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요3:22~30).
22절. 그 후에 예슈아,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요한은 본장 첫 부분을 주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니고네모에게 복음을 전하신 것을 증언하고 있고 이 구절부터 본장 끝까지는 예루살렘에서 나오셔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복음을 전하시고 침례를 베푸신 것을 기록하고 있다. 본 절에 보면 예슈아 주님께서 친히 침례를 베푸신 것 같이 보이나 4:2절에서 보면 예슈아 주님이 친히 주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제자들이 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23절.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그 때에 침례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죄를 회개하고 메시야의 오심을 갈망 하며 나아오는 자들에게 침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오늘날 어느 교회에서 행하는 약식 세례는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자의로 만든 교리인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침례가 물을 뿌리거나 붓는 것이라면 굳이 물이 많음이 필요치 않다.
24절.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이 구절은 침례 요한의 계속된 사역과 그에 대한 유대인들의 지속적인 반응을 설명하기 위하여 주어졌다. 그러나 머지 아니하여 그의 곧은 양심과 거침없이 죄를 책망함으로 당시 분봉 왕이던 헤롯이 자기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고 책망하여 그에게 잡혀 옥에 갖히고 목 베임을 받게 될 것이지만 그는 그가 받은 하나님의 사명에 온전히 충실하였다.
25절.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당시에 유대인들은 침례는 죄를 씻는 정결예식으로 생각하였던 것 같다.
세례”는 헬라어로“밥티스모스baptismos”인데 이 말은“잠그다, 적시다, 담그다, 빠트리다, 씻다”을 뜻하는“밥티조 baptizo”에서 유래한 것으로“담그기, 씻음, 제의적인 씻음”을 말한다. 이것은 구약에서 성소에서 사용하는“잔, 주발, 놋그릇”같은 것을 씻어 정결하게 하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정결”은 헬라어로“카타리스모스katharismos”인데“깨끗케 하다”을 뜻하는“카다리조katharizo"에서 유래한 것으로“세척,(의례적으로)깨끗하게 함,(도덕적으로)목욕제계하여 정결하게 함으로 속죄함”을 뜻한다.(막1:44, 요2:6, 3:25, 벧후1:9) 그러므로 침례를 받는 것은 물로 씻어 깨끗함을 받는 것을 말한다.
본문에 나오는 변론의 초점은 정결에 대한 것으로 요한의 침례와 예수님의 침례 사이에서 일어난 것으로 생각된다.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의 침례가 더 낫고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고 유대인은 그 말을 부정하며 말하기를 요한의 침례가 더 낫고 가치가 있다면 면 왜 사람들이 요한을 따라가지 아니하고 예슈아 주님을 따라 가겠느냐? 라고 비난 했을 때 요한의 제자들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것 같다.
26절.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그러므로 그 사실관계를 확인하러 변론하던 자들이 침례요한에게 가서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침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라고 조롱조로 말한 것 같다. 즉 요한의 회개의 침례는 인기가 사라져 간다고 경멸의 말을 한 것이다. 이것은 요한에게 시기와 질투심을 일으켜 그 둘 사이를 이간시키려는 마음에서 한 것 일 것이다.
이 말은 요한이 육신적인 사람이고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시기와 질투심이 일어 날만한 말이다. 사실은 복음서나 사도행전에 나타난 당시의 역사를 보면 유대인들과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그런 시기와 질투심에 사로 잡혀서 주 예슈아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해를 끼쳤는지를 볼 수 있다.
27절.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요한은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고, 매우 의미심장한 말로 답변하다. 이 말은 요한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운 말인가? 또한 요한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만 충실하고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지 아니하였으며 예슈아 주님을 주로 높이고 자신을 낮추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아름다운 말이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이 말이 주 예슈아의 침례를 의미한 것이라면 주님의 성공은 곧 그에 대해 하나님이 증명하셨다는 뜻일 수 있다.
둘째 이 말이 자신의 침례에 대해 말한 것이라면 그 자신은 주님과 비교할 수 없는 무가치 한 자임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베푸는 침례가 예슈아 주님의 침례보다 낫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요한은 다만 그가 침례를 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행하는 것이므로 절대로 교만하거나 우줄대고 자신을 높여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요한은 주님이 베푸는 침례나 자신이 베푸는 침례가 서로 경쟁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명령을 따라 행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밝혔다.
28절. 내가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요한의 그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무엇을 증언하여야 하는 것을 말했다.
그들은 자신의 선생은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그리스도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요한 자신은 중요한 인물이 아니다. 그를 위하여 논쟁하고 변론할 필요가 전혀 없음을 제자들에게 상기 시켰다.
29절.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요한은 주 예슈아를 신부를 취하는 신랑으로 비유하고 자신은 신랑 옆에 서서 결혼하는 신랑의 음성을 듣고 기뻐하는 친구에 비유하였다. 여기서 신부는 예슈아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를 따르는 신약시대의 모든 제자들과 후로도 믿고 따르는 모든 자들을 말한다.
구약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과 관계를 남편과 아내관계라고 표현하였다
(사54:5). 그러나 신약에서는 예슈아 그리스도 그를 따르는 지체들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 관계라고 표현하여 이스라엘 민족보다 교회가 더 친근하고 사랑받음을 말하고 있다.(고후11:2)
30절.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요한은 그/ 그리스도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광야에서 외치도록 주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주의 종으로서 쇠하여야 함을 주님과 자신을 대조시켜 말하고 있다.
주님/주 예슈아 그리스도는 흥하셔야 한다.
“흥하다”는 헬라어로“아욱사노auxano”인데 “자라게 하다, 키우다, 증가하다. 늘어나다, 성장하다, 커지다”를 뜻하는 것으로 번영을 의미한다.
나는/ 요한 자신은 쇠하여야 한다.
“쇠하다”는 헬라어로“엘랏토오elattoo”인데 비교급“더 적은, 더 어린, 열등한”을 뜻하는“엘랏손elasson”에서 유래한 것으로 지위나 영향력에 있어서“더 낮게 만들다, 더 열등하게 하다, 더 형편없이 되다, 감소”을 시키는 것을 말한다.
본장에는“해야 하겠다”는 표현이 세 번 기록되어 있는데 흥미롭다
① 주님이 니고데모에게“네가 거듭나야 하겠다.”(3:7)
② 주님이 자신/하나님의 사람도“들려야 하리니.”(3:14)
③ 요한이 그/ 주님보다“쇠하여야 하리라.”(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