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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11월 16일 토요일
[(녹)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스코틀랜드의 성녀 마르가리타 또는
[백] 성녀 제르트루다 동정 또는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
말씀의 초대
요한 사도는 가이오스에게, 형제들이 여행을 계속할 수 있게 도와주면 좋겠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고 하시며, 불의한 재판관을 조르는 과부의 비유를 드신다(복음).
제1독서
<우리가 형제들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진리의 협력자가 됩니다.>
▥ 요한 3서의 말씀입니다. 5-8
사랑하는 가이오스,
5 그대는 형제들을 위하여, 특히 낯선 이들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하든 다 성실히 하고 있습니다.
6 그들이 교회 모임에서 그대의 사랑에 관하여 증언하였습니다.
그들이 하느님께 맞갖도록 그대의 도움을 받아
여행을 계속할 수 있게 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7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길을 나선 사람들로,
이교인들에게서는 아무것도 받지 않습니다.
8 그러므로 우리가 그러한 이들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진리의 협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부르짖으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1-8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2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3 또 그 고을에는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4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5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6 주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7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청원 기도에 대하여 오래전부터 전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께 청하는 기도는 모두 다 이루어진다. 만일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 기도의 청원이 올바르지 않았거나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청한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첫 번째로 그 청한 것이 올바른지 살펴보아야 하고, 두 번째로는 주님께서 바라시는 때를 기다리며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끈질긴 과부의 비유는 바로 기도의 가르침에 관한 것입니다. 과부는 재판관을 찾아가 “올바른 판결”을 요구합니다. 한 번의 요구로 그치지 않고, 거듭하여 요구합니다. 과부는 올바른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끊임없이 재판관을 찾아갈 것이고, 재판관은 마침내 과부의 요구를 들어줄 것입니다.
우리도 올바른 것을 청할 줄 아는 지혜와 낙심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도하는 인내를 지녀야 하겠습니다. 청원 기도에 대하여 조금 더 깊게 묵상해 보면, 끈질기게 요구하는 모습은 우리 인간보다 하느님의 모습과 닮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청원하는 쪽은 언제나 우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렇게 끈기 있고 한결같이 청하지 못합니다. 정작 성실하고 한결같이 청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돌아오도록 끊임없이 요청하시고 우리가 회개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응답을 갈망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간절히 우리의 응답을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인내하며 한결같이 하느님께 청원하는 것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는 것입니다. 그렇게 닮아 가며, 주님께서 우리의 청원에 빠르게 응답하시듯 우리도 그분 청원에 재빠르게 응답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청원을 기억하여 청원 기도가 내 뜻을 이루는 주문이 아니라, 주님과 대화하며 주님을 닮아 가게 하는 일치의 기도가 되게 합시다.(최정훈 바오로 신부)
임마누엘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 한 가운데, 그리고 내 안에 굳건히 현존하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대한 중요한 가르침 하나를 선물로 주십니다. 해도 해도 어려운 것이 기도인 것 같습니다. 때로 열심히 기도하면서도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알쏭달쏭할 때도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기도의 참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기도하셨는지? 그렇게 어떤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남기셨는지를 유심히 바라봐야 하겠습니다.
오늘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말 마디 그대로, 표면적으로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깊이 고민하고 성찰하고 묵상하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 적당하게가 아니라 집요하게 졸라대는 과부처럼 하느님이 귀찮을 정도로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너무 괴롭고 귀찮아서 청을 들어주실 것이라는 뉘앙스입니다.
“하느님께서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루카 18,7-8)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한 군데 있습니다. 대체 무엇을 청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또한 오늘 우리는 무엇을 청하고 있습니까?
기도 지향, 미사 지향의 대부분은 가화만사성, 명문대 합격, 좋은 직장 취직, 좋은 배우자와의 만남, 승승장구, 무병장수... 등등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합니까? 한계와 결핍 투성이인 한 인간 존재가 불완전한 이 세상 안에서 살아가다보니, 자연스레 우리네 인생은 우리가 전혀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세상 든든했던 그, 영원히 나를 지켜줄 것으로 확신했던 그가 점점 약해지고 작아집니다. 결국 나를 홀로 두고 먼저 떠나갑니다. 유일한 희망이요 미래라고 여겼던 자녀가 갈팡질팡 흔들립니다.
마치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속절없이 세월이 흘러 인생의 끝자락에 서게 되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쇠잔해진 내 모습을 직면해야 합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바치는 기도 지향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우리네 인생이 그렇게 흘러갑니다. 우리가 나이들어가면서 필연적으로 직면해야 할 엄중한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청해야 하겠습니까? 집요한 과부가 청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올바른 판결이었습니다. 우리처럼 너무나 사소하고 자기중심적인 그런 청원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청원 기도가 내 위주의 청을 넘어 주님 마음에 드는 청원 기도로 성장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휘황찬란한 대상들,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영원할 것 같은 우리네 인생도 한 순간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불로장생, 불사불멸을 청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가 집요하게 청해야 하는 기도는 성령을 청하는 기도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기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동적으로 머무실 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참으로 큰 은총이 있습니다.
매일의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임마누엘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 한 가운데, 그리고 내 안에 굳건히 현존하신다는 의식 속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결핍과 모순 투성이인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우리 신앙 여정의 충실한 동반자이신 성모님께서 항상 나를 인도하게 계신다는 의식 속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인류의 역사는 ‘에너지’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초기 인류는 자연의 에너지를 활용하여 삶을 이어갔습니다. 태양, 불, 물 등의 자연 에너지를 통해 생존 기반을 다졌습니다. 이런 원시 에너지 사용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에너지였지만, 인류 발전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인류의 에너지 사용이 업그레이드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18세기 중반에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입니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석탄과 석유의 대규모 사용은 인류 사회에 급격한 변화를 불러왔습니다. 화석 연료는 공업화와 도시화를 촉진했고, 이는 인간의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환경 오염과 에너지 자원 고갈이라는 문제를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20세기에 등장한 핵에너지는 전력을 생산하는 강력한 원천이 되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원자력의 위험성과 윤리적 고민을 동반했으며, 인류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오늘날 태양열, 풍력, 수력 등 재생 에너지에 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으며, 이는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인류가 에너지를 바라보는 철학과 윤리적 태도를 재정립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에너지의 원천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한테서 왔습니다. 성경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빛이 있어라.” 하시며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전합니다. 이 빛은 에너지의 근원이자, 창조의 시작을 상징합니다. 모든 에너지는 신이 창조한 세상의 일부로, 인간이 받은 선물이자 자원의 일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에너지를 사용하고 관리하는 것은 창조 질서를 보존하고 하느님의 뜻을 존중하는 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피조물을 다스리라"라는 사명을 받고 창조 세계의 청지기 역할을 맡았습니다. 따라서 에너지를 사용하는 데도 책임감과 절제, 지혜를 요구받습니다. 화석 연료 사용으로 인한 환경 오염과 기후 변화는 청지기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결과로 볼 수 있으며, 신학적 관점에서 이는 창조의 돌봄과 사랑을 지키지 못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에너지를 과도하게 사용하는 것은 자원의 불평등한 분배와 관련이 있습니다. 많은 부유한 국가들이 과도하게 에너지를 소비하는 반면, 빈곤한 국가들은 최소한의 에너지에도 접근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학적으로 이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가르침과 배치되며, 에너지 자원도 이웃을 위한 나눔과 배려를 통해 관리되어야 함을 시사합니다.
성경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구원의 약속을 전합니다. 지속 가능한 에너지원으로 전환하는 것은 지구와 미래 세대를 위해 새 창조를 향한 책임 있는 준비로 볼 수 있습니다. 신학적 관점에서 이는 생태계의 회복에 참여하는 실천으로,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협력하는 사명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종종 ‘불’로 상징되며, 이는 하느님의 능력과 힘을 의미합니다. 에너지를 긍정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성령이 주시는 은사와 연관 지을 수 있으며, 하느님의 능력이 창조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결국 에너지를 관리하고 사용하는 방식은 신앙인으로서 창조의 청지기 역할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필요한 또 다른 에너지를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이끌어주는 에너지입니다. 이웃에 대한 배려와 관심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에너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가장 헐벗고, 가장 굶주리고, 가장 아픈 이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따뜻한 이웃’이 되어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많이 배웠던 율법 학자도,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던 사제도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알아도, 제사를 지내도 이웃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없으면 강도당한 이웃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대는 형제들을 위하여, 특히 낯선 이들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하던 다 성실히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교회 모임에서 그대의 사랑에 관하여 증언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진리의 협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난 꽃의 향기는 천리를 가지만 덕을 베풀면 향기가 만리를 간다고 합니다. 2024년의 달력도 이제 1장 남았습니다. 이웃에 대한 배려와 나눔으로 남은 1장의 달력을 가득 채우면 좋겠습니다. “잘되리라, 후하게 꾸어 주고, 자기 일을 바르게 처리하는 이! 그는 언제나 흔들리지 않으리니, 영원히 의인으로 기억되리라.”
<올바른 판결을 내리소서>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루카 18,8)
의로우신 하느님
제가 의롭다면
더욱 의롭게 하시고
제가 불의하다면
가차 없이 내치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의로우심을
저를 통해서 드러내소서
깨끗하신 하느님
제가 깨끗하다면
더욱 깨끗하게 하시고
제가 더럽다면
가차 없이 쓸어내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깨끗하심을
저를 통해서 드러내소서
자비하신 하느님
제가 자비롭다면
더욱 자비롭게 하시고
제가 매몰차다면
가차 없이 물리치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자비하심을
저를 통해서 드러내소서
온유하신 하느님
제가 온유하다면
더욱 온유하게 하시고
제가 거칠다면
가차 없이 꺾어주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온유하심을
저를 통해서 드러내소서
살리시는 하느님
제가 살린다면
제가 더욱 살리게 하시고
제가 죽인다면
가차 없이 저를 죽이소서
그리하여
당신이 살리시는 분임을
저를 통해서 드러내소서
함께하시는 하느님
제가 예 하며 따른다면
더욱 따뜻하게 품어주시고
제가 아니오 하고 거부한다면
가차 없이 저를 팽개치소서
그리하여
당신이 함께 하시는 분임을
저를 통해서 드러내소서
당신처럼 되라 하시는 하느님
제가 당신을 닮는다면
더욱 믿고 바라고 사랑해주시고
제가 당신을 지운다면
가차 없이 저를 버리소서
그리하여
당신이 모든 것임을
저를 통해서 드러내소서
오늘의 성인
스코틀랜드의 성녀 마르가리타(Margarita)
신분 : 왕비
활동지역 : 스코틀랜드(Scotland)
활동연도 : 1046-1093년
같은이름 : 마가렛, 마르가리따, 말가리다, 말가리따, 말가리타
에드워드 두트레메르 왕자와 독일 공주 아가타 사이에 태어난 그녀는 헝가리의 성왕 스테파노의 조카이다.
그녀는 헝가리에서 태어났고, 스테파노 왕의 궁중에서 자랐으며, 하스팅 전투를 피하여 스코틀랜드로 갔다.
그녀는 여기서 말콜이란 사람과 결혼했는데, 이때부터 그녀의 성덕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기도와 고행과 단식에서 철저하였고,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한 애정은 놀라웠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 만연되었던 성직 남용과 성직매매를 금지하려는 시노드를 적극 지원하였다.
또한 그녀는 남편과 함께 예술과 교육의 진흥을 위하여 적극 활동하였고,
던펨라인에 성삼위 성당을 세우는 등 교회 안팎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녀는 스코틀랜드의 수호성녀이다.
스코틀랜드의 마르가리타는그녀가 자신에 대해 자유로울 수 있었다는 점에서 참으로 해방된 여인이었다.
그녀에게는 이것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봉사하기 위한 자유를 의미했다.
마르가리타는 본래 스코틀랜드가 아니라 헝가리 출신이다.
그녀의 가족들은 정복자 윌리암으로부터 도망가다가 스코틀랜드 해안에서 파선당했다.
말콤 왕은 그들을 친절하게 대했으며 아름답고 우아한 마르가리타에게 사로잡혔다. 그들은 1070년 던펌린(Dunfe rmline)성에서 결혼했다.
말콤 왕은 선량한 사람이었지만 마치 그의 나라처럼 거칠고 무례했다.
마르가리타에 대한 말콤의 사람이 극진하여 그녀는 그의 성격을 부드럽게 하고 그의 생활을 바르게 하며 그가 덕을 갖춘 왕이 되도록 도왔다.
그는 모든 집안 일을 그녀에게 맡기고 때로는 국사 문제에까지 그녀의 조언을 구했다.
마르가리타는 예술과 교육을 장려하여 그 나라를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종교 개혁을 위해서 교회 회의를 개최하도록 촉구하고 사제들과 신자들 가운데 있는 공통된 종교적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는 토론에도 직접 참여했다.
그것은 독성 또는 불순한 결혼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여러 개의 교회도 세웠다.
마르가리타는 왕비인 동시에 어머니였다. 그녀와 말콤 사이에는 여섯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이 있었다.
마르가리타는 이들의 종교 교육은 물론 다른 공부까지도 직접 지도 감독했다.
그녀는 집안 일과 나라 일로 대단히 바빴지만 세상사와는 멀리 떨어져 살았다. 그녀의 사생활은 엄격했다.
그녀는 성서를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녀는 신심 생활을 할 수 있는 시간을 갖기 위하여 검소한 식사와 짧은 수면을 취했다.
그녀와 말콤은 두 번의 재계를 했는데 한 번은 부활 전에 한 번은 성탄 전에 했다.
이 기간 동안에 그들은 언제나 한밤중에 일어나서 미사에 참여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가난한 사람 여섯 명의 발을 씻어 주고 그들에게 자선을 베풀었다.
그녀는 공공 장소에서도 언제나 거지들에게 둘러싸였고 그들을 절대로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홉 명의 고아와 24명의 어른을 먼저 먹이지 않고는 절대로 식탁에 앉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1093년에 윌리암 푸퍼스 왕이 알위크 성을 불시에 공격하였을 때 말콤왕과 그의 장남 에드워드가 살해되었다.
이미 죽음의 병상에 누워 있던 마르가리타는 남편이 살해된 지 4일 후에 세상을 떠났다.
애덕은 두 가지 길이 있는데 ’깨꿋한 길’과 ’지저분한 길’이다.
’깨끗한 길’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단체에 돈이나 옷등을 희사하는 것이다.
’지저분한 길’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직접 봉사함으로서 자기 자신의 손을 더럽게 만드는 것이다.
마르가리타의 두드러진 덕행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다.
마르가리타는 물질적 선물을 줄 때도 매우 너그러웠지만 병자들을 방문하여 자기 손으로 그들을 직접 간호해 주기도 했다.
그녀와 그의 남편은 대림절과 사순절에 무릎을 꿇고 고아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했다.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지저분한 애덕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마르가리타의 이야기에는 지헤의 소금으로 간이 배어 있다.
그녀가 침묵할 때에는 그녀의 침묵이 좋은 생각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녀의 훌륭한 행동은 그녀의 착실한 성격과 너무나도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에그녀가 태어날 때부터 덕을 갖춘 생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터고트, 마르가리타의 고해 신부)
성녀 제르트루다(대)(Gertrude the Great)
활동년도 : 1256-1302년
신분 : 수녀, 신비가, 저술가
지역 : 헬프타(Helfta)
같은 이름 : 거트루드, 게르투르다, 게르투르데스, 게르투르디스, 게르트루다, 제르뜨루다, 제르뜨루디스, 제르트루디스, 젤뚜르다, 젤뜨루다, 젤투르다, 젤트루다, 제르투르다
이 성녀는 흔히 "대" 제르뚜루다라 불린다. 다섯 살 때에 그녀는 삭소니의 헬프타 수녀원에 맡겨졌고, 그곳에서 자랐으며, 이 수녀원을 떠난 적이 전혀 없는 듯하다.
여기서 그녀는 성녀 멕틸다의 제자이자 절친한 벗이 되었다.
그녀는 여기서 특별한 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공동체 안에서 무슨 직책은 맡지 않았다.
그녀는 하루를 거의 관상생활로 보냈는데, 25세 때에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환시를 보았다.
그 때부터 제르뜨루다는 세속적인 학문에 흥미를 잃고 오로지 성서에만 관심을 쏟았으며,교부들의 저서와 전례에 정신을 집중하였다.
또 그녀의 생활은 영적 체험의 연속이었으며,이 모든 것을 한데 모아둔 것이 소위 "제르두르다와 멕틸다의 묵시"라 부르는 전집이다.
이 책은 중세 신비신학과 신비주의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으며, 예수 성심께 대한 제르뚜르다의 놀라운 신심 때문에 후대에 와서는 더욱 주목을 받았다.
그녀는 헬프타에서 운명하였으나, 공식적으로 시성된 사실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 글레멘스 12세는 전교회가 그녀의 축일을 지내도록 지시하였고, 서인도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는다.
성녀 제르트루다는 13세기의 위대한 신비가 중의 한 사람이다.
성녀 맥틸다(Mechtild)와 더불어 그녀는 혼인의 신비라 부르는 깊은 영성을 살았다.
즉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의 신부로 여기는 것이다.
그녀의 영성 생활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성심에 깊은 인격적 일치를 이루며 자신을 삼위일체의 생명 그 자체 안으로 이끌어 갔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적인 신심이 결코 아니었다.
제르트루다는 전례의 리듬에 따라 살았으며 거기서 그리스도를 발견한 것이다.
전례와 성서 안에서 그녀는 자신의 신심을 표현하고 풍요롭게 할 수 있는 주제와 표상을 발견했다.
그녀의 개인 기도와 전례 사이에는 아무런 충돌이 없었다.
제르트루다의 생애는 그리스도인 생활이 기도임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표지이다.
개인적 기도와 전례적 기도,일상적인 기도이든 신비적인 기도이든 언제나 하느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기도가 그리스도인 생활이다.
"주님, 당신은 하느님과 같으신 당신의 마음, 당신 천주성의 은밀한 보화를 내 모든 행복의 원천이 되도록 너무나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에게 주시며 당신의 은밀한 우정에로 나를 받아들이셨나이다.
때로는 당신의 마음을 자유로이 나누어 주시고 때로는 우리 서로 간의 특별한 당신의 마음을 자유로이 나누어 주시고 때로는 우리 서로간의 특별한 상호 우정 표시로 주셨나이다.
당신은 너무나도 자주 당신의 사랑어린 애무로써 내 영혼을 녹여 주셨기에, 내가 만일 당신의 넘쳐 흐르는 은혜를 몰랐다면 나는 너무 놀라서 당신의 복되신 모친도 그렇게 놀라운 애정과 사랑의 표시를 받기 위해서 선택된 것이라고 말할 지경이었습니다."(성녀 제르투르다 생애와 계시, 2편 23장)
성녀 멕틸다 (Mechtildis)
활동년도 : +1298년
신분 : 수녀, 신비가
지역 : 헬프타(Helfta)
같은 이름 : 마띨다, 마띨디스, 마틸다, 마틸디스, 맥띨다, 맥틸다, 메히틸다, 메히틸디스, 멕띨다
성녀 멕틸다는 로쓰도르프의 수녀가 되었고, 처음에는 어린이들의 교육을 맡았다.
1258년, 수녀들이 삭소니아의 헬프타로 옮겨가서 3년이 지난 후에 성녀 제르뚜르다(대)가 수녀원 교육을 받으러 들어왔는데, 이때 그녀는 겨우 다섯 살이었다.
그러므로 성녀 제르뚜루다를 장성할 때까지 돌봐주었고, 뛰어난 신비가로 키운 인물이며, 자기 자신도 "그리스도의 나이팅겔"이 되어 그녀와 같은 신비적인 길을 걸었던 인물이다.
그녀의 제자인 제르뜨루다가 자신의 신비체험을 써내려갈 때, 처음에는 이것을 경고하였으나, 주님께서 멕틸다의 마음에도 감도하셨기에 위대한 책이 나오게 된 것이다.
따라서 멕틸다 자신도 영적인 체험을 기록했는데, 이것이 "성녀 멕틸다의 계시록" 혹은 "특별한 은혜에 관한 책"으로 불리운다.
성녀 멕틸다는 공식적으로 시성된 바 없으나, 그 때문에 그녀에 대한 신심은 줄어들지 않았다.
복자 그라시아 (Gratia)
활동년도 : +1508년
신분 : 수사
지역 : 카타로(Cattaro)
같은 이름 : 그라씨아, 그라티아
그라티아(또는 그라시아)는 달마티아(Dalmatia)의 카타로 출신 상인으로 30세까지 바다를 항해하며 장사를 하였다. 어느 날 우연하게 베네치아(Venezia)의 성당에 이르러 어느 아우구스티누스 회원의 설교에 감명을 받고서는 수도자가 되었다. 그는 파도바(Padova) 교외의 몬테 오르토노(Monte Ortono)에서 평수사로 활동하였다. 그는 주로 정원지기로 일했는데 그의 성덕이 뛰어나 모든 수도자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가 베네치아의 성 크리스토포루스(Christophorus) 수도원에 살 때에는 신비스런 빛이 그의 방을 늘 비추었고, 그의 간구로 많은 기적들이 일어났다고 한다. 71세 때에 그는 중병에 걸려 운명하였다. 그에 대한 공경은 1889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승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