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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단체 : 법주사(法住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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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미수(彌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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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명 : 성은 김씨(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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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자정(慈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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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하사명 : 오공진각묘원무애국존(悟空眞覺妙圓無촦國尊)
* 자정 미수(慈淨彌授, 1240∼1327) 스님은 고려 중기의 법상종 승려였다. 스님은 경상북도 선산에서 태어나 이모의 손에서 자라면서 어려서부터 유학에 총명한 재질을 보였는데, 13세였던 1252년(고려 고종 39) 원흥사(元興寺)의 종연(宗然) 대사를 스승으로 득도하였다.
경전 공부에 힘을 기울였고, 19세 때는 승과고시인 선불장(選佛場)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하였다.
29세 때 국령사(國寧寺)에 머물며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다. 젊은 나이에 삼중대사라는 고위직에 오른 것도 대단하지만, 이 곳에서 유식론(唯識論)을 강설할 때는 많은 중진 스님들도 참석하여 경청했다고 한다. 이후 공주의 웅신사(熊神寺)에서는 수좌(首座)가 되었고, 한양의 장의사(莊義寺)에서는 승통(僧統)이 되었다. 법주사에 머물 때는 국왕의, “말법에 대종장(大宗匠)을 만나기 어려운데 이제 미수 대사가 있으니 후진들을 위하여 장소(章疏)를 지어 세상에 유포시키도록 하시오.”라는 명령을 따라 장소의 편찬에 힘을 기울여 무려 92권을 간행, 유통시켰다.
이 무렵 국왕은 얼마나 스님을 존경하였는지 무려 일곱 차례나 장의사를 방문하였고, 스님에게 대자은종사삼중대광양가도승통(大慈恩宗師三重大匡兩街都僧統)이란 직위를 내렸다. 자은종은 중국 법상종의 다른 이름으로서, 스님을 대자은종사라 칭하였음은 결국 미수 스님이 고려 법상종의 대가임을 나타낸 말이다.
한 곳에 오래 머물면 나태해지기 마련이므로 스님은 이를 철저히 경계한 듯 곳곳을 순력하였다. 한양의 중흥사(重興寺)에 있을 때는 충선왕에게서 석교도승통(釋敎都僧統)에 임명되어 원명(圓明) 대사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제 스님의 교학과 덕은 곳곳에까지 미쳤다.
유가사(瑜伽寺)에 있을 때였다. 당대의 석학들이 고심하던 <대반야경> <신해품>을 어렵지 않게 해석하여 간행하자 다시 한 번 스님의 명성이 높아졌다. 충숙왕 때는 왕실의 내전참회사(內殿懺悔師)가 되어 왕사의 대우를 받았고, 다시 개성의 대민천사(大旻天寺)에서는 삼가장소(三家章疏)를 강설하였다.
1324년(충숙왕 11) 스님은 85세의 나이로 동화사에 머물며 오공진각묘원무애국존(悟空眞覺妙圓無촦國尊)의 칭호를 받았다. 그리고 법주사에서 노년의 원숙한 교학과 진리를 펼치던 스님은 1327년(고려 충숙왕 14) 12월 앉은 채로 입적하였다. 세수 88세, 법랍 75년이었다. 수 많은 제자들은 슬퍼하며 스승을 다비한 후, 지금의 청동미륵상이 있는 산호전 동쪽에 부도를 모셨다.
*서울시 성북구 경국사 창건:"자정율사(1240∼1327)는 충숙왕 대에 국존(國尊)이 되었던 고려후기의 스님이다. 속성은 김씨로 경북 선산에서 태어났다. 1252년(고종 39) 13세에 원흥사(元興寺) 종연(宗然) 스님에게서 득도하고 구족계를 받았다. 첫 법명은 자안(字安)이었고 1258년(고종 45)에 승과고시인 선불장(選佛場)에 응시하여 상품과(上品科)에 올랐다. 1268년(원종 9) 삼중(三重)대사를 받아 유식론의 주강(主講)을 맡았다. 이후 웅신사(熊神寺)에서 수좌를, 장의사(藏義寺)에서는 승통을 지냈다. 속리산 법주사에 머물면서 〈경론지해(經論之解)〉92권을 찬술하기도 했다. 충선왕이 즉위하자, 원명(圓明)대사라는 호를 받고 석교도승통(釋敎都僧統)에 임명되었다. 1313년(충선왕 5) 대자은종사 삼중대광 양가도승통(大慈恩宗師三重大匡兩街都僧統)에 올랐다. 충숙왕때는 내전참회사(內殿懺悔師)가 되어 궁궐에서 왕실의 계율을 다스리기도 하였다. 또 왕의 청으로 민천사(旻天寺)에 머물며 삼가장소(三家章疏)를 강의하였다. 1324년(충숙왕 11) 왕이 오공진각 묘원무애국존(悟空眞覺妙圓無碍國尊)이라 봉하고 존경을 아끼지 않았다.
이듬해 다시 법주사로 돌아갔다가 1327년(고려 충숙왕 14)나이 88세, 법랍 75년으로 입적했다. 시호를 자정국존, 탑호를 보명(普明)이라 하여 1342년(충혜왕 복위3) 법주사에 비를 세웠다. 《경론지해》외에 《대반야경난신해품기(大般若經難信解品記)》와 《심지관경기(心地觀經記)》 등의 저술이 있었다.
이상이 〈법주사자정국존보명탑비〉를 통해 살펴본 스님의 행적이다."(전통사찰총서4,경국사편,303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