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답사장소 |
답사 여행 |
답사일 |
충주시 |
2009년 4월 17일 |
<지도출처 : 월간산>
<답사기록>
중원고구려비-중앙탑-탄금대-충렬사-미륵사지-충주댐-목계나루-청룡사지
9:30 10:00 11:00 12:00 13:30 15:30 16:30 17:30
길의 고을 - 충주시
충주는 조선시대에 영남대로가 통과한 지역이다. 부산에서 서울로 향하는 백두대간의 문경새재를 넘고 나면 충주를 만나고 이어서 장호원을 거쳐 서울로 향하거나 남한강의 목계나루에서 배를 타고 서울로 향하는 교통의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서다. 그래서 충주는 ‘길의 고을’이다.
길의 고장 충주를 찾아가는 2009년 4월 17일은 화사한 햇살이 내려오는 전형적인 봄날씨를 보인다. 아침 7시에 포천을 출발하고 중부내륙고속국도에 올라서니 노란색의 개나리가 봄의 향기를 전해준다.
충청북도 북부에 있는 충주시(忠州市)는 동쪽에 제천시, 서쪽에 음성군, 남쪽은 경상북도 문경시, 북쪽은 경기도 여주군과 접하고 있는데 통일신라 때는 나라의 중심에 있다고 해서 중원(中原)이라고 불렸다. 기원전 4~3세기에는 마한에 속하였고 그 뒤 백제에 병합되었다가 고구려 장수왕이 남진했던 475년에는 국원성(國原城)이라 하였다가 신라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차지하던 557년에는 국원소경(國原小京)이라 하였고 경덕왕 때인 757년에 중원소경이 되었다.
고려시대인 940년(태조 23년)에 충주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고 조선시대인 1395년(태조 4년)에 충청도 관찰사를 두고 충청 고을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1908년(순종 2년)에 충주가 경부선에 벗어나 있어 교통이 불편하다 하여 도청을 청주로 이전하였는데 1956년 충주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나머지 지역은 중원군으로 분리되었다가 1995년 충주시와 중원군이 통합하여 충주시가 되었다. 면적은 983km2, 1읍 12면에 인구는 21만 명이다.
9:30
중부내륙고속국도 북충주IC를 빠져나와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중원고구려비가 있는 가금면 용전리이다. 중원고구려비는 남한 지역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비석으로서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다. 1979년 입석마을 입구에서 발견되었는데 비문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어 글자의 일부만 읽을 수 있는 상태다.
<중원고구려비>
중원고구려비는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3국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로 꼽혀 국보 제205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 비석 하나 때문에 문화유산해설사가 상주하고 있다. “이 비석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은가요?” 하고 물었더니 주말에는 150명이 넘게 찾아온다고 한다.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문화재이다 보니 그럴 만도 하겠다.
10:00
중원고구려비를 돌아 보고 남한강의 물줄기를 따라 충주시내 방향으로 향한다. 잠시 후에 가금면 탑평리에 닿고 여기서 또 하나의 국보 문화재를 만난다. 남한강변의 높은 토단 위에 건립된 통일신라시대의 7층탑인 일명 중앙탑(中央塔)이다.
<남한강변>
탑의 높이는 14.5m, 당시에 세워진 석탑 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 1917년 탑을 보수할 때 6층 몸돌과 기단 밑에서 사리장치와 유물이 발견되어 통일신라 후기인 8세기 후반에 세웠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 탑의 특징은 전체적으로 규모가 커서 웅장하기는 하나 지나치게 높아 안정감이 덜한 당시의 경향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중원탑평리 7층석탑>
중앙탑 근처에는 충주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1986년 중원문화권내에 산재한 유적과 유물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유물전시관으로 시작하였고 1990년 박물관으로 승격되었다고 한다.
남한강과 중앙탑이 잘 어울리는 사적공원 내에 제1관의 역사 1,2실, 민속 1,2실로 구분하여 불교미술품과 민속품 위주로 전시하였고 제2관은 선사삼국실, 고려조선실, 충주명현실, 충주항쟁실의 4실로 구분하여 충주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게 했다.
<충주박물관>
<국보 제102호인 흥법국사실상탑 모형>
충주박물관을 두루 구경하고 다시 충주시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 옆으로 남한강의 물결이 푸르다. 충주 시내로 향하는 520번 지방도에는 지나는 차량이 많은데 왼쪽에 중원 창동마애불이라는 이정표를 보고 차를 세운다.
<중원 창동마애불 이정표>
안내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바위에 새겨 있는 불상을 마애불이라고 하는데 이 마애불은 높이 6.3m의 크기로 바위에 꽉 차게 새긴 불상으로 남한강변에서 동남쪽을 향하고 있다. 크고 길게 새겨진 눈꼬리는 근엄함을 보이면서도 툭 불거진 큼직한 코와 귀는 서민적인 친근감을 보여주는 충주지역의 토속적인 불상이다.
이 고장 사람들은 임진왜란 때 신립장군이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 놓은 것이라는 전설을 갖고 있지만 상호(相好), 의문(衣紋), 연판(蓮瓣:연꽃 모양)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불상이다. 강변 암벽에 조성되었고 인근의 가흥창 및 목계나루터로 보아 당시 조운(漕運)제도와 민간신앙을 살펴볼 수 있는 문화재이다.”
<창동마애불>
<남한강의 조정 선수들>
11:00
탄금대로 간다. 충주시 칠금동에 위치하고 있는 탄금대(彈琴臺)는 남한강과 달천이 만나는 합수지점에 솟은 언덕으로 대문산과 견문산 등으로 불렸다. 덩치는 작지만 산세가 평탄하면서도 남한강을 아우르는 기암절벽에 소나무 숲이 우거긴 경치가 좋아 충주 시민들의 휴식처로 사랑받고 있는 곳이다.
산위로 올라가 충주문화원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운다. 그리고는 산책길로 나서는데 ‘탄금대사연노래비’를 만난다. 주현미가 불렀다는 ‘탄금대 사연’의 가사는 이러하다.
“탄금정 굽이돌아/ 흘러가는 한강수야/ 신립장군 배수진이/ 여기 인가요/ 열두 대 굽이치는/ 강물도 목메는데/ 그 님은 어디가고/ 물새만이 슬피우나~”
<탄금대 산책길>
<탄금대사연 노래비>
산책로를 따라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열두대까지 걸어간다. 열두대 앞 능선에는 탄금정이라는 정자가 있고 그 안쪽에는 여러 편의 시가 걸려 있다.
탄금대라는 이름은 신라 진흥왕 때 가야국의 악성 우륵(于勒)이 가야금을 연주하던 곳이라 해서 유래했다. 임진왜란 때는 신립(申砬,1546-1592) 장군이 왜군을 문경새재에서 막지 못하고 이곳 탄금대 남한강에 배수진을 쳤다가 8000명의 군사와 함께 장렬히 최후를 마쳤다. 이때 신립 장군이 계속된 전투로 뜨거워진 활의 열기를 식히고자 이 암벽을 열두 번이나 오르내렸다고 해서 열두대라 한다. 또 군사들을 독려하느라 열두 번을 올랐고 열두 번의 싸움 끝에 승산이 없자 이곳에서 투신 자결했다고 해서 열두대라는 이야기도 있다.
<열두대>
신립장군은 작전회의에서 문경새재에서 싸우자는 참모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왜 이곳에 진을 쳤을까? 그는 함경도 변방에서 여진족과 싸우면서 용맹을 떨친 장군이다. 그곳에서 기마전술을 익혔고 기마병들의 전력을 키웠기 때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기마병들을 이끌고 충주로 내려왔다. 장소가 좁은 새재에서 싸우는 것보다 널찍한 평지에서 기마병을 활용하려 했던 것인데 그 작전은 실패였다. 조총을 가진 왜군에게 기마병은 단지 표적에 불과했던 것이다.
<열두대 아래의 남한강>
신립장군의 충주전투 패배는 조선의 선조 임금을 더욱 처참한 피난길로 오르게 한다. 패배의 충격을 견디지 못한 신립장군은 이곳 남한강에 투신하여 패배의 책임을 졌던 것이니 역사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했지만 만약 신립장군이 참모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문경새재에서 왜군과 맞붙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12:00
탄금대를 뒤로 하고 충렬사로 향한다. 충주시 단월동에 있는 충열사(忠烈祠)는 병자호란 때의 명장 임경업 장군(1594-1646)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충렬사 안내도>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장군은 북방에서 여러 성을 고쳐 쌓고 백마산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적군은 백마산성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직접 한양으로 진격하여 남한산성에서 인조의 항복을 받아내고 만다. 명에 대한 의리를 일관되게 유지했던 장군은 청에 항복한 이후 청나라가 명을 치기 위해 조선에 병력동원을 요청하자 매번 장수로 동원되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명군과의 접전을 피하다 이 사실이 청군에 알려지고 압송되어 가던 도중에 탈출하기도 했다. 결국 나라의 역모사건에 휘말려 1646년 조선으로 송환되어 모진 고문을 받다가 죽었는데 달천 기슭의 풍동은 그가 태어나고 묻힌 곳이다.
<충렬사>
영웅이었지만 장군의 운명을 안타깝게 생각했던 백성들은 수많은 설화를 만들었고 한글소설 ‘임경업전’은 그 중의 하나인데 무속에서 다시 부활하여 서해안 풍어를 관장하는 수호신으로 모셔지기도 했다.
충렬사 맞은편에는 길가에 단호사(丹湖寺)라는 사찰이 있다. 이곳에 보물 제512호의 단호사 철불좌상이 있는데 사찰을 둘러본다. 사찰의 안내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단호사 법당의 주존불로 봉안되어 있는 철불좌상은 현 장소가 원위치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조성양식이나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인 11세기경의 철불로 추정된다. 불상의 크기는 1.3m이다. ~”
<단호사>
단호사를 나와 다음의 답사지로 향한다. 미륵사지와 하늘재이다. 국가하천 달천을 따라 간다. 조선 선비 이행이 “천하에 으뜸가는 물맛”이라고 했다는 달천이다.
<충렬사 옆의 달천>
시간은 어느덧 12시를 넘어섰다. 1시간 거리에 있는 미륵사지까지 가는 3번 국도변에는 크고 작은 식당들이 나온다. 그중에서 기사식당으로 들어가서 점심을 해결하기로 한다.
점심메뉴는 ‘시골정식’이다. 고등어구이, 제육볶음, 상추쌈, 계란찜, 봄나물 몇 가지 등 제법 푸짐한데 여기에 충청도의 시골인심이 하나 더 보태졌다. 된장양념과 담북장이다. 담북장은 충청도의 청국장을 말하는 것인데 향기와 맛이 독특하여 이른 봄에 먹기 알맞은 별미장이라고 한다.
<담북장으로 꾸려진 시골정식>
기사식당의 선택은 거의 틀림없다. 전라도에서도 식당을 고를 때는 기사식당으로 가보라는 경험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이곳에서도 우연히 선택한 식당치고는 운이 좋았다. 시골정식의 가격은 6000원, 정식의 가격이 저렴한데다 주인장의 인심 또한 후했다.
<미륵사지로 향하는 3번국도>
13:30
수안보를 스쳐 미륵사지에 도착한다. 3번 국도변의 벚꽃은 지기 시작했는데 이곳의 벚꽃은 활짝 피었다. 만개한 봄의 향연을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이다.
<미륵사지 안내문>
미륵리는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가장 큰 고개였던 계립령에 위치하던 마을이다. 이곳에 유명한 미륵리 절터가 있다. 매표소를 지나 5분 거리에 미륵사지는 돌거북과 오층석탑, 석등과 더불어 보물 제96호인 미륵대불이 순서대로 서 있다. 고려 초기 새로 일어난 국력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불상은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를 보는 듯하다.
마의태자와 누이 덕주공주가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이 대불을 세웠다는 전설도 있고 태조 왕건이 세웠다는 전설도 있지만 고려말 몽고군의 침입으로 대부분 불타버린 탓에 창건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미륵사지의 석탑과 불상>
이곳에서 문경 관음리를 잇는 백두대간의 분수령은 하늘재라고 하는데 문헌상 이름은 계립령(鷄立嶺)이다. 미륵리와 수안보 사이에 있는 고개를 지릅재라 하고 미륵리와 남한강 가는 길의 고개를 닷돈재라고 하니 모두 계립령의 영역에 속한다.
이 고개를 처음 연 나라는 신라다. 삼국사기에 ‘아달라 이사금 3년(156년)에 계립령 길을 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죽령은 이보다 2년 뒤에 개척되었다. 계립령은 길이 열린 이후 삼국의 통로였기에 서로 이곳을 차지하려고 애썼다. 고구려 온달장군은 “계립령과 죽령의 서쪽을 차지하지 못하면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으니 미륵사지의 ‘온달 공깃돌’의 전설로 남아 있다. 고려시대에는 몽고군의 침입로였고 고려말 홍건적의 침입 때 공민왕의 피난행렬도 이곳 계립령이었다. 그러다 조선시대인 태종 때(1414년) 문경새재가 개척되어 계립령은 발길이 뜸해지고 조선후기 대동여지도에 지명으로만 남아있는 잊혀진 길이 된 곳이다.
<미륵사지의 공깃돌바위>
<하늘재로 이어지는 길>
미륵사지에서 하늘재까지 다녀와야 하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고 충주댐을 향하여 충주시 방향으로 나간다. 돌아나가는 길은 월악산국립공원의 덕주사지를 경유하기로 했는데 덕주사지로 가던 길에 먼저 사자빈신사지석탑 이정표를 만난다.
<사자빈신사지석탑 이정표>
고려시대 석탑인 사자빈신사지석탑은 네 마리의 사자가 모서리마다 배치되어 있고 가운데에 비로자나불상 한 구를 놓았는데 사사자석탑으로도 불린다. 이러한 사자탑은 통일신라 때 등장하였으며 구례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이 남아 있는 최초의 예에 속한다.
탑의 내력을 밝힌 명문에는 고려 현종 때(1022년) “몹쓸 적들이 아주 물러갈” 것을 기원하며 월악산 사자빈신사에 구층석탑을 세운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단다. 현종 당시에는 거란족이 빈번히 고려에 침입하던 때이므로 불력으로 거란족의 침탈을 막아 태평안민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세워진 것이다.
<사사자석탑>
15:30
‘한 번 몸을 담그면 3년 동안 더위를 잊는다’는 월악산 송계계곡을 벗어났다. 덕주사지를 방문하려던 계획은 진입로 공사관계로 자동차의 출입이 제한되어 포기했다. 곧장 충주시내를 지나 충주댐으로 향한다.
충주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전망대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자동차로 전망대까지 올라갈 수 있지만 처음에는 그것을 몰랐다. 엘리베이터가 한참을 올라가더니 멈춘다.
<충주댐>
충주다목적댐은 4대강 유역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강원도의 소양강댐, 경북의 안동댐, 충남의 대청댐에 이어서 건설하는 발전시설 40만킬로와트의 콘크리트 중력댐이다. 중부지역의 지도를 바꾼 충주다목적댐은 1985년에 준공되었는데 높이가 97.3m, 길이가 464m에 이른다. 일대의 해발 145m에 못 미치는 땅은 모두 물에 잠겨 101개 마을의 8200여 가구가 고향을 떠났다고 하니 가슴 아픈 사연이 여기에도 남아 있다.
<물문화관>
16:30
충주댐과 물 문화관을 둘러보고 다음의 답사지로 향한다. 목계나루터다. 예전 영남지방에서 한양으로 갈 때는 신라와 고려 사람들은 계립령을 넘었고 조선시대 사람들은 대부분 죽령과 새재(조령)을 넘었다. 어느 고개를 넘든 결국 만나게 되는 곳이 충주의 목계나루다.
인천에서 소금이며 생활필수품을 실은 황포돛배가 수십 척 붐볐고 나라의 세곡을 운반하던 조운으로 이곳에는 가흥창(可興倉)이 있었으니 한창 번성하던 때에는 뱃일하는 인부만 500여 명이 되었다고 한다.
<목계나루터 표석>
목계나루에서 20리쯤 떨어진 충주시 노은면 연하리는 신경림 시인에게 소중한 추억의 장소였다고 한다. 광복 이듬해인 초등학교 4학년 때 목계나루 솔밭으로 소풍을 갔다가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 목계장터를 보고는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목계나루엔 빈 배 한 척 쓸쓸하고>
그래서 신경림 시인은 마침내 ‘목계장터’라는 시를 남겼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울장수 되라네~”
17:30
목계나루터를 뒤로 하고 청룡사지로 향한다. 오늘의 마지막 답사지가 된다. 꼬불꼬불한 시골길을 달려 도착하니 청룡사지 이정표가 나오는 주차장이다. 충주 지역에 흩어져 있는 여러 곳의 절터 중에서 이곳을 선택한 것은 국보 1점, 보물 2점 등의 문화재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국보 제197호의 보각국사 부도와 보물 제658호인 보각국사비, 보물 제656호인 석등이 그것이다.
<청룡사지 입구>
<보각국사 부도>
청룡사지를 돌아 나온다. 시계는 어느덧 오후 6시가 다 되어간다. 봄이 되면서 해가 무척 길어진 것도 실감하게 된다. 네이게이션에게 집으로 돌아가자고 주소를 입력했더니 남한강 물줄기를 따라 여주 방향으로 드라이브를 시켜준다. 옆에 있는 중부내륙고속국도에 오르지 않고 영동고속국도 여주IC로 향하는 것이다. 그래서 강변 풍경을 감상하게 된다.
<남한강변>
충주시는 길의 고장답게 사방으로 길이 연결된다. 예전에는 백두대간을 넘는 영남대로와 한강을 따르는 수운이, 지금은 중부내륙고속국도와 중앙고속국도가 양쪽으로 지나가고 국도는 3번, 19번, 38번이 제 갈 길을 다툰다. 그래서 역사적인 흔적도 많고 문화재도 곳곳에 흩어져 있다.
“오늘 답사지인 충주시를 평가한다면?”
“큰 내용보다 잔잔한 방문지가 많았다.”
중원고구려비와 탄금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답사지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다. 그렇다고 작은 문화적 흔적을 소홀히 하기도 어려운 답사지이기에 시간을 쪼개어 많은 유적지를 방문하였다. 역사는 흘러가는 것이지만 당시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되새겨보면 애틋함이 곳곳에 배어있다. 세월의 흔적을 더듬어 보게 하는 답사지로서 충주는 기억속에 남을 곳이다.<2009.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