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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성, 깨달음 그리고 열반
한 페친이 이런 질문과 함께 요청을 해왔다.
“스님, 남방에서도 견성을 말하나요? 견성이 깨달음으로 가는 경유지인가요? 견성이 특별한 수행 없이도 어느 날 갑자기 번개치듯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더군요. 마치 복권 당첨되는 것처럼. 또 견성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면, 화두선(?) 선정(?) 수행 체험과 비슷해 보이기도 하고. 알아차림조차 사라진 그 무엇이라고도 합니다. 알아차림만으로는 부족한 걸까요? 견성을 사마타, 위빠사나 수행과 관련지어 설명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1. 견성 또는 깨달음의 의미
사실 이런 고차원적이고 논란이 많은 문제에 대해 내가 토를 단다면 많은 사람들이 흥분할 것 같아서 질문을 무시하려고 했는데, 그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순전히 나의 견해를 말하려고 한다. (이런 글은 정중체로 써야 하는데...)
견성은 깨달음이고, 남방에서도 깨달음에 대해 당연히 이야기한다. 그것이 남방에서는 견성이라는 단어, 그러니까 ‘성품을 본다.’라는 뭔가 고상한 것을 본 것처럼 표현하지 않고, 닙바나nibbana(불이 꺼졌다)라고 표현할 뿐이다. 고대인도어 닙바나nibbana(산스크리트어로 니르바나; 열반涅槃은 니르바나..닐바나..닐반..열반으로 변천한 한문 음사)의 의미는 ‘불이 꺼졌다.’라는 뜻이다. 욕망의 불, 번뇌의 불이 꺼졌다는 의미이지만, 사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욕망과 번뇌를 일으키는 ‘유신견(자아, 아상)이 소멸했다.’라는 뜻이다.
'볼 견(見) + 성품 성(性)'의 한자 합성어인 견성(見性)은 중국에서 창시된 불교종파인 선종 전통에서 유래한 한문(중국어, 한자) 용어로 '성(性; 성품, 본성, 본래의 성품; 붓다의 성품, 부처의 성품, 불성)을 본다(見)'는 뜻이다.
북방에서는 뭔가 있음을 보았다는 ‘견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실은 (탐진치가 소멸한) ‘텅 빈 그 자리’를 보는 것이고, 남방에서는 (탐진치의) '소멸'을 의미하는 열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실은 자아가 무너졌을 때 일어나는 ‘텅 빈 고요’를 경험하는 것이므로 같은 말이라고 보아야 한다.
2. 견성이 특별한 수행없이 갑자기 일어난다?
그런 사람이 있을 수는 있겠다. 절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것인 것이 아니고 그것도 매우 특별하고 희귀한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나! 붓다는 6년 동안 지독한 수행을 한 후에 깨달았는데, 그러면 붓다는 그런 특별하고 희귀한 존재가 아니고 보통 사람이었을까? 그리고 대부분 사람들이 선방이나 수행처에서 다리 아프게 가부좌를 하고 거의 평생을 수행하는데도 견성을 못하는데, 그러면 그런 사람들은 바보란 말인가? 그들은 왜 그렇게 힘들게 수행하는 것일까?
사실 ‘갑자기 깨닫는다(돈오)’는 말은 오랫동안 수행하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깨닫는다는 말이다. 그냥 수행도 없이 알아차림도 없이 방일하게 살다가 갑자기 견성을 했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어느 날 길을 걸어가다가 우연히 갑자기 깨달을 수도 있다. 우주의 이치나 삶의 의미, 아니면 뇌를 스치는 번뜩이는 지혜, 머리를 꿰뚫고 지나가는 깨달음, 마음에 커다란 감동의 물결과 함께 폭포처럼 쏟아지는 눈물, 땅에 발이 닿지 않는 희열과 행복감, 흥분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럼 이런 것이 깨달음이냐? 견성이냐? 결론은 ‘아니다.’이다.
그런 경험이 일어난 후에 ‘자아의 소멸’, 즉 속박에서 벗어남, 내려놓음, 텅 빔, 무심함, 자유로움, 번뇌의 소멸, 욕망의 소멸을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경험한다면 그것은 깨달음이다. 그러니까 어떤 경험을 했는데 여전히 욕망에 끄달리고 여전히 부질없는 생각(망상)이 계속 일어나 정처없이 흘러가면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다.
나는 그동안 깨달았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이런 저런 다양한 경험들을 나에게 털어놓았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온 우주와 내가 하나됨을 경험했습니다.”
“온 몸을 전율하는 희열이 일어나면서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몇 달을 깨달음의 기쁨 속에서 보냈습니다.”
“눈만 감으면 환한 빛이 떠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경험했습니다.”
그럴 때, 나는 이렇게 되물었다.
“여전히 욕망이 일어납니까? 여전히 분노, 스트레스, 짜증이 일어납니까? 여전히 생각이 계속 흘러갑니까? 여전히 대상을 보면 반응이 일어납니까?”
그들이 깨닫기는 깨달았는데 여전히 그렇다고 하면, 나는 그들에게 결정타를 먹였다.
“그럼, 그런 깨달음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3. 사마타의 길과 위빠사나의 길
초기경전에 ‘법을 따르는 자’와 ‘믿음을 따르는 자’가 나온다. '법(진리; 진실한 이치)을 따르는 자는 위빠사나를 위주로하는 수행자'(??)이다. 이성적인 성향이 강한 자들이 이 길을 간다. '믿음을 따르는 자는 사마타를 위주로하는 수행자'(??)이다(기도하는 자가 아님).
그러나, 사마타의 길과 위빠사나의 길.. 이 둘이 분명하게 구분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이 누누이 강조하셨듯이 사마타와 위빠사나, 이 둘을 상호 보완적으로 함께 닦으며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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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바와나(수행, 계발하는 수행, 닦는 수행)'의 관점에서 팔정도를 계戒(실라; 정어·정업·정명), 정定(사마디; 정정진·정념·정정), 혜慧(빤냐; 정견·정사유) 세 부분으로 그룹핑하시고, 설법(법을 설명) 시의 편의를 위해, '사마디(定; 정정진·정념·정정) 바와나'를 사마타, '사마타 후에 하는 깊은 빤냐(慧; 정견·정사유) 바와나'를 위빠사나라고 이름 붙이셨다. '실라(계; 정어·정업·정명) 바와나'는 그냥 실라.
부처님이 완성하시고 가르치신 '팔정도 바와나, 즉 팔정도를 계발하는/닦는 수행, 실라[戒; 정어(바른 말)·정업(바른 행위)·정명(바른 삶/생활)]•사마디[定; 정정진(바른 노력/정진)·정념(바른 사띠/알아차림)·정정(바른 삼매)]•빤냐[慧; 정견(바른 봄/관찰)·정사유(바른 생각/사유)]를 계발하는/닦는 수행'을 중국어(한문) 번역경전식 표현으로 말하면 '계행戒行•정행定行•혜행慧行'(戒•定•慧를 닦는 行) 또는 '戒•定•慧 三學'이고 고대인도어로 말하면 '실라•사마타•위빠사나'(실라•사마디•빤냐 바와나)다.
니까야(부처님 말씀/설법/가르침을 고대인도어로 기록한 경전 모음집)의 한문 번역본에 해당하는 경집(경전 모음집)인 아함경집에 등장하는 지관법止觀法; 지법(止法, 정행, 정향; 사마타)과 관법(觀法, 혜행, 혜향; 위빠사나), 선禪 또는 선정禪定 수행, 계향戒香-정향定香-혜향慧香-해탈향解脫香-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 등의 용어도 후대 사람들(중국의 불교도들)이 부처님이 가르친 팔정도 바와나(팔정도 수행, 팔정도 계발 수행, 팔정도를 계발하는/닦는 수행)의 일부 또는 전부를 한문으로 달리 표현한 것들이다
《코끼리 발자국 비유의 경》에서 사리뿟따(사리불, 사리자)가 설명하듯이, 부처님이 듣는 사람의 수준(근기; 경험-일상경험, 수행경험 등과 그로부터 형성되는 소질, 적성, 성향, 성격 및 여러 가지 능력-이해력, 인내력, 집중력 등)과 처지(처해 있는 상태; 사정이나 형편, 환경, 상황 등)에 맞춰서 설하신 모든 가르침(설법; 이른바 대기설법)은 초전법륜경의 사성제 가르침에 포괄되고,
부처님이 듣는 사람의 수준(근기)과 처지(처해 있는 상태)에 맞춰서 듣는 사람이 이해하고 실천(행, 수행)할 수 있도록 가르치신 모든 수행법(이른바 37조도품 등)은 초전법륜경에서부터 대반열반경에 이르기까지 여러 경전에서 가르치신 팔정도 바와나(팔정도를 계발하는/닦는 수행)에 포괄된다.
꼰단냐를 비롯한 최초의 다섯 제자에게 팔정도를 바와나(계발)하는 중도[majjhimā paṭipadā; 양 극단에 의지하지 않는 길을 감/길걸음/실천/수행]를 설하신 초전법륜경( https://www.facebook.com/permalink.php?story_fbid=2317044811941414&id=100009077529459 )의 가르침을 시작으로,
입멸하시기 전 마지막 제자인 수밧타에게, ['팔정도 바와나, 팔정도를 계발하는/닦는 수행; 실라•사마디•빤냐 바와나, 실라(계행)•사마타(정행)•위빠사나(혜행)'를 부처님께 자세히 바르게 배워서 이미 바르게 실천하고 있는 기존의] 사부대중(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과 함께 팔정도를 바와나(계발, 닦음)할 것을 간곡히 당부하시는 대반열반경의 마지막 가르침에 이르기까지,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수행은 '정각에 이르는 또는 깨달은 자(붓다, 부처)가 되는 여덟 부분으로 이루어진 성스러운 바른 길(八支聖道, 八正道)을 계발하는/닦는 수행'(팔정도 바와나)이 전부다.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正法)을 바르게 배우고 바르게 실천하고자하는 자(불자, 불제자), 특히 正法(왜곡되거나 변질되지 않은 부처님 가르침)을 바르게 따르고자 출가한 자(스님; 비구, 비구니)라면 부처님이 완성하시고 가르치신 팔정도 바와나(팔정도 수행, 팔정도를 계발하는/닦는 수행, 팔정도를 닦는修 행行)를 자신도 바르게 공부해서(바르게 배우고, 바르게 이해해서) 바르게 실천하고 사람들에게도 바르게 가르쳐야 한다.
부처님이 누누이 강조하셨듯이, 팔정도 바와나(팔정도를 계발하는/닦는 수행; 실라•사마디•빤냐 바와나, 실라•사마타•위빠사나; 계•정•혜를 닦는 수행, 계행•정행•혜행)는 연기(조건에 따른 상호의존) 방식으로 완성된다. 또한 부처님이 누누이 강조하셨듯이 팔정도 바와나는 실라나 사마타나 위빠사나 어느 한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상호의존 방식의 중도中道[majjhimā paṭipadā; 양 극단에 의지하지 않는 길을 감/길걸음/실천] 수행임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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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수행을 통해서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을 증득(증명 경험으로 득)하시고 나서, 자신이 시행착오를 겪으며 암중모색하여 완성하신 수행 경험을 시행착오를 빼고 '경험적+합리적'으로 정리하여 자신과 같은 '깨달은 자(부처)가 되는, 또는 정각에 이르는 여덟 부분으로 이루어진 바른 길'을 줄임말로 '팔정도‘라 이름 짓고, 그 바른 길(팔정도)을 바와나(경작하여 계발)하는 수행, 줄임말로 '팔정도 바와나'(팔정도를 계발하는/닦는 수행)를 가장 중요하게 가르치셨다.
부처님이 듣는 사람의 근기(육체적 정신적 경험과 그로부터 형성되는 소질, 적성, 성향, 성격 및 여러 가지 능력-이해력, 인내력, 집중력 등)와 처지(처해 있는 상태)에 맞춰서 가르치신 팔정도를 계발하는/닦는 수행의 가르침을 따라 많은 사람들이 정각을 증득한 사람(아라한)이 되었다. (이른바 천이백 아라한)
당시의 인구 추정치와 역사적 자료를 참고한 학자들의 추정치에 의하면 부처님이 활동하셨던 갠지스강(항하) 중북부 지역에서 사문(재가자, 출가자를 포함해서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의 수효가 약 십만 명 정도였다고 하니 그 중에서 약 천 명 정도(백 명당 한 명 꼴)를 자신과 같은 아라한(부처님도 아라한이다. 스승으로서의 능력이 매우 뛰어난 아라한)으로 이끌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류 역사상 어떤 위대한 자(성인, 현자, 스승)도 천 명 이상의 제자를 자신과 같은 경지로 이끈 자는 붓다(석가모니 부처님) 이외에 없다.
4. 알아차림만으로 부족한가요?
일반적인 알아차림만으로 당연히 부족하다. 번뇌를 일으키는 주체, 즉 유신견(자아)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게 얼마나 교활한 사기꾼, 협잡꾼인지 수행하다보면 스스로 경험할 수 있다. 일상적 수준의 거친(얕은) 알아차림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번뇌가 왜 일어나는지, 번뇌를 누가 일으키는지, 내면에 어떤 오염원, 어둠, 사악함이 도사리고 있는지 [사마타의 바른 삼매(초선정~제4선정 삼매) 상태에서 계발되는 초강력 '고요 집중의 사띠(알아차림)' 능력을 사용하여] 깊이 관찰(이어서 사띠함, 사띠하여 이어 봄)할 필요가 있다.
5. 결론
어떤 길을 가던지 목적지는 같고, 그 결과가 욕망의 소멸, 번뇌의 소멸, 유신견(자아)의 소멸이어야 그것이 진짜 견성(깨달음)이다. 깨달았는데 여전이 욕망 속에 살고 여전히 번뇌로우면 그것은 가짜 견성이다. 물론 깨달음은 다양하고 작은 깨달음도 있고 큰 깨달음도 있다. 처음부터 완벽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깨달았지만 여전히 욕망이 남아있을 수 있다. 하지만 작은 깨달음이라도 욕망이 줄어들었음을, 자아가 많이 무너졌음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머리로(지식으로) 깨달은 것이지 진짜 깨달음은 아니다. 그래서 남방에서는 견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대신 남방에서는 ‘(탐진치의) 소멸, 무너짐’이라는 의미를 지닌 nibbana(열반)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출처 : 무념스님 포스팅 (일부 수정 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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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로만 하는 수행자는 하급 수행자다.
몸으로만 하는 수행자는 중급 수행자다.
머리와 몸으로 하는 수행자야 말로 상급 수행자다."
- 부처님
부처님이 가르치신 ‘팔정도 바와나’(팔정도 수행, 팔정도 계발 수행, 팔정도를 계발하는/닦는 수행)의 진행 과정을 간략히 개괄하면 다음과 같다.
(1) 머리로 하는 지식(교학) 차원의 빤냐(혜慧; 정견·정사유) 바와나(계발 수행) 단계
; 첫 단계의 목표는 변질되지 않은 부처님 가르침(正法)을 바르게 듣고 보고(정견), 바르게 사유(정사유)하여 (달리 말하면 머리로 바르게 공부하여) '팔정도 바와나'(팔정도 계발 수행; 계•정•혜 계발 수행, 계행•정행•혜행, 실라•사마타•위빠사나)를 흔들림 없이 스스로 바르게 실천할 수 있을 정도로 지식(교학) 차원의 이해/견해 또는 지혜[문혜聞慧(들은 지혜), 사혜思慧(사유 지혜)]를 계발(열고 발전향상)하는 것이다. 머리로 하는 지식(교학) 차원의 '빤냐(혜慧; 정견·정사유) 계발 수행'(혜행慧行)은 실라(계행戒行), 사마타(정행定行), 위빠사나(경험 차원의 혜행慧行)의 바탕이 된다.
(2) 몸으로 하는 '실라(계戒; 정어·정업·정명) 바와나(계발 수행)'(계행戒行) 단계
; 이 단계 ‘실라 바와나’(계행戒行)의 일차목표는 (1)단계에서 계발된 문혜聞慧(들은 지혜)와 사혜思慧(사유 지혜)를 바탕으로 정어(바른 언어)·정업(바른 행위)을 닦아서 5계 등의 계율을 자발적으로(스스로) 지키고 6근(여섯 감각기관)을 단속하여 정명(바른 생활; 청정한 생활)을 계발(열고 발전향상)함으로써 바른 삼매(正定)의 첫 단계인 초선정 삼매를 계발할 수 있을 정도로 6근('안이비설신의'근, 달리 표현하면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계행戒行(실라 바와나)은 정행定行(사마디 바와나; 사마타)의 직접적인 조건(토대, 바탕, 기초, 기반)이 된다.
(3) 몸으로 하는 '사마디(정定; 정정진·정념·정정) 바와나(계발 수행)'(정행定行) 단계
; 이 단계 '사마디 바와나'(정행定行; 사마타)의 일차목표는 (2)단계에서 어느 정도 청정해진 6근(달리 표현하면 몸과 마음)을 바탕으로 정정진(바른 노력/정진)과 한 가지 대상(호흡과 같은 까시나)에 대한 정념[正念; 바른 사띠(마음챙겨 알아차림)]을 통해서 정정(正定; 바른 삼매)의 첫 단계인 초선정 삼매를 계발하는 것이다. 정행定行(사마디 바와나; 사마타)은 '경험 차원의 깊은 혜행慧行(빤냐 바와나)'(=위빠사나)의 직접적인 조건(토대, 바탕, 기초, 기반)이 된다.
(4) 머리와 몸으로 하는 경험(수행경험) 차원의 깊은 '빤냐(혜慧; 정견·정사유) 바와나(계발 수행)'(혜행慧行) 단계
; 이 단계 위빠사나[사마타 후에 하는 경험(수행경험) 차원의 깊은 혜행慧行(빤냐 바와나)]의 목표는 (3)단계(사마타)의 바른 삼매(초선정~제4선정 삼매) 상태에서 계발되어 '한시적'으로 유지되는 극대화된 고요집중의 사띠 능력을 사용해서 신수심법身受心法(달리 표현하면 자신과 세상)을 깊이 정견(바르게 관찰/통찰)하고, 깊이 정견한 것을 깊이 정사유(바르게 분석 사유)하여 통찰지혜[통찰지; 위빠사나 수행의 통찰(깊은 관찰) 경험에 의해서 생기는 지혜]를 계발(열고 발전향상)하는 것이다.
(5) 팔정도 바와나(팔정도 수행, 팔정도 계발 수행, 팔정도를 계발하는/닦는 수행)의 완성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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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팔정도를 계발하는/닦는 수행의 맨 처음 단계(교학 단계)인 '지식(교학) 차원의 혜慧(빤냐)를 계발하는 수행'으로 계발된 지식(교학) 차원의 이해/견해 또는 지혜(聞慧와 思慧)를 바탕으로, 바른 공양과 5계 등의 계율을 지키는 것을 포함한 ‘실라(戒; 정어·정업·정명)를 닦는 수행’(실라 바와나, 戒行)을 자발적으로(스스로) 실천하여 청정한 생활을 닦고 여섯 감각기관(6근)을 단속하여 어느 정도[정정(正定; 바른 삼매)의 첫 단계인 초선정 삼매를 계발할 수 있을 정도]로 6근('안이비설신의'근, 달리 표현하면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닦는다.
어느 정도 닦아진 실라(계행戒行)를 바탕으로 사마타(사마디 바와나, 정행定行; 계행을 바탕으로 '바른 정진, 바른 사띠, 바른 삼매'를 닦는 수행)가 계발(열리고 발전향상)되고, 사마타를 바탕으로 위빠사나[사마타 후에 하는 깊은 혜행慧行(빤냐 바와나); 사마타의 바른 삼매(초선정~제4선정 삼매) 상태에서 계발되어 한시적으로 유지되는 초강력 고요집중의 사띠 능력을 사용해서 계발되는 바른 관찰(이어서 사띠함, 사띠하여 이어봄)과 바른 사유를 통해서 통찰(깊은 관찰) 지혜를 닦는 수행]가 계발(열리고 발전향상)된다. 발전향상된 사마타는 실라와 위빠사나를 더 발전향상시키고, 발전향상된 위빠사나는 사마타와 실라를 더 발전향상시키며, 발전향상된 실라는 다시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더 발전향상시킨다.
부처님이 누누이 강조하셨듯이, 팔정도 바와나(팔정도를 계발하는/닦는 수행; 실라•사마디•빤냐 바와나, 실라•사마타•위빠사나; 계•정•혜를 닦는 수행, 계행•정행•혜행)는 이렇게 연기(조건에 따른 상호의존) 방식으로 완성된다.
부처님이 완성하시고 가르치신 변질되지 않은 바른 수행(팔정도를 계발하는/닦는 수행)은 이해하기에 어렵거나(피상적이거나, 난해하거나) 실천하기에 어렵지 않다.
다만 수행의 성취와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바른 수행(팔정도를 계발하는/닦는 수행; 실라•사마타•위빠사나, 계행•정행•혜행)에 대한 변질되지 않은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正法)을 사리자나 주리반특 같은 부처님 제자들처럼 바른 공양과 5계 등을 지키는 계행에서부터 매우 철저하고 충실하게 실천해야 한다.
부처님이 완성하시고 가르치신 팔정도를 계발하는/닦는 수행은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훌륭한 길(실천방법)이다. 수행의 중간 과정에서도 아상(我相; ‘나我’라는 상대相적 분별식, 에고식 또는 에고심)의 착각과 집착에서 벗어나는 정도만큼 그리고 탐(갈망, 욕망, 탐욕), 진(갈망의 다른 측면인 혐오, 미움, 성냄, 증오, 분노, 두려움), 치(갈망과 혐오, 탐·진에 대한 집착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정도만큼 저마다의 자유와 평화, ‘나(我, ego)’를 초월한 분별 집착 없는 지혜로운 바른 사랑(자비)과 바른 행복을 누릴 수 있다.
부처님은 연기(조건에 따른 상호의존) 방식의 수행인 팔정도 바와나(팔정도를 계발하는/닦는 수행)를 '여덟 개의 바큇살로 이루어진 바퀴가 구르는 것'에 비유하셨다. 팔정도 바와나를 상징하는 ‘여덟 개의 바큇살로 이루어진 법륜(法輪; 법의 바퀴)’은 불교(부처님佛 가르침敎)의 심볼(상징, 상징물, 표식)이 되었다.
도리사(桃李寺)는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태조산(太祖山)에 있는 사찰로 삼국시대 고구려의 승려 아도(阿道)가 창건한 사찰이다. 아도가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서라벌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겨울인데도 복숭아꽃(桃花)과 오얏꽃(李花; 오얏/자두 나무 꽃)이 만발하여 있음을 보고 그곳에 절을 짓고 도리사(桃李寺)라 하였다.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이 절이 신라 최초의 사찰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1976년 6월 아도의 석상(石像)이 발견되었으며, 1977년 4월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을 해체, 복원하다가 금동육각탑 형태를 띤 사리구(舍利具)와 붓다(석가모니 부처님; 세존)의 진신사리(眞身舍利) 1과가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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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오. _()_
모든 존재가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正法)을 따라
행복하고.. 평화롭고.. 자유롭기를...
May all beings
following the Buddha's samma Dhamma
be happy.. be peaceful.. be liberated(모든 괴로움과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기를, 벗어나기를, 해탈하기를)...
불교의 목표는 깨달음이다. 그것은 욕망, 탐진치, 번뇌, 자아의 소멸을 뜻한다. 자아가 무너졌을 때 '텅 빈 고요'를 경험한다. 깨닫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행'을 해야한다. 수행의 핵심은 팔정도로서 1. 바른 견해 2. 바른 말과 바른 생각과 바른 행동 3. 바른 직업 4. 바른 정진 5. 바른 사마타와 바른 위빠사나 이다.
감사합니다. ..()()()..
성불하십시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