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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으며 삽시다.
앞서 쓴 글 중에"깜빡깜빡 못 말리는 나의 건망증" 이란 글이 있습니다.
그전까지 쓴 글들을 읽어보니 너무 딱딱하고 거칠어서
내 글을 읽으시는 회원님들의 표정도 내내 찌푸려졌을 것 같았고
그래서 미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회원님들을 한 번 웃겨 드리려고 쓴 글이 "깜빡깜빡..."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쓴 글들을 읽어보니
그 전에 쓴 글보다 더 거칠고 살벌한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또 미안했고, 한번 더 위로해 드리고 싶은 마음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몇 편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꼭 웃겨 드리리라는 보장은 못하겠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 한국 사람들은 도대체가 웃을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침에 눈을 떠서 제일 먼저 대하는 게 TV이고, 신문인데
거기에 실려 나오는 기사들이 하나 같이 우울하고 화나는 것뿐 아닙니까?
TV이건 신문이건 언제나 첫머리를 장식하는 게 정치 분야인데
그 정치인이라는 사람들은 늘 국민의 약통만 올렸지
한 번도 웃음을 준 적이 없었습니다.
아침 첫새벽부터 시작해서 늦은 밤까지 계속되는
드라마와 예능 프로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나는 한국의 앞날이 어두우리라고 내다보는 중요한 이유를
그 연속극과 예능 프로에서 찾습니다.
도대체가 저런 구역질 나는 연속극과 예능 프로를 보면서 헬렐레하고 있는
이런 한심한 국민을 가지고 민주주의·개혁·통일이라는
이 엄청난 난제들을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을지 그저 눈앞이 캄캄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기회가 닿는 대로 나는 후배들에게 TV를 보지 말고,
컴퓨터 게임을 하지 말 것을 권면합니다.
술이나 담배, 혹은 마약처럼 TV와 컴퓨터 게임에도 중독성이 있습니다.
칼을 내리쳐 무를 두 동강 내듯, TV와 컴퓨터 게임을 그렇게 끊어 보세요.
생활이 달라지고, 의식이 달라지고, 그리고 얼굴이 달라집니다.
< 꼬리가 길면...>
건설현장 일용직 근로자.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노가다라는 용어가 일제의 잔재이니 그런 말을 쓰지 말고
앞으로는 이렇게 바꿔 부르라고 정부에서 지어준 이름입니다.
하지만 나는 이제까지 노가다를 그렇게 부르는 사람을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름이 너무 길 뿐만 아니라 이름을 그럴듯하게 바꾼다고 해서
노가다의 처지가 바뀌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벤또를 도시락으로 바꾸고, 사리마다를 팬티로 바꾸고,
가다마이를 양복으로 바꿔 부르는 데는 성공했지만
노가다를 건설현장 일용직 근로자로 바꾸는 것은 앞으로도 성공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나는 이제까지 내 차를 가져 본 적이 없습니다.
운전면허를 딴지는 33년이나 됐지만 차가 있어야 운전을 해볼 것 아닙니까?
그래서 내 면허는 말 그대로 장롱면허이고,
나의 교통수단은 이제까지 줄곧 오토바이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헬멧이었습니다.
겨울에는 쓰지 말래도 찬바람 때문에 쓸 수밖에 없는데,
처음부터 습관을 잘못 들여서 그런지
무더운 한여름에 헬멧을 쓰는 것은 참으로 고역이었습니다.
뙤약볕에서 하루 종일 땅을 파거나 사모래를 개 나르거나
벽돌을 져 나르면서 땀을 빡빡 흘리다가
일이 끝나서 집으로 돌아올 때 헬멧을 쓰지 않고 오토바이를 달리면
범벅이었던 땀이 금세 달아나면서 오장육부까지 시원하기 짝이 없는데
머리 위에 (더구나 내 머리는 여자처럼 치렁치렁한 장발인데)
그 위에다가 또 헬멧을 덮어쓴다는 것은 참으로 죽을 맛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안 쓸 수도 없는 것이
경찰한테 안전모 미착용으로 걸리면 딱지값이 2만 원인데
하루 종일 고생해서 받은 일당 5~6만 원에서(지금은 8만 원으로 올랐지만)
딱지값으로 2만 원을 제하고 나면 뭐가 남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헬멧을 쓰는 것은
내가 남달리 준법정신이 투철하다거나
불의의 사고 시 안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딱지값 2만 원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그날도 일을 마치고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갑자기 덜컥하고 헬멧이 벗겨지면서
끈이 목에 탁 걸리는 것이었습니다.
오토바이를 세우고 살펴보니
헬멧 양 옆의 4개의 고리 중 한 고리의 끈이 끊어진 것이었습니다.
쉽게 고칠 수도 없을 것 같아 집에 가서 고치기로 하고
할 수 없이 헬멧을 팔에 걸고 오토바이를 몰았습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그때 경찰을 만나 단속을 받게 되었습니다.
큰 일 났구나, 2만 원 날아가게 생겼구나...
나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과 공손한 태도로 다가온 경찰에게 사정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저기까지는 헬멧을 쓰고 왔다, 그런데 갑자기 헬멧 끈이 끊어지더라,
이것 봐라, 이걸 어떻게 쓰겠느냐,
집에 가서 고쳐가지고 내일부터는 꼭 쓸 테니 한 번 봐주시라...
그랬더니 잔뜩 걱정했던 거와는 정 반대로 이 경찰이 두말도 없이
"알겠습니다. 수고하세요!" 하고는 거수경례까지 붙이고 돌아가는 것 아닙니까!
야~! 이런 횡재가 있나! 정말이지 예상치 못한 화끈한 선처였습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기똥찬 아이디어 하나가
내 머리를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가만, 헬멧 끈을 고치지 말고 계속 팔에 걸고 다닐까?
설마 하니 방금 끈이 끊어져서 할 수 없이 팔에 걸고 간다는데
기어이 딱지를 뗄 악질 경찰이 있으려고?
나는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행여 고약한 경찰을 만나 거금 2만 원을 날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불안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나는 한국 경찰의 양심(?)을 굳게 믿고
그다음 날부터는 아예 끈 끊어진 헬멧을 팔에 걸고 집을 나섰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며칠 후를 시작으로 계속 단속을 받았지만
어느 경찰도 길게 물고 늘어지지 않고
시원시원하게 나를 보내주는 것이었습니다.
야~! 한국 경찰, 아니 충주 경찰, 정말 훌륭한 사람들만 뽑았구나 하는 생각에
절로 애정과 함께 친근감이 우러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대낮에 시내를 질주하고 있는데
뒤에서 애앵~하고 사이렌 소리가 나더니
"오토바이, 갓길로 세우세요!" 하는 스피커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경찰 백차였습니다.
나는 속으로 "야, 내가 무 헬멧 경력이 몇 년인데,
너한테 딱지나 떼일 군번으로 보이냐?" 하며 오토바이를 세웠습니다.
안전모 미착용이니 면허증을 내놓으라는 경찰에게 나는 태연히 또 그 원고를 읊었습니다.
내가 이제까지 헬멧을 쓰고 왔었다. 그런데 저기 저 소방서 앞에서 끈이 탁 끊어지더라.
자, 봐라. 이걸 어떻게 쓰겠느냐. 집에 가서 고쳐가지고 내일부터 쓰겠다...
내가 이렇게 말했으면 아, 그러세요. 알겠습니다. 수고하세요. 하고
경례를 붙이고 가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러기는커녕 이 경찰이 자기 손으로 키를 돌려서 내 오토바이 시동을 끄더니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하는 말이
"아저씨, 작년 여름에 끊어진 끈을 아직도 안 고치셨어요?"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뭐! 작년 여름에...라고? 그렇다면....... 그렇습니다!
이 경찰이 작년 여름에 나를 한 번 단속한 적이 있었고,
내가 상습범임이 기어이 뽀롱난 것이었습니다.
앞 뒤 가릴 것 없이 나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기도 하고,
언성을 높여 윽박도 질러봤지만 다 소용없었고
기어이 2만 원짜리 딱지를 떼이고야 말았습니다.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그다음부터는 할 수 없이 헬멧을 쓰고 다닙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더니, 옛말 틀린 게 하나 없구나!
< 똥 이야기 >
나는 이제까지 수세식 화장실이 있는 집에서 살아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내가 살았던 집은 모두 재래식, 푸세식 화장실이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집도 그런 화장실입니다.
그런데 지금 살고 있는 이 집 화장실은 참 희한한 게
여름이 와서 장마철이 되면 어디로 스며드는지 똥통에 물이 그득히 차오르다가
장마가 끝나고 초가을쯤 되면 다시 물이 쪼옥 빠지는,
그런 자동개폐식 화장실입니다.
그것 때문에 처음에는 고생이 참 많았습니다.
물이 가득 찬 똥통에 앉아 똥을 누면
한 덩어리 떨어뜨릴 때마다 풍덩풍덩 하며 똥물이 엉덩이에 튀어 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이걸 어떻게 해결을 해야지, 하루 이틀도 아니고 적어도 2개월 동안을
매년 그 불편을 감수할 수는 도저히 없었습니다.
어떡할까, 요리조리 잔머리를 굴리다가 내가 처음 생각해낸 건
똥누기 전에 똥물 위에 미리 신문지를 한 장 까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방법은 실패였습니다.
첫 덩어리는 괜찮은데 그 똥이 신문지를 가라 앉혀서
두 번째부터 다시 똥물이 튀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다고 한 덩어리 싸고 신문 깔고, 또 한 덩어리 싸고 신문 깔고,
그 짓을 계속 반복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두 번째로 생각해 낸 방법은
똥 한 덩어리를 싸기가 무섭게 엉덩이를 번쩍 치켜들어서
똥물의 사정거리를 벗어나 보자는 것이었지만 이 것도 실패였습니다.
그래도 똥물이 튀었습니다.
그 후에도 몇 가지 방법을 더 써 보았지만 계속 실패를 보다가
끝내는 성공을 했는데 그것은, 똥을 가늘게 빼고, 짧게 끊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말은 쉬워도 엄청 어렵습니다.
똥 눌 때 당신도 시험 삼아 한 번 해보세요. 보통 어려운 게 아닙니다.
나는 피나는 노력과 각고의 연습 끝에 기어이 성공을 했고
그래서 지금은 별 걱정 없이 똥을 쌀 수 있게 되었고
그리고 항문의 힘도 엄청 좋아졌습니다.
< 돈 좀 꿔 줘 >
이른 새벽에 용역( 인력 ) 사무실에 나와 앉아 있는 노가다꾼들은
다들 조금씩은 불안해합니다.
왜냐하면, 이왕이면 좀 쉽고 깨끗한 일이 걸려야 하는데,
똑같은 8만 원 일당에 재수 없게시리
힘들고 지저분한 일이 걸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같은 일당 8만 원에 어떤 사람은 덤프트럭 드나드는 길목에
신호봉 들고 가만히 서서 신호 봐주러 가는데
자기는 양돈장에 돼지똥 치우러 간다면 이거 보통 열 받는 일이 아니거든요.
일이 깨끗하고 제일 쉬운 현장은 골프장입니다.
멋있는 나무들과 널따랗게 펼쳐진 새파란 잔디밭이 보기에도 상쾌하지 않습니까?
일이라 봐야 잔디나 나무를 옮겨 심는 것인데 그런 건 다 장비가 하고
사람은 슬슬 따라다니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 데다가 골프공에 맞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
골프 치는 사람들이 나타나면 일하다 말고 잔디밭 가장자리로 나와
그들이 지나갈 때까지 구경이나 하면서 앉아 있어야 하니
일하는 시간의 절반은 시원한 나무 그늘에 앉아 있다 돌아오기 일쑤입니다.
그 골프장에 몇 달 일을 다닌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일을 하고 있는데 하루는 먼데 사는 친구가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어디야?" 하기에 나는 별생각 없이 "응, 골프장에 와 있어." 하고는
몇 마디를 더 하다가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런데 그 며칠 후부터 나에게 돈을 좀 꾸어달라는 전화가
심심찮게 걸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나는 지금 빚 갚느라고 허리가 휘고,
술 한 잔을 마음 놓고 못 사 먹는 형편인데 돈을 꾸어 달라니,
참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전화통화가 문제였습니다.
"어디야?" 하길래 나는 당연히 노가다하러 왔다는 뜻으로 " 골프장에 와 있어." 한 건데
이 친구는 내가 골프를 치러 온 것으로 잘못 알아들은 것이었습니다.
그 소문은 커지고, 퍼져서 나중에는
" 양 아무개가 떼돈을 벌어서 에쿠스 타고 다니면서 골프나 치러 다닌대."
이렇게 소문이 났고, 나는 그 소문을 진화하느라고 진땀을 흘린 적이 있습니다.
나는 남의 차라도 아직까지 에쿠스를 타거나 만져본 적도 없는데!
< 훔쳐야 산다. >
여러 해 전, 한 2, 30명이 어떤 건설회사에 한시적으로 고용되어
내리 몇 달을 일 한 적이 있습니다.
매일 다른 현장에 팔려나가 일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한 현장에 소속되어 고정적으로 일 하는 게 마음이 훨씬 편합니다.
첫날 출근을 했더니 현장소장이 다섯 명씩 조를 짜주고 연장을 지급해주면서
거듭 다짐하며 하는 말이
"이 연장은 일이 끝날 때까지 분실하면 안 된다. 만일 분실하면
조원들이 개인 돈으로 사서 채워놔야 한다.
그렇게 못하겠다는 사람은 필요 없으니 집에 가라!" 참으로 강력한 경고였습니다.
연장은 한 번도 쓰지 않은 새것이었고, 각 조에 똑같이 지급되었습니다.
연장을 지급받자 각 조원들은 연장에 표시를 하느라 일대 난리가 벌어졌습니다.
예를 들어 연장이 삽이라고 한다면 1조는 빨간 페인트로 삽자루에 가로줄을 하나 긋고
2조는 두 줄, 3조는 세 줄, 이런 식이 었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면서 희한하게도 연장이 자꾸 없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자기 집으로 훔쳐가는 건지,
아니면 드넓은 현장에서 자주 이동을 하면서
제대로 챙기지를 않아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연장은 계속 없어졌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몇 푼 안 되는 일당 가지고 자기돈을 써가며 연장을 사다가 보충할 바보는 아무도 없고
할 수 없이 다른 조의 연장을 훔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2조는 1조의 연장을 훔쳐서 빨간 줄을 하나 더 긋고,
3조는 1조나 2조의 연장을 훔쳐내어 빨간 줄 세 개를 만들었습니다.
제일 유리한 조는 6조 였습니다.
6조는 1조부터 5조까지 아무 연장이나 훔쳐도 표시하기가 쉬운데,
문제는 1조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1조는 줄이 하나이니, 두 줄 세 줄이 그어져 있는 연장을 훔쳐봐야
표시하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그래서 1조 사람들이 쓴 새로운 방법은, 일단 아무 조의 연장이나 훔칩니다.
그런 다음 삽자루에 빈틈없이 빨간 칠을 해서 표시를 싹 지운 다음에
그 위에 하얀 페인트로 한 줄을 새로 긋습니다.
1조의 이 새로운 수법은 순식간에 표절이 되어
각 조의 연장의 색깔들이 계속 바뀌어 나갔습니다.
그때 나도 곡괭이와 오함마를 한 자루씩 훔쳐내어 우리 조에 크게 기여하면서
조원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같은 조원들은 열심히 훔치는데, 나 혼자서
"내가 왜 도둑질을 해!" 하고 팔짱 끼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그럴 땐 같이 훔치면서 적극 협조해야 합니다!
< 화장실 같은 집 >
내가 인천 계산동 살 때의 일이니 벌써 20년 전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단칸 월세방을 얻어 살고 있었습니다.
밖에서 문을 열면 한 평도 안 되는 좁디좁은 부엌이고,
부엌에서 문을 열면 두 평 남짓되는 방이 하나 딸린
정말 남루하기 짝이 없는 그런 집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부엌에 쪼그리고 앉아서 세수를 하고 있는데
어떤 놈이 노크도 없이 내 집 부엌문을 덜컥 여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놀랐지만, 문을 연 그 20대 남자 녀석은 더 크게 놀란 표정이었습니다.
낯짝을 보니 내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모르는 놈이었습니다.
이 버릇없는 녀석에게 뭐라고 한 마디 쏴줘야겠다고 일어나기도 전에 이 젊은 녀석은
" 앗! 죄송합니다. 전 또 화장실인 줄 알고..."
하면서 문을 닫고는 황급히 내 빼는 것이었습니다.
뭐라고, 화장실인 줄 알고?
아니, 뭐 저런 싸가지 없는 놈이 다 있지? 나 참 기가 막혀서...
나중에 알고 보니 그놈은 가스 배달원이었고,
이웃집에 가스 배달을 왔다가 갑자기 똥이나 혹은 오줌이 마렵자
내 집을 화장실인 줄 알고 문을 열었던 것이었습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말을 꼭 고 따위로 해야겠습니까?
화장실인 줄 알고 문을 열었어도 그 안에 사람이 살고 있으면
" 아, 죄송합니다. 전 또 아는 사람 집인 줄 알고..."
뭐 이렇게라도 둘러댔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 말을 듣고 나니 내가 마치 똥 간에 들어앉아 있는 것 같은 마음에
밥도 먹히지 않고,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한낮에 밖에 나가 내 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내가 봐도 화장실 같았습니다.
< 하나님을 때려죽여야 돼! >
아침 6시쯤 되면 용역(인력) 사무실은 노가다꾼들로 북적입니다.
거기서 커피를 한 잔 하면서 어제 누구하고 술 마신 이야기,
일을 열심히 해 줬더니 팁을 얼마를 주더라는 이야기
야리끼리를 맡아 오전만에 일을 끝내고 하루 일당을 받았다는 이야기 등등
뻥을 약간씩 섞어가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일손이 필요한 사람들이 일꾼들을 데리러 오고
그렇게 하나둘씩 일터로 팔려 나갑니다.
그런데 인력 사무실을 통하지 않고 일을 나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아는 오야지가 전화로 일을 부탁해오는 경우가 그런 경우입니다.
그럴 땐 그 오야지가 내 집 앞으로 나를 데리러 오니 인력 사무실까지 가지 않아도 되고
또 일당의 10%인 수수료를 떼지 않아도 되니
일당이 8만 원일 경우 8천 원이 굳지 않습니까?
그래서 개인적으로 일을 가면 그만큼 일거양득입니다.
어느 날, 아는 후배 오야지가 전화로 일을 부탁해왔고, 그곳에 일을 갔습니다.
현장은 단무지 공장이었고
넓은 창고를 조립식 패널로 이리저리 막아 여러 칸의 작은 창고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같이 일을 온 일꾼 하나가 좌우를 살피더니
창고에 쌓여 있던 단무지 상자를 예닐곱 박스나 차에 싣고는
옷으로 푹 덮어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나에게" 이따가 일 끝나고 형님도 두어 박스 드릴 테니 갖다 잡수세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지금 단무지를 훔친 것이었고,
매일 그렇게 몇 박스씩 가져다가 자기네도 먹고
주변 사람에게도 인심을 쓴다는 것이었습니다.
건설현장에서 공구나 연장을 훔치는 거야 내 집으로 가져오는 게 아니고
그 회사에 그대로 있으니 장난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고 하겠지만,
이건 완전히 성격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점심때가 되어서 식당으로 밥을 먹으러 갔는데 그 사람,
아침에 단무지를 훔친 사람이 밥을 앞에 놓고 고개를 숙인 채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는 것 아닙니까?
나는 의아했습니다.
아무리 봐도 저게 분명 기도를 하는 건데,
남의 단무지를 게눈 감추듯 훔치는 사람이 기도를 한다?
나는 몹시 궁금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어 꾹 참고 있는데
마침 그 사람이 먼저 말을 붙여 오는 것이었습니다.
" 형님, 교회 나가세요?"
" 아니, 난 종교 없어."
" 그럼 우리 교회 나오세요. 우리 목사님 설교가 기가 막혀요.
교회에 나오시면 형님 장가가는 건 문제도 아니에요."
그러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라는 성경 말씀도 곁들여 주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에라 모르겠다 하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 어이, 자넨 그렇게 믿음이 좋은 사람이 남의 단무지를 마구 훔쳐도 되는 거야?'
했더니 이 사람 하는 말이
" 그래서 주일마다 교회에 나가서 회개하잖아요.
사람인 이상 죄를 안 짓는 사람도 없고, 안 지을 수도 없어요.
문제는 회개를 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거예요.
회개만 하면 하느님은 끝없이 용서해 주시는 분이 거든요.
신앙이 그래서 좋다니까요."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일이 끝나고 차에서 내릴 때, 이 사람이 단무지 두 박스를 내 품에 안겨 주었습니다.
나는 왠지 찝찝하기도 하고,
혼자 사는 나에게 이렇게 많은 단무지가 필요하지도 않아서
들어가는 길에 미영이네 한 박스, 유리네 한 박스씩 나누어주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 겁니까?
아무리 많은 죄를 지어도 회개 한 마디에 하느님이라는 분은
끝없이 용서해주시는 분입니까?
그래서 예수 믿고 부처님 믿는 정치인, 공무원들이 거리낌 없이 뇌물을 받아먹는 겁니까?
그러니까, 어느 국회의원이
" 하나님! 어제 아무개 사장에게 뇌물을 1억 원 받아먹었습니다. 용서해 주옵소서."
하면 용서를 받은 것이고, 어느 또 공무원이
"하나님! 어제는 공금을 5천만 원 횡령해서 닦아 썼습니다. 용서해 주옵소서."
하면 용서를 받은 것이고, 또 어느 회사 사장이
"하나님! 어제는 마누라 몰래 여비서 하고 씹을 한 번 했습니다. 용서해 주옵소서."
하고 회개만 한 마디 하면 깨끗이 용서를 받은 거다, 이거죠?
그렇다면, 막말로, 조두순이나 강호순, 김길태 같은 사람도
"하나님! 어제는 버스 기다리는 여자를 데려다주겠다고 속여서 태우고 오다가
강간을 한 번 한 뒤에 목졸라 죽여서 머리, 팔, 다리를 도끼로 여섯 토막을 내 가지고
저 산 밑에 갖다 파묻었습니다. 용서해 주옵소서!"
하면 용서가 된 거다, 이거 아닙니까!
야~! 편리해서 좋긴 한데, 얼른 이해는 안 가는 말이네요.
참, 요지경 세상입니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어떠한 죄도 회개 한 마디에 무한정 용서하는 하나님이라면,
그런 개 씹새끼는 때려죽여야 합니다.
.
< 빨간 하이힐 >
내가 꼭 한 번 매음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10년도 훨씬 전의 일이고, 자전거로 전국일주 여행 중이었습니다.
그날도 하루의 주행을 끝내고 목욕탕에 가서 따듯한 물에 목욕을 한 뒤
저녁을 한 그릇 사 먹은 후 맥주를 몇 병 사들고 여인숙에 방을 하나 잡아 들었습니다.
그렇게 느긋하게 맥주를 한 잔 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나기에 문을 열어보았더니
여인숙 주인아주머니였습니다.
주인아주머니는 맞은편 방 쪽을 가리키며
" 예쁜 아가씨가 있는데 한 타임 뛰실래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한 타임이라는 말이 얼른 이해가 안 갔지만
그 앞에" 예쁜 아가씨 "라는 말 때문에 무슨 뜻인지를 겨우 알 수 있었습니다.
주인아주머니가 가리킨 맞은편 방을 바라보니
방문 앞에 하이힐 한 켤레가 단정하게 놓여 있었습니다.
색은 진한 빨간색이었고, 뾰족한 뒷굽이 아주 높으면서
세련되고 날렵하기 짝이 없는 그런 구두였습니다.
그 빨간 하이힐을 보자, 나는 나도 모르게 갑자기 정신이 헤까닥 했고, 얼결에
" 그럼... 오라고 하세요." 하고 말았습니다.
화대는 3만 원이었고, 선불이라기에 지갑을 열어 3만 원을 꺼내 주었습니다.
방문을 닫고 주인아주머니가 사라지자 가슴이 뛰기 시작하는데
정말이지 이러다가 내 심장이 터지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정도로
사정없이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이란 말입니까!
잠시 후 내 방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은 여자가 아니라..... 아니, 여자는 여자였습니다.
자세히 보니 여자는 분명 여자였는데
여자다운 구석이라고는 한 군데도 찾아볼 수 없는,
기골이 장대한 남자 타입의 여자였습니다.
빨간 하이힐만을 놓고 볼 때 나는 그 주인이 20대나,
적어도 30대 초반의 예쁘고 날씬한 아가씨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내 방에 들어선 여자는 완전 역도선수에다가, 머리통은 또 얼마나 큰지
내 머리의 두 배는 족히 되어 보이면서 엄청 무섭게 생긴 여자였습니다.
나이도 아무리 잘 봐주어도 40대 초반은 되어 보였습니다.
나이 많고 좀 뚱뚱해도 성적 매력을 풍기고 귀염성 있는, 그런 여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여자는 치마만 둘렀다 뿐이지, 도저히 여자라고 보아 줄 수가 없었습니다.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하면 좋은가!!!
뛰던 가슴이 갑자기 멈추고,
빳빳하게 솟아오르던 자지도 단번에 삐리릭 죽어 나자빠졌습니다.
그렇다고 " 됐으니 그만 가 보세요." 한다면 이 여자에게 얼마나 큰 모욕이겠습니까!
마음 약한 나로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고, 내색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대책 없이 애꿎은 맥주만 들이켜면서 시간을 끌어 보았지만
그 여자는 곧 자기 손으로 내 반바지를 벗기더군요.
하지만, 바지만 벗기면 뭘 하겠습니까? 자지가 서야 뭘 해 먹죠!
내 자지가 그렇게 안 서면 "할 수 없네요."
하고 그냥 나가도 내가 붙잡지 않고, 오히려 고맙겠는데
이 여자는 자기가 맡은 임무는 기어이 완수해야 한다는 무슨 사명감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이미 지불한 화대를 돌려달라고 할 것 같았는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이렇게도 해 보고 저렇게도 해 보면서
어찌어찌해서 가까스로 내 자지를 세우는데 기어이 성공했고,
그래서 한 번 하기는 했는데 그 여자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참 고생 많았습니다!
일을 끝내고 나가는 그 역도선수 아줌마에게
" 오늘 참 즐거웠다."며 나는 2만 원을 더 쥐어 주었습니다.
그날 밤엔 참 고통스럽고, 괴로웠는데
지나고 나니까 웃음이 나네요.
그리고, 그 역도선수 아줌마가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전화번호를 알면 만나서 저녁이라도 같이 먹고 싶은데......
< 나는 고자요! >
" 왜 아직까지 결혼을 안 하고 혼자 살아요? "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예외 없이 당하는 질문입니다.
하긴 50 이 넘은 사람이 혼자 살고 있으니 궁금할 법도 하겠지요.
하지만 한두 번도 아니고,
똑같은 질문을 끝없이 당해야 하는 나로서는 큰 고역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 질문에서 헤어나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잔머리를 굴리다가
묘안이 하나 떠 올랐습니다.
어느 날, 나를 자주 불러 일 시켜주는 오야지 한 사람에게
( 그 사람이 묻지도 않았는데 ) 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 박형! ( 그는 나와 동갑입니다.) 나는 사실...( 침통한 표정으로)
결혼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야.'
" 왜?"
"사고를 당했거든."
" 사고를?"
박 사장은 눈을 황소만 하게 뜨면서 나에게 물었습니다.
" 응. 20대 때 등산을 갔다가 돌 비탈에서 쭈루루 미끄러지면서
뾰족한 바위에 자지 밑을 정통으로 찧었거든.
그 후부터 자지가 안 서대. 그래서 병원엘 갔더니 수술을 해야 하는데
보험이 적용되지 않아서 수술비가 650만 원이라는 거야.
650만 원 커녕은 65만 원도 없는데 어떻게 수술을 하겠어.
그래서 한 해 두 해 미루다가 어디서 꿔서라도 해 보려고
몇 년 전에 병원엘 가 봤더니 늦었다는 거야.
수술을 해도 가망이 없다는 거야. 그러니 어쩌겠어. 포기할 수밖에."
" 그전에 애인은 없었어?"
" 있었지. 결혼까지 약속했었는데 별짓을 다 해도 자지가 안 서니까
결국 다른 남자한테 시집가버리고 말더라구."
나의 예상은 적중했고,
그 후로는 아무도 내 앞에서 결혼이나 여자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국 사람이 결혼 못하는 고자에게 이렇게까지 동정심을 갖고
측은하게 여긴다는 사실에 적지 않게 놀라기도 하였습니다.
저녁 초대를 받아 아는 사람 집에 밥을 먹으러 가면
그 집 형수나 제수씨가 내 밥 만은 꽉꽉 눌러 고봉으로 퍼 주었고
닭볶음탕이나 돼지 두루치기 같은 맛있는 음식을 가운데 놓지 않고
내 앞에 놔주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동료들과 함께 대폿집이나 호프집 같은 단골 술집엘 가도
내가 청하지도 않았는데 그 집 마담이 자청해서 내 옆에 앉아
친절을 베풀어주는 것을 볼 때, 누구에겐가 내가 고자라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불쌍하게 생각되어 위로해 주고 싶었던 게 분명해 보였습니다.
며칠 후, 동료 서넛과 어울려 일을 가게 되었는데,
소태면에서도 산속으로 한참을 더 들어간 아주 멀고 외딴집이었습니다.
80 되신 할머니가 혼자 살고 계신 허름한 농가주택을 수리하는
4~5일짜리 공사였습니다.
그런데 첫날부터 나를 바라보시는 이 할머니의 시선이 예사롭지가 않았습니다.
시선만 그런 게 아니라 나에 대한 대접이 다른 동료들과는 완전 딴판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 할머니가 부엌에 숨어 있듯 지켜 서 계시다가
내가 그 앞을 지나가면 소리 없이 손짓으로 나를 불러들여서
" 이거 먹고 해." 하시며 미리 따라 놓은 막걸리 잔을 내 입에 대 주셨고
역시 김치에 미리 싸놓은 돼지고기를 내 입에 넣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동료들 모르게 고기를 씹어 삼키느라 등에 식은땀을 흘려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도대체 이 할머니가 왜 나에게만 이렇게 대해 주시는 건지 몹시 궁금했습니다.
파마한 내 긴 머리가 마음에 드시나? 아니면 내가 잘생겨서 그런가?.....
그러다가 나는 아주 그럴 듯 한 이유를 하나 생각해 냈습니다.
그래. 저 할머니에게 아들이 몇 있었는데 그중 한 아들이 젊어서 죽은 거야.
일찍 죽은 그 아들하고 내가 비슷하게 생겼고
그래서 나를 보시자 죽은 그 아들이 생각 나신 거야...
나는 이렇게만 생각했지
내가 고자라는 소문이 이 깊은 산속에서 혼자 사시는
8 순 할머니에게까지 전해졌으리라고는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점심을 먹고 툇마루에 앉아 있는데 할머니가 다가와 옆에 앉으시더니
나이가 몇이냐, 고향은 어디냐, 형제는 몇이냐,
부모님은 살아 계시냐 하고 물으시더니 갑자기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 에이그... 돌아가신 부모님이 눈을 못 감으시겠어!" 하시는 것 아닙니까?
나는 의아해서 " 아니, 왜요?' 하고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자식이 장가를 못 가는데 부모가 어떻게 눈을 감나. 못 감는 벱이여..."
할머니의 이 말씀을 듣고서야 나는 일의 전후를 깨닫게 되었고,
오야지가 견적 내러 왔을 때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여담으로
내 이야기를 했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튼지 소문 참 빠르고,
그런 류의 소문일수록 더욱 빠르다는 사실을 실감하였습니다.
어쨌든 " 나는 고자요!"이 한 마디 덕분에 나는 지금까지 편하게 살고 있습니다.
< 좆 다마 >
우선 이 글을 읽는 분들께 죄송하다는 사과의 말씀부터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내 글의 표현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반적 통념을 뛰어넘어
너무 적나라하기 때문입니다.
자지니, 보지니, 씹이니 하는 표현들을 스스럼없이 쓰고 있고,
죽인다거나 죽여야 한다는 말도 적지 않게 나왔습니다.
나는 ( 내가 볼 때 ) 그렇게 과격하거나 음탕한 사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런 단어들이 나오는 이유는
첫째, 나는 나의 감정을 숨기거나 미화하지 않고 솔직하게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순우리말을 쓰고 싶은 이유와 함께,
겉으로는 순수하고 얌전한 체하면서 속으로는 호박씨를 까고 있는
이 나라 사람들의 철저한 위선에 일격을 가하고 싶은 충동도 섞여 있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다시 한번 양해를 구하는 바입니다.
여행과 관광의 사전적 의미가 어떤 것인지는 읽어보지 않아서 나는 모릅니다.
하지만 혼자 떠나면 여행이고, 둘 이상이 함께 하면 그것은 관광이다,라고
내 개인적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둘이든 셋이든 옆에 동행이 있으면 우선 말을 많이 하게 되지 않습니까?
여행이란 수도승의 좌선과도 비슷한 건데
말을 많이 하게 되면 나의 내면과,
눈앞에 펼쳐지는 자연에 대해 집중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뭔가가 채워지다가도 자꾸 빠져나가는 것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탁 트인 바다 앞에 섰을 때나 붉게 물든 노을 앞에 섰을 때,
혹은 어느 산 모퉁이를 돌다가 이름 모를 꽃 한 송이를 발견했을 때,
그 앞에 발걸음을 멈추고 시를 한 편 읊을 수도 있고 몇 마디 말을 건넬 수도 있고,
그때그때의 감정의 변화에 따라 이런저런 표정을 마음껏 지을 수 있어야 하는데,
누가 옆에 있으면 그런 걸 못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여행을 떠나기 전에 목적지와 중간 경유지를 미리 정해 놓기는 하지만
마음과 발길이 이끄는 대로 도중에 쉽게 변경할 수도 있어야 하는데
누구와 함께 하면 그런 모든 것들이 불편하니
여행의 의미는 반감되고 관광이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글의 제목을 "좆 다마"라고 정해 놓고 엉뚱한 이야기만 한참 늘어놓았네요.
좆 다마를 유독 많이 하고 있는 특정 지역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도 사람들입니다.
그게 "어느 정도 많이"가 아니라
한눈에 보기에도 다른 도 사람들과 확 표시가 날 정도로
△△ 도 사람들은 좆 다마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 사실을 한두 번이 아니고 수도 없이 목격하고 확인했기 때문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게 서울 사람인지, 혹은 경기도나 강원도 사람인지,
아니면 충청도나 경상도나 전라도나 제주도 사람인지는 밝힐 수 없습니다
나는 무더운 한 여름에도 목욕탕엘 갑니다.
이상하게 혈액순환이 잘 안 되는지 날씨가 흐리고 습도가 좀 높다 싶으면
한 여름에도 몸이 찌 뿌드하고 그럴 땐 목욕탕에 가서
뜨거운 물에 몸을 한참 담가서 땀을 내야 몸이 풀리곤 합니다.
자전거 여행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자전거 여행이라고 해서 진종일 페달만 밟는 게 아니고
도중에 기념관·박물관·전시관이 있으면 그곳에도 들르고
시가 적혀 있는 조각공원에서 여러 시간씩 보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걸 다 포함해서 하루 주행 거리가 평균 70에서 80 킬로미터 정도 되는데
그렇게 주행을 하고 나면 저녁 무렵엔 몸이 지치고 피곤한 법입니다.
그렇다고 욕조가 딸린 3 만 원 이상의 장급 여관에서 잘 형편이 안 되어
나는 기어이 1만 원, 비싸 봐야 1만 5천 원짜리 여인숙을 찾게 되는데
여인숙에는 욕조도 없고 따듯한 물도 잘 안 나오니
할 수 없이 매일 목욕탕엘 가게 되는 겁니다.
자전거 여행을 하다 보면 도와 도의 경계가 모호합니다.
물론 도와 도의 경계에는 " 어서 오세요. 여기서부터는 ○○ 도입니다."
이런 비슷한 문구를 도로 위 높은 곳에 써붙여 놓았지만
내가 그것을 보는 경우는 드물고, 식당을 가거나 행인에게 길을 물어보았을 때
그 지방 사투리를 듣고 나서야
아, 내가 ○○ 도에 들어와 있구나 하는 걸 알게 됩니다.
그 사투리 외에, 내가 그 지역,△△도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는 건
바로 목욕탕에서 입니다.
목욕탕에 들어섰을 때 다마 (구슬 )와 링으로 울퉁불퉁한
그 지방 사람들의 자지를 보고 아, 여기가 △△ 도구나 하면 정확합니다.
△△도 사람들은 다른 도 사람들에 비해 정말이지 좆 다마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좆 다마를 하는 게 좋으냐, 나쁘냐를 이야기하려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자지에 구슬이나 링을 끼우면 남자 자신이 아니라
여자의 성적 쾌감이 높아진다는데
그렇다면 △△ 도 사람들은 다른 지방 남자들보다
여자를 배려하는 마음이 더 깊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안 그런가요?
어쨌거나 저쨌거나 다른 뜻은 전혀 없고,
나는 그저 사람들이 신기해하고 재미있어할 것 같아
이 이야기를 한 것뿐입니다. 그뿐입니다.
그나저나 △△ 도에 사시는 여자분들, 좋으시겠습니다!
< 어떤 시어머니와 며느리 >
내가 오십을 넘게 살면서 제일 비싸게 주고 산 물건이 120만 원짜리 자전거입니다.
그 자전거를 타고 전국 곳곳을 여행하였습니다.
짧게는 일주일에서 열흘, 길게는 한 달씩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동·서·남해안, 중부내륙과 울릉도 제주도,
해남의 땅끝 마을에서 강원도 고성의 군사분계선까지 안 간 곳이 없습니다.
대관령, 미시령, 진부령은 물론이고
높고 길다 하는 한국의 영들을 다 자전거로 넘었습니다.
한 10년 전에도 한 달 일정으로 자전거 여행을 떠났었습니다.
좀 일찍 떠났어야 하는데 무슨 일 때문에 기회를 놓쳐서
여행을 떠난 때는 늦가을이었고, 조석으로 꽤 쌀쌀할 때였습니다.
주행 중 소낙비와 함께 길고 가파른 언덕을 만났습니다.
우비를 꺼내 입을까 하다가 비에 젖으나 땀에 젖으나 마찬가지일 것 같아
비를 그대로 맞으며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시속은 약 5 KM. 사람이 걷는 것과 비슷한 속도.
언덕이 얼마나 긴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 긴 언덕을 고개를 푹 떨구고 숨을 깊이 고르면서 서두르지 않고 페달을 밟고 있으면
내가 마치 깊은 산속 어느 폭포 옆에서 가부좌를 틀고 좌선을 하고 있는
수도승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끝이 없을 것 같은 언덕이 끝나고 내리막 길이 시작되었습니다.
올라올 때는 쉴 새 없이 페달을 밟느라 땀이 났지만,
내려갈 때는 힘쓸 일이 없고 속도까지 빨라지니
몸에 맞는 비바람이 엄청 거세고 얼음처럼 차가웠습니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런 추위를 맛보았고,
추위 때문에 온 몸을 떨고 이빨을 부딪쳐보기도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빨리 시내에 들어가서 따끈한 국물에 소주를 한 잔 했으면 좋겠는데
가도 가도 시내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르막길보다 훨씬 긴 것 같은 내리막 길이 끝나고
집이 한두 채씩 보이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택시와 버스와 빌딩들과
사람들로 분주한 시내가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보아도 내가 들어갈만한 식당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몸에서 물이 줄줄 흐르는, 꼭 물에 빠진 생쥐꼴인 나 같은 사람을 누가 반겨 줄 것입니까.
한참을 찾아 헤맨 끝에 어느 골목에서 작은 분식집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홀에는 손님이 하나도 없었고,
작은 방에서 모녀로 보이는 30대와 60대 여자 두 사람이
무릎에 담요를 덮고 TV를 보고 있었습니다.
나를 본 두 여자는 깜짝 놀라는 표정이더니
그중 나이 많은 아주머니가 벌떡 일어나 뜨거운 물부터 한 잔 내다 주어
혹 쫓겨나지 않을까 걱정하던 나를 안심시켜 주었습니다.
나는 소주부터 청해서 급하게 한 잔을 들이켰습니다.
그런데 뱃가죽이 등가죽에 달라붙은 빈 속이었는데도 속에서는 아무 기별이 없었고
두 잔을 마셔도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안주도 없이 연거푸 세 잔을 들이 부운 후에야 속에서 천둥번개를 치며
고압 전기에 감전된 듯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내 몸을 한 번 부르르 떨게 하였습니다.
내가 주문한 것은 칼국수뿐이었는데
아주머니는 구수한 된장국에 밥까지 한 그릇 내다 주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밥 먹을 겨를이 없었습니다.
TV를 끄고 나를 향해 돌려 앉은 아주머니는
어디서 왔느냐, 고향은 어디냐, 직업이 뭐냐, 나이는 몇이냐, 부모님은 살아 계시냐,
결혼은 했느냐, 아니 왜 그 나이 되도록 결혼을 안 했느냐,
이 추운 날씨에 나와서 왜 사서 그 고생을 하느냐 등등,
아주머니의 끝없는 질문에 답을 하느라고 나는 밥 먹을 새가 없었습니다.
내가 인사치레로 소주 한 잔 하세요, 했더니 젊은 여자는 사양을 했지만
나이 드신 아주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한 걸음에 내 앞에 와 앉았습니다.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소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던 중,
이렇게 나와 다니면 잠은 어디서 자느냐고 묻길래 여인숙에서 잔다고 했더니
그러지 말고 우리 집에 빈 방이 많으니 자고 가라며 호의를 베풀어주셨고
한 푼이 아쉬운 나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주머니는 칼국수 값, 소주 값도 받지 않았습니다.
살림 집은 가게와 붙어 있었습니다.
주방 뒷문을 열고 나서니 바로 안채의 좁은 마당이었고,
아직도 창호지 방문을 달고 있는 오래된 기와집이었습니다.
따듯한 사랑방에 배낭을 풀고 나서 젖은 옷을 빨아 널고 샤워를 한 뒤 일기를 쓴 다음
MP3로 음악을 좀 듣다가 빳빳하게 풀을 먹인 깨끗한 솜이불 속에 몸을 누이니
그렇게 편하고 아늑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단했던 나는 눕자마자 단잠에 빠졌고,
한참 자다가 눈이 떠져 아침인가 하고 시계를 보니
이제 겨우 밤 열 시가 조금 넘고 있었습니다.
안방에서 큰소리가 난 것은 그때였습니다.
" 어머니! 왜 그러세요?"
목소리를 들어보니 딸처럼 보였던 젊은 여자였고,
대꾸가 없는 것으로 미루어 전화 통화를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 그러지 마세요, 어머니!"
불만에 가득 찬 젊은 여자의 목소리에 나는 신경이 곤두섰고,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어머니! 누가 그런 생각 해 달라 그랬어요?"
"......"
" 그러지 마시고 들어 오세요!"
"......"
" 그러니까 일단 들어오시라니까요!"
"......"
" 어머니, 어머니!....."
상대방에서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것 같았고, 나는 불안해졌습니다.
‘엄마’가 아닌 ‘어머니’로 부르는 것으로 미루어 모녀가 아닌 고부,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인 것 같았지만
어쨌든 두 사람의 갑작스러운 불화가 나 때문인 것 같아서 나는 좌불안석이었습니다.
곧이어 안방 문 여는 소리와 함께 그 부인이 나오는 기척이 들렸고,
나에게 뭔가 (아마도 떠나 달라는 ) 이야기를 하러 오려는가보다 했지만
젊은 부인이 향한 곳은 가게였습니다.
나는 아무래도 떠나야 할 것 같은 생각에
빨아 널었던 젖은 옷을 비닐봉지에 넣어 서둘러 배낭을 챙겼고,
이불을 반듯하게 개켜놓은 다음 가게로 나갔더니
젊은 부인은 소주를 한 병 놓고 혼자 식탁에 앉아 있었습니다.
" 죄송합니다. 나 때문에 불편하셨나 본데 여인숙으로 가겠습니다." 했더니
" 아니에요. 그래서 그런 게 아니에요. 어머니는 곧 들어오실 거예요. 주무시고 가세요."
부인의 이 말에 어떡할까 잠시 망설이고 있는데
나에게 소주나 한 잔 더 하시라며 잔과 수저를 한 벌 갖다 놓는 것이었습니다
솔직히 나는 여인숙비 1만 5천 원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다른 식구도 없이 단둘이 살고 있는 이 두 여인과,
오늘 이 일이 어떻게 된 것인가 하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눈 딱 감고 젊은 부인 앞에 앉았습니다.
그렇게 마주 앉아 소주를 마시며 우리는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내 짐작대로 두 사람은 고부간이었고, 참 기구하게도 두 여인 모두 과부였습니다.
시어머니는 결혼해서 아들을 하나 얻자마자 남편이 죽었고,
그 아들을 애지중지 키워 결혼을 시켰더니
이번에는 자식도 하나 얻지 못하고 아들을 잃고 말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결혼은 했다지만 자식도 없는 젊디 젊은 여자가 망설일게 무엇 있겠습니까.
바로 떠나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도 없고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지만,
더 늦기 전에 좋은 남자 만나 재가하라는 시어머니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 혼자 살고 있는 시어머니를 버리지 못한 채
10년 넘게 분식집을 운영하며 모녀처럼, 친구처럼 서로 의지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그 이야기를 듣고 나자, 그제야 나는 두 여인의 얼굴에 서려 있는
어두운 그림자의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친구 집에서 자고 오겠다며 자리를 비워 준 그 시어머니는 도대체
나의 어디를 보고 초면인 나를 그렇게 잘 봐주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고,
며느리를 생각해주는 시어머니의 그 깊은 배려가 참 별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 날이 채 밝기도 전 이른 새벽에 나는 조용히 그 집을 떠났고,
그날부터의 나의 자전거 여행은 더욱 숙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금은 40대 중반이 되어 있을 그 젊은 부인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직도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는지
아니면 좋은 남자를 만나 새로운 행복을 찾아 떠났는지가 몹시 궁금합니다.
그 도시가 어디였고, 그 분식집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면
모르긴 해도 내가 한 번쯤은 찾아가 보았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썼던 일기는 돌아온 직후 바로 태워 버렸고,
기억상실증에 가까운 형편없는 나의 기억력 때문에
모든 걸 다 잊어버린 채 지금은 다만
나의 추억 속에 한 편의 영상으로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기구한 운명의 그 두 여인이 말년에나마 꼭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회원님들께 조그마한 재미를 선사하고 싶어 시작한 글이었는데
목적이 달성되었는지 모르겠네요.
너무 길어졌으니 오늘은 이것으로 끝 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10 년 4월 강봄.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의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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