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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 5:27~32
27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30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새로운 질서를 가져오신 예수님 5:33~39
33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3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35 그러나 그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36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3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 쓰게 되리라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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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예수님이 세관에 있는 레위를 부르시니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금식하지 않는다고 비방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음을 밝히시며 혼인집, 새 옷 조각, 새 포도주 비유를 드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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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7-32절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
예수님이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부르셨습니다. 당시에 매국노 취급을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돈은 있었지만 유대사회에서는 죄인중의 죄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과는 함께 식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를 제자로 불러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따졌습니다. 그때 주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고 하셨습니다.(32)
33-39절 신랑과 함께 하는 잔치집 손님들
세례요한은 금식과 절제로 회개를 선포했지만 예수님은 함께 식사하며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때문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너무 먹고 즐기기만 한다고 비난을 들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제자들을 변호하시며 이들은 잔치집에서 신랑과 함께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세상에는 용서와 구원의 잔치가 열렸습니다. 누구든 어떤 죄인이든 주님은 만져주시고 치료해주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 일을 함께 할 일꾼을 찾으십니다. 베드로와 마태(레위)를 부르신 주님은 오늘 우리도 부르십니다. 나와 함께 이 땅의 모든 죄인들을 용서의 잔치로 초대하자.
우리 모두 베드로처럼 레위처럼 즉시 순종하지 않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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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27-32절 죄를 고치기 위해 죄인을 가까이하십니다. 당시 세리는 모든 사람이 상종하길 기피하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제국에 부역하는 민족의 반역자였고, 늘 이방인과 접촉해야 하는 부정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리 레위를 부르시고 그의 동료들과 어울려 식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파격적인 환대가 그들로 하여금 죄를 돌이키게 했습니다. 낙인과 배척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결과였습니다. 비난의 칼날을 휘두르면 죄인의 마음을 더 얼어붙게 할 뿐입니다. 큰 죄인일수록 오히려 긍휼히 여기며 가까이하신 예수님처럼, 우리가 따스한 품으로 그들을 품을 때 그들의 굳은 마음이 부드러워질 것입니다.
36-39절 옛 시대와 전혀 다른, 그래서 공존할 수 없는 새 시대를 여셨습니다. 옛 시대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죄인을 낙인찍어 혐오의 눈으로 바라보는 시대이고, 새 시대는 예수님처럼 사랑과 자비와 환대의 눈으로 바라보는 시대입니다. 옛 시대와 예수님이 여신 새 시대의 차이는 ‘시간의 다름’이 아니라 ‘시각의 다름’입니다. 어떤 시각을 가졌느냐에 따라 젊은 사람이 옛 시대에 속할 수 있고, 나이 든 사람이 새 시대에 속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시대에 속할지는 우리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
내게주시는교훈은무엇입니까?
28절 예수님의 잔치에 참여하려면 예수님의 환대에 회개로 응답해야 합니다. 레위도 예수님이 부르셨을 때 부정하고 부패한 세리의 삶을 버렸기에 기쁨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죄로 물든 지난 삶을 청산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순 없습니다. 나를 환대하신 예수님께 부끄러운 점이 남아 있다면 어서 버리십시오.
33-35절 예수님이 계신 곳에 금식이 그치고 잔치가 열립니다. 금식하며 바라던 바가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용서와 치유와 환대로 우리 삶을 기쁨과 감사의 연회장으로 바꾸십니다. 그러나 금식하고 기도하며 바라보아야 할 곳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자비가 필요한 곳, 미움과 차별이 여전한 영역입니다. 용서와 환대와 평화가 있는 곳에서는 잔치를 여십시오. 그러나 증오와 배척과 다툼이 있는 곳을 위해 금식하십시오.
기도
옛 시대의 질서를 벗어나 예수님이 여신 새 시대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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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5:27~32)
세상은 사람을 차별하지만, 예수님은 차별 없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당시 유대인은 로마의 세금을 징수하며 강탈하던 세리를 혐오하고, 죄인과 동등하게 취급했습니다.
예수님은 멸시받던 세리 레위(마태)를 제자로 부르시고 그의 집에서 식사를 나누며 교제하십니다.
세리를 죄인으로 여기는 것은 바리새인들이나 예수님이나 같았습니다.
그러나 죄인이기에 멀리한다는 것이 바리새인들의 입장이고, 죄인이기에 회개를 통해 새사람이 되게
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입장이었습니다.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죽어 마땅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가능성 있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도 합니다. 믿음 앞에는 모두가 평등합니다.
예수님의 관점으로 본다면, 모든 사람은 긍휼이 필요한 구원의 대상입니다.
- 세리를 향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시각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예수님의 관점으로 사람을 보기 시작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5:33~39)
유대인의 3대 경건 생활은 기도, 금식, 구제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고 먹고 마시는 것을 비난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 시기의 적절성과 관련해서 세 가지 비유를 드십니다. 신랑(예수님)과 함께 있는
혼인집 손님을 예로 드시며, 새 옷(복음)을 낡은 옷(유대교 전통)에 붙이지 말아야 함과
새 포도주(복음)를 낡은 가죽 부대(유대교 전통)에 넣지 말아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자유와 생명과 기쁨이 넘치는 새 시대가 왔습니다.
생명력 넘치는 복음을 받기 위해서는 낡은 전통과 위선적인 행위를 버려야 합니다.
형식적인 금식과 기도보다 중요한 것이 복음의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 예수님이 자신을 혼인집의 신랑으로 비유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신앙생활에서 버려야 할 위선적인 모습은 무엇인가요?
오늘의 기도
다른 사람에게서는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는 관심과 사랑의 시선으로 저를 봐 주시는 주님,
한 번도 마른 적 없는 주님의 신실한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그 사랑을 마음에 채워서 오늘 만나는 모든 이에게 온전히 흘려보내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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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예수님 안에서 변화된 삶❞
❚ 은혜의 복을 누리는 변화된 삶을 위해서는 예수님과 날마다 동행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 인생의 방향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27~32절).
예수님은 세금을 징수하는 세리인 레위라는 사람을 주목하여 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27절).. 동족으로부터 멸시받던 직업을 가지고 있었던 레위를 예수님께서는 관심 있게 지켜보시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이는 곧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32절)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사명이셨습니다. 이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28절).. 그리고는 그동안 자기 배만 채우기에 급급했던 레위는 예수님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집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에 대하여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분개하여 비방합니다. 그들은 죄인은 그저 멀리해야만 하는 존재로 그들을 바라보았다면, 예수님은 죄인을 그대로 놔두어서는 안 되고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셨습니다. 어떤 관점으로 사람을 그리고 현실의 문제를 바라보느냐는 엄청난 차이를 보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볼품없고, 비천한 존재라 할지라도 주님의 손안에서는 존귀한 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무엇보다 부르심에 순종할 때, 말씀이 나의 삶이 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둠에 속한 삶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주께서 인도하시는 생명의 삶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겠노라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내 손에 쥐고 있는 삶의 경험과 지식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니다. 나 중심적 삶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삶으로의 변화를 가져와야 합니다. 그럴 때 내 인생의 삶의 궤도를 수정해 주시는 주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람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복음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라도 다가가 복음을 전하는 삶으로의 변화를 다시 한 번 결단해 봅니다. 참으로 허물투성이고, 연약한 자를 부르셔서 존귀한 자로 변화시켜 주시고, 귀한 사역의 자리의 이끄심에 감사할 뿐입니다. 주님 안에 거할 때, 내 인생의 방향을 찾을 수 있습니다.
➲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33~35절).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요한의 제자들도,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금식하며 기도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느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혼인 잔치의 손님들을 신랑이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 금식하게 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터인데, 그 날에는 그들이 금식할 것이다..’(34~35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신랑에 비유하셨고, 제자들은 혼인 집 손님으로 비유하셨습니다. 그리고 신랑을 빼앗기는 날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실 때를 가리킵니다.
주님을 만난 그것 하나만으로 기뻐할 수 있는 삶이어야 합니다. 날마다의 삶이 혼인 잔칫집 같은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삶이어야 합니다. 슬픔이 변하여 찬송이 되게 하시고, 눈물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시는 은총의 삶을 빼앗기지 않도록 주님과 날마다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내 입술에서 불평이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내 자신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요, 여전히 죄악 된 옛 생활을 버리지 못한 결과요, 스스로의 판단만을 앞세운 삶이기 때문입니다. 좀 더 주도면밀하게 주위와 상황을 살펴서 눈앞에 보이는 상황만을 보고 판단하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의 의미를 한 번 더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불평할 요소들만 찾을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요소들을 찾음으로 매일의 삶이 주님과 더불어 잔칫상에서 기쁨을 누리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새로운 은혜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36~39절).
새 옷에서 한 조각을 떼어내서 낡은 옷에다가 대고 깁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율법주의라고 하는 낡은 옷은 예수님의 파격적인 은혜라고 하는 새 옷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또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다 넣은 사람 역시 없을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38절). 바리새인들에게는 경건생활에 대한 열심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원의 감격도, 자녀 됨의 기쁨도, 죄 용서의 은혜도 모르는 형식적인 그들의 경건생활에 대하여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면 새로운 삶의 기쁨과 은총을 누리는 삶이어야 합니다. 날마다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는 날마다 내 마음의 그릇을 깨끗하게 닦아내야 합니다.
날마다 새로운 은혜를 담아 그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그릇으로 깨끗해져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낡은 생각들과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 그리고 이기적인 생각과 교만을 버려야만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런 자신들의 생각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행동 하나하나가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변화를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변화되지 않으려는 생각이 오늘의 한국교회가 이 땅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새롭게 하시는 은혜의 기쁨을 담을 만한 새 부대가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오늘도 내 인생의 참된 방향을 지시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진정한 기쁨이 있는 삶으로 나아갈 뿐만 아니라 내 인생을 역전시키시는 주님의 은혜를 담기에 합당한 부대가 되도록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눅 5:27~3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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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세관에 앉아있는 세리가 있다(27)
또 비방하기 좋아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있다.(30)
요한의 제자들이 있다.(33)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이 있다.(33)
예수님의 제자들이 있다.(33)
또 많은 무리들이 언제나 함께 있었다.
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내가 꼭 배워야 할 분이 있다.
내가 정말 깊이 알아야 할 분이 있다.
정말 좋은 친구들을 만나서 죄사함도 받고 보너스로 건강도 회복한
한 중풍병자의 수지맛은 은혜로운 것도 주목이 되고
유대인으로부터는 인간 이하의 취급받는 세리 마태가 나를 좇으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모든 것을 버려두고 일어나서
예수님을 따른 위대한 결정을 한 레위 또한 신선한 충격을 준다.
예수님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오셨다.(32)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씀해 주신다.
아무리 사회에서 지탄 받고 비난받는 공인된 죄인 세리라 할찌라도
불러 주시고 함께 식사도 하시고 잔치에도 참여해 주신다.
인생의 방향도 목적도 없이 백성을 착취하고 자기배를 불리고 있던 세리
이 사람을 불러 주신 예수님 나도 함께 불러 주심에 감사합니다.
율법을 준수함으로 많은 공적을 쌓아서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한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의 가르침 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믿음으로 말미암에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며
십자가의 은혜로 보혈의 공로로 죄사함을 받고 믿음으로 살도록 부르신 주님
죄인을 부르시고 회개의 영을 부어주옵소서.
나사렛에서 자라나신 예수님이 고향에서 별로 환대를 못받으시자
갈리리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사역들을 하고 계시는데
다섯가지의 연속적인 사건들을 통하여 바리새인들과 또는 율법사들과의
긴장 내지는 비판을 받으면서 하나님 나라의 교훈이
바리새인들이 강조하는 엄격한 율법의 준수와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를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잘 배우게 된다.
갈릴리에서 일어나 일련의 사건들을 정리하면
1. 온 몸에 문둥병 들린자를 손을 내밀어 깨끗함을 받으라
말씀하시고 고쳐 주셨다.(눅5:12~16)
2. 한 중풍병 걸린자를 몇 사람이 지붕을 뚫고 예수님 앞에 내렸을 때
믿음을 보시고 내 죄사함을 받았다 라고 말씀하시고 고쳐주셨다.(눅5:17~26)
3. 민족의 배신자로 여김 받던 세리, 죄인으로 취급했던 마태를 불러서
나를 좇으라 말씀하시고 함께 식사를 하셨다.(눅5:27~32)
죄인과 함께 식사한다고 함께 식사 하는 것 조차도 시비를 걸었었다.
4. 금식에 관한 시비가 붙였을 때에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너희가 금식을 할 수 있느냐 라고 반문하시고 정말 금식할 때가 있다 하신다.
(눅5:3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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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생명으로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A time is coming and has now come when the dead will hear the voice of the Son of God and those who hear will live.
삶은 한편으로는 죽어 가는 것입니다. 영원한 진리지만 흔히 잊고 삽니다. 그러다가 소중한 사람이 떠나면 새삼스럽게 깨닫습니다.
누구나 떠나갑니다. 모든 사람이 죽음의 행렬 가운데 있습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림자이고 덧없이 지나가는 존재입니다. 살아 있다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죽기 시작합니다. 이 땅은 삶의 땅인 동시에 죽어 가는 땅입니다. 영원한 삶이 있는 세상은 죽음의 찬 강을 건너야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다스리는 분이 계십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죽음은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죽음을 통과해서 생명으로 들어갑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파멸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죽음과 연관된 모든 것으로부터 구원받으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분은 언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