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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시학/ 2019년 봄호>
업(業)은 녹슨 칼날을 좋아한다/ 백이운
악수를 하는 족족 빚 받으러 온 손
웃으며 비수를 꽂는 그런 때도 있었던 거다
업인들 그러고 싶었겠나, 녹슨 칼날 탓이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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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식/ 김호길
내 생애 처음으로 이지러지는 달을 보네
월식이 끝나가도 붉은 상처는 그대로네
다 먹혀 없어졌지만 오뚝한 그 상처를 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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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잔치/ 박정호
허공을 움켜쥐고 기어오르는 넝쿨손
그런 지경으로 마악 나서 아장아장 내딛는 행보
그것이 시작이었다
다만 선한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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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유사(雪嶽遺事)/ 홍성란
바구니 쥐 드나들 듯 백담사 만해기념관에 불청객이 많았으니
한때 기념관 문 앞에 ‘쥐 들어오지 마세요’라는 글귀가 나붙었다 경
고가 뜨자 쥐들이 사라졌다는데 “객식구 차별하지 마라 쥐도 자연 아
니냐” 산감(山監) 말씀에 글귀가 도망치자 쥐들 다시 출몰한다는데
겨드랑 간지러울까 귀 시끄러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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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문자답(自問自答)/ 김제현
바르게 살았다고
반드시 옳은 삶이며
열심히 살았다고
그것이 잘 산 삶이랴
세상에 한 일이 없다고
놀기만 하였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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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대떡 에피그램/ 윤금초
#1
어라, 청진동 해장국집 빈대떡이 사라졌네.
모둠전에 술국 끓일 야간 일손 빌 수 없어
주인장 혼자 홀 서빙··· 빈대떡을 못 부친다.
#2
‘너무 많은 영세 통닭집, 한국 경제 위협한다.*’
골목 간판 불 꺼진 그날 후유 소리 담을 넘고
얕은 꾀 스텝이 꼬여 어라, 숨찬 목줄 조여 온다.
#3
소득 주도 알량한 바람 턱밑까지 휘몰아친다.
보이지 않는 손아귀에 덜미 잡힌 골골샅샅
허풍 센 일자리 창출에 어라, 억장 다 무너진다.
* 2013년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이 한국 경제를 예고한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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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서(調書)/ 염창권
숨어 있던 치욕이 다른 치욕을 겁탈했다
눈구멍을 쑤신 듯 붉어진 창틀 밑에서 죽은 나무 건너가는 바람처럼
쏟아질 때 잠자코 저울을 가리키던 기록관이,
여기에 올려놓는 거야
너도 그걸 잘 알지
그가 뚫어둔 구멍으로 세상이 흘러들었다
분해된 거울 앞에서 과거를 짜 맞출 때
내 입이
배수관처럼 뱉어낸
저,
눈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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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어버리다/ 임성구
나를 따라다니던 어둠을 내다 버린다
화창하게 좋은 날 울다 그친 꽃 바라보며
맘 놓고 밀어버린다, 숨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층층이 자라나던 지독한 독(毒) 쏟아내고
거친 감정들까지 따뜻하게 지나가면
무결점 가수처럼 와서
목청 붉은 노래하겠다
열창을 받아먹고 날아가는 청둥오리야
바람 얼굴 다 만져보고 날 만나러 오느라
만 볼트 박장대소 한 잔
불콰하게 마셔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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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손영희
마침내 혼자가 된 언니와 밥을 먹는다
눈치 빠르게 밥은 참 조용하기도 하다
말문을 트게 하려고 밥알이 울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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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에꽃 피었습니다/ 김계정
황금 햇살 그늘 밟고 시린 바람 당도하면
홀로는 설 수 없어 기대어선 유리창
눈물의 온기를 거둬 성에꽃 피웁니다
한나절도 채 견디지 못한 무너진 중심에서
안과 밖 다른 얼굴로 경계는 선명한데
한 뼘씩 늘어난 영토 위태로운 물의 뼈대
태생이 물이라며 제 흔적 지울 때까지
빗금 그은 자리에 물로 다시 만날 때까지
가까이 오지는 마라 곁을 주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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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블라우스 소녀/ 김환수
노고단* 산행 길에 눈인사하는 원추리 꽃
단발머리 앳된 소녀 환한 얼굴 떠오르고
먼 능선 혀 빼문 원추리, 첫사랑 블라우스다.
진초록도 더위 지쳐 솔개그늘 찾아들고
하고많은 의류 매장 문을 연 저 여름 산
볼수록, 자꾸 볼수록 그녀에게 빠져든다.
샛노란 블라우스 차려입은 원추리 보며
몇 날 며칠 옥벼르다 침 발라 쓴 긴 손 편지
여우비 눈물 훔친 날, 하얀 손에 건네준다.
* 노고단: 원추리 꽃의 국내 최대 군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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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창/ 배우식
나무와
대패 타고
아버지가 날아간다.
유리도
반짝이며
그 뒤를 따라간다.
아버진,
하늘 가서도 영창 다는 목수다.
사람들
하나하나
또렷하게 보고 싶은지
벽 같은
밤하늘에
창문 내고 별을 켠다.
저 별빛,
쏟아져 내리는 아버지의 창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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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팔꽃이 나팔꽃에게/ 김양희
지하철에서 엄마가
아이에게 이른다
기둥 꼭 잡고 있어
사람들에게 쓸려나가
휩쓸고 지나가는 것
큰바람만 아니지
끝없이 밀려오고
밀려가는 사람 속에
나팔꽃 새순처럼
기둥에 매달린 아이
자동문 열릴 때마다
더 꼭 매달리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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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불이 켜졌어요/ 이중원
바로 뒤에 닥쳐오는 빨간 등에 떠밀려서
벨트도 매지 못하고 비좁은 틈새 사이
위태한 곡예라는 걸 알면서도 달리는 것
잠깐은 자동차를 길가에 세워두고
지는 낙엽 바라보며 심호흡하고 싶어도
디지털 시계의 숫자 따라가기 바쁜 것
늘 시간에 빚을 지고 앞만 보고 달려가다
바로 옆의 소중한 것 다 놓치고 마는 것
달리는 차량들만 있다, 인생이란 길 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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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마트/ 우도환
오가는 이웃들과
행복을 나누자고
따뜻한 마음으로
저 가게를 열었겠지
주인은 어디 갔을까
세 놓는다
써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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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시학/ 2019년 여름호>
선흘리 먼물깍/ 오승철
그나저나 동백동산 그 너먼 가지 마라
4·3땅 곶자왈 길 물허벅 넘던 그 길
아직도
출렁거리는
내 등짝의 먼물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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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역설/ 문무학
틈도 없이 붙어 있어 그대를 잃었습니다
짬도 없이 같이 있어 그대를 잊었습니다
그대를 찾기 위해서 그대 곁을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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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최영효
봄 오면 진달래 피리
응달마다 손 흔들리
언 산에 뿌리 내리고 산불의 눈을 맺어
진달래 누리에 피리
함께 피어 일어서리
벨벳은 체코에 오렌지는 우크라이나에
재스민은 튀니지에 튤립은 키르키스스탄에
겨울은 지나가리니
피어서 얼싸 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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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 오해/ 이소영
“사랑해”를 잘못 발음해 “사람해” 했다
그래 너, 내 사람, 내 사람 하라구
발음을 잘못한 게 아니야
마음이 튀어나온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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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심사 구경하는 날 비가 왔다/ 이석구
시도 때도 없이
꽃가루를
어루만져
바위에 달라붙다
손가락에 엉겨 붙다
자목련 맨 뒷장에다
빗방울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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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앞에서/ 박기섭
이 몹쓸 군지러움을
그냥 확,
구겨 던져?
아니면 발로 툭 차
처박아,
수챗구멍에?
환장할 때죽음이여,
피는 족족
죽는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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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의 동토/ 이달균
북극곰은
뼈만 남은
고래를 먹습니다
나도
북극곰처럼
여위어 갑니다
그렇게
얼음 성문이
닫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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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봄맛/ 최오균
1.
이슬비 연못 위에 동글동글 동그라미
늦잠 깬 버들붕어 입 내밀고 뽀글뽀글
종종종 노란 병아리 삐악삐악 노래해.
2.
‘이랴~’ 나아가는 소
‘워워~’하면 이내 멈춰
비알진 감자밭이 두 마디면 다 일궈져
그 순한 감자의 맛을 이제 조금 알겠다.
3.
동박새 꽃술 새로 새 꿀맛 즐기는 새
낌새챈 떠돌이 새 억새꽃 핀 새재 넘고
남새밭 노새와 버새 봄 냄새를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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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일/ 이태순
큰고모가 두고 온 그 딸이 찾아왔다
뒤란 풀잎을 깔고 둘이 앉아있었다
토란잎 큰 잎사귀에 두 얼굴이 가려졌다
뒷문 문틈 사이로 엿보던 그때 뒤란
큰고모가 들고 온 간고등어 한 손이
짜디짠 피멍이 들어 포개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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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가득/ 홍사성
어느 해 봄
춘천 가다 쳐다본
하늘이었다
푸른 하늘 어디에도 구름 한 점 안 보였다
그 넓은
하늘 전체가
어떤 얼굴로만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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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의 시간/ 구애영
만삭의 몸을 안고 주위를 살피네
7월이면 통가 해역에 모여드는 혹등고래
먼저 간 어미 흔적으로 나만의 방 찾아보네
천적 피한 산호섬, 별들도 산란을 하네
뜨겁게 젖 물리고 자장가 들려주고
점점 더 노을의 갈피도 수묵처럼 엷어지네
등을 짓누르던 그 시간을 보내고 나니
포유(哺乳)의 생애가 한여름 밤 꿈은 아니리
솟구친 은빛 포말들 빈 새벽을 깨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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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유헌
절에 가서 절을 했다
나절을 절을 했다
절이 곧 절이요
절도 곧 절인 것을
절 낮춰 절절히 절하니
절도 따라 절 낮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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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시학/ 2019년 가을호>
삼립크림빵/ 이승은
감미가 많은 쪽을 기꺼이 양보하고
조금 남은 것을 아쉽게 혀로 핥던,
어린 날 삼립크림빵, 핏줄 속을 건너온다
머리에 쑥물 오른 남매가 마주앉아
살가운 이야기에 크림 듬뿍 발라준다
강파른 세상의 아침, 그 윗목에 마주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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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귀촉도/ 이승현
가슴으로 키운 새가 먼 길을 가려나 보다
날갯짓 겨운 소리가 마른 창을 치고 있다
날려고, 날려고 해도 끝내 날지도 못하면서
피멍 든 그대 깃털을 내 다시 안는다면
청동빛 녹슨 마음에 꽃 다시 피어질까
보듬고 또 보듬어도 풀리지 않을 저 눈빛
설운 맛 깊을수록 그대 노래 구슬프리
깃 짓는 파동만큼 전해오는 이 아련함
가슴속 조롱을 열고 그대 깃을 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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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와트/ 박해성
한 천년 가부좌하고 나무뿌리 밑에 숨어
죽은 척,
무념무상 나무인 척 살아남은
잘 봐라, 우리의 신은 시커먼 돌덩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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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강현덕
이 호수도 예전엔 조그만 웅덩이였으리
어쩌다 발을 헛디뎌 주저앉는 바람에
두어 번 빗물 고이고 나뭇잎 떠다녔으리
이 호수도 나처럼 후회하고 있으리
어쩌다 널 헛디뎌 여기 빠져 있는지
조그만 웅덩이였을 때 흙 몇 줌 다져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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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자차/ 노창수
선배와 그의 제자 만나 회포를 주고 받고
비 내리는 찻집 창가 신맛 사람 흉을 본다
그들로 뭉친 스트레스 달게 마시지만 씁쓸하다
한때는 음료 넘쳐 찬장 깊이 잊고 묵힌
유리병 속 굳은 액체 하수구에 버린다
지나간 앙금 감정이 혀에 붙은 그 이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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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신필영
일등이 되겠다고
생을 걸지 말거라,
들풀 같은 이웃들의 상처를 품어가며
더불어 바다에 닿는
강물이면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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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동화/ 오종문
그 사이 아이들 크고 어른은 늙어가고
누군가 현기증 나게 저편에서 걸어온다
우물 옆 한 그루 나무
몰래 훔친,
빈집 시간
오래전 차압 당한 청춘을 해제하고
잘못된 모든 길을 처음으로 되돌린다
다 닳은 흑백필름 속
붉은 동백,
짧은 봄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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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아줌마/ 양점숙
사근대는 무릎의 아우성을 걷어들고
전동차 문 앞에서 어설픈 줄을 섰다
손님이 내리기도 전 재빨리 들어갔다
코끝을 내려 보며 점잖게 말했었지
늙어도 엄마처럼 살지는 않을 거야
오! 순간 부끄러웠다 아픈 다리 핑계 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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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孤兒)/ 김현우
이 분마저 고아였구나
우린 모두 고아였거니
구순도 훨씬 지난
호호백발 이 할머니
지르는 그 소리가 연방
거저 ‘엄마!’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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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춧구멍/ 김강호
잠근 가슴 허투루
열어주지 않겠다며
언약처럼 단추를
물고 있는 단단한 입
한평생
제자리이기를
잘못 꿰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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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하모니카/ 김차순
그녀는
하모니카를
갖고 싶다고 했다
멋지게
‘마농의 샘’을
연주하고 싶었을까
세월 속
가난한 마음
그렇게 흘러갔다
이름 대신
그대 얼굴
새겨 놓은 하모니카
간절한
눈빛만큼
떨리는 혀끝에서
아득한
바람소리만
오래도록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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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려주세요/ 박희정
당신을 마주하기에는 준비가 덜 되었어요
밖으로 서성대는 발길, 보채지 말아주세요
회전문 안과 밖 사이는 굴절로 가득해요
귀 얇은 당신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아요
하루에도 수십 번 밀고 당기는 언저리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심장을 데우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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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영도 시편 20- 깡깡이 아지매/ 손증호
쇠에서 난 녹이 쇠 온통 먹기 전에
대풍포 깡깡이마을 깡깡이 아지매들
그 쇳녹 벗겨내느라 귀도 깜깜 눈도 깜깜
난청에 이명이 겹쳐 불면증에 시달려도
녹슨 배 두들기다 억센 근력 키웠는지
깡깡깡 소리에 맞춰 영도다리도 번쩍 드네
영도다리 번쩍 드네, 깡깡이 아지매들
밧줄에 매인 밥줄 뱃전에 꽁꽁 묶고
온 삭신 들쑤신대도 억척으로 버텨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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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방*/ 이교상
하루 숙박 12,000원이고, 열쇠가 필요하면 보증금 10,000원이고, 창
문이 있는 방은 1,000원 더 내야하고
가로 1.6m, 세로 2m, 곱하면 3.3㎡, 국토교통부에서 정한 1인 가구
최소 주거면적 14㎡에 미치지 못하는 방. 사람 1명이 대(大)자로 누울 수
있는 면적인 1평(3.3㎡)도 안 되는 섬들이 골목에 둥둥 떠다니고 있는
데···
사라진
저녁의 삶이 주도해
성장시킨
저, 밤
* 창문이 없는 고시원의 방.(이 작품은 기사(記事)를 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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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낭화 마을/ 권영희
문 닫고 살지 마라
이웃들도 함께이듯
수레국화 양귀비
금낭화가 선 땅에도
금 긋고
살지 말라고
풀꽃들이
더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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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치동/ 임채성
여기선 개들마저 혀꼬부랑 소리로 짖네
새벽부터 자정 넘게 노랑버스 좇고 쫓다
다국적 친구들 앞에 제 주인 자랑하듯
더 높이 서기 위해 키를 늘인 아파트들
24시간 편의점 같은 학원 불빛 깜박일 때
가로수 가슴팍에도 등급표가 내걸리고
앞서간 발자국을 따라잡아 지우려는 듯
한 번에 두세 걸음 축지법을 쓰는 초침
대치맘* 구둣발소리 시계바늘 끌고 가네
* ‘대치동 엄마’를 일컫는 신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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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무/ 박방희
하늘로 두 팔 쳐든
성스런 겨울나무
검정색 미사복의
한 무리 까마귀들이
북두에
머리를 두고
장엄미사 중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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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자배기 너름새/ 윤금초
햇무리 그예 설핏하고, 서녘 하늘 눌눌하다.
금방 북새라도 필 양으로 당단풍 꽃물 들일 수작 하마 접을 무렵 쑥
부쟁이 가녀린 꽃떨기 마구발방 흔들고, 뒤흔들고···. 산그늘 앞장세운
아기 손 바람결이 무료한 잎사귀 간질이고 간질인다. 무덤새 무덤 곁을
잔걸음 종종 물러난 뒤 잎잎이 줄느런한 이슬 달빛 꿴 채 줄광대 발림
에 젖는 가을밤.
이윽고 등 떠밀린 구름, 육자배기 너름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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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시학/ 2019년 겨울호>
촛불의 미학/ 이지엽
불은 타오르기 위해
끊임없이 요구한다
꾸준한 연료의 공급
헛된 욕망 버무린다
끝없이 속에서 타는 불, 남자의 불이다
꺼질 듯 흔들리는 불
절대 얕보지 마라
타버린 재 속에서 불씨 다시 모은다
위장의 달콤한 유혹, 여자의 불이다
같은 불이면서도
촛불은 따로 탄다
다 닳아질 때까지 스스로 숨죽인다
사람이 고독할 수 있는 건
혼자 타는 저 힘 때문
불이 꿈꾼 몽상의 시학
거기 가 닿을 절벽 있다
삼동의 긴 적막, 속 깊은 눈사람들
어두운 마음 한 켠에
촛불 하나 켜두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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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쥐구멍 없나요?/ 노영임
젊어 뵈는데 어떻게 되요?
저는 84입니다
어머나, 난 82학번!
우리 엇비슷하네요
그게 저
그게 아니라
저는 84년생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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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금 산조/ 박권숙
가다가 가다 듣는 시월 상달 가다 듣는
억새꽃 무리를 몰고 간월재 가다 듣는
은발의 가을발자국 해금을 켜고 있다
바람의 활을 당겨 능선이 우는 소리
능선의 현을 골라 바람이 우는 소리
내 마음 깊은 적소에 가다가 가다 듣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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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게 고(考)/ 박시교
온종일 모은 폐지 한 리어카 이천오백원
몇 십억 아파트 깔고 사는
호사와는 견줄 수 없다지만
경건한 그 삶의 무게 결코 가볍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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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억새꽃들/ 이우걸
저무는 하늘을 휘젓는 갈필이다
박토를 물고 견뎌온 민초들의 상소다
쫓기며 살아온 생의
마지막 절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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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의 비가/ 김일연
늙은 독수리는 발목이 묶였건만
아무리 세월 가도 마음 길들지 않고
첫새벽 이슬 내린 곳에 저녁이슬 내리지
대평원 어디엔가 산다는 야생마처럼
막막한 마음 어디 숨어있는 사랑도
구름을 뜯어 지은 집 무덤으로 드는 밤
백골의 말 머리들 모래 위에 뒹굴고
안고 있는 당신도 찬바람에 흩어지면
한숨은 가슴을 찢고 마두금을 울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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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심/ 김복근
살다보면 붉은 피 정수리로 솟아올라
여유로운 구름 보며 거위걸음 걸어본다
느린 맥 밀고 당기며 쉬어가는 고갯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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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초- 동두천/ 정용국
이곳이 어디신가 세계 최강 캠프 케이시
창말에서 태어나신 할아버지 묻혀 계신 곳 한량으로 사시다가 선산
으로 가셨지만 유혼은 불행하게도 병영 연금 중이시다 세계를 쥐락펴
락 최신 무기 전시장엔 들러리 한국군이 경계근무를 선다지 벌초 때
도 신고해야만 겨우 갈 수 있는 곳 악의 축이 누구인지 가늠할 순 없지
만 이름도 눈물겹구나 맹방의 은혜라니 동두천 주름잡던 팔난봉 할아
버진 부대 안에 갇혀있는 수인이 되셨으니 한 성깔 누르느라 울화통
이 터지실라 최고의 호위병이 지켜주고 계신다며 헛기침 참으시는 큰
형님 뒷모습에 창말 고운 노을도 무젖어 시들었네
절하고 돌아서는 발길이 해마다 더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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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의 레시피/ 강경화
엄마의 레시피
모든 양념은 적당히
도무지 가늠되지 않아
늘 과하거나 늘 부족한
내게는
적당히가 안 되는
그대라는
레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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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새장/ 선안영
우리, 우리가 되어
서로를 가두었던가
뼈 한 벌이 나가고
휘어져 열린 문
사랑의 꽃다발이 시들며
고요가 만삭인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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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서/ 김미정
누구는 간다 하고
누구는 온다 하고
입추와 백로 사이
지고 피는 울음 꽃
귀뚜리 애끊는 소리
소식 끝에 매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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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일/ 김남규
잠자리를 나누는 일
서로의 방을 지키는 일
얼마나 깊이 안아야
당신을 가질 수 있나
당신을
미워할 것이네
발가벗은 마음으로
가슴에 가슴이 닿으면
위로될 줄 알았으나
찌르는 일 가두는 일
무난하게 섞이는 일
서로를
함부로 탐하네
각자 알아서
쏟아지네
**********
째보* 선창/ 조성문
1.
비린내 땀마저 배는 옴팡진 자드락 길
거저 준 게 아니란다 헐해서도 넘쳐나서도
선창가 젓국 달이는
오늘따라 코 지른다
2.
소금쩍 버짐 피듯 깡다리** 닮은 사람들
하루도 비손이란다
솟대 같은 옛 굴뚝 너머
흐너진 막돌의 담장 해넘이도 시울 붉다
3.
다 떠난 곰보 · 빡보*** · 째보
저 앞바다 목 놓던 곳
제삿날이 한날이란다 그예 그만 못 돌아와서
하늘 녘 박힌 그믐달 사금파리로 빛난 그날
* 언청이를 이르는 말
** 조기의 새끼를 의미하는 방언.
*** 얼굴이 얽은 사람을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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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그림 찾기- 온금동(溫錦洞)/ 박성민
저녁 무렵 달동네 그림이 보이나요?
맞닿은 지붕에서 신신파스 찾으세요.
계단은 아코디언처럼
늘어났다 줄지요.
흔들리는 전깃줄을 실뜨기 하는 바람
텅 빈 적금통장 잔고 같은 저녁노을
턱을 벤 저녁노을엔
면도기가 숨어있죠.
웅크린 무릎 사이 빠져나간 한숨을
당신은 찾았나요? 하수구에 빠진 달과
껌처럼 구두에 붙어
늘어지던 절망을.
담벼락에 기대 울던 첫사랑이 보이나요?
시린 손 비비면서 귀가하는 사내 위에
초저녁 별들을 떠먹는
숟가락을 찾아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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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목포역에서/ 유헌
왁자한 사투리를
칸칸마다 싣고 와
어둠 속에 풀어놓고 줄행랑치는 통일호
막차는 가고 없어도
사람은 거기 있다
엎어진 고무신처럼
서럽게 엎드린 역
퐁당동* 퐁당동 용당동 그곳에 가면
지금도 물소리가 들린다,
잊혀진 역사(驛舍)에서
* 바다를 매립해 조성한 목포 용당동의 별칭. 한때 상습 침수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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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 최보윤
새들도 수만의 하늘과 헤어진다
바람이 불어올 적 다정만 바라며
방안에 엎질러진 몸, 너는 너로써 가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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