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이어 김영남님의 <시 쉽게 쓰는 법.2>
3. 초보자의 시 습작 방법
초보자 시절에는 시 창작 방법을 아무리 들어도 시작하려면 정작 막막하기 이를 데 없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필자의 경험을 토대로 좀 더 구체적인 방법, 두 가지를 추천할까 합니다.
* 좋은 시를 모방해 보라.
* 첫째로 왕초보 시절에는 기성 시인의 작품 중 구조적으로 잘 짜여진 작품을 갖다 놓고 그 작품 구조에 맞추어 자기 생각을 끼워보는 연습을 먼저 해보라고 권장하고 싶습니다. 즉 그 시를 한번 모방해 보라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란 모방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했습니다. 사실 어느 시인이 누구의 영향을 받았다는 건 좋게 말해서 영향이지, 액면 그대로 표현하면 그 사람을 모방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 모든 창작은 모방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미술학도 지망생에게 제일 먼저 시키는 것이 석고데생, 즉 모사연습이고 외국어를 습득하는데 어떤 이론, 문법 공부보다도 말을 실제로 따라 해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음미해보면 금세 이해가 갈 겁니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이렇게 급속도로 선진대열에 올라설 수 있었다는 것도 외국, 특히 인접 일본의 앞선 기술, 문화, 제도 등을 그대로 모방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우리나라의 색깔과 독자성이 문제이지만…
하여, 왕초보 시절에는 구조적으로(기,승,전,결) 잘 짜여진 작품이나, 독특한 표현이 많이 들어있는 작품을 갖다 놓고 자기 생각을 끼워보는 연습을 많이 해보기 바랍니다.
내용과 감각을 모방하라는 것이 아니라, 구조와 전개 방법과 표현기술을 따라서 해보라는 뜻입니다. 이걸 능수능란하게 하다 보면 나중에 자기도 모르게 표현을 뒤틀어보고 싶고 독특하게 펼치고 싶어져 자기 색깔이 선명하게 나오는 걸 보게 될 것입니다.
* 시의 소재를 찾는 방법
* 둘째로는 자기가 생각하기에 어느 정도 감각은 있는데 될만한 시의 소재를 못 찾아 시를 제대로 쓸 수 없는 사람은 잡지를 많이 보라고 권장하고 싶습니다. 특히 여성지, 패선 잡지, 디자인 잡지, 건축잡지, 미술잡지 등 사진과 그림이 많이 담긴 잡지를. 시란 기본적으로 심상, 이미지 즉 언어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니까 그림이 많은 잡지를 넘기다 보면 언뜻 시로 표현하고 싶은 소재가 스치게 됩니다. 잡지를 깊게 읽지 말고 눈요기식으로 넘기고 광고 카피도 눈여겨보기 바랍니다. 문득 힌트를 얻게 됩니다. 광고쟁이들도 시를 많이 읽고 쓴다는 걸 참고해 가면서 말입니다. 이때 얻은 힌트를 가지고 감상평 (1),(2)를 참고해서 상상을 펼쳐보기 바랍니다. 나중에 또 언급하겠지만 제목에 신경을 쓰지 말고 문득 얻은 힌트, 그
소재를 가지고 상상을 해 다듬어 보기 바랍니다. 상상을 자꾸 새롭게 하고 고치다가 보면 처음 의도했던 내용과 전혀 다른 내용의 시가 탄생하거든요. 그래서 제목을 맨 나중에 붙이는 겁니다.
이상을 참고해서 초보자 시절에는 가능한 한 이미지 즉 글로 그림을 그리는 연습을 많이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걸 잘하다 보면 나중에 의미 있는 말, 표현, 자기 철학 등도 요령 있게 양념 치듯 넣는 기술을 알게 됩니다. 여하튼 처음에는 거창한 자기의 말, 주장하려 하지 말고 힘을 완전히 뺀 상태에서 감각과 상상으로 접근해 그림을 그리는 연습을 많이 해보기 바랍니다.
방
그 방은 창을 통해 안이 훤히 드러난다. 연둣빛 레이스 커튼을 드리웠고 널린 브래지어가 한결같이 희망표이다. 고개를 들면 갤럭시 손목시계, 악어가죽 핸드백이 한눈에 확 들어온다. 바닥은 아담하고 천장은 유난히 높고 알록달록한 박달나무 숲속 같은 분위기가 달려오는 방. 저렇게 꾸미는 데는 몇 년이 걸렸을까. 그 방에 닿으려면 창동역에서 도봉산 쪽으로 날아가는 화살표를 두 번 따라가야 하고 909국 다이얼을 돌려야 한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만큼 그 방 밖도 늘 매혹적이고 불안하다. 항상 불이 켜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불이 꺼져 있으면 그 방 밖은 가을이고 수상하다. 그리고 낙엽이 뒹굴고 바람이 불면 그 방은 사정없이 흔들린다. 방은 흔들릴 때가 아름답다. 흔들릴 때마다 굳게 잠긴 자물통이 침묵의 장식처럼 중심을 잡아주지만 한 발짝 뒤로 물러나서 돌아다보면 그 방은 다시 불이 켜진다.
참으로 이상한 방. 한번 쓱 들어가 맘껏 뒹굴어보고 싶은 방. 브래지어가 창인 그녀.
4. 시의 길이는 20행 정도가 적당하다
초보자 시절에 시의 퇴고와 관련하여 자주 고민하는 것이 연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 시의 길이는 어느 정도로 할 것인가입니다. 여기에는 내용에 따라 전개하는 형식에 따라 각각 다르겠지만 행갈이를 정상적으로 한다고 할 때 시의 길이는 대체적으로 20행 정도를 목표로 하고, 시의 연은 의미가 달라지는 부분에서 연을 구분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가 시를 읽을 때 통상적으로 20행이 넘어 시가 길어지면 우선 시각적으로도 질리게 되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 시를 읽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나게 됩니다. 시가 길어질 땐 길어지는 특별한 사유가 있어야 합니다. 우선 그 시가 아주 재미있다든지, 아니면 호흡이 길어도 독자들이 지루함을 못 느끼도록 하는 특별한 기교와 내용이 있든지 해야 합니다. 이젠 독자들도 영악해서 별로 의미 없고 특별한 내용도 없으면서 작자만의 생각으로 길게 쓴 시는 두 번 다시 읽지 않는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시가 문학의 어느 분야보다도 언어의 함축성과 경제성을 추구하는 예술이라는 걸 생각하면 금세 이해가 가리라 여깁니다. 그러나 요즘 시 잡지에 발표되는 시들을 보면 필자가 말하는 내용과 너무나 다르다는 걸 느낄 겁니다. 좋은 시란 적당한 길이에 음악성과 함축성을 겸비하고 이미지가 선명한 시가 좋은 시입니다. 하여, 초보자 시절에는 상상은 끝없이 해놓고 나중에 작품을 다듬어 퇴고할 때 이 정도의 길이로 지향하는 게 바람직할 겁니다.
연을 나눌 때에는 대체적으로 의미가 달라질 때 나누게 됩니다. 그러니까 상상의 내용이 건너 뛸 때. 변칙도 있습니다만 초보자 시절에는 여하튼 기본에 충실하는 게 발전이 빠릅니다. 그리고 1, 2, 3 등으로 구분하는 것은 내용이 거의 연작시 수준이거나, 연을 구분하기에는 보폭이 너무 클 때 통상 사용하는 것으로 초보자 시절에는 가능한 한 사용하지 않는 게 바람직합니다.
5. 시를 쉽게 잘 쓰려면 2중 구조에 눈을 떠라.
* 이중구조란 글자 그대로 두 가지 그림을 거느리는 구조를 말합니다.
예를 들자면 현실의 나와 의식 속의 나, 현재의 나와 과거ㆍ미래ㆍ 또는 추억 속의 나, 현실의 나와 거울 속의 나, 현실의 나와 그림 속의 나…등 이런 관계를 말합니다. 이런 관계의 시를 가장 선명하게 제일먼저 제시한 시인이 바로 <이상> 시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상 시인은 주로 거울을 매개체로 해서 현실의 나와 의식 속의 나를 잘 조응했었습니다. 사실 이중구조 이치만 잘 이해하고 소화한 사람이면 이런 유형의 시가 쓰기도 쉽고 참 재미있는 걸 금세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남들은 난해하고 쓰기 어렵다고 하는데... 그 작업은 의외로 쉽지 않나 생각합니다. 현실의 나와 거울 속의 나와 대화를 계속 나누면서 온갖 장난과 행동을 다 해보는 겁니다.
"현실의 나와 거울 속의 나"로 예를 들면 < 내가 눈빛을 시퍼렇게 뽑으니까/ 거울 속의 녀석도 눈빛을 시퍼렇게 뽑는다./ 내가 쫓아가니까 그 녀석은 도망간다. 화장실로 숨는다/ 내가 다시 돌아서니깐 녀석은 다시 기어 나온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와 행동을 이 둘에만 초점을 맞추어 전개해 나가면 시적 공간이 나와 거울 속의 나로 한정되기 때문에 그 이미지가 아주 선명하게 되고 이야기도 풀어나가기가 한결 쉽게 됩니다. 제 시집 '정동진역'에 실려있는 <도둑놈을 잡자>라는 시도 참고로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상상의 시작도 이런 데에서부터 시작하고, 고정관념을 벗어나 사고의 자유로움을 쉽게 느낄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데에부터 시작하지 않나 싶습니다. 기본적으로 이런 마인드를 갖고 이상, 김기림, 김수영, 오규원 등 이런 시인들의 시를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시가 참 재미있다는 걸 금세 느낄 수 있을 겁니다.
* 소재의 이중구조
위에서 예를 든 이중구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소재의 이중구조라는 것이 있는데 이걸 한번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즉 어떤 오브제를 갖다놓고 그 소재와 나와의 관계 둘로 보고 시를 써 나가는 것입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때 시를 끌어내는 방식이 세 가지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첫째는 내가 아예 그 소재가 되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고,
둘째는 거꾸로 그 소재가 나로 되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고,
셋째는 그 소재와 내가 서로 마주보고서 떨어져 앉아 대화를 나누며 생각하는 방법입니다
<깡통>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예를 한번 들어볼까요?
* 첫 번째 방법은 이렇습니다.
< 나는 엉덩이에 찌그러진 상호를 붙였지만/ 발로 차면 크게 소리를 지른다/ 밟으면 시커먼 침을 뱉을 수도 있고/ 잘 돌봐주면 난 그대 책상을 꾸미는 꽃병이 될 수도…>
이런 식으로 내가 깡통이 되어 깡통의 속성을 가지고 계속 생각하고 행동한 다음에 제목을 <깡통>으로 붙이는 경우입니다.
이때 유의할 점은 본문 내용에 절대 '깡통'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안 됩니다. '깡통'이란 말이 들어가면 깡통이란 단어를 보는 순간 내가 깡통이라는 환상이 갑자기 확 깨져버립니다. 이것만 잘 소화해도 현상문예 예선을 거뜬히 통과할 수있을 정도로 시가 감각적이 되지 않나 싶습니다.
*두 번째 방법은 거꾸로 깡통이 내가 되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 이 깡통은 목소리가 크고/ 속에 든 것은 아무 것도 없고/ 하루종일 거리에서 빈둥거리며 놀고/ …그리하여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깡통/ 가끔 앞집 아저씨의 발에 채여/ 아프다고 소리치는 깡통……>
이렇게 깡통이 내가 되어 생각하고 행동한 다음에 제목을 <김영남>으로 붙이는 경우입니다. 이때는 또 반대로 '나의' 라는 말이나 '나'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절대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이런 단어를 보는 순간 환상이 확 깨져버립니다.
* 세 번째 방법은 지면상 설명이 좀 길어질 것 같아 다음 기회로 미루고 첫 번째 방법에 충실한 시 한편을 소개하고 게시판 시 감상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첫 번째 방법만 잘 활용해도 눈에 확 나는 좋은 시를 금세 쓸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수박 / 윤문자
나는 성질이
둥글둥글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허리가 없는 나는 그래도
줄무늬 비단옷만 골라 입는다
마음속은 언제나 뜨겁고
붉은 속살은 달콤하지만
책임져 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배꼽을 보여주지 않는다
목말라 하는 사람을 보면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다
겉모양하고는 다르게
관능적이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면
오장육부를 다 빼 주고도
살 속에 뼛속에 묻어 두었던
보석까지 내 놓는다
간이식당 / 이 원
끊어져버린 전기처럼 한 사내
등받이가 없는 간이 의자에 앉는다
그가 꽂힐 콘센트가 보이지 않는다
사내의 잠긴 허리 근처에서
수도꼭지 두 개도 잠겨 있다
카운터 너머 진창 같은 여자는
수도꼭지 옆 온수 탱크 앞에 선다 그래도
온수 탱크와 수도꼭지는 차가운 은빛이고
허옇게 뒤집어진 고무장갑은 시간을 잔뜩 묻히고
붉은 벽의 허공에
형광등과
여자와 사내가 흐릿하게 떠 있다
그곳으로 들어가는 손잡이는 보이지 않는다
유리문 밖은 차들이 굉음을 내며 도로를 질주한다
여자와 사내는 모른다 어디쯤이 이 세계의 통제선인지는
헐거운 세계를 조이고 있는 나사못처럼
단단한 등만 보이고 있는 여자와 사내
여자와 사내를 열고 밤이 산업용 석회액을 부어넣는다
굳은 후에 사내와 여자를 뜯어낸다
엉킨 전선 다발 같은 것들이 석고 밖으로 빠져나온다
묵은 무씨 / 이상호
-어머니 말씀.2
텃밭에 심은 가을무 여러 포기에 꽃대가 올라왔다. 가
을무가 꽃을 피우는 걸 보지 못했는데 난데없이 꽃대가
올라와 이 놈 저 놈 뽑아보니 하나같이 뿌리가 실하지 않
았다. 왜 그런지 어머니께 일러바쳤더니 너무 오래 묵은
씨앗은 그럴 수 있단다.
싹 틔울 날을 얼마나 고대했으면
저렇게 철없이 꽃을 피워 올렸을까?
대대손손 이을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으면
때도 없이 냅다 꽃대부터 밀어 올렸을까?
무화과 / 장민정
....우린 꽃시절이 없었어야
니 할베 얼굴도 쳐다보지 못했으닝께
장독대 옆에서
잘 익은 무화과를 따는 날 할머니
보드랍고 달짝지근한 과즙을 오물오물 삼키신다
....그래도 아들딸 낳고 해로 했으닝께 회혼례 잔칫상도 안 받었냐
이 존 세상 너그들은 제발 구순하게 살어라잉
몇 번째인지 모를 할머니 얘기를 듣는다
열매 속에
속 꽃 피운 무화과 인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