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詩人과 머저리

[김삿갓]

                          詩人과 머저리

                                                                              이재신

우리에게 그녀는 흠모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이었다. 맵시의 옷차림과 세련된 매너, 그리고 교양미 넘치는 화술과 미모로 우리 세사람을 사로잡아 놓았다.

모두가 그러했듯이 마음속에 그녀를 감추어 두고 짝사랑 했던 것은, 그것이 속물근성이라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지 말아야 할 일들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녀를 마음과 가슴속에 묻어둠의 차체가 흠 일수는 없겠으나 최소한 도덕사회에서는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며 또 일방적인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모든 것을 알면서도 우리 셋은 그녀가 나타나면 순한 양이 되고 포효하는 사자가 되었다.

그녀가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된 동기는 지극히 단순했다. 그리고 평범했다. 우리셋은 오래전부터 쉼터 하나를 마련해두고 각자의 업무가 끝나면 쉼터로 모였다. 열평 정도의 사무실에는 허름한 쇼파 하나와 철제 책상 하나 그리고 전화기 한 대가 있을 뿐 쉼터답게 업무와는 무관한 곳이었다. 그 곳에서 서로의 삶에서 얻어진 교훈과 정보 등을 나누고 더러 지루해지면 백원짜리 고스톱으로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다. 그녀가 우리와 인연을 맺게 된건 바로 그 무렵이다.

미모의 여인이 쉼터문을 열고 들어섰다. 까만 눈동자에 명랑한 표정과 봉오리가 숨가쁘게 터질듯한 아름다운 입술에서 피어나는 미소에 우린 넋을 잃고 말았다.

“실례합니다만, 혹시 여기 1234차주 되시는 분 있나요?”

그리고는 우리 셋의 머저리 같은 표정을 번갈아 살피는 것이었다.

“네, 그 차는 제 찬데 왜 그러신지?”

나는 얼떨결에 더듬거리며 그녀의 표정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만개한 꽃송이처럼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더니 내게 말했다.

“사실은 선생님의 차를 제가 조금 다치게 했어요, 죄송하지만 확인해 주시면 잘 손봐 드리려고 합니다.”

물론 내차는 십년이 넘은 단종 되어버린 고물차다. 그뿐 아니라 폐차를 생각하고 있는 터라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있는데 그 고물차가 이처럼 귀한 인연을 맺게 해주다니 더 없는 행복이었다.

“아, 괜찮습니다. 그쪽 차는 어떠신가요?”

나는 오히려 염려하는 미인을 위로라도 하듯이 공손하게 물어봤다.

“제가 저지른 실수니까 전 괜찮습니다. 후진하다가 그리 됐으니 확인 해 주세요. 수리해 드리겠습니다.”

그 때 그 여자의 미향(美香)에서 깨어난 친구중의 하나가 또 여인을 위로하고 나섰다.

“차주는 괜찮다고 하니까 그냥 돌아 가십시오. 불신이 팽배한 사회에서 몰래 다친 차량 주인을 찾아서 용서를 구한 것 만으로도 미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자 곁에 있던 또 다른 친구가 정색을 하고 나섰다.

“그렇다고 그냥 가시면 않되지! 예의가 아니잖아!”

“네, 알아요. 저도 마음 편하게 배상을 하고 가겠어요.”

“지금 무슨말을 하는거야! 피해자인 내 뜻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가 흐르고 있잖아!”

나는 언성이 높아짐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러자 그 친구는 또 기어드는 숨죽인 목소리로 얼버무렸다.

“그 물질적 보상이 아니라 연락처 같은것을 남겨 달라는 뜻이었어.”

“네! 연락처는 드리겠어요.”

그녀가 나간 뒤에는 우리 셋은 한동안 그녀가 남기고 간 그윽한 채취에 몽롱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각자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가슴속으로 끌어안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몽환적 감상에 젖어 있었다. 그 아련함을 난도질 해버리고 나선 것이 한종이었다.

우리 셋 중에 한종은 좀 유머러스 한곳이 있긴 하다. 고스톱을 칠때에도 월약인가 뭔가를 어디서 배워온 뒤 우리에게 특강을 해 놓고 우리 용돈을 곧잘 훑어가는 친구였다.

“ 그 미모한테 전화해서 오늘밤 한잔 쏘자면 어떨까?”

우리는 누구랄 것도 없이 그 신나는 제안에 탄성을 올렸다.

“근데 왜 전화를 받지 않냐? 신호는 가는데 말이야!”

눈을 깜빡이던 귀복친구가 귀를 세우고 반응을 기다렸으나 응답이 없었다. 그렇게 상당한 시간이 세사람 사이에 흘러간 뒤 요행히 통화는 되었으나 너무도 엉뚱했다. 통화에서 전류속의 상대방은 우리를 실망 시키기에 충분했다. 음성은 늙은 육십대 후반의 남자였다. “거 전화번호 똑똑히 확인하시오.”

기대에서 절망으로 바뀌는 순간 우리 셋은 서로의 표정에서 희망 없음을 여실히 확인 할 수 있었다.

“아름다운 꽃은 향기가 너무 진해서 차라리 피지 말아야 하는데…….”

그 미모가 차라리 우리 곁에 나타나지 말던지 나타나려면 추물박색 이던지 하는 허탈감에서 하는 말이었다.

이슬다방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켜 들떴던 마음을 치유한 뒤 각자 헤어지기로 하고 쉼터를 나선 시간은 오후 일곱시쯤 이었다. 그냥 그렇게 헤어지기가 아쉬우니 그 기분에서 해방되려면 위로주가 필요하다며 셋은 각자의 뜻을 밝혔다. 우선 분위기가 중요하다면서 노래방 같은 곳이 어떠냐는 제안이었다. 나는 분명히 반대를 했다. 이 망가진 실망의 기분에서 노래방을 가면 선택의 노래마다 유행가요, 제목처럼 허무한 마음이나 처음 본 당신쯤이 분명한데 기분전환이 가능 하겠느냐 이거였다.

그러나 술을 하지 못하는 귀복친구는 그곳에 더욱 마음을 두는 듯 했다. 마지막 선택한 곳이 아늑한 곳이라며 한종 친구가 소개한 카페였다. 그 자신도 가본 바는 없으나 라이브 음악이 흐르고 미희가 있고 그런대로 기분전환 하기에는 좋다더라며 목에 힘줄이 솟도록 우리를 설득했다.

차는 한사람만 가지고 가기로 합의를 한 뒤 주차해 놓은 골목 안으로 셋은 걸어갔다.

“아악!”

그것은 내 찌그러진 차를 본 뒤 세사람이 동시에 저지른 허탈섞인 비명이었다.

어떻게 후진을 했는지 알수는 없지만 차의 유리창과 본넷은 깨지고 찌그러져서 차라 할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미모가 원망스러운 것은 비단 나뿐만 아니라 이쯤되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감정일 것이다.

“해도 너무한거 아니야 이거?”

“그래도 할 수 없지, 수리가 필요 없다고 그냥 돌려보낸 이상 말이야.”

그렇게 우리는 넋잃은 사람들처럼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물론 십년이 넘은 고물차이긴 하지만 너무 기가막힌 상황에서 마음 정리가 쉽지 않았다.

그녀는 자취를 감춘 것이 분명했다. 전화번호라면서 남겨준 것이 다른 사람의 것이니 이제 어디다 하소연도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 아름다운 여인이 말이다. 아니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이 시대에 흔치않는 여인이 말이다.

미희가 있고 음악이 있다는 카페에서 우리셋은 그날밤 얼마나 마셔 댔는지 모른다. 도대체 기억은 나지 않고 어떻게 귀가를 했는지 조차 희미했다. 기대의 성이 허물어져 버린 아쉬움으로 아마도 그토록 폭주를 자행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또 분위기도 괜찮았다. 서구풍의 아늑한 실내하며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듯 차분한 음악이 은은히 흐르고 있었으며 오색조명이 그날밤 전체를 물들이고 있어서 정도이상의 술을 청하게 되고 말았다.

우리는 또 아무런 사건도 없었던 사람들처럼 전화를 주고 받은 뒤 내가 제일 먼저 쉼터의 문을 열었다. 그 곳에는 분명히 어제 그녀가 남기고 간 아름다운 향기가 그윽히 남아 있었다. 뇌리를 스치는 그녀의 환영이 가슴 저 깊은 곳으로 흘려 내렸다. 하얀 피부. 가지런한 치아, 검고 큰 눈동자, 늘씬한 몸매. 그리고 조용히 속삭이던 음성이 곳곳에 묻어 있었다.

“뚜르르…….”

전화가 걸려왔다. 혼자서 느끼고 있던 고요를 난도질 해버린 건 그녀의 음성이었다. 맑은 목소리로 전류를 타고 흘러 내 뇌리에 화살처럼 꽂혔다.

“선생님! 지금 사무실 앞인데 조금 들러서 쉬어가면 어떨까 해서요?”

“네! 그럼요 대환영입니다. 그러세요. 제가 대접하지요, 부담없이 오십시오!”

어쩌다 내가 이렇게 말이 많은 사나이가 돼버렸는지 스스로 으아해 졌다. 사나이 오십대 초반이면 이제는 자신의 인격과 행동을 능히 살필 때도 됐는데 아름다운 여인의 미향에 취하면 별 수 없는가보다.

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섰다. 여전히 아름다웠다.

“안녕하셨어요?”

“네, 어서 오십시오, 앉으세요.”

그녀는 이제 구면이어서인지 별로 어려워하지 않고 편하게 대했다. 소파에 앉아있는 동안 차 한잔을 주문 하려하자 극구 사양했다.

“오늘은 왜 혼자계세요, 어제는 다른 분들도 계셨는데?”

“네, 우리는 시간 여유가 있을 때만 이곳에서 모여서 쉽니다.”

“친구분들이세요?”

“네”

그녀는 다시 얼굴에 미소를 띄우더니 내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어제는 정말 미안했어요, 공연히 잡생각을 하다가 그렇게 됐어요. 이해해 주셔서 고마웠어요.”

“아, 아닙니다. 어차피 폐차하려던 차였어요, 십년도 넘게 탄 고물차에다가 단종 되어버려서 부속도 구하기 힘들고요, 그뿐입니까 타고가면 사람까지 무시당하는 차였어요.”

“이해해주시니 고마워요.”

“근데 아까 말씀 중에 잡생각을 하시다가 그러셨다는데 그 잡생각이 뭘까 궁금해집니다.”

갑자기 그녀의 표정이 갈색처럼 시들어 가더니 허공 어디엔가로 시선을 끌고 갔다.

“쓸쓸한 계절이면 그런게 있잖아요, 와락 밀려드는 참아내기 힘든 고독 같은거!”

그리고 그녀는 허무로운 인생의 낙조를 맞이한 절망앞에 선 사람처럼 어둡게 표정이 바뀌어 갔다.

“제가 공연히 이상한 질문을 한 것 같아 미안해집니다.”

“아, 아니에요 전 그냥 그렇다는 거지요 뭐.”

그녀가 머물다 돌아간 자리에는 언제나처럼 아쉬움만 가득했다. 그리고 나로 돌아왔을 때는 왜 그랬을까 하는 어리석음을 발견하고는 했다.

전화번호를 확인했더니 다른사람이 받았는데 그 쪽이 허위로 가르쳐 준것 아니냐 등등 의당 필요한 말들은 깔아뭉개고 그저 태평양 같은 이해 넓은 마음의 소유자로만 행세 했으니 스스로 이상했다. 사나이답지 않게 꼴이 우스웠다. 아니 우습다기 보다는 아직 젊음이 남아있다는 증거처럼 여겨져 다행일수도 있다는 위안도 해보았다. 나약해지는 나는 그녀 앞에서만 그랬다.

“그러니까 그 미모의 여인 혼자서 다시 찾아 와서 쉬어갔다 이거지?”

한종과 귀복친구의 부러움 섞인 질문이었다. 한 술 더 떠서 이들은 왜 우리 두사람은 운명적으로 여복이 없느냐며 엄살을 피웠다. 그들이 쉼터에 나타난 건 가을해가 낙엽처럼 스러지던 오후 늦게였다.

“오늘은 내가 한 잔 화려하게 연출 하겠으니 허리끈 풀어.”

물론 그래봐야 술 못하는 귀복친구를 빼버리면 애주가 한종이 밖에 없고 그 또한 분위기나 좋아하지 마셔대는 쪽은 아니어서 모든 계산을 한 뒤에 선심을 쓰겠다는 속셈이었다.

“맞아! 그곳 궁전으로 가지!”

우리는 그렇게 의견일치를 본 뒤 쉼터를 빠져 나왔다. 시월의 저녁답게 피부를 스치는 밤바람은 찬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소위 밀실이라는 지하의 주점에서 우리는 거나하게 마셨다. 2차를 제안한 사람은 한종이었다. 그의 성격은 낭만적인데도 있지만 엉뚱한데도 있어서 그런지도 몰랐다. 가령 고스톱을 칠 때 일월 네장을 모두 먹으면 3점, 오동 네 장을 모두 가져오면 삼일점 그런식으로 말이다.

“이렇게 기분 나이스의 밤을 멈추어서는 안되니까 2차다 2차~”

“근데 문제가 있어. 우리는 세사람 인데 꽃은 두송이 아니야!”

그 때 둘 중의 한 아가씨가 실눈을 흘기며 말했다.

“숫자에 맞출 테니 염려마세요.”

그렇게 또 2차를 계획 했을때는 알콜로 무디어진 심신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오직 그 시간이 그렇게 흐를 것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그 밤의 축제가 어떻게 끝이 났는지 기억이 날리 없었다. 쓰린속과 멍한 미열을 의식하면서 눈을 뜬 시간이 아침 7시쯤이었다.

출근을 위해 천근무게의 몸을 일으켜 세수를 하고 담배 한 개피를 피워물고 베란다로 다가갔다. 육층에서 내려다본 건너 아파트 동 앞에서 십여명의 주민들이 웅성거리며 서있었다.

아침을 대강 끝마치고 집을 나왔다. 찌그러진 차량을 아쉽게 생각하면서 버스 승강장으로 가기 위해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쪽으로 걸어갔다.

꽃잎처럼 떨어져 숨을 거둔건 어느 여인이었다.

“젊은날 남편과 이혼하고 혼자 이 아파트에 살면서 외롭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해왔어요. 그러더니 글쎄…….”

군중 속에서 삼십대 후반쯤의 여인이 안타까이 뇌까렸다. 나는 그곳을 빠져 나오면서 중얼거렸다.

“참 쓸쓸히 떨어져 버리고 말았군.”

걸어가는 나의 두 어깨위에 낙엽이 흩날리고 있었다.

침을 꿀꺽 삼켜서 마른 기도를 적신 한종은 담배 한 개피를 꺼내어 물고 라이터를 켜더니 불을 붙여 물었다. 곁에서 지켜보며 다음 말을 기다리던 귀복이 참다못해 한종을 재촉한 것이다.

“그래서 어찌 됐다는 거야?”

“우연히 길에서 만났는데 나를 보더니 너무나 반가워 하는거야, 그리고 우리들의 안부를 묻고 말이지.”

“거기까지는 아까 했잖아.”

이번엔 내가 한종을 재촉했다.

“그래서 그랬지.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고 우리 사무실에는 왜 발길을 끊으십니까?”

“그랬더니?”

“네, 친정에 좀 다녀왔어요. 그러는거야, 그런데 그 표정이 영 아니야, 검은 구름 가득한 불안한 어두운 하늘이었어.”

우리는 또 제각기 그녀의 우울해 하는 모습을 떠올려 보며 가슴아파 했다. 메마른 척박한 땅위에 애정의 씨를 뿌리고 간 그녀였기에 그녀의 잿빛 하늘은 우리들 마음에도 검은 구름을 몰고 왔으며 언제 내릴지 모르는 우울한 빗줄기를 의식하며 불안해했던 것이다.

“친정이 어디래?”

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한종에게 물었다.

“모르지, 묻지 않았으니까.”

“물어보지 뭐했어? 고스톱 월약 따지듯 하면 친정이 어디냐? 누가 살고 있느냐? 아주 세밀하게 물었을거야.”

잠시 침묵이 흐르고 귀복이 자리에서 일어나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육체가 늙었으면 정신도 보폭을 맞추어야 정상인데 마음이 청춘이니 나이값 들을 못한다 이거지.”

그리고 그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잠시 후 한종이 마저 사무실을 빠져 나간 뒤 나는 빈 사무실에서 그녀의 모습을 가슴 속 가득히 채워 안고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속삭이고 있었다.

어느 파도가 우는 해변가 였고 하얀 갈매기들이 진청의 물결위를 비상하고 있었으며 갯바위 위에서 우리들은 멀리 융단처럼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며 속삭이고 있었다.

“인간에게 사랑이 없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나는 참 바보같은 질문을 했다고 느꼈으며 곧 후회하고 있었다.

“없다고 생각 하는데에 그친게 아니라 저는 몸소 체험하며 살고 있어요.”

의외의 답변이었다. 이를 두어 우문현답이라 하던가.

“그러시면 가슴속에 사랑을 간직하지 못하셨다는 말씀이신가요?”

“갖고 있어도 나누지 못한 사랑은 없는거나 다름없지 않겠어요?”

내 말에 반문해오는 그녀를 보면서 몹시 안타까운 생각을 하게 된건 순간적이었다. 애정고갈을 호소 하는듯도 했다.

따르르르릉!

나의 망상을 난도질 해버린건 전화벨 소리였다.

“여보세요?”

청각을 자극하여 평화로운 정원에 소나기를 내리게 한 그 목소리는 그녀였다. 나는 현실과 망상사이의 늪에서 이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잠시 망설이고 있을 때 상대편 그녀 음성은 다시 내 가슴의 소요로 다가왔다.

“여보세요!”

“아,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금 저 혼자거든요. 얼마나 기다렸다구요.”

그녀 앞에서 왜 이렇게 내가 갈피를 잡지 못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최소한 사나이의 중후함은 어디로 가고 무질서의 말들이 경망스럽게 쏟아 지는건 왜인지 몰랐다.

잠시 후 노크소리와 함께 사무실 문이 열리고 우아한 자태의 그녀가 들어왔다.

가을날의 석류처럼 농익은 입술에는 미소가 흐르고 눈빛에서 발산하는 알지 못할 영롱함 앞에 인사마저 잊고 있었다.

“안녕하셨어요?”

그녀가 물었으나 머저리같이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나는 그녀를 쳐다 볼 뿐이었다.

“어디 편찮으세요?”

재차 물어온 그녀의 말에 겨우 이성을 회복하고는 입을 열었다.

“앉으십시오.”

어둡게 우울하던 음침하기 짝이 없던 사무실 안이 향기 가득한 장밋빛으로 밝게 변했던건 일순간이었다. 그녀는 분명 나에게 있어서만은 야릇한 마력을 지닌 천사같았다. 사랑의 천사…….

“그래 어떻게 지내셨어요?”

“네, 얼마전에 친정에 좀 다녀왔어요. 지금은 혼자사는 처지니까 친정이고 시갓집을 구별할 필요도 없지만요.”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는 왜 이다지도 내 마음의 사원(思圓)에 그윽한 라일락 향기를 뿌려대는지 모를 일이었다. 정이 가득담긴 그 매혹적인 음성은 나를 영원한 포로로 묶어 둘것만 같았다.

“실례지만 다녀오신 친정이 어디신가요?”

“네, 여수쪽에 위치한 아주 외딴 섬이에요.”

“아 그러시군요, 근데 무슨 문제가 생기신 겁니까?”

나는 마치 피붙이라도 되는 듯이 깊은 관심을 나타내었다.

그녀는 소란스러운 창밖을 응시하더니 내게로 시선을 끌어왔다. 얼굴빛은 여전히 우울함 그대로였다.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그냥 친정 식구들이 보고 싶어서 다녀왔어요.”

그러나 그녀의 얼굴빛은 그리 밝지를 못하였고 깊은 시름에 젖어있었다.

“우리가 이번이 세 번쯤 만난 것 같은데 통성명이 없어서 서로를 호칭하기가 곤란하거든요. 실례지만 존함이?”

“저는 고순천 이라고 해요.”

오래 사귄 이성간의 사이처럼 우리들은 명랑해지고 있었다.

“고순천 여사, 이름이 참 멋있어요. 우리나라 정치사에 보면 순천이란 여류 정치인이 있었고 또 권투선수 중에도 순천이라는 사람이 있었지요. 그 뿐인줄 아십니까? 미인이 많기로 전국에서 유명한 도시가 전남 순천이고요, 이북에도 순안비행장 옆에 순천이라는 고을이 있어요. 그곳은 순할순(順), 내 천(川)을 쓰지만요.”

안개가 사라졌다. 두서없이 지껄이는 내 말에 우울하던 그녀의 기분은 환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러자니 나도 즐거운 마음일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잠시 그녀와의 추억거리를 생각하고 있었다.

“근데 선생님은 무슨 사업을 하세요? 그리구 친구 분들은 어떤 일을 하세요?”

“저는 화백입니다. 그리고 그 중의 귀복친구는 화물 운송업을 하구요, 한종친구는 회사에 중역입니다.”

“선생님의 전공은 동양화세요? 서양화세요? 아니면?”

“그림의 화가가 아니라 화려한 백수라는 듯이지요. 화백!”

나는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그녀는 마네킹처럼 예쁜손을 입으로 가져가 가린 뒤 한동안 웃고 있었다.

그녀가 피안대소 하는데 덩달아 기분이 좋은건 왜일까.

찌푸린 하늘에서 검은 먹구름이 사라지고 이내 보석을 뿌려놓은 듯 별빛이 눈부시고 영롱한 달빛이 온누리를 조명하는 기분 그것이었다.

그녀가 웃음을 그친 적당한 기회를 보아 드라이브를 제안했다.

“혹시 시간이 있으시면 변두리나 한바퀴 하시겠습니까.”

“네, 그러지요, 그럴 시간은 있어요.”

“그러시면 잠깐만요.”

나는 수화기를 들고 한종에게 전화를 걸었다.

“난데 차좀 빌려주라! 몇시간만.”

그녀가 듣지 못하게 조용히 부탁한 것은 내차를 폐차시킨 장본인이 그녀이기 때문이며 이런 부탁을 알게 되면 미안해 할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오래 있지는 말고 쓴 다음에는 기름이나 가득 채워!”

쾌히 승낙했다. 물론 자주색 구형 무슨 페로라는 건데 폐차 직전을 이백오십 주고 샀다니 그 친구도 안목은 색맹이었다.

갈대가 흐느끼고 있었다. 국내 유일 철새 도래지 대대포구에는 사각사각 바람결에 갈대가 흐느꼈다. 남에서 밀려오는 해풍에 가창오리들은 신이났다. 마주앉아 정을 나누듯 중얼대더니 갯벌을 박차고 비상하기도 했다. 한눈에 펼쳐진 갈대밭 늪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하나가 돼 있었다.

“그림 같아요. 너무 멋있어요!”

“그렇지요. 그런데 이렇게 아름답도록 가꾸어 지기까지의 우여곡절은 참 많았어요.”

“왜요?”

“우리네 조상들은 이 갈대꽃을 뽑아다 소금물에 담근 뒤에 방 빗자루를 만들어서 가난을 극복하기도 했고 대궁으로는 주름(발)을 만들어 팔기도 했지요. 지금도 시장에서 창문가리개 주름이 보이기도 하던데요.”

“아 그랬군요.”

“지금은 자신들이 심고 가꾼것 처럼 모든 사람들이 입으로만 주인이지요.”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환경을 지키는건 바람직한 것이 아닐까요?”

“그렇지요. 하지만 그 쪽보다 훼손쪽이 더 많다는 거지요. 저의 지론은 인간의 발길이 가지 않은 곳에 생태계의 파괴는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인위적으로 가꿀 필요도 없어요. 자연은 생성 번성의 능력과 자생력이 있으니까요.”

“그래도 사람과 가까이에 있는 이런 곳은 잘 관리되어 있지 않아요?”

“아니지요 겉모습을 보신 것 뿐입니다. 심지어는 지키고 가꾸자는 일부 단체에서는 이곳에서 무슨 행사를 열기도 합니다. 그 뒷날 가보면 쓰레기만 뒹굴고!”

“그래서 휴식년제 라는게 있었군요.”

차를 몰아 상사호수를 끼고 돌았다. 거대한 호수에서 속삭이는 물결을 보면서 그녀는 연신 감탄사를 연발했다.

“보시기에 이곳에 오신지 오래일 것 같은데 안와 보셨어요?”

“아니지요, 언제나 보아도 다른모습 다른 기분이어서 그러는 거지요.”

즐거웠다. 비록 이러한 순간들이 가슴속에 지울 수 없는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해도 현실은 너무도 낭만적이었다.

우리는 선암사를 돌고 다시 고인돌 공원을 들러서 송광사를 경유 화엄사까지 거치고 나니 라이트를 켜야만 달릴 수 있도록 날은 저물고 말았다. 그때 달리는 차창으로 oo모텔이라는 입간판이 시야에 잡혔다. 나는 또 그녀와의 환영(幻影)에 시달렸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뒷문으로 들어서니 변두리 러브호텔답게 투숙객이 별로 눈에 뜨이지 않았고 카운터에서 사십대 후반의 여인이 졸린 눈으로 쳐다보며 우리의 눈치를 살폈다.

“얼마지요?”

“쉬었다 가시게요?”

“네!”

“오만원이에요.”

나는 기갑에서 요금을 지불하고 열쇠에 적힌 호실을 따라 이층 계단을 올랐다.

그녀는 묵묵히 나의 이끄는 행동대로 따랐다. 우리는 오랜 사이처럼 샤워를 끝내고 침대위에 나란히 누웠다. 그리고 서로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확인했다. 무수한 사랑의 별들이 반짝반짝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니 우리의 사람의 가슴위에 쏟아지고 있었다. 이 순간이 그렇게 멈춰 버렸어도 후회없는 일생일 것 같았다.

“외로웠어요. 선생님을 만나기 위한 어두운 터널은 제게 너무나 길었어요.”

그녀는 참새처럼 내 가슴속에 얼굴을 깊이 파묻고는 속삭였다. 그녀와 내가 토해내는 고열로 그 방은 가득차 숨이 막혔다.

나의 입술을 포갠 뒤 힘껏 정열을 퍼부었다.

“더 힘껏 안아주세요.”

절규에 가까운 그녀의 젖은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녀는 나의 깊은 곳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솜처럼 부드러운 그녀의 체취가 여름 아침의 실안개처럼 코끝을 스쳤다. 나는 더 이상 인내 할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하고 말았다.

그녀도 그렇게 허물어져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차에 이상이 생겼어요?”

그녀의 불안한 한마디에 또 개꿈에서 헤어났다. 내가 또 그런 부도덕한 드라마를 연출하는 사이에 달리는 차가 요동을 쳤던 모양이었다. 그런 허황된 꿈을 꾼 내가 참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고 나의 인격에 문제가 있는건 아닐까도 자문해 보았다.

“어디 편찮으세요? 이마에 땀이 솟았어요.”

“아 아니에요 저는 덥네요.”

그녀의 말에 우물쭈물 대꾸한 체 시내로 진입하고 있었다. 헤어짐 앞에서 그녀는 조그마한 시집 한 권을 내게 내밀었다.

“저의 신작이에요.”

“아, 시인<詩人>이셨군요.”

“오늘은 즐거웠어요. 영원히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할게요.”

그러는 그녀는 나에게 자신의 신작 시집 한 권을 남기고 군중속으로 사라졌다.

어둠이 삼켜버린 그녀의 뒷모습을 확인 한 뒤 나는 시집을 펼쳐 보았다. 그 속에는 조가마한 메모지가 들어 있었다.

<선생님과의 짧은 만남은 즐거웠습니다. 우리 다시는 만날 수 없음을 아쉽게 생각해요. 고순천>

돌아서서 가는 내 가슴위에 낙엽이 한잎 하늘거리고 있었다.

[하정]

한 때 저도 소설가를 꿈꾼적 있답니다. 세익스피어마냥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삶을
보이지 않는 이면까지 꿰뚫어 인생사를 아름답게 때론 예리하게 글로써 그려낼 수 있는
소설가. 그것은 제게 흠모의 대상이었지만 꿈과 달리 수필로써 문학의 거대한 산을
오늘도 힘겹게 오르고 있답니다. 그런 열망 탓인지 이렇듯 단,장편의 소설을 통해 인간의 내면과 혼을 응시하는 작품을 쓰실 수 있는 이재신 선생님의 뜨거운 열정이 존경스럽습니다. 선생님의 좋은 작품에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