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3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비는 원래 북한산 비봉에 있던 것을 비신의 보존을 위하여 1972년에 국립중앙박물관 역사실에 옮겨 놓고 원래 자리에는 모조품을 만들어 놓았다. 높이 약 168cm, 너비 약 76cm의 크기이며, 비문은 해서와 예서체의 중간쯤 되는 서체로 2줄, 각줄 32자씩을 새겼다. 조선 순조 년간에 우리나라 금석학의 대가인 추사 김정희가 직접 북한산 비봉에 올라 종래 무학의 비석으로 알려져 있던 북한산의 비석을 신라 진흥왕 순수비 중의 하나임을 고증해냈다. 내용은 황초령, 마운령비와 거의 비슷하게 지방을 순수하는 목적과 비를 세우게 된 연유 등인데 특히 진흥왕의 영토확장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이 비는 6세기 중반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 신라의 漢江 유역 점령을 증언하는 역사적 遺物
碑峰에서 느낌으로 다가온 역사의 파노라마
인구 1000만명의 메트로폴리탄 서울이 北漢山(북한산)처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名山을 끼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다. 그러나 北漢山은 도시인의 휴식공간이나 등산코스에 그치는 곳이 아니다. 서울의 鎭山(진산)인 이곳은 우리 역사의 핵심 토막을 안고 있다. 그 대표적 현장이 碑峰(비봉:556m) 정상에 있는 眞興王 巡狩碑(진흥왕 순수비)다.
진흥왕 순수비는 1970년대에 비바람에 의한 마멸을 피하기 위해 국립중앙박물관 안 지하 2층 전시실에 옮겨다 놓았지만, 원래의 위치인 碑峰에 올라야 이 빗돌의 의미를 느낄 수 있다.
碑峰은 북한산 僧伽寺(승가사) 바로 뒤의 바위산이다. 구기동 매표소에서 출발하면 승가사까지가 1.4km인데, 碑峰은 승가사 앞에서 표지판을 따라 860m만 더 오르면 된다. 비봉매표소나 승가매표소에서 출발하면 지름길로 오를 수 있지만, 그 만큼 가파르고 아기자기하지도 않다.
碑峰 자락에 이르면 「비봉에 오르다가 추락하여 죽는 사람이 많다」는 요지의 경고문이 게시되어 있다. 등산이라면 「王초보」인 필자는 잔득 겁을 집어먹고 碑峰의 가파른 바위 위를 거의 엉금엉금 기어서 올라갔다. 뒤를 돌아 보니 자칫 미끄러져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하면 사망 아니면 중상을 입을 것 같았다.
碑峰 정상에 이르니 오뉴월 뙤약볕 아래인데도 그야말로 간담이 서늘했다. 바람도 내 몸뚱이 하나쯤은 휙 날려갈 만큼 세찼다. 이곳은 북한산에서도 사방이 확 틔어서 전망이 가장 좋은 곳이다. 남서쪽으로 서울의 案山(안산)인 南山이 가깝게 다가오고, 그 너머로 한강이 그림처럼 흘러가고 있다.
필자는 아직 한강처럼 잘 생긴 강을 본 적이 없다. 여의도 63빌딩 같은 건 장난감 같다. 북서쪽으로는 서울 은평구와 고양 일대의 평원 지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碑峰 정상에는 비록 모조품이지만 진품처럼 만든 「진흥왕의 순수비」가 우뚝 세워져 있다. 손가락으로 순수비의 字體(자체)를 하나하나 더듬으면서 「나」라는 個體(개체)의 역사성을 음미했다.
빗돌의 형태는 長方形(장방형)으로서 전후좌우를 잘 다듬은 석재이며 윗부분에 1단의 축을 만든 것을 보면 원래 갓돌(蓋石)로 씌웠던 것으로 보인다. 碑身은 높이 154cm, 폭 71cm, 두께 16cm이다.
碑文(비문)은 12行에 걸쳐 쓰여져 있다. 비바람에 심하게 마멸되어 전혀 판독할 수 없거나 자획이 명료하지 않은 부분이 많다. 1행의 字數는 30字 전후. 筆法(필법)은 중국 六朝式의 楷書(해서)이고, 글자의 지름은 약 3cm이다.
秋史 金正喜의 역사적 공로
판독할 수 있는 글자에 의하면 碑文의 내용은 주로 眞興王의 공덕과 왕이 국경지역을 돌아본 목적, 그리고 왕을 수행했던 신하들의 이름들로 이루어져 있다.
碑의 측면에는 조선 純祖 16년(1816) 7월에 조선조 최고의 명필이며 金石學의 대가인 秋史 金正喜(추사 김정희)가 金敬淵(김경연)이란 사람과 이 곳을 답사했고, 이듬해 6월8일에도 다시 趙寅永(조인영)과 함께 와서 碑文 중 68字를 판독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秋史는 그 후 2字를 더 판독하여 현재까지 세상에 알려진 글자수가 모두 70字에 이르게 되었다.
秋史 이전에 사람들은 북한산 봉우리 하나에 비가 우뚝 세워져 있어 그 곳을 막연히 「碑峰」이라고 부르기만 했지, 정작 그것이 무슨 碑인지는 몰랐었다. 조선 太祖의 王師(왕사)였던 無學대사의 碑라고 잘못 口傳(구전)되기도 했다.
순전히 필자의 생각이지만, 碑峰의 碑에 새겨진 글자의 뜻을 판독한 것은 秋史가 어릴 적부터 가졌던 꿈을 실현한 것이 아닌가 한다.
秋史는 경복궁 옆 지금의 孝子路(효자로)연변의 동네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런 만큼 동무들과 더불어 북한산에 자주 올랐을 것이다. 북한산에 오르기만 하면 코끼리처럼 웅크리고 있는 바위 봉우리, 그곳 암반 위에 오연히 세워진 古碑(고비) 하나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碑文의 내용이 과연 무엇일까? 바로 이 의문이 추사 金石學의 출발점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秋史는 진흥왕 순수비의 존재를 확인해 줌으로써 韓國史의 중요한 의문부호 하나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삼국시대의 세 나라 중 가장 후진적이었던 신라는 진흥왕 때 들어서야 비로소 고구려의 南進勢를 꺾고, 伽倻諸國(가야제국)을 병합하여 낙동강의 경제력을 움켜 쥐었으며, 백제의 中興主이던 聖王을 敗死(패사)시키고 한강 유역을 독차지한 데 이어 동북변 영토를 지금의 함경남도 지역까지 확대했다.
6·25 총탄 흔적
특히 신라의 漢江 유역 확보는 100여 년 후 신라의 삼국통일에 결정적 기반을 마련한 것이었다. 이러한 영토 확장을 기념하기 위해 진흥왕은 낙동강 서쪽지역에 昌寧碑(창녕비:국보 제33호), 함남지역에 黃草嶺碑(황초령비)와 摩雲嶺碑(마운령비), 그리고 북한산 순수비를 세웠다.
진흥왕 순수비는 고구려 廣開土王 陵碑(광개토왕 능비), 中原 고구려 碑(국보 제205호), 신라의 울진 봉평리 碑(국보 제242호)와 영일 냉수리 碑(국보 제264호)와 더불어 지금까지 알려진 우리나라의 옛 碑들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필자는 경복궁 동편에 있는 중앙박물관에 가서 북한산 순수비의 진품을 다시 한번 관찰했다. 좀 이상한 표현이지만, 모조품 그대로였다. 碑身 후면에 곰보자국이 무수했는데, 알고 보니 6·25 전쟁 때 얻어맞은 소총 彈痕(탄흔)이었다. 이 사실도 어김없는 민족사의 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진흥왕 순수비를 넋을 잃고 쳐다 보다가 필자는 문득 秋史 선생에게 감사의 심경을 주체하지 못했다. 字體(자체)가 마모되어 필자의 눈으로는 한 字도 읽을 수가 없는데, 선생은 「眞興太王及重身等巡狩管境之時記」로 시작되는 碑文 중 무려 70字나 해독해 주었기 때문이다.. (출처-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