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을 따라 행함
2021. 6. 4. 이현래 목사
엊그제 누가 왔는데 ‘구속을 받으면 어떻게 되느냐?’, 또 ‘예수 안에 있으면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을 했다. 생각이 좀 많은 형제여서 구속을 받은 후에 뭘 할 것이고 왜 묻느냐고 그랬다. 그 생각 좀 그만 두고 일단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자리로 들어오라고 했다. 옳다고 생각하면 죽든지 살든지 들어오고 봐야지 그 다음에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아무 것도 못한다.
그 형제가 생각이 좀 많아서 내가 일부러 뭐라고 했다. 무엇 때문에 그것을 물어 보느냐고 다시는 그런 소리를 하지 말라고 큰 소리를 쳤다.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이러면 어떻게 될 것인가? 다음에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생각을 하면 못 듣는다. 다음에 어떻게 되든지 갈 수밖에 없는 그런 길이어야 한다. 다음을 알고 이것을 하고 나면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하고는 갈 수 있는 길이 못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와 다르기 때문이다.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뒤에까지 다 알고서는 못 간다.
“너는 너의 고향(본토)과 친척과 아버지(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고 하면 그냥 가야지 간 다음에 어떻게 할까 생각하면 못 간다. 내 경험은 그렇다. 나는 원래 성질이 옳다고 하면 그 전 것은 싹 지워 버린다. 어쩔지 모른지만 그래도 늘 항상 새로운 것이었다. 옛날의 것을 가지고 있으면 복잡하다. 지식이라는 것은 더군다나 전의 지식과 다르니까 내가 받아들이는 것이다. 세상의 지식은 축적된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항상 새로운 것이라야 되지 옛날 것과 겹쳐 있으면 안 되는 것 같다.
희망적인 예수도 아니고,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 못하는 예수인데 뒤의 일을 알겠는가? 그 결과를 우리가 알겠는가? 전혀 모른다. 알 수 없다. 학자들이 그러다 보니까 다 없어진 것 같다. 학자들은 막 생각하고 앞뒤를 맞추고 이렇게 하다 보니까 그게 빠진 것 같다.
우리가 어디 갔는데 ‘너의 주님이 누구냐?’고 물으면 ‘예수다.’라고 말하기가 쉽다. 또 ‘십자가에 죽으신 분이지만 다시 살아나신 분이다.’, ‘부활하신 분이다.’ 이렇게 말하기도 쉽다. 그러면 사람들이 부활을 몰라도 희망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네 주님은 누구냐?’고 구체적으로 물으면, ‘네가 믿는다는 주님은 누구냐?’고 자꾸 물으면, 마지막에는 우리가 그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었는데 내려오지 못해서 죽었다.’는 이 말을 하지 않으면 우리가 뭔가를 감춰놓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대답하지 못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꼬치꼬치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면 나는 할 말이 없어지게 된다. 사람들이 물을 때는 뭔가 깊이 알고 싶어서 묻는다. 아니면 꼬집기 위해서도 묻기도 한다. 이런 여러 가지 유형들이 있는데 끝까지 말을 해야 된다.
“소망(구원)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3:15)라고 되어 있다. 걸림이 안 되도록 까지 준비해야 된다. 누구에게 그분을 내 놓아도 내가 부끄럽지 않는 분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전하러 가는 것은 예수를 전하러 가는 것이다. 그분을 전하러 가는데 그분이 내게 조금이라도 부끄러우면 안 된다. 그러면 전도가 된다고 볼 수 없다.
사도바울 시대를 지나서 요한 시대에 와서는 말이 달라진다. 아주 놀라운 말이 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요일5:5)고 한다. 이것을 깊이 생각하면 아주 깜짝 놀랄 말이다. 거꾸로 말하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않는 자는 세상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세상을 이기지 못한 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못 믿는다는 말이다.
지금 기독교가 세상을 이겼는가? 아니면 세상에 먹혀 들어갔는가? 세상에 먹혀 들어간 것이다. 오히려 희랍화되고, 로마화되고, 종교화되고, 이런 게 아닌가? 세상을 정복하러 나갔다가 오히려 세상에 이기지 못하고 정복을 당했다. 왜 그런가? 예수께서 하나님 아들이심을 못 믿었기 때문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은 유치원 아이도 다 아는 것이다. 그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면 한 편으로는 두려운 말이고, 또 한편으로는 아주 확실한 말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금이라면 내가 금 이하의 그 어떤 것이 부럽겠는가? 아이들도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데 더 좋은 것을 주면 전의 것은 버려 버린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예수가 더 좋다면 왜 못 이기겠는가?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라고 믿는다면 왜 세상을 못 이기겠는가? 이 말이 되지 않은가?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그럭저럭 믿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는 앞에 나가서 선봉장으로 나갈 것인데 적이 두려워 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내가 앞장서서 나가야 될 것인데 ‘나를 따르라.’고 하는데 내가 두려우면 어떻게 되겠는가? 보병학교 마크가 ‘나를 따르라.’는 것이다. 뒤에 부하들은 다 못 가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 아들’이라는 이것이 나에게 자랑스러워야 된다. 그런데 그 예수가 부활 승천해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다면 괜찮지만 그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와 보면 그것은 예수를 따라온 게 아니다. 심지어는 사도들만 하더라도 무엇을 보고 따라 왔는가? 그 사람이 행한 이적들을 보고 왔다. 아, 이 사람이 메시아구나, 이스라엘을 회복해 주겠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왔다. 그래서 허탕을 쳐 버렸다. 결정적인 순간에 다 떠나 버리고 말았다.
오늘날 우리가 복음을 전해도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를 부인해 버리게 된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 못한 예수를 내가 자랑할 수 없으면 자랑할 때까지 알아야 된다. 어떤 경우에도 자랑할 수 있을 때까지 알아야 된다.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다른 것은 다 전해 놓았다. 기독교가 종교인 것은 다 알고 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신학교 나오면 누구든지 할 수 있다. 신학교를 나와서 설교를 못 하는 사람이 있는가? 다 잘한다. 나도 설교는 잘 했다. 다른 사람들이 잘 한다고 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나는 내가 가는 길을 모르고 했다. 한 교회에서 8년 동안 사역을 했는데 설교는 잘 한다고 했는데, 나도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했기 때문에 그 사람들에게 정말 미안하다. 지금도 연락을 하고 있고 관계는 참 좋다.
내가 고난을 받을 때, 올 데 갈 데 없이 궁지에 몰렸을 때, 이 사람들이 나를 끝까지 보호해 주었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내가 4년을 버텼지 무슨 수로 내가 4년을 버텼겠는가? 교단의 실세 어른들이 나를 배격하는데 무슨 수로 거기서 살아남겠는가? 우리 교단은 창설 이래로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다. 나가라 하면 그냥 나가는 것이다. 두 말도 못하고 가야 된다. 그런데 4년을 버틴 것이 내가 무슨 힘이 있어서 버텼겠는가? 이 사람들이 똑똑해서 나를 보호해 주었던 것이다.
한 사람은 그 후로 거기서 나와서 그리스도의 교회로 들어가 버렸다. 그래서 유성에 있는 한성 신학대학의 학장이 되었다. 지금은 종합대학교가 되었다고 하는데 거기서 총장까지 했다. 그때는 그냥 한전에 다니는 직원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나와서 성결교단에 들어갔다. 거기서 인정을 받아서 유능한 장로가 되었는데 남 선교회 회장이 되었다. 성결교회 남 선교회 회장이 되었고, 부총회장의 물망에 올랐던 사람이다. 교회 안에 무슨 분쟁이 있으면 마지막에 법정에 가야 된다. 법정에 가면 덕이 안 되지 않은가? 그런데 싸우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고 지금은 교회 분쟁위원회를 맡고 있다. 그 밑에 자원해서 참여한 사람들 중 법조인만 150명이라고 한다. 지금은 교회에서 내분이 생기면 법정에 못 가게 하려고, 그 사람들이 가서 판사, 변호사, 검사가 한 팀이 되어서 가서 문제를 해결해 준다. 그런 사람들이 그때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런 사람들이 나를 끝까지 보호해 주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무슨 힘이 있어서 거기서 버티겠는가? 절대적인 교단이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절대적인 보장이 되어야 한다. 나는 그 절대적인 보장을 믿고 그분을 전해야 한다. 보장해주는 분이 시원찮으면 내가 가서 뭘 하겠는가? 군대에서 내가 아무리 돌진해도 천황폐하가 항복해 버리면 끝난다. 마찬가지다.
예수는 끝까지 그 자리를 버텼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 못하지만 그 자리를 끝까지 버텼다. 그것을 보장한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하늘에 올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한다. 보장이 그만큼 확실하다는 그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거기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어떻게 전쟁을 하겠는가? 못한다. 그래서 내가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요일5:5)
기독교는 결국 그것을 믿는다고 했는데 결국 세상에 먹혀 버린다. 희랍에 들어가서 고도의 철학 세계에 들어가서 교리화가 되었고, 로마에 들어가서는 세계를 지배하는 고도의 정치에 들어갔다.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모든 데서 엄청난 세계, 세계 최고고 고도의 세계에 들어갔다. 거기서 아무리 정체성을 지키려고 해도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먹혀 들어갔다.
약소국가에 와서는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굉장히 노력을 했다. 그래서 오히려 반대로 많은 문제가 생겼다. 한국에 와서는 제사 지내는 것을 보고 우상숭배라고 했다. 우상숭배를 타파하려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천주교가 100년 동안 박해를 받았다. 그 동안에 죽은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 팔공산에도 그때 은신처가 있다. 사람들이 숨어서 산 속에서 살던 곳이 있다. 그런 곳을 이제는 성지로 만들어놓았다. 그런 곳이 전국적으로 엄청나게 많았던 것 같다. 서울에 가면 한강 변에 절두산이라는 산이 있다. 거기는 천주교인들을 불러다가 망나니들이 목을 치는 곳이었다.
얼마나 박해를 많이 받았는지 모른다. 서양 사람들이 와서 볼 때 그때는 미개인들이 아닌가? 그래서 미개인들이 하는 짓이니까 무조건하고 우상숭배라고 했다. 한국 사람들은 조상숭배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우상숭배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데 어떻게 우상을 숭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약한 데 와서는 정체성을 너무나 지키려고 노력을 했고, 강한 데 들어가서는 아무런 능력이 없었다. 핍박을 당했다. 핍박 속에서 살아남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좋은 시대에 태어나서 핍박 없이 살았다. 내 연령대는 모두 좋은 때 태어났다. 어렸으니까 일제 때 군대를 안 갔다. 6.25때도 미달 되어서 군대를 안 갔다. 정전 후에는 갔지만 전쟁에는 안 갔다. 그런데 우리 앞 세대, 5살쯤 위의 세대는 일제 강점기 때도 징용을 갔고, 6.25 때도 또 갔다. 그렇게 두 번이나 전쟁을 겪었다. 아주 재수 없는 세대다. 우리는 전혀 핍박이 없는 세대에 와 있는데, 언제까지 이럴지 모르겠다. 계속 이럴지 아니면 회오리바람이 칠지 모르겠다.
좌우지간 정체성이 확고해야 전쟁을 할 수 있다. 정체성이 확고하지 못하면 전쟁을 해도 지지부진하게 하고 만다. 구원의 확신을 전하는 사람들이 판을 쳤던 이유가 그것이다. 구원의 확신이 애매하고 모호하니까 한 방에 넘어갔다. 구원을 받았느냐고 물으면 대답할 사람이 없었다. 죄 사함을 받았느냐고 물으면 그때는 대답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그 사람들만 잘못했다고 할 수가 없다. 그럴 토양에 들어왔다. 거기서 버티고 있는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들이다. 구원의 확신도 없으면서, 죄를 사함 받았다는 확신도 없으면서, 천당에 갈 확신도 없으면서, 버티고 있었다. 그게 잘한 것인가? 잘못한 것인가?
내가 C.C.C.에 있을 때 그 사람이 한 번 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막 하면서 나를 끌어 들이려고 했다. 그때 나는 그런 것에 관심이 전혀 없던 때여서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더니 말을 못하고 그냥 갔다. 그 사람은 지금도 기억할지 모르겠다. 그때 젊은이가 한 사람 따라왔다. 간증을 시켜도 되겠느냐고 하여 하라고 했다. 이 젊은이가 ‘여러분 지금 죽으면 천당에 갈 자신이 있습니까?’ 라고 했다. 담대했다. 그게 잘 됐든지 못 됐든지 간에 좌우간 담대했다. 틀렸냐, 맞았냐고 하기 이전에 자기 확신을 그만큼 가지고 있다. 누구라고 이름을 말할 수는 없다. 다 아시는 분이다. 지금은 대단히 커져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유튜브에는 구독자가 몇 십만씩 들어온다. 그러니 성공한 게 아닌가? 우리 같은 사람이 유튜브를 해 놓으면 아직은 우리 교회사람 밖에는 안 들어온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언제 다 먹힐지 모른다. 이것은 여담이다.
지난번에 8장을 시작했는데 8장, 9장, 10장, 11장까지 가는 동안에 어디를 찾아봐도 다 똑 같은 말씀이다. 육을 따르지 말고 영을 따라 행하라는 그 말이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갈5:16) 육의 생각을 버리고 영의 생각을 따르라.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6) 전부가 다 그 이야기다. 경우를 바꾸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지 골자는 바로 그것이다.
육과 영의 문제, 특별히 영의 문제로 나는 고생을 참 많이 했다. 영을 못 잡아서 말이다. 성경에 보면 맨 처음에 나온 것이 하나님의 영이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1:2)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이고, 영은 누구인가?’ 이것을 삼위일체론으로 갈라놓았다.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으로 갈라놓았다. 그런데 이것도 눈에 안 보이니까 나는 잘 수용이 안 된다. 하나님도 안 보이는데 영까지 나오니까 더 안 보인다.
나는 안 보이는 하나님을 찾아서 몇 년을 헤매다가 결국에는 못 찾고 말았다. 어떤 사람은 안 보여도 잘 믿는데 안 보이니까 답답하고 막연했다. 교회를 갈까 말까 할 때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다녀서 안 가면 찝찝한 것이다. 종소리를 듣고 가지 않으려면 참 어렵다. 그래서 가기는 갔는데 가면서도 몰라서 교회가 싫은 것은 아닌데 앉아 있으려면 답답하고 혹시 나보고 기도하라면 어떻게 하나 했다. 시골 교회니까 사람이 얼마 안 된다. 내가 그 교회 터줏대감이다. 맨 처음부터 다닌 사람이니까 터줏대감이다. 비록 스물 댓 살 먹은 청년이지만 그래도 그 교회에서는 터줏대감이다. 내가 세례도 확신이 없으니까 일부러 안 받았다. 그런데도 기도하라고 갑자기 시키면 어떻게 하는가했다. 한 번 지명을 받아서 혼이 났다. 그때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그런 경험이 있다.
영, 영하면 아주 골치 아프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1:2)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이 구별되는가? 이게 어렵다. 지금도 모르겠다. “하나님은 영이시니~”(요4:24)라고 해 버리면 간단하다. 하나님이 영이시면 간단하다. 그런데 하나님이 있고 영이 있다고 하면 복잡해진다. 나는 지금도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 말만 믿고 있다. 육이 없으신 분이니까 영이지 별게 있겠는가? 육이 아예 없는 분이다.
그런데 또 ‘예수의 영’하면 문제가 된다. 예수는 몸이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살아 있을 때는 ‘예수의 영’이라는 말이 없었다. 돌아가시고 승천하신 후에 ‘예수의 영’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러니까 예수나 예수의 영이 하나지 예수 다르고 예수의 영이 다르겠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예수나 예수의 영은 하나지 어떻게 둘이겠는가?
구약에 보면 악령이 있고 선령이 있다. 사울에게 임했던 영은 악령이라고 한다. 악령이 사울에게 임해서 잠을 못 자게 한다고 하였다. 왜 그런가? 생각을 잘못하니까, 다윗을 죽이려 하니까, 자기 자리를 안 빼앗기려고 하니까, 악령이 들어왔다고 한다. 어떤 데는 선지자 학교에 들어가서 방언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삼상19:24) 이런 말이 또 나왔다. 이 영이 곤란하다. 또 성령에 대해서도 선지자 발람에게 들어갔다, 당나귀에게 들어갔다는 이런 말도 나온다. 좀 곤란하다.
창세기 1장 2절에 있는 말은 히브리말로 ‘루아크’라는 말이다. 그런데 영이라는 말의 뜻은 ‘숨, 바람’ 이런 뜻이라고 한다. 사람에게도 영을 불어 넣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한 것 같다. 숨을 코에 불어 넣었는데 그것은 ‘니샴마’라는 말인데 ‘루아크’와 다르다. 이것을 종합해 보면 영이라는 것은 ‘바람, 보이지 않는 어떤 원동력’이다.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왜 흔들리는가? 바람이 불어서 흔들리는 것인데 바람은 보이지 않고 나뭇가지만 흔들린다. 파도가 일어난다. 바람은 보이지 않는데 파도가 일어난다.
보이는 것은 육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인 셈이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좀 쉽다. 보이지 않는 것은 영이라고 하고, 보이는 것은 육이라 한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마3:6)라는 말이 나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3)는 데도 있다. 그래서 귀신같은 영인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 성경에는 귀신같은 영도 있고, 아닌 것도 있다고 한다. 생명의 영도 있고 귀신의 영도 있다.
나는 바닷가에서 살았는데 바닷가에 가면 귀신이 아주 많다. 바다에서 죽은 사람이 많아서인지 귀신 이야기가 많다. 바다낚시를 하고 있는데 그 앞으로 배가 쓱 지나갔다는 사람도 있다. 그게 귀신 배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어디 으슥한 데를 오다가 도깨비를 만나서 부딪쳐 싸우다가 죽을 뻔 했다는 사람도 있다. 섬 지방에 가니까 귀신 이야기가 많다. 다른 데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루아크’라는 말을 신약에 와서는 ‘푸뉴마’라고 히랍어로 번역했다. 70인 역에도 ‘푸뉴마’라고 번역 했다고 한다.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영향을 주는 것, 눈에는 안 보이는데 영향을 주니까 바람과 파도, 이런 것이다.
또 다른 곳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이럴 때는 바람, 이런 이야기가 아니다. 동식물 속에는 기름이 있다. 짜면 나온다. 그래서 기름을 붓는다는 말은 성령을 붓는다는 말과 비슷하고 같은 말이다. 여기서 기름은 또 여호와의 것이라고 한다. 제사법에 따르면 기름은 너희가 먹지 말고 여호와께 돌리라는 것이다. 기름을 태워야 향기로운 냄새가 난다. 내가 향기로운 냄새를 맡을 테니까 기름은 너희가 먹지 말고 나에게 내 놓으라는 것이다. 재미있는 말이다.
식물에도 기름이 있고, 동물에도 기름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대표적으로 참깨다. 참깨를 짜면 참기름이 나온다. 참깨를 그냥 맡으면 향기가 없는데 기름을 맡으면 향기가 좋다. 용도도 다르고 성분도 달라진다. 한방에서는 깨는 따뜻한데 기름은 차다고 한다. 몸이 차가운 사람이나 위가 좋지 않은 사람들은 참기름을 먹으면 좋지 않다. 나는 위가 약하니까 참기름을 먹으면 배가 부풀어 올라서 아주 고약하다. 나는 나물을 무치는데 참기름을 못 넣게 한다. 들기름은 반대다. 들기름은 먹어도 아무렇지도 않다. 따뜻한 기름이다. 들기름이 좋다는 이유가 다른 게 아니고 그것이다. 이것은 기름을 짠 것이니까 엑기스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는데 겟세마네라는 말이 기름틀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예수님이 피땀 흘려 기도하신 것은 겟세마네에서 하신 것이다. 예수의 기름이 짜진 것이다.
바울이 지금 누구를 보고 이 말을 하고 있는가 하면,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산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다. 육을 따라 행하지 말고 영을 따라 행해라.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4)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았다고 해 놓고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4)고 했다. 이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 육을 떠나서 영을 섬기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이것을 구별해서 하겠는가? 워치만니는 이 문제 때문에 목숨을 걸고 사형언도를 받고 나서 쓴 책이 [영에 속한 사람] 1부, 2부 대작이다. 그 책을 쓰고 나서 형제들이 급하게 돈을 모아서 출판을 했는데 그 책을 쓰고 나서 병이 회복되었다. 그래서 책을 회수하라고 해서 다시 회수했다는 말이 있다.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왜 회수했을까? 내가 C.C.C.에 가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읽어 보면 의문만 생긴다는 것이다. 그 책을 읽어본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이것은 영입니까? 혼입니까? 질문이 자꾸 온다. 가만히 들어보니까 안 되겠다.
나는 그냥 그 책을 읽었는데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영과 혼이 다르구나. 영의 일과 혼의 일은 다르구나. 우리가 교회 안에서나 종교적으로 열심히 기도하고 구하고 해서 하는 일은 다 성령이 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성령에 맡기고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책을 읽으면서 그게 아니네, 그것이 인간의 혼일 수가 있네, 사람의 생각일 수 있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특별히 C.C.C.에 있었으니까 작정하고 기도하고 이런 게 많았다. 그때 어느 지구에서는 그런 말을 했다. 광주인지 모르겠는데 터(대지)가 하나 있는데 그것을 두고 매일 아침에 가서 여리고성이 무너지듯이 기도했다는 말이 있었다. 어느 간사가 그렇게 했다고 했다. 여리고성은 매일 돌아서 무너지게 했다. C.C.C. 형제들이 그렇게 믿음이 좋았다. 샀는지 못 샀는지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는데 좌우간 그렇게 했다고 한다. 그런 것을 보고 성령으로 했다하지 않을 수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그 책을 읽어 보면 그렇게 열심히 한 것도 혼으로 한 것일 수 있다고 한다.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뭔가가 정리가 되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이 책을 읽은 학생들은 의문이 막 생긴다. 다른 것만 생각하니까 ‘이것은 영이냐? 혼이냐?’ 하니까 골치 아파서 소화가 안 되면 읽지 말라고 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소화가 안 되면 먹지 말아야지 먹어서 부글부글하면 되겠는가? 그래서 읽지 말라고 한 적이 있다. 영을 따라 행한다는 것이 말로는 쉽지만 어렵다. ‘육의 생각을 버리고’ 어디까지가 육의 생각인가? 어디까지가 영의 생각인가? 참 어렵다. 여러분도 해 보셨겠지만 과연 그것이 잘 되는가? 또 나는 영을 따라 했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영을 따라 행한 것인가? 문제가 많다.
기독교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부흥운동을 많이 했다. 이런 것이 다 영으로 한 것인가? 아니면 혼으로 한 것인가? 하나님의 일에서 인간의 협력은 어디까지 인가? 이런 문제가 해결이 안 되기 때문에 굉장히 어렵다. 나로서는 아주 어려운 일이다.
육을 따르지 말고 영을 따라 행하라는 말을 이 말 그대로 우리가 행하기는 대단히 어렵다고 생각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하면 좀 쉽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고 하니까 그 말을 듣고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요6:52)하고 가버렸다고 한다. 제자들을 보고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니까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6:68)하고 남았다고 한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것도 잘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마지막에 가보니까 말짱 도루묵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도 그것을 두고 하신 말씀이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요6:61),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3)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보이는 것,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는 보이는 것이 아니고 영이요 생명이라는 것이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8) 이런 말이 모두 의미 있게 나온 말이 아닌가?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이것은 불교에 가도 같이 공감이 된다. 거기서는 보이는 것을 다 제거하는 것이다. 하여튼 계급장도 제거하고 보이는 것은 다 제거하고 성불하는 것이다. 해탈이라는 게 보이는 것을 다 없애는 것이다. 그러면 불교나 기독교나 비슷하다.
우리는 보이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우리도 중요한 문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내려오지 못하고 죽었다. 이것은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것을 꼭 알지 않으면 안 되는가? 보이지 않는 것 때문이다. 보이는 것 때문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 때문이다. 그 안에 참 사람, 하나님이 지으신 그 사람, 지금 하나님이 찾고 있는 그 사람, 그 사람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듣기 좋은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듣기 좋은 말을 가지고서는 안 된다. 소금은 소금 가마니(짚)에 담아야 적당하다. 왜냐하면 소금 가마니(짚)에 담는 이유는 간수가 빠지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소금을 비닐봉지에 넣어 놓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간수가 빠지지 않는다. 간수는 두부 만드는데 쓰는 것인데 알고 보면 독약이다. 소금 가마니를 놔두면 간장국 같은 새까만 물이 나온다. 그것을 가져다가 두부를 만드는 것이다. 조금 들어가야 되지 많이 먹으면 안 된다. 비상이 들어있는데 그것이 들어가면 두부가 된다. 지금은 약으로 하는 모양이던데 약으로 하는 두부는 맛이 별로 없다. 그것을 넣어야 고소하고 맛이 있다. 손두부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소금은 오래될수록 좋다는 말이 그것이다. 가마니에 두면 계속 물이 빠진다. 오래되면 물이 빠지니까 소금이 가벼워진다. 그러면 우리가 먹으면 좋은 것이다. 요즘은 소금을 볶아서 먹으라고 한다. 볶으면 독기가 증발이 되니까 볶아 먹으라고 말한다.
보이는 것도 있고 보이지 않는 것도 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안 보이는 것을 가지고 해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해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이 표시가 되겠는가? 그것을 해석한 것이다. 동물의 제사가 여호와께 드려진다. 예수님께서 드려졌다. 같게 생각한 것이다. 보이는 것을 보고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얘기한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보이는데 근거가 안 되고 보이지 않는 것을 얘기한다면 허황해진다. 육이 없이 사람을 얘기하면 사람이 제대로 안 된다. 사람은 전인적이다. 육만 있는 것도 아니고, 영만 있는 것도 아니고, 전인적이다. 중국 사람들은 일체주의로 영 따로 육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알고 보면 그것이 맞는 것이다. 영 따로 육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하면 사람도 눈에 보이는 그 사람이 있고 보이지 않는 그 사람이 있다. 분명히 그렇다. 표면이 있고 이면이 있다. 교회도 표면이 있고 이면이 있다.
어떤 사람은 우리 교회의 표면만 보고 자꾸 흠집을 잡고 얘기한다. 이면은 다른데 이면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알고 보면 참 좋은 교회인데 이것은 이러지 않나 자꾸 의심이 생기는 것이다. 지금 20년 정도 됐는데 나를 이단이라고 고발했던 사람이 아주 유명한 사냥꾼이다. 써 놓은 것이 지금도 인터넷에 남아 있다. 그것을 근거로 해서 한기총에서는 한기총대로 이단이라고 하고, 또 우리나라 큰 교단들이 여러 개가 있는데 거기는 한기총을 보고 이단이라고 해서 내가 이단이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은 거기 써 놓은 것을 보면 전부 의심을 써 놓았다. 자기가 의심하는 것을 전파한 것이다. 그 사람들도 의심하는 것을 보고 와보지도 않고 사실인 줄 생각하는 것이다.
대구에 있은 지 45년이 되었는데, 목회자들 중에 우리 교회를 정식으로 알아보려고 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냥 말만 듣고 생각한다. 이단을 정죄하는 것에 이력이 났다. 그래서 보지도 않고 옆에서 그러면 그렇다고 생각해버린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여러분이 읽어보면 그 사람이 의심스러운 것을 말해 놓았는데 이*규씨가 써 놓은 것이 있는데 모두 어떤 사실은 없고 의심만 있다. 그런데 그것만 보고도 사람들이 모두 다 이단이라고 해 버린다. 기독교인들이 훈련이 너무 잘되어 있다. 이단에 대해서는 훈련이 너무 잘되어 있다. 바람 소리만 들어도 놀라서 자빠진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우리도 이것을 철저히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보이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도 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표면만 아니고 이면도 있다. 형상만 있는 것이 아니고 생명도 있다. 이것을 아는 것이다.
예수를 본 사람들이, 직접 봤던 사람들이, 한 바퀴 돌아서 다시 예수를 증거하는 것이다. 배신도 했다가 다시 자기들 속에서 자신감이 생겨서 써 놓은 것이 성경이다. 그 사람들의 고백이니까 사실에 사건을 쓰려고 한 것이 아니고, 사실 뒤에 있는 이면을 쓰려고 성경을 써 놓았다.
십자가도 해석 나름이다.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 이 문제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맞기는 맞다. 그런데 어떻게 절대적인 사랑을 표현했는지는 모른다. 또 동물의 희생보다 완전한 제물이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는데 내용이 없기 때문에 모른다. 그리고 우리가 거기에 참여가 안 된다. 참여가 안 되면 나와 예수는 항상 거리가 있다. 같이 참여가 되어야 된다. 참여가 안 되고 거리가 있으면 그것이 종교가 되는 것이다. 그냥 숭배하고 존경하는 것은 종교이다.
그 이면에서 그분이 우리와 연합하기를 원하는 그것을 우리가 찾아야 된다. 그분은 우리와 연합하기를 원했는데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1:11) 어디까지 영접하라는 말인가? 지금도 많이 영접한다. 다 믿는다. 그런데 어디까지 믿느냐다.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1,12)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아까 말한 대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요일5:5)고 한다. 요한은 치밀하다. 이제는 빠져나갈 길이 없다. 내가 세상을 이기지 못한다면 나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다는 그 말이다. 그런데 아주 믿지 않겠는가? 믿기는 믿는데 건성으로 믿는다는 말이 된다. 아주 믿지 않는다고 하면 말이 안 되고 믿기는 믿는다.
TV는 처음 일본 소니(SONY)에서 나왔다. 개발하기는 미국에서 먼저 했는데 상품화는 일본에서 먼저 했다. 그래서 소니가 전 세계를 휩쓸어 버렸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누가 가져간다는 그런 식이 되었다. 미국 의사당에 가니까 위인들 동상을 세워 놓았는데, 맨 앞에 있는 사람이 TV를 발견한 사람이 잠바 차림으로 있다. 그렇게까지 유명한 사람인데 상품에 뒤졌다. 돈은 일본 사람이 벌었다.
그런데 이것을 가져다가 좋다고 볼 수는 있는데, 그 내용을 모르면 다시 만들 수가 없다. 그래서 기술이전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처음에 우리는 껍데기만 만들었다. 하나하나 기술이 받아져서 만들어서 결국은 지금은 우리가 완제품을 생산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 물건을 수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TV 좋다고 그냥 보기만 했으면 지금도 일제 소니를 사다가 봐야 한다.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이 훌륭하다고 숭배만 했으면 영원히 그렇게밖에 안 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고 했는데 먹지고 않고 마시지도 않고 보기만 하고 참 좋은 고기라고 하면 되겠는가? 아무리 좋은 고기라도 내 속에 들어와야 된다. 예수를 알아도 그 이면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다는 것이다.
영을 따라 행하려면 그 이면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예수를 따르는가? 영을 따라 행하는가? 일일이 행동 하나하나마다 내가 영을 따라 행했는가? 육을 따라 행했는가? 이것을 알려면 정말 한 발자국도 못 나간다.
전에도 말했는데 ‘오늘 하루만이라도 오직 주님만 생각하게 해주십시오.’ 하고 새벽기도를 했다. 그런데 하루도 안 되었다. ‘딱 하루만 해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내가 믿겠습니다.’라고 했는데 하루도 안 되었다. 어떤 사람은 할 수 있는가 모르겠는데 나는 그것이 안 된다. 그래서 기도도 소용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제일 쉬운 것은 여러분에게 제시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분의 인격이다. 우리 형제들에게 그랬다. 영, 영하는 사람들을 만나보니까 아니었다. 막상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기 육으로 행해버린다. 저번에도 간판 부수고 간 사건을 말했다. 자기들은 아침에 올 때 ‘오, 주 예수여!’하고 왔다. 분명히 영으로 한다고 하고 왔는데 그렇게 하고 갔다. 그 사람들이 육으로 하고 싶었겠는가? 영으로 행한다고 했다. 핍박하는 사람들이 이방인이 핍박한 것만이 아니고 믿는 사람들끼리도 핍박한다.
그것은 예수를 죽이면서 하는 말들이 이런 말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예)이라 하리라.”(요16:2) 예가 되리라. 이런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을 모독한 건방진 저놈을 그냥 살려놓으면 나도 공범자 아니냐는 것이다. 그래서 죽인 것이다. 그냥 죽인 것이 아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예)이라 하리라.”고 했기 때문에 그 다음에는 늘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 후에 순교자가 얼마나 많이 나왔는가? 이방인에게 죽은 순교자보다 기독교가 기독교인을 죽인 숫자가 더 많다고 한다. 오죽하면 정교분리 정책을 미국 헌법에 넣어 놓았겠는가? 미국에서는 사탄 종교도 있다고 한다. 그래도 미국 형사법에 해당이 안 되면 정치가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 우리는 걸핏하면 정부에게 이단 없애 달라는 사람들이 많다. 이단만 없앨 줄 알지만 그렇게 되면 기독교 전체를 총괄하는 것이다.
인격이 문제이다. 영을 따라 행하더라도 인격이 문제이다. 성막의 원칙이 정말 맞는 것 같다. 판자의 모양에 따라서 금이 입혀지기 때문에 아무리 영을 따라 행해도 판자는 판자고 각목은 각목이지 따로 쓸 수가 없다. 하나님도 각목은 각목대로 쓰고, 판자는 판자대로 쓰지 마음대로 쓸 수가 없다.
사람이 그 모양이 아니면 그 모양으로 쓸 수가 없다. 바울은 바울대로, 베드로는 베드로대로, 요한은 요한대로 사용했다. 그것이 영이 달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영은 다 한영이라도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사용한다. 그러니까 우리 됨에 달렸다. 사람 됨에 달렸다. 인격 됨에 달렸다.
왜 모세에게는 율법을, 예수에게는 은혜와 실제를, 왜 그렇겠는가? 그 사람 때문이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실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1:17) 왜 그런가? 하나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하나님이다. 그런데 사람 따라 다른 것이다. 시대 따라 사람 따라 하나님이 다르게 썼다. 그 시대에 그 사람, 그 시대에 모세이다.
예수는 그 시대에 가면 안 된다. 예수라는 사람은 만약 출애굽시대에 있었더라면 선지자가 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지팡이를 들고 반석을 치고 하겠는가? 내가 보기에 성질이 그렇지 못할 사람이다. 예수님에게 바로를 굴복시키라고 하면 하겠는가? 못 한다. 다 할 것 같지만 못한다. 모세니까 했다.
모세는 모세대로 썼다. 성막과 율법을 제정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모세 하나님은 두려운 하나님이다. 왜? 만나기를 거기서 만났다. 시꺼먼 구름 속에서 빽빽한 구름 속에서 나팔소리가 나는 데였다. 전쟁터다. 불꽃이 튀는 데서 만났다. 오죽하면 돌 판에 글자를 새겨서 왔겠는가? 어떻게 새겼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친히 손가락으로 새겨주었다고 한다. 끌을 가지고 가서 파 가지고 왔겠는가? 그것도 아니다.
예수님이 그보다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실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1:17) 사람 따라다. 시대 따라 사람 따라다. 그 시대에 필요한 사람을 그 시대에 쓰신다. 오늘 필요한 사람이 있고, 내일 필요한 사람이 있다. 이 자리에 필요한 사람이 있고, 저 자리에 필요한 사람이 있다. 다 다르다. 그 나무 생기기에 따라 쓰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바꿔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
모세는 40년 동안 장인 집에서 양치기를 하고 살았다. 바로의 궁중에서 공주의 아들로 자랐던 사람이 미디안 광야에 가서 이드로라는 장인 집에 가서 40년 동안 양치고 살았다. 양을 치고 가다가 서쪽으로 서쪽으로 가다가 만났다고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동쪽이 좋은 곳이니까 서쪽으로 서쪽으로 가는 것은 잘못된 곳이다. 남쪽으로 가면 풍부하고, 동쪽으로 가면 길한 곳이다. 성막이 문이 동쪽에 있다. 한국 사람도 동쪽을 좋아하고, 북쪽 문은 아주 싫어한다. 살기가 들어있다고 싫어한다. 일본 사람들은 북쪽 문을 좋아한다. 일본 집에 가보면 문이 북쪽에 있고 정원은 남쪽에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서쪽을 갔다는 말은 곤고한 것이다. 곤고한 곳으로 가는 것이다. 서쪽으로 가봐야 바다밖에 없는데, 그 바다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곳이다. 요한계시록에서는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21:1)고 했다. 그 바다가 오죽 무서우면 그렇게 말했겠는가? 모세가 서쪽으로 서쪽으로 양을 치면서 그리로 갔다는 말은 아주 절망적인 얘기이다. 가봐야 바다밖에 없다. 배가 있는가? 뭐가 있는가? 이스라엘 사람은 배가 없다. 해양민족이 아니다.
사람 따라 영으로 살기도 하고, 육으로 살기도 한다. 일일이 하나하나 갈라서 이것은 영이고 이것은 육이라고 가르려고 생각하면 안 될 것 같다. 나는 못 하겠다. 차라리 내가 변하는 것이 낫지 일일이 따지고 있으려면 내가 차라리 죽어서 다시 사는 것이 낫지 그 짓을 어떻게 하겠는가? 쉬운 일이 아니다. 매 순간 매 순간 영을 따라 행한다는 것이 장난인 줄 생각하지만 장난이 아니다.
사람은 사람이다. 전인적인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안에 있는 나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 그 사람이 참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 참사람으로 발견되어야 내가 딴 짓을 안 한다. 내가 어떤 사람으로 발견되어야 강을 건널지 길을 건널지 알 것이다.
예수님 말씀에도 집을 지을 때 얼마나 들어야 집을 짓는지 모르고 지어서 되겠느냐는 것이 있다. 우리 교회를 지을 때 얼마나 들어갈 것인가? 그것이 제일 관심이었다. 왜냐하면 돈을 준비해 놓지 않고 집을 지으면 부흥회도 못하는 교회에서 한층 지어놓고 부흥회하고 이층 지어놓고 부흥회하는 그 짓은 나는 죽어도 못한다. 아예 미리 돈이 얼마 들것이며, 지금 헌금은 얼마나 들어왔는지, 내가 검산한 것은 그것뿐이다. 돈을 준비하고 했기 때문에 나는 근심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 돈을 준비하지 않고 했으면 내가 지금까지 살아 있겠는가? 지금까지 못 살아 있다.
사람이 준비되고 영으로 살든지 육으로 살든지 간에 가능하지 그렇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섣불리 대들어서 영으로 산다고 할 것 같지만 안 된다. 내 재주로는 못하겠다. 안 될 것 같으면 일찍 포기하는 것이 낫다.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4) 새 생명 안에서 행해야 한다. 예수님이 다시 나지 않으면, 거듭나지 않으면, 새 생명이 아니면, 그 말이다. 니고데모에게도 매 순간 영을 따라 행하시오라고 했는데, 니고데모에게 말을 하면 되겠는가? 제자들에게 말해도 안 되는데 되겠는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이 말이 정답이다.
당신이 선한 일에 대해서 천국에 대해서 얘기하려고 왔지만 그것 이전에 다시 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 말이니까 너무 합당한 말이다. 잘못 들으면 너무 냉정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냉정한 말이 아니고 참으로 맞는 말이다. 다시 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안 된다고 해놓고 한 말이 장대에 달린 뱀을 보라는 말이었다. 기가 막힌 일이다. 새로 난다면 굉장한 것이 되어야 하는데 장대에 달린 놋 뱀을 쳐다보라는 것이다.
사람됨이 문제이다. 판자가 되면 내가 성막의 벽이 될 것이고, 각목이 되면 법궤를 짜는데 쓸 것이다. 내가 어떻게 쓰일 것인가 생각할 필요도 없다. 어떻게 써주십시오 할 수도 없다. 나를 더 잘 알고 계신 분이다. 나를 더 잘 알고 계신 분이 잘 알아서 쓸 것인데 나를 이렇게 해달라고 하겠는가?
영화하겠다는 사람이 영화감독에게 나에게 이런 배역을 달라고 해서 되겠는가? 감독이 봐서 맞는 배역을 찾는 것인데 엉뚱한 사람이 되지도 않을 사람이 나는 이런 배역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면 배우 할 것을 그만 두라고 할 것이다. 나는 너를 그렇게 쓸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 가서 나는 이런 것을 하고 싶다고 하면 딴 데 가서 물어보라고 하지 않겠는가? 나는 너를 그렇게 쓸 수 없다고 하면 어쩌겠는가.
우리가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렇게 쓰든지 저렇게 쓰든지 그것이 나에게 감사한 그런 사람이어야 한다. 어떻게 써도 감사한 사람이어야지 한다. 어떤 사람은 교황까지 되는데, 나는 본당 신부로 끝나느냐고 해서는 안 된다. 교황 될 사람은 교황이 되고, 본당 신부 될 사람은 본당 신부가 되는 것이다.
영을 따로 알아서 구별해서 살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로마서 8장 이후를 보면 헷갈려서 아무것도 안 된다. 왜 이 말을 하고 있는가? 로마서 12장에서 교회 생활이다. 교회 건축이다. 이것이 없이는 교회 건축이 안 된다. 그냥 해서는 교회 건축이 아니기 때문에 이 말을 먼저 하고 있는 것이다. 굉장히 긴 장을 할애해서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 생활은 영적으로 살아야 되는 생활인데 거기에 어중이떠중이가 산다고 교회가 되겠는가? 아주 신중한 것이다. 바울의 서신을 보면 교회에 아주 신중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오늘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해보면 제일 문제가 표면적인 문제를 가지고 싸우는 것이다. 영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싸운다. 영적인 사람은 싸우지 않는다. 영적인 사람은 늘 감사해 한다. 여러분이 경험해보면 알고 교회에서 살아보면 안다. 영적이 안 된 사람은 아주 쉬운 사람이 있고, 아주 어려운 사람이 있다. 인물 잘생겼다고 좋은 것도 아니고, 돈 많다고 좋은 것도 아니고, 목회자를 속 썩이는 사람은 따로 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애를 먹는다.
나도 그런 사람 하나 만나서 당했다. 그때는 나도 비슷했을 것이다. 그 사람이 장이야 하면 나는 멍이야 하고, 이런 식으로 된 셈이다. 겉으로 안 했지만 속으로 그렇게 했다. 결국은 내가 그 사람에게 진 셈이다. 저 사람만 아니면 우리 교회가 편하고 좋은 교회인데, 이런 사람이다. 저 사람만 없으면 되겠는데, 이런 사람이다. 교회마다 가면 다 하나씩 있다. 어느 교회나 가면 있는데 그것을 극복 못하면 안 되는 것이다. 둘 중에 하나가 죽어야 된다. 싸움이다. 둘 중에 하나는 죽어야 한다.
구속된 사람이라는 것이 이래서 필요하다. 구속이면 인격이 구속된 것이다. 표면과 이면! 표면은 똑같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세상에 있을 때나 안에 있을 때나 표면은 다 똑같다. 그런데 이면이 달라졌다. 지금 다른 세계에 들어왔다. 다른 세계에 들어왔으면 다른 세계로 살아야 되는 것이 합당하다.
미국에 가면 미국 법을 따라야 되고,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되는 것이 맞다. 미국 가서 한국식으로 살다가는 큰일 난다. 정원에 잘못 들어갔다가는 죽는다. 다 공개된 정원이라도 남의 정원에 들어가면 총으로 쏜다. 그런 땅을 잘못 갔다가는 큰일 난다. 또 술을 먹고 고래고래 동네에서 소리 지르면 그 사람들이 가만 두겠는가?
한국에서는 파출소에 와서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밤 10시나 11시 되면 경범죄인들이 많이 잡혀온다. 파출소에 들어오면 시끄러워서 못 견딘다. 파출소 근처에 집 사면 절대로 안 된다. 잠을 못 잔다. 밤새도록 소리 지르고 떠든다. 옛날에는 두드려 패기라도 했는데 지금은 패지도 못한다. 아주 시끄럽고 고약하다.
미국 사람들은 법정에 가면 조용해진다. 경찰에 잡혀가면 꼼짝도 못 한다. 가정폭력 때문에 신고를 하니까 대번에 경찰이 와서 현행범으로 수갑 채워서 간다. 물어볼 필요도 없다. 철망으로 만든 개장 같은 철망에 가두어놓고 완전히 개 취급하고 일부러 모욕을 준다고 한다. 현행범은 그렇게 하니까 가정 폭력을 잘 못하는데, 외국인들이 와서 잘 모르고 했다가 걸리면 큰일 난다.
토론토에서 그런 일이 있어서 얘기를 듣고 나니까 큰소리치면 안 되겠구나. 아이들에게 큰소리 잘못 쳤다가는 그것도 걸린다. 무조건 현행범이다. 쇠고랑 찬다. 구속 영장 발부하고 안하고도 없다. 그 자리에 갔다가 개장 속에 넣어 놓고 철망 속에 넣어놓고 밥이나 넣어 주고 조롱하고 온갖 욕을 다 한다고 한다. 박사가 잡혀 갔다가 왔다. 나는 박사라고 하면 더 맞는다. 박사가 그 모양이냐고 하면 뭐라 하겠는가?
우리 형제 하나가 교통사고가 나서 잘 봐줄 줄 알고 나는 교사라고 했더니 교사가 되어서 그러면 되느냐고 했다고 한다. 교사라고 하면 실수했다고 할 줄 알았는데 교사라면서 그러면 되느냐고 했다고 한다. 교통경찰들이 전부 훈련을 받고 나간다.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말하고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말하라고 훈련받고 나가기 때문에 말해야 본전도 못 찾는다. 잘못했다고 해야지 나는 교사라고 했다가는, 만일 판사라고 했다가는 더 큰일이 난다. 목사라고 했다가는 큰일이 난다. 얼마나 창피를 주겠는가?
결국은 사람문제이다. 영을 따라 행한다고 해서 따로 있을 수가 없다. 어떤 때는 영을 따라 행하고, 어떤 때는 육을 따라 행하고 일부러 누가 그러겠는가? 다 좋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인데, 다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인데, 누가 일부러 잘못하려고 하겠는가? 나는 영을 따라 살아야지 일부러 결심할 필요는 없다.
참사람의 자리로 오면 된다. 그러면 그 사람이 영을 따라 사는 사람이다. 새 생명 가운데 사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니까 편하다. 실수할지도 모르지만 하여간 편하다. 영을 따라 행한다고 가르려고 생각을 하면 어떻게 살겠는가? 밥을 먹겠는가? 잠을 제대로 자겠는가? 신경이 예민한 사람은 밥을 먹으면서 이것이 영을 따라 먹는 것인지 육을 따라 먹는 것인지를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 답답하다. 그래서 나는 아예 포기하고 그냥 사람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