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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창성개명(創姓改名)과
일제강점기의 창씨개명(創氏改名)
원래 고대 중국에서는 성(姓)과 씨(氏)는 엄연히 다른 것이었다.
아주아주 옛날에는 성(姓)이 어머니 쪽 혈통을 표시하는 것이었고,
씨(氏)가 아버지 쪽 혈통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모계제 사회이어서 성(姓)이 씨(氏)보다 한 수 위로 평가되었다고 한다.
조금 있다가 부계제 사회가 되면서 나라도 생기고 천자도 생겼다.
이 때부터
姓은 천자가 내려주는 것이고
氏는 제후나 왕이 내려 주는 것으로 되었다.
그런데 나중에는
姓과 氏가 너무 많이 남발되어 한때 나라였던 지방의 명칭을 주로 姓으로 사용하였고
(姜, 韓, 魏, 趙, 秦, 宋... )
氏로는 그 사람의 출신 지역 또는 현재 살고 있는 지방의 명칭을 주로 썼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姓과 氏가 마구 혼동되어 쓰였는데, 지금도 그렇다.
부여국(夫餘國, 지금 중국의 남만주) 출신인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고
그 아들 온조가 백제를 세웠는데,
후세에 역사를 정리하는 사람들이 동명성왕 주몽과 온조왕을 "부여씨"라 부르기도 하였다.
여기서 姓이 아니라 氏를 사용한 것은
한반도의 서쪽 지방은 항상 중국의 눈치를 보아야 했고,
姓과 氏를 엄격히 구분을 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과 비교적 교류가 적은 신라는
겁도 없이 신하들에게 姓을 내려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유리왕이 신라 개국의 공신들인 6촌 촌장들에게
이(李), 최(崔), 정(鄭), 손(孫), 배(裵), 설(薛) 등의
6姓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그것인데...
원래 姓도 氏도 쓰지 않던 우리나라에서
유리왕이 갑자기 姓을 하사했다는 이 기록은 신빙성이 좀 떨어진다고 볼 수 있으며,
이 기록은 통일 신라 이후
왕족 중심으로 세계화한다면서 서로 앞다투어 중국식으로 姓을 만들어서 쓸
그 때에 유리왕 때로 소급하여 후손들이 기록하였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신라가 중국 당나라를 도와 고구려를 무너뜨린 댓가로
백제 땅을 선물로 받아서 통치하던 그 시절,
신라의 왕족은 중국식으로 姓이나 氏를 만들고 이름도 중국식으로 바꾸어 쓰면서
약간은 잘 보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 창씨개명의 시초가 되는 셈인데,
이와 같이 우리나라의 창씨개명은 신라의 귀족을 중심으로 자진해서
중국식 이름을 가지는 것으로 출발하였다.
(김춘추, 김유신.. )
그래서 덕분에 이미 죽고 없는 알지,
수로왕, 혁거세 등도 본의 아니게 김(金), 박(朴) 등의 성씨를 가지게 되었다. 이 때에 "거칠부" 같은 우리나라식 이름도 중국식 이름인 "황종(荒宗)"으로 개명하는 작업도 함께 이루어졌고, 이미 죽고 없는 "붉은 애"도 "혁거세(赫居世)"란 이름으로 소급해서 개명되었다. 이 때의 중국식 창씨개명은 작은 나라 신라의 국민으로서는 영광이었다.
그 이전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이나 연개소문(淵蓋蘇文)도 성씨(姓氏) 없이 이름만 있는 것이었다. (그 아들들의 이름을 보면 을지나 연개라는 글자가 안 보인다.) 그것이 우리나라 전통이었다.
그리고 또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나라를 세울 무렵에 개국 공신들에게 많은 姓을 하사한다.
어차피 신라 때부터 귀족들의 상징이 성씨(姓氏)를 소유하는 것이었으니만큼 개국 공신들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 준다는 증거로 姓을 하사해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려 초에는 姓을 가진 사람들이 조금은 더 많아졌고 중국식으로 창성개명(創姓改名)이든 창씨개명(創氏改名)이든 그것은 가문의 영광이었다.
고려 시대에 중국의 경서 실력으로 관리를 뽑는 과거제도가 시행되고, 고려 말기에는 중국 원나라의 지배를 받으면서 우리나라에서 힘깨나 쓰는 사람은 대부분 중국식 성씩(姓氏)를 가지게 되었고 일반 국민들은 아직도 성씨가 없었다.
세월이 또 흐르고 흘러...
조선 말기 엄청나게 어지럽던 시절....
토끼 모양의 우리나라를 가운데 놓고 늑대, 곰 등 수많은 맹수들이 서로 뜯어 먹으려고 으으렁대던 시절이 있었다. ( 유럽 신문에 이러한 내용의 만화가 게재된 적이 있다 )
각자의 특기를 최대한 살려서 누가 먼저 먹나 경쟁이 붙었을 때 가장 먼저 입질을 한 것은 선교사를 앞장세운 유럽 세력들이었다.
당시 유럽 제국주의 열강들의 약소국 침략공식은 선발대로 선교사를 보내서 하층민들부터 민심을 교란시켜 놓고, 그 다음으로는 대량 생산된 신문명의 물자들을 풀어 놓아 경제 기반을 흔들어 놓는데... 그래도 별 효과가 없을 때에는 최신식 대량 살상 무기를 가진 군대를 보내서 가볍게 식민지로 만드는 작전이었다.
이 때 들어 왔던 신부나 선교사들이 우리나라 서민들을 중심으로 영세명이니 세례명이니 하여 새로운 이름을 많이 선사하게 된다. 자기네들 모임에서는 "요한", "마리아", "아가다" 등의 독일식 발음의 성자명으로 개명(改名)한 이름을 사용하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역사상 두 번째 창씨개명에 해당한다. 이 두 번째의 특징으로는 첫 번째와는 달리 서민들 위주로 이루어졌고, 창씨는 없이 개명 위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첫 번 째와 공통점이 있다면 개명한 경위야 어찌 되었든 대부분 스스로 원해서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이 공통점이다. 이와 같이 천주교의 성인 이름으로 개명하는 것은 옛날에 중국식 창씨개명 때와 마찬가지로 상당히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갑오경장 이후 일본은 고맙게도 우리를 중국으로부터 독립시켜 주면서 독립문도 만들게 하고 한글 활자를 긴급 제작하여 한글로 된 신문도 볼 수 있게 하였다. 무엇보다도 고마운 것은 양반, 쌍놈 표시가 안 되어 있는 호적부를 새로 만들어 줄테니 누구나 관청으로 와서 성명을 신고하라고 한 것이었다. 姓이 아직까지 없는 사람도 관청에 와서 신고만 하면 다 姓과 이름을 모두 호적부에 올려 준다고 하였다.
그래서 많은 서민들은 姓이 있는 사람에게 달려 가서 姓을 좀 빌려 달라고 하였다. 그것도 힘센 양반 한테는 제대로 말도 못 붙이고 가난한 양반에게 쌀 몇 말 줄테니 姓 좀 쓰게 해 달라고 부탁하여 다들 면사무소로 달려 갔다. 어떤 동네는 주민 전체가 김해김씨 댁 소작인들이라 주인 댁의 양해를 얻어서 일제히 김해김씨로 신고하였다고도 한다. 물론 거기에는 그 댁의 머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쨌든 이 때 갑자기 姓을 만들어 붙인 사람이 엄청나게 많다는데 그 정확한 숫자는 파악이 잘 안 되고 있다. 누구나 다 "우리 가문은 대대로 양반들이었다"라고 확실히 가정교육을 시켜 두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나라 전 국민은 모두가 다 "양반의 자손"이 되어 버렸다.
이것이 세 번째 창씨개명이다. 姓과 氏의 구분이 여전히 모호하기는 하지만, 이 세 번째 창씨개명 덕분에 우리나라는 "쌍놈의 자손"이 아무도 없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품종의 나라가 되어 버렸다.
- "내가 보리쌀 두 되로 족보에 이름 넣었고, 호적부 정리를 했다는 말을 아무 한테도 말하지 말라!" -- (머슴 출신인 어떤 분의 유언)
우리가 춘향전을 보아도 홍길동전을 보아도 양번은 한두 명밖에 안 나오고 대부분 평민밖에 없는데, 일본의 강요에 의한 이 호적법 개정은 우리나라 전 국민을 양반의 자손으로 만들어 버렸다.
어쨌든 이 세 번째 창씨개명도 대부분 본인의 간절한 희망에 의하여 이루어졌고, 법적으로도 노비가 아닌 자유인으로 만들어 준 데에다 졸지에 왕족의 성씨까지 얻게 되었으니, 독립국 대한제국의 국민에게 일본의 인기는 엄청나게 높아졌다.
이러한 인기작전이 모두 일본의 주도면밀한 계획의 일부였는데, 일본은 외교적, 군사적으로도 거의 완벽하게 계획을 수행해 나갔다. 청나라와 러시아는 힘으로 눌렀고, 영국과 미국은 개별 협약으로 같은 편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한일합방을 할 때도 모두들 눈을 꾹 감아 주었다.
아직까지도 애꿎은 이완용을 매국노 제1호로 지목하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엄밀하게 따져 보면 사실 한일합방은 수십 년간에 걸친 일본의 빈틈없는 계획과 우리나라 고종의 무능함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완용에게 피박, 광박 다 뒤집어 씌운 것은 정말로 좀 너무했다.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일부 인사들이 용감하게, 정말로 용감하게 일본식으로 창씨개명을 하고자 했고, 실제로 일본식 성씨와 아름을 만들어서 다니기도 하였다.
개화파인지 친일파인지 김옥균(金玉均)은 "암간주작(岩間周作)"이란 이름으로 창씨개명하였고
철종의 부마이며 태극기를 처음으로 만든 박영효(朴泳孝)는 "산기영춘 (山崎永春)"으로 창씨개명하였고
당시 의지의 친일파였던 송병준(宋秉畯)도 "야전평차랑 (野田平次郞)"으로 행세하고 다녔다.
그러나 데라우치 총독은 조선 사람이 일본식으로 창씨개명을 하는 것은 건방진 놈이거나 미친 놈이 아니면 아부에 목적이 있는 놈이라 하여 일본식 창씨개명은 엄격히 금지하였다. 일본 사람 눈에서도 조선 놈이 일본인 이름으로 일본인 행세를 하는 것이 보기 싫었던 것이다.
이 때에 이완용은 일본식 창씨개명은 커녕 일본어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없어서 일찍이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유학파 이인직을 이완용의 일본어 담당 비서관으로 붙여 주기도 하였다. 자진하여 창씨개명을 한 김옥균, 박영효, 송병준과는 사뭇 다른 구석이 있는데, 우리 역사에서는 김옥균, 박영효에게 지나치게 좋은 평가를 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갑자기 머리를 스치고 지나 간다.
어쨌든 한일합방 이후 일본은 점점 더 강해지고 나날이 욕심을 키워 가고 있었는데..
만주사변에 큰 전공을 세운 미나미 지로(南 次郞) 육군대장이 1936년 조선 총독으로 부임해 오면서 여러 가지로 상황이 달라진다.
세계 정복의 꿈이 있는 미나미 총독은 머지 않아 일본이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치를 경우 일본 청년들만으로는 전쟁을 수행하기 어려울 것이라 판단하고, 일본 식민지 중에서 조선 지방 정도는 군대를 끌어가도 총부리를 거꾸로 갖다 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아무리 조선이 오래 된 식민지라 하더라도 조선 청년들을 그냥 일본군으로 데려 올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내 놓은 당근이 "차별대우 없는 명실상부한 내선일체의 실현"이었다.
미나미 대장이 만주에 있을 때, 만주에 와 있던 조선인들이 "만주 놈들이 일본 이름 가진 사람 말만 듣고 조선 이름 가진 사람 말은 잘 안 듣는다"라고 하며 일본식 이름을 쓸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말을 여러 차례 들은 바 있고, 조선 총독으로 온 뒤에도 조선과 일본에서 생활하는 여러 조선인들이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고 민원이 자주 들어오고는 하는데...
바로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미나미 총독은 조선 사람에 한하여 일본식으로 창씨개명을 허용하여 주는 법안을 만들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러면 앞으로 조선인들을 차별대우한다는 말도 안 나오게 될 것이고.... 일단 차별에 대한 불만이 사라지게 되면 조선에서 청년들을 군대를 끌어 가도 별로 반발이 없어질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일본 군부의 생각이었다.
어쨌든 일본식으로 창씨개명을 허용한 것이 조선인들의 희망사항이었다는 최근 일본 모 장관의 발언이 사실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얘기이다. 우리나라 언론에서 계속 지나친 과민 반응을 보이면 오히려 우리의 상처가 더 커질 수도 있다.
그래서 1939년 11월 21일 조선총독부는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공포하고, 1940년 2월 11일 일요일부터 8월 10일까지 6개월 동안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어서 신고하라고 하였는데, 그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조선인의 성명제(姓名制)를 폐지하고 씨명(氏名)의 칭호를 사용한다.
- (중국식 성명제(姓名制)에서 일본식 씨명제(氏名制)로 바꾼다는 것임. 일본은 姓을 안 씀)
- 婿養子(서양자, 데릴사위)를 인정하되 데릴사위는 처가의 氏를 따른다.
- 다른 姓의 양자를 인정하되 양자는 양자 간 집의 氏를 따른다
- 결혼한 여자는 남편의 氏를 사용할 수 있다. (미국, 일본처럼)
설날이 막 지난 음력 정월 초4일, 양력으로 2월 11일 일요일 아침부터 접수를 하였는데...
첫날 새벽부터 와서 기다리다가 신고를 한 사람도 있었다.
한 때 조선의 3천재에도 이름이 올랐었고, 1919년 2․8독립선언문을 쓰기도 했고, "무정", "흙" 등 수많은 소설을 발표했던 이광수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이광수는 2,600년 전 일본 神武天皇이 즉위하였다는 香久山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하면서 "香山光郞"이란 이름으로 신청하고 갔다. 약 30년 전에 데라우치 총독이 이러한 아부꾼들이 보기 싫어서 창씨개명을 금지한 적이 있었는데, 창씨개명을 허용하자 당장 이러한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또 당시 동양연료회사의 사장이었던 金桂祚는 자기 회사 전 직원을 나카무라상(中村氏)으로 통일하여 신청하기도 하였다.
간혹 불경죄로 접수가 거부된 이름들도 있었는데....
당시 일본 천황의 궁궐 이름과 천황의 이름을 딴 "若松 仁(와카마쓰 히토)"라는 이름이 접수 거부되었고
"개자식에다 곰의 손자"라는 뜻인 "犬子熊孫(이누코 구마소오)"라는 이름도 접수 거부되었다고 한다.
어쨌든 종친회들은 바빠지기 시작했고, 우리 집안은 어떻게 할 것인가로 논의가 분분하였다.
대부분의 종친회에서는 本貫과 姓에서 글자를 따 와서 일본식 씨(氏)를 만들었다. 김해김씨는 金海로, 전주이씨는 궁궐의 근본이라 하여 宮本으로, 밀양박씨는 혁거세 우물의 이름을 따서 新井으로 하는 등 각 성씨에서는 나름대로의 특징을 살려 내어 창씨하느라 제법 머리를 썼다.
옛날 신라의 귀족 후예들은 삼국유사의 기록을 참고하여 창씨하기도 하였다
어쨌든 이번의 창씨개명이 우리나라 네 번째의 창씨개명이었다.
앞의 것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전체 국민이 모두 관련되었다는 것과 개별적인 찬성, 반대에 상관없이 무조건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이 좀 다르다.
중국식 姓이 얼마나 좋은 건데 일본식 氏로 바꾸라느냐 하면서 자살해 버린 사람도 있고
아예 동사무소에 가지도 않아서 전쟁 때에 식량 배급을 못 받아 굶어 죽은 만해 한용운 같은 사람도 있었다.
그 와중에 일본식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배짱 좋게 그냥 원래 姓을 그대로 신고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류(柳), 남(南), 임(林), 계(桂), 진(秦), 구(丘) 姓을 쓰는 사람들 대부분과 손(孫) 姓의 일부는 일본에도 같은 姓氏가 있다고 하여 따로 創氏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때 창씨개명을 적극 반대한 사람 중에는 여러 가지 유형이 있겠지만.
1. 40년 전 일본의 강요로 호적법이 개정되어 법적으로는 양반-쌍놈이 없어졌지만, 그래도 성씨 하나로 옛 양반의 후손이었다는 걸 자랑스러워 하였는데. 이제는 그 나마도 양반의 흔적이 없어지게 되었으니 억울하고 분하다는 사람들이 그 중 하나이고..
2. 40년 전 일본의 강요에 의한 호적법 개정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덕분에 노비문서가 자동 소멸되고.. 그리고 얼마나 어렵게 얻은 양반의 성씨인데 40년도 못 쓰고 또 버린단 말인가... 이번 기회에 결사 반대하여 우리 집안이 대대로 양반의 자손이었던 것처럼 해야지.. 암, 그렇구 말구 하는 사람들도 그 중 하나였다.
어쨌거나 자진해서 했든, 나중에 차별대우 받는다고 또 군소리하지 말고 빨리 하라는 강요에 의해서 했든 8월 10일 1차 마감일 현재 창씨개명 등록 완료자는 가구 수 기준으로 79.3%에 달했다.
하여튼 당시 창씨개명한 이름은 약 5년 정도만 사용했을 따름이지만, 사회적인 충격은 참으로 컸고, 황공하옵게도 일본인과 똑같은 대우를 받아 징병으로 군대 간 청년들은 대부분 미국 군인들에게 총 맞아서 다 죽었다.
조선인 징병법안이 일본국회에 계류되어 있을 때 당장 필요한 병력보충을 위하여 잠시나마 학생 자원병을 받을 때가 있었는데, 이 때에 자원을 독려하는 연설에 이광수, 최린 등이 적극 참여한 바 있다.
이광수, 최남선, 최재서, 김동환 등 고품질의 일제 말기 친일파들이 엄청나게 많은데, 왜 유독 서정주만 이번 국어 교과서에서 싸악 뺐는지 그것도 의문이다. 친일파 작품을 빼려면 최남선의 기미독립선언문부터 빼 버려야 맞다..
이제 친일파 논쟁은 대충 끝낼 때가 된 것 같다. 독립군 자손들을 대부분 거지로 방치한 죄는 누가 책임을 져야 할 것인가 하는 것부터 논의해야 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이다.
어쨌든 각 성씨들의 창씨개명 상황은 대개 다음과 같다.
1. 김씨(金)
= 김해씨(金海, 김해), 김강씨(金岡), 김전씨(金田), 김본씨(金本), 김성씨(金城), 경김씨(慶金), 김산씨(金山), 김강씨(金江), 금곡씨(金谷), 김택씨(金澤), 김천씨(金川), 김포씨(金浦), 김원씨(金原), 김촌씨(金村), 김정씨(金井), 김청씨(金淸), 김원씨(金源), 김자씨(金子), 김도씨(金島), 김송씨(金松), 김림씨(金林), 김광씨(金光), 광산씨(光山, 광산), 강전씨(岡田) ....
2. 리씨(李)
= 궁본씨(宮本, 전주), 국본씨(國本), 조본씨(朝本), 송산씨(松山), 암촌씨(岩村), 목산씨(牧山), 우봉씨(牛峰), 진성씨(眞城), 평천씨(平川), 청목씨(靑木), 단산씨(丹山), 산본씨(山本), 이촌씨(李村), 영천씨(永川) ....
3. 박씨(朴)
= 신정씨(新井, 밀양), 천본씨(天本), 촌정씨(村井), 박원씨(朴原), 박전씨(朴田), 박택씨(朴澤), 송천씨(松川), 죽산씨(竹山), 목하씨(木下), 목본씨(木本), 목산씨(木山), 목촌씨(木村) ....
4. 최씨(崔)
= 고산씨(高山), 산가씨(山佳), 가산씨(佳山), 산본씨(山本), 산강씨(山江), 대산씨(大山), 화산씨(和山), 수성씨(隨城), 좌정씨(佐井) ....
5. 정씨(鄭)
= 지산씨(智山), 위천씨(爲川), 영전씨(迎田), 대천씨(大川), 하동씨(河東), 삼성씨(三城), 삼산씨(三山), 삼포씨(三浦).....
6. 강씨(姜) = 신농씨(神農), 신본씨(神本), 신운씨(神雲), 진산씨(晉山) ....
7. 조씨(趙) =풍전씨(豊田), 백천씨(白川) ....
8. 윤씨(尹) = 평소씨(平沼), 이동씨(伊東) ....
9. 장씨(張) = 장본씨(張本), 장곡씨(長谷), 옥산씨(玉山) ....
10. 림씨(林) = 림씨(林)(일본에 있어서 창씨 않기로 함)
11. 한씨(韓) = 청원씨(淸原), 서원씨(西原), 기본씨(箕本), 조천씨(朝川), 대원씨(大原) ...
12. 신씨(申) = 평산씨(平山), 평전씨(平田) ....
13. 오씨(吳) = 오산씨(吳山), 오촌씨(吳村), 덕산씨(德山), 삼정씨(三井) ...
14. 서씨(徐) = 달성씨(達城), 대성씨(大城), 대천씨(大川), 대산씨(大山), 대원씨(大原) ...
15. 권씨(權) = 안동씨(安東), 권동씨(權東), 권등씨(權藤) ...
16. 황씨(黃) = 황원씨(黃原), 방촌씨(芳村), 회산씨(檜山), 황전씨(黃田), 황본씨(黃本) ...
17. 송씨(宋) = 야산씨(野山), 호산씨(壺山), 송산씨(松山), 송원씨(松原), 야전씨(野田), 대원씨(大原) ...
18. 안씨(安) = 안전씨(安田), 안본씨(安本), 안등씨(安藤), 죽안씨(竹安)....
19. 류씨(柳) = 류씨(柳, 대부분 창씨 안함), 류택씨(柳澤), 류천씨(柳川), 류원씨(柳原) ...
20. 홍씨(洪) = 남양씨(南陽), 풍산씨(豊山), 덕산씨(德山), 홍천씨(洪川), 홍원씨(洪原) ...
21. 전씨(全) = 강원씨(江原), 송산씨(松山), 송원씨(松原), 송전씨(松田), 국산씨(菊山) ...
22. 고씨(高) = 고산씨(高山), 고도씨(高島), 고자씨(高子) ...
23. 문씨(文) = 문암씨(文岩), 문평씨(文平), 문원씨(文原), 문명씨(文明), 강성씨(江城) ...
24. 손씨(孫) = 대촌씨(大村), 송산씨(松山), 천일씨(天日), 손씨(孫, 일부는 창씨 안함)
25. 양씨(梁) = 양천씨(梁川), 량원씨(良原), 남원씨(南原), 양원씨(梁原) ..
26. 배씨(裵) = 무본씨(武本)
27. 백씨(白) = 백천씨(白川), 백원씨(白原)
28. 조씨(曺) = 창산씨(昌山), 하산씨(夏山)
29. 허씨(許) = 석도씨(石渡), 암촌씨(岩村)
30. 남씨(南) = 남씨(南, 일본에 있어서 창씨 않기로 함)
31. 심씨(沈) = 청송씨(靑松), 송본씨(松本)
32. 유씨(劉) = 옥천씨(玉川), 하남씨(河西)
33. 노씨(盧) = 강촌씨(岡村), 풍천씨(豊川), 신본씨(神本), 하원씨(河原), 서원씨(瑞原), 상전씨(上田)
34. 하씨(河) = 하본씨(河本)
35. 유씨(兪) = 유원씨(兪原), 송원씨(松原), 기전씨(杞前)
36. 정씨(丁) = 차산씨(茶山), 정등씨(丁藤), 정전씨(町田), 무도씨(武島)
37. 성씨(成) = 성본씨(成本), 성전씨(成田), 성산씨(成山)
38. 곽씨(郭) = 서포씨(西浦), 목야씨(牧野), 암곡씨(岩谷), 서원씨(西原)
39. 차씨(車) = 차전씨(車田), 영원씨(永田), 굉씨(轟) ...
40. 구씨(具) = 능성씨(綾城), 능원씨(綾原), 능부씨(綾部)
41. 우씨(禹) = 단산씨(丹山), 우삼씨(宇森)
42. 주씨(朱) = 주본씨(朱本), 본성씨(本城), 능부씨(寧野)
43. 라씨(羅) = 부전씨(富田), 상촌씨(上村), 송도씨(松島)
44. 임씨(任) = 풍천씨(豊川)
45. 전씨(田) = 전촌씨(田村), 택전씨(潭田)
46. 문씨(閔) = 문원씨(閔原), 본성씨(本城), 암촌씨(岩村), 암본씨(岩本)
47. 신씨(辛) = 신도씨(辛島), 중광씨(重光)
48. 지씨(池) = 지전씨(池田)
49. 엄씨(陳) = 진천씨(陳川), 진내씨(陳內), 진전씨(陳田), 삼선씨(三山), 대원씨(大原)
50. 엄씨(嚴) = 암본씨(岩本), 내성씨(奈城)
51. 원씨(元) = 원원씨(原元), 원촌씨(原村)
52. 채씨(蔡) = 채원씨(蔡原), 채천씨(蔡川), 평강씨(平岡), 평송씨(平松), 좌천씨(佐川)
53. 천씨(千) = 천원씨(千原), 천전씨(千田)
54. 방씨(方) = 방산씨(方山)
55. 양씨(楊) = 청수씨(淸水), 청원씨(淸原), 화전씨(和田), 양원씨(楊原), 양씨(楊)
56. 공씨(孔) = 곡원씨(曲原), 공촌씨(孔村), 회원씨(檜原), 창원씨(昌原)
57. 현씨(玄) = 현무씨(玄武), 연산씨(延山)
58. 강씨(康) = 강원씨(康原), 강전씨(康田)
59. 함씨(咸) = 성본씨(成本)
60. 변씨(卞) = 초계씨(草溪), 덕원씨(德原)
61. 노씨(魯) = 강촌씨(江村), 강본씨(江)本, 화촌씨(華村)
62. 염씨(廉) = 서원씨(瑞原), 매원씨(梅原), 석천씨(石川)
63. 변씨(邊) = 원변씨(原邊), 원천씨(原川)
64. 여씨(呂) = 궁원씨(宮原), 궁본씨(宮本), 여정씨(呂井)
65. 추씨(秋) = 추산씨(秋山)
66. 도씨(都) = 도전씨(都田), 도본씨(都本), 도천씨(都川), 도씨(都)
67. 신씨(愼) = 진산씨(眞山), 진원씨(眞原)
68. 석씨(石) = 석원씨(石原), 석천씨(石川), 석촌씨(石村)
69. 소씨(蘇) = 초화씨(草禾), 이소씨(伊蘇), 화전씨(和田), 추전씨(秋田)
70. 설씨(薛) = 옥천씨(玉川), 송산씨(松山), 홍본씨(弘本), 대산씨(大山)
71. 선씨(宣) = 선천씨(宣川), 중원씨(中原)
72. 주씨(周) = 주본씨(周本), 길전씨(吉田), 덕원씨(德原)
73. 길씨(吉) = 길본씨(吉本), 사재씨(寺再), 연양씨(延陽)
74. 마씨(馬) = 목천씨(木川), 유마씨(有馬), 마야씨(馬野), 마장씨(馬場)
75. 연씨(延) = 연원씨(延原), 중산씨(中山), 중본씨(山本)
76. 표씨(表) = 표전씨(表田), 산기씨(山崎), 신천씨(新川)
77. 위씨(魏) = 장본씨(長本)
78. 명씨(明 )= 명석씨(明石), 명천씨(明川), 일월씨(日月)
79. 기씨(奇) = 암기씨(岩崎)
80. 방씨(房) = 방원씨(房原)
81. 반씨(潘) = 미전씨(米田), 하촌씨(河村)
82. 왕씨(王) = 왕본씨(王本), 송전씨(松田), 송성씨(松城), 왕산씨(王山), 대원씨(大原)
83. 금씨(琴) = 금천씨(琴川), 금전씨(金田), 금전씨(今田)
84. 왕씨(玉) = 대원씨(大原)
85. 육씨(陸) = 관성씨(管城)
86. 인씨(印) = 인도씨(印島), 고본씨(高木), 고촌씨(高村)
87. 맹씨(孟) = 신원씨(新原), 송강씨(松岡), 송원씨(松原)
88. 제씨(諸) = 영천씨(穎川)
89. 탁씨(卓) = 탁산씨(卓山), 광산씨(光山)
90. 진씨(秦) = 진씨(秦, 그대로), 남원씨(南原), 송원씨(松原), 대창씨(大倉), 풍전씨(豊田)
91 남궁씨(南宮) = 남궁씨(南宮)
92. 장씨(蔣) = 아산씨(牙山), 송산씨(松山), 국원씨(國元)
93. 모씨(牟) = 모전씨(牟田), 곡본씨(谷本)
94. 국씨(鞠) = 청산씨(靑山)
95. 어씨(魚) = 어천씨(魚川), 어서씨(魚西), 서천씨(西川), 어소씨(魚沼)
96. 여씨(余) = 의천씨(宜川), 부본씨(富本)
97. 은씨(殷) = 행주씨(幸州), 송강씨(松江), 강본씨(江本)
98. 편씨(片) = 편산씨(片山)
99. 용씨(龍) = 용천씨(龍川), 전하씨(天河)
100. 예씨(芮) = 초내씨(草內), 광전씨(廣田)
101. 구씨(丘) = 구씨(丘, 그대로)
(성씨 순위 102위 이하는 생략)
그리고 불과 5년 뒤인 1945년에 우리는 일본식 氏名制를 버리고 중국이나 신라의 왕족, 귀족의 후예임을 증명하는 姓名制로 되돌아 간다. 물론 이들 중에는 갑오경장 직후에 논 두 마지기로 姓을 사 가지고 왔던 사람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1950년 한국동란 때 공산군 치하의 인민재판은 그동안의 상하 개념을 완전히 거꾸로 뒤바꾸어 버렸는데, 갑오경장 이후 아직도 시골에 남아 있던 양반-쌍놈의 흔적이 순식간에 없어졌다
어쨌든 이 때 저놈이 대대로 하인의 자손인지 아닌지, 姓을 사 가지고 온 집안인지 아닌지 하는 비밀을 알고 있던 사람들도 대부분 다 죽어 버렸다. 이제부터는 명실상부한 왕손 양반으로 행세해도 누가 뭐라 그러겠는가?
참으로 아이로니컬하게도 일제침략과 공산침략을 거치는 와중에 수천년 뿌리 깊은 계급사회가 무너지고 평등사회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제서야 우리 집안도 제대로 양반 행세 한 번 해 보나 싶었는데... 아-- 이건 또 무슨 낭패인가... 양반도 쌍놈도 남자도 여자도 똑같이 한 표의 권리를 가진 민주 평등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 그저 아쉬울 따름이었다.
우리는 미국 영향권 하에서 또 다른 형태의 창씨개명을 보게 된다.
이것도 각자 개인의 희망 사항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는 한데...
이번에는 미국식으로 이름을 만드는 현상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미국 영주권을 가지고 시민권을 가진 사람을 많이 본다. 우리나라 장관이나 총리 중에서도 최근까지 2중 국적자가 있었다.
"유승준"이라는 이름을 쓸 때에는 한국의 군대에 가야 되고
“Steve Ryu”라는 이름을 쓸 때에는 군대를 안 가도 되는 특전이 있다고 한다.
또 한국 여자가 미국이나 일본 남자와 결혼할 때에는 결혼 즉시 남편과 같은 성씨로 창씨해야 한다. 우리나라 한국은 여자가 결혼을 해도 처녀 때의 성씨를 가질 수 있는 아주 특이한 나라로, 결혼할 때 創氏를 싫어 하는 전 세계의 모든 여권 운동가들이 부러워 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역시 좋은 나라다
이제는 남자건 여자건 결혼을 하든 않든 創氏할 일이 없다.
전 국민이 중국 또는 한국 귀족의 자손으로만 되어 있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참, 창씨개명을 주제로 발표된 소설이 노밸상을 탈 뻔 한 일이 있었다는데..
네, 그런 일이 있었지요..
서울상대 출신의 김은국이라는 분이 한국동란 직후에 미국으로 유학가서 경영학을 전공하다가 문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공부한 적이 있었는데
졸업논문 대신에 소설 작품을 발표해도 된다고 해서 어린 시절 일제강점기의 창씨개명을 주제로 하여 영어로 "The Lost Names(빼앗긴 이름)'이란 소설을 발표한 적이 있지요..
이 작품이 당시에 선풍적인 인기를 몰고 와서 노벨상 문학상 후보로 두세 번 올라 간 일이 있지요 (우리나라에도 번역판이 나왔음)
일본식 창씨개명의 아픔이 서양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준 것이지요...
그러나,,..
이 소설을 쓴 김은국은 미국식으로 개명한 "Richard Kim"이란 이름으로 이 소설을 발표하였으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중국식으로 창씨 개명하는 것은 괜찮다 하고,
천주교 성인 이름으로 개명하는 것도 괜찮다 하고
미국식으로 개명하고 미국 남편의 성씨로 창씨하는 것도 괜찮다 하는데..
반만년 역사에서 불과 5년의 해프닝으로 끝난 일본식 창씨개명의 망령에서 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 안타깝기만 하네요...
우리나라 사람의 후손이라고 알려진 일본의 천황 가족은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중국식으로 성씨를 만들 건 말건 아랑곳없이 옛날 우리나라의 성씨 없는 전통을 아직도 굳건히 지켜 아직도 성씨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네요...
어쨌거나 과거는 미래의 나침반은 될지언정 현재의 발목을 잡는 것이 되어서는 안될 터...
우리는 이제 쓰라린 과거의 망령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서 희망찬 내일을 건설하기 위해 오늘 하루를 어떻게 충실하게 보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