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원^^★↓계속해서~
1998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 된 중국에서 최대 규모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완전한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는 황족 정원이며,
특히 서태후의 여름 별장으로 유명한[이화원]관광.
초딩 친구들과 함께^^
※(북경)서태후의 여름별장으로 유명한 이화원 ※
서태후의 여름 별장인 이화원은 1998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며
중국에서 최대 규모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완전한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는 황족 정원이다. 특히 서태후의 여름별장으로 더 유명한 이화원!!
북경 서북 지역에 위치한 이화원의 원래 이름은 '청의원'이었으나 서태후가
영국,프랑스 연합군에 의하여 불타 버린 청의원을 복원하면서 이름을
이화원으로 바꾸었다. 이화원 중앙에 있는 곤명호는 15년에 걸쳐 만들어진
인공호수로 여기서 파낸 흙들과 돌들은 대부분 그 옆에 있는 인공산인
만수산을 쌓는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호수,산,전각,누각,정자 등 이화원의
거의 모든 것은 사람의 손으로 의해 지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공호수인
곤명호는 인공이라고 하기에 믿기 어려울 정도로 그 규모가 실로 엄청나다.
겨울에는 얼음이 얼어서 스케이트를 즐기는 사람을 볼 수 있으며 여름에는
유람선을 타고 뱃놀이를 즐기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또한 곤명호를
안고 있는 만수산은 역시 곤명호를 팔 때 나온 흙을 쌓아 만든 인공산으로
화려한 누각이 있으며 이화원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어서 역시 인기가 좋다.
중국의 자금성이나 황제가 거처하던 곳에는 황제의 상징인 용이 항상 황궁을
장식한다.하나 이화원을 가보면 황제의 상징인 용보다는 그녀를 상징하는
학이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면서 용은 이화원 서태후가
정치하던 곳의 중앙의 자리를 학에게 주고 그 옆에 조각되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황제도 서태후 보다 나중이라는 의미를 상징하고 있다.
곤명호^^
이화원 중앙에 있는 [곤명호]는 15년에 걸쳐 만들어진
인공호수로 여기서 파낸 흙들과 돌들은 대부분 뒤에 있는 인공산인
[만수산]을 쌓는데 사용되었다고 한다.원래 북경 서북쪽 교외의
많은 샘물들이 모여 형성된 천연 호수라 물이 썩지 않는다고 합니다.
[용의 발톱 나무].
용좌수:이상한 모양으로 꼬인 나무(주로 시내 가로수로 이용) 이화원 여기까지~~
차 등등..., 물건 파는 곳^^ (석식)현지식 샤브샤브^^ 석식 후 북경 국제 공항에서^^↓ [연길 국제 공항] 도착 세기호텔 투숙^^ 호텔 조식 후 백두산으로 이동(3시간 30분 소요)
♧[중국.백두산]만리장성.명13릉.천안문 광장.천단공원.이화원.자금성.
북경서커스)[백두산]천지조망3.803m.[장백폭포1.203m]♧
★[중국.백두산]만리장성.명13릉.천안문 광장.천단공원.이화원.자금성.북경서커스)
[백두산]천지조망3.803m.[장백폭포1.203m](2012년 6월 2일~6일)★
★베이징 [北京(북경), Beijing]★
중국의 수도.
위치 중국 허베이성 중앙부
경위도 동경116°23′29″ 북위39°54′20″
면적 16808㎢
꽃 국화, 월계화
나무 회화나무, 측백나무
정식 명칭은 베이징직할시[北京直轄市]이며, 약칭하여 '징[京]'이라고도 부른다.
화베이평야[華北平野] 북쪽 끝에 있으며, 동남쪽으로 보하이해[渤海]와 150㎞
거리에 있다.전국시대에는 연(燕) 나라의 수도였으며, 초기에는 '지[蓟]'라고도
불렸다. 후에 요(遼)·금(金)·원(元)·명(明)·청(淸) 나라 등을 거쳐 중화민국 초기의
수도로서 800년의 역사를 이어왔다. 1928년 시(市)로 정하고 이름을 '베이핑
[北平]'으로 개칭하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과 함께 명칭도 다시
'베이징'으로 고치고 수도로 정해졌다.
면적은 16,410.54㎢이다. 행정구역은 둥청구[東城區]·시청구[西城區]·충원구[崇文區]
·쉬안우구[宣武區]·하이뎬구[海淀區]·차오양구[朝陽區]·펑타이구[豊台區]·스징산구
[石景山區]·팡산구[房山區]·먼터우거우구[門頭溝區]·퉁저우구[通州區]·순이구
[順義區]·창핑구[昌平區]·다싱구[大興區]·화이러우구[懷柔區]·핑구구[平谷區]등
16개 구와 옌칭[延慶]·미윈[密雲] 등 2개의 현(縣)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화와 대외
교류의 중심지이며 국제화된 대도시다.
1929년 교외의 저우커우뎬[周口店]에서 발견된 60만~23만 년 전의 베이징원인
[北京原人] 화석을 통하여 불을 사용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 이후
북방을 포함한 전국의 정치·문화·교통의 중심지로 발전하였으며, 인재가 흥성하여
숱한 역사적 인물을 배출하였다. 대표적 인물로는 원나라 희곡의 4대 작가 중
마치원(馬致遠)·관한경(關漢卿)·왕실보(王實甫) 등 3명이 이곳 출신이며,
《낙타샹쯔[駱駝祥子]》로 유명한 현대 소설가 라오서[老舍] 등이 있다.
★황제와 신의 특별한 관계, [천단공원(天壇公園)]★
황제가 된다는 것은 신과 교류한다는 뜻. 낱낱이 신께 고해바치고 백성의 안위를
약속받는다는 뜻. 베이징 황성 내에는 네 개의 제단이 있다. 남쪽의 천단(天壇),
북쪽의 지단(地壇), 동쪽의 일단(日壇), 서쪽의 월단(月壇)은 이름에서도 볼
수 있다시피 각각 제사를 지내는 대상이 다르다. 이중 천단(天壇)은 가장 중요
시되던 제단으로, 명청시대에 황제가 매년 이곳에서 천신에게 제를 올렸다.
이곳의 넓이는 무려 자금성의 네 배. 고대규모로는 가장 큰 제단이라 할만하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 최대의 제전이기도 하다. 명나라의 영락제가 1420년에 세운
이 제단은 1961년 최초의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중 하나로 선포되었고, 1998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됐다.건축법의 다양한 활용으로 “천원지방
(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 “천고지저(天高地底-하늘은 높고
땅은 낮다.)”는 천지의 순리를 담아내기도 했다. 제사를 지내는 환구단(圜丘壇)
정중앙에는 하늘을 상징하는 천심석(天心石)이 놓여 있는데, 이 천심석 위에서는
독특한 메아리현상이 발생한다. 이는 황궁우(皇穹宇)를 둘러싼 회음벽(回音壁),
황궁우 앞에 깔린 세 개의 돌, 삼음석(三音石)에도 생기는 기이한 현상이다.
회음벽의 이쪽에서 서서 말한 작은 소리는 벽을 따라 전파되어 다른 쪽 벽에서도
들린다고 하고, 삼음석의 경우는 첫 번째 돌에서 손뼉을 치면 한번, 두 번째
돌에서는 두 번, 세 번째 돌에서는 세 번의 메아리가 들린다고 한다.
천단의 중심 건축물인 기년전(祈年殿) 천정에는 용과 봉황이 어우러진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바닥에 조각되어 있던 봉황이 밤에 천정의 용에게
놀러 갔다가 날이 밝자 그대로 눌러앉은 것이라고.
★백두산 [白頭山]★
북한 양강도(량강도) 삼지연군과 중국 지린성[吉林省]의 경계에 있는 산.
위치 양강 삼지연군, 중국 지린성 경계
높이 2,750m
봉우리 장군봉
문화재 백두산 정계비
높이 2,750m로 북위 41˚01´, 동경 128˚05´에 있으며 한반도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백색의 부석(浮石)이 얹혀 있으므로 마치 흰 머리와 같다 하여 백두산이라
부르게 되었다.백두산에서부터 지리산에 이르는 백두대간은 한국의 기본 산줄기
로서 모든 산들이 여기서 뻗어내렸다 하여 예로부터 성산(聖山)으로 숭배하였다.
또 단군(檀君)이 탄강(誕降)한 성지로 신성시해왔다. 중국 금대(金代)인 1172년
에는 영응산(靈應山)이라 하여 제사를 지냈으며, 청대(淸代)에는 이곳을 왕조인
애신각라(愛新覺羅)의 발상지라 하여 숭배하였다.
북동에서 서남서 방향으로 뻗은 백두산맥[白頭山脈]의 주봉으로 최고봉은 장군봉
(2,750m)이다. 장군봉은 일제강점기에는 병사봉이라 불리며 해발 2,744m로
측량되었으나, 북한에 의하여 2,750m로 다시 측량되었다. 2,500m 이상 봉우리는
16개로 향도봉(2,712m), 쌍무지개봉(2,626m), 청석봉(2,662m), 백운봉(2,691m),
차일봉(2,596m) 등이 있다. 남동쪽으로 마천령산맥(摩天嶺山脈)이 뻗어 있다.
활화산으로 고생대부터 신생대까지 여러 시대의 지층들이 발달하였으며, 특히
중생대와 신생대의 구조운동에 의해 형성된 단열구조, 파열구조 단층이 발달
하였다. 화산분출은 쥐라기(약 6억 년 전)에서 신생대 제4기까지 지속되었는데
특히 신생대 제3기부터 활발히 진행된 화산활동으로 현무암질 용암이 대량
유출되어 약 5,350㎢의 넓은 백두용암대지가 만들어졌다.
약 200만 년 전부터 화산활동이 약화되어 지금의 산세를 형성하였다. 화산활동
후기에는 대연지봉, 소연지봉, 대각봉, 무두봉, 베개봉, 청봉 등 부속화산들이
형성하였으며 이들은 적갈색 다공질현무암용암의 분출로 생겼다.
최근의 분출은 1597년·1668년·1702년에 있었다고 문헌에 전하고 현재는 백두산
주변 50km 내외에 진도 2∼3의 약한 지진이 발생하고 있다. 화산폭발시 용암이
잘게 부서져 쌓인 부석층이 곳곳에 남아 있는데 천지 부근의 부석층은 두께가
20m 가량 된다. 화산재, 화산탄, 화산모래 등의 층도 남아 있다.
토양은 여러 해 동안 동결층의 영향과 한냉한 기후에서 형성된 토양, 평탄한
현무암대지에서 형성된 토양과 수평대성을 띤 포드졸성 갈색산림토 등이
다양하게 이루어져 있다.
기후는 전형적인 고산기후이며, 한국에서 기후변화가 가장 심하다. 연평균
기온은 6∼8℃, 최고기온 18∼20℃, 1월 평균기온 -23℃(최저 -47℃), 1월의
평균 일교차는 7.5℃, 7월의 평균 일교차는 4.8℃이다. 연평균 상대습도는
74%이며 여름에 가장 높고 겨울에 낮다. 북서풍과 남서풍이 강하게 불고
최대 풍속은 40m/s, 연중 강풍일수는 270일이며, 천지 부근은 강한 돌개바람인
용권이 자주 일어난다.
남쪽의 더운 공기와 몽골지방에서 오는 찬 공기가 마주치면서 안개가 많이
끼는데 7~8월에 안개가 끼는 날수는 33일 가량 되며, 구름이 많고 천둥현상이
잦으며 주로 눈·비를 동반한다. 벼락회수는 연간 약 50회이고 그중 60∼70%는
6∼7월에 있다. 연평균 강수량은 1,500mm이며, 겨울 날씨가 연중 230일 정도 계속된다.
백두산에는 검은담비, 수달, 표범, 호랑이, 사향노루, 사슴, 백두산사슴, 산양,
큰곰 등의 희귀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또한 204종의 조류가 서식하는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삼지연메닭(348호)·신무성세가락딱따구리(353호) 등이 있으며, 특별보호대상
조류로 메닭, 세가락메추리, 북올빼미, 긴꼬리올빼미, 흰두루미, 재두루미, 원앙,
청둥오리, 붉은허리제비, 숲새 등이 있다. 북살모사와 긴꼬리도마뱀 등의 파충류와
무당개구리·합수도룡뇽 등의 양서류가 있으며, 천지에는 천지산천어가 살고 있다.
300과 2,700여 종의 식물이 분포하는데 분비나무, 가문비나무, 종비나무, 잎갈나무,
좀잎갈나무, 백두산자작나무가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비교적 분포속도가 빠른
식물종이 다른 지역보다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화산 분출에 의해 피해를 받기 전의
식물종들이 정일봉을 비롯한 일부 지역에 자란다. 이 지역에서는 백두산의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흰병꽃나무·구름꽃다지·백리향·만삼·왜당귀 등이 자란다.
빙하기 이후 고산조건에 적응한 담자리꽃나무, 시로미, 물싸리, 두메김의털, 장군풀,
산할미꽃, 두메아편꽃, 큰산싱아, 각씨투구꽃, 끈끈이주걱, 두루미꽃, 눈사버들,
구름국화, 바위구절초, 만병초 등 한대성 식물들이 자란다.
또 매저지나무·들쭉나무·백산차 등의 냉대성 관목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금방망이·삼잎방망이·자주꽃방망이·무수해·황기·부채붓꽃·손바닥란·동의나물·
분홍노루발풀·왕바꽃·메바꽃·구름범의귀풀·물매화 등 냉대성 초본식물들이 있다.
산 정상에는 칼데라호인 천지(天池)가 있는데 면적 9.165㎢, 평균수심 213m,
최대수심 384m이다. 천지의 물은 높이 67m의 장백폭포(長白瀑布)가 되어
얼다오바이강[二道白河]으로 떨어져 쑹화강[松花江]으로 흐른다. 천지에
시원을 둔 폭포는 백두폭포·사기문폭포·형제폭포·백두밀영폭포 등이며 압록강
상류, 두만강 상류, 산다오바이강[三道白河]으로 흘러들어간다. 천지에는
백암온천과 새로 개발된 백두온천이 있으며, 주변에 장백온천과 제운온천이 있다.
허항령에서 북쪽으로 2km 떨어진 지점에 있는 삼지연(三池淵)은 대소 4개의
얕은 호수로 이루어져 있는데 주위 길이가 4.5km, 수심 3m인 천연호수로서
주변 경관이 뛰어난 휴양지이다. 문화재로는 1712년(숙종 38)에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세운 백두산정계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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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후기 ★
2012년 6월 2일~6월 6일까지 4박 5일 [중국](만리장성.명13릉.천안문 광장.
천단공원.이화원.자금성.북경서커스).[백두산]백두산 천지에서 흐르는 웅장
하고 장엄한[장백폭포1.203m].[천지조망3.803m]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칼데라호로 해발2.257m의 천문봉 짚차로 등정.유황을 다량으로 함유하고 있는
[유황 온천지대 관광].용정시 해란강이 한눈에 내다보이는 비암산 정상에
위치한 소나무로 독립운동의 혼이 담겨져 있는[일송정 차창]관광.[윤동주 시인]
이 다녔던 학교[용정 중학교.대성 중학교.윤동주 시비].북한의 남양시가 보이는
중국과 북한의[중조국경지대].를 새오정 산악회에서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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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 [萬里長城,万里长城, The Great Wall]★
북쪽의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위해 진나라 시황제가 증축하면서 쌓은
산성이며 명나라 때 몽골의 침입을 막기위해 대대적으로 확장하였다.
국가 중국(China)
지정일 1987년
분류 문화
테마분류 문화유산
소재지 랴오닝[遼寧], 지린[吉林], 허베이[河北], 베이징[北京], 톈진[天津],
산시[山西], 내몽골, 산시[陝西], 닝샤[寧夏], 간쑤[甘肅], 신장[新疆], 산둥[山東],
허난[河南], 후베이[湖北], 후난[湖南], 쓰촨[泗川], 칭하이[靑海], 그밖의 자치주
‘인류 최대의 토목공사’라고 불리는 이 거대한 유적은 중국 역대 왕조들이 북방
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세운 방어용 성벽이다. 지도상 연장 길이 2,700㎞이며,
중간에 갈라져 나온 지선들까지 합치면 총 길이가 약 5,000~6000㎞에 이른다.
동쪽 산하이관[山海關]에서 서쪽 자위관[嘉峪關]까지 동서로 길게 뻗어 있다.
보통 만리장성의 기원을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 때로 잡지만 그보다 훨씬
전인 춘추시대(BC 770~ BC 443)부터 북쪽 변방에 부분적으로 성벽이 건축되었다.
통일 왕국인 진나라가 들어서면서 북쪽의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이들 성벽을
연결하고 증축한 것이다. 당시의 만리장성은 동쪽 랴오양[遼陽]에서 서쪽
간쑤성[甘肅省] 민현[岷縣]까지로 지금보다 훨씬 북쪽에 있었다.2000여 년 역사,
시대에 따른 변화 만리장성이 현재 위치에 처음 축성된 것은 6세기 북제(北齊)
시대이다. 처음 건축될 무렵의 길이는 산시성[山西省] 리스 현부터 보하이만
[渤海灣]까지 약 1,500㎞였다. 이후 명(明)나라 때 총 길이 2,700㎞에 이르는
현재의 규모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명 나라는 15세기~16세기에 만리장성에
대한 대대적인 개보수 작업을 진행했는데, 당시 북방에 있던 몽골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북방민족인 만주족이 세운 청(淸) 왕조에서는 군사적
가치가 없어 방치되어 있다가, 중화인민공화국 때 관광 목적으로 보수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만리장성 2,700㎞가 똑같은 구조와 재료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이중으로 축성된 곳도 있고, 성벽의 높이나 폭도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대체로 서쪽보다는 동쪽이 견고하게 축성되어 있다. 성을 쌓은 재료는
햇볕에 말린 벽돌과 이것을 불에 구운 전(塼), 그리고 돌 등인데 동쪽으로
갈수록 더 단단한 재료를 사용했다. 성벽은 높이 6∼9m, 평균 폭은 위쪽 4.5m,
아래쪽 9m이다. 100여 m 간격으로 망루를 설치하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군사적 방어선이자 문화적 경계 중국 역대 왕조들이 만리장성을 쌓은 가장
중요한 목적은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왕조의 성격에
따라 만리장성의 중요성이나 만리장성에 쏟는 정성도 달라졌다. 왕조가 공격적
이었던 시기보다는 방어적이었던 시대에 만리장성은 더욱 중시되었다.북방
경영에 열심이었던 당나라 때나 전 세계를 무대로 침략전쟁을 벌였던 몽고
제국과 뒤이은 원나라, 만주에서 일어나서 만리장성 너머까지 다스렸던
청나라 때는 그 중요성이 크게 떨어지고, 따라서 개보수 작업도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만리장성은 군사적인 역할 이외에 문화적으로는 유목문화와 농경문화,
중원과 변방을 가르는 경계선의 역할도 했다. 중국 역대 왕조들이 만리장성에
들인 노력과 비용에 비해서 방어벽으로서 역할은 크지 않았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 실효성에 관계없이 오늘날 만리장성은 중국을 대표하는
명물이 되었다.
★ 명 13릉 중 "정릉[지하궁전]관광 ★
명조(1368~1644년)13명의 황제와 23명의 황후와 능묘(한꺼번에
모여 있는 산) 중에서 일명 지하궁전이라 불리는 13대 만력제의
능묘인[명 13릉-명 13릉 중 "정릉[지하궁전]관광
베이징 시내에서 북서쪽으로 약 50km 떨어진 천수산 아래에 위치한
북경 명13릉 은 약 40km² 부지 안에 명나라 제3대 황제 영락제의
무덤인 장릉(长陵)부터 승정제의 사릉(思陵)에 이르기 까지 황제
13인과 황후 23인 비, 그리고 1인의 능묘가 모여 있는곳 입니다.
실제 개방되어 관람할 수 있는곳은 13곳 중에 3곳으로 3대 영락제의
장릉(长陵) 13대 융경제의 조릉(昭陵) 14대 만력제의 정릉( 定陵) 만
일반에게 개방하고 있습니다.
★(북경)서태후의 여름별장으로 유명한 [이화원] ★
서태후의 손톱이 인상적이다. 당시 신분의 상징으로 귀족이나 왕족들은
손톱을 길게 기르던 풍습이 있었다. 서태후 역시 손톱을 무척 길게 길렀는데
때론 자신의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이나 시녀들에게 날카로운 손톱으로 얼굴을
할켜 깊은 상처를 내는둥 거의 무기 수준으로 사용을 하기도 했다 한다.
손톱이 부러질까 손톱 보호하는 손톱싸개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고 있다
서태후의 여름 별장인 이화원은 1998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며
중국에서 최대 규모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완전한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는 황족 정원이다. 특히 서태후의 여름별장으로 더 유명한 이화원!!
북경 서북 지역에 위치한 이화원의 원래 이름은 '청의원'이었으나 서태후가
영국,프랑스 연합군에 의하여 불타 버린 청의원을 복원하면서 이름을
이화원으로 바꾸었다. 이화원 중앙에 있는 곤명호는 15년에 걸쳐 만들어진
인공호수로 여기서 파낸 흙들과 돌들은 대부분 그 옆에 있는 인공산인
만수산을 쌓는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호수,산,전각,누각,정자 등 이화원의
거의 모든 것은 사람의 손으로 의해 지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공호수인
곤명호는 인공이라고 하기에 믿기 어려울 정도로 그 규모가 실로 엄청나다.
겨울에는 얼음이 얼어서 스케이트를 즐기는 사람을 볼 수 있으며 여름에는
유람선을 타고 뱃놀이를 즐기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또한 곤명호를
안고 있는 만수산은 역시 곤명호를 팔 때 나온 흙을 쌓아 만든 인공산으로
화려한 누각이 있으며 이화원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어서 역시 인기가 좋다.
2012년 6월 10일^^☎☎
★이화원^^★
1998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 된 중국에서 최대 규모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완전한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는 황족 정원이며,
특히 서태후의 여름 별장으로 유명한[이화원]관광.후 이동~~
북경에서 창밖 풍경^^↓ 석식 후 공항으로 이동~^^ 북경 국제 공항^^ 연길~백두산으로 이동(3시간 30분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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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의 여인 들 청나라 [서태후] ★(책이라 생각하고 꼭 읽어 보세용~ㅎㅎㅎ)
중국 북경에 있는 이화원은 서태후의 별장겸 그녀가 마지막에 중국을 정치하며
지내던 거처다 이화원은 중국 최고의 악녀로 입에 오르 내리고 있는 서태후의
여름 별장겸 노후 거처하던 별궁이다 중국의 자금성이나 황제가 거처하던
곳에는 황제의 상징인 용이 항상 황궁을 장식한다 하나 이화원을 가보면 황제의
상징인 용보다는 그녀를 상징하는 학이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면서 용은 이화원 서태후가 정치하던 곳의 중앙의 자리를 학에게 주고 그
옆에 조각되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황제도 서태후 보다 나중이라는 의미를
상징하고 있다
환란의 청조 말기에 서태후는 어떤 이에게는 시대를 밝히는 등불이었으며,
반면 어떤 이에게는 무시무시하고 매몰찬 이름이었다. 중국역사에는 역사를
이끌어 갔던 유명한 여인네들중 가장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리고 강한
인상을 남긴 여인 중에 제일이 서태후 일것이다.중국이란 나라를 자신만이
이끌수 있다는 강한 신념과 권력에 대한 편집증 적인 욕심은 당시 숨가쁘게
돌아가는 시대적 상황에서 바른 판단을 내리기에 한계를 가지게도 했다.서태후의
손톱이 인상적이다. 당시 신분의 상징으로 귀족이나 왕족들은 손톱을 길게
기르던 풍습이 있었다. 서태후 역시 손톱을 무척 길게 길렀는데 때론 자신의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이나 시녀들에게 날카로운 손톱으로 얼굴을 할켜 깊은 상처를
내는둥 거의 무기 수준으로 사용을 하기도 했다 한다. 손톱이 부러질까 손톱
보호하는 손톱싸개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고 있다
서태후는 자신의 아름다움과 젊음을 간직하기 위해 했던 기이한 행동으로도
유명하다 자신의 방앞을 지키는 사람들은 젊고 잘생긴 남자들을 고용하였고
그들에게 하루종일 북을 치는 일을 시키기도 하였다. 힘이 좋고 건장한 사람들은
장시간 북을 쳐도 북소리가 활기 참을 느낄 수 있어 이들은 그녀의 문앞을 지키게
하면서 때론 개인적인 시중을 들게 하게도 했다 한다 젊고 잘생긴 건장한
남자들의 시중을 받으며 그들의 기를 받으면서도 때론 사적인 이야기가 새어
나가는 것을 우려해 그들을 죽이라는 명을 내리기도 하였다 한다 그녀의 아이같은
피부를 유지하기 위하여 젊고 예쁜 유모을 고용하였다 마치 어린 아이같이
저녁에는 유모들이 아기를 달래듯 다둑거리게 시키며 서태후는 젊은 유모의
가슴에 안겨 젖을 빨아 먹으며 아이와 같은 피부와 젊음을 유지하려 하였다
자금성 안에 있는 서태후의 거처다. 자금성 에는 여인들의 거처가 따로 있는
데 황제의 부인이나 공주들이 거처 하는 곳은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황비를
보통 동태후라 불리고 있고 후궁들이 거처하고 있는 곳은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서태후 역시 후궁으로 그녀가 위치하고 있는 거처가 서쪽에 있기 때문에
서태후라 불려 지게 됐다.서태후는 만주 귀족 가정에서 태어 났으나 전란으로
인해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고생을 하였다 황궁에 들어 가면 편안한 삶을 살것으로
기대하여 17세때 궁녀로 뽑혀 자금성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하나 자금성에는
서태후 외에도 상당히 많은 후궁들이 있어 황제의 눈에 띄기란 하늘의
별따기와 같았다.
서태후는 황제를 만나기 위해 황제의 시종에게 뇌물을 주며 황제가 언제
어느곳을 지나가게 될지 알아 내고 우연을 가장하여 황제가 지나가는
길목에서 자신의 장기인 경극 노래를 멋들어 지게 불렀다. 멋진 노래를
듣게 된 황제는 호기심이 생겨 그 궁녀가 누군가 하고 묻는데 그 때 서태후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손수건을 떨어 뜨리며 그 자리를 홀연히
떠나버린다.황제는 궁금증에 수건을 집어 들며 누군가 하고 묻게 되고
뇌물을 받은 시종은 누군지 알면서도알아 보겠다며 황제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게 된다.
서태후는 자금성에 들어 와서도 황제를 알현할 수 없고 관심을 끌기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으로 황제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자신도 즐겨하고
좋아하지만 황제도경극의 노래를 좋아한다는 정보를 알고 열심히 연습을
하면서 황제와의 만남을 유도하고 고 침실까지도 이끌어 내기 위해 많은 노력과
연습을 하였다.서태후와 함풍황제는 이렇게 만나게 된다.제 7대 함풍황제의
아들을 낳게 됨으로 황귀비가 되고 그 아들은 동치황제가 된다.함풍황제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다 서태후로 인해 아들을 얻게 되고 얼마 안되 황제는
서거하게 된다 함풍황제가 죽게 됨으로 서태후의 아들이 6살의 어린 나이로
동치 황제로 등극하게 되고 서태후는 황비에서 황태후가 되면서 어린
아들대신 수렴청정을 하게 되면서 근48년간이나 중국을 다스린다.
서태후가 아들을 낳았지만 함풍 황제의 황후인 동태후가 동치황제의
양모가 되어 어린 황제를 같이 키웠다. 함풍황제의 서거로 6살의 동치
황제가 대를 잇게 되나 어린나이라 동태후와 서태후는 같이 수렴청정을
한다. 두 태후의 성격은 대비가 되게 차이가 났다 서태후는 야심가이며
정치에 관심을 갖아 적극적으로 수렴청정을 하며 많은 것을 혼자서
차지하려 한 반면 동태후는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고 따뜻함 마음의
소유자로 대신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었다두명의 태후는 동치
황제가 17살이 되어 결혼을 하게 되자 수렴청정을 끝내기로 한다 동치
황제의 성품 또한 날카롭고 폭주가 이며 성격이 거칠어 정치를 하면서도
자꾸 참견을 하려는 자신의 생모인 서태후와 항상 충돌하게 된다.
이로 인해 동치황제는 항상 푸근한 동태후를 가까이 하게 되고 자신의
황후를 맞이 함에도 서태후가 추천하는 여인을 마다하고 동태후가
좋아 하는 여인을 황후로 맞게 됨으로 서태후와 더욱 사이가 벌어 지게
되고 동태후 때문에 자신의 친아들과 거리가 멀어지게 됐다하여
동태후를 더욱미워하게 된다.동치 황제가 결혼함으로 수렴청정을
끝내기로 했음에도 불구 하고 서태후는 계속 정치에 참견하고
모든 보고를 자신에게 먼저 하게 하고 이에 대한 결정도 아들인
동치황제의 결정을 무시하고 서태후의 결정대로 지시하곤 하여 두
모자간의 갈등은 점점 심화되었다.
두 태후의 갈등은 함풍황제의 제사날에 고조 된다.동태후는 중궁태후인
제 1 태후로 가장 앞서 가는데 옆에서 따르던 서태후에게 한발자욱
뒤에서 따르라 하자 사람들 많은곳에서 자신에게 수치를 주었다
하여 이때 부터 서태후는 동태후를 제거를 결심하게 된다.하나 서태후의
품성을 알고 있던 선황제인 함풍황제는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서태후가 황실의 서열을 무시하고 동태후에게 경망한 행동을 하게
되면 서태후를 제거하라는 유서를 남긴것을 알기에 함부로 행동을 할 수
가 없었다 마침 그때 동태후가 병으로 앓아 눕자 서태후는 눈물을
흘리면서 빨리 쾌유하기를 빈다면서 옆에서 갖은 정성을 가장하여
문병을 한다 아픈 사람에게 사람피를 타 먹이면 빨리 병이 난다며 자신의
피를 썩어 약제를 만들었다 한다
함풍황제는 이런 자신의 맘도 모르면서 그런 밀서를 남겼다 하며
눈물을 흘리며 완쾌를 기원하는 모습을 보자 동태후는 이에 감탄하여
이토록 자신을 생각해주는것에 감동하였다 하며 함풍황제의 밀서를
불태워 버린다 그 후 부터 서태후의 태도는 변하였고 동태후는
후회하였지만 때 늦은 후회였다.서태후가 아퍼 누웠을때 동태후가
문병을 오자 서태후는 너무나 감사하다 하며 자신의 냉정한
태도에 대해 용서를 구하였다 이에 마음이 누그러진 동태후는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처소로 돌아 갔고 자신의 문병옴에 감사한 맘으로
서태후는 동태후에게 선물로 전병을 보냈으나 그 전병을 먹고 며칠
지나지 않아 동태후가 죽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서태후의 독살에
대한 의심을 품고 있었지만 감히 발설할 수 없었다 이제 단독으로
황실의 어른이 된 서태후는 동태후의 추천으로 결혼하게 된 동치
황제의 황후를 노골적으로 핍박을 하기 시작하며 황제와 황후의
접촉을 금지 시키며 동치황제가 자유롭게 대신들과 만나지도 못하게
하며 주위와 단절된 생활을 시켰다
이에 동치황제는 자포자기 하게 되며 밤이면 변장을 하고 기생집을
드나 들면서 타락의 생활을 하기 시작하다 병들어 죽게 된다.아들이
죽자 자신이 권력을 독점하고 수렴청정하기 위해이에 대한 누명을
동치황제의 황후에게 뒤집어 씌어 남편을 죽게 했다는 죄명으로
황후마저 죽인다그리곤 자신의 동생의 아들인 3살짜리 광서황제를
황제의 자리에 즉위시키곤 다시 수렴청정을 시작한다.이화원 내의
인공 호수 -곤명호 겨울이라 물을 따 빼내어 을씨년스런 모습이다.
여름에는 갖은 꽃과 물이 가득찬 호수에서 뱃놀이를 하기도 한다
광서황제가 19세가 되어 스스로 정치를 하고자 하여 서태후와 충돌이
생기게 된다 광서황제는 그를 따르는 유심파인 강유희, 양계초등과
함께 군정 실권을 잡으려 개혁정치를 표방하였고 이로 인해 서태후와
갈등이 깊어 지게 된다.
처음엔 광서황제가 실권을 잡는 듯 했으나 103일 만에 서태후에
진압되고 개혁파등은 모두 살해 되거나 외국으로 망명하였고
광서황제는 가택연금의 생활이 시작 되었다.광서황제는 여름에는
이화원의 옥판당에 가택 연금 당했고 겨울에선 중남해의 영대에
가택연금 당했다. 광서황제는 외부와 연락도 할수 없었고 모든
사람들과 격리 되어 이화원의 외진곳에 높은 담을 쌓은 옥판당에서
세상과 격리 된채 살아갔다 광서황제는 10년 간 갇혀 살다 1908년
서태후가 죽기 하루전에 서태후에 의해 살해 되었다.1908년 10월
13일 그녀는 74세 생일을 기하여 큰 연회를 베풀었다. 그녀는 여러
날 동안 과식하여 일째 되던 날 이질이 발병하였다. 아편을 평소
보다 배로 복용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고 그녀를 더욱 여위게
만들뿐이었다. 20일 부의(중국 마지막 황제 : 영화로도 제작되었음)
를 후계자로 세운 다음 날 광서황제가 세상을 떠났다.1908년 10월
23일 정오에 서태후는 점심 식사를 받고 갑자기 의자에 쓰러지곤
운명을 달리했다
이화원에 있는 기다란 장랑의 복도로 기네스 북에 올라있을 정도로
긴복도다 서태후는 장랑을 산책하면서 이화원의 호수와 경치를
즐겼다장랑의 천정에는 중국의 여러 지역의 모습의 산수화가 그려져
있다 서태후는 극한 미식가로 알려 지기도 했다 서태후의 밥상에는
절대로 똑같은 음식이 상에 올려 지는 것이 용납 되지 않았으며
밥상에는 수백가지의 산해진미의 요리가 가득 쌓여 상이차려 졌다
그 중에는 한번도 젓가락이 가지 않는 음식이 수두룩 했다 당시
서태후 의 한끼 식사비로 백은 3킬로 그램이 들었다 하는데 이
돈으로 5000kg의 쌀을 살수 있을 정도였으며 일반 서민 만명이
하루 식사하는 비용이었다 한다
서태후는 또한 매우 사치하였는데 하루에도 몇번씩 옷을 갈아입곤
하여 옷상자만 해도 3000여 상자로 가득찼다 한다대신들, 궁녀들
모두 서태후를 무척 무서워 했는데 광서황제의 아버지는 그의
어린아들을 황제로 임명하자 오히려 무서워 거절도 하지 못하고
떨었다 한다 자신의 권력과 영원한 젊음을 갖고 싶어함은 일반
여인네와 다를 바 없었던 서태후도 늙어감이 두려워 자신의 젊음을
지키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였다 궁여들이 서태후의 머리를
빗기다 머리카락 하나마 빠져도 죽음을 명했기에 궁녀들은 마치
머리카락이 하나도 안빠지고 머리를 빗기는 흉내를 내기 위해
소매가 넓은 옷을 입고 머리를 빗겼다 한다. 넓은 소매에 서태후의
빠진 머리카락이 소매안으로 들어가기에 서태후는 자신의 머리카락이
빠지지 않았다고 착각하였다.
또한 자신의 피부를 젊은 여인네 같이 유지하고파 저녁마다 유모의
젖을 먹으면서 아기의 피부를 유지할 수 있다 생각한 여인이었다
유모는 마치 아이를 재우듯 가슴에 서태후를 안고 다독거리면서
자신의 젖을 먹였는데 과거중국 풍습으로 여인네가 남자한테 젖을
먹여 젊음을 유지한다는 풍습을 자신도 이용한듯하다 자신의
아들과의 인륜도 외면하고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이에 방해 되는
모든 사람들을 제거한 서태후, 그렇게 붙잡고자 하던 젊음도 떠나가고
자신의 말년에는 치매에 걸려 한낱 정신혼미한 노인네의 모습 이었다.
★자금성 정문인 오문★
서태후가 가장 아쉬어 했고 유감스러웠던 것은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을 통과해 보지 못함이다 48년간이나 그 거대한 중국을
다스리고 모든 사람을 떨게했던 서태후였건만 황제도 아니었고
황후도 아니었기에 황제만 드나들 수 있고 황제의 결혼식날 황후의
가마만의 들어갈 수 있는 그 오문을 들어가지 못함의 서태후의
유일한 아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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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중국 아파트는 옛날 우리나라처럼 참 멋없게 성냥갑처럼 지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