좋겠다는 소리샘에게 말해준다. 예수 이르시기를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대접하라 하셨으니 네가 먼저 조건 없이 반디 편을 들어주라고. 아멘―이라고 했거니와 부디 그대로 되기를. (2017. 8. 6)
⎈ 아침에 효선이 ‘말씀과 밥의 집’에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할 것인지 막연한 생각을 버릇처럼 하고 있는데 분명하고 단호한 말씀 한 마디 들리더란다. “내 집이다!” 그러니 이 집에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네가 염려할 주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독서모임 ‘바이제 로제’가 이번 주에는 ‘말씀과 밥의 집’에서 초대를 받아 모인다는 알림이 카페에 실린 모양이다. 효선이 말하기를, 하마터면 자기가 집주인으로 초대하는 것처럼 오해받을 수 있고 자기도 그렇게 오해할 수 있었을 텐데 당일에 집을 비우고 강원도에 가서 있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단다. 이 사람 생각이 여기까지 왔구나, 속으로 감사드릴 뿐이다.
경기도 광주 지금여기교회에서 한국 KSCF 성서순례 모임. 중고등학생 열 댓 명이 모였다. 어떻게 하면 이 녀석들에게 쇼크를 줄 것인가? 그것도 부드럽고 진하게… (2017. 8. 7)
⎈ 오전 모임 마치고 치과 다녀옴. 결국 남은 어금니마저 뽑기로 했다. 류 원장이 발치해야겠다고 말하는데 나도 모르게 “오케이, 좋아!” 했다. 곁에 있던 최 간호사가 이 뽑는 게 그렇게도 좋으냐고 묻는다. 물론 싫다고 할 수도 있고 언짢아할 수도 있지만, 내 이를 나보다 더 아끼고 걱정하는 전문 치과의사가 뽑겠다는데 “오케이, 좋아!” 말고 다른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오케이, 좋다! 무슨 일이 일어나려거든 일어나라. 나는 조건 없이 “오케이 좋아.”다. 아니, 실은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나에 대하여 무슨 말로든 이렇다 저렇다 단언할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모임 마치고 장 목사가 밤늦게 부암동 집으로 데려다준다. 대문에 붙어 있는 소리 그림을 슬쩍 건드리니 툭 떨어진다. 접착제 효능이 다된 모양이다. 실은 그게 아니라 여기는 더 이상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이제 자리를 옮길 때가 되었다고, 그러는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효선이 그림을 순천으로 가져가고 싶은데 강력 접착제로 붙인 거라서 잘 떨어질는지 그게 속으로 걱정이었단다. 아주 사소한 것들에 주목할 것! (2017. 8. 8)
⎈ 오는 18일에 이를 뽑기로 예약했지만 그때까지 미룰 게 뭐 있나? 오늘 정선 가는 길에 뽑자, 해서 치과병원 문 열자마자 이를 뽑았다. 이제 엄마가 준 어금니는 한 개도 남지 않았다. 그동안 나를 먹여 살리느라고 말없이 고생한 어금니들, 고맙다. 아, 얼마나 많은 내 살과 뼈들이 나를 살리느라고 죽어갔던가? 내가 내 살을 먹고 사는구나. “너를 살리려고 죽어간 네 살과 피, 그것이 너의 스승이자 벗인 나다. 너도 그렇게 죽어라. 거기 영생의 길이 있다.” 내 어금니는 자살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마다 않고 감당하다가 수명을 다했을 뿐이다. 잊지 말자.
임계 도착. 그동안 교회 식구들이 뜰을 정리하고 나무도 베고 꽃도 심고… 땡볕에 수고한 것이 눈에 보인다. 한님이 이곳을 어떻게 사용하실지 궁금하지만 미리 예상하고 싶지 않다. 짓는 동안 여러 사람이 고생을 보탠 집인데. (2017. 8. 9)
⎈ 동해바다가 보고 싶어 동해로 갔다. 비 내리는 바다. 거센 파도들이 흰 물보라를 일으키며 부서진다. 생기면서 사라지는 덧없는 물결들. 하지만 저것들이 있어서 고요와 생동의 바다 또한 있는 것 아닌가? 보이는 것들 뒤에 고향집 어머니처럼 숨어있는 보이지 않는 것을 느끼고 있는데 곁에서 효선이 저 파도들을 여태 쓰지 않은 말로 표현해보란다. 새 말이든 헌 말이든 그것을 어찌 ‘말’로 표현할 것인가? 입을 다물고 있자니 “내 말 듣고 있어요?”라고 묻는다. 그냥 웃고 만다. 그렇다, 뭐가 있다. 멀지 않은 데 있다. 느껴진다. 하지만 말로는 할 수 없다. 이럴 때는 입을 여는 게 아니다. 현경을 불러내어 함께 곰칫국으로 점심. 초등학교에서 적응 못하는 아이들 상담하며 지낸단다. 집으로 돌아오니 지금여기교회 다섯 식구가 도착하여 가마솥에 옥수수를 삶고 있다. (2017. 8. 10)
⎈ 누구의 허물이나 잘못에 대한 지적은 그 동기와 내용이 어떻든 간에 끝이 날카로운 칼이다. 함부로 휘두를 물건이 결코 아니다. 오랜 세월 많은 사람에게 ‘지적 질’을 하면서 살아왔다. 진심으로 뉘우친다. 내 말에 상처받은 이들이 있다면 부디 용서해주시기 바란다. 왜 스승께서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는지 이제 좀 알겠다.
오랜만에 중봉산 임도를 걷는다. 무슨 생각에 골몰하여 걷다보니 어느새 중간 삼거리다. 더 걸을까 하다가 돌아섰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지만 그것 말고 사람의 길에 다른 무엇이 더 있을 것인가? 응달을 만들지 않고서 햇볕을 받을 순 없는 일이다. 적어도 이 지구별에서는 그렇다. 누구를 진정 사랑하려면 그가 만든 그림자를 먼저 품에 안을 수 있어야 한다.
폴 틸리히가 1955년도 유니온 신학대학 졸업식에서 한 설교 번역. “병들 수 있는 사람(who can become sick)이 그러지 못하는 사람, 존재하는 것으로만 남아있는 사람, 자기 안에서 분열될 수 없는 사람(unable to be split in itself)보다 큰 사람이다. 자유로운 사람만이 자신의 자유를 족쇄로 바꿔놓는 악령의 힘에 굴복할 수 있다. 자유라는 선물에는 예속의 위험이 포함되어 있고 생명의 풍요에는 질병의 위험이 포함되어 있다.” (2017. 8. 11)
⎈ 지금여기교회 어른 20여 명이 아이들과 함께 도착. 아이들은 벌써 개울에 내려가 피라미 잡느라고 시끄럽다. (2017. 8. 12)
⎈ 새벽길을 떠나 순천을 향하는데 중부내륙고속으로 접어드니 이정표에 괴산이 나타난다. 괴산이면 기림이 있는 동네다. 마침 주일이라 틀림없이 집에 있겠다 싶어 연락도 없이 신풍교회 마당에 차를 세웠다. 뜻밖의 방문에 김 목사가 반가워한다. 설교가 확실하고 복음적이다. 발음도 분명해서 거의 모든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 주어진 일에 충실한 모습이 보기 좋다. 기림이도 얼굴과 손이 깨끗해져졌다. 게다가 눈감고 기도하는 모습에서 제 할머니 얼굴이 얼핏 보여 속으로 놀랐다. 어머니가 기도할 때면 늘 저런 얼굴이셨지. 입술을 아래로 향해 앙다물고… 함께 국수로 점심 먹고 다시 출발. 순천까지 길이 참 멀다. 효선이 휴게소에서 쉬긴 했지만 몸이 극도로 고단하여 몸살기운에 두통까지 호소한다. 도착하는 대로 곧장 약을 먹고 잠에 빠져든다. 차에 싣고 온 짐은 내일 내려야겠다. (2017. 8. 13)
⎈ 풍경소리 독자 모임이 어제부터 열리고 있다. 오후 2시 반에 빗속을 뚫고 학교에 가니 낯익은 얼굴들이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공주에서 소하가 옥주와 함께 내려와 오랜만에 반가웠다. 내가 몸이 많이 쇠약해졌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괜찮아 보이니 안심이란다. 고맙다. 원 선생 안부를 물으니 잘 계신다고… (2017. 8. 14)
⎈ 사랑어린 여름 예술학교가 오늘 개학이다. 아이들과 부모들이 모였다. 뜻밖에도 외사촌 아우 동규가 학교 운동장에서 인사를 한다. 처음엔 몰라봤다. 자기 손녀가 이번 캠프에 참석하게 돼서 데려왔단다. 어려서부터 집안 어른들의 칭찬을 받으며 자란 친구다.
풍경소리 독자들이 오전에 와서 이야기 나누다가 효선이 마련한 점심을 먹고 각자 집으로 돌아간다. 호일이 완연한 농부 모습으로 나타나 고맙고 반가웠다. (2017. 8.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