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정찬주 삽화·송영방
“그렇다고 고명인은 어린 아이가 일타스님의 환생이라고 단정 짓고 싶지는 않았다.”
고명인은 어깨가 차가워 눈을 뜨는 순간 깜짝 놀랐다. 누군가가 홑이불을 덮어주었는지 자신은 법당 한쪽에서 자고 있었던 것이다. 간밤 늦도록 기도를 하다가 잠이 들어버린 모양이었다. 법당은 텅 비어 조금은 무섭기조차 하였다. 마주친 비로자나부처님도 무덤덤하고 위압감이 느껴질 만큼 어제보다 더 크게 보였다.
고명인은 홑이불을 각지게 개놓고 법당 밖으로 나왔다. 6시가 가까워지고 있는데 날은 이제야 겨우 밝아지고 있었다. 그는 밤이 길어졌음을 새삼 실감했다. 경내 마당은 서리가 내려 은가루를 뿌린 듯 반짝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꿈결처럼 범종소리가 나고 목탁소리와 염불소리가 난 것 같았는데, 경내는 정적이 켜켜이 쌓인 깊은 바다 속 같았다. 너무나 고요하여 사운당 가는 길마저 낯설게 보일 정도였다. 고명인은 문득, 차를 한 잔 하고 싶으면 지족암으로 올라오라는 혜각스님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 산책 삼아 지족암으로 가보자.’
퇴설당 쪽에서 지족암 가는 지름길의 산길이 분명 있을 것이나 그 길을 물을 사람도 없는 이른 아침이었으므로 고명인은 어제 보았던 표지석대로 가기로 했다. 승용차를 몰고 일주문 쪽으로 올라오는 길가에 세운 자연석에서 간단한 약도와 함께 백련암, 희랑대, 지족암이라고 쓴 음각의 글씨를 보았던 것이다.
산길로 들어서자, 새소리가 귀를 따갑게 했다. 작은 새들이 나뭇가지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우짖고 있었다. 고명인은 서리에 축축해진 낙엽을 밟으며 천천히 산길을 올라갔다. 스님이 운전하는 지프차 한 대와 마주쳤을 뿐 지족암 가는 산길도 적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종 모양의 부도들이 모여 있는 부도지를 지날 무렵에야 날이 밝았고, 좀 더 오르자 희랑대와 지족암이라고 쓴 이정표가 또 나타났다. 스님 한 사람이 이정표 부근까지 나와 싸리비를 들고 쌓인 낙엽을 쓸고 있었다.
“스님, 지족암이 여기서 멉니까.”
“몇 걸음만 더 가시면 됩니다. 누구를 만나러 오셨습니까.”
“혜각스님을 뵈러 왔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스님께서 손님이 한 분 오실 줄 모른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과연 혜각스님은 지족암 일주문 밖에서 고명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족암의 좁은 마당에서 눈을 부비고 있던 어린 아이가 고명인을 보고 쫓아 왔다.
“고 선생, 간밤에 기도는 하셨습니까.”
“스님 당부대로 했습니다.”
“그렇다면 보살님은 고 선생이 축원한 대로 환생하실 것입니다.”
혜각스님이 어린 아이에게 두 손을 모으라는 시늉을 하자 아이가 고명인에게 합장했다. 가까이서 보니 눈이 파랗고 살결이 하얀 외국인 아이였다. 외국인 아이가 귀엽게 합장을 하다니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고 선생, 5살짜리 외국인 아이가 왜 여기 있는 줄 아십니까. 아버지와 해인사에 왔다가 절이 좋다고 아버지를 따라 가지 않는 바람에 여기서 나와 함께 있게 된 겁니다.”
“아이를 절에 둘 생각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아이는 아버지를 따라 곧 미국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고명인이 영어로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갈 것이냐고 묻자 아이는 도리질을 하더니 도리어 절에 남겠다고 말했다. 혜각스님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더니 말했다.
“전생에 나와 무슨 인연이 있는 것 같습니다. 머리를 깎아달라고 하고, 승복을 입혀 달라고 떼를 쓰지 뭡니까.”
혜각스님은 고명인을 정자로 안내했다.
“날이 좀 쌀쌀하지만 차는 정자에서 마셔야 제격입니다.”
정자는 지족암 오른편에 있었다.
“스님, 정말로 제가 기도한 대로 이루어질까요.”
“고 선생께서는 아직도 제 말을 믿지 않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제 얘기를 들어보면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한번은 제가 일타스님을 모시고 대구에 갔을 때이고, 또 한 번은 지족암에서 일타스님을 모시고 살 때의 일입니다.”
혜각스님은 정자에 올라 차를 한 잔 마신 후, 영가의 존재에 대해서 반신반의하고 있는 고명인을 위해 얘기를 꺼냈다.
일타의 형제는 2남 2녀였다. 일타 위로 누나와 형님, 그리고 아래로 누이동생이 있었다. 형제 중에서 가장 먼저 출가한 사람은 일타보다 6살 위인 누나 응민(應敏)스님이었다. 응민은 비구니로서 만공스님에게 ‘한 소식한 비구니’라고 인가를 받았을 정도로 여장부처럼 걸출하게 수행을 잘하다가 1984년 12월 15일에 입적하였다. 천도재를 지내는데, 초재와 이재는 수덕사 견성암에서, 삼재는 일타의 누이동생인 대구의 쾌성(快性)스님 절에서 지내게 되었다.
초재와 이재를 참석하지 못한 일타는 삼재를 집전했다. 원래 재를 지내려면 염불과 독경, 범패까지 곁들이는데, 삼재는 모든 것을 생략하고 선법(禪法)에 의해 영가를 천도했다. 응민을 따르는 비구니 제자와 보살 신도들이 모두 다 염불과 독경으로 여법하게 삼재를 지내자고 하였으나 일타는 ‘응민스님은 살아생전에 자기 염불 자기가 다 하고 갔으니까 따로 염불할 거 없습니다. 응민스님이 평소에 든 화두나 찾고 대중공양하고 끝냅시다.’ 하고 생략했던 것이다.
일타가 좌선하는 자세로 죽비를 세 번 치고 입정(入定)에 든 뒤 응민의 영가를 불러 물었다.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하나는 어디로 가는가).”
응민의 영가에게 묻고 있는 화두는 만공이 생전에 즐겨 들었던 것인데, 만공 자신도 온양 봉곡사에서 이 화두를 들고 밤낮으로 정진하다가 깨달음을 얻고 다음과 같은 오도송을 노래하였던 것이다.
빈산의 이치와 기운은 고금 밖이요
흰 구름 맑은 바람 스스로 가고 오네
무슨 일로 달마는 서천을 넘어 왔나
축시엔 닭이 울고 인시엔 해가 뜨네.
空山理氣古今外
白雲淸風自去來
何事達磨越西天
鷄鳴丑時寅日出
깨달음에 대한 만공 자신의 확신 때문인지 만공은 누구에게나 ‘만법귀일 일귀하처’라는 화두를 주곤 했다.
그런데 일타는 문득 여행 한 번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는 응민의 영가를 위해 이렇게 한 생각을 했다.
‘응민스님, 미국 구경이나 한번 다녀오시오. 펜실바니아 소영이네 집에 가면 구경 잘 시켜줄 거요. 이대 나온 뒤 미국으로 이민 간 소영이 집으로 가면 돼요.’
일타가 입 밖으로 낸 말이 아니었으므로 삼재에 참석한 그 누구도 눈치 챌 수 없는 일타의 축원이었고, 그 순간은 그야말로 찰나였다. 10초 정도 자신의 생각을 전하고는 놓아버린 일념(一念)이었던 것이다.
일타의 축원은 영험했다. 그날 밤 일타의 누이동생인 쾌성의 꿈에 응민이 나타나 하소연을 했다.
“일타스님이 날더러 미국 가란다. 서울도 혼자 못 가는 사람이 어떻게 미국을 가냐. 아이고, 서울도 가니 정신이 없더라.”
“언니, 미국 가기는 서울 가는 것보다 쉽다고 하데요. 비행기만 타면 가는 거고, 여기서 전화만 해놓으면 자동차로 공항에 마중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싣고 가기 때문에 서울 가는 것보다 쉽다고 하대요. 그러니 가세요.”
“그런데 소영이가 누군가. 누군데 소영이 집으로 가라고 하는 건가.”
“예전에 언니한테 아주 좋은 두루막 장삼을 해준 사람 있잖아요. 언니가 너무 좋은 것이라서 중이 입을 것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 두루막 장삼을 해준 사람이 바로 소영이 엄마 보살이지요.”
“그런가.”
그제야 응민이 선 채로 쭉 물러나면서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쾌성은 잠에서 깨어나 시계를 보았다. 벽시계는 새벽 1시와 2시 사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에 미국에서 국제전화가 걸려 왔다. 응민에게 두루막 장삼을 해주었던 소영이 엄마였다.
“아이고, 쾌성스님 미안합니다. 여기는 낮인데 거기는 지금 밤중이겠네요. 점심 먹고 방금 쇼파에 누워 낮잠을 잤는데 꿈에 응민스님이 뭐를 짊어지고 우리 집으로 들어옵디다. 그런데 스님, 그게 태몽이 틀림없는 것 같아요.”
실제로 소영이는 그날로 잉태하였던지 10달 후에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았는데, 아기를 가지려고 한 지 5년 만의 경사로써 응민이 일타의 천도로 미국에서 소영이의 아들로 환생한 것이었다.
혜각스님은 다시 차를 우려내며 얘기를 덧붙였다.
“이 이야기는 일타스님께서 천도재를 지낼 때 영가법문으로 가끔 하셨습니다만, 이 모든 사정을 저는 스님을 모시고 가서 보고 들었으므로 영가의 존재를 확신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고 선생께 기도를 하라고 권유한 것입니다.”
고명인은 차를 마시면서 차향에 도취되어 상념에 잠겼다. 육하원칙에 의해서 말하는 혜각스님의 얘기는 더 이어지고 있었다. 어린 아이가 정자 위까지 올라와 혜각스님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만지작거려 잠시 얘기가 끊어지곤 했으나 혜각스님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아이는 차를 주면 얌전해지곤 했다.
“이래도 영가의 존재를 믿지 못하겠습니까.”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반신반의하고 있는 것 같군요.”
“솔직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일타스님을 모시고 살 때의 얘기를 하나 더 하겠습니다. 긴 얘기가 아닙니다.”
20여 년 전, 혜각이 지족암 부엌에서 반찬거리를 담당하는 채공(菜供)을 보고 있을 때였다. 당시 일타는 태백산 도솔암에서 나와 지족암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지족암은 지금과 달리 초라하고 퇴락한 암자였다.
일타는 무슨 이유에선지 보살 공양주를 싫어했으므로 행자인 두 청년이 끼니때는 공양주와 채공을 보고 나머지 시간은 울력으로 소일했다. 지족암의 행자생활은 어느 절보다 고달팠다. 금쪽같은 스님의 법문은 새벽에 잠깐 들을 수밖에 없었고,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지게를 지고 산을 오르내렸던 것이다.
하루는 혜각이 산길에 퍼질러 앉아 혼자서 푸념을 하고 있자, 일타가 뒤에서 그 말을 다 듣고 나서는 혜각을 달랬다.
“혜각아, 행자 노릇하기 힘들지. 나는 죽어서 미국 사람으로 환생할 것이다. 미국 사람으로 태어나 한국에 돌아와 그때는 내가 니 행자, 상좌 노릇해 다해 줄 것이니 참고 견디어라.”
“큰스님께서 제 상좌가 된다고 그랬습니까.”
“내가 죽고 나서 20년 후의 일이다. 해인사 일주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미국의 명문 대학을 갓 입학한 코쟁이 청년이 얼쩡거리거든 귀를 잡아끌고 가서 네 상좌로 만들어라. 그가 바로 나일 것이다.”
그러나 그때 혜각은 우스갯소리로 듣고 말았다. 힘들어서 지족암을 도망칠지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을 달래는 농담쯤으로 들었던 것이다. 실제로 공양주 행자는 1달만 견디면 사미승이 될 수 있는데도 5개월째에 줄행랑을 친 적도 있었다.
“지금은 일타스님께서 하신 그 말씀을 믿고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스님께서 입적하신 지 5년 밖에 안 됐으니 앞으로 15년이 남은 셈입니다.”
혜각스님은 단호하게 말했다.
“고 선생.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사람의 삼생(三生)을 들여다보셨던 우리 일타스님이 어떤 분인지 아셔야 합니다. 그리하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 알게 될 겁니다.”
“일타스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말로 설명할 수 없지요. 진리는 체험으로 얻을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스님께서 입적한 주기마다 벌써 5년째 스님께서 수행하셨던 암자나 절을 찾아 만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님, 저도 동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고 선생의 자유입니다.”
혜각스님은 고명인에게 화두를 던지듯 말했다.
“고 선생, 이제 이 어린 아이가 누구인지 알겠습니까.”
고명인은 어렵지 않게 혜각스님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 온 어린 아이의 나이가 만 5살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고명인은 어린 아이가 일타스님의 환생이라고 단정 짓고 싶지는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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