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혜왕
1.원나라의 생활 풍습이 더 익숙했다.- 고려 27대 충숙왕)과 명덕태후 홍씨 사이의 장남. 31대 공민왕의 친형이다. 그는 고려의 생활 풍습보다는 원나라의 환경에 더 익숙했다. 세자의 신분으로 원나라에 가서 숙위(황제를 호위한다는 명목으로 속국의 왕족들이 볼모로 가서 머무는 일)하며 머물렀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이자 철저한 속국이었다. 25대 충렬왕과 26대 충선왕이 원나라에 의해 왕위를 수시로 빼앗겼던 것처럼, 그의 아버지 충숙왕도 1330년 원나라에 의해 사실상 왕위를 빼앗겼다. 겉으로는 충숙왕의 양위(讓位)를 받아, 그해 2월 그가 귀국하여 왕위를 계승하고 충혜왕이 되었다. 당시 고려의 왕위 계승은 아버지가 고려의 왕이라는 혈통의 문제보다는, 원나라에 얼마나 강력한 지기기반이 있느냐에 따라 좌우되었고 충혜왕은 14살의세자 시절 원나라 승상 엘테무르와 가까이 지내며 함께 사냥도 하고 술도 마시며 그의 총애를 받았다. 게다가 그는 세조 쿠빌라이의 고손녀인 이렌첸반(덕령공주)과 결혼했다.
2. 2년간의 짧은 1차 재위- 왕위에 오른 충혜왕은 1331년 너무 가치가 커서 화폐로 쓰이기 힘든 은병(銀甁)의 통용을 금하고, 오종포(五綜布, 올이 다섯 가닥인 베) 15필에 해당하는 소은병(小銀甁)을 통용하게 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또 행정조직을 개혁하고, 5도(道)에 소금을 관리하는 염장도감(鹽場都監)을 설치하기도 하였으며, 원나라의 쌍성(雙城), 요양(遼陽), 심양(瀋陽) 등지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을 귀환해줄 것을 요청하는 등 새로운 정치를 하려는 의지를 보였었다.
3. 방탕한 행실이 폐위의 구실- 그를 지지해준 엘테무르가 사망하자, 원나라에서 권력을 잡은 태보(정1품 고위직) 백안이 ‘충혜왕이 본래 행실이 나빠 원나라의 변방을 지키는 일에 누가 될까 염려스러우니 그의 아버지에게 배우게 하십시오’라면서 충혜왕의 폐위를 주청했고 왕위에 오른 후에도 술, 사냥, 여자등 방탕한 나쁜 행실은 폐위의 구실이 되어 2년 만에 왕위에서 물러나 원나라로 가야했다. 하지만 원나라에서도 황족, 귀족들과 함께 유흥을 즐기며 방탕한 생활은 이어지고 그가 엘테무르의 아들 등과 함께 술을 마시며 여자를 희롱하고 다녀 간혹 숙위에도 결근하자, 바이안은 그를 두고 무뢰배, 건달을 뜻하는 ‘발피(泼皮)’라며 비난했다.
4. 누가 고려 왕이 될 것인가- 충숙왕은 아버지 충선왕과의 갈등, 원나라와의 갈등으로 인해 왕권이 허약했다. 게다가 고려 왕위는 심왕(瀋王) 고(暠)가 넘보고 있었고, 그를 지지하는 신하들이 고려에 많았다. 충숙왕 역시 이런 사정 때문에, 요동 일대의 고려인을 다스리는 심왕 고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생각하기도 했다. 충숙왕은 아들을 ‘발피’라고 부르는 등 애정이 적었지만, 1339년 3월 죽음을 앞두고 유명(遺命)으로 그에게 왕위를 다시 계승하게 했다.
그런데 원 황제에게 왕위 계승의 허락을 구하고자 하는 요청을 원나라 태사(太師, 정1품 최고 직위) 백안이 묵살하고 황제에게 고하지 않았는데 백안은 심왕 고가 왕이 되어야 한다며 충혜왕의 즉위를 반대했다. 이 때문에 고려 왕위는 그해 11월까지 비어 있게 되었고 아직 왕위가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충혜왕은 아버지의 여인 가운데 수비(壽妃) 권씨(權氏)를 범하고, 외삼촌인 홍융의 아내 황씨도 간음하는 등, 음란한 짓을 많이 했었다. 그는 심지어 8월 17일 서모(庶母, 아버지의 첩)인 백안홀도(伯顔忽都, 경화공주)를 강제로 능욕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녀는 원 세조 쿠빌라이의 증손녀라는 높은 신분을 갖고 있었다. 수치심을 느낀 그녀는 원나라에 이 사건을 알리고자 했다. 충혜왕은 그녀가 원나라에 소식을 전하지 못하도록 말의 거래까지 막을 정도로 단속했다. 그러자 그녀는 재상인 조적(曺頔)에게 자신이 폭행당한 사실을 알렸다. 심왕 고를 고려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세력의 우두머리였던 조적은, 이 사건을 기회로 삼았다. 그는 8월 24일 국새(國璽)를 숨긴 채 군사 1천명으로 왕궁을 습격하는 반란을 일으켜 심왕을 고려 왕위에 앉히고자 했다. 이때 충혜왕은 직접 말을 타고 나와 화살을 쏘며 반격했다. 수적으로 우세한 충혜왕의 군사들이 활을 쏘아 조적을 죽이면서 반란을 평정할 수 있었다. 원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반란을 평정하고 왕이 된 충혜왕은 사람을 보내 원나라에 가서 왕위 계승을 인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해 11월 고려에 온 원나라 사신은 먼저 경화공주의 궁에 가서 황제가 보낸 술을 전한 후, 왕의 관저로 가서 국새를 빼앗아 경화공주에게 넘겨주었다.
충혜왕은 원나라로 압송되어 형부(刑部)에 투옥되었다. 상당수의 고려 관리들도 함께 원나라에 압송되어 투옥되었다. 자칫 왕위를 빼앗길 위기였으나, 마침 충혜왕을 미워하던 바이안이 권력을 잃는 등 원나라의 정계 개편으로 정국이 혼란스러워졌다. 이를 틈타 충혜왕은 황제의 명령을 받아 왕위에 복위되고, 6개월 만인 1340년 5월 고려로 귀국하였다.
5. 황음무도의 결과와 귀양길에서의 죽음-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 신분의 고하에 상관없이 제 욕심을 차리다가 왕위까지 빼앗길 뻔했던 그였지만, 고려에 돌아온 후에도 그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충혜왕은 여전히 여자들을 겁탈하고 신하들을 때려 죽였다. 결국 기황후의 오빠인 기철(奇轍, ?~1356)을 비롯한 고려의 신하들이 원나라 중서성에 글을 올려 충혜왕의 황음무도(荒淫無道)를 고발함으로써, 충혜왕은 1343년 11월에 고려에 온 원나라 사신에게 구타를 당하고 포박 당해 원나라로 끌려가고 말았다. 1343년 12월, 원나라 순제 토곤테무르는 충혜왕을 죄인을 가두는 수레에 태워 게양현으로 귀양을 가던 길에 다음해 1월 악양현(호남성 지역)에서 죽고 말았다. 그의 귀양길을 따른 신하는 하나도 없었을 뿐더러, 그의 죽음에도 고려 백성들 가운데 아무도 슬퍼하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6. 원 간섭기 고려 왕들의 비행, 왜 그랬을까 8살에 즉위해 12살에 죽은 충목왕과 12살에 즉위해 15세에 죽은 충정왕을 예외로 치면, 원 간섭기 고려의 왕들은 모두 여자관계가 복잡한 난봉꾼들이었다.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모두 몽골의 공주들과 사이가 나빴다. 자신들이 원한 결혼이 아니라, 왕으로서의 지위를 지키기 위한 정략적 결혼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또한 언제든지 원나라의 결정에 의해 수시로 왕위를 빼앗길 수도 있는 처지에 놓여 있었고, 실제로 왕위를 빼앗겼던 경험들을 갖고 있었다. 원나라 공주와 결혼해 원나라에서 황족의 대우를 받기도 했지만, 고려에 오면 왕의 권위를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신하들이 자신이 아닌 원나라의 정세 변화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늘 불안감을 안고 살았다. 이런 불안감이 원 간섭기 고려 왕들을 난봉꾼이 되도록 만든 요인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고려에는 우탁(禹倬) 등 일부 신하들을 제외하면 왕의 난행을 막기보다는 도리어 왕에게 자신의 딸, 심지어는 부인까지 바치면서 출세하려는 자들이 넘쳐났다. 충혜왕의 황음무도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등장한 것이었다.
7. 상업을 존중한 고려- 화폐유통에 적극적이었던 고려 15대 숙종은 개경 시가지 도로 양편에다 상업에 종사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나 스스로 점포를 지어 돈을 사용하여 이익을 크게 거둘 것을 장려하였다. 또 각 주와 현에 명령하여 미곡을 내어 술과 밥을 파는 가게를 열게 만드는 등 백성들에게 상업을 권장하고 돈의 유익함을 알도록 하라고 지시한 바 있다. 고려 시대에는 상업에 대해 적극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고,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장사를 해서 이익을 얻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중에서도 임금이 직접 상점을 차리고 수공업장을 만든 것은 매우 특별한 일이다. 하지만 충혜왕이 국제무역과 장사를 통해 왕실 재정을 확보하려고 계획하고 실천했던 것은 당시 고려가 상업을 존중하고, 그 바탕 위에서 상업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 충숙왕과 충혜왕의 왕위계승.
충숙왕 17년(1330), 충숙왕이 원나라에게 폐위되어 충혜왕 즉위, 곧바로 충혜왕 2년(1332) 원나라에 의해 폐위되어 충숙왕이 복위되어 다시 원나라로 갔다. 충숙왕 복위 7년(1339) 충숙왕이 죽자 충숙왕의 사촌 심양왕 왕고(王暠)를 왕으로 세우려는 조적(曺頔) 등의 반란이 있었으나 실패하고 충혜왕이 즉위했다. 즉위 후에 사치와 향락, 사냥을 일삼았으며, 흉흉한 민심과 소문이 돌았다.
충숙왕 복위 7년(1339) 5월에는 부왕의 후비인 수비 권씨(壽妃權氏)를, 8월에는 또 다른 부왕의 후비인 경화공주 백안홀도(伯顔忽都)를 강간하였다. 충혜왕은 서모인 권씨나 경화공주 뿐만 아니라, 외숙 홍융(洪戎)의 처까지 얼굴이 예쁘면 근친관계, 혼인 여부, 신분 등에 상관 없이 닥치는대로 사람을 시켜 빼앗아 강간하는 등 행동에 절제가 전혀 없고 패륜을 일삼았다. 그는 항상 정력이 강해지는 열약을 복용했는데, 강간과 음행을 일삼아 그와 관계를 가지는 여자들은 임질에 걸리는 일이 많았다. 그 때문에 장인인 홍탁의 후처 황씨도 임질에 걸렸는데, 충혜왕은 승려 복산을 시켜 그녀의 임질을 치료토록 하였다.
충혜왕 복위 4년(1343)에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삼현(三峴)에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개성에서는 “왕이 민가의 어린이 수십 명을 잡아 새 궁궐의 주춧돌 밑에 묻고자 한다.”는 소문이 돌아 집집마다 아이를 안고 도망하고 숨는 등 소란이 일었다. 충혜왕은 영특하고 슬기로운 재능을 좋지 못한 데 사용하였고, 사무역(私貿易)으로 재화를 모으고 무리한 세금을 강제로 징수하여 유흥에 탕진하고, 백성들의 토지와 노비를 약탈하여 보흥고(寶興庫)에 소속시키는 등 실정이 많았다.
음탕한 행위를 많이 한 것으로 《고려사》를 통해 잘 알려져 있는 충혜왕은 결국 원나라에 의해 다시 폐위되어 원나라 게양현으로 유배를 가다가 악양현에서 죽었다. 독주를 마셨다고도 하고, 귤을 먹고 죽었다고도 알려져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 즉위 순서
제27대 충숙왕 즉위 : 재위 17년 (→ 폐위 및 원나라 압송), 1313년 ~ 1330년
→ 제28대 충혜왕 즉위 : 재위 2년 (→ 폐위 및 원나라 압송), 1330년 ~ 1332년
제27대 충숙왕 복위 : 재위 7 년 (→ 사망), 1332년 ~ 1339년
→ 제28대 충혜왕 복위 : 재위 5년 (→ 폐위 및 유배중 사망), 1339년 ~ 1344년
제29대 충목왕 즉위 : 재위 4 년 (→ 요절), 1344년 ~ 1348년
제30대 충정왕 즉위 : 재위 3 년 (→ 폐위 및 유배중 사사), 1348년 ~ 1351년
제31대 공민왕 즉위 : 재위 23년 (→ 피살), 1351년 ~ 137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