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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5일] 영적 집중이 약해질 때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I3pUtv-Bof8?si=qOwufnEvKVk305Do
[오스왈드 챔버스의 365 묵상집]
주님은 나의 최고봉
4월 15일
영적 집중이 약해질 때
산당은 이스라엘 중에서 제하지 아니하였으나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온전하였더라
- 역대하 15장 17절
아사 왕은 외적 순종에 있어서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주된 일에서는 옳게 행했지만 온전하게 다 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을 주의하십시오.
당신에게 중요하지 않은 것이 하나님께는 아주 중요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가벼운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얼마나 더 오랫동안 하나님께서 이 한 가지를 우리에게 가르치셔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결코 인내를 잃지 않으십니다.
당신은 "나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습니다"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이 여전히 순종하지 않는 부분인 '산당'이 남아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 당신의 삶 속에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의심스러운 것들이 남아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당장 없애십시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무시하고 지나가서는 안 됩니다.
당신의 육신의 삶 또는 지적인 삶과 관련해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들이 있습니까?
주된 일은 옳게 하고 있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엉성하다면, 이는 주께 집중하는 마음이 느슨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심장이 쉬지 않듯이 영적 집중에서도 쉼은 필요 없습니다.
도덕적인 삶에서 벗어난 날을 보내면서 도덕적인 사람으로 유지될 수 없고, 영적인 삶에서 벗어난 날을 보내면서 영적인 사람으로 유지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온전하게 주의 것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당신 스스로 주의 뜻에 합당할 수 있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대단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에는 불과 2분 내에 엄청난 영적 향상을 이루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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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4일] 불평을 찬송의 시로 바꾸시는 분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0KXpU4I72RQ?si=5d2eaniTMonvRIY
[오스왈드 챔버스의 365 묵상집]
주님은 나의 최고봉
4월 14일
불평을 찬송의 시로 바꾸시는 분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 마태복음 11장 29절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히브리서 12장 6절).
우리의 불평은 얼마나 하찮은 것입니까!
주님은 우리가 주님과 교통할 수 있는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기 시작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음하며 말합니다.
"오, 주님! 다른 사람들처럼 편하게 해주소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멍에의 한쪽 끝을 잡으라고 하십니다.
"나의 멍에는 가벼우니 나와 함께 이 멍에를 메자."
당신은 이와 같이 주 예수님과 일치되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주님의 도우시는 손을 느끼며 그분께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이사야 40장 29절).
하나님은 오셔서 감상에 빠진 우리를 건져내시고 우리의 불평을 찬송의 시로 바꾸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의 멍에를 지고 그분께 배우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헤미야 8장 10절).
성도들이 어디에서 기쁨을 얻습니까?
만일 우리가, 성도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다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오, 그분은 멍에가 없이 편하게 살았답니다."
베일을 걷어올리십시오.
하나님의 평안과 빛과 기쁨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멍에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워주시는 멍에는 포도송이를 짓이기게 되며 그 결과로 포도주가 나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멍에로 인해 만들어진 포도주만 봅니다.
이 세상 및 지옥의 그 어떤 세력도 인간의 영혼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성령은 정복될 수 없는 우리 안의 내적 힘입니다.
만일 당신 속에 불평이 있다면, 가차없이 발로 차버리십시오.
불평은 하나님의 능력을 무시하고 의도적으로 약해지는 적극적인 범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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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3일] 모든 짐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Ja_dkZLN1tM?si=-SVzMiHsAM8vFyvk
[오스왈드 챔버스의 365 묵상집]
주님은 나의 최고봉
4월 13일
모든 짐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 시편 55편 22절
우리는 옳은 짐과 그렇지 않은 짐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결코 의심이나 죄의 짐을 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지게 하시는 짐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 주님은 그 짐을 옮길 의도가 없으십니다.
이때 주님은 우리가 그 짐을 다시 주님께 맡기기를 원하십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일하면서 주님과의 관계가 끊어진다면 그 책임감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울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이신 짐을 다시 주님께 맡기면, 주님은 주님의 역사를 드러내시면서 우리의 책임감을 제거해 주십니다.
많은 사역자들이 높은 의욕과 건전한 열정을 가지고 주를 위해 일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얼마 되지 않아 포기하고 쓰러지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지워진 짐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피곤함에 빠집니다.
그러면 주변 사람들은 비웃습니다.
"멋지게 시작하더니 저 꼴이 뭐람!"
모든 짐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당신은 너무나 많은 짐을 혼자 다 지고 왔습니다.
이제 뜻을 다해 하나님의 어깨에 그 짐을 지우십시오.
"정사가 그의 어깨에 있도다"(이사야 9장 6절).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맡기신 모든 짐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그 짐을 던져버리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동료의식을 느끼게 되면서 그 짐은 가볍게 될 것입니다.
결코 그 짐을 포기하지 말고 주께 맡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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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2일] 영생을 나눔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o2Lt9bY18QU?si=Raeza4aOO62t6K-v
[오스왈드 챔버스의 365 묵상집]
주님은 나의 최고봉
4월 12일
영생을 나눔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해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아계심은 하나님께 대해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해서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 로마서 6장 9~11절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곳 인간 세상에서 보여주신 생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날 때 우리의 죽을 육체에 예수님의 생명 자체가 나타납니다.
복사된 예수님의 생명이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드러났던 능력과 권능은 우리가 죄에 대해 도덕적인 결단을 내릴 때 하나님의 순전한 은혜에 의해 우리 안에서도 드러나게 됩니다.
"너희가 성령의 권능을 받게 될 것이라" (사도행전 1장 8절)
권능이란 성령으로부터 오는 은사로서의 능력이 아니고 그분이 부여하는 어떤 힘도 아니며 성령 자체입니다.
예수 안에 있었던 그 생명은 우리가 주님과 일치하기로 결단하면 주님의 십자가를 근거로 우리의 것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이 어렵다면 이는 우리가 죄에 대해 확실한 결단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단하는 순간 하나님의 충만하신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끝없는 생명의 공급을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충만케 되길 원하노라" (에베소서 3장 19절)
영생은 시간과는 전혀 관계 없는 것이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분이 사셨던 그 생명이 영생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의 유일한 근원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무리 연약한 성도라도 그의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 하나님의 아들의 거룩한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작은 능력이라도 주장하면 예수님의 생명을 가리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속 내려놓을 때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이에 사람들이 우리가 주님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4월 11일] 함께 부활에 참여함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USJgPD6tyjk?si=_PDxNJTSyBjNo75c
[오스왈드 챔버스의 365 묵상집]
주님은 나의 최고봉
4월 11일
함께 부활에 참여함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 로마서 6장 5절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증거는 내가 그분과 뚜렷하게 닮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이 내 안에 들어오면 나의 삶은 주님께 재조정됩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을 나에게 부여할 수 있는 권한을 받으셨습니다.
따라서 나의 실질적인 삶은 내 안에 부여된 하나님의 생명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나는 지금 예수님의 부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생명은 거룩을 통해 나타날 것입니다.
바울 서신의 전반적인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일치되려는 도덕적인 결단을 내리고 나면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인간 본성의 모든 부분을 점령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죽을 육체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 살아가려면 전능한 능력이 필요합니다.
성령은 육체라는 집에서 손님으로 있을 수 없습니다.
삶의 전 영역을 지배합니다.
내가 나의 '옛사람' 곧 죄의 유전이 예수님의 죽음과 일치되어야 한다고 결단하면, 성령이 나를 점령하기 시작하시며 나의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이때 나의 역할은 빛 가운데 걷는 것이요 그분이 계시하시는 것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죄애 대해 도덕적인 결단을 내리면 내가 실제로 죄에 죽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쉽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있는 것을 항상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인성도 오직 하나인 것처럼 거룩도 오직 하나로써 예수님의 거룩 외에 다른 것은 없습니다.
내게 선물로 주어지는 거룩은 바로 주님의 거룩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의 거룩을 내게 부어주셨습니다.
나는 영적으로 새로운 질서 속에 속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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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0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p7oXTMrcrWA?si=5Nefm_ptTZbd0EhM
[오스왈드 챔버스의 365 묵상집]
주님은 나의 최고봉
4월 10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 로마서 6장 6절
"내 안에 있는 죄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죄에 대해 이러한 도덕적인 결단을 내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죄를 위해 죽으신 순간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 인생에도 죄를 향해 죽겠다는 위대한 결단의 순간이 필요합니다.
이는 내 안에 있는 죄를 절제하거나 짓누르거나 대항하는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십자가 상에서 죽여 없애야 하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당신 대신에 이 결단을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간절히 부탁할 수 있고 신앙적으로 설득할 수는 있어도, 바울이 위의 말씀에서 강력하게 요구하는 죄를 죽이려는 결단은 스스로 해야 합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주여, 죄가 제 안에서 죽은 것을 알 때까지 주님의 죽으심과 일치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십시오.
당신 안에 있는 죄가 반드시 죽도록 도덕적인 결단을 내리십시오.
위의 말씀은 바울의 미래에 나타날 신령한 모습을 기대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의 삶 속에서 발생한 아주 근본적이고 확실한 체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내 안에 계신 성령을 대항하는 죄의 성향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까?
이를 알 때까지 성령께서 내 마음을 샅샅이 점검하도록 허락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그 후 죄를 향한 하나님의 판결, 즉 죄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일치되어 죽어야 한다는 판결에 동의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이 근본적인 의지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결코 "나 자신이 죄에 대해 참으로 죽은 것으로"간주할 수 없습니다.
내 살과 피에 오직 예수님의 생명만이 남을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영광스러운 특권에 들어가겠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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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9일] 예수님을 보았습니까?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LM63gTt0wuU?si=PsB9BSmyBN8IrEES
[오스왈드 챔버스의 365 묵상집]
주님은 나의 최고봉
4월 9일
예수님을 보았습니까?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 마가복음 16장 12절
구원을 받는 것과 주님을 보는 것은 다릅니다.
주님을 보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본 사람은 반드시 변화됩니다.
과거에 좋아하던 것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과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을 아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주님께서 당신을 위해 이루신 일만 안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충분히 안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당신이 예수님의 모습을 그대로 보았다면 삶 속에서 어떤 경험을 하더라도 당신은 보이지 않는 그분을 보는 것같이 하며 인내할 것입니다.
날 때부터 소경 된 자는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자신을 보이실 때까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했습니다.
주께서는 누군가를 위해 어떤 일을 하신 후에 그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러나 그분이 언제 나타나실지는 말할 수 없습니다.
갑자기 그분이 오시면, "나는 지금 그분을 봅니다"라고 외치게 됩니다.
당신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당신의 친구에게도 나타나셔야 합니다.
그 이유는 다른 사람의 눈으로는 주님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본 사람과 보지 못한 사람 사이에는 구분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친구를 인도하시지 않는 한, 당신이 그 친구를 인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보았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을 보게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마가복음 16장 13절)
그들이 믿지 않더라도 당신은 반드시 말해야 합니다.
"내가 본 것을 말할 수만 있다면 당신은 분명히 믿게 될 텐데!
어떻게 말해야 당신이 받아들일까!
오직 주님께서 내가 섰던 그곳에 당신을 이끄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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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8일] 주님께서 부활하신 목적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KNvVuptaNgI?si=_sPEwqY1b_89lVUG
4월 8일
주님께서 부활하신 목적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 누가복음 24장 26절
주님의 십자가는 그분의 생명으로 들어가는 정문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이제 그분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생명을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위로부터 거듭날 때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께로부터 그분 자신의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목적은 바로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사명을 완성하심으로써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는 권한을 얻으셨습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아들만이 하나님과 가지셨던 그 관계속에 거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 양자의 관계를 갖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죽음에서 부활하셨을 때 성육신하기 전에는 누리지 못했던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나셨습니다.
곧 전에 없었던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가 옛 생명이 아닌 주님의 부활의 생명으로 다시 일어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언젠가 우리도 주님의 그 영광스러운 몸처럼 변화된 몸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지금 우리는 주님의 부활의 효력을 알 수 있으며 새로운 생명 안에서 행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빌립보서 3장 10절)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요한복음 17장 2절)
'성령'은 지금 이 땅에 존재하는 사람들 안에서 역사하는 '영원한 생명'의 또 다른 체험적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성령은 주님의 속죄를 계속적으로 우리의 경험에 적용시키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순종하려고 하면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이루십니다.
얼마나 영광스럽고 위대한 진리입니까?
이 진리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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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7일] 부활하신 생명과 연합할 때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S7IOb9W-h_4?si=FPSmlJ1E27TdUd09
4월 7일
부활하신 생명과 연합할 때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 마가복음 9장 9절
인자가 당신 안에서 부활하실 때까지 아무것도 말하지 마십시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당신을 다스리면 역사 속에 계셨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말씀을 이해하게 됩니다.
당신의 내면이 바르게 되면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슴들이 너무나 자명하게 되어, 왜 전에는 그 말씀들이 보이지 않았는지 놀라게 됩니다.
전에 당신이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다는 사실은 그때 당신의 마음은 그 말씀들을 감당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으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영적인 생명의 합당한 조건에 이르기까지는 그 내용들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요한복음 16장 12절)
따라서 우리가 특별한 어떤 말씀을 이해하려면 주님의 부활하신 생명과의 연합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정말로 예수님의 부활하신 생명이 우리에게 부여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만일 그 부활하신 생명이 우리에게 부여되었다면, 그 증거는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깨닫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마음에 주님의 성령이 없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계시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의 고집스러운 편견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뭔가 계시하시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습니다.
자기가 믿는 교리에 사로잡히면 하나님의 빛은 더 이상 임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 빛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생명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될 때 그 완고한 상황은 당장 끝나게 될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변화산에서 본 그 영광을 말합니다.
그들은 뭔가를 보았고 그래서 증거하지만, 만일 그들의 삶이 주님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인자께서 아직 그들 안에서 부활하신 것이 아닙니다.
언제쯤 주님의 부활 생명이 당신과 내 안에 형성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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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6일] 하나님과 죄의 충돌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JbpHRjw2Pno?si=EMreZSdTcK7WNwZu
4월 6일
하나님과 죄의 충돌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 베드로전서 2장 24절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일종의 순교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십자가는 지옥의 권세가 근본적으로 흔들리는 최고의 승리였습니다.
시간의 세계에서나 영원의 세계에서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이루신 일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십자가로 주님은 모든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돌아오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사람들의 생명의 근본이 되게 하셨습니다.
즉, 주님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에게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 아닙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위해 오셨습니다.
그는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 (요한계시록 13장 8절)이십니다.
성육신의 모든 의미는 바로 십자가입니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인류의 죄를 지신 인자로부터 분리시키는 실수를 하지 마십시오.
성육신은 죄를 제거하려는 구속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성육신하신 목적은 하나님 자신을 실현하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시간과 영원의 중심이며 그 둘 사이의 신비를 푸는 해답입니다.
십자가는 사람의 십자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십자가는 인간의 체험 속에서 결코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누구든지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의 연합 관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다다를 때 우리는 그 십자가를 통과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십자가라는 통로를 지나 새로운 생명에 거하게 됩니다.
구원의 중심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이 그토록 쉬운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그만큼 엄청나게 대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죄인 된 인간이 충돌해서 만나는 지점이요, 생명을 향하는 길이 열리는 지점입니다.
그러나 충돌은 오직 인간의 죄로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서 발생합니다.
결국 인간의 죄를 해결해야 하는 하나님의 대책은 십자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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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5일] 주님의 고통과 우리의 친교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_jlJafcbcIE?si=3Dgttu0mY1r9zNCs
4월 5일
주님의 고통과 우리의 친교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임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 마태복음 26장 36, 38절
우리는 겟세마네의 고통을 결코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고통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고통은 인간의 죄로 인해 신이자 인간이신 주님께서 겪은 고통입니다.
우리의 개인적 체험으로는 겟세마네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겟세마네와 갈보리는 아주 유일한 것 곧 우리를 영생에 이르게 하는 문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두려워하신 것은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주께서 가장 강조하신 말씀은 자신이 죽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주께서 두려워하신 것은 '인자'로서의 사명을 다 감당해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아들'을 건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인자'가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도록 공격합니다.
곧 구세주가 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관한 기록을 사탄의 유혹의 배경 속에서 읽어보십시오.
주님의 공생애의 처음 시험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누가복음 4장13절)
사탄은 겟세마네에 다시 돌아와 예수님을 시험했지만 또 패배했습니다.
사탄은 겟세마네에서 '인자'로서의 주님을 마지막으로 공격한 것입니다.
겟세마네의 고통은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의 구세주가 되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해야 하는 고통이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주께서 어떠한 대가를 치르셔야 하는지 그 비밀이 다 드러났습니다.
주님의 고통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유일한 반석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자'로서의 승리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주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승리하셨다는 표시입니다.
따라서 '인자'께서 고통을 겪으심으로써 누구든지 지금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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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4일] 축복보다 하나님을 바라십시오!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JmGoZpTmzYM?si=m4IY_3akCgDfBgxF
4월 4일
축복보다 하나님을 바라십시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요한복음 16장 32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믿음은 진실했지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현실적인 상황에서 역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 없었지만, 제자들은 자신들의 유익을 구하여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우리가 거룩해짐으로써 하나님과 온전히 관계를 맺었다면 우리의 믿음은 현실 속에서 역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역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면의 절망을 향해 흩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소위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내면의 죽음을 겪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이러한 일들에 대해 준비가 되었습니까?
이러한 일은 우리가 선택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황을 간섭하셔서 우리로 그 자리에 있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 경험을 통과할 때까지, 우리의 믿음은 감정과 축복에 의해 지탱될 뿐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한 번이라도 가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에 두시든, 우리의 내적 황폐함이 어떠하든 모든 것이 주안에서 잘되었다고 찬송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현실 속에서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나를 혼자 둘 대가 오나니."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흩어질 때 주님을 홀로 두고 떠난 것은 아닙니까?
우리의 상황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까?
삶의 어둠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임하게 됩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원하시는 대로 뭐든 하시도록 허락할 준비가 되었습니까?
눈에 뜨이는 축복으로부터 멀어질 것에 대해서도 준비가 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주'가 되실 때까지 우리 모두 자신의 유익을 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진실한 것이지만 아직 흔들림이 없는 영구한 믿음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절대 서두르는 일이 없으십니다.
만일 우리가 기다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보다 그분이 주실 축복에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에 이끌리는 믿음은 아주 기초 상태에 있는 신앙입니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한복음 16장 33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적인 용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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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일] “너도 알았더라면!”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LedEVG9xXk?si=H-14MgRdyFgExUo1
4월 3일
"너도 알았더라면!"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 누가복음 19장 42절
예수님께서는 승리의 기세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성은 예수님으로 인해 술렁거렸습니다.
그곳에서는 이상한 우상 곧 바리새인들의 교만이 있었습니다.
바리새파는 매우 종교적이었고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아주 의로웠습니다.
그러나 '회칠한 무덥'이었습니다.
최근 나의 삶에서 나의 눈을 막고 흐리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 안에 이상한 우상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상은 멀리하고 싶은 끔찍한 괴물이 아니라 오히려 내 안에서 나를 휘어잡는 성향입니다.
여러 번 하나님께서는 나로 이 우상을 대면하게 하셨습니다.
그때 나는 그 우상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우상으로 인한 위기에서 간신히 벗어났지만 여전히 나 자신은 그 우상에게 빠져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마음에 거리낌이 전혀 없는 그 뭔가에 눈이 멀어 있습니다.
정말로 끔찍한 것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아무 방해 없이 찾아오시는 장소에서도 우상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상태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더 큰 죄를 쌓는 것입니다.
"너도 알았더라면."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의 눈물을 가지고 우리 마음속에 직접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 가리워진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책임을 물으십니다.
"지금 그것들은 네 눈에 감추어졌느니라."
왜냐하면 그 죄성이 끝까지 버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랬더라면..." 하는 후회는 얼마나 끝없이 슬픈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미 닫힌 문은 다시 열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른 문들을 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닫혀지지 말아야 하는데 우리가 닫은 문들을 기억나게 하십니다.
더러움에 양보하지 말았어야 할 귀한 생각들을 떠오르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과거를 기억나게 하실 때 절대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기억이 자연스럽게 그 역할을 하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기억은 꾸짖음과 징계와 슬픔을 사용해 하나님의 수종을 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랬더라면"하는 과거의 아픈 기억을 통해 멋진 미래를 펼쳐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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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일] 최상의 영광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PEludI8Sf9U?si=NcF8ZIdwu2BEcD0
4월 2일
최상의 영광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 사도행전 9장 17절
바울이 시력을 다시 회복했을 때 그는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통찰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후로 그의 여생과 가르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린도전서 2장 2절)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외에 그 어떤 것도 바울의 마음과 영혼을 휘어잡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에수 그리스도를 보았을 때 계시된 주님의 그 못브에 이를 수 있도록 삶 가운데 흠 없는 성품을 유지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영적인 사람이 항상 지니고 있는 특징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잘 깨달은 후에 다른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목적이신 그리스도를 알려주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그 인생의 단 한가지 집중된 열정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당신이 어떤 사람에게서 이러한 특징을 보았다면, 당신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느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려는 당신의 통찰력을 왜곡시키려는 그 어떤 것도 결코 허락하지 마십시오.
바로 이 점이 당신이 영적인가 아닌가를 시험하는 기준입니다.
영적이지 않은 모습은 우리가 다른 뭔가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 눈이 주를 뵌 이후 다른 모든 것을 보지 않게 되었다네.
십자가에 달리신 주를 뵐 때에 나의 영혼을 사로잡으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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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따뜻한 마음입니까, 무관심한 마음입니까?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f4pG34GXEUc?si=4Qnm-VJwLBtAB6bi
4월 1일
따뜻한 마음입니까, 무관심한 마음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해 간구하심이니라
- 로마서 8장 34, 27절
중보 기도자가 되어야 할 필요에 대해 이보다 더 확실하게 보여주는 구절이 있습니까?
곧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하시고, 성령께서 성도를 위해 중보 기도하십니다.
당신은 성령님께 교육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동료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드리는 관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까?
지금 우리가 속한 상황에서부터 중보 사역을 시작하십시오.
가정, 사업, 나라, 지금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현재의 위기 상황 등이 당신을 짓누루고 있습니까?
이러한 것들이 우리를 주님의 존전에서 밀어내고 그분을 경배할 시간이 없게 만듭니까?
그렇다면 잠깐 멈추고 하나님과 먼저 살아 있는 관계를 맺으십시오.
그래야만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중보 기도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게 되고, 그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십니다.
주의 뜻을 이루고 싶은 간절한 소망 때문에 주님보다 앞서는 것을 주의하십시오.
우리는 수천 수만의 행사 가운데 주님보다 앞섭니다.
결국 사람들과 어려운 일들에 치여 주님을 경배하지 않게 되고 중보 기도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만일 여러 짐들과 압박에 눌려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하게 되면 서서히 우리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강퍅해질 뿐 아니라 우리 영혼은 좌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 우리를 우리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로 인도하십니다.
이때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상태가 아니라면 우리가 그들에게 행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행위는 그들을 차갑게 대하는 것입니다.
한두 마디 뼈아픈 성경 구절을 던져주거나 틀에 박힌 신앙 상담을 하고 차갑게 떠납니다.
따스함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분명 주님께 커다란 아픔일 것입니다.
중보하시는 주님과 성령의 마음에 일치되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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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1일] 주의하는 것입니까, 위선입니까?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TkN3s-9PYAg?si=dfOqfot0Z9bkdcaR
3월 31일
주의하는 것입니까, 위선입니까?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해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 요한일서 5장 16절
우리 안에서 성령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에 대해 주의하지 않으면 우리는 영적 위선자들이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죄 범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우리의 분별력을 사용해 그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기보다 비판하며 조롱하기 쉽습니다.
계시는 지성의 예리함보다 성령의 직접적인 조명하심에 의해 임합니다.
계시의 원천이 되시는 성령님께 주의하지 않으면 우리는 비판만 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잊게 될 것입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주님께서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짓는 자들을 위한 마음을 당신에게 주시리라."
당신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구하기 전에, 다른 사람을 비판의 입술로 바르게 세우려고 당신의 모든 시간을 사용하는 위선을 행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주신 미묘한 부담 중 하나는 다른 사람의 영혼에 대해 분별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 가지를 보여주시는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다른 영혼의 짐을 지게 하시고 그들을 향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중보 기도를 하면, 주께서는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 지은 자들을 위하는 생명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만지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기도 가운데 들어올려서 중보 기도 대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주님의 영이 탄식하시는 것을 보고 계십니까?
주님과 온전히 일치되어 우리의 마음이 들어올려져서 중보 기도하는 그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과 일치되지 않으면 그럴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보 기도하는 우리로 인해 크게 만족하실 수 있도록, 우리는 전심으로 중보 기도하는 것을 바르게 배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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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0일] 하나님을 향한 거룩입니까, 강퍅함입니까?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j9lYY5LeTd4?si=WoRBjXISAbNAFymS
3월 30일
하나님을 향한 거룩입니까, 강퍅함입니까?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 이사야 59장 16절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강퍅해지는 이유는 우리가 기도할 때 감상적인 관심만 가지기 때문입니다.
기도한다는 말은 듣기 좋습니다.
기도에 관한 책들을 읽어보면 기도가 얼마나 유익한지를 알려줍니다.
기도할 때 우리 마음이 평강을 누리며 우리 영혼이 높은 곳으로 들려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잘못된 기도의 개념에 놀라시는 것처럼 암시합니다.
경배하는 마음과 중보 기도는 병행되어야 합니다.
둘 중 하나가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중보 기도는 우리 자신을 붙들어 기도의 대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마음을 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음을 갖기보다 기도 응답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의 논리를 펴나갑니다.
당신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경배합니까, 하나님과 논쟁합니까?
"저는 주께서 이 일을 어떻게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지 않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뵙지 못하면 우리의 마음은 강퍅해지고 고집이 세어집니다.
자신의 간청들을 하나님의 보좌 앞에 던져두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그분이 하셔야 한다고 명령을 내립니다.
이러한 기도 자세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려고 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강퍅해지면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강퍅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는 대상을 향해 그리스도께서 어떤 마음을 가지셨는지 그 마음을 갖고 싶어 주님께 예배하는 마음으로 매달립니까?
하나님과 거룩한 관계 가운데 살아갑니까, 아니면 마음이 굳고 고집을 부립니까?
"마땅한 중재자가 없음이라."
당신 자신이 중재자가 되십시오.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분과 거룩한 관계 속에서 사는 사람이 되십시오.
실제로 중보 기도의 사역을 시작하십시오.
중보 기도의 사역은 당신의 모든 힘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함정이 없는 사역입니다.
복음을 외칠 때는 사람을 의식하거나 인기를 구하는 등의 덫이 있을 수 있어도, 중보 기도에는 함정이 있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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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9일] 주님의 갑작스러운 방문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FCXW54fRU5c?si=damJazO8tPWhJu68
3월 29일
주님의 갑작스러운 방문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 누가복음 12장 40절
그리스도의 사역자는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뵐 준비를 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 체험과 상관없이 이러한 자세를 취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와 어려움과 여러 상황들과 맞서는 대신 일에 너무 몰두해 주님을 만나뵐 준비를 하지 못하는 나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사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의 믿음, 신조, 유용성이 아니라 오직 주님을 만나뵙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기대할 때 오시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가장 기대하지 않을 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우리 입장에서 논리적으로 볼 때 그분이 오실 시기가 전혀 아닌 때 오십니다.
따라서 주님을 향해 언제나 충성스러운 사역자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언제나 주님의 갑작스러운 방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예비한다는 것은 특별한 봉사를 하는 차원이 아니라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른다는 기대 속에서 실제로 주님을 집중적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자세는 우리 인생을 어린아이 같은 기대로 가득 차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세를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비하려면 고상한 문화로 여겨지는 '종교 생활'을 버리고 영적으로 실제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당신이 유행을 따르는 종교의 부름을 피하면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당신의 마음을 오직 주님께서 원하시는 데 두고 그분을 따라 생각한다면, 당신은 비현실적이요 꿈만 꾸는 자라고 조롱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분주하고 바쁜 어느 날 주님이 나타나실 때 당신만이 준비되어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아무도 믿지 마십시오.
심지어 이 땅에서 존재했던 아주 고상한 성인마저, 만일 그가 당신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을 방해한다면 그를 무시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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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8일] 주님께 불명예가 되는 것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RcbAJeU--Kk?si=6a5dqdFT6NI-Y4Fw
3월 28일
주님께 불명예가 되는 것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 요한복음 11장 7~8절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말씀에 순종할 경우 예수님께 불명예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주님께 순종하지 않는 것만이 주님께 불명예가 됩니다.
주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신 대로 따르기보다 '이렇게 하면 주님께 영광이 될 거야'라는 나의 생각을 따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 생각이 주님께서 공개적으로 부끄럽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선한 동기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제안이 올 때를 압니다.
주님의 제안은 매우 조용하면서도 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제안에 대해 내가 찬성 혹은 반대 의견을 가지고 내 속에서 따지면 의심과 다툼이 생기게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닌 요소들을 끌어들이면서 결국 그 제안을 밀어내는 잘못된 결론에 이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교리에 충성합니다.
주님께 충성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발걸음을 내딛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교리에 충성하는 것은 무엇보다 나의 지식을 신앙의 발판으로 삼는 것입니다.
믿음은 지적인 이해가 아닙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 마음을 다해 오직 주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의 발걸음을 뗄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뭔가 분명히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릴 것인지 마음속에서 논쟁합니까?
아무 미련 없이 기쁨으로 주님께 순종하십시오.
주님께서 뭔가를 말씀하셨는데 계속 당신이 따진다면 그것은 주님께 영예가 되는 것을 내가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 자체가 주님께는 불명예가 됩니다.
당신은 그분의 말씀에 충성합니까, 아니면 예수님과 상관없는 자신의 교리에 빠져 타협하고 있습니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요한복음 2장 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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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7일] 인격적인 성품에 의한 비전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qsa5V56mnUo?si=504nX_u1pgCu1xO
3월 27일
인격적인 성품에 의한 비전
이리로 올라오라 이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 요한계시록 4장 1절
높이 오르려는 마음은 인격적으로 자신을 고양시키려는 습관을 가진 사람들에게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당신의 외면적인 삶에서 최고의 삶을 살 때 주님께서는 계속 말씀하십니다.
"친구여, 더 올라오라."
유혹의 세계도 "더 높이 올라가라"는 원리를 사용합니다.
더 올라가면 또 다른 유혹과 특성들을 대면하게 됩니다.
사탄은 유혹의 차원을 더 높이는 전략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같은 방법을 사용하셔서 성도들로 하여금 더 높은 곳에 오르게 하십니다.
그리고 결과는 다릅니다.
사탄이 당신을 더 높은 곳에 올려놓을 경우 그는 먼저 당신으로 하여금 왜곡된 거룩의 개념을 갖게 합니다.
마치 거룩이란 우리의 이 육신으로는 도무지 이룰 수 없는 것이기에 영적인 곡예사가 되어야 할 것처럼 말합니다.
그 후 그 자리에 올려지면 감히 움직일 생각도 못하고 꼼짝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분의 은헤로 우리를 하늘의 장소로 올려놓으시면 우리는 매달릴 꼭대기가 아니라 그곳에서 마음껏 움직이며 뛰 놀 수 있는 운동장을 발견하게 됩니다.
작년 이맘 때와 이번 주를 비교해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더 높은 곳으로 부르셨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우리는 모두 고양된 차원에서 볼 수 있도록 더 높은 곳으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진리를 말씀하시면 당장 그 진리대로 사십시오.
언제나 진리의 빛 가운데 사십시오.
은혜 가운데 성장한다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사실로 입증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당신의 위치를 볼 수 있는 통찰력이 바로 당신의 영적으로 성장한 증거입니다.
"더 높이 올라오라"는 주의 음성은 단순히 당신에게 개인적으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당신 내면의 통찰력이 그 말씀을 받을 만하기 때문에 들리는 것입니다.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세기 18장 17절)
우리의 인격적인 성품의 분량이 하나님의 계시를 대할 수 있는 자리까지 이르기 전에, 주님은 주께서 하실 일을 우리에게 숨기실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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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6일] 인격적인 청결에 의한 비전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yw06PYRQo1s?si=fmqoOoqQKOZx1jB7
3월 26일
인격적인 청결에 의한 비전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 마태복음 5장 8절
청결은 순진함 그 이상으로, 하나님과 영적으로 한마음을 유지할 때 나오는 결과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더 청결해져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삶은 바른 삶이어야 하고, 비록 이런저런 일로 외면은 더럽혀지더라도 그 내면의 청결함은 흠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더럽혀질 가능성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기 위해 인격적인 청결함을 유지해야 할 필요를 깨닫게 됩니다.
만일 하나님과의 영적인 풍성함에 조금이라도 차질이 생기면 모든 것을 뒤로하고 그 문제부터 바르게 하십시오.
비전은 마음 상태와 관련되어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주권적인 은혜에 의해 우리를 청결케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돌봐야 할 부분도 있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 및 다른 견해를 접하게 될 때 우리의 내면도 쉽게 더럽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면의 성전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을 뿐 아니라 외부와 접촉되는 바깥 뜰 또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우리에게 주신 청결함과 온전한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의 바깥 뜰이 더럽혀질 때 우리는 영적인 깨달음에 이를 수 없게 됩니다.
만일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교제를 유지하려면 자신을 더럽히는 모든 생각들과 행동들을 삼가야 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합당한 것이라도 우리는 멀리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대인관계 속에서 개인의 청결함을 유지하는 실질적인 방안은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친구 및 친척들과의 관계도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완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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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5일] 이 땅에서 가장 미묘한 사명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1N_xlYX4FSs?si=UufV-XWaJ45ppiwQ
3월 25일
이 땅에서 가장 미묘한 사명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요한복음 3장 29절
절대로 사람들의 관심을 선함과 순결 그 자체로 인도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은 단지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자석과 같아야 합니다.
만일 나의 거룩함이 사람들의 관심을 주님께로 향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거룩은 정상적
인 궤도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나아가 사람들의 마음에 비정상적인 애착을 유
발시켜 그 영혼들로 하여금 곁길로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훌륭하고 멋진 성도가 예수님을 드러내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그를 위해 하신 일을 통해 자신만
드러내면 오히려 그는 예수님께 방해거리일 뿐입니다.
그는 이러한 인상만 남기게 됩니다.
"그 사람은 정말 멋진 인격을 가졌어."
이러한 사람은 신랑 예수님의 진정한 친구가 아닙니다.
이들은 마음속으로 "나는 언제나 계속 흥해야
하고 예수님은 쇠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랑 예수님을 향한 우정과 충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어떤 것보다 주님과 함께 자발적이고 살아 있는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데 더욱 힘써야 합니다.
가끔 특별하게 순종할 만한 것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이때에도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주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고 계속 주님과의 활기찬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종종 순종해야 할 때 순종하면 됩니다.
위기가 발생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발견해야 합니다.
그러나 평범한 대부분의 삶에서 더 중요한 것은 의식적인 순종보다 주님과의 관계 유지입니다.
언제나 신랑 예수님과의 친구 관계를 누리는 것입니다.
종종 기독교 사역이 우리 마음을 빼앗아 주님께 집중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신랑 예수님의 친구가 되는 대신 우리는 주의 일을 한답시고 주님의 무기들을 사용하면서 도리어 주님께 대항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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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4일] 주의 목적을 위해 쇠하는 것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IvNEDTwK0RY?si=EgyyUD5M9nPPuvmv
3월 24일
주의 목적을 위해 쇠하는 것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 요한복음 3장 30절
만일 당신이 어떤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가 된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질서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사역자로서 당신의 가장 중요한 책임은 신랑 되신 예수님의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위하는 입장에서 사람들을 대한다면 당신의 영향력은 바른 방향으로 역사할 것입니다.
그들의 역경을 막아주기 위해 손을 내미는 대신 그들이 열 배나 더 강해져서 이 세상의 그 어떠한 것도, 심지어 지옥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영혼을 주 예수님께로부터 빼앗을 수 없도록 기도하기 바랍니다.
계속적으로 섣부른 간섭으로 "이런저런 일들이 있어서는 안되지"라고 하며 그들의 도움이 되려고 하면, 이는 하나님의 역사를 간섭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막는 것입니다.
이렇게 간섭하는 가운데 우리는 신랑 예수님의 친구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알량한 자비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혼은 어느 날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 사람은 도둑이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나의 사랑을 빼앗아갔지요. 나는 그 때 저 사람 때문에 주님을 향한 비전을 잃었어요."
그릇된 길에서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는 것을 주의하십시오.
옳은 길에서 기뻐하고 있는지 살피십시오.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한복음 3장 29-30절)
이 말은 슬픔이 아니라 기쁨 가운데 나온 것입니다.
마침내 그들이 신랑을 봅니다.
이것이 세례 요한의 기쁨이었습니다.
이것이 사역자의 정신입니다.
자신은 전혀 드러나지 않게 하고 다시는 기억조차 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신랑의 음성이 들리기 전에, 다른 사람의 삶에 당신이 소중한 사람이 되려는 마음을 버리십시오.
당혹스럽거나 힘든 상황이라도, 심지어 건강을 잃더라도 당신이 그 사람의 신랑이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의 음성이 들릴때 신성한 희열 가운데 기뻐하십시오.
당신은 종종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의 삶을 파선케 하신다는 사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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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3일]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입니까?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YEkT5DoaFBU?si=VDJ4yb4EmA-IdJlS
3월 23일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입니까?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 고린도전서 3장 3절
자연인은 육신에 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
거듭날 때 우리에게 임하신 성령께서는 우리 육체의 소욕을 대항하시고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대항합니다.
바로 성령을 대항하는 이 세력이 육신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라디아서 5장 16절)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하면 이 육신이 사라집니다.
당신은 사나우며 사소한 일들에 쉽게 분노합니까?
그리스도인이라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증상을 그들 속의 육신과 연결시킵니다.
성경 안에 당신을 짜증나게 만드는 진리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는 당신이 지금 육에 속한 상태임을 증거합니다.
만일 성화하는 과정에 있다면, 그러한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성령께서 당신 안에서 뭔가 잘못된 것을 발견하시면 당신에게 그 잘못을 시정하라고 부탁하는 대신 빛을 받아들일 것을 요청하십니다.
주님이 당신의 잘못된 것을 바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때 빛의 자녀들은 당장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듯이 서게 됩니다.
그러나 어둠의 자녀들은 변명합니다.
"오, 저는 그렇게 할 만한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요."
빛이 들어와 자신의 잘못을 책망하면 빛의 자녀답게 죄를 자백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잘못된 부분을 다루실 것입니다.
자신을 변론하려고 한다면 당신은 스스로 어둠의 자녀임을 시인하는 것이 될 뿐입니다.
육이 떠났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결코 스스로 속지 마십시오.
육신이 떠난 가장 확실한 증거는 실제로 현실 속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의 놀라운 역사를 통해 당신의 육신이 떠났다는 사실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실질적인 확인이 곧 육신이 제거된 유일한 증거입니다.
"이 일이 전에 발생했다면 분명 내 안에 짜증과 분노가 있었을 텐데...."
당신은 내면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며 놀라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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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2일] 뜨거운 마음의 비결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VdH9JKwpVEI?si=3puLSOMlWd5K1xky
3월 22일
뜨거운 마음의 비결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 누가복음 24장 32절
우리는 마음을 뜨겁게 하는 비결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갑자기 우리에게 나타나시면 불이 붙게 되고 우리는 엄청난 비전을 갖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이 뜨거운 마음이 어떤 상황에서도 계속 타으로게 하는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그 비결을 배우지 않는다면, 지루하고 따분하며 재미없는 단조로운 일상 생활과 매일 보는 사람들은 우리의 뜨거운 마음을 차갑게 만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겪는 대부분의 번민은 죄 때문에 오기보다 자신의 속성에 대한 무지 때문에 옵니다.
예를 들어, 감정에 따르는 것을 허락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유일한 판단 기준은, 그 감정으로 인해 야기될 결과를 미리 보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따져보십시오.
만일 그 결과가 하나님께서 정죄하시는 것이라면 절대로 그 감정을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한편 성령에 의해 감정이 뜨거워졌을 경우 그 감정을 우리의 삶 가운데 적절히 표현하지 못하면 그 뜨거운 감정은 아주 낮은 차원에서 반응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감상적인 차원에 머물게 됩니다.
만일 그러한 감정을 적절한 수준에서 다루지 않는다면 감정이 뜨거울수록 그 추락도 매우 깊고 상처도 심합니다.
만일 성령이 당신을 요동한다면 가능한 한 많은 일들이 진행될 수 있도록 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결과들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변화산 상에서 계속 살 수 없습니다.
그곳에서 받은 빛에 따라 현실 가운데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비전을 주시면 아무리 큰 대가를 치르더라도 비전에 맞는 일들을 하기 바랍니다.
"우리는 태우고 싶어도 태울 수 없네.
우리 마음속에 거하는 그 불.
성령이 숨을 쉬면 고요하지만
나의 영혼은 신비에 거하게 되네.
매 시간마다 일마다 깨달음을 주셔서
어둠의 시간이 다 마쳐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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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1일] 관심입니까, 아니면 일치입니까?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C20H5BeVEQs?si=zYP8uJj4jao016iL
3월 21일
관심입니까, 아니면 일치입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 갈라디아서 2장 20절
영적으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죄성이 죽었다는 증서에 서명을 하는 것이며, 감정적인 표현과 지적인 믿음을 모두 동원해 죄성 곧 나 자신의 권리 주장을 버리겠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합니다
.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로 작정하였다"거나 "그분을 따르기를 노력할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로 일치되어 십자가에 못 박혔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영적인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에 따라 행하면, 주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 상에서 이루어 놓으신 모든 일들이 우리에게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기꺼이 나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드리면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을 내게 부어주십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사람의 개성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 마음을 다스리던 성향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그의 몸은 여전히 같지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던 과거 사탄의 권세는 제거됩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내가 원하는 삶도 아니고 기도를 통해 소원하던 삶도 아닙니다.
지금 이 죽을 육체 가운데 사는 삶을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삶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삶 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바울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께서 바울에게 부여하신 믿음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소유하셨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모든 의식적인 경계를 넘어서서 하나님 아들의 믿음과 일치된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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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일] 하나님과의 친구 관계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mCiSGYRfRH0?si=IuKKzfjFLZ12s2hP
3월 20일
하나님과의 친구 관계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 창세기 18장 17절
주님과 친구된 기쁨
창세기 18장은 가끔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기뻐하는 정도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과 진정한 친구가 되는 기쁨을 말합니다.
주님과 정말로 친밀하기 때문에 더 이상 주의 뜻이 무엇인지 물을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는 믿음의 삶의 훈련에서 마지막 단계에 가깝습니다.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으면 우리의 삶은 자유함과 기쁨과 평안으로 가득 찹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뜻이 되며, 만일 하나님이 막지 않으신다면 우리가 상식적으로 내리는 결정들이 보통 그분의 뜻입니다.
그에 따라 하나님과의 기쁘고 완벽한 친분 안에서 삶을 결정해 나갑니다.
만일 우리의 결정이 잘못되었다면 주께서 언제나 막으실 것을 잘 알고 있으며, 만일 막으시면 당장 멈춥니다.
주님과 친구된 어려움
왜 아브라함은 기도를 멈추었습니까?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응답하실 때까지 담대히 나아갈 수 있을 만큼 하나님과의 관계가 충분히 깊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다가 멈추고, "글쎄, 잘 모르겠어요. 아마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도 있겠지요"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경우는 여전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더 나아가야 할 다른 단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사귐같이 하나님과 친밀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만큼 그분과 가깝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저희들도 하나가 되게 하소서" (요한복음 17장 11절)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기도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자신의 욕망을 위한 것이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습니까?
성령의 몇 가지 은사를 구하기로 결정했습니까, 아니면 성령을 구했습니까?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우리의 필요가 무엇인지 아십니다"(마태복음 6장 8절)
기도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더욱 알기 위함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시편 37편 4절)
하나님을 온전하게 알 수 있도록 계속 기도하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7장 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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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9일] 믿음의 삶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HNEqmXDWBmU?si=dixh2uwQ7GTKwf9b
3월 19일
믿음의 삶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 히브리서 11장 8절
구약에서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교제는 따로 분리됨을 의미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에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데, 그는 친척과 고향으로부터 분리되었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구별됨은 위치적인 개념보다 정신적, 도덕적인 면에서 고려됩니다.
만일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가 없을 경우 우리는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서부터 자신을 분리시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를 더욱 강조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4장 26절)
믿음은 자신이 어디로 이끌리는지 전혀 알지 못하지만 이끄시는 그분을 사랑하고 아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이란 지성이나 이성적인 삶이 아니라 우리에게 "가라"고 하신 그분을 알아가는 삶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뿌리는 그분을 아는 경험적, 인격적 지식에 있습니다.
믿음의 삶에서 큰 장애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성공으로 이끄실 것이라는 착각입니다.
믿음의 삶에서 궁극적인 단계는 언제나 인격적인 면에서의 완성입니다.
인격을 변화시키는 여러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를 둘러싸는 축복을 느끼기도 합니다.
한동안 우리는 변화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일상적인 생활로 돌아가면 그 영광은 사라집니다.
믿음의 삶이란 날개를 펼쳐 저 높은 곳에 단숨에 날아오르는 삶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걸음씩 계속 걸으며 나아가지만 지치지 않는 삶을 의미합니다.
믿음의 삶은 오직 개인의 성화뿐 아니라 훨씬 더 무한히 높은 차원의 것입니다.
믿음은 시련을 당할 때 증명되며 마침내 시험을 이기고 일어섭니다.
아브라함은 성화의 표준이 아니라 믿음의 삶의 표준입니다.
그는 참된 하나님 위에 시험을 이긴 믿음을 세웠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더라" (로마서 4장 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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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8일] 하나님을 최고로 두십시오!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VupFPQRB_p8?si=FApL_3gy2odpH56U
3월 18일
하나님을 최고로 두십시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 고린도후서 7장 1절
나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정당하게 요청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 편에서만 그렇습니다.
당신이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본다면 주님의 요구 사항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정말 우리는 우리의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란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의 빛을 분명히 드러내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까?
성화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안에 형성되는 것입니다.
나의 할 일은 주님을 향한 순종을 통해 자연적인 삶을 영적인 삶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소한 일까지도 간섭하시며 교훈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양심의 가책을 주실 때는 혈육과 의논하지 말고 당장 자신을 정결케 하십시오.
매일의 삶 속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십시오.
나의 육신과 영혼이 모두 하나님의 속성과 완전한 조화를 이룰 때까지 영과 육의 온갖 더러운 것으로부터 자신을 깨끗케 해야 합니다.
내 영과 마음은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과 온전히 일치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의 지식을 내세워 불순종합니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던 그리스도의 마음을 나도 내 마음속에 형성하고 있습니까?
또한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자신의 영을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신 것처럼 우리도 깨어 있는 마음을 유지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자신의 영을 주의 성령과 온전히 일치시킬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면 점차적으로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그분의 삶의 수준으로 끌어올리실 것입니다.
그 삶은 다른 어떤 것에도 전혀 마음을 주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드려진 삶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이러한 거룩을 완성시키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주의 길을 내셔서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통해 점점 더 하나님을 보기 시작합니까?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심각하게 생각하고 나머지 것들은 사소하게 여기기 바랍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최고로 두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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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7일] 당신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 주님은 나의 최고봉
https://youtu.be/Wa7nF2uve1s?si=xgsG6k70vqXWw2NI
3월 17일
당신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 고린도후서 5장 9절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언제나 주님의 비전을 앞세우고 그 비전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수고로운 일입니다.
이 수고는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야망을 갖는 것도 아니고, 교회를 세우거나 부흥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며, 오직 주님께 인정받는 것을 가장 높은 이상으로 삼아 자신을 맞추는 것입니다.
우리 삶이 실패하는 이유는 영적 경험의 결핍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이상을 항상 유지하려는 수고의 결핍 때문입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주님이 원하시는 그 기준에 따라 사는지 지난 삶을 점검하십시오.
바울은 마치 훌륭한 연주자처럼 관중을 의식하기보다는 스승의 인정을 받는 것에만 신경을 썼습니다.
만일 하나님께만 인정받으려는 진실한 마음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려는 야망이 생기면, 그 사람은 결국 하나님께 인정 받지 못하는 자로 남을 것입니다.
야망이 자신을 어디로 이끌고 가는지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사는 인생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린도전서 9장 27절)
조금도 쉬지 말고 나의 모든 것을 가장 중요한 이 소망에 연결시키는 훈련을 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나의 공적인 가치는 내가 홀로 있을 때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가장 중요한 소망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께 인정 받는 것입니까?
아니면 아무리 고상해 보여도 주님께서 받으시기에 곤란한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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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6일] 죄에 대한 무감각(심판은 있다!) | 주님은 나의 최고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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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6일
죄에 대한 무감각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 고린도후서 5장 10절
바울은 우리가 모두 예외없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고 말합니다.
만일 지금 이곳에서 그리스도의 정결한 빛 가운데 사는 것을 배운다면, 마지막 심판은 당신 안에서 하나님이 이루신 사역으로 인해 당신에게 기쁨이 될 것입니다.
언제나 당신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기억하십시오.
당신이 아는 가장 거룩한 빛 가운데 걷도록 하십시오.
당신이 아무리 거룩한 척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향해 드러나는 나쁜 성질들은 사탄의 영에게 이용될 것입니다.
한 가지 죄성에 대한 심판은 당신으로 하여금 지옥을 경험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장 그 죄성을 빛으로 끄집어내어 고백하십시오.
"나의 하나님, 제가 이 점에서 범죄한 죄인입니다."
만일 이렇게 고백하지 않으면 당신의 마음은 강퍅하게 될 것입니다.
죄에 대한 형벌은 그 죄가 결과를 맺는 것입니다.
죄를 징벌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아닙니다.
죄 자체가 열매를 맺음으로써 그 죄로 인한 깊은 고통을 얻는 것입니다.
어떠한 바둥거림과 기도로도 그 죄를 멈추지 못합니다.
죄로 인한 형벌이란 점점 그 죄에 익숙해져서 그것이 죄인 줄을 알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임재 외에는 죄의 뿌리 깊은 결과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할 수 없습니다.
"그가 빛 가운데 곗니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요한일서 1장7절)
우리 중에는 빛 가운데 걷는다는 의미를,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위한 자신의 기준을 따르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가장 파렴치한 현대판 바리새인들입니다.
오늘날 가장 심각한 바리새인들은 위선이 아니라 죄를 죄로 알지 못하는 무감각을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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