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여행]
국공(國共) 대결, 일본 침략, 그리고 중공정권 수립
장개석 vs 모택동’ 영걸의 결전 홍군 승리로 新중국 탄생하다
국민당 장개석, 북벌 후 남경정부 시대 개막했으나
급성장한 공산당과의 내전서 패배 후 대만으로 철수
공산당 모택동은 홍군 승리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손문, 장개석, 모택동(왼쪽부터).
대장정 중 설산을 넘는 중국 공산당 군대.
1949년 10월 1일 모택동(맨 왼쪽)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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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공합작(國共合作·1924)으로 공산당원의 입당을 허용한 국민당은 이제 민중에 기반을 둔 대중 정당의 면모를 갖추는 작업에 착수했다. 손문이 제시한 삼민주의를 당의 이념으로 정하고 중앙의 집행위원회를 중심으로 전국으로 조직망을 확대시켜 나갔다. 무엇보다도 당의 군사력 확보를 위해 소련의 지원으로 황포군관학교를 설립(1924. 6)했다. 이때 초대 학교장으로 취임한 인물이 바로 장개석(蔣介石)이었다. 이곳에서 장차 북벌과 항일투쟁을 이끌어갈 군사전문가들이 양성됐다.
합작한 국민당이 맨 먼저 추진한 거국적 과업은 군벌들에 의해 사분오열돼 있던 중국을 재통일하는 일, 즉 북벌(北伐)이었다. 이의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은 국민당 지도자 손문의 갑작스러운 사망(1925. 3)이었다. 당시 북양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단기서 정부와 평화적인 통일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북경을 방문 중이던 손문이 지병 악화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손문 사후 국민당 내의 좌·우파 대립 상황을 이용해 군권을 장악한 장개석은 1926년 6월 손문의 꿈을 실현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북벌을 선언했다. 이어서 자신이 황포군관학교에서 배출한 간부들이 주축을 이룬 국민 혁명군을 이끌고 남부의 광동을 출발, 북상(北上)하기 시작했다. 약 2년에 걸친 북벌 기간을 통해 장개석은 대외적으로는 북벌의 주역으로, 대내적으로는 국민당 내의 제1인자로 등극했다. 1928년 7월 초 북경 교외에 있던 손문의 묘에 북벌 완성을 고함으로써 그는 손문의 후계자임을 천명했다. 이제 남경을 수도로 삼고 장개석을 수반으로 하는 남경정부 시대(1928~1949)가 개막됐다.
정부가 수립됐다고는 하나 중국인 전체를 아우르지 못했다. 장개석의 독주에 불만을 가진 세력들이 저항의 몸짓을 발하기 시작했다. 우선, 남경정부가 북벌군의 감축을 결정하자 자신들의 세력 약화를 우려한 지방 군벌들이 반기를 들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무섭고 집요한 도전자는 국민당에서 축출된 공산당 세력이었다.
1927년 국공합작 결렬 이후 농촌에서 일으킨 수차례 봉기에서 실패한 공산당은 남부의 강서성 서금에 모택동(毛澤東)을 주석으로 하는 강서 소비에트(Soviet)를 수립(1931. 11)하고 이를 중심으로 세력 확대를 꾀했다. 이처럼 공산당 세력이 점차 커지자 국민당은 이들을 제거하는 작전에 착수했다. 이후 장개석과 모택동이라는 두 인물로 대변되는 양 진영 간의 싸움은 짧게는 1937년 제2차 국공합작이 성사될 때까지, 길게는 1949년 10월 중공정권이 수립될 때까지 지속됐다.
초기에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자 장개석은 1933년 8월부터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 철저한 근거지 포위 작전으로 ‘홍군(紅軍)’이라 불린 공산당 군대를 강하게 압박했다. 국민당 군대의 포위망 구축으로 곤경에 처한 공산당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1934년 10월 근거지였던 강서성 서금을 떠나 1년여의 고된 행군 끝에 섬서성 연안에 도달하는 유명한 ‘대장정(大長征)’을 실행했다.
국민당 군대의 추격을 받으면서 공산군대는 총 1만2000㎞가 넘는 거리를 이동, 연안의 산악지대에 새로운 혁명 근거지를 구축했다. 물론 이 퇴각 기간에 모택동은 당내에서 최고지도자로서의 입지를 구축하고, 중국 대륙의 깊숙한 오지에 공산주의 이념을 확산시킴으로써 이후 국공내전 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공산당은 오늘날까지 이를 ‘대장정’이라는 역설적 어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후의 해석이야 어찌됐든 현실적으로 당시 공산당 세력은 중국 전체에서 거의 한 점에 불과한 연안 지역에 포위된 채 국민당 군대의 토벌작전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었다. 이대로만 지속됐다면, 장개석의 소망대로 공산당 세력은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역사의 여신, ‘클리오’가 조화를 부렸는지 모택동의 공산당 세력이 기사회생할 수 있는 ‘역전의 기회’가 찾아왔다. 제2차 국공합작의 결정적 계기가 된 이른바 ‘서안(西安)사건(1936. 12)’이 일어난 것이었다. 공산당 토벌전을 독려하기 위해 남경에서 내륙의 서안을 방문한 총사령관 장개석이 부사령관 자격으로 토벌군을 지휘하고 있던 장학량에 의해 감금당하는 하극상 사태가 벌어졌다.
그렇다면 장학량은 왜 이러한 모험을 감행했을까? 사건의 배후에는 일본의 중국 침략이라는 외부적 요인이 놓여 있었다. 1931년 만주사변을 통해 화북지방을 장악하고 만주국 괴뢰정부를 세운 일본은 계속해 중국정부를 압박하면서 호시탐탐 중국 본토를 노리고 있었다.
이러한 외세의 침탈에 대응해 지식인과 학생들을 주축으로 ‘내전중지’ ‘거국항일’의 여론이 중국 민중 사이에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장개석은 ‘선안내 후양외(先安內 後攘外)’를 내걸고 일본의 요구에 양보하면서 우선은 공산당 세력을 토벌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장개석의 태도에 대해 국민당 토벌군 내에서도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토벌군의 주류였던 장학량의 동북군은 원래 그 기반이 만주였던 터라 일본에 대한 적개심으로 들끓고 있었다.
어쨌든 서안사건을 계기로 국민당과 공산당은 두 번째로 손을 잡게 됐다. 이러한 ‘제2차 국공합작(1937. 9)’으로 사지에 몰려 있던 공산당 세력은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결사항전을 선언하고 내륙의 심장부에 위치한 중경(重慶)으로 수도를 옮긴 국민당 군대는 지구전을 벌이면서 전력을 다해 일본군에 정면으로 맞서는 전략으로 나갔다. 이에 비해 공산당의 홍군은 일본군의 후방에서 유격전을 전개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세력 기반을 확대하는 일에 전념했다. 그 결과 국공합작 시 수만 명에 불과하던 공산당 세력은 1945년 중일전쟁 막바지에는 120만 당원, 200만 병력에 달할 정도로 불어났다.
공산당 세력의 급성장은 당연히 국민당의 경계심과 견제를 불러 왔다. 하지만 이제 홍군은 지난날의 초라했던 군대가 아니었다. 일본이 항복한 직후 두 군대는 내전(內戰)에 돌입했다. 장개석과 모택동이라는 20세기 중국을 대표하는 두 영걸 간에 4년여에 걸친 최후 결전이 벌어진 것이다. 내전 초기의 예상과는 달리 최종 승자는 공산당의 홍군이었다. 부패와 실정(失政)으로 민심을 잃은 국민당은 시간이 갈수록 강해지는 공산당의 위세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대만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마침내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는 모택동의 육성이 천안문광장에 울려 퍼졌다. 거의 1세기에 걸친 신산(辛酸)을 겪은 끝에 새로운 중국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Songs From a Secret Gard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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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릿 가든: Songs From a Secret Garden
Secret Garden 1995–present
No.1 - Noctur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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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um Title: Songs From a Secret Garden - Secret Garden
Studio/Live Studio Mono/Stereo Stereo Audio CD (April 16, 1996) Label: Polygram Records / PHILIPS (P) 1995 PolyGram A/S Norway (C) 1996 Philips Classics Marketed in the UK by Philips Class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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