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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단에 관하여 - 변절(창49:16)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갓은 군대의 박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로다. 아셀에게서 나는 식물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진수를 공궤하리로다.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
야곱의 축복을 통한 예언은 개인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에 관계된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첫째 그룹은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인데 이 사람들은 죄인으로서의 인간의 모습이 드러났다. 르우벤은 정욕이 물 끓듯 함으로서 자기 서모와 통간 하는 죄악을 저질렀고 시므온과 레위는 잔인함으로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이 맨 먼저 등장하는 이유는 인간은 이렇다는 것이다.
두 번째 그룹인 유다와 스불론과 잇사갈은 이러한 인간의 상태 하에서 어떻게 승리를 하고 어떻게 안식을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유다는 사자 새끼고 숫사자고 암사자다 이렇게 표현해서 승리하고 안식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이고 스불론은 항구에 거함으로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상징하고 잇사갈은 장막에 거한다 했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안식을 상징하는 것이다.
세 번째 그룹은 단과 갓과 아셀과 납달리 네 사람이다.
단은 변절함으로서 악을 행하던 사람이고 갓은 이것을 다시 회복한 사람이다. 그리고 아셀은 회복을 통해서 넉넉에 이르는 사람이고 납달리는 부활 안에 있는 풍족을 상징하는 사람으로서 셋째 그룹을 형성하고 있는데 셋째 그룹에 오면 단체적이고 사회적이기 때문에 교회적인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은 단 지파에 대해서 말씀드리겠다.
열두 지파는 결국 오늘날 교회의 예표다. 죄인으로부터 시작해서 통치자로 끝나는 축복은 야곱 속에 자기의 인생관이나 우주관이나 또 하나님과의 관계나 이런 것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 축복의 순서가 출생의 순서를 따른 것이 아니다. 그룹별로 형성이 되어 있지 출생의 순서와 다르고 이것은 진을 칠 때 순서와 비슷하다. 그래서 하나님의 경륜과 관계되는 그런 순서로 배열되었다.
죄인들의 무리에서 승리와 전파자로, 변절에서 다시 회복으로, 회복에서 다시 축복과 통치로 열 두 아들을 통해서 이렇게 배열되었다. 이것은 교회의 장래라고 할 수 있고 교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했는데 단 지파에서 삼손이 나왔다. 삼손은 사사였다. 그리고 이방인에게 유혹을 받아서 힘을 잃게 되지만 마침내 죽음을 통해서 이방인들을 놀라게 하고 정복했던 그런 사건이 있었다. 그러므로 능력과 권세가 있는 지파로 보여지고 있다.
백성들을 심판하리라 이것은 만민이라고 할 수도 있고 동족이라고 할 수도 있다. 삼손이 마지막에 극장의 기둥을 뽑아버림으로서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게 했다. 그래서 온 백성을 심판하는 심판자로서의 마지막을 보게 했던 사람이다.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했는데 그의 전투력이나 이런 것이 아주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추격하는 뱀이고 몰래 발을 물어서 넘어지게 하는 자다. 창세기 3장에 나오는 뱀의 모습을 연상할 수가 있다. 뱀은 너의 발꿈치를 상할 것이고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를 상할 것이다 하는 말이 있었다. 뱀은 숨어 있다가 사람의 발꿈치를 물어서 쓰러 넘어지게 하는 것인데 단이 그런 지파가 될 것이라고 예언을 했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이 말은 단이 너무나 악독하기 때문에 여호와의 자비를 구한다는 뜻이다. 어떻게 구원을 받을 길이 없겠습니까? 그런 뜻이다.
신명기 33:22에 가면 단에 대해서 단은 사자 새끼다 이런 말이 나온다. 사자 새끼는 유다 때에도 나왔는데 사자 새끼는 싸우는 사자를 말한다. 단도 싸우는 사자라고 표현했는데 유다의 경우에는 먹이를 잡기 위해서 싸운다. 그런데 단은 먹이 때문에 싸우는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분배된 땅보다 더 많은 땅을 얻기 위해서 싸우는 사자 새끼다.
여호수아 19:47이나 사사기 18;27-29에 보면 단은 자기들에게 분배된 땅 이상의 더 많은 땅을 확보하기 위해서 억울하게 양민들을 학살하는 그런 장면이 있다.
단 지파는 분배된 땅보다 더 이상을 획득하려고 했다. 다 분배를 했는데 단 자손의 지경이 더욱 확장되었으니 이는 단 자손이 올라가서 레센을 쳐서 취하여 칼날로 치고 그것을 얻어 거기 거하였음이라 이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라는 말이 이미 땅이 다 분배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말이다.
사사기 18장에 ‘단 자손이 미가의 지은 것과, 우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 제사장을 취하고 라이스에 이르러, 라이스가 레센과 같은 곳이다. 라이스에 이르러 한가하고 평안한 백성을 만나 칼날로 그들을 치며 불로 그 성읍을 사르되 그들을 구원할 자가 없었으니 그 성읍이 골짜기에 있고 멀리 있어서 시돈과 상거가 멀고 상종하는 사람도 없음이었더라’ 아무도 구원을 할 수 없는 그런 상태에서 전쟁하지 않은 백성을 무고히 학살했다 그런 뜻이다.
‘단 자손이 성읍을 중건하고 거기 거하며 이스라엘의 소생 그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 그 성읍을 단이라 이름 하니라. 그리고 그 자손들이 자기를 위하여 새긴 신상을 세웠고 모세의 손자 게르손의 아들 요나단과 그 자손은 단 지파의 제사장으로 고용이 되었다.’ 그들이 뺏은 땅에 그들은 따로 신상을 세워놓고 거기에 제사장들을 고용해서 따로 경배의 중심지를 만들었던 그런 사람들이었다.
유다는 먹이로서의 사탄을 잡는 그런 사자 새끼였음에 비해서 단은 같은 사자 새끼였지만 더 많은 땅을 확보하기 위해서, 욕심을 부렸다는 말이다. 그것을 위해서 싸웠기 때문에 첩경의 독사다 그렇게 표현이 되었다.
라이스를 노략해서 잔인한 짓을 하고 단이라는 성을 쌓고 자기들끼리 독립을 했고 거기에 신상을 세워서 우상 숭배를 하고 제사장들을 고용함으로서 다른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이때 이스라엘의 장막은 실로에 있었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전이 실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끼리 따로 이런 경배의 중심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강함은 만민을 심판 할 만큼 강한 족속이었고 그리고 독하기는 라이스를 무고하게 침략하는, 아무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은 양민들을 학살하고 그 땅을 뺏을 만큼 독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성의 이름을 단이라고 했다. 그리고 형제들과 완전히 분리되어서 자기들끼리 따로 성전을 세워놓고 숭배를 하는 그런 사람들이 된 것이다.
역대상과 계시록에는 이 두 지파가 빠져 있다. 계시록의 말대로 하면 생명 책에 빠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생명 책에 기록된 자는 복이 있다, 기록되지 못한 자들은 다 불 못에 던지우더라’ 이런 말씀이 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지파 속에 들어있다는 것은 생명 책에 들어 있다는 것이고 이스라엘 지파에서 빠졌다는 말은 생명 책에서 빠졌다는 말이다.
에스겔 48장에 다시 한 번 언급이 나온다. 천년 왕국동안에는 이 지파가 다시 기록이 되어 있다. 그러니까 사탄을 잡고 이기는 왕국 안에서는 이 이름이 잠시 등장할 것이라는 것이다.
유다의 경우는 타락한 앞의 무리들을 이어서 반대로 사탄을 사로잡아서 먹이를 삼고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고 옷을 포도즙에 빨았기 때문에 눈은 붉고 이가 희어졌다 이렇게 표현이 되었다.
그런데 단의 경우는 변절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지파 속에서 빠져나가서 자기들만이 다른 짓을 했다. 변절이다. 이 변절이 갓을 통해서 회복이 되고 아셀을 통해서 넉넉해지고 납달리를 통해서 완성되는 이런 세 번째 그룹에 속한다.
단은 변절했는데 승리에 있어서는 유다의 연속이다. 이기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이기는 것이 무고한, 하나님이 정하심이 아닌 자리에서 싸워서 이긴 것이다. 개인적이고 독립적이었는데 이것은 교만했다는 것이다. 자기들의 강함을 믿고 단독적으로 레센을 침략했다. 그리고 그것을 불사르고 다시 중건해서 단이라는 성을 세웠다.
경배의 중심지를 따로 세웠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죄악이다.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세웠다. 모세는 신명12, 13, 14, 15, 16장에서 적어도 열 다섯 번 이상을 너희가 너희 눈에 보이는 곳에서, 다시 말하면 스스로 선택한 곳에서 절대로 번제를 드리지 말아라 이렇게 경고를 했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중심은 하나라는 것이다. 절대로 너희 눈에 보기 좋다고, 아니면 편리하다 해서 거기서 경배를 따로 드려서는 안 된다 했다.
정치적인 것으로 생각하면 분열을 막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더 깊은 것이 들어있다. 우리는 한 하나님 이외는 경배를 드려서는 안 된다 하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한 그리스도 이외는 그리스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세는 누누이 다른 경배를 갖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자손은 그런 짓을 하게 되었다.
여호화께서 명하신 유일한 곳으로 가도록 그렇게 명하고 있다. 신명기 12, 13, 14장에 ‘너는 삼가 네게 보이는 아무 곳에서든지 경배를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의 택하신 그곳에서 너희의 번제를 드리고 또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거기서 행할지니라’ 그렇게 말했다. 절대로 다른 곳에서 번제를 드리지 말아라 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그들이 외국에 포로로 잡혀가서 80년씩 40년씩 포로 생활을 했어도 절대로 번제를 드린다든지 예배를 드린다든지 이렇게 하는 법이 없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회당이다. 회당에서는 율법을 가르치기는 했지만 절대로 거기서 예배를 드리는 곳은 아니다.
한 곳 외에는 여호와를 경배할 수 없다. 그리고 여호와는 반드시 꼭 그 자리에 계시지 다른 곳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 기독교적인 관념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이 어디든 안 계시냐, 무소부재 하신데 이 우주 안에 어디든지 계시기 때문에 아무 곳에서나 경배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절대로 다른 곳에서는 경배를 드릴 수 없도록 명령을 하고 있다.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좋은 땅에 들어간 후에,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 하나님의 장막은 실로에 있었다. 사사기 18:31절에 보면 실로가 경배의 중심지였다. 여기서 예루살렘으로 옮겨온 것이다. 그런데 단은 북쪽에 또 다른 경배의 중심을 세워 놓고 이제는 너희가 예루살렘에 내려갈 필요가 없다, 여기도 하나님이 계시는데 왜 내려가냐 이렇게 해서 내려가지 못하게 했던 그런 일이 있다.
실로는 영원히 하나뿐이다, 여호와의 장막은 하나뿐이다, 둘이 있을 수가 없다.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는 동안에 미가의 지은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 사사기 18장에 그렇게 되어 있다.
실로는 예루살렘으로 옮겨지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솔로몬에 의해서 성전이 완성되게 된다. 이러한 사건이 또 생겼는데 여로보암 때 이런 일이 또 생겼다. 여로보암은 단에 좀 더 견고한 성전을 만들었다. 그래서 거기에 우상을 세웠던 역사가 있다.
여로보암은 유다왕 르호보암에게 백성들이 갈 것을 두려워했다. 성전이 거기 있으면 백성이 자연히 그리로 갈 것이다. 솔로몬의 두 아들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이 서로 갈라지게 되었다. 하나는 북왕조 하나는 남왕조 이렇게 되었는데 여로보암은 북왕조다. 우리의 북한과 같은 것이다. 북왕조 열지파였다. 여로보암은 이 백성들이 여호와를 경배하기 위해서 모두 예루살렘으로 내려가면 유다 지경으로 가야 한다. 그래서 유다 지경으로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단 성에 성전을 세웠던 사건이 있다.
열왕기상 12장에 보면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이런 말이 나온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결국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두 개의 성전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제사장들을 고용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정하심을 모독한 것이니까 신성 모독에 행하는 그런 것이다. 율법에 따르면 제사장은 아론의 자손 중에서 되도록 정해져 있는데 그들은 이것을 돈을 주고 고용을 시켰다. 그래서 최초로 고용 제사장을 만들게 되었다.
절에 보면 그런 것이 있는데 어떤 사람들이 돈 벌기 위해서 암자를 만들어 놓는다. 그러고서는 염불하는 중을 고용을 한다. 그러면 불교 철학과 같은 곳에 다니는 학생들이 아르바이트로 염불만 해 준다. 그런 경우와 마찬가지고 이것이 직업 제사장 제도와 마찬가지다. 직업적으로 그것만 해 주고 얼마의 돈을 받는 것이다.
기독교 안에도 마찬가지로 그런 양상이 일어나고 있다. 전에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어느 회사에 기도하는 전도사로 취직한 사람이었다. 그 회사를 위해서 기도하는 전도사, 너무너무 어이가 없는 일이다. 그 사람이 하는 일은 그 회사에서 그 회사가 잘 되도록 기도만 하는 것이다. 기도하는 전도사로 고용이 되어 있는 사람이다.
한 번은 절에서 목탁을 두드려주는 고용 중을 만난 일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너무너무 가난했다. 너무 가난해서 그 일을 했다고 직접 이야기를 했다. 회사가 잘 되도록 고용된 기도 전도사와 목탁만 두드려 주는 중, 이것이 바로 이때부터 시작된 일이다.
오늘 우리의 유일한 경배의 중심은 무엇인가? 구약 시대는 장소였다. 예루살렘이냐 단이냐 이런 문제였다. 오늘 우리 경배의 중심은 무엇이냐? 이것을 잘못 생각하면 카톨릭에서는 카톨릭이 중심이니까 카톨릭에서 나가는 것은 분열이다 이렇게 할 것이고 장로교는 장로교가 중심이니까 장로교에서 나가는 것은 분열이다 이렇게 할 것이다. 그래서 서로 이단이라고 한다. 나가는 사람을 보고는 다 이단이라고 한다.
신약의 원칙은 인격이다. 신약의 모든 원칙은 인격이다. 구약의 물질적이고 제도적이고 형식적이었던 모든 것의 실재는 인격이기 때문에 오늘 우리의 경배의 유일한 중심은 그리스도밖에는 없다. 그리스도 이외 다른 것을 만일 중요하게 여기고 그것을 앞세우게 되면 그것이 바로 분열의 원인이 된다.
모든 종파가 왜 생겼는가? 그리스도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다. 어떤 다른 문제 때문에 생겼다. 정치적인 이유로, 감독제냐 장로제냐 이런 것 때문에, 또 동교회와 서교회가 갈라질 때도 신상을 숭배하냐 아니냐 이런 것들 때문에, 침례를 하느냐 약례를 하느냐 이런 문제들 때문에, 이런 여러 가지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문제들 때문에 분열이 되었지 그리스도 때문에 분열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직 한 곳을 경배지로 삼아야 했던 이유는 그리스도 때문에, 성전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고 성전은 그리스도의 형상이었다. 그러니까 오늘 이 세상의 모든 기독교가 전부 하나가 되려면 기독교 안에 있는 색다른 모든 것들이 없어져야 한다. 너와는 다르다는 것이 다 없어져야 한다. 그리고 오로지 그리스도만 중심이 되어야 하나가 된다.
그리스도로 하나가 되면 갈라질 이유가 없다. 갈라질 필요가 없다. 장로 제도냐 감독 제도냐 할 필요가 없다. 감리교는 감리 제도고 장로교는 장로 제도다. 다른 이유가 없다. 결국 우리 유일한 경배의 중심은 한 인격이신 그리스도다. 이 인격에 초점을 맞춘다면 왜 갈라지겠는가? 갈라질 이유가 없다.
심지어는 제도나 교리나 의식이나 이런 것 말고도 또 아주 교묘한 것이 있다. 예를 들어서 봉사랄지 사랑이랄지 기도랄지 이런 것은 아주 종교적이고 좋은 것 같지만 이런 것이 강조되면 강조된 것만큼 분열된다.
어떤 기독교에서는 교회가 예배당에 앉아서 주여 주여 하고 있으면 되냐? 이 세상에 불쌍한 사람이 얼마나 많고 가난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이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그리스도의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그것은 참 좋은 일이지만 그리스도 자신이 아니기 때문에 분열된다. 그러면 한쪽에서는 그것이 다냐?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전부다 이렇게 나서는 쪽이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그것이 중심이 되어도 안 되고 또 가난한 사람을 돌봐야 한다는 이것이 중심이 되어도 안 된다. 어떤 것이 중심이 되어도 다 분열될 소지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 이외의 모든 것은 다 분열의 소지가 있다. 나쁜 것만 분열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교회가 분열되는 것은 술집이나 극장 때문에 분열되는 것이 아니고 이런 교리나 좋은 것들 때문에 분열된다. 나쁜 것 때문에 분열되는 것이 아니다.
실로는 바로 그리스도를 말한다. 성경은 말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하리니 이런 말이 나온다. 이 실로는 곧 그리스도를 말한다.
오늘 우리가 이것을 생각해 볼 때 단의 죄악은 무슨 악을 행하는 죄악 이전에 분열이 가장 큰 죄악이었다. 자기들의 강한 것을 믿고 스스로 자만함으로서 다른 지파를 무시했다. 다른 지파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우리가 거리가 너무 멀어서 성전을 세우려고 하는데 괜찮은가 이렇게 다른 지파에게 물어본 것이 아니고 자기들 단독으로 그것을 세워서 분열을 자초했다. 그래서 이 단의 죄악은 성경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이 엄청난 그런 죄악이다.
물론 다른 왕들이 나쁜 짓을 많이 하고 악한 짓을 많이 한 것도 있다. 그런데 성경은 제일 심하게 말한 것이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보다 더 심한 것은 경배의 중심을 바꾼 것이었다. 성전을 따로 세우는 것, 이것보다 중한 것은 없다. 이것은 그 백성의 분열을 가지고 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보다 무서운 것은 없었다.
단은 맨 처음으로 분열을 일으키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강하다는 것, 기독교 역사에서 그런 것이 많다. 자기가 어떤 신령한 것을 깨달았다는 이유로, 아니면 세력이 커졌다는 이유로, 사람이 많이 모였다는 이유로, 이런 이유로 독립해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사람은 약할 때는 분열되지 않지만 강하면 분열이 된다. 자기 힘이 생기고 커지면 그것을 세력화시키고 그것을 분열시켜서 다른 지파를 무시하고 다른 형제들을 무시하는 그런 경향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유일한 경배의 중심은 오직 그리스도다.
누가 예수 안 믿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냥 예수를 믿는다,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는 것과 다른 문제다. 무엇이 중심이냐 하는 문제다. 그 교회가 혹은 그 교파가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하는 그 문제다.
천주교는 제도에 초점을 맞췄다. 그래서 다른 것은 다 용납한다. 예를 들어서 천주교에는 방언을 안 한다 했다가도 방언을 허락해야 할 때가 되면 다 허락한다. 천주교 사람들은 그렇다. 처음에는 방언을 안 했다. 병 고치는 이런 것들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개신교에서 방언을 하고 병을 고쳐서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 그러니까 자기들도 해서 지금은 방언하는 전문 신부, 병 고치는 전문 신부가 생겼다. 그 사람들은 전적으로 그 일만 하고 돌아다닌다. 오히려 더 발전적으로 일하게 된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을 용납한다. 무엇이든 용납하는데 단 한 가지 용납 못하는 것은 카톨릭이라는 제도를 반대하는 경우에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라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것은 제도가 어떤 것보다 소중하다는 말이다. 공산주의까지라도 용납을 한다. 그렇지만 자기들의 제도를 반대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개신교는 어떤가? 개신교는 다른 것은 다 용납한다. 그런데 교리를 바꾼다든지 교리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기게 되면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그것은 부자간에도 용납하지 않고 형제간에도 용납하지 않는다. 친구간에도 용납하지 않고 어떤 경우에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것을 보면 개신교의 중심은 교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것이 결국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리스도가 아닌 것을 주장하기 때문에 분열이 생기기 마련이다. 오늘 기독교가 합해지려면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야 하고 온 인류가 하나되려면 오직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한 인격이 중심이 되어야 온 인류가 하나 된다.
단지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온 세상의 인류가 다 모일 한 자리가 어디겠는가? 죽고 다시 산 자리밖에는 한 자리에 모일 일이 없다. 나는 기독교고 너는 불교다 하면 무엇이 더 나은 것이라고 하겠는가? 각자 자기가 더 옳다고 할 것이다.
이 땅 위에서 마지막 전쟁이 생긴다고 하면 그것은 종교 전쟁이다. 이것은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이것보다 비참하고 무서운 것이 없다. 그러니까 이 땅 위에 종교가 없어져야 한다. 종교가 없어지고 오직 그리스도만 있어야 한다. 그러면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라고 하지만 만일 누구든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다시 산 인격이 있다면 불교고 기독교고 어디를 가도 다 하나다.
사실 절에서도 그것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자아를 완전히 버리고, 자기를 버리고 해탈하자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해탈이 되는가? 죽고 다시 살아야 해탈이 되지 무슨 수로 해탈이 되겠는가?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 전하게 된다면 우리 전 세계 모든 종교, 모든 인류가 다 한 자리에 오게 된다. 그 이외 것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사람을 다 분열시키고 만다. 기독교에서 제일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만일 우리가 사랑을 말한다면 불교에서는 자비를 말할 것이니까 또 갈라진다. 그러니까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 이외의 것은 다 분열의 원인이다. 그 이외 것을 주장하고 그 이외 것을 가지고 있는 교회들은 전부 분열된 교회다.
오직 한 자리만이 경배의 중심지다. 구약이 아주 의미 깊은 이유는 왜 꼭 그 자리에 가서만 경배를 드리게 했을까? 왜 그 자리가 아닌 곳에 가서는 번제를 드리지 못하게 했을까? 왜 그들은 그것을 고집하는가? 자기들은 그것을 고집하면서도 이런 깊은 뜻을 모르고 한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오히려 싸움의 원인이 되었다.
성전은 바로 그리스도의 형상이다. 성막 자체가 한 인격을 묘사한 건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인격의 실재가 바로 그리스도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성전을 헐으라 사흘동안에 내가 다시 일으키겠다. 이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게 말했다. 그분 자신의 인격이 바로 성전이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성전이다.
이것이 고린도전서에 오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이것은 교회를 가리켜 말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확장이 교회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교회 그것이 바로 성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 이외는 절대로 여호와가 없다, 하나님을 경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무소부재하시다 이런 개념과는 완전히 다르고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신다 이런 개념과 아주 다르다. 그리스도 안에만 계시는 것이지 어디든지 계시는 것과는 다르다. 그리스도 안에만 계신다는 것이 기독교다. 예루살렘에 있다, 성전에 있다, 하늘에 있다 이것이 유대교라면 꼭 그리스도 안에, 나사렛 목수의 아들 예수라는 한 사람의 인격 안에만 하나님이 계신다 이것이 기독교다. 이 차이다.
오늘 우리는 이 차이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내가 기독교인이면 무엇이 기독교인줄 알아야 한다. 그냥 기독교라 해서 기독교가 아니고 우리가 만일 유태인처럼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유태교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그리스도가 아버지라고 여기는 그 하나님만을 하나님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고 기독교인들이다.
기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참으로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시와 말씀으로 인해서 한 곳에서밖에는 여호와를 경배할 수 없도록 행하신 그 깊고 놀라운 뜻을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을 감사하고 우리가 이 실재 안에 들어와서 주님을 경배할 수 있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어디든지 계신 하나님이 아니고 오직 나사렛 목수의 아들 예수께서 아버지라고 부르신 그분 안에만 우리의 경배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온 인류를 하나되게 하기 위해서 아버지께서 보내신 독생자,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으시고 다시 사신 한 인격 안에 온 인류를 하나되게 하시려는 아버지의 놀라운 지혜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다 하나되어 아버지를 다 찬송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하고 모든 인류를 다 그 안으로 불러서 아버지의 만족이 되게 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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