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예과 때부터 시를 썼습니다. ‘소라동인회’라는 시쓰기 동아리에 들어가서
어깨 너머로 주워 들은 대로 쓰면서 제대로 된 시인지도 모르고 학교 신문에 내기도
했지요. 학교 졸업하고 밥 벌어 먹고 사는 동안에도 시에 대한 관심은 지속됐습니다.
시집을 사다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도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2001년, 제 나이 52살
때입니다. 우연히 ‘포엠토피아’(지금은 없어졌습니다)라는 시쓰기 인터넷 강좌에
들어가서 배웠습니다. 그때 지도해 주셨던 분이 육군사관학교 국어국문학과의
이기윤 교수님(지금은 고인이 됐습니다)과 이화은 선생님이었습니다. 시를 지어서
인터넷 시창작 카페에 올리면 강평과 함께 수정을 해주셨습니다. 이화은 선생님은
지금도 서로 연락하고 지내고 있습니다.
요즘도 그러는지 모르지만 그때는 전국으로 돌아다니면서 모임을 가졌었습니다.
제가 있는 진주에도 와서 일박을 하고 갔지요.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기 끝이
없습니다만 왜 그리 서로들 싸웠는지 생각하면 쓴웃음이 납니다. 2002년에
시와 시학을 통해 등단하고, 2004년에 시와 시학 잡지사를 통해 자비출판을
했습니다. 시집의 디자인이니 뭐니 생각할 것 없이 오직 자신의 시집을 내고 싶다는
욕심뿐이었습니다. 허영이라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만 그때는 그랬습니다.
아직도 전문 시인 축에 끼이지 못하는, 말하지만 골프로 치면 ‘보기’ 플레이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제 시력(詩歷)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흉부 사진」
이라는 시였습니다. 이기윤 교수님이 저의 습작들을 보시다가 이 시를 시답다고
처음으로 인정해주셨습니다. 이 시 한 편이 저의 글쓰기의 원동력이 된 셈입니다.
진주에서 2019년부터 2년 동안 과학기술대학의 평생교육원의 시창작 교실에서
박종현 선생님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선생님은 고등학교, 여중학교 국어 선생님을
하시다가 은퇴한 분이었습니다. 선생님에게 배운 것 중에 커다란 것은 우리나라
시작품의 범주였습니다. 초창기의 함축적 시, 그 다음 발견의 시, 치환의 시,
현대시에 대해 강의를 듣고 시에 대한 또 다른 눈이 떠졌습니다.
제 시작(詩作)에 또 하나의 큰 계기가 된 것은 손주들과 7년간 ‘메타포‘를 가지고
씨룬 결과물인 『의사 할배가 들려주는 조금 다른 글쓰기』를 책으로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작년 8월에 출판사에 원고를 제출하여 여러 번 교정을 보고 나서
2023년 1월 15일 출간되었습니다. 손주들을 가르치는 것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제가 더 배웠고 저나름 시와 수필 쓰기에 대한 기준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번 여름 방학에 미국에 사는 손녀가 둘이 왔길래 진주 내려오는 기회에 시쓰기와
여행 에세이 쓰는 특강을 했습니다. 제가 수강료를 받은 게 아니라 꼬시느라 제가
수강료를 주었습니다.
제가 시쓰기에 대한 기준을 제시한 것은 다섯 가지였습니다.
1 사물의 본질 세 가지를 찾아라(Find three essentials of things.)
2 메타포가 안 써지만 단어로 브레인스토밍하라.(Brainstorm with words even
though the metaphor doesn't work.)
3 메타포를 사용해서 시를 써라.(Write a poem using metaphors.)
4 쓴 시를 은유와 진술로 분석하라.(Analyze the written poem with metaphors
and statements.)
5 제목을 다시 써라.(Rewrite the title.)
여행 에세이를 쓸 때는 세 가지를 제시했습니다.
1 자신이 경험한 것을 써라.(Write what you have experienced.)
2 여행한 현장의 생생한 정보를 전해라.(Give vivid information on the scene
of your trip.)
3 자신의 관점, 깨달음, 통찰을 써라. 이것이 없으면 신변잡기(身邊雜記)에
지나지 않는다.(Write your point of view, enlightenment, and insight. Without
this, it is nothing more than an essay in which you write down various things
that happen around one.)
이번에 손주와 글쓰기를 하면서 그래도 보람이 있었구나 하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큰 손녀는 이제 중2이고 둘째는 초5입니다. 그들이 쓴 글이 백일장에
내보내도 장원이 될 정도는 아니지만 그들이 스스럼 없이 메타포를 구사했다는
것입니다. 빼어난 솜씨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모르게 메타포가
나오는 것을 보면서 역시 글쓰기도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어릴 때 배우듯이
어릴 때 배워야 하는구나 하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20여 년 동안 제 노트북에 저장했던 글 중에서 최근 5,6년의 시들을 모아서
자비출판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이화은 선생님이 소개해 주신 청어출판사에
5월 20일 경에 맡겨서 거의 한달 반인 7월에 1일에 출간 된 것이 시집
『실례했습니다』입니다. 시는 사실 일반 책들과 달라서 교정 볼 것이 별로
없어 빨리 나오는 것 같습니다.
이 시집의 내용은 네 가지입니다.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의 저의 어릴 적
1950년대 이야기, 일상생활에서 겪은 것들, 요양병원에서 만난 환자들 이야기,
사천요양병원에서 생활하면서 만났던 풀꽃에 대해 썼습니다. 특히 요양병원의
환자들은 제가 시적 능력이 없어서 그렇지 시적 소재로는 무궁무진합니다.
환자분 한분 한분을 볼 때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집의 해설을 평론가 손희락 선생님이 해주셨습니다. 읽으면서 너무 과찬이
아닌가 하고 얼굴이 붉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소중한 배움은 제가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작품을 지적해 주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생몰 연도」는
신경학자들의 생몰 연도를 괄호 안에 쓴 것으로서 별로 메타포도 없고 어떤
면에서는 싱겁기도 한 것이어서 빼버릴까 하는 생각도 한 적이 있습니다. 그걸
다른 각도에서 지적해 주신 손희락 선생님의 혜안에 저도 모르게 감복했습니다.
손희락 선생님에게 시집이 출간되어 감사하다고 문자를 보내니 이런 답이
왔습니다. “표제시는 평설 연재하는 계간문예에 좀 더 깊이 있게 다루어서
이번 가을호에 게재토록 보냈습니다. 오탁번, 선생 이하 21번째 집중평설이
되겠네요.” 이 문자를 보는 순간 과장해서 말해 기절할 뻔했습니다.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일어 일어난 겁니다. 순간 기쁘기도 하고 멍하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항상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저그런 아마추어에 지나지 않는다는 열등감에 저도
모르게 항상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저의 시를 이렇게 평가해 주시다니
현기증이 난 겁니다.
이번 시집이 나온 후 20여 년 전에 써두었던 시들을 다시 끄집어 내어 보았습니다.
습작 냄새가 많이 났습니다. 하지만 못난 자식도 제 새끼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못났다고 내팽개칠 것이 아니라 다시 주워담아야겠다고 생각해서 『시나브로
비봉산이 되다』라고 시집 제목을 가제(假題)로 정하고 정리하고 있는 중입니다.
제 집에서 걸어서 15분이면 가는 비봉산은 제게는 의미가 큰 산입니다. 산 높이
143미터밖에 되지 않는 그야말로 볼 품 없는 산이지만 30년도 넘게 수도 없이
올라갔습니다. 어설픈 비봉산이 바로 다름 아닌 저와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제목을 그렇게 정했습니다.
의사 노릇만 해도 바쁜데 왜 시를 쓰는 데 그토록 빠져 있었는지 저도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그 시간에 환자 하나 더 볼 궁리를 하거나, 돈이라도 한 푼 더
벌려고 노력했다면 지금의 형편보다 나아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구태여
말하자면 자기가 좋아서 하는 짓이었습니다만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일
것입니다. 니체의 ’아모르 파티‘가 아니라도 제 운명을 사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첫댓글 신입회원 김명서 시인님이 글을 올리셨네요. 시집 [ 실례합니다]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김명서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문운하세요
이윤 선생님, 윤주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월례회에서 뵙겠습니다.
반갑습니다 김명서 선생님
문협 회원으로 변경해 놓겠습니다.
실명으로 수정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