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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성총이 가득하신 이여, 하례하나이다.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시나이다.” - 루카 1,28
“성총이 가득하신 이”라는 말은 교회가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다룰 때 강조하는 용어이다. 이 용어는 그리스어 κεχαριτωμένη(케카리토메네)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은총의 ‘완벽함’과 ‘충만함’을 의미하는 단어다. 달리 말하면, 천사가 성모님이 완벽한 은총을 받으셨음을 선언한 것이다. 이것은 매우 강력한 증언이다. 성모님이 완벽하고도 충만한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셨는데, 어떻게 그 안에 아직도 죄가 머물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인들은 결국 성모님이 하느님의 성총으로 가득했다면, 그분께 죄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루카 복음서 1장 28절은 성경을 통틀어 사람에게 “성총이 가득한 이”라고 부른 유일한 구절이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신께서 당신께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당신을 덮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입니다.” - 루카 1,35
루카 복음서 1장 35절은 성모님을 신약의 계약궤로 보여주고 있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계약궤는 십계명을 담은 순수하고 거룩한 궤였다. 실제로 계약궤는 너무나 거룩해서 누구나 그것에 손대는 자는 죽어버렸다! 그래서 계약궤는 유다인 대사제들이 1년에 한 번 꼴로 들어갈 수 있는 완벽하게 정결한 장소인 지성소 안에 정성되이 보관되었다(레위 16,2-4). 그렇다면 성모님이 어째서 계약궤와 연관이 있으신 걸까? 옛 계약궤에 하느님께서 머무셨다는 것을 묘사하는 용어가 성신께서 성모님께 내려와 덮으실 때 다시 등장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옛 계약궤는 하느님의 십계명이 그 안에 있었기 때문에 거룩했으며, 그래서 누구도 손댈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성모님은 새로운 계약궤로서 자신의 태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십계명보다 얼마나 더 거룩하시겠는가? 그러한 그리스도를 태중에 모셨기에 성모님 역시 그 어떠한 죄도 없이 순결하셨다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 창세 3,15
창세기는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와 어떤 상관이 있을까? 창세기 3장 15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써 사탄을 패퇴시키심을 예고한 최초의 성경 구절이다. 이 구절은 또한 성모님이 어째서 새 하와가 되시는지를 보여주는 최초의 성경 구절이기도 하다. 뱀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는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을 가리킨다. 그리고 뱀과의 사이에 적개심이 일어나는 여자는 성모님을 가리킨다. 성모님과 사탄(뱀)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신 분은 하느님이시며, 이 적개심은 그리스도와 뱀의 후손 사이의 적개심과 동일하다고 보여진다. 이 말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성모님과 사탄 사이의 적개심은 영원하기 때문에 이 말은 성모님이 원죄 없으신 분이시라는 점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사탄과의 사이에서 완전히 적개심이 있으려면 하느님의 끊임없는 은총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 구약의 하와는 “아니오”라고 했지만, 새 하와이신 성모님은 “예”라고 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시게 하셨다.
역사의 증언:
비오 12세 교황님은 1854년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공식적으로 교의로 반포하셨다. 교황님은 이 믿음이 가톨릭 신앙에 있어서 영적인 도움을 준다고 이해하셨다.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성모님이 원죄 없이 잉태되셨다는 믿음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원죄 없으신 잉태가 교리로 정의된 1854년 이전에는 믿어지지 않았다고 잘못 생각하는 이들이 아직도 많이 있다. 그들은 이러한 믿음이 4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교회 문헌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하느님의 명예를 위해서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는 그 어떠한 죄도 침범할 수 없었다.” - 성 아우구스티노, 390년.
“마리아께서는 단지 순결한 여인이실 뿐만 아니라 은총을 받아 더럽혀지지 않았으며, 미소한 흠도 없는 분이시다.” -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오, 340-370년.
“예수님, 당신의 모친은 홀로 가장 아름다우신 분이시옵니다. 당신이 티 없으시니, 당신의 모친 또한 흠 없으시나이다.” - 성 에프램, 350년.
실제로 초대 교회의 교부들은 “지극히 거룩하신 분”, “지극히 죄 없으신 분”, “흠 없으신 분” 등의 표현을 사용하여 말 그대로 성모님을 죄 없으신 분으로 언급한 사례가 많다. 이는 곧 성모님이 흠 없으시다는 생각이 교회의 초세기 동안 보기 드문 생각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동방 교회는 8~9세기에 축일을 제정하는 등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에 대한 강한 사랑을 보이기 시작했다. 12세기에 서방 교회에서는 전 유럽이 원죄 없으신 잉태 축일을 기념했으며, 15세기 말까지 이것은 참된 그리스도교의 교리로서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옹호되었다.
공통적인 반론과 질문에 대한 답변:
저는 원죄 없으신 잉태가 성모님이 성신의 힘에 의해 예수님을 잉태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줄 알았어요!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이는 많은 사람이 범하는 일반적인 오해입니다. 당신이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강생이지, 원죄 없으신 잉태가 아닙니다. 강생은 예수님께서 온전히 하느님이신 동시에 온전히 사람으로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원죄 없으신 잉태는 성모님이 예수님을 잉태하시기 위해 태중에 죄 없이 잉태되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로마서 3장 23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어버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라는 구절을 보면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믿음을 반박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알고 나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성모님이 어린이들과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들처럼 이성적 판단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죄가 무엇인지 모르는 어린이는 죄를 지을 수가 없는데, 그 이유는 어린이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이가 전적으로 성모님과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라는 원칙에 예외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좋아요. 하지만 원죄는요? 아담과 하와가 금지된 나무 열매를 먹었음으로써 우리 모두는 그들로부터 원죄를 물려받게 되었잖아요.
그건 맞습니다. 하지만 원죄 역시 예외적인 경우가 적용될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본래 하느님을 시중 드는 천사들과 마찬가지로 죄 없이 창조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생명체를 원죄의 물듦 없이 창조하시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간단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아담과 하와를 포함한 모든 인간은 살면서 죄를 짓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요?
가톨릭교회에서는 그러한 법칙에 예외가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성경 구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예수님과 성모님은 이 구절에서 말하는 모든 사람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의 “모든”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파스(pas)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그리스어는 오늘날 영어의 “all”과 마찬가지로 꼭 빠짐이나 남김이 없이 모든 것을 가리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한 예로, 똑같은 로마서에서 성 바오로는 “온(모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으며, 마태오 복음서 2장 3절에는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것이 말 그대로 예루살렘 전체가 구원받게 될 것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이 한 명도 빠짐 없이 깜짝 놀랐던 것이겠습니까? 성경 전체를 놓고 볼 때, 이와 유사한 다른 많은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리스어로 “모든” 또는 “온”이라고 번역되는 단어는 다른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로마서 3장 23절이 예외적인 경우가 발생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마리아가 죄가 없다”는 구절을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가톨릭 신자들은 그렇다고 믿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에는 성모님이 죄 없으시다고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모님이 죄가 있으셨다는 말 역시 성경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앞서 설명해 드린 것처럼, 가톨릭교회에서는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는 성경 안에 암시적으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고 봅니다. 또한 이 문제에 대한 초대 교회의 문헌들 또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가톨릭교회에서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믿는 것이 왜 당연한 것인지를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성모님이 죄가 없으셨다면, 성모님께 예수님이 구세주로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성모님이 원죄 없이 잉태되셨다고 해서, 그것이 성모님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개신교 교파들이 흔히 갖고 있는 오해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완전하게 죄가 없는 상태로 만들지 않으셨다면, 성모님 또한 여느 사람처럼 죄를 품은 상태이셨을 것입니다. 성모님과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언젠가 죄를 품은 상태에서 벗어난다면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성모님은 그 태중에 그리스도를 잉태하기 위하여 태어나기 전부터 죄로부터 보호를 받으셨습니다. 따라서 성모님한테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원칙에 간접적인 방식으로 적용됩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당신의 은총으로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성모님 또한 죄를 지니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이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로워져 하늘나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었듯이, 성모님 또한 죄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구세주 예수님이 필요하셨습니다.
성모님의 죄 없으심이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인가요?
그럴 수가 있을까요? 가톨릭교회에게는 원죄 없으신 잉태에 대한 믿음이 성모님과 관계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리스도와도 관계되는 사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거룩하시고, 위대하시고, 신성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한 여인을 완벽하게 죄가 없게 만드신 다음 그녀를 통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에 어떻게 이것이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있을까요? 원죄 없으신 잉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완벽하심을 진실로 보여주는 간략한 증거입니다!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가 교의로 정해지기까지 왜 그렇게 오래 걸렸나요? 왜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에 바로 정의되지 않았나요? 1854년은 예수님께서 죽으신 지 한참 후가 지났잖아요!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예수님 사후부터 1854년까지는 긴 시간임에 틀림 없습니다. 하지만 삼위일체, 강생, 신약 정경 목록 등 그리스도교 신앙의 대부분은 그것이 공식적인 그리스도교 신앙이 되기까지 수세기가 걸렸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믿음들이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니며, 단지 그것을 올바로 정의하는데 시간이 다소 걸렸을 뿐입니다.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초대 교회의 많은 교부가 성모님이 죄가 없으시다고 믿었지만, 교회 초창기에 이는 중요한 문제로 다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성모님이 완전히 죄가 없으시다는 것보다는 예수님과 그분의 신성에 대해 논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교회가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어떻게 성모님의 죄 없으신 상태에 대해 논의할 여력이 있었겠습니까?
위대한 교회 철학자인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에 대해 동의하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저는 그가 매우 훌륭한 교부라고 생각했는데요!
맞습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모님이 원죄 없이 잉태되셨다는 것에 동의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모님이 죄가 전혀 없으시다는 믿음까지 동의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모님이 무죄한 상태에서 어머니의 태중에 잉태되었는지의 여부,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성모님이 구세주로서 그리스도의 필요성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논쟁이 수면으로 부상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철학적 논쟁은 13세기 둔스 스코투스에 의해 일단락되었는데, 그는 성모님께 그리스도께서 구세주로써 필요하셨는지를 둘러싼 모든 이견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둔스 스코투스 덕분에 원죄 없으신 잉태는 유럽의 교회들과 대학들에서 가르치는 표준 과목이 되었습니다. 성모님께 언제부터 원죄가 없었는지 -그리고 언제까지 원죄가 남아 있었는지- 에 대한 논쟁이 바로 이 교리를 1854년까지 교회에서 공식적인 교리로 선포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이는 곧 교회가 어떤 주제를 교리로 공식화하기 전에 그에 대해 연구하고 평가하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리게네스, 성 바실리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등은 초대 교회의 교부들이었습니다! 이분들은 성모님이 죄가 있으셨다고 믿었는데, 이것이 바로 성모님께 죄가 있으셨음을 입증하는 증거라고 볼 수 있지 않나요?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그러한 성모님께 죄가 있으셨다고 믿은 초대 교회 교부들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성모님께 죄가 없으셨다고 믿었던 초대 교회 교부들 또한 그에 못지 않았습니다. 성모님을 “새 하와”라고 불렀던 이레네오를 포함해, 유스티노, 테르툴리아노, 예루살렘의 치릴로, 세둘리오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암브로시오와 아우구스티노, 예루살렘의 테오도로, 요한 다마스체노 역시 성모님이 전적으로 순수하셨다고 보았습니다. 역사 전반에 걸쳐 이러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심지어 개신교의 창시자인 독일 신학자 마르틴 루터조차 성모님께는 죄라고는 전혀 없었다고 믿었습니다! 가톨릭교회가 역사적으로 언제나 성모님이 죄 없으신 분이시라는 점을 끊임없이 말해왔다는 사실에는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습니다.
설득력 있는 설명을 듣기는 했지만, 여전히 성모님이 원죄 없이 잉태되셨다는 믿음에 확신하지 못하겠어요.
괜찮습니다! 가톨릭 신자가 아닌 분들이 이해하기에 쉬운 문제는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성모님이 원죄 없이 잉태되신 것은 예수님에 의해, 예수님을 위해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은총 없이 그러한 일이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 중요한 점은 성모님이 단지 무죄한 상태에 계시다는 이유만으로 예수님과 동등해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모님께 대한 가톨릭교회의 관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는 더러 그러한 오해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예수님은 천주 성자이시기 때문에 죄가 없으시며, 성모님은 예수님이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에 죄가 없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통해 그리스도의 완전하심과 그분의 사랑, 그분의 위대한 신성을 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