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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속 사람을 가꾸는 훈련 (골 3:1-11)
성경에는 인간을 설명하는 다양한 인간론적 표현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옛사람과 새사람’이라는 표현입니다. 엡 4:22-24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이 말씀에서 예수 믿기 이전의 인간의 모습을 ‘옛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고 난 뒤 변화된 새로운 인간의 모습을 ‘새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사용된 옛사람과 새사람이라는 표현은 예수를 믿는 신앙의 유무에 따라 달라지는 통전적 인간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예로 ‘겉사람과 속사람’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고후 4:16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에게 ‘겉사람’이 있고, 동시에 ‘속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사용된 겉사람과 속사람이라는 표현은 존재론적 인간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있든 없든 모든 인간에게는 겉사람과 속사람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겉사람과 속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고후 4:18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는 인간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보이는 세계’와 인간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보이는 세계 안에서 살아갑니다. 바로 이 보이는 세계는 곧 물질세계입니다. 이 물질세계에는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물질들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이 물질세계에서는 우리 육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이런 보이는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론적 모습이 바로 겉사람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또한 보이지 않는 세계에도 속해 있습니다. 바로 이 보이지 않는 세계는 곧 영적세계입니다. 바로 이 영적세계는 인간이 영안을 열게 될 때 비로소 볼 수 있는 세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세계입니다. 이렇게 영안이 열려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론적 모습이 바로 속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나면 비로소 영안이 열려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드디어 깨어나게 되고 과거에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고후 4:16 하반절을 보면 주목할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의 속사람이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욱 새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영안이 더 밝아져서 영적 세계를 더욱 잘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탈무드를 보면 큰 슬픔을 당한 뒤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을 세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첫째는 큰 슬픔을 당했을 때 큰 소리로 울부짖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눈앞에 보이는 절망적인 상황만 보고 견딜 수 없어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둘째는 큰 슬픔을 당했을 때 잠잠히 슬픔을 깊이 느끼지만 그 슬픔을 이겨내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느끼며 힘들지만 슬픔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큰 슬픔을 당했을 때 찬양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슬픔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슬픔 너머에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희망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슬픔 중에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속사람의 상태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전혀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보되 희미하게만 볼 뿐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보다 명확하게 봅니다.
그리고 속사람의 상태가 같은 사람이라도 늘 같지 않습니다. 꾸준히 훈련받은 사람들은 속사람의 영적 능력이 강건해 집니다. 그러나 훈련받지 않은 채 지내면 속사람의 영적 능력이 제자리에 머물러있고, 심할 때는 오히려 퇴보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속사람을 훈련해야 합니다. 그것도 꾸준히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날로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속사람을 위해 어떤 훈련을 해 가야 할까요?
1. 성령으로 사는 훈련입니다.
엡 3:16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성령이 속사람을 강건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속사람은 성령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우리 속사람은 성령이 우리 안에 임하실 때 깨어납니다. 그래서 비로소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요 3:3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또한 요 3:6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여기서 거듭난다는 것은 영으로 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 3:8을 보면 “성령으로 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으로 난 사람이란 성령으로 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성령이 오셔서 새롭게 거듭난 사람이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동화 백설공주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백설공주가 독사과를 먹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일곱 난장이들의 정성어린 보살핌으로 생명은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 먼 나라의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왕자의 입맞춤으로 백설공주가 깊은 잠에서 깨어납니다.
그렇습니다. 원래 우리의 속사람은 깊은 잠에 빠져 들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우리 심령 속에 오셔서 우리의 속사람을 깨워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비로소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영안이 열려 하나님도 볼 수 있고 하나님의 나라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의 속사람은 성령이 충만할 때 더욱 강해집니다. 앞에서 살핀 엡 3:16을 보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성령이 충만할 때 더욱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강건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보았던 만화영화 뽀빠이가 생각이 납니다. 뽀빠이는 브루투스에게 늘 당하며 삽니다. 그러나 애인 올리브가 어려움에 처하게 되어 가냘픈 목소리로 “뽀빠이 살려주세요”라고 부르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시금치를 먹습니다. 그러면 새 힘이 온 몸에 가득 차 오릅니다. 그리고 브루투스를 물리치고 올리브를 구해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힘만으로는 악한 원수마귀를 상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충만하게 되면 성령의 놀라운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속사람이 강하게 됩니다.
결국 우리는 속사람의 훈련 가운데 가장 먼저 힘써야 할 것은 성령으로 사는 훈련입니다. 늘 성령과 동행하는 훈련, 성령으로 사는 훈련을 해 갈 때 우리의 속사람이 더욱 강건해 질 수 있습니다.
2. 위의 것을 찾는 훈련입니다.
오늘 본문 1-2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이 땅을 살아갈 때 위의 것을 우선적으로 찾으며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위의 것이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말합니다. 그리고 영적세계를 말합니다. 그래서 위의 것을 찾는다는 것은 인생의 우선적인 목적을 저 위의 것에 두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인생의 우선적 목적을 저 위의 것에 두며 살 때 우리가 속사람 중심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창 24장을 보면 안타까운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파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창 25:34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팔게 된 근본적인 이유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원래 에서는 장자로서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하나님의 축복의 계보를 이을 수 있던 사람입니다. 도무지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그 엄청난 영적 자산을 물려받도록 되어있던 사람입니다. 안타깝게도 에서는 그 영적 자산의 가치를 볼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팥죽 한 그릇에 그 엄청난 영적 자신을 팔아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달랐습니다. 그 장자 명분이 가진 영적 가치를 볼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것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러다 결국은 그 영적 가치를 손에 넣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두 종류의 인간을 봅니다. 하나는 에서형 인간입니다. 그는 겉사람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늘 그는 아래의 것 다시 말해 보이는 세계 물질세계의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다른 하나는 야곱형 인간입니다. 그는 속사람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늘 그는 위의 것 다시 말해 보이지 않는 세계 영적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야곱형 인간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속사람이 그 인생의 방향을 정하고, 속사람이 그 인생을 주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위의 것을 추구하며 참된 행복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빌리그래함이 세속화되어가는 미국사회를 보며 탄식하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때때로 나는 토마스 제퍼슨이 미국 독립 선언문에 “행복의 추구”에 대한 문구들을 집어넣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행복을 추구할 “권리”(또는 적어도 자유)를 주셨습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삶의 일차적인 목적이라고 생각하고, 미친 듯이 그것을 추구하는 데 인생을 소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추구는 환멸로 끝이 납니다.
행복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어떤 것의 부산물입니다. 행복은 추구하거나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행복은 다른 추구, 곧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으로부터 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에서와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땅에서 행복을 추구하며 삽니다. 그러다가 참된 행복의 길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야곱과 같은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위의 것을 추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참된 행복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결국 우리가 속사람 훈련을 위해 힘써야 할 또 하나는 우리가 늘 위의 것을 찾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3. 땅의 것을 버리는 훈련입니다.
오늘 본문 2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우리가 속사람 주도적인 삶을 살려고 할 때 땅의 것을 버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의 내부에 속사람에게 걸림돌 노릇을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다 땅의 것과 연관되어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을 버리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욕망입니다. 이 욕망은 우리로 하여금 땅의 것에서 눈을 띠지 못하게 합니다. 위의 것을 찾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욕망을 떨쳐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속사람이 제 기능을 다할 수 있습니다.
알렉산더 왕이 페르시아로 진군해 들어가고 있을 때 일입니다. 페르시아 대군과 일전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더가 군인들의 사기와 상태를 점검해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군인들의 진군 속도가 제대로 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군인들의 사기도 그렇게 높지가 않았습니다.
알렉산더는 어렵지 않게 그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군인들이 이미 앞의 전쟁에서 많은 노획물을 몸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진군 속도가 나지 않았고 그것들을 잃어버릴까봐 전쟁하기를 꺼려했습니다.
알렉산더는 진군을 멈추게 하고 노획물들을 모두 압수했습니다. 그리고 모두 한데 모아 불태웠습니다. 군인들의 심한 불평이 있었지만 알렉산더는 마지막 전쟁에서의 승리한 뒤 더 많은 상을 주기로 했습니다. 결국 그렇게 함으로써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둘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욕망이 문제입니다. 이 세상 것에 대한 욕망이 문제입니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어하는 욕망, 높아지고 싶어하는 욕망, 유명해 지고 싶어하는 욕망, 성적인 욕망 이런 욕망들이 속사람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또 하나는 옛습관입니다. 이 옛습관은 우리의 속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속사람이 제대로 활동하게 하려면 옛습관을 던져버려야 합니다.
한국교회 초창기 기록을 보면 우리가 깊이 새겨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1907년 경기도 지역에서 선교하던 S.F. 무어 선교사의 기록을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전에 김 씨는 농사를 지었는데 술을 즐겨 마셨고 예쁜 첩도 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개종한 후 첩을 내보냈고 술과 노름도 끊었습니다. 겨울 사경회 기간 중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 안에서 진보했음을 확인했고 매서인으로 활동해 주기를 요청하자 그는 기꺼이 응했습니다.”
당시 한국교회 초창기에 아직도 봉건사회의 잔재가 뿌리 깊게 남아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옛습관으로 당시 사람들을 지배했습니다. 그런데 김씨라는 분은 예수 믿게 되면서 당시 하나의 관행이었던 첩을 내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술과 노름도 과감하게 끊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뒤에 사명자의 길로 나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우리 안에 우리의 속사람의 발목을 잡고 있는 옛습관들이 남아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과감하게 끊어낼 때 우리의 속사람이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훈련을 철저하게 수행해 가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속사람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이 속사람을 통해 보이지 않는 세계 곧 영적 세계를 살아갑니다.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합니다. 우리가 이 속사람을 잘 가꾸고 훈련해 가야 합니다.
우선 성령으로 사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성령이 우리의 속사람을 능력있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위에 것을 찾는 삶을 사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위의 것을 찾을 때 우리의 속사람이 활력있게 제 기능을 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땅의 것을 버리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땅의 것을 버릴 때 속사람을 발목잡는 것들을 끊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