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경영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공중부양도 하고 축지법을 쓴다고 주장하는 좀 이상한 사람입니다. ‘내 눈을 바라봐’, 뭐 어쩌고 하는 음반도 냈었고, 각종 토크쇼에 등장했었습니다. 대통령 되면 신혼부부에게 일억씩 준다던 공약을 냈었는데, 또 선거철이 돌아왔으니 새로운 공약으로 등장할 것입니다. 기대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시선의 주목 안 받으면 병이 납니다.
사실 우리들도 별로 내세울 것이 없어서 그렇지, 누구든지 좋은 의미로 주목받고 싶고, 또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주었으면 생각합니다. 또 그 정도면 알아줄만한데 안 알아주면 섭섭합니다. 그게 인지상정인데, 하물며 대단한 기적으로 병자들을 치료하여 벌떡벌떡 일어나게 하신 예수는 그 인기를 누릴 만도 한데, 오히려 절대로 알리지 마라, 신신당부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또 오늘 예수님께 나병 환자 한 명이 찾아옵니다. 당시 나병환자는 죄인 중에서도 최고의 죄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피하지 않습니다. 무척 바빴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를 만나 그의 딱한 이야기를 듣고 측은한 마음까지 들어서 그에게 치유의 기적을 베푸십니다.
오늘은 두 가지를 짚고 넘어갑니다. 첫 번째, 예수님이 왜 치유기적을 보여주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말라고 했을까. 두 번째, 죄인 중의 죄인인 문둥병자가 감히 예수님을 찾아와서 자신의 딱한 사정을 하소연함으로 치유 받는다는 것은 과연 신앙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나라에 유명한 목사들 많습니다. 조용기, 김홍도, 곽선희.... 우리 같은 보통사람들이 이들을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을까요? 아마 모르긴 몰라도 대기업 총수 만나는 것만큼 힘들 겁니다. 외제차는 기본이고, 비서에 수행원 몇 명씩 데리고 다닙니다. 자녀들은 모두 해외 유학 보내서 착착 순조롭게 교회 승계하지 않습니까. 이게 북한의 권력 세습하는 것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도 종북세력 어쩌고 하면서 제일 난리를 치는 게 또 그들입니다. 오늘 이걸 얘기하려는 것은 아니고요.
하여간 크든지 작든지, 또 교회든지 복지기관과 같은 선교기관이든지 어느 분야든지 이런 예수를 이용하여 사업하는 천벌 받을 사람들 정말 많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성경 안 보냐. 더 많이, 더 자세히 봅니다. 왜냐. 자신이 하는 일이나 처지를 옹호해줄 그런 구절 찾느라고 더 많이 봐야 하고, 더 자세히 봐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거두절미해서 보고, 그것을 유리하게 해석하고, 불리한 것은 교인들 못 보게 합니다.
천주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난공불락, 전혀 흔들림 없는 그 탄탄한 조직, 권위. 똘똘 뭉쳐있습니다. 우리 신부님, 우리 신부님, 사제들은 평생 떠받들려 사느라 이 세상에 발을 못 붙이고 삽니다. 그런 사제를 보고 신자들이 직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결혼도 못 하는데 하면서, 그것 하나로 모든 모자람은 다 상쇄됩니다.
우리 성공회. 워낙 작아서 사람들에게 관심도 없고, 신자들이 몇 명 되지도 않으니까, 우리가 뭐라고 해도 주변에서 신경도 안 쓰고, 워낙 가진 게 없으니까, 서로 별 것도 아닌 것 같고 싸웁니다. 이렇듯 개신교나 천주교나 우리 성공회나 모두 정도의 차이지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저 위에서 하느님이 보시기엔 전부 거기서 거깁니다. 인간이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입 다물고 있으라는 겁니다.
모자라고 못 믿을 게 인간이라는 거죠. 그래서 하느님을 봐야 하는데, 우리는 하느님은 보지 않고 그 표적인 기적만 봅니다. 치유만 봅니다. 축복만 봅니다. 껍데기만 봅니다. 교회 건물만 보고요, 열광하는 사람들만 보고, 프로그램만 보고, 누가 인기 있나, 몇 등인가, 그것에만 온통 관심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측은지심으로 병을 고쳐는 주셨지만, 물론 그것이 복음의 주된 내용이죠. 하지만 그 근저의 하느님의 진리는 보지 않고, 깨끗해진 치유라는 결과만을 볼 것이기에, 그래서 하느님은 철저히 가려지고, 치유의 축복만이 과장되고, 누가 더 영험하고 기도발 있는 무당인가에 관심이 쏠리는 것을 염려하심입니다. 이 염려는 괜한 것이 아님이 오늘날 우리나라 기독교회를 보면 확연히 드러납니다.
이런 상태에서의 우리의 구세주이신 메시아, 즉 그리스도의 출현의 선포는 때가 이르다. 아직 뜸 들기 전에 솥뚜껑 열지 말라는 소리입니다. 바로 지금 예수님이 깨끗해진 문둥병자에게 지시하는 이 몇 가지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하느님 종으로서의, 일꾼으로서의, 자녀로서의 자세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기쁘고 놀랍고 감격스러운 그런 격한 감정만으로는 하느님나라를 확장하는 일을 할 수 없다. 하느님나라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법과 관습도 따라야할 때는 따라야 하고, 훈련된 머리도 필요하고, 참는 의지, 자제할 줄 아는 종의 자세가 요구된다. 더 공부하고 함께 모여 기도해라. 너희들은 하느님나라의 소망을 갖고 노력만 하면 된다. 때는 내가 정한다.
두 번째, 죄인 중의 죄인인 문둥병자가 감히 예수님을 찾아와서 자신의 딱한 사정을 하소연함으로 치유된다는 것, 이것은 과연 이 시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문둥병 걸리면 병원 가야죠. 아직도 병 고치려고 교회 가서 안수기도, 안수치료 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그건 무당이나 하는 짓이고, 병은 분명히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마찬가지 사회적 불평등을 당했다면 인권단체나 복지기관을 찾아야 합니다. 공부를 하려면 학원을 가야하고, 심한 갈등으로 문제가 생겼다면 상담사를 찾아야 하고, 억울한 일이 있으면, 경찰이나 법원에 가야하고, 그래도 안 되면 하다못해 일인시위라도 해야죠.
맞습니까. 우리들이 살면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일들이 그렇게 하면 해결되지 않습니까. 굳이 교회로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오지 않아도 됩니다. 가지고 와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중세 때는 모든 일을 교회가 중심이 되어 풀어가고 이끌어갔습니다만, 현대에 들어서 교회는 거꾸로 이 세상을 좇아가느라 가랑이 찢어지고 있습니다. 어떤 문제도 하느님께 꺼내어 놓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맞습니까?
아니죠. 이 사회에 아픈 사람들이 모두 병원에 갈 수 있느냐 말이죠. 불평등을 당했을 때 인권위원회에 제소한 적 있으세요? 없잖아요. 귀찮고, 어떻게 하는 줄도 모르고, 더 큰 보복이라도 당할까봐. 안 합니다. 독선과 억압에 항거해서 적극적으로 나선 본 적이 아득하죠? 갈등 해소를 위해서 상담 받으시러 문을 두드려 보셨습니까? 안 합니다.
얼마 전에 우리들은 촛불을 들었습니다. 동전으로 이마트에 가서 장도 보았습니다. 일인시위도 해보았습니다. 아무 효과가 없을 것 같았지만, 바위에 돌 던지는 기분이었지만, 효과가 더디어서 그렇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주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대형할인마트 영업단축을 조례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물론 많은 시행착오가 있겠지요. 그 효과도 미지수입니다. 그렇다고 안 할 수 없습니다. 시행착오는 있겠지만 하면서 끊임없이 고쳐가야 합니다. 하느님나라는 만들어가는 것이지 완성되어 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여간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더디고 효과가 당장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지속적이지 못합니다. 바빠서, 당장 내 일이 아니라서, 해도 소용없으니까. 못 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합니다. 또 이거 옳은 일인가 확신도 잘 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우리들을 바로 세워주십니다. 확신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니다. 환자에게는 완치의 기적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치유의 희망과 평안함을 주십니다. 피켓을 든 이에게는 명분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인내와 주님의 용기를 주십니다. 갈등을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갈등 해소를 위한 사랑의 마음을 주십니다.
우리가 이런 나와 내 주변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물리적인 힘, 능력, 빽, 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 주시는 희망과 용기와 인내와 지혜와 무엇보다도 사랑을 구하지 않아서입니다. 그거 구하러 오늘 문둥병자는 감히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제대로 찾아온 겁니다. 그럴 때 비로소 주님은 활동하십니다.
여러분, 오늘 문둥병자처럼 내 문제를 주님께 내 놓고 떼쓰시기 바랍니다. 물론 시원하게 해결되지도 않고, 또 정확한 답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주시고, 또 우리에게 희망을 보여주시고, 때를 기다리는 인내도 주시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내가 사랑 받아 마땅한 소중한 존재임을 알게 해주십니다.
그 사랑을 듬뿍 받아서 보잘것없는 내가 하느님나라에 당당하게 살고 있음을 확인하시는 행복한 한 주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