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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이창동 감독에게 듣는다
대담자 _ 유지나(영화평론가, 동국대 교수)
장 소 _ 성북동, 이창동 감독 작업실
사 진 _ 김이하 시인
정 리 _ 손순희 편집장
도서출판 ‘작가’와 문화계간지 ‘쿨투라’에서 100명의 영화, 문화예술 전문가들이 지난해 최고 영화로 이창동 감독의 <밀양>을 선정했다. 인터뷰를 꺼리는 것으로 잘 알려진 이창동 감독의 인터뷰를 성사시키느라 고생한 사연을 구구절절 풀어놓으시면서 손사장님은 인터뷰를 당하거나 하는 것이나 다 꺼려하는 나를 결국 이창동감독의 사무실로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스크린쿼터운동’을 통해 그와 친분을 쌓은 나는 딱딱한 인터뷰보다는 평소처럼 영화와 인생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부담 없는 차 한 잔의 대화로 풀어가기로 합의를 했다.
<밀양>을 막 다시 보고 성북동으로 가는 길이어서일까? 하늘이 꼭 <밀양>에 나오는 구름들을 두른 청아한 자태로 눈부시게 빛난다.
유지나_ 오늘 하늘이 <밀양>에 나오는 첫 장면, 그것도 실내에서 유리를 통해 보는 하늘 모습과 똑같아서 이야기가 잘 풀릴 것 같습니다.
이창동_ 하늘은 밀양 하늘이나 어디 하늘이나 다 똑같은 하늘일 텐데, 날씨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할 테죠. 구름이 비슷한 거 같네요.
유지나_ 그렇지요? <밀양> 얘기를 하려니까 하늘도 도와주는 것 같고, 또 오랜만에 감독님 뵈니까 반갑네요. 그런데 좀 초췌해지신 것 같아요.
이창동_ 늘 그래요.
유지나_ <밀양>을 본 제 느낌은, 한국영화에서 세상 보는 철학과 삶에 대한 철학의 높은 수준은 이창동 감독이 여전히 담보하고 있구나, 라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그러면서 그래서야 되겠는가. 이창동 감독이 여전히 최고면 안 되는데 이거보다 더 고차원의 영화가 안 나오니까 안타깝기도 했지요. 그래도 여전히 감독님이 <초록물고기>, <박하사탕>, <오아시스>에 이어서, 그러니까 장관직을 하고 돌아와서도 망가지지 않고 여전히 고지를 지키고 있다는 게 고맙다, 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이창동_ 무슨 철학을 담보하고 정신을 담보하고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고, 이런 생각은 많이 하죠. 영화가 우리가 극장에서 보는 많은 영화들, 흔히 영화 매체의 특성이라고 하는 것들, 영화가 대중 관객들하고 만나는 지점, 이런 생각을 많이 하는데, 삶이란 게 참 쉽지 않은 거고. 윤리적인 문제든 미학적인 문제든 굳이 철학이라 이름 붙이지 않아도 삶의 요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 그런 것들을 한 개인에게 많은 것을 던져 주는데 다른 예술 장르와 달리 영화는 그런 것과 무관한 것인 양, 그런 것을 영화에서 담는 것은 영화적이지 않은 것처럼 받아들이는, 영화는 즉자적인 어떤 것, 또는 뭐라 할까요? 어떤 소비되고, 어떤 영화적 자극에 의해서 소비되는 어떤 것,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는 평소에 내부에서 저항을 많이 하죠. 나는 어떤 고지를 올라간다는 생각보다는 영화도 그런 것에 대해서 대답하는 장르여야 되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들어요.
유지나_ 저도 공감을 합니다. 만약 감독님이 스스로 내가 한국 영화에서 삶에 대한 고민과 철학, 그 정상을 고수한다고 생각한다면 유치한 사람이겠죠. 그건 아니고요. 그저 제가 관객이나 평자로서 볼 때, 왜 한국영화는 삶의 문제를 껴안고 뒹굴지 않는가, 란 문제에서 항상 답답함과 안타까움늘 느꼈는데, 감독님 영화는 여전히 그런 고민을 안고 허우적대는 것이 참 좋았다, 라는 것이죠.
이창동_ 제 이야기는 높낮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죠. 고지라는 것은. 이런 영화적 경향이랄까 이런 것들이 꼭 한국만의 문제만은 아니에요.
유지나_ 세계적으로도 그렇겠지요.
이창동_ 어떤 의미에서는 영화 매체가 어떤 방식으로 관객들하고 만나느냐의 문제일 텐데, 어쨌든 윤리만 따지고, 사실 윤리를 따지는 거는 지금 지나간 화두랄까? 지나간 이슈처럼 받아들이고 있어요. 모든 것을 쿨하게 바라보고 진정성이랄까 이런 거에 대해 약간은 시니컬한 시각, 어떤 의미에서는 좀 속물적인 게 더 세련되고 더 쿨하게 받아들이는 이런 경향, 의미와 각론을 따지는 걸 낡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 이게 어떤 의미에서는 탈근대적인 성격인지도 모르고, 영화 매체가 문자 매체와 달리, 문자 매체는 그런 걸 주로 다루었다면 영화 매체는 거기로부터 벗어난 어떤 걸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영화 매체 자체에. 윤리적인 것은 영화 매체와 잘 안 맞는다고 생각하고. 지금 저는 거기에 저항하는 거죠. 내면으로부터. 영화는 꼭 그래야만 되나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유지나_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윤리란, 세상 도덕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괴롭고 그것 때문에 상처 받고, 그것에 대해서 사유하고, 이런 차원의 고답적이고 전통적인 윤리 차원의 문제를 얘기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이창동_ 그렇죠. 윤리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도덕하고는 다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도덕은 대개 바깥에서 주어지는 거잖아요. 윤리라고 말할 때는 스스로 빠지는 거죠. 내면에서, 내면의 거울이라고 할까요? 그러니까 윤리를 따질 때는 어떻든 기준에서 벗어날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이제 시대는 기준 자체를 우습게 생각하는 시대가 됐잖아요. 예전에는 이런 식으로 했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 기준의 문제를 고민을 할 거라고요.
유지나_ 그래서 전문가 100명이 <밀양>을 가장 좋은 영화로 뽑았다는 게 참 반가운 일이란 것이죠. 가벼운 오락거리로만 영화 매체 전체를 대하는 태도는 늘 존재해 왔죠. 지금 돌아다니는 영화담론이란 게, 관객이 얼마 들었느냐, 해외에 얼마나 수출되었느냐, 그런 숫자로 환산해서 영화 등급을 매기고, 비평은 사라지죠. 이런 시대 분위기 속에서도 <밀양>이 나오는 것은 감독님의 영화에 대한 생각, 영화 만들기 철학, 이런 것들이 작용했을 텐데요. <밀양>이 그래도 지지를 받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창동_ 이제 지지가 어떤 성격의 것이냐가 문제가 되겠죠. 저는 불과 4편밖에 안 만들었는데, 제가 체감하는 일반 관객의 반응은 <밀양>이 최악이었어요, 최악. 외형적으로는 4편 중에 관객이 제일 많이 들었어요. 가면 갈수록 관객이 많이 늘어났지요, 이건 제가 자랑으로 말하는 건데. 그런데도 관객들이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보이는 반응 있잖아요. 제가 극장에 있지 않더라도 체감할 수 있잖아요? 그거는 최악이었어요. 일반적인 관객 태도로 봐서는 지지라고 할 수가 없다는 거죠. 그런데 아시다시피 국내에서 상도 받고 이런저런 평론가들이 뽑을 때마다 높은 자리로 뽑아주고……. 물론 국내에서 관객이 많이 든 것은 여러 요인이 작용했겠죠. 일단 관객은 어떤 요인으로 왔든지 간에 극장에서 실망했다고 할까? 실망보다는 적의에 가까운 반감 같은 걸 느끼는 분들도 있어요.
유지나_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겠어요?
이창동_ 어쨌든 그 이야기는 차차 하기로 하고. 일반 관객이 지지했다고 말하기는 어렵고, 그러나 평자들은 많이 좋게 본 편이고, 이것은 이제 뭐랄까 영화 전문가 집단과 일반 관객과의 거리가 넓어졌다고 말할 수도 있을 거고, 제 영화와 관객과의 거리가 더 멀어졌다고 말할 수도 있을 거고. 어쨌든 폭넓은 지지는 아니었다는 것이죠.
유지나_ 그러니까 박스 오피스 흥행 수치와 소통은 다른 거라는 것이지요?
이창동_ 그렇죠. 그건 다르고, 그래서 저는 오히려 늘 관객과 소통한다는 게, 소통하고 싶다는 게 가장 큰 화두였거든요. 그 점에서는 위기감을 제일 많이 느낀 작품이죠.
유지나_ 그러면 전작 3편 가운데 관객과 가장 소통이 잘 된 작품이라면 어떤 걸 들 수 있죠?
이창동_ <초록물고기>는 그렇게 소통이 잘 됐다고 볼 수 없습니다. <초록물고기>는 한편으로는 관습적인 영화인데도 관객들은 굉장히 낯설어 했어요. 아마 관습적인 장르 영화처럼 보여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는데, 그 영화의 진행 방향이나 결말이나 이런 거에 대해서 굉장히 낯설어 하고 불편해 했어요. 아마도 지금은 그렇게 낯설게 보이지 않을 거예요. 그때 당시는 그랬어요. <박하사탕>이나 <오아시스>는 대중적으로 관객들이 많이 찾아준 건 아니지만 꽤 호의적으로 받아들여 준 것 같아요. <밀양>은 대체로 불편해 하고, 심지어는 화를 내는 관객도 많았어요.
유지나_ 그런 이야기는 감독님이 전해 들은 게 아니라 직접 목격한 것입니까?
이창동_ 저는 시사회 후 일반 관객들과 극장에서 같이 영화를 본 적이 없거든요.
유지나_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죠?
이창동_ 그냥 알 수 있죠. 체감으로 느낄 수 있어요. 극장에서 본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거든요.
유지나_ 그럼 일반 관객은 아니잖아요? 인터넷 댓글 같은 것도 참조하시나요?
이창동_ 얼굴이 많이 팔려서 일반 관객들도 많이 알아보고 이야기를 해주죠.
유지나_ 그렇다면 면전에서 좋은 얘기만 외교적으로 많이 하지 않을까요?
이창동_ 좋은 얘기를 해도 진심으로 하는 건지, 어떤지는 알 수 있죠.
유지나_ 그렇다면 불편한 구석은 어떤 거죠? 어떤 이미지. 어떤 대목, 혹은 전체가 주는 어떤 불편함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이창동_ 불편함의 정체는 첫 번째로 이야기하자면 내가 의도한 거예요. 내 영화 방식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는 거예요. 이건 내가 자초한 거예요. <밀양>만 그런 거는 아니고, <초록물고기>부터 <오아시스>까지 관객을 불편하게 하는 요소들이 내 영화들에 있죠. 내가 그걸 잘 알고 있고, 내가 그걸 의도하고 있죠.
유지나_ 이건 흥미롭고 중요한 정본데요. 진지하게 털어놓으셨지만 끝까지 불편한 요소가 뭔지 여전히 크게 추상적으로 말씀하시는데, 그게 뭔지,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관찰자 시점인지 뭔지 짚어주시겠어요?
이창동_ 아마 총체적인 걸 거예요. 모든 것의 총체적인 걸 거예요.
유지나_ 모든 게 체계적으로 총체적이란 건가요?
이창동_ 이야기를 하자면 좀 길어지죠. 이건 영화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태도거나 관점의 문제인데요. 어쨌든 내가 지금까지 이 생각이 불가능할 거라고 믿지는 않아요. 나도 배워야죠. 영화 매체에 대한 내 생각이에요. 보통은 영화라는 매체가 본질적으로 모순된 매체라고나 할까, 현실을 정직하게 반영해서 현실을 드러내거나 성찰하게 하는 요소도 있는 반면에 현실에서 벗어나서 현실 일탈이랄까 이런 것을 주는 볼거리를 제공하는 오락으로서 영화도 있단 말이에요. 어떤 게 가치가 우선이다 말하기는 어렵지만 세상에 유통되는 영화들이 너무 볼거리만 제공하기 때문에 현실을 어떤 식으로 영화 속에 끌고 들어오느냐 하는 게 나에겐 화두가 되었단 말이에요. 나한테만. 일반론으로 누구한테나 강요할 수 있는 건 아니고. 그런데 이를테면 현실을 다루는 데 있어서도 아주 차갑게 다룰 수가 있어요. 거리를 두면서 객관적으로. 감정을 전이시키지 않는 거죠. 저는 그러고 싶지는 않아요. 왜냐면 결국 그런 영화, 영화뿐만 아니라 오래된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뭐 꼭 브레히트? 안 들먹인다 하더라도. 근데 이건 내 개인적인 건데 늘 소화시키다 끝나 버렸어요. 그러니까 내가 끝까지 현실에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태도를 유지해서 그래서, 그 다음에, 이런 질문을 언제나 남는다는 거지요. 어쨌든 영화기 때문에 관객이 그 현실을 체험하게 된다. 관찰하게 된다는 거죠. 여기서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죠. 영화를 통해 관객과 동화되는 것과 체험하는 것과는 좀 다르죠. 영화는 관객을 어떤 매체보다도 쉽게 동화시킬 수가 있어요. 영화 시작하고 1분 내로 동화시킬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쉽게 동화되는 것은 그 현실을 정직하게 바라보면서 체험하는 것과는 좀 다른 문제죠. 그러니까 어쨌든 어떻게 해야 관객들을 영화를 통한 현실 속에서 함께 체험하고 영화가 끝난 뒤에도 영화가 자기와 무관한 어떤 걸로 끝나 버리고 안전하게 현실에 복귀하는 게 아니라 현실 속에 연결될 수 있는, 이게 내 화두라는 것이죠. 이런 태도가 모든 방법론에 적용되고, 삼투되는 것이죠. 이러다 보니까 관객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 관객들은 주인공에 이입돼서 정신없이 따라가든가 아니면 거리를 두고 보든가, 이렇게 해야 되는데 그 경계에서 밀어 넣었다 뺐다 하기 때문에 그게 현실도 아니고, 현실이 아닌 것도 체험하게 하는 게 관객들을 불편하게 할 거예요.
유지나_ 제겐 그 불편함이 어떤 의미에서는 이창동 감독의 스타일, 혹은 화두로 다가오는데, 자신의 수행으로 삼은 화두를 공유하고자 하는 소통의 욕망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 게 느껴지긴 했어요, 제게도. 그런데 그런 불편함을 의도적으로 경계에서 넣었다 뺐다 삼투하면서 소통한다는 게 상당히 까다롭고 세련되면서도 짓궂은 방식이거든요. 약간 관객을 새디스틱하게 다루는 듯하면서도, 영화라는 매체의 모순된 두 가지를 경계에서 부딪치게 하는 고도로 힘든 길을 택하신 셈인데, 그건 택했다기보다 원래 그런 기질이신 것 같아요.
이창동_ 그럴지도 모르죠.
유지나_ 소설에서도 그런 스타일이 느껴지는데, 영화에서는 더 강력하게…….
이창동_ 그런데 소설은 사실 체험만은 아니거든요. 물론 소설도 체험이긴 하죠. 간접체험이라고 말하니까, 독서 행위가. 그러나 체험이라는 말의 의미 폭을 보면 영화가 훨씬 체험적인 매체죠. 그런 의미에서 체험의 질이 다르지 않겠습니까? 영화를 택했기 때문에 체험이라는 것이 중요해졌죠.
유지나_ 몸으로 느낀다. 상당히 난해할 수도 있고 심각하면서도 감각적이네요. 소설과 영화를 비교할 생각은 없지만 일단 영화가 더 드라마틱한 면을 보여주는데요. 전작 3편은 감독님이 시나리오를 썼는데, <밀양>만 원작이 있는 거군요. 이걸 보면서 영화적으로 더 체험적인지 모르겠지만, 소설에서 내레이터인 남편을 죽여 버리고, (제가 대한민국 영화에서 본 제한된 목록에 따르면) 순정파 남자가 등장하죠. 대체로 영화를 전도연(신애) 중심으로 보지만, 다르게 보면 저는 송강호(종찬) 중심으로 보면 남자 순애보로 볼 수가 있다는 거죠. 훈훈한 남자, 요즘 말하는 훈남의 계보로 보자면, 액션멜로 장르 <약속>, <편지> 등…… 그리고 곽경택 감독조차도 등장시킨 <사랑>의 남자를 연상시킨다는 거죠. 송강호는 조연이지만 매우 중요한 캐릭터이죠. 그간 감독님은 고통 받는 남성, 즉 자신의 어떤 것들이 삼투되어 있는 남성, 근대사나 과거로부터 도망갈 수 없는 남성, 굉장히 아프고 망가진 상처 받은 남자 이야기를 중심에 두고 여자 이야기를 깔아 놓았다면, <오아시스>에서만 여주인공이 남주인공과 일대 일 관계로 나오죠. 그래서 <밀양>은 처음으로 여자를 중심에 놓고, 남자 순애보를 껴안았다고 저는 생각해요. 그리고 그건 젠더 차원에서 진전을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이창동_ 저는 꼭 그렇게 생각하진 않고요.
유지나_ 이렇게 보는 사람도 있으니 흥미롭지 않나요?
이창동_ 물론 이게 순애보로 읽힐 수 있지 않을까 짐작은 했지요. 짐작은 했지만 애초부터 순애보 생각은 없었고, 영화 속에서 신애와 종찬은 그냥 남녀의 대립이라거나 남녀의 균형이라기보다는 인간과 인간의 차이예요. 무슨 말이냐면, 그게 남녀의 차이일지도 몰라요. 어쨌든 본질적으로 이런 인간과 저런 인간인데, 전도연은 말하자면 자기 삶에서 끊임없이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이에요. 자기 삶의 로직을 설정하지 않으면 자기 삶이 공허해서 견디지 못하는 인간이에요. 종찬은 로직이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인간이에요. 그냥 주어진 대로 살겠다, 이런 인간이에요. 어떤 의미에서는 한 인간이 이렇게 둘로 정확히 구분되지는 않겠죠. 한 인간 속에도 이 두 부분이 다 있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아마도 굳이 젠더로, 성으로 따지자면 여자 쪽이 좀 더 의미를 추구하는 편이고 남자 쪽은 좀 더 물질적이라고 할까? 있는 그대로를 추구하는 거라고 말할 수도 있겠죠. 지금 영화 속에서 종찬은 사실은 여자를 위해서 순애보적인 사랑을 바치는 인물은 아니에요. 사실 이 남자가 이 여자한테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요.
유지나_ 제겐 많이 것을 했다고 보이는데요. 항상 옆에 맴돌고, 종교까지도 여자 때문에 바꾸고…….
이창동_ 이를 테면 껄떡거리는 거죠. 자기를 희생하지는 않는다고요. 여자가 정말로 힘들고 어려울 때 종찬은 그 자리에 없어요.
유지나_ 그러니 이런 사람이 훈남으로 보일 정도니! 한국영화에서 그동안 남자의 이런 보습을 제대로 얼마나 안 그렸으면 제가 이런 느낌을 가질까요?
이창동_ 많은 사람들이 종찬을 훈남으로 봐요. 나로서는 성공한 거죠. 왜냐하면 종찬은 사실 따지고 보면 굉장히 속물적인 인간이거든요. 뭐 엄청나요. 뭔가 좀 우아하고, 시골의 카센터 운영하고 맨날 친구들 와서 다방 레지 불러서 농담 따먹기 하고…… 어쨌든 종찬은 전형적인 속물이라고요. 그래서 이 여자한테도 사실은 자기 모든 걸 다 바쳐서 하진 않아요. 맘은 있지만 표현은 못하고 그러나 어떻게 해보려고 주변에 왔다 갔다 하는 인물. 그런데 어쨌든 그가 갖고 있는 천성, 그 천성이 관객들에게 뭔가 인간적이라고 할까? 받아들여졌다고 하는 건 어쨌든 좋은 거죠. 더욱 중요한 것은 단순화시킨다면 결국 삶의 고통이란 것은 누구한테나 피할 수 없는 거잖아요. 누구든 삶의 고통을 나하고는 무관하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요. 삶의 고통은 예고하고 오지는 않는다고요. 나도 결혼해 봤지만. 고통이 찾아올 때, 5분 전에도 몰라요. 결국 그게 삶이잖아요. 고통이 찾아왔을 때 어쨌든 살아야 하니까, 우선 사람들은 이 고통은 도대체 나에게 뭐지? 이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죠. 이 고통은 어떤 의미가 있지? 왜 나한테 이런 게 오지? 이 고통을 이기기 위한, 좀 거창하게 얘기하자면 구원은 어디에 있지? 희망은 어디에 있지? 질문을 하게 돼 있잖아요? 종교도 그중 하나의 해답은 되겠죠. 그런데 종교에서 해답을 찾든, 어디에서 해답을 찾든 그 해답은 단순하고 쉽지가 않다는 거죠. 그 해답은 정말로 힘겹게 살아질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그리고 그 해답은, 그 구원은 결국은 내가 서 있는 현실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 이 현실이 대부분의 현실이란 그 의미를 감추고 있어요. 대부분의 현실은 초라하고 무의미해 보이고, 속물적이고, 세속적이고 그런 거라고요. 그러니까 저는 종찬이 어떤 의미에서 그 현실에 인격화될 정도로 그 현실의 한 부분이죠. 신애는 종찬을 결코 제대로 보지를 않아요. 늘 뒤에 서 있는데, 돌아보면 종찬이 있을 텐데 한번도 결코 종찬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고요. 학교는 어디 나왔냐는 둥, 당신 왜 혼자 사냐는 둥, 연애는 한번 해봤냐는 둥, 당신 생각은 뭐냐는 둥 관심이 없어요. 늘 자기 뒤에 있는 걸로 알죠. 그리고 이 여자는 어디를 보냐 하면 뒤돌아서 종찬을 보는 게 아니고 멀리 봐요, 하늘을. 거기에 의미가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죠. 또는 그 의미가 배반당했다고 싸우는 거죠. 종찬은 어쨌든 이 여자가 앞으로 계속해서 살아가려면 함께 살아야 될 그 누구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종찬이니까, 순애보적인…….
유지나_ 그렇게 현실론으로 말씀하시니 전체적으로 일관되 보이네요. 그럼 일단 이미지 얘기를 해 보죠. 하늘 이미지 말입니다. 처음에 보여진 갇힌 하늘, 그러니까 차 속에서 유리를 통해서 본 하늘이 잡히고, 그 후에도 하늘 이미지는 여러 곳에 등장하죠. 신애가 두세 걸음 뒤에 서 있는 종찬을 보는 게 아니라, 정작 방향은 위쪽을 보는데, 약간 실성한 듯 하늘을 보고 원망인지, 칭얼대는 모습도 있어요. 이렇게 하늘은 주로 신애의 시점에서 보여지는데, 그 자체라기보다 신애와의 관계상 로직일 수도 있고, 의미를 초월하는 기독교의 하나님, 이런 의미도 잡히죠. 마지막 장면에서 혼자 머리를 자르죠. 거기서 카메라가 아래로 낮게 움직여서 한쪽 귀퉁이에, 평범한 집 시멘트 벽돌의 거친 흙을 보여줍니다. 거긴 쓰레기장처럼 남루한데 아름다운 자연도 아니고 그냥 현실 어디에나 있는 장면을 한참 동안 보여준다는 거죠. 이건 지금 말씀하신 것을 대변하는 이미지 체계대로 일관되게 의도하신 건가요?
이창동_ 네, 당연하죠. 처음에 하늘에서 시작해서 땅으로 끝나는데, 물론 마지막 장면의 땅은 머리카락을 따라가죠. 그 땅은 누추한 땅이죠. 누추한 땅이나 그런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고, 삶의 희망이나 구원을 찾는다 해도 거기서 찾을 수밖에 없고, 어쩌면 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신이건 절대자이건 누군가가 존재한다면 신의 의지도 숨은 뜻도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거죠.
유지나_ 근데 신이건 절대자가 존재한다면, 이에요? 감독님은 ‘존재한다면’이라는 생각을 평소 하신다는 거예요? 아니면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예요?
이창동_ 나는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 몰라요. 내가 모른다는 것보다는 내가 이 영화에서 내 태도는 내가 모르는 것은 말할 수 없다는 거예요. 내가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유지나_ 항상 그런 태도를 견지하신게 아니셨나요? <초록물고기>에서도 그렇게 보이는데요.
이창동_ 이건 좀 다른 문제예요. 이건 신에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관련된 문제이기도 해요. 영화라는 매체에 관련된 문제이기도 해요. 영화가 눈에 보이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드러내야 하느냐 하는, 나의 아까 이야기한 영화 매체의 태도에 대한 걸로 다시 환원이 돼요. 영화는 뭐든지 다 보여줄 수 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더욱 우리가 눈에 보이는 이면에 있는 것을 어떻게 보여 주느냐인데, 나의 <밀양>에서 방법론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여주겠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만 보여주겠다는 태도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부정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만 보여주되 관객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 느끼고 생각하기를 바라는 거죠. 그게 내가 영화 매체에 대한 태도이기도 하고 이 영화에서 신에 대한 내 태도이기도 해요.
유지나_ 다시 구체적으로 이미지 서술의 다른 부분을 이야기해 보죠. 마지막 장면에서 신애가 머리를 스스로 자르는데 종찬이 들어와 거울을 들어주지 않습니까? 그런데 거울은 화면 속의 작은 화면이죠. 제겐 그게 뭘 불러일으키냐 하면, <초록물고기>에서 가장 감동을 받은 명장명이라고 볼 만한 이미지로, 막동(한석규)이 엄마 화장대 거울을 보는 장면이죠. 거긴 나무가 담겨 있죠. 즉 프레임 속 프레임인 거울을 통해 자신의 핵심적 의도를 담은 이미지를 담아내는 것이죠.
이창동_ <초록물고기>에는 거울이 많이 나와요. 내가 지금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는데 한 열대여섯 군데 나와요. 나는 의도적으로 사용했거든요. <초록물고기>라는 영화는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 중에 중요한 주제라고 말할 수 있는 정체성 문제였어요. 공간이 변화면서 그 공간에 있는 인간의 정체성까지 앗아가버렸다는 거죠. 특히 젊은이의 경우에 이제 막 군대를 제대하고 사회에 들어선 젊은이는 누구나 정체성에 혼란을 겪어요. 군대 제대하고 나면 내가 뭐해야 하는지 막막해진다고요. 근데 특히 한국의 젊은이가 한국사회가 변화되는 과정, 자기가 살았던 전통적인 농촌이 갑자기 신도시가 되었다든가 하는 이런 식의 변화를 겪잖아요. 그럴 때 우리의 젊은이의 정체성은 어디에 갔냐는 거죠. 어디에서 찾아야 되냐는 거죠. <초록물고기>에서 하고 내가 싶었던 얘기가 그것인데, 이 친구는 자기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막동이도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어요. 근데 어디서 찾느냐 하면 자기가 허위로 뭘 만들어서 찾는다 말예요. 가족이 해체되고 상실됐다는 그 상실감에서 가짜 가족을 찾는 거예요. 잘못 찾아가면 자신의 그 정체성의 근원을 스스로 만들어가지고 잘못 찾아가는 거예요. 그게 가짜 가족으로 설정돼 있는 조폭 세계란 거요. 한국사회가 조폭만 가족을 빙자하는 게 아니고 거의 모든 기업도 ‘대우가족’이니 뭐니 하잖아요. 그 가족들이 언필칭 가족을 내세우지만 사실은 그걸 유지하고 지탱하는 것은 어떻게 말하면 폭력성의 논리인 거죠. 필요하면 어떤 수단을 써도 된다는 논리가 가족으로 위장돼 있어요. 어쨌든 이것이 한국의 젊은이들의 정체성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 거죠. 그러니까 당연히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영화니까 거울이 필요했어요. 거울은 자기를 드러내는 거니까. 그런데 우리가 거울을 봐가지고는 모른다고요. 나는 거울을 보면서 나를 바라보지만 사실은 내면까지 보이는 것은 아니잖아요. <초록물고기>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의미 있는 순간에 항상 거울이 나와요. 의도적으로. 그래서 열 몇 번이나 되죠. 많죠. 그건 정체성 문제니까 어쩔 수 없으니까 그랬고, <밀양> 경우에는 그보다는 거울의 의미화는 그 정도로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내가 거기서의 거울을 둔 것은 굉장히 단순한 이유였어요. 단순하면서도 사실은 본질적인 거죠. 어쨌든 신애가 병원에서 나와서 다시 남은 생을 현실에서 살아야 되는데, 자기 혼자 살 수밖에 없잖아요. 혼자밖에 안 남았으니까요. 이 여자는 스스로 누구의 도움도 없이 살겠다고 생각해요. 고집스럽게. 심지어 머리도 스스로 자르겠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내가 거기서 혼자 했던 아주 소박한 내 생각은 이런 거예요. 결국 혼자서 살아야 한다. 혼자 머리를 자른다는 것은 불편한 거잖아요. 그래도 적어도 누군가 거울을 들어주는 정도의 도움은 서로 주고받아야 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정도의 소박함, 나의 생각이랄까? 이런 것을 넣은 거죠. 그게 사는 거라고 생각해요.
유지나_ 그런데 종찬, 즉 송강호 캐릭터가 무겁고 심각하고 얼룩진 부분을 코믹스럽게 풀어줘서 영화보기에 재미와 편안함을 주기도 하죠.
이창동_ 그게 나한테 굉장히 중요했죠. 송강호의 대사 중에 “나야 뭐, 쿨하게 안 삽니까?” 이러면 형사가 “마이 해라 쿨 서른아홉에 혼자 사는 새끼가…….” 이렇게 말하는 게 있어요. 조롱하는 거죠? 어쨌든 그 가벼움이 영화 속에 균형을 잡아야 되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필요했죠.
유지나_ 이제 신애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해보죠. 신애가 ‘ ~하기 때문에 ~ 하다’라는 완벽한 로직을 가진 여자란 게 감독님의 설정이라면, 또 다른 측면인 젠더적인 관점에서 보면 변화가 보여요. 감독님이 말한 로직이 가부장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것까지 포함해서 가부장적인 것으로부터 탈피, 결국 혼자되기를 수용한다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해요. 저는 신애한테 동화되기도 힘들고, 실제로 연민을 느끼지도 않았어요. 이를테면 회식하는 자리에서나 동생과의 대화에서 정보가 주어집니다. 남편이 죽었는데 남편의 고향에 내려가서 아들을 키운다는 것은 과잉이라고. 실은 남편은 바람난 남편이고, 그게 신애에게는 상처일 텐데, 사랑받는 아내라는 환상을 스스로 만들어내 남편이 죽은 후 남편의 고향에 가서 아들 잘 키울 명분을 스스로 만들어낸 거란 것이죠. 이게 신애의 로직인데, 누가 열녀문을 세워주지도 않는 시대에 현모열처라는 것을 자신의 로직으로 삼는 거죠. 거기서 보란듯이 씩씩하고 명랑하게 살면서, 이웃 상가의 인테리어를 바꾸라, 잔소리까지 하죠. 신애는 서울물 먹은 세련된 여자로 우아하게 피아노 강사하면서 아들에게도 세련되고 좋은 엄마노릇을 하죠. 이런 작태가 저는 과잉으로 보이고, 그 과잉성은 가부장제의 로직이 담보하느다는 것입니다. 그런 과잉이 아까 말한 고통, 5분 전에도 모르는 고통의 근원이 되니까요. 과잉이 결핍으로 폭로되니 미치게 되고, 신을 만났다고 생각하고 기독교 광신으로 갔다가 깨지잖아요. 그래다가 종국에는 나중에 혼자 머리를 자르는 것은 (바람피운 남편을 지우고) 현모열녀하던 여자가 어떻게 거듭나는가, 의 과정으로 보이죠. 그런 진전은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이창동_ 저는 가부장제의 카테고리에 딱 갇히는 것에는 동의하기는 힘들지만 그런 요소도 있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이 여자는 스스로 자기가 배반당했고, 불행해졌고, 자기의 지난 사랑이 의미가 없어졌고 이런 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남들의 눈에 의해서 비치는 자기의 모습을 새로 만드는 거잖아요. 영화 전면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이 여자는 자기 동행한테 얘기하죠? “결혼만 하지 않았으면 피아노를 계속 쳤을 거다” 우리가 흔히 생각할 때 모모한 대학의 음대? 밀양의 피아노 선생과는 질적으로 다른 교육을 받았고, 전문가가 될 수 있었던 여자잖아요. 그런 여자가 일찍 결혼을 해서(보통 피아노를 그 정도 치려면 아주 어릴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들으면서 쳐야 된다고요.) 결국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남편과의 사랑 때문에 자기의 꿈, 자기의 인생의 길까지도 포기한 듯한 그것도 일종의 오버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죠. 그러나 그것도 외면적으로 그러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보통 우리가 피아노나 하는 애들 보면 부모의 압력이 있거든요.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는지도, 자유롭고 싶었는지도 모르죠. 거기에 따르는 어떤 대리물로서 사랑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는데 어쨌든 그 사랑이 배반당하고 나니까 자기가 희생한 것에 대해서 보상 받을 길이 없잖아요. 더구나 상대는 죽었기 때문에. 미워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미워할 대상이 죽어버렸기 때문에요. 어쨌든 망가진 자기, 자신에 대해 의미화시키는 것, 그 의미화가 끊임없이 의미화를 하려고 하는데 그게 그 여자의 삶의 동력일지도 모르는데, 그게 차츰차츰 그것으로부터도 배반당하는 거죠. 그 의미화가 자기를 진정으로 자기한테 의미를 주는 것은 아니라는 걸 배우게 되는 거죠? 근데 그 중에서도 이 여자가 한마디로 꼭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을 설명해줄 수 있는 로직을 찾는 것은 틀림이 없다. 그 로직을 찾는 것은 틀림이 없는데 그런 유형의 여자임은 틀림이 없는데, 어쩌면 그 로직이 쉽게 찾으려고 하는 그 로직이 이 여자의 지나친 자의식, 지나친 이기심, 지나친 욕망이 만들어 낸 것인지도 몰라요. 종교 자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 중에는 상당 부분 초기에는 가부장적인 것과 결합돼 있을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이 여자가 찾는 의미라는 것은 남들의 시선인데, 그 남들의 시선이라는 것이 결국 가부장적인 것의 시선일 수밖에 없거든요. 우리 사회가 그러니까. 이 여자는 어쩌면 저는 그 부분의 카센타에서 거의 발작처럼 종찬에게 화를 한번 내고, 뛰쳐나오잖아요. 길거리 걸어갈 때 무슨 중얼중얼하는 게 있는데 한국 관객들은 그게 정확하게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안 들릴 거예요. 의도하지 않았지만 외국에서는 자막이 들어가니까 어차피 의미가 좀 더 전달이 돼버리는데, 자막 처리를 안 할 수도 없고……. 한국 관객들에게는 의도적으로 잘 안 들리게 했어요. 전도연 씨한테도 정확하게 들리지 않게 해달라고 주문을 했었고. 거기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누구한테 중얼거리면서 화를 내는데 “12살 때부터 숟가락으로 머리 때리면서 혼내지 않았느냐? 분홍색 타이즈……” 그 분홍색 타이즈와 무슨 연관이 돼 있는지는 잘 모르게 돼 있어요. 그런 툭툭 끊어지는 말들이 있어요. “자기는 거실에서 담배 피우면서” 그게 어린애처럼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버지한테 하는 말이죠. 왜 숟가락으로 머리 맞으면서 뭔가 과거에 대단한 싸움은 아닐지 모르지만, 분홍색 타이즈 때문에 아버지한테 혼났는지도 모르죠? 그래서 욕실에 갇혀서 벌 받았다는 내용의 얘기를 해요.
유지나_ 와! 그런 대사였어요? 그렇다면 상징성이 큰 건데…….
이창동_ 그 다음에 또 어떤 말을 하는가 하면, “내가 버클리 음대에 간다고 했는데 너 왜 못 가게 했느냐?” 그러면서 “색골” 이런 얘기를 해요. 이건 남편한테 하는 거죠. 뭐 “색골, 좆 같은 놈……” 이런 식으로 이야기해요. 남자들이란 남편들이란 다 색골인 것처럼 이렇게 얘기를 하죠. 그 다음엔 하늘을 쳐다보면서 “난 너한테 안 져, 절대 안 져” 이것은 신한테 하는 거지요. 나는 의도적으로 관객한테 전달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러나 영화를 만드는 우리끼리의 내적동기로서는 이 여자는 아버지나 남편이나 신이나 구별이 잘 안 되는 거죠. 미쳤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무의식 속에…….
유지나_ 근데 가부장적인 윤리에 자아환상에 중독된 여자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살죠. 전 어떤 면에선 보수적인 기독교 일파에서 섬기는 하나님은 가부장적인 맏형 보스처럽 포장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이창동_ 원래 로직이라는 게 남성적인 거죠. 왜냐하면 로직을 만들어놓은 것은 어쨌든 이 세상의 가치세계인데, 가치세계를 굳이 젠더로 따진다면 남성적인 것이거든요. 어쨌든 이 여자에게는 무의식 속에 남편과 아버지와 신이 구별이 잘 안 되는 거예요. 이 여자가 신과 싸우려고 하잖아요. 신과 싸우려고 하는 것은 결국 자기가 찾던 로직과 싸우려고 하는 건데, 싸운다는 것을 일단 전제로 하는 거죠?
유지나_ 그래서 저는 그 대목이 좋다는 거죠. 그걸 가르치려는 것, 그런 태도를 보여주는 여성이 처음으로 감독님 작품 세계에 출몰했다는 것이죠.
이창동_ 최초까지야……. 현실 속에 살고 있는 인간들이 신애 같은 여자만 있는 것은 아니에요. 저는 문제가 되는 것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현실성 없이 의도적으로 어떤 관습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문제가 되는 거지, 현실에 있는 인물을 있는 그대로 우리가 흔히 보는 인물을 드러내는 게, 그게 그 감독의 페미니즘에 대한 것이든 무엇에 관한 것이든 그 세계관을 도덕적으로 심판하는 근거는 될 수 없다고 봐요.
유지나_ 도덕적으로 심판한 것은 아니고요, 그 문제에 관한 한 이젠에 비해 진전이 보인다는 것이죠. 감독님은 칭찬을 해 주면 안 받으려고 하는 겸손함이 있으시네요.
이창동_ 칭찬? (웃음) 들으면 돌아서서 웃을지 모르지만 불편하죠?
유지나_ 이제 음악 얘긴를 해 보죠. 감독님 자신의 음악 취향이 어느 정도 반영되었지만, <박하사탕>에서 강변에서 한바탕 망가지면서 노래하는 것이 드라마 설정상 펀하고 의미심장해요. 도입부 장면 아닙니까? 카니발적인 한국 사람들의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해요. 저는 그 부분이 매우 재미있었거든요. 그리고 <밀양>에서는 야외 부흥회에서 ‘거짓말’을 틀지 않습니까? 근엄하고 위선적인 것을 깨는 이런 카니발식 역전은 흥미로운 부분이고. 영화 보기나 드라마 흐름에서도 구심점이 되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디딤돌 역할도 하고요. 마지막을 정리해 주는 음악도 대중음악 중에서 트로트 같은데, 어떤 의미인가요?
이창동_ 아, 그 음악은 사실 아르헨티나 작곡가 건데, 잘 알려진 사람은 아니에요. 우연히 그 친구의 시디에서 그 곡을 듣고 마음에 들어 썼어요. 영화에서 그 친구의 음악이 두 번 나오거든요. 작곡을 했죠. 그 곡에서 흥미가 있다고 느낀 게 뭐냐면, 리듬으로 말하면 뽕짝, 트로트. 우리 한국 대중가요가 뽕짝인데 뽕짝이 아주 두드러지게 느껴지는 것도 있고, 잘 안 느껴지는 것도 있거든요. 박자로 보면 뽕짝이나 그렇게 두드러지게 안 느껴지는 것도 많아요. 그러나 이 음악은 그야말로 뽕짝, 뽕짝, 뽕짜짝, 뽕짝~ 그렇게 들립니다. 그 점이 흥미로웠어요. 그 친구 태생이 남미 보컬이기 때문에 한국 대중음악이 뽕짝으로 돼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작곡했대요. 내가 그 음악을 왜 선택했냐면 아까 얘기한 현실의 세속적인 느낌, 종찬으로 대면할 수 있는 세속적인 현실을 보여주기 위한 건데……. 음악이 세련되고 고상한 음악으로 볼 수 없잖아요. 그러나 그 속에 뭔가 있긴 있죠. 삶의 애환이랄까? 우리에게 낯익은 애환 같은 게 있기 때문에 이 음악이 맞는다고 생각했지요. 송강호나 전도연 씨에게는 그 얘기를 했죠. 이건 종찬의 곡이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영화에 음악을 잘 안 쓰는 편입니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이 늘 있다고 생각되는 게 영화 속에 음악이 있거든요.
유지나_ 바로 그 부분이죠. 배경음악을 쓴다기보다 음악을 극중 액센트나 캐릭터적인 느낌, 역할로서 쓴다는 것이죠.
이창동_ 영화에 담긴 현실 속에서 음악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또 음악이 굳이 안 나온다 하더라도 영화에 담기는 현실 자체가 음악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영화 바깥에서 음악을 집어넣는 것은 그게 영화 매체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반칙 같은 느낌이 들어요. 현실과의 관련을 생각하면 현실을 정직하게 반영하느냐 안 하느냐, 요 관점으로 보면, 왜냐하면 음악이 들어가는 순간 음악은 그 관객들을 인위적으로 감정을 이입을 시키게 되거든요. 그래서 가능하면, 될 수 있으면 음악을 안 쓸려고 하죠. 그래서 <오아시스>도 전혀 없고요. 뒷부분에 엔딩 크레딧으로 올라갈 때 보면 처음 나오고, <박하사탕>도 세트 바뀔 때 음악이 나오고, 아주 한두 번만 나옵니다.
유지나_ <박하사탕>의 강변에서의 노래잔치도 그걸 배경으로 쓰지 않고 현실 안에 쓴다는 거죠?
이창동_ 한국 사람들이 음악을 많이 접하잖아요. 노래방도 자주 가고, 옛날에는 술집에서 술 마시면서 취하면 노래 불렀죠. <박하사탕>은 20년 동안 우리 음악의 변천사라고 해도 돼요. 그 시절에 유행하던 음악들, 변화된 것을 쭉 볼 수 있죠. <박하사탕>에 〈나 어떡해〉가 앞에도 나오고 뒤에도 나오는데, 그 영화 시작할 무렵, 20년 후에 야유회 때 〈나 어떡해〉를 부르는 것은 이 친구가 과거에 20년 전에 불렀던 〈나 어떡해〉를 의도적으로 부르는 것이에요. 〈나 어떡해〉가 1980년대 초에 나왔을 때 굉장히 단순한 가사였는데 그전까지는 그런 종류의 가사를 볼 수가 없었죠. 말로 하는…….
유지나_ 그 전에는 문어체 가사가 주류었죠?
이창동_ <나 어떡해>는 김창완의 노랜데 단순함 속에 그 시대의 변화와 기미가 있었죠. 영화 속으로, 영화 얘기로 돌아간다 해도 ‘나 어떡해 너 갑자기 떠나가면 나 어떡해.’ 하는 건데 우리 모두 갑자기 떠나가는 그런 경우가 많아요.
유지나_ 다 갑자기 떠나가지 않나요? 서서히 떠나는 경우도 있나요?
이창동_ 제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삶에서 인생에서. 인생을 산다는 게 갈림길에서 선택을 하는 건데, 종종 자기가 하는 수많은 선택들이 원래의 자기가 원하던 것 그것에서부터 자꾸 떠나는 거예요. 그것이 인생인 것 같아요.
유지나_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왜 원래의 자기로부터 떠난다고 생각하세요?
이창동_ 그런 느낌을 그때는 모르죠. 그 순간에는. 불과 한 걸음 정도 벗어날 뿐이니까. 근데 많은 시간이 지나서(동기들을 만나다 보면) ‘거울’을 바라볼 때 늙었다고 느끼잖아요. 과거 20년 전 젊을 때 그때를 생각하잖아요. 너무 먼 길을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죠. 벗어나면 얼마나 벗어났겠냐마는 다르게 살았으면 얼마나 다르게 살았겠냐마는 그래도 많이 벗어난 느낌이 들죠. 그 많이 벗어난 그런 느낌, 그게 영화의 그 단순한 노랫말 속에 암시된 것처럼 느꼈어요. 같이 노래 부르다가 영호가 중간에 일어나서 저쪽으로 간다고. 자기는 그냥 가는 거지만 다른 이유로 동기로 그냥 가는 거지만, 그게 보면 아주 멀리 가는 첫걸음이이에요. 갑자기 떠나가는 거예요.
유지나_ 감독님 생각에 동의하지만, 저는 살수록 자기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에 시스템 때문에 망가지는 것이라고 봐요.
이창동_ 그것은 오히려 단순논법이라고 보고요. 삶은 자기로부터 멀어졌다고 말할 수도 있고, 또 다른 관점으로는 결국은 돌아오는 거다, 말할 수도 있어요. 근데 지금 나는 멀어진 것에 대해 얘기하는 거죠. 멀어지는 거예요. 돌아갈 수가 없어요.
유지나_ 영화에서 보면 돌아갈 수가 없지만, 돌아갈 수 없다는 것도 알아가는 거 아닌가요? 마지막으로 즐거운 얘기 하나 해주세요. 아님 오늘의 유머라도 한 말씀 해 주세요.
이창동_ 아, 이게 다 농담 아닌가요? 허허허…….
그렇다, 이게 바로 이창동 감독의 모습이고 내공이다. 자신의 영화에 대해, 관객과의 소통 욕망에 대해, 영화 매체의 이중적 속성으로 인한 고뇌에 대하여 진정성을 담보한 낮은 목소리로 진지하고 깊게 이야기를 나눈 후, 그걸 다 농담이라고 날려버리는 태도 말이다. 유연함과 깐깐함의 공존. 뿌리까지 내려가는 성찰과 사유로 다져진 깊이와 허허실실의 공존이다. 그리하여 세상이, 영화세상이 가볍고 쿨하고 재미나게 돌아가며 숫자로 환원되는 영화담론판에서 여전히 불편하게 현실과 접속하는 영화작가로 살아남기. 그런 이창동 감독이 삶과 세상을 접속시키기 위해 자신의 화두를 스크린에 투영하며 우리와 소통하려는 열정을 늘 간직하기를 청아한 하늘을 바라보며 비밀스럽지 않은 햇볕을 쬐며 열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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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쿨투라>계간지 사장님 부탁으로 진행한 인터뷰랍니다. 08년 봄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