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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시가에 나타난 선인들의 해학과 사랑
가락문학 연수자료 / 2007.9.15(토)
주 오 돈
<서동의 사랑>
백제 서동은 이웃 나라 신라 진평왕 셋째 딸 선화공주가 예쁘다는 소리를 듣고는 무작정 길을 나선 것이다. 사랑을 위해 마를 짊어지고 국경을 넘어 신라로 잠입한 밀입국자요, 불법체류자다. 서동은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산을 넘었고 강도 건넜다. 이리하여 경주로 들어와 먼저 골목 아이들을 꼬드겼다. 가지고 온 마를 구워 건네면서 자기가 부르는 노래를 퍼트리라 했던 것이다.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정을 통하고
서동 도련님을
밤마다 몰래 안고 간다.
구운 마를 건네받은 경주 아이들은 서동이가 시킨 대로 뜬금없이 이 노래를 부르고 다녔던 것이다. 아마도 이 노래의 위력은 몰래 카메라에 담았다는 유명 연예인의 사생활처럼 여러 사람의 입방아에 올랐으리라. 당연히 공주의 부모인 진평왕과 왕비까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 현숙한 선화공주의 순결을 어느 누구도 믿어주지 않으려 했다.
선화공주는 끝내 궁궐에서 쫓겨나야 했다. 이걸 놓칠 서동이가 아니었다. 아마도 서동은 몇 날 며칠을 대궐 개수구멍에 엎드려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공주인지라 금붙이 한 도막을 싸서 내보냈단다. 서동은 울먹이는 공주에게 은근슬쩍 다가가 든든한 동행인이 되었다. 그리고는 아득히 왔던 길을 되돌아갔던 것이다. 둘은 결혼하여 그렇고 그렇게 해서 임금까지 올랐다. 그가 백제의 제 30대 무왕이 아니던가.
<삼십육계>
안에서 하던 직원체육이 바깥까지 옮겨지는 날이 가끔 있다. 그 때는 자리와 나이에 관계없이 술잔을 앞에 놓고 펼치는 연장전이다. 뭐 자리라고 해 봐야 명태전이나 주꾸미 안주로 돌리는 소주잔 정도다. 간혹 입가심이라며 맥주 자리도 있기는 했던가. ‘월하미인月下美人’이라고 그럴 때 찾은 술집 여자는 어찌 그리 얼굴이 곱던지. 달빛 아닌 불빛 아래서도 여자는 여자인지라. 아마 대한민국 여자를 미모 순으로 찾아 나선다면 가까운 술집부터 차근차근 뒤지면 되리라.
유학을 이어온 큰 봉우리들 가운데 송대宋代 정주학程朱學을 연 학자로 정호와 정이 형제가 있다. 이 둘이 스승을 만나고 인재를 구하러 다닐 때였겠지. 날이 저물자 주막에서 하룻밤 묵고 다시 길을 나서 걷다가 나무그늘 아래서 쉬고 있을 참이렷다. 아우가 “형님, 간밤 묵었던 주막의 주모가 참 미색이었지요?”라며 입맛을 다시더란다. 이 말을 받은 형은 “예끼, 이 녀석! 난 간밤의 일은 아침에 길을 나서며 미투리 끈 묶을 때 이미 다 잊었단다.” 속세에서도 학문에서도 형은 역시 형다운 부분이다.
<눈썹에 맞초이다>
목민관 주세붕이 백성을 교화할 목적으로 남긴 시조가 전한다. 그 제목부터 다분히 의도하는 바가 드러난 오륜가五倫歌 여섯 연이다. 참, 오륜이면 다섯 덕목인데 왜 여섯이냐 하면 맨 앞에 머리말이 붙기 때문이다. 이는 오우가도 마찬가지다. 이 분의 그 작품 넷째 연은 이렇다.
지아비 밭 갈러 나간 데 밥 고리 이고 나가
밥상을 들어서 눈썹에 맞초이다
친코도 고마오시니 손이시나 다르실까.
신사고 눈높이로 본다면 이런 보수 꼴통이 어디 있냐고 펄쩍 뛸 일이다. 밥상도 밥상이지만 남편을 손님처럼 섬기라니. 가게서는 손님이 왕이라고 하는데. 그럼, 남편을 왕처럼 섬기라는 말인가. 너무 오해하지 마시라. 삼강오륜三綱五倫의 ‘강綱’을 풀어보면 ‘벼리’라는 뜻이다. 그 벼리는 고기잡이할 때 드리우는 그물에 매다는 납덩이다. 그물은 낚시 줄과 다르다. 낚시 줄은 달랑 하나이지만 그물은 이 벼리가 있기에 가로 세로 균형을 이룬다. 전통윤리가 수직적인 것만은 아니다. 수평적 인간관계도 함께 유지될 때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위 작품에서 바로 잡을 부분이 한 곳 있다. 주세붕은 아내 맹광이가 밭일 나간 남편 양홍에게 밥상을 이고 나간 상황으로 설정했다. 둘이 모함 받아 이웃나라로 쫓겨 가기 전에는 이런 장면이 그려진다. 내가 어렸을 적 우리네 농촌에서도 아낙들이 새참을 머리에 이고 들녘으로 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거안제미擧案齊眉는 들일 갔을 때 이고 나간 밥상이 아니라, 이웃나라로 쫓겨 갔을 때 양광을 도와준 고백통의 방앗간지기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맹광이 올렸던 밥상이다.
<형님형님 사촌형님>
확돌에다 우리 할머니 어머니들은 상추도 헹구고 부추도 다듬었다. 마을 아낙들이 우물가에 와서 모두가 함께 쓴 이 확돌은 반질반질 닳아 매끈매끈했다. 여럿이 함께 썼지만 그 안과 밖은 아주 깨끗하게 사용했다. 내 어려 마을 공동우물을 지날 때 확돌을 본 선명한 기억이 있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때 초가집붕이 걷어지고 전깃불과 간이상수도가 들어오면서 우물가 확돌도 사라졌다.
그런데 확돌은 사라져도 확돌 언저리에서 불렸던 노래는 사라지지 않고 있더이다. 그 우물가에서 시어머니 시누이 눈치 보지 않고 걸쭉하게 토해냈을 당시 우리 아낙의 노래가 있더이다. 부엌 강아지한테도, 빨래터에서도, 다듬이질로도 달래지지 않던 시름을 이 우물가에서 풀었던 것이다. 아낙들의 시작이야 특유의 수다로 시작했겠지만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애절한 ‘시집살이노래’ 가락이 절로 퍼졌을 것이다.
형님 온다 형님 온다 보고저즌 형님 온다
형님 마중 누가 갈까 형님 동생 내가 가지
형님 형님 사촌 형님 시집살이 어떱데까
이애 이애 그 말 마라 시집살이 개집살이
……
열새 무명 반물치마 눈물 씻기 다 젖었네
두 폭 붙이 행주치마 콧물 받기 다 젖었네
울었던가 말았던가 베개 머리 소沼이겠네
그것도 소이라고 거위 한 쌍 오리 한 쌍
쌍쌍이 떼 들어오네.
아쉽게도 이 노래는 이제 청각적 울림으로는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이처럼 비록 문자언어로나마 만나지만 사라진 바위에 박힌 화석처럼 나한테는 또렷하게 남아있다. 어쩌면 이 노래 후반부에 나온 한 마리 오리나 거위가 나의 젖먹이 자화상인지 모른다. 빛바랜 흑백사진에 박힌 내 유년의 모습처럼.
<춘풍 이불아래>
달은 또 다른 속성이 있다. 해는 매일 떠오른다만 달은 어찌 그렇던가. 더구나 보름달은 한 달에 한 번뿐이다. 그것도 구름 끼거나 비 오는 날이면 공치는 날이다. 밤은 대체로 물상이 활동을 멈추는 시간이다. 그리고 새벽이 오기까지 내공을 축적하는 신비로운 시간이다. 이 밤에 달은 동녘하늘에서 서녘하늘로 이동하고 있다. 어둠이 깊어 가면 새벽은 더 가까이 오고 있는 것이다. 이 밤에 진이는 그 진가를 발휘하고자 단단히 벼르는 요염함이 대단한 여자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베어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정든 임 오신 밤에 굽이굽이 펴리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만한 사랑시가 어디 있으랴 싶다. 진이가 남긴 많지 않은 작품 가운데서도 이것이 단연 으뜸이다. 단순한 어휘 해석으로만 본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상황을 설정했다. 어찌 시간을 잘라서 공간으로 옮겨 놓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한 계절을 훌쩍 건너서 말이다. 즉, x축에 있어야 할 좌표 점을 y축에다 옮겨 놓았다.
길쭉한 갈치라면 살점 깊은 가운데 부분을 싹둑 잘라 생선 보관실이나 냉동실에 둘 수 있다. 동짓달에 잘라 봄날 저녁밥상에 올릴 수도 있겠지. 그런데 외롭게 지내야하는 동짓달‘긴 밤’을 잘라 비닐봉지에 가둘 수가 있겠나, 옷장에다 보관할 수가 있겠나. 그런데 진이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이런 기발한 착상을 해 내었다. 그리고 임과 함께 하는 봄의 짧은 밤 시간을 연장하려 든다. 그런 밤에 둘은 무엇을 하려고.
이것은 문학이기에 가능했던 표현이다. 자연의 섭리에는 있을 수가 없다. 그러면서 신의 피조물인 인간이 우주의 원리를 거슬리면서도 벌 받지 않았다. 사랑은 국경만 없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진행 원리에 어긋나도 되는가 보다. 황진이는 정말 희대의 사기꾼이었고, 천하의 거짓말쟁이였다. 다만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용서받았을 뿐이다. 내가 시대만 잘 만났어도. 평범한 서생書生이었다면 어쩔 수 없어도 그 시대 현감이나 부사가 되어 그 황진이를 한 번 만났더라면.
<왕따 원조>
그는 나이 열두 살 때 당나라로 유학을 갔다. 그 시절은 요즘 미국이나 영국으로 가는 유학보다 더 어려운 길이었을 것이다. 경주에서 땅끝 마을까지 가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기회를 엿보아 장사꾼에게 사정하여 뱃길로 산동성에 닿았을 것이다. 그의 문장은 ‘황소의 난’을 평정하는 데도 공을 세웠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외국인끼리 겨루는 과거에 급제하여 그곳에서 벼슬살이도 하였다. 그가 그 시절에 남긴 작품으로 ‘가을비 내리는 밤’이 있다.
가을바람에 이렇게 외로이 읊건만 秋風唯苦吟
세상 어디도 날 알아주는 이 없네 世路少知音
창 밖에는 깊은 밤 비가 내리고 窓外三更雨
등불 아래 천만 리 떠나는 마음 燈前萬里心
그의 총명함은 주변의 부러움을 사면서도 질투도 많이 받았을 것이다. 요즘 아이들 말로 얼굴 잘 생기고 공부 잘하는 녀석이 제일 얄밉다지. 그는 십 년 넘는 외국생활에서 그렇지 않아도 우수에 젖어있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가을밤에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고 했으니 얼마나 고향생각이 간절했을까. 요즘처럼 국제전화나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 아니던가. 학문적인 성취는 이루었다지만 사회적 인간관계에서는 원만하지 못했을 것이다. 학자는 원래 옹생원이다.
당으로 건너간 홍안 소년은 나이 스물여덟 청년이 되어 신라로 돌아왔다. 당시 경주 바닥에서 인품이나 실력으로야 그를 따라갈 인물이 없었을 것이다. 신라는 하대로 내려오면서 나라 기강이 흐트러지고 있을 때였다. 왕에게 나라 혁신을 위한 열 가지 정책을 제안하나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현감 정도 벼슬이야 살았지만 그의 한계는 골품제를 뛰어 넘을 수 없는 데 있었다. 성골이니 진골이니 하는 족속들이 다해 먹는 세상에 고작 그는 육두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난세를 비관하고 속진을 떨어버리려고 다시 길을 나섰던 것이다. 그리하여 머물렀던 곳이 해운대고 월영대다. 천년이 지난 지금은 그곳들도 사람들이 박작거리는 주막이 들어서서 장터가 되고 말았다. 아마도 최치원은 당나라에서도 왕따 당하고 신라서도 집단 따돌림 당한 시대의 불운아였다. 그리하여 가야산으로 숨어들어 책을 읽으며 세월을 달래다 홀연 신선이 되어 종적을 감추었다. 바다 위 뜬구름처럼 한 조각 외로운 구름이 되어 흩어졌던 것이다.
<풍월주인>
산에는 한 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엄정한 질서가 있다. 나뭇잎이 돋아나고 꽃잎이 피어나는 차례는 신이 정한 섭리에 따르는 것이다. 수풀은 서로 다툰다거나 그 순서가 뒤바뀌지는 않는다. 잡목으로 섞여 있는 산인가 싶어도 이른 봄이면 아래서부터 위로 오르면서 연두색으로 물든다. 가을이면 꼭대기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붉게 불탄다. 봄 산은 아래서부터 위로 입어 올리고, 가을 산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벗어 내린다.
조선조에 정극인이라는 선비가 벼슬에서 물러나 전라도 태인에 은둔할 때 봄나들이를 나가 남긴 ‘상춘곡賞春曲’이 전해온다. 무욕 무심의 경지에서 청아하게 봄을 완상한 가사 작품이다. 중간에 이런 부분이 있다.
엊그제 겨울 지나 새봄이 돌아오니, 도화행화는 석양리에 피어 있고, 녹양방초는 세우 중에 푸르도다. 칼로 말아낸가, 붓으로 그려낸가, 조화신공이 물물마다 헌사롭다. 수풀에 우는 새는 춘기를 못내 겨워 소리마다 교태로다.
나는 수업을 하다가 이 대목에서 잠깐 쉬어간다. ‘물물마다 헌사롭다’라는 표현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본다. 일부 아이들은 ‘온갖 사물이 야단스럽다’고 한다. 그러면 왜 야단스러워야 하느냐고 물으면 말을 잇지 못한다. 한 해에 꼭 한번만 때맞추어 피는 꽃인데 그냥 수수하게 피어나선 곤란하다. 겨우내 벼르고 벼른 봄날이었다. 이 한철을 위해 한껏 치장하고 품어낼 향기를 모아 두었던 것이다. 그것이 제 진가를 발휘하는 것이다.
한 구절 뒤에 있는 ‘소리마다 교태로다’는 왜 그래야 하느냐고 또 물어본다. 왜 아양을 떨어야 하느냐고 말이다. 아이들은 멀뚱멀뚱 머뭇거리고만 있다. 이 역시 일 년에 딱 한번 찾아오는 짝짓기를 하기 위해서라고 내가 거들어야 한다. 대를 잇는 종족보존을 위해서는 새끼를 까야 한다. 벌레나 씨앗을 주워 먹고 양기가 가득 오른 수컷은 암컷에게 잘 보이려고 목청 가다듬어 뽑는 거란다. 그래야 암컷은 멋진 상대가 누굴까 눈을 두리번두리번 찾아 나설 것이다.
<가슴에 낸 창문>
창 내고자 창을 내고자 이내 가슴에 창을 내고자
고모장지 세살장지 들장지 열장지 암돌저귀 수돌저귀 배목걸쇠 크나큰 장도리로 뚝딱 박아 이 내 가슴에 창 내고자
이따금 많이 답답할 때면 여닫아 볼까 하노라.
이 사설시조는 다른 작품에서도 그렇듯이 지은이가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다. 아마도 짐작컨대 세상사 풍상을 다 겪은 중년 이후의 여성이 먼저 노래하지 않았나 싶다. 바깥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당시 조선 여성들은 삼종지도三從之道의 굴레를 벗어나기가 어려웠을 테다. 하루의 대부분 동선이 대문 안에서만 왔다갔다한 우리네 옛 아낙의 심정으로 헤아려진다. 그 당시 시집식구와 갈등 앞에 마음 조여야했고, 남편의 바람기에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자녀한테도 어머니의 자리는 그렇게 넓지 못했을 것이다.
일부 사대부 양반가문에서야 법도가 있어 여성 권익은 보호받았다. 그러나 대부분 상민과 하층 아낙은 일상의 스트레스를 푸는 통로는 제한되었다. 우물가 수다 떨기가 그 하나이고, 빨래터 방망이질이 그럴 수 있다던가. 더러 부엌강아지와 공생관계로 누룽지를 먹이고 발길로 차는 정도였다. 우리 어머니나 할머니들은 으레 이런 시조나 민요 가락으로 시름을 달랬었다. 오죽했으면 의학계에서도 한국인의 유전인자엔 화병火病이 체질적으로 잠재되어 있다는 설이 나오겠는가.
복잡한 사회구조가 아니었던 예전에는 안으로 삭일 수 없었던 고민이야 많았을 것이다. 더구나 사회활동에 제약이 따랐던 여성의 고민은 그 해결 통로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기발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요즘 같으면 정신과 의사한테 받아야할 진료를 외과 의사한테 맡겨 보려는 것이다. 가슴에다 외과적 수술로 창을 달겠다고 했으니 그 아픔을 감수하고라도 쌓인 시름을 밖으로 풀려는 적극적 의지가 참 놀랍다.
<새끼손가락>
앞서 언급한 정석가는 그 당시 인기가요 순위에서 앞자리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자기가 좋아하는 임과 절대로 헤어질 수 없다는 것을 손가락에 장을 지지고 싶다는 심정으로 매달린다. 도대체 이 사람 앞에서는 이별은 감히 입 밖에 꺼낼 수 없다. 처음부터 임과 헤어질 마음이 손톱 끝만큼도 없는 사람이다. 연을 구분하지 않고 재구성해 보면 이런 내용이다.
절벽 바위틈 모래에다 구운 밤 다섯 되를 심어 그 밤에서 싹이 돋아야 임과 헤어지겠나이다. 옥돌로 연꽃을 조각하여 바위에다 접을 붙여 돋아난 가지에 꽃이 피면 임과 헤어지겠나이다. 무쇠로 갑옷을 지어 그 옷을 꿰맨 철사가 닳으면 임과 헤어지겠나이다. 무쇠로 큰 소를 만들어 그 소를 쇠풀이 자라는 산에다 놓아서 쇠풀을 뜯어먹으면 임과 헤어지겠나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요즈음 사랑은 쉬 달아올라 쉬 식어버린다. 이 정석가는 무쇠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진수로 보여준다. 찰거머리같이, 찰떡궁합같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런 사랑이 곳곳에 넘쳐났으면 한다. 예식장에서 주례는 가정을 이루는 신랑신부에게 이 정석가를 외우도록 해 혼인 서약으로 대신했으면 한다. 옛날 동심으로 돌아가 새끼손가락을 거는 심정으로 말이다.
<그대, 잔 받게나>
내가 보기로는 그녀는 아마 당대 명기이기 이전에 명의였지 싶다. 그냥 헤픈 웃음으로 잔에 술을 따른 기녀가 아니지 않은가. 그녀가 명의인 것은 진맥을 잘 해서가 아니다. 침을 잘 놓아서가 아니다. 약을 잘 조제해서도 아니다. 풍류를 아는 남성만 고객으로 맞은 정신과 전문의였다. 치열하게 당대를 고민하고 인생을 번뇌하는 품격 높은 환자들이 그녀를 찾았다. 시대와 불화를 겪고 그녀를 찾아온 사내들에게 맞춤형 진료와 처방으로 우울을 치료해 주었던 것이다.
설에 전하기로 그녀가 간지 스무 해 정도 지날 무렵이란다. 퇴기가 죽어 지어진 봉분이 뭐 그리 번듯했겠는가. 초라한 무덤 앞에는 ‘명월황랑지묘(明月黃娘之墓)’정도 적힌 목비가 세워졌을 것이다. 그것도 비바람에 삭아 기울고 있었을 것이다. 누가 찾아와 벌초하고 기제사 지내주는 이도 없었을 것이다. 그 무덤을 임제가 찾아갔던 것이다. 평양 부임지로 가는 길에 개성을 지날 무렵이었겠지. 임제가 그녀를 생전에 한 번이라도 만났는지 내가 고증할 길 없다.
그녀의 생몰연대가 부정확해도 임제보다 조금 앞 시기였지 싶다. 젊은 임제는 주변 눈치 보지 않고 용기 있게 그녀를 찾아 술잔 올렸다. 뭇 남자들에게 잔만 따르다 한평생 보낸 그녀다. 그녀가 어찌 술잔에 술만 채웠겠는가. 한숨도 채우고 눈물도 채웠을 것이다. 저울로 달 수 없고 자로 잴 수 없는 마음도 분명 잔에 채웠을 것이다. 그러면서 달이 차고 기울어 해가 가고 또 오고했던 것이다. 임제가 들렸을 때는 이미 먼 길 떠나고 없었다. 그래서 임제는 무덤까지 찾아 잔을 권했다.
살아 뭇 남자를 애태우고 행복을 빌어주며 살아온 그녀다. 죽어 단 한 남자가 올린 술잔으로 더 행복해진 그녀다. 진이가 채워준 여러 술잔의 총질량과 임제가 올린 단 한 잔의 질량은 칼로리나 알코올 도수로 보면 같은 것이다. 단지 이승과 저승의 간극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임제처럼 때 늦게 무덤까지 찾아가 잔 잡고 권하려는 수고는 안 해야 할 텐데. 내 남은 생애 옷깃 스친 인연들과 이승에서 동고동락하고 해원하길 소망한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가 누웠는가
홍안(紅顔)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가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조각달 배를 타고>
부모가 돌아가면 천붕(天崩)이라 해서 하늘이 무너지는 만큼의 슬픔이라 했다. 누가 조금 먼저 겪느냐 늦게 겪느냐의 시차는 있을지라도 한 번은 떠나 보내야하는 별리다. 지나고 나서 후회하지 않도록 생전에 각별히 마음 써서 행해야 할 인간의 기본 도리다. 친가 처가 부모를 다 여의어 더 기댈 언덕이 없는 나는 무거운 납덩이가 가슴 한 구석을 차지한 듯하다.
부모가 돌아가는 상황보다 더 절절한 슬픔을 느낄 때가 형제자매를 떠나보낼 때란다. 부모가 돌아갈 때는 무너지는 하늘이라도 보이는데 형제자매의 별리에는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다고 한다. 내가 아직 이런 상황에 부닥치진 않았지만 형제가 많은 나로서는 언제까지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피한다고 될 일도 아니기에 마음속으로나마 적선과 공덕을 쌓으려고 노력한다.
신라적 스님 가운데 피리를 잘 불렀던 스님으로 월명스님이 있었다. 그가 달밤에 피리를 불면 서쪽으로 기우는 달도 피리소리에 감명하여 밤하늘 가운데 일시 멈추더라는 것이다. 그곳 마을이 월명리라 한다. 그는 문학적 재능도 있어 향가 도솔가와 제망매가를 남겼다. 아마 우리 기록에 남은 최초의 편지이지 싶다. 그것도 산 사람이 죽은 사람에게 보낸 영혼편지다.
삶과 죽음의 길이 / 여기 있음에 머뭇거리고 / 나는 간다는 말도 / 못다 이르고 어찌 갑니까. /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 이에 저에 떨어질 잎처럼 / 한 가지에 나고 / 가는 곳 모르는가. / 아아, 미타찰에서 만날 나 / 도 닦으며 기다리겠노라.
무슨 연유인지 모르나 월명스님은 누이동생을 황급히 보내야 할 처지였지 싶다. 누이를 먼저 보내면서 정말 앞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잃었던 정신을 차려 극락왕생을 비는 재를 올릴 때 비로소 이 편지를 쓴 것이다. 오누이를 같은 뿌리로 해서 뻗어 나온 가지에 달린 나뭇잎에다 비유했다. 그러고 너는 어찌 그렇게 먼저 떠나가야 하느냐고 안타까워한다.
마음씨 착한 월명스님은 먼저 보낸 누이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라도 착하게 살았을 것이다. 저 멀리 서방정토를 가려면 교통편이 있어야 한다. 그래도 월명스님은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평소 쌓은 선행과 공덕으로 서방정토 가는 배편을 알고 있었다. 그믐이 다가오는 어느 날 밤 피리를 불며 조각달에 살짝 올라탔던 것이다.
<사랑과 영혼>
우리나라 문화재 발굴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이 71년 공주 송산리 무령왕릉이다. 왕릉이라고는 한 곳 드러나지 않은 백제 땅에서 왕의 무덤임을 확인해준 지석명문이 나와 당시 문화재 관계자들을 흥분시켰던 것이다. 아마 이에 버금할 만한 역사적 사건이 98년 안동에서 택지를 개발하다 우연히 드러난 고성이씨의 무덤이다. 무덤 속 주인공의 신분이 높아서도 아니고 부장품으로 금붙이나 골동품이 쏟아진 것도 아니다.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다른 사람도 우리처럼 어여삐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처럼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들 생각하지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가요?
위 글은 고성이씨 집안으로 시집온 성씨를 알 수 없는 여인이 쓴 편지의 일부다. 서른한 살에 생을 마친 지아비를 보낼 때가 420년 전인 병술년(1586년) 유월 초하루였다. 한지에다 당시 표기법으로 또박또박 세로로 써 내렸다. 하고픈 말을 맺지 못한 채 종이가 모자라자 모서리를 돌려 위쪽에다 가로로 눕혀서 절절한 슬픔을 빼곡하게 적어갔다. 편지 내용으로 미루어 ‘원이 어미’는 아마 다섯살 바기 쯤 되는 첫아들 원이와 뱃속에는 둘째를 품고 있었다.
이 무덤은 편지만으로도 놀랄만한 일인데 더 감탄할 부장품이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미투리였다. 이 미투리는 그 당시 생활사를 엿보는 단순한 게 아니었다. 이 편지를 쓴 원이 어미가 머리카락을 잘라 삼 줄기와 같이 섞어 정성들여 삼은 섬세한 미투리였다. 아마 짐작컨대 투병중인 지아비를 위해 삭발 병간을 했나보다. 반가의 여인이 머리카락을 자른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닐 것이다. 지아비의 병세가 나아지길 간절히 바라면서 잘랐을 것이다.
그 머리카락으로 삼아 만든 미투리는 병세가 나아지면 지아비한테 신겨 함께 나들이 갈려고 준비한 것이리라. 둘이 손잡고 나들이가 꽃도 보고 새도 보고 정답게 거닐고 싶었을 것이다. 이 미투리를 지아비에게 한 번 신겨주지 못하자 저승 가는 먼 길에라도 신으라고 편지글과 함께 관속에 넣었을 것이다. 오호, 통재라. 애재라. 가슴 아프고 슬픈 일인지라. 원이 어미의 이 지극한 간병에 하늘도 정말 무심하셨지. 하늘은 왜 지아비를 그렇게 빨리 불러 들였는지.
<눈물의 영상편지>
“지난해 사랑하는 딸 잃고 올해 사랑하는 아들 잃었네. 슬프고 슬프도다. 광릉 땅이여. 두 무덤 서로 마주하고 있구나. 백양나무 사이 소슬바람 불고 귀신불은 공동묘지를 밝힌다. 종이돈으로 너의 혼을 부르고 맑은 정화수를 너의 무덤에 뿌린다. 응당 남매 혼임을 서로 알아 밤이면 밤마다 서로 같이 놀아라. 비록 배 속에 아이 들었거니 어찌 잘 크기를 바라겠는가? 구슬픈 황대 노래 읊조리면서 소리 삼키며 피눈물로 슬퍼하노라.”
위의 인용 글은 허난설헌이 두 아이를 먼저 보내고 읊은 오언율시를 풀어 적은 것이다. 당시는 영아사망률이 높았던 시기라 채 피지 못하고 꺾어진 꽃들이 어디 한둘이기는 했겠는가? 그녀는 이 가혹한 시련을 연이어 두 번이나 겪어야 했다. 부모 복을 못 탔다면 남편 복이라도 있어야 했는데. 남편은 허구한 날 바깥으로 나돌고 자식마저 먼저 보내야하다니. 그래서 규방 여인으로 세상을 원망하는 노래를 남기기도 했다.
미인박명이라 했던가. 그녀에게 사랑과 야망은 허영이고 사치였나 보다. 그래도 짧게 살고 갈 것이라는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고나 있은 듯 불꽃처럼 뜨거운 창작열을 보였다. 상처받은 조갯살이 진주를 만든다고 했다. 슬픔은 영혼을 정화시킨다고 했다. 눈물로 지새운 고독의 밤 시간을 예술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닥친 시련을 이겨내어 남자보다 통 크게 세상을 바라봤다.
그래도 두 아이를 먼저 떠나보낸 허전한 가슴팍은 어디에 비할 곳 없었을 것이다. 바람 부는 날이면 바람 분다고, 눈비 오는 날이면 눈비 온다고 이승의 어미는 저승의 두 아이 생각에 잠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는 아이대로 어미 품이 그리워 쉬 잠들지 못하고 떠나온 발길을 되돌아가려고 보챘을 것이다. 슬픔은 그리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리움은 슬픔을 다독일 수 없었을 것이다. 슬픔이 끝난 그곳에 그리움은 다시 움텄을 것이다.
두 아이를 먼저 보낸 어느 날 어미도 홀연 이승의 끈을 놓고 저승으로 가고 말았다. 식어버린 남편사랑을 더 이상 기대하지 않고 말이다. 그곳에도 놀이동산이 있었다. 두 아이를 상봉한 어미는 회전목마를 함께 탔다. 목마에서 내려 솜사탕 사서 함께 먹으며 비단잉어 놀고 있고 연꽃이 피어나는 연못으로 갔다. 그곳 배경으로 셋은 카메라 폰에다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 영상편지는 바로 이승으로 전송됐다. 받는 사람 성은 김이요, 이름은 성립이었다.
<바람 앞의 등불>
꼬장꼬장한 선비 최익현이 다시 살아난다면 우리 청소년들에게 무슨 말을 해줄까? 머리카락 보고 서양오랑캐 같은 녀석들이라고 크게 노할 것이다. 대마도로 끌려간 최익현은 원수의 밥은 먹지 않고 끝까지 버텼다. 끝내 이국땅에서 숨을 거두고 시신이 조국 땅 부산포로 돌아오자 전국의 유림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발을 동동 구르며 슬퍼했다. 아니, 나라가 망했으니 조국 땅이라고 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때 꾀죄죄한 행색에 괴나리봇짐을 진 시골 선비 하나가 목 놓아 곡하고는 만사(輓詞) 여섯 수를 놓고 갔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가 남기고 간 시 중에 “고국에 산 있어도 빈 그림자 푸를 뿐, 가련타 어디 메에 임의 뼈를 묻사오리(故國有山虛影碧 可憐埋骨向何方)”라 했다. 삼천리강산이 왜놈 땅이 되었는데 시신이 되어 돌아온들 묻을 곳이 그 어디 있냐는 외마디 절규였다. 그는 지리산 자락 구례에서 책을 읽고 글을 지으며 살던 사람이었다. 운집한 군중들은 수백 수천의 만사 가운데 그의 글을 으뜸으로 꼽았다.
이후 나라는 더 기울어 암울해졌다. 그는 고뇌하다 마침내 비장한 결의를 했다. 지식인으로 더 이상 나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절감했다. 그러고는 모질게도 목숨 끊는 시 네 수를 남겼다. 바람 앞의 등불은 마침내 꺼지고 말았다. 다시 불을 밝힐 때까지 서른 하고도 여섯 해가 걸렸다. 국권을 되찾은 조국은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鳥獸哀鳴海岳嚬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槿花世界已沈淪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어라.
秋燈掩卷懷千古 가을 등불에 책 덮고 지난 날 생각하니,
難作人間識字人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구나.
<임금을 꾸짖은 신하>
그는 관리들이 백성을 섬기기는커녕 고혈을 빨아 제 욕심을 채우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지 않았다. 먼저 임금부터 꾸짖어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웠다. “왕대비는 세상 물정 모르는 일개 과부요,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다만 선왕의 한 아드님이실 뿐이니….” 이 추상같은 상소에 임금은 몸이 움찔했을 것이다. 위로부터 기강이 바로 서 있지 않으니 어찌 아랫것들이 처신을 바로 하겠느냐는 것이다. 어느 나라 왕조사에도 이처럼 신하가 임금을 신랄하게 꾸짖은 사례가 없다.
그래도 그도 한 범부이고 백성인지라 멀리서 들려온 임금의 부음 앞에 어쩔 수 없었다. 여러 번 제의 받은 관직을 이 핑계 저 핑계로 거절했던 그다. 임금으로부터 받은 은총도 없거니와 갚아야 할 은혜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화개동천에서 지리산 비경을 예찬한 시조를 남긴 이후 두 번째로 한 수 읊었다.
삼동에 베옷 입고 암혈에 눈비 맞아
구름 낀 볕뉘도 쬔 적이 없건마는
서산에 해 진다하니 눈물겨워 하노라.
그는 합천 삼가고을에서 태어나 젊은 날 한양의 문사들과 교류가 있었지만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김해 처가 곳에 산해정을 지어 학문에 정진하다 다시 삼가로 가서 뇌룡정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이후 산청 덕천강변에 산천재를 세워 경(敬)과 의(義)를 몸으로 실천했다. 진정으로 장엄한 지리산 산세를 닮은 거인이었다. 큰 바위 얼굴은 오백년 전 조선에 먼저 있었다. 글을 가르치는 스승은 만나기 쉬워도, 사람됨을 가르치는 스승은 만나기 어렵다는 말이 있다. 그럼, 나는 어느 쪽인가?
<대동강 둑에서>
사람들이 모여든 강마을은 자연히 문화를 먼저 꽃피웠다. 사람이 모여드니 저자가 생겨나고 그곳엔 주막도 생겨 하룻밤 묵고 떠나는 나그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강이 순기능만 있은 것이 아니었다. 강으로 수운이 발달하기도 하지만 배가 없는 강은 피안과 차안을 분리하는 단절의 기능이 있다. 오늘날 강남과 강북을 이어주는 한강 다리는 스무 개가 넘는다고 한다. 옛날 대동강이나 한강에 어디 다리가 한 개라도 있을 리 없다.
비 그친 긴 강둑에 풀빛은 짙어만 가는데 雨歇長堤草色多
남포로 임 보내니 슬픈 노래 울려 퍼지네. 送君南浦動悲歌
대동강의 물은 어느 때쯤 다 마를 것인가? 大同江水何時盡
해마다 이별의 눈물 푸른 물결에 더하는구나. 別淚年年添綠波
정지상이 대동강을 배경으로 남긴 이 ‘송인(送人)’은 이별 노래 가운데 절창으로 통한다.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까지 통틀어 이만한 애절한 이별시가 없을 것이다. 이 시에서 압권은 전구에서 넘어오는 결구이다.
대동강이 마르기라도 하면 강바닥 저벅저벅 걸어서라도 임 만나러 가겠는데. 웬걸, 나도 홀짝 너도 홀짝 여기서도 저기서도 홀짝거렸다. 강둑에서 모두 이별의 눈물을 흘렸으니 물이 마르기는커녕 더 불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강 건너 떠난 임을 만나기는 글렀다는 것이다. 그 강물, 아마 손끝으로 찍어 맛보았으면 소금기 있어 바닷물처럼 좀 짰지 싶다. 이태백이 흰 머리칼을 삼천장이라 했고 내리쏟는 폭포를 삼천척이라 했지만 이보다 더한 표현이다.
정지상은 묘청의 서경천도를 돕다 라이벌인 김부식 손에 의해 제거되었다. 김부식은 어느 날 멋진 시구를 떠올라 읊어보았다. 유색천사록 도화만점홍 (柳色千絲綠 桃花萬點紅)이라고. 그러자, 허공에서 원통히 죽은 정지상이 귀신으로 나타나 “네 이놈, 김부식! 네가 어찌 버들가지가 천 갈래인지, 복사꽃이 만 송이인지 세어 보았느냐? 유색사사록 도화점점홍(柳色絲絲綠 桃花點點紅)이느니라.” 버들색은 가지마다 푸르고 복사꽃은 송이마다 붉다네. 그곳, 대동강 둑이려나.
<효, 관광 상품이 되다>
흔히 한중록의 ‘한’이 ‘한(恨)’으로 알기 십상인데 한‘(閑)’이다. 한중록(恨中錄 )이 아니라 한중록(閑中錄)이다. 남편 사도세자의 죽음을 한탄하며 지은 것이 아니라 한가한 때 지난날 궁궐 안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이런 제목을 붙인 이면에는 세월이 흐른 뒤에 기록해서 그렇겠지만 젊은 날 남편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애도보다 친정을 더 먼저 생각한 평범한 아녀자의 입장이 우선한다.
혜경궁 홍씨에게는 권력 암투가 지긋지긋했을 것이다. 젊은 날 남편의 안타까운 죽음과 친정마저 멸문 당하는 참극 앞에 인생무상을 느꼈을 것이다. 평범한 아녀자라면 부엌강아지한테 발길질이라도 해 보았을 것이다. 이웃하고 우물가나 빨래터에서 수다로 갑갑함을 풀었을 것이다. 울적할 때 사립문 나서 작은 암자라도 찾아 부처님 전에다 두 손 모아 남편과 친정아버지 명복을 빌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린 세손으로 할아버지 영조 앞에서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한 참극을 직접 목격한 정조다. 왕실의 비극이기 이전에 한 가족의 기구한 운명이었다. 어찌 군왕일지라도 부자의 정과 모자의 정을 모르겠는가. 할아버지를 이어 왕위에 오른 손자는 이 상처 입은 가족사를 잊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하고 양주에 있던 능을 성곽까지 새로 쌓은 신도시 수원 화성으로 이장하면서 어머니와 합장하였다. 수원은 이렇게 세계적인 효의 도시로 각인 되었다. 정조의 효성이 후대 사람들에게 관광 상품으로 뜬 것이다.
“왕은 세자에게 자결을 명했다. 죽음의 그림자를 보면서도 세자는 “아바님, 아바님, 잘못하였으니, 이제는 하라 하옵시는 대로 하고, 글도 읽고 말씀도 다 들을 것이니, 이리 마소서”하고 목이 메도록 빌었다. 섬돌에 머리를 부딪기도 했다. 11세의 어린 손자까지 할아버지께 아버지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영조의 결심은 반석 같았다. 세자를 죽이고자 하는 뜻을 쉬 이루지 못하자, 급기야 뒤주를 가져오라 했다.” 한중록 일부.
권력무상 인생무상 제행무상이라.
<영리한 개>
시조를 가리켜 흔히 국민문학이라 한다. 율격의 정형과 소재의 한정으로 다소 딱딱하게 받아들이는 이가 있을 지도 모르겠으나 시대와 계층을 초월해 오늘까지 맥을 잇고 있다. 요즘은 창(唱)으로까지는 익숙하지 않아도 시조 창작과 감상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더러 있다. 나는 여기서 조선후기 서민의식이 싹트면서 나오기 시작한 사설시조 한 가락을 소개하련다. 진솔한 마음을 해학적으로 드러낸 작품이다. 지은이가 알려졌다면 곤란했을 것이다.
개를 여남은이라 기르되 요같이 얄미우랴.
미운임 오며는 꼬리를 홰홰 치며 올려 뛰고 내리 뛰며 반겨서 내닫고 고운임 오며는 뒷발을 바동바동 물러나고 나오면서 캉캉 짓는 요 방정맞은 암캐,
쉰밥이 그릇그릇 날진들 너 먹일 줄이 있으랴.
이 시조에서 말하는 이는 개사육사가 아니다. 분명 시집간 여인으로 보인다. 지아비가 있는 중년 여인일 것이다. 문제는 지아비에게 있을 상 싶다. 술주정뱅이인지 난봉꾼인지 집을 비워도 제법 비웠을 것이다. 지아비 미운임은 이 여인에게 손찌검도 했을지 모를 일이다. 이런 여인에게 새로운 고운임이 생긴 것은 자연스러웠으리라. 기다리던 고운임이 모처럼 여인을 찾았던 것이다. 미운임이 집을 비운 밤에 왔던 것이다.
작중화자에게 혼쭐난 이 개는 참 영리한 개였다. 열 마리나 넘게 있던 나머지 개는 멍청해 주인과 손님을 구분하지 못했다. 유독 이 녀석만은 누가 바깥주인이고 누가 외부 침입자인지를 식별했던 것이었다. 밤손님도 손님 나름인데 말이다. 시든 꽃밭에 물 주러 간 고운임 아니었던가. 고운임 발길을 돌리게 했던 죄업으로 밥을 굶어야 했던 견공(犬公)이었다. 그대, 일찍이 연암의 아첨술을 알았더라면.
“아부의 고수는 몸가짐을 신중히 하고 얼굴빛을 바로 하여 말을 삼가며, 명리에 아무런 욕심이 없고 교유에 뜻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여 상대의 관심을 유도하는 것이다. 그 아래가 비위에 맞는 말만 골라 하여 자신의 마음을 표시하고, 그 틈을 잘 타서 자기 뜻을 전하는 것이다. 가장 천박한 하수가 신발이 닳고 자리가 헤지도록 입만 쳐다보고 낯빛을 살피면서, 하는 말마다 옳다고 하고 일마다 훌륭하다 하는 것이다.”
연암은 아첨에는 단계가 있다고 했던 것이었다. 고수는 겉으로는 태연히 무관심한 듯해도 역으로 상대의 관심을 유도한 것이었다. 하수는 노골적으로 비굴하게 굽실거리는 것이라 했다. 읽는 수가 모자란 상전에게는 언제나 하수의 아첨만이 통하는 세상이더라는 것이리라. 하수는 하도 배알 없이 싹싹 빌어 손가락 지문이 닿아 없다는 족속일 게다. 연암이 살았던 시대도 이런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고 요즘이라고 어찌 이런 사람이 없겠는가?
<섬진기행>
주 오 돈
산정춘설백백해(山頂春雪白白解) 산꼭대기 봄눈 희끗희끗 녹고 있고
강변매화점점발(江邊梅花點點發) 강 언저리 매화 송이송이 피어나서
절기여원우회귀(節氣如圓又回歸) 계절은 원과 같아 다시 돌아오는데
인생여로종점달(人生如路終點達) 인생은 길과 같아 종점으로 가누나
첫댓글 부탁 드리면 되는데 제 머리가 나쁩니다^^ 운향님이 좋아할 것 같습니다.
아이~ 좋아라...^^ 덕분에 마음의 양식 섭취하고 갑니다.
문서를 부탁드리면 되는데...12장 중 스캔을 하던 도중에... 오전을 허비했다요^^ 특파원 하시기 좀 고단하실겝니다. 소식 또 기다리지요. 글 재주로 만나입시더(소정님 꾸지람 하십니더^^)
나쁘긴요, 안 그랬으면 자료방에 올랐겠어요? 잘 하신 것이지요. 이래 올려 놓으면 다 보셔야 하는데, 다 보시기 바랍니다.
주오돈 선생님 참 고생이 많았습니다. 가락 가족들 마음의 양식으로 아주 좋았을 것입니다. 가끔은 이런 고전의 향기를 맡아야 인생에 여유도 누리고 여운도 맛볼 수가 있겠지요.
자료 올려주신 덕분에 잘 보았습니다. 인쇄해서 볼랍니다^^*
문학의 참맛나는 향기는 정사보다 야사가 으뜸이다. 그러나 그걸 찾아 맛깔나게 전해주는 고불 닮은 주 선생을 뉘 감히 따르겠습니까. 많은 사람의 가슴을 울려 놓았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