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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천왕봉나들이 원문보기 글쓴이: 나들이
우리 삭녕최씨는 시조이신 최천로(崔天老)공께서는 고려조에서 문화시랑평장사를 지내시고 중시조이신 최유가(崔瑜價)공께서는 고려중기 명종때에 역시 문화시랑평장사와 국자감대사성, 추밀원부사를 역임하셨으나, 중간에 세계(世系)가 부전(不傳)하여 소목을 알 수없으므로 낭장공(諱 善甫)을 1世祖로 하는 낭장공파와 부사공(諱 ?)을 또 1세조로 하는 부사공파로 갈리어 전국에 퍼져 살면서 크게 번성하여 왔다.
낭장공파의 2세조는 서승공(諱 忠)이요, 3세조는 전서공(諱 潤文)이시고 4세조는 부사공(諱 士昻), 선절공(諱 士弘), 사예공(諱 士柔), 연기공(諱 士廉), 희천공(諱 士溫)등 5형제분인데 첫째이신 부사공과 둘째이신 선절공께서는 무후(無后)하시고 셋째분은 사예공이시며 넷째이신 연기공은 연기공파를, 다섯째이신 희천공은 희천공파를 각각 이루시었다.
셋째 아드님이신 사예공께서는 5세조 부정공(諱 崇), 참판공(諱 衡), 주부공(諱 華), 문정공(諱 恒)등 4형제의 아드님을 두시었는데. 첫째이신 부정공께서는 아드님대에서 무후하시고 둘째이신 참판공께서는 참판공파를, 셋째이신 주부공께서는 주부공파를 각각 이루시었고, 넷째이신 문정공께서는 6세조 석포공(諱 永潾)과 찬성공(諱 永灝) 형제분을 두시었는데 첫째이신 석포공께서는 문정공종파요, 둘째이신 찬성공께서는 찬성공파를 이루시었다.
문정공의 맏아드님이신 석포공께서는 7세조 사직공(諱 秀英), 통례공(諱 秀雄) 사정공(諱 秀傑)등 3형제의 아드님을 두시었는데 각각 사직공파, 통례공파, 사정공파를 이루시어 분파(分派)함으로써 낭자공파는 크게 참판공파, 주부공파, 사직공파, 통례공파, 사정공파, 찬성공파, 연기공파, 희천공파의 8파로 갈리게 되었다.
부사공파는 2세조가 규정공(諱 時玉)이요, 3세조는 서령공(諱 守明)이시고 4세조는 사간공(諱 卜麟)이시며, 5세조는 지평공(諱 道源)이신데, 지평공께서 처음으로 4형제의 아드님을 두시어 4파로 갈리게 되었으니 첫째 분은 교도공파(諱 景溥)요, 둘째 분은 사정공파(諱 景淵)요, 셋째분도 사정공파(諱 景泉)이며, 넷째 분은 현감공파(諱 景時)인바. 교도공파를 진위파, 춘천파, 순천파라 부르고 사정공파를 사천파, 셋째파인 사정공파를 진주파, 현감공파를 만경파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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朔寧崔氏(삭녕최씨)
◆ 由來
시조(始祖);崔天老(최천로)
관직(평장사(平章事)
--일세조:선보(善補)
관직:낭장(郎將)
--일세조:연
관직:부사
始祖(시조)崔天老(최천로)는 高麗(고려)때 平章事(평장사)를 지냈다.그의 아들 崔兪嘉(최유가)가
高麗(고려)明宗(명종)때 門下侍郞平章事(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내고 朔寧(삭령)에서 代代(대대)로
살았으므로 本貫(본관)을 朔寧(삭녕)으로 하였다. 朔寧崔氏(삭녕최씨)는 主(주)로 慶南地方(경남지방)에
많이 살고 있는데,特(특)히 泗川郡(사천군)泗川面(사천면),正東面(정동면), 泗南面(사남면)一帶(일대)에
特色(특색) 있는 同族部落(동족부락)을 이루고 있다.
◆ 人物
- 崔恒(최항) : 集賢殿(집현전)副修撰(부수찬)으로 訓民正音(훈민정음) 創製(창제)에 參與(참여)하였고
領議政(영의정)을 두 차례나 歷任(역임)하였다.
- 崔興源(최흥원) : 崔恒(최항)의 曾孫(증손)으로 宣祖(선조)때 柳成龍(유성룡)의 뒤를 이어 領議政(영의정)을
歷任(역임)하였다.
- 崔漢綺(최한기) : 崔恒(최항)의 15世孫(15세손)이며 朝鮮(조선) 實學(실학)의
거두로 英祖(영조), 正祖(정조)때에 融盛(융성)했던 實學(실학)이 學文(학문)으로서 理論的(이론적),思想的(사상적)으로
未熟(미숙)하던 것을 徹底(철저)한 經驗主義(경험주의)哲學(철학)을 바탕으로 務實思想(무실사상)을 展開(전개)하여
實學(실학)의 體系(체계)를 確立(확립)한 學者(학자)이다.歷史學者(역사학자)들이 그를 가리켜'實學思想(실학사상)과
開化思想(개화사상)의 架橋者(가교자)'라 評(평)할 만큼 그는 韓國(한국) 思想史(사상사)에 重要(중요)한 業積(업적)을 남겼다.
◆ 科擧及第者(朝鮮時代)
崔恒(최항) (1409 己丑生) : 文科世宗16年(1434) 謁聖試 乙科 壯元及第
崔永灝(최영호) (1409 己丑生) : 文科 成宗8年(1477) 春塘臺試 丙科
崔東立(최동립) (1557 丁巳生) : 文科 宣祖25年(1592) 別試 丙科
崔啓翁(최계옹) (1654 甲午生) : 文科 肅宗7年(1681) 式年試 丙科
崔顯重(최현중) (1745 乙丑生) : 文科 英祖51年(1775) 別試2 丙科
崔炳哲(최병철) (1862 壬戌生) : 文科 高宗29年(1892) 謁聖試 丙科
崔柄大(최병대) (1820 庚辰生) : 文科 哲宗13年(1862) 庭試 丙科
崔繼勳(최계훈) (1820 庚辰生) : 文科 明宗8年(1553) 別試 丙科
崔豪(최호) (1820 庚辰生) : 文科 光海君13年(1621) 別試 丙科
崔暄(최훤) (1732 壬子生) : 文科 英祖49年(1773) 增廣試 丙科
等 모두 122名의 科擧 及第者가 있다.
(文科 33名, 武科 11名, 司馬試 73名, 譯科 3名, 醫科 1名, 陰陽科 1名)
◆ 行列字(항렬자)
19世우(遇): 20世구(九): 21世병(炳) : 22世우(宇): 23世성(成) :24世범(範):
25世(鉉): 26世수(洙): 27世항): 28世 (燮):29世(載) :30세손;승(丞)
31세손;운(雲) 32세손;춘(春) 33세손;헌(憲) 34세오;(梧) 35세손;경(京)
36세손;순(純) 37세손;용(容) 38세손;원(元) 39세손;탁(卓)
※ 世와 代는 다른 것으로 世에서 1을 뺀 값이 代가 된다. (예: 20世孫은 19代孫)
◆ 本貫 沿革
本貫所在地 : 京畿道 漣川
朔寧(삭녕)은 京畿道(경기도) 漣川郡(연천군)과 江原道(강원도) 鐵原郡(철원군) 一部地域
(일부지역)에 位置(위)했던 地名(짐명)이다.高句麗(고구려)때에 所邑豆縣(소읍두현)이라
불리우다가 757年(新羅景德王16)에 朔邑(삭읍)으로 改稱(개칭)되어 兎山郡(토산군)의 領縣(영현)
이 되었다. 940年(高麗 太祖23)에 朔寧(삭녕)으로 이름을 바꾸고, 1018年(顯宗9)에는 東州
(동주:鐵原)에 倂合(병합)되었다가 1107年(睿宗2)에 僧嶺縣(승령현)으로 移屬(이속)되었다. 1413年
(太宗14)에 知郡事(지군사)로 昇格(승격)하여 僧嶺縣(승령현)을 倂合(병합)하였고,1414年에 安峽縣
(안협현)을 合(합)쳐서 安朔郡(안삭군)이 되었다.1416年에는 安峽縣(안협현)을 分離(분리)하여復活
(부활)시키고 朔寧郡(삭령군)으로 改編(개편)되었다.1895年(高宗32)에 地方制度 改正(지방제도 개정)
으로 開城府(개성부) 朔寧郡(삭녕군),1896年에 京畿道(경기도) 朔寧(삭녕군)이되었다.1914年 郡
面廢合(군면폐합)으로 朔寧郡(삭녕군)이 廢止(폐지)되어 內文面(내문면),寅目面(인목면),馬場面
(마장면)은 江原道(강원도)鐵原郡(철원군)에 屬(속)하였고, 나머지는 漣川郡(연천군)에 倂合(병합)되었다.
◆또다른 유래자료
경기도의 삭녕은 경기도 연천군과 철원군의 일부 지역을 차지했던 옜지명을 말하며
고구려의 소읍두현인데 통일신라의 경덕왕이 삭읍으로 개칭을 하였고 현종 9년(1018)
에 동주(지금의 철원)에 속했으며 예종 1년((1106)에는 승령현 감무를 겸하여 삭녕으로 개칭하였다
조선 태종때 지군사로 승격하였고 태종14년(1414)에 안협현을 통합하여 안삭군이 되었다 그후에
여러 변천을 거쳐 고종32년 에 군으로 승격하여 삭녕군이 되었다
그후 1914년 군이 폐지되고 내문면 인목면 마장면은 강원도 철원군에 속하고 나머지는
경기도 연천군에 속하게 되어 오늘에 이른다
창씨 연유
삭녕최씨의 시조 최천노는 선계의 문헌이 실전되어 상고 할수는 없으나 그는
고려때 평장사를 지냈고 그의 아들 유가도 평장사를 역임하였으나 그 후의 계대가
실전되어 어모 장군으로 낭장을 지낸 선보와 경전부사를 역임했던 최연을 각각 일세조로 하고
본관을 삭녕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여 내려오고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선보의 아들 충이 병조판서에 추중되었고 그의아들
윤문은 우찬성을 지냈고 윤문의 셌째아들 사유는 태조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 기사관을 거쳐 성균관
사예가되고 노인직으로 지승 문원사에 올랐다시유의 아들 항은 세종때 집현전 부수찬이 되었다
그는 정인지 박팽년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고 집현전 교리로 오레를 찬진했고
세조 1년에 대사헌으로 좌익공신이등에 책록되었으며 형조, 공조 판서를 거쳐 중추원사에이어 대사성을
역임하고 이조 판서를 역임한뒤 1461년 왕명으로 경국대전 편찬에
착수함으로 조선초기의 법제도를 집대성하였다
그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우의정및 좌의정을 거쳐 두번이나 영의정을 지냈다
항의 아들 영린은 예조 참의를 지냈고 영호는 좌찬성을 지내 가문을 더욱 중흥시킨 인물들이다
항의 손자인 흥원은 동래부사를 거쳐 중추부사를 역임하고 1592년임진왜란때에는
도순찰사가되고 우의정 좌의정을거쳐 영의정에 올라 세자를 강계로 배종한뒤 의주에 가서 왕을 배종하였다
이듬해에 병으로 사직을 하고 영돈령 부사에 전입되어 영평 부원군에 봉해졌다
항의 6세손인 최상중은 선조 22년에(1589)중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검열을 거쳐 임진왜란당시에는 권율의
종사관으로 공을 세우고 지평 교리등을 역임하고 사간을 마지막으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그후 남원 노봉서원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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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다른 내용들 ◆
삭녕최씨 시조 고려 최천로 평장사=>최항,최한기등 대학자 배출 성씨 시조始祖 안내
삭녕(朔寧)
삭녕(朔寧)은 경기도 연천군(漣川郡)과 강원도 철원군(鐵原郡) 일부지역을 차지했던 지명으로, 원래 고구려
소읍두현(所邑豆縣)인데 통일신라 경덕왕이 삭읍(朔邑)으로 고쳤고, 1018년(현종 9)에는 동주(東州:鐵原)에
속했으며, 1106년(예종 1)에 승령현(僧嶺縣) 감무(監務)를 겸하여 삭령으로 고쳤다.
조선 태종 때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였고, 1414년(태종 14)에 안협현(安峽縣)을 합쳐서 다시 안삭군(安朔郡)
이 되었다. 1416년 안협현을 다시 설치하여 삭령현이 되고, 1895년(고종 32)에 군으로 승격하여 삭령군
(朔寧郡)이 되었다. 1914년 일제에 의해 군이 폐지되어 내문면(內文面), 인목면(寅目面), 마장면(馬場面)은
강원도 철원군(鐵原郡)에 속하고, 나머지는 연천군(漣川郡)에 병합되었다.
삭녕 최씨(朔寧崔氏)는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최천로(崔天老)를 시조(始祖)로 하고, 어모장군(禦侮將軍)
으로 낭장(郎將)을 지낸 최선보(崔善甫)와 경전 부사(慶殿副使)를 역임했던 최연(崔 )을 각각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을 이어왔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낭장(郎將) 선보(善甫)의 아들 충(忠)이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충의
아들 윤문(潤文)은 우찬성(右贊成)을 역임하였으며, 윤문의 셋째 아들 사유(士柔)가 태종(太宗) 때 식년문과
(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춘추관 기사관(春秋?記事官)을 역임한 후 장흥고사(長興庫使)를 거쳐 노인직(老人職)으로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에 올랐다. 그의 아들 항(恒)은 삭녕 최씨 가문을 명문의 반석(盤石)위에 올려 놓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조선 초기 훈구파(勳舊派)의 대학자로서 세조(世祖)를
도와 문물제도(文物制度) 정비에 큰 역할을 했다.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撰)으로 정인지(鄭麟趾), 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참여했으며, 집현전 교리(校理)로 오례(五禮)를 찬진했고, 집현전 응교(應敎)
로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창제에 참여, 이어 [동국정운(東國正韻)], [훈민정음해례(訓 民正音解例)], [용비어천
가보수(龍飛御天歌補修)] 등을 찬진했다. 역사(歷史), 언어(言語), 문장(文章)에 능통하여 당대의 팔문장(八文章)의
한 사람으로 명나라에 보내는 표전문(表箋文)은 거의 그가 담당하여 썼다. 또한 항(恒)은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와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공을 세워 정난일등공신(靖難一等功臣)으로 책록되어 도승지(都承旨)에 올랐고, 형조(刑曹),
공조판서(工曹判書), 예문관 대제학, 이조 판서(吏曹判書) 등을 역임했으며, 우의정(右議政)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두
차례나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근면 성실하고 겸손을 바탕으로 한 그의 성품으로 40년 동안 벼슬길에 있으면서 한
번도 탄핵을 받거나 외직(外職)으로 물러난 적이 없었으며, 저서로는 [태허정집(太虛亭集)], [관음현상기(觀音現相記)]
를 남겼다.
광해군(光海君) 때 어우당(於于堂) 류몽인(柳夢寅)이 지은 [어우야담(於于野談)]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항(恒)이 알성 문과(謁聖文科)에 장원급제 할 무렵 세종(世宗)이 꿈을 꾸었다. 꿈 속에 한 마리의 큰 용(龍)이 성균관
서편 잣나무에 서리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깨어나 사람을 시켜 가보게 했더니 한 선비가 그 잣나무 아래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이윽고 과거(科擧)를 보고 장원급제한 사람을 찾아보니 다름아닌 바로 그 선비였으며 훗날 명신
(名臣)이며 대학자(大學者)가 된 태허정(太虛亭) 최 항(崔 恒)이었다. 그로부터 그 잣나무를 장원백(壯元柏)이라 이름
하였다고 한다. 조선조에 예조참의(禮曹參議)를 지낸 영린(永潾)과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영호(永灝)는 항(恒)의
아들로 가문을 더욱더 빛냈다. 항(恒)의 증손이자 전첨을 지낸 수진(秀珍)의 아들인 흥원(興原)은 1555년(명종 10)
진사가 되어 1568년(선조 원년)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장령(掌令), 정언(正言), 집의(執義), 사간(司諫), 동래부사
(東萊府使)를 역임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순찰사(都巡察使)가 되었고, 이어 우의정(右議政), 좌의정(左議政)에 승진
하여 영의정(領議政)에 기용되었다.
영평부원군(寧平府院君)에 봉해졌고 죽은 뒤 호성공신(扈聖功臣) 2 등에 추록되었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낸 영(穎)의 아들 상중(尙重)은 1576년(선조 9) 사마시(司馬試)를 서쳐 1589년(선조 22) 증광문
과(增廣文科)에 급제, 검열(檢閱)이 되고 1600년(선조 33) 헌납, 지평(持平)을 거쳐 1602년(선조 35) 사간(司諫)을
지냈으며 도승지(都承旨)에 추증(追贈)되고 대사헌(大司憲)에 가증(加贈)되었다.
변( )의 아들 동립(東立)은 1585년(선조 18) 진사가 되어 임진왜란 때 능참봉(陵參奉)으로 임금을 의주(義州)로 호종
하고 후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1595년(선조 28) 봉교(奉敎)를 거쳐 1597년(선조 30)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지냈으며,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1599년(선조 32) 병조 정랑(兵曹正郞)에 올랐다. 뒤에 황해도 관찰
사(黃海道觀察使)고 부임하여 이도(吏道)를 바로 잡았다. 그의 동생 동식(東式)은 당대의 문관(文官)이며 의병장인
우성전(禹性傳)의 문인(文人)으로, 1594년(선조 27)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안변부사(安邊府使)로 나가 관개(灌漑) 사업을
크게 일으켰고, 1612년(광해군 4) 보덕(輔德)을 거쳐 이듬해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상중(尙重)의 아들인 연은 1603년
(선조 3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예조 좌랑(禮曹佐郞), 장령(掌令), 응교(應敎), 집의(執義), 사간(司諫) 등을
역임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지냈고 후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연의 동생 온( )은 1609년(광해군 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은퇴하여 성리학(性理學) 연구에
전념하다가 1653년(효종 4)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이르렀다. 행(荇)의 손자이며 휘지(徽之)의 아들인 계옹(啓翁)과 시옹
(是翁) 형제는 삭녕 최씨(朔寧崔氏)가문을 문(文)의 가문으로 더욱 빛냈다.
계옹(啓翁)은 지평(持平)으로 동지사 서장관(冬至使書狀官)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 온 후에 정언(正言), 지평(持平)을 지냈고
그의 동생 시옹(是翁)은 윤 증(尹 拯)의 문하생으로 지평(持平)이 되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 학자로서 실학파(實學派)의 거두(巨頭)이며 한국 사상사(韓國思想史)에 중요한 업적을 이룩한 한기
(漢綺)는 항(恒)의 14세손이다.
1825년(순조 25)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의 연구에 전심하였고, 1872년(고종 9) 아들 병대
(柄大)가 고종의 시종(侍從)이 되자, 노인직(老人職)으로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철저한 경험주의 철학을 기반으로 무실
사상(務實思想)을 전개하여 실학의 철학적 기반을 확립했고, 교육사상에 있어서 직업교육을 제창했다. 성리학의
배타적이고 고루한 입장에서 벗어나 자유분방한 이론을 전개한 점에 있어서 한국 사상사(韓國思想史)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고, 또한 삭녕 최씨(朔寧崔氏) 가문을 덕망있는 가문으로 이르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삭녕 최씨(朔寧崔氏)는 남한에 총 9,027가구, 37,87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 났다
[출처] 삭녕최씨 시조 고려 최천로 평장사=>최항,최한기등 대학자 배출|작성자 개벽일꾼
◆ 人口數
統計廳(통계청)의 人口調査(인구조사)에 依(의)하면 朔寧崔氏(삭령최씨)는
1985年에는 摠 9,027家口 37,872名,
2000年에는 摠 12,055家口 38,736名이 있는 것으로 調査(조사)되었다.
집성촌
경기도 김포군일대..210여세대
전북 남원군일대....52세대
전북 정읍군 일대...120세대
전남 구례군일대....78세대
전남 담양군일대 45세대
경기도 평택,이천,광주군일원 60여세대
전북 김제군일원..48세대등
유적지
전북 남원군의 노봉서원,,,최상중,최온,최휘지등을 배향한다
전북 남원의 병산서원....최언수, 최연을 배향
전북 남원의 덕계서원.....최원을 배향
경남 사천의 구계서원.....최관을 배향
경남사천의 극덕사........최형민을 배향
이상이 삭녕 최씨의 계보입니다
◆ 朔寧崔氏全國대종회==http://www.sakchoi.com/
다음은 通禮公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