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이 다섯 번이나 변한 긴 세월. 꿈꾸지 않는 사람은 절망도 없다고 했던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설치던 꿈많은 젊은 시절, 처음 대학교 입학을 하여 아무것도 모르던 신촐래기 신입생, 고향을 떠나 객지를 경험한 것도 고등학교 2학년 수학여행이 처음이요. 듣고 보는 것도 없는, 늘 같은 환경과 개미 쳇바퀴 돌듯한 시골에서 생활을 하다가 대학에 진학을 하게 되니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 우리나라 제2의 도시 부산으로 가게 되었는데, 처음 대학에 들어가서 낯선 환경에 학점 신청이며 시간표 작성으로 정신없이 지내면서 강의실을 찾는 것도 잘 몰라서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신입생 시절에 20명밖에 안 되는 국문과 학생들을 처음 만나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였다. 며칠이 지나면서 얼굴을 익히게 되고 서로 말도 트면서 조금씩 친해지던 때쯤 몇몇 친구들이 당구장엘 갔는데 생전 처음 잡아보는 당구대! 촉감은 좋은데 공을 향하여 힘껏 큐대를 미니 공이 마음먹은 대로 가지 않고 제 맘대로 가는 것을 보고 세상사가 당구공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 번 두 번 다니다 보니 조금씩 실력이 늘었고 당구장에 가는 친구들이 저절로 그룹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그중에 정함용과 우광호와 나, 세 명이 친해지면서 붙어 다니면서 틈만 있으면 당구장을 찾곤 하였다. 그런데 게임비가 장난 아니게 가난한 학생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되어 많이 절제하였지만 별다른 놀이가 없는 상황에서 처음 접하는 호기심에 제일 접하기 쉬운 것이 당구장이다 보니 허구한 날 당구장을 들락거리게 되었고 그때는 게임을 계산해 주는 아가씨가 있어서 젊고 예쁜 아가씨를 보려는 마음도 없지 않았던 것 같다. 종종 우리 몇 명이 강의를 빼먹고 당구장을 가면 강의가 제대로 되지를 않아서 휴강을 하기도 하였다. 점심때가 되면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늘 가는 곳이 분식집이었고 만두나 국수를 먹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특별식으로 돈까스를 시켜놓고 한참을 기다리니 멀건 죽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몇 숟가락 먹고 나니 빈 접시만 남는데 간에 기별도 안 가고 기다려도 더 나오는 것은 없고 하여 이것이 돈까스인가 하는 생각에 친구보고 야! 내가 계산할 테니 다른 것 하나 더 시켜 먹자고 하니 함용이 친구가 잠깐 기다려 보라고 하는 게 아닌가. 기다리고 있으니 무슨 개떡같이 생긴 손바닥 만한 부침개 하나에 잘게 썬 야채가 나오는 것이었다. 곁눈질로 친구를 보면서 유식한 말로 나이프로 자르고 포크로 찍어서 먹어 보니 튀김옷 안에는 고기가 들어있는 것이, 나중에 알고 보니 돼지고기였다. 맛있게 먹었지만 그때의 실수를 생각하니 낯이 조금 뜨거워지기도 한다. 그렇게 세 친구가 친해지면서 서로의 집으로 왕래를 하게 되었는데 청학동의 친구 집에를 가면 편물 기계가 있어서 어머니와 여동생이 편물을 짜던 모습과 기계를 밀 때 나는 찍익! 찍익! 하는 소리가 지금도 여운으로 남아있고 범일동 친구네는 2층 방 한 곳에는 아버지의 작업장이 있었는데 금세공하는 방이라 함부로 접근을 하지 못하고 옆방에 놀면서 조심스럽게 다녔던 기억도 지울 수가 없다. 나는 누나에게 얹혀 지내는 형편이라 누나 집에 친구들이 오면 신경이 쓰이긴 하였지만 누나가 편하게 잘 해줘서 다들 별 부담 없이 드나들곤 하였다.
그렇게 정신없이 한 학기를 보내고 여름 방학이 되어 정함용, 우광호, 나 세 사람이 남해도로 캠핑을 가기로 하고 생전 처음 하는 캠핑이라 가슴이 설레고 많은 기대를 하면서 준비물을 하나하나 챙기는 것도 여간 즐거움이 아니었다. 셋이 만나서 계획을 짜며 같이 준비하는 것 중에는 텐트와 랜턴이 문제였는데 마침 텐트는 범일동 친구 집에 군용 텐트가 있어서 해결이 되었고 랜턴은 포장마차에서 사용하는 카바이트 등을 준비하고 냄비와 코펠 등 각자 분담하여 준비를 하여 배낭은 물론 국산 여행 장비가 없던 1960년대, 냄비와 양파, 감자 등 반찬거리와 쌀 그리고 개인 소지품을 여행용 가방에 넣으니 가방이 터질 것 같고 무거운 가방을 들고 땀을 뻘뻘 흘리며 목적지 상주 해수욕에 도착하니 드넓은 해수욕장에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고 낮에는 소나무 숲속에 몇 사람이 있다가 돌아가고 밤이 되니 해수욕장은 우리 텐트 하나와 세 사람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이었다.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너무도 한가롭고 조용한 밤에 취해서 파도 소리를 들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오는 게 아닌가? 처음에는 조금 겁도 나고 의아스러웠는데 알고 보니 밤이 되니 바닷가에 밝은 불빛이 보여 궁금해서 왔다며 마을 주민들 10여 명이 와서는 카바이트 등을 보고 신기해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함께 하다가 늦게 돌아가기도 하였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조용한 해수욕장에서 3~4일을 지내기가 재미없고 싫증이 나서 남해의 대표적인 산으로 전국적으로 이름난 아름다운 금산 등산을 하였다. 워낙 덥고 사람도 없는 곳이라 해수욕 팬티만 입고 산행을 하고 찍은 사진이 지금도 증거로 남아있다. 캠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삼천포 시골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인 우리 집에 들러서 하룻밤을 묵었던 일을 잊을 수가 없다.
두 친구가 군대 가기 전까지 3년간 남해를 비롯하여 제주도로, 울릉도로 해마다 캠핑을 다니며 추억을 만들다가 친구들이 군대를 가면서 대학생활은 각자의 길로 갈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내가 4학년이 되는 해에 누나가 서울로 이사를 하면서 같이 서울로 올라오는 바람에 친구들과는 저절로 헤어지게 되었고 편지로 간간이 연락을 주고받으며 지내다가 동두천 미군부대에 근무하는 함용이 친구 면회를 가서 숙소까지 들어갔다가 오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나는 1971년 경기도 평택의 시골 면 소재지 학교에 취직을 하게 되어 완전히 고향이나 부산과는 멀리 떨어진 시골에서 생활하다 보니 지난 일들은 서서히 잊혀져 가는 중에 함용이 친구는 자취를 하는 평택 집에 와서 같이 지내기도 하였으며 후에 그 친구는 외항선을 타게 되어 멀리 떠나고 편지로 오랫동안 연락을 주고받으며 외국 우표도 보내오곤 하였고, 광호 친구와는 연락이 거의 되지 않는 상황에 어떻게 연락이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친구나 친척 중 유일하게 내 결혼식에 광호라는 친구가 참석을 하였던 것이다. 대구에서 결혼식을 하는데 부산에서 전날 와서 늦게까지 다방에서 이야기를 하였고 결혼식 날은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헤어지고는 연락이 끊어지고 말았는데 우연히 이메일 주소를 알게 되어 서로의 연락을 하게 되었고 그동안 카톡으로 종종 연락을 주고받다가 이번에 광호 친구가 자기가 다 준비할 테니 아무 걱정하기 말고 부산으로 내려와서 만나자고 하여 2021년 5월 25일 KTX 열차를 타고 부산역에서 반세기 만에 극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마스크를 하고 약속 장소로 가는데 지나가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서로를 쳐다보며 머뭇거리는데 광호 친구가 최~상~민 하며 내 이름을 부르기에 너무나 반가워서 서로 끌어안고 인사를 하였다. 선상 주차장에서 친구 차를 타고 광안리 친구 집으로 가서 잠시 내가 기도를 하고 준비물을 싣고 광안 대교와 해상으로 연결된 도로를 달리며 부산 시가지를 한 눈에 바라보며 달리는 기분은 아주 상쾌하고 좋았다. 더구나 거가대교를 따라 해상으로 연결된 높은 다리와 48m의 바다속을 통과하는 지하터널을 지나서 거제도 장목항 어느 팬션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쉬다가 7시경에 준비해 간 회를 중심으로 푸짐한 저녁을 먹고 그동안 쌓인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니 끝없이 실타래처럼 술술 풀리는 것이었다. 대학 시절의 캠핑 이야기며 함용 친구와의 이야기에, 그동안 각자 지내 온 삶의 이야기와 교회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문제 등 산처럼 쌓인 추억을 하나하나 풀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1시가 넘었다. 다음날을 위해서 1시30분에 헤어져 잠자리에 들었고, 둘째 날은 2003년 가을 태풍 매미로 파괴된 둑을 보수하면서 옛 성처럼 쌓아서 이름하여 매미성이라는 한 사람의 무서운 의지로 이룬 삶의 현장을 둘러보며 사진도 찍고 멀리 바다를 바라보며 답답한 가슴을 활짝 열고 시원한 바닷바람을 마시면서 대학시절에 바다로만 다니던 캠핑에 대한 추억을 그려보았다.
돔 안의 폭포
밍크 선인장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정글돔이라는 식물원인데 엄청나게 큰 돔 안에 높은 전망대에 올라가서 전망을 할 수 있게 꾸며 놓고 폭포와 각종 식물과 꽃을 구경하면서 한참을 둘러보고 바람의 언덕으로 가려던 계획을 바꾸어 이른 시간 3시경에 숙소로 와서 쉬다가 7시에 저녁을 먹고 전날의 미수잠과 피곤함으로 10시30분까지 이야기를 하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안식구끼리는 서로가 처음 보는 사인데 친구 부인이 음식 준비를 철저하게 너무 많이 하여 다 먹지를 못하고 버리는 것이 많아서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첫날 저녁에는 회를 중심으로 저녁을 먹었는데 회를 얼마나 푸짐하게 준비하였는지 절반 정도밖에 못 먹고 생선찌개도 마찬가지로 다 먹지를 못했다. 다음 날도 미역국과 추어탕 등 밑반찬도 깔끔하게 차렸고 네 끼 밥을 손수 지어서 차리면 우리 내외는 그냥 가서 먹기만 하다 보니 너무 미안하고 고맙기도 하였다. 다음 만날 때는 우리가 대접하겠다는 약속으로 감사를 대신하였다.
반세기 만의 만남, 대학 3학년 말에 헤어진 때를 계산하면 꼭 53년 만이다. 그동안 살아온 과정을 짧은 시간에 이야기하였지만 주된 내용은 즐거웠던 대학 생활과 교회 문제로 아픔을 겪게 된 이야기가 친구와 내가 겪은 것이나 지금 처한 현실이 너무나 흡사하고 가정사도 마찬가지로 비슷하여 서로 공감하는 것이 많아서 소통이 더 잘 된 것 같았다.
有朋自遠方來하니 不亦樂乎라는 論語의 學而篇 나오는 ‘말로 멀리서 친구가 찾아오면 즐겁지 아니한가?’ 라는 의미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명구절이다. 친구를 만난다는 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반갑고 소중한 자산이 아닐 수 없다. 나이가 들수록 친구가 있어야 하고 만날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며 삶을 윤택하게 하는지 측량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2박 3일의 짧은 일정을 마치고 아쉬운 작별을 하고 나는 다시 KTX를 타고 올라오면서 앞으로 서로 소통하며 잘 지내기로 굳게 다짐을 하였다. 그 다짐이 꼭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
거친 광야를 헤매며
먹이와 꿈을 찾아
무거운 삶의 짐을 지고
앞만 보고 살아온 세월
어언 반세기
이기적인 사회적 동물
그 본성을 따라
타향에서의 낯가림에
몸부림치며 버티느라
추억을 망각한 숱한 날
황혼의 길목에 들어서서
아름다운 서쪽 하늘처럼
돌아보니 붉게 물들어
하나님이 정한 수를 다하고
남은 날을 그리며
살아 있으매 감사하고
두 발로 걸을 수 있으니
반세기만의 만남에
말을 못하고 끌어안은 채
눈빛으로 인사하고
남쪽 바다의 잔물결을 보며
깊어 가는 밤과 함께
매듭진 보따리를 풀듯
거미줄 같은 끄나풀을
길게 뽑아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