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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한자문화 칼럼 |
千金勿傳과 福의 根源 |
田 英 培 |
배재대학교 명예교수 / 本聯合會 지도위원 |
六寓堂 李夏鎭의 千金勿傳
“자손들에게 千金을 전하지 말고 오로지 學德을 전하라.”는 뜻이 담긴 千金勿傳이라는 家訓을 내가 처음 대한 것은 70년대 초였다. 당시 교단에서 맡은 과목이 倫理여서 학생들의 人性問題에 고심하던 중, 그 문제는 家庭의 몫이라는 생각에 학생들에게 父母님이 늘 말씀하시는 내용을 적어 오라는 숙제를 냈다. 家訓宿題였던 것이다.
그 명언은 朝鮮의 仁祖 때부터 肅宗 때까지 大司憲을 지낸 梅山公 六寓堂 李夏鎭(1628~1682)이 지은 책의 表題였다. 최근에 상세히 알게 되었지만 驪州 李氏 家門은 600년 朝鮮歷史에서 가장 많은 賢人과 學者를 배출한 名門家였다.
漢文學과 東洋哲學의 대가인 眞城李氏家源(1917~2002)박사도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韓國精神文化硏究院이 낸 星湖家門典籍(2002)이나 星湖先生事業會의 世乘記(2002), 그리고 麗州李氏歷代人物誌(1997)에 언급된 名人 1800여명과 賢人 學者 379명의 略傳을 통해 그 진실을 엿볼 수 있었다.
그때 公의 행적에서 특히 유의하게 되는 것은 慣例에 따라 中國 朝廷이 답례로 준 銀과 비단緋緞을 모두 수천권의 書籍과 바꿔 귀국한 일이다. 그때 사 가지고 온 책들이 밑거름이 되어 후일 公의 後孫과 後學들이 조선후기의 새로운 사상인 實學을 創導하며 이를 주도해 나가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을 뿐 아니라, 經世致用學派의 宗師인 星湖선생을 비롯해 많은 학자들을 배출시켰던 것이다.
義俠心 많은 公은 大司憲으로서 나라를 위해 直諫을 피할 수 없었다. 따라서 公은 1680년(肅宗6年) 庚申大黜陟(경신대출척) 때에 西人들의 誣告로 평안도 雲山에 유배당하는 불운을 겪다가 恨많은 삶을 마감했다.
天地간에 몸을 두고
30여년 전 학생들의 人性發達의 搖籃인 가정교육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시작한 家訓갖기運動의 주창자였던 내 집에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사실 나름의 家訓이 없었다. 그런데도 TV와 大田市ㆍ淸陽郡民 등의 요청을 받아 講演까지하고 다녔다. 그런 내가 근래에서야 家訓을 갖게 되었다. 30여년간 고심해서 얻은 확신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나라의 家訓들은 대부분이 行動變化를 촉진할 수 없는 抽象的 槪念으로 哲學과 理想, vision이 없는 虛禮虛飾用에 불과하다고 판단되었다. 그 말은 家訓에 분명한 目的意識이 결여되어 있다는 말이다.
가훈의 50-60%를 차지하는 ‘誠實, 忍耐, 和睦, 忠孝’ 등의 덕목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 궁극적 目的價値가 상세히 제시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덕목들은 대부분 ‘惡의 集團’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니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옛날에 반딧불(螢)과 눈빛(雪) 아래서 공부하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남포燈이나 등잔불과 촛불이 나오면서 그런 불편은 없어졌다. 더구나 電氣照明기구가 사용되니 또한 촛불, 등잔불 등은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BC시대에 우리 인류에게 촛불 등잔불과 같았던 Socrates, 釋尊, 孔子 등의 가르침은 AD시대(Anno Domini = in the year of our Lord) 原子ㆍ單子시대인 오늘에 사는 우리에게 절대적인 빛이라고 말하는 것은 깊이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과거의 가치는 참고사항이지 매임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儒家ㆍ佛家의 가르침은 현실적 귀납적 회고적 무신론적이며, 基督家의 가르침은 이상적 연역적 미래적 유신론이라는 이치를 깨달아 하는 말이다.
무엇을 우상화하는 일은 후진국민의 특징의 하나다. 하느님의 실체가 抽象性이기에 다행이지 만일 形象性이라면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추해졌을 것이다. “As long as you pray to God and ask him for SOMETHING, you are not a religious man.”(R.N. Goldman, Einstein's God. Jason Aronson Inc, 1997. 2면)라는 말은 Einstein의 말이다. 하느님에게 무엇을 해달라고 비는 기도가 아니라 ‘良心을 통해 하느님의 음성을 들어야 참 신앙’이라는 과학자의 그 같은 말은 오늘의 그 많은 종교행위를 다시 보게 한다.
Beruf라는 직업을 뜻하는 말은 ‘불리움을 받았다’는 召命感을 뜻한다. 따라서 직업에 貴賤이 있을 수 없다. B?er(빵구이), Matzger(백정), Schmidt(대장장이)까지도 神이 주신 직업이라며 代를 이어가는 名門家業의식을 가지고 있으니 우리의 士農工商의 身分序列意識과 크게 다르다.
오늘날 우리 나라가 理念的 混亂을 심하게 겪고 있는 것은 우주질서와 人間의 本性, 그 運命의 限界性과 자신들이 쓰는 말의 뿌리에 무지한 文化的 後進性에 있다. 조상의 생각이 담긴 漢文을 모르는 世代들의 오늘의 행동이 그것을 입증해 준다.
지난 東洋역사 100년간의 가장 위대한 위인이라는 M Gandhi(1869~1948)는 인도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겠다고 共産主義를 신봉하다가 거기에 神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즉시 그 이념을 버린바 있다.
光復되기 전 인간을 절대화한 北間島의 左傾者들이 殺父會까지 조직해 民族獨立 志士인 자기 아비까지 살해한 反人倫犯罪를 오늘의 左派 환상주의자들아 아는가 모르는가? 그대들은 靈的 悖倫兒들임을 속히 깨달을 지어다.
따라서 나와 이웃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至福的 價値는 흔히 말하는 東洋的 가치인 五福(壽, 富, 康寧, 攸好德, 考終命)이 아니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 반면에 西學의 토대가 되는 Hellenism과 Hebraism과 遭遇하게 되었다.
특히 근래에 Israel人의 始祖 Abraham이 그의 고향 Ur를 떠날 때 들은 하느님의 말씀 “내가 너로 큰 民族을 이루고 네게 福을 주어 네 이름을 昌大케 하리니 너는 福의 根源이 되어라.”(창 12.2)에 깊이 심취하면서 우리 食率들에게 줄 家訓을 그 말씀에서 택하게 되었다.
알에서 부화되지 못한 생명은 결국 죽는다. 傳統은 발전의 터전으로 改良發展시켜 가야 할 일찍이 Aristotle이 말한 形相과 質料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Abraham에게 ‘福의 根源이 되어라.’고 한 福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아무래도 東洋的인 가치로서의 福개념은 아닌 듯 하다. 히부리語의 福이라는 단어 바라크(barak, ???)는 그 뜻이 ‘무릎을 꿇다, 인사하다, 찬송하다’이다.
신약성경 원어 희랍語의 福이라는 말 마가리오스(데醒?ρ?ο?)는 ‘은총을 입다, 찬양하다, 복받다’이고, 율로게오(ε?λο??ω)는 ‘칭찬하다, 찬양하다, 축복하다’로서 그 모든 말에 함축된 의미는 “하느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것이 福이 된다”는 宗敎的 信仰개념이다.
그러한 신앙은 신약시대의 聖女 Mary의 告白에서 다시 들어 났다. 童貞女 잉태의 受難者가 된 자신을 “만세에 나를 福이 있다.”(눅1:48) 했으니 그녀의 신앙은 하느님의 逆說(paradox)의 수락이었던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하느님이 우리 인간을 포함해서 온 世界萬物을 창조한 마지막 날에 그 모든 것을 보고 한 말이 ‘아름답다. 좋았다.’(Tob, ??? 창 1:31)라고 했으니 하느님이 판단하신 福은 ‘아름다운 삶'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福의 根源은 아름다움에 있다
福은 진리를 사모할 때에 오는 정신적인 희열이다. 마음은 항상 진리를 渴望해야 한다. 滿足하면 곧 교만의 늪에 빠진다. 그래서 교만은 罪의 뿌리가 된다. 그와 반대로 영적인 갈망은 德의 샘이다.(Riches easily become pride. Pride is the root of sin, poverty of spirit is the root of the virture)
나는 늘 질그릇, 그 중에서도 분청사기粉靑沙器를 특히 좋아한다. 분청사기는 귀족들의 종교적 목적을 위해 빚은 高麗靑磁나 士大夫들의 소용을 위해 빚은 朝鮮白磁처럼 反自由 不自然의 산물이 아니다. 분청사기는 가장 구김살 없이 한국인의 순수하고 소박한 마음을 표현했기 때문에 가장 아름답다.
또한 세계 陶藝美學의 태두로 알려진 버너드 리치는 “조선의 막사발처럼 ‘없으면서 있는 것 같은’ 色과 觸感을 낼 수 있는 그런 사람곁에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하고 남을 幸福하게 할까?”라고 말했다. 우리 분청사기가 사람의 마음에 평화를 주기 때문에 서양에서의 聖杯와 같은 神器라는 사실을 나도 새삼스럽게 인식하게 되었다. 일본의 혼아미 고에쓰本阿彌光悅, 1558-1637의 일화는 분청사기의 가치를 더욱 웅변해 준다. 그는 당시에 유명한 서예가 도검감정가 茶道人이었다. 어느 자리에서 마음을 사로잡은 茶?을 보고 집을 팔고 빚을 내어 사려고 했다. 그 사정을 안 주인이 값을 깎아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고에쓰는 깎아사면 가치가 떨어진다고 사양하며 황금 30냥의 거금으로 그 다완을 사가지고 와서 즐겼다. 그때 그 다완을 탐낸 주변의 재력가와 권력자들의 강력한 유혹과 위협이 있었지만 “아름다운 것은 生命과 같다”며 평생을 그 茶?을 지켜 보며 즐겼다.(中野孝次, 淸貧의 思想, 自由文學社 번역 출판, 1993)
아름다움은 하느님의 예술이며 平和이다. 그것은 自然스러움의 眞理이다. 그 진리(眞)ㆍ선함(善)ㆍ거룩함(聖)ㆍ아름다움(美)을 느끼며 사는 마음은 至福을 누리며 사는 삶이다. 특히 아름다움은 하느님이 주신 만인을 위한 선물이기 때문에 시대와 인종을 초월하여 만인이 함께 즐겨야 한다. 아름다움은 文化의 精髓이니 우리는 속히 문화민족이 되어 인류에게 그 福을 많이 나누어주어야 한다. ※
‘아름다움은 참된 것, 참된 것은 아름다운 것'
‘Beauty is truth, truth Beau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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