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자여, 두려워하지 말라
(마태복음 10장 24절 - 4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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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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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나름대로의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외외로 그 두려움이라는 것이, 없는 것으로 인한 것이기보다는 있는 것으로 인하여 가지는 두려움이 더 큽니다. 늘 잃어버릴까봐 전전긍긍합니다. 자기 스스로가 그것을 지키려고 애를 씁니다. 그냥 걱정하는 것일뿐 자기 스스로가 지킬수 있는 것은 거의 없음에도 말입니다. 생명을 잃어버릴까봐, 그 잘난 체면과 자존심을 잃어버릴까봐, 명예와 자리와 재산을 잃어버릴까봐, 부모와 자식을 잃어버릴까봐, 미래를 잃어버릴까봐, 자신의 꿈과 성공과 성취를 잃어버릴까봐... 그 어느 것도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에도 말입니다.
인간의 소유욕은 무섭습니다. 모든 것을 그저 내 것으로 만들려고 집착합니다. 좁디좁은 작은 자기 생각에 모든 것을 가둬 버리려고 합니다. 그 사람으로 그 사람되게 해주고, 있는 그것들로 있는 그 자리에 있게 해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가만히 두고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과 그것들이 그 자리에 존재해야만 하고 존재하고 있는 그 존재적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배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늘 자신을 마치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다른 사람 눈에 띄게 하려고 애씁니다. 자신의 하는 일이 사람들 앞에서는 비록 보잘 것 없게 보일지 모르지만, 변함없이 겸손함과 당당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역할의 자리를 지키려고 하는 사람을 예수님은 ‘소자’라고 부릅니다. 세상적으로는 어린아이처럼 지극히 작은 자에 불과한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마치 자신이 대단한 존재나 되는 것처럼 행세하는 그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이들이 하나님께는 기억되어진 바 되어집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 보아서는 별볼일 없고 참 초라하게 느껴지는 존재들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들이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초청받고 있음을 증거합니다. 세상에서는 이들이 혹 초라한 존재일지 모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큰 자로 세움받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들을 향하여 ‘두려워하지 말라’고 끊임없이 격려합니다.
모세가 죽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새 지도자로 세움받습니다. 자신만이 모세의 뒤를 이을 위대한 지도자라고 자부하거나 자처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같은 사람은 도저히 모세처럼 이스라엘 민족을 훌륭하게 이끌 그 어떠한 능력이나 자격이 없음을 고뇌합니다. 그의 마음을 읽으시는 하나님이 오히려 두려워하지 말라며 여호수아를 격려합니다.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너희 지경이 되리라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1:2-9).
하나님은 약속의 땅을 향한 신앙의 백성들의 전진을 늘 새롭게 격려합니다. 하나님의 꿈은 결코 소멸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류 구원을 위한 자신의 꿈을 끊임없이 믿음의 사람들에게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로 하나님의 꿈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 야망의 성취를 위한 욕망으로 불타게 합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빙자하여 자기 명예를 위한 꿈을 성취하고자 하는 열정과 야망이 아닙니다. 죄악의 늪에서 인류를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원대한 그 역사 섭리의 꿈을 함께 꾸며 오늘을 겸손하고도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신앙인입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은 그리스도 예수를 닮아가는 제자된 삶을 살고자 하는 신앙인된 우리의 교회적 사명과 자세를 증언합니다. 교회는 복음 전파와 성도의 신앙생활의 중심지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을 통한 증언과 전도로 하나님의 백성된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신앙의 사람은 언제까지나 가르침과 보호를 받는 자가 아니라 믿음의 성숙을 거듭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러 다음 세대와 자신보다 믿음이 적은 자들의 안내자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양육받은 자녀들이 자라서 부모를 부양하며 자기 자식을 낳고 키우며 양육해 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부모의 마음을 읽을수 있는 사람은 건강한 맏이로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장차 건강한 부모된 삶을 살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꿈이 우리 안에 다시금 부활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답습된 신앙의 전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과 언제나 함께 하는 생명적 신앙으로 늘 새롭게 부활되어야 합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우리의 삶의 방식은 문화로 자리잡게 되고 그러한 문화가 쌓여서 전통이 됩니다. 문화와 전통은 소중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본래의 정신은 어디로 가버리고 없고 껍데기만 붙들고 앉아서 지키려고 애를 씁니다.
신앙이 마치 인물 숭배가 전부인 것처럼 왜곡시켜 버립니다. 그러다보니 믿는 바를 의식화시키고 예전화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한 부분일 수는 있지만 신앙의 본질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예배와는 달리 하늘보좌를 버리고 인간의 몸으로 삶의 현장에 들어와 자신의 생명이 다하시기까지 오직 함께 살아가셨습니다. 인간의 역사 속에 개입하고 들어오신 하나님의 이러한 사건은 인간을 살리고자 하기보다 인간을 억압하기에 급급한 기존의 종교적 틀을 깨뜨려 버립니다. 예수님은 오직 마지막까지 믿음으로 살아가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이 인간과 건물의 신격화를 거부하셨던 예수께서 죽임을 당하셔야만 했던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그 예수님을 통해 우리 안에 회복되어야 할 올바른 신앙의 생명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자 해야 합니다. 이 사람들이 복됩니다.
1.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세상의 어떠한 상황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존경과 높임을 받거나 백성들을 선동하기 위해서 놀라운 능력과 기적을 행하고 말씀을 선포하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수많은 죄악의 올무에 사로잡혀 빠져 나오지 못하고 신음하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의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되신 하나님의 마음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 끓어오르는 아버지의 안타까운 마음을 자신의 가슴 속에 안고 맏이로서 살아간 것이 우리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자신의 입지나 자신의 생명을 위해서는 그 어떠한 능력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죄악에 사로잡혀 고통스러워하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쏟아 내셨습니다. 그는 세상의 지도자들을 정죄하거나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기 길을 가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지도자들이 먼저 시비를 걸어옵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생애를 통해 놀랍게도 거짓된 자신들의 실상이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비쳐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지도자된 자신들의 입지와 행동과 말이 심히 불편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선으로 악을 이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께서 가신 그 길을 믿음으로 따라오고자 하는 제자들이 장차 겪을 고초가 무엇인지는 눈에 안봐도 환히 보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진리를 따라 살아가고자 하는 그 믿음의 길을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격려합니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10:24,25).
‘바알세불’은 마귀의 우두머리라는 뜻입니다. 자신들이 왜 그 자리에 존재하는지도 모른채 자기 권위와 명예와 권력과 물질의 착취를 위해서 백성들을 저주하고 옭아매기만을 쉬지 않던 종교지도자들이 실상은 마귀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이 예수님을 마귀의 왕으로 뒤집어 씌웁니다. 그들은 자신들처럼 거룩하고 고고한 사람이 없는 것처럼 행세하면서 뒤로는 온갖 죄악을 저지르는 온상이었으면서 말입니다.
진리와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자신들의 허물과 죄악의 실상과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들로 말미암아 받을 핍박과 박해의 고난이 두려워서 자신이 가야 할 진리의 길을 포기하실 그런 예수님이 아니셨습니다. 오히려 당당히 자신이 걸어간 그 길을 통해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죄악에서 일어나 뒤따라 올 것을 내다보셨습니다. 자신이 세상에서 어떤 업적을 성취하는 것도 물론 소중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마지막까지 걸어간 이 길이야말로 오히려 인류의 희망이요 등불이요 생명이 될 것임을 내다보셨습니다.
따라서 고난의 그 길을 기쁨으로 마지막까지 걸어가십니다.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10:26). 거짓된 거룩함으로 위장하고 있는 존재된 그들의 실체가 무엇인지 다 드러나게 될 날이 있을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가 반드시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상황과 오해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권세자들과 대적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마지막까지 각자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진실된 그 길을 가라고 권면합니다.
아니, 오히려 진리와 진실이 무엇인지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외치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10:27). 제자들로 현장에서 보게 하신 세상의 어두운 실상과 실체들을 통해 그들에게 진리가 무엇인가를 예수님은 깨우쳐 주셨습니다. 세상의 현실을 보았고 진리를 깨달았다면, 고난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가셨던 예수님처럼 그 자신들의 삶의 생애 속에 하나님의 진리가 드러나는 삶을 동일하게 살아갈 것을 요청하십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10:28). 우리는 진짜 두려워할 것은 두려워하지 않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들을 오히려 두려워하며 사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진리를 위해 진리를 따라 사는 삶이라면 죽임을 당하는 그것까지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진리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고 사는 그 권한이 적대자들이나 세상의 권력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우리를 끊임없이 위협하고 들어오는 세상의 수많은 권세 앞에 결코 비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10:29-31).
이 말씀이 예수를 믿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죽지않고 살아갈 것이라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의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에 스스로 자기 생명을 지키고자 지나치게 연연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사명이 끝나는 그날까지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십니다. 걱정한다고 우리의 생명의 날이 더 길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허락하신 그 생명의 날까지 오직 믿음으로 진리 가운데 자기 사명의 길을 당당히 성실하게 걸어가고자 하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한 사람은 세상의 그 어떠한 위협과 상황에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끊임없이 빠지는 머리카락 숫자가 얼마가 되는지에 관심조차 없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것까지 세고 계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각자를 얼마나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는지를 안다면 지나치게 자기 생명의 날에 대해 집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어진 생애의 날 속에서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앞에 보다 합당한 것인가를 먼저 생각합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10:32,33).
단지 입술의 고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애와 삶을 통해 과연 예수님과 함께하는 그 삶의 방식을 세상 속에 드러내느냐 아니냐는 결단의 요청입니다. 겉으로만 예수의 사람인 것처럼 위장하는 위선자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자신의 모든 삶의 방식이 성실과 정직함으로 사람들 앞에서 투명하게 비쳐나는 그 사람을 하나님도 인정하시겠다는 표현입니다. 겸손히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며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세상의 어떠한 상황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매순간을 당당하게 살아가게 하시는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2. 진리는 위장된 평화가 아닌 진정한 생명으로의 회복을 위한 갈등을 촉발시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자신이나 세상의 실체를 위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가 오히려 종교지도자들의 욕망에 의해 잘못 왜곡되고 위장되는 경우가 너무 많았습니다. 우리의 손에 들려주신 하나님의 말씀된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읽어야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갑자기 전혀 예상치 않은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10:34). 이것은 또 무엇입니까? 화평이 아니라 검이라니 말입니다. 더군다나 예수께서 오신 이유가 가족간의 불화를 조성하기 위해서라니 말입니다. 도대체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10:35,36).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고 존경하되 믿어서는 안됩니다. 사람은 믿을만한 존재가 못됩니다. 우선은 자신이 자신을 믿을 수 없습니다. 하루에도 말과 생각 바꾸기를 도대체 몇 번이나 합니까? 하물며 굳이 다른 사람을 탓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부부간에도 언제는 죽고 못살겠다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한 백년 함께 살자고 하더니 돈없고 병들면 이내 팽개쳐지는 경우가 다반사인 시대입니다.
남녀 모두가 성적 방종을 쫓아 바람 피우는 것은 말도 못하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이제는 서로가 서로를 기다려 주지도 않습니다. 오실 메시야를 성경은 평화의 주로 선포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도대체 무슨 의미입니까? 이 성경말씀을 왜곡해서 허구한날 다른 사람과 다투고 싸우면서 영적 전투라는 이름을 내세우며 자신이 대단히 신앙적인 것처럼 떠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도대체 사람들이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선교현장을 지켜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충격은 훈련을 철저히 받은 사람일수록 더 비신앙적이고 더 비인간적이고 더 비도덕적인 경우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목표지향적인 훈련의 틀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위장된 평화, 위선으로 가리워진 화평을 싫어합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화평과 평화는 자기 편에서의 업적 성취와 정치적 해방과 물질적 번영입니다. 외형적이고 현상적인 모습에 집착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빛이 그 안에 비췰 때에 가리워지고 감추어진 온갖 추악하고 더러운 실상과 실체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된 진리를 검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6:17)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히4:12-14)고 선포합니다. 따라서 진리는 거짓된 자로 더 거짓되게 하며, 진실된 자로 더 진실되게 합니다. 진리의 검은 우리 내면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존재하지 않을 때는 도대체 어떤 것이 진실이고 거짓인지가 구별되지 않습니다. 거짓된 자가 진리를 통해 자신의 거짓된 실체를 발견했기에 진실로 감사하며 돌이킬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실체가 드러난 것에 대해 오히려 분노하고 증오합니다. 그 사람의 삶의 뿌리가 위선과 거짓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진실된 사람은 진리를 통해 더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을 가집니다. 그렇게 살아가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살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안믿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왜 기독교에는 자신들보다 더 비도덕적이고 악한 사람들이 많으냐고 질타합니다. 그러나 또한 기독교에는 그들보다 더 윤리적이고 선하며 위대한 사람들도 훨씬 많다는 사실은 망각합니다. 어차피 썩을 것이라면 안썩어 넘어지려고 버티기보다 일찌감치 폭싹 썩는게 낫습니다. 여기에 치유와 회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채 어설프게 있으면 본인도 힘들고 지켜보는 다른 사람도 힘듭니다. 저는 우리 사업가들이나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차라리 철저히 세상적이 되던가 그렇지 못할바에는 철저히 신앙적이 되라고 말입니다.
오히려 철저히 세상적이 되어 모든 것을 맛보고 날 때에는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헛되고 헛된 것인가를 발견한 사람은 다시금 신앙으로 돌아올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닐 때에 참 불행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닌 우리를 붙들고 있는 세상의 그 어떤 버팀목도 다 포기할 것을 요청합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10:37,38).
흔히들 자기 가족, 자기 자식, 자기 부모를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든 다 합니다. 아니, 오늘날에는 자기 자식 밖에 없지 부모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더 정확한 현실입니다. 인간의 많은 죄악이 의외로 자신과 가족들의 이기주의 때문으로 인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로 인해 세상이 병들고 신음합니다. 그렇게 키워진 자녀들은 더 큰 죄악을 저지르며 세상을 살아갑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이 죄악이라는 자책감마저 없습니다.
자신이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하루라도 빨리 깨달을수록 서로가 행복합니다. 서로를 자유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명분은 세상과 사람들을 위한다고 떠듭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오직 자기에게 얽어매이게 하려고 그렇게 애쓰는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신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 안에서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건강한 삶과 그 어떠한 환경과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는 능력으로서의 참된 자유입니다.
이러한 참 자유와 건강은 진리의 말씀된 검으로 자신의 헛된 욕망과 잘못된 가치관을 철저히 죽이지 않으면 얻지 못하는 선물입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10:39). 따라서 사도 바울도 끊임없이 다가오는 유혹과 욕망 앞에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부활의 은총과 생명 가운데 늘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임을 선언합니다. 진리 앞에 표출된 갈등은 우리로 위장된 평화가 아니라 참된 평화가 우리 안에 영원한 생명으로 역사하게 합니다.
3. 그리스도 예수의 증인된 제자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상을 잃지 않습니다.
세상이 모두 정치적 힘과 물질적 번영을 누리기 위해 애쓰는 시대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한다는 것처럼 초라하고 왜소해 보이는 것도 없습니다. 모두가 출세와 성공에 몰두하고 있는 상황에서 높아지려고 하지 말고 낮아지라는 말씀은 마치 막 정신병원에서 나온 사람이 하는 소리처럼 들려지는 시대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교회들마저 정치적 힘과 물질적 번영, 출세와 성공을 외치며 인기몰이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부요함과 화려함 속에 상대적으로 비쳐지는 그 왜소함과 초라함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마지막까지 그리스도 예수의 증인된 제자로써 진리 안에서 살아갈 것을 요청합니다. 지나치게 다른 사람들의 반응과 대우에 구애받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10:40). 여기서 “너희”는 마지막까지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된 제자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을 가리켜 “소자”(10:42)라고 표현합니다. 세상적으로는 지극히 작은 자처럼 비쳐집니다. 아니 스스로가 자신의 모든 인간적 권위를 내려놓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분명한 정체성과 자부심을 잃지 말고 살 것을 당부합니다. 이들의 신앙과 그 삶의 자세를 받아들이는 이들야말로 구원의 삶을 살아가게 하시는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삶 속에 받아들인 사람들이요, 나아가 영원토록 함께 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모시어 들이는 은총과 축복의 사건이 됨을 선언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증인된 제자들은 자신들이 마치 엄청난 권세나 가진 것처럼 행세하지 않습니다. 오직 말씀을 전파하며 지극히 작은 자로서 겸손히 자신이 먼저 그렇게 살아가는 선지자적 삶을 살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의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의를 위해 살아가고자 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의롭지 못한가를 알기에 다른 사람을 함부로 정죄하거나 비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격려하고 세우며 관용과 용서를 베풀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저들을 경멸하고 무시하지 않고 영접할줄 안다는 것은 자신이 또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동일한 상급이 주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10:41,42). 신앙의 사람은 엄청난 자기 업적 성취에만 분주하거나 자기 생색 내기에 급급하지 않습니다. 작은 정성의 마음을 나눌줄 압니다. 오직 마지막까지 그리스도 예수를 따라가는 증인된 제자의 삶을 겸손히 그리고 당당히 살기를 힘씁니다.
이들은 상급을 위해서 일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처럼 불쌍히 여기는 사랑의 마음으로 서로를 섬기며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자세로 서고자 할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들의 모든 수고를 잊지않고 기억하시고 계심을 선언합니다. 언제인가는 모든 진실이 드러나리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세상이 인정해주지 않을지라도 두려워말고 마지막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증언하는 복음 전도적 삶을 살아갈 것을 요청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흔히들 죄악으로부터의 구원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권력과 재력이라는 소유욕과 명예욕의 추구에 집착합니다. 적당히 의로운 척하면 될 뿐입니다. 신앙인들마저 아니 종교지도자들마저 그런 경향이 있다는 데에 예수님은 안타까워 하십니다. 이들의 위선적인 가치관에 휩쓸리게 하는 군중심리는 성도들로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기를 반복합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되신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하나님께 구하며 부활의 영으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무엇을 두려워하십니까? 진리 안에서 모든 허영과 탐욕과 죄악의 허물을 벗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신앙과 삶이 새로워지는 은총의 새아침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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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믿는바를 의식화시키고 예전화하는 것만이 신앙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늘보좌를 버리고 인간의 몸으로 삶의 현장에 들어와 함께 하셨던 예수님을 통해 회복되어야 할 신앙은 무엇입니까?
2. 마10:24-33 인류 구원을 위한 신앙으로 사셨던 예수님의 제자된 삶을 살기를 원하는 신앙인들로 겪고 넘어가야 할 고난을 두려워말라고 격려하시며 부탁하시는 자세와 이유는 무엇입니까?
3. 마10:34-39 예수께서 세상에 화평이 아니라 검과 불화를 주러 오셨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왜곡된 신앙의 문제는 무엇이며, 따라서 요청하시는 신앙의 자세와 은혜는 무엇입니까?
4. 마10:40-42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영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또한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자세가 요청됩니까?
5. 흔히 사람들은 죄악으로부터의 구원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권력과 재력이라는 소유욕과 명예욕의 추구에 집착합니다. 적당히 의로운 척하면 될 뿐입니다. 이들의 위선적인 가치관에 함께 휘둘린 군중들은 늘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기를 반복합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되신 예수께서 부활의 영으로 늘 우리와 함께 하심을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