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부처님 제자는 이사理事에 걸림 없는 실력 갖춰야!” 한국 무문관 수행의 효시!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 6년 결사 후 홀연히 사라진 전설적인 선사禪師를 박부영 기자가 발굴ㆍ추적하다
구두선口頭禪을 떠난 실참 강조한 수행자의 사표師表 《무문관수행의 전설 석영당 제선선사》
박부영ㆍ원철스님ㆍ김성우 공저 신국판ㆍ양장ㅣ흑백ㅣ256쪽ㅣ15,000원 ISBN 978-89-97188-25-3 03220 비움과소통 펴냄ㅣ11월 21일 발행
문의 - 도서출판 비움과소통 Tel. 02-2632-8739 Fax. 0505-115-2068. buddhapia5@daum.net
제선선사 탄생 100주년, 선사의 구도행적과 무문관수행을 점검하다
“선사로 참선 정진의 길을 함께 걸었던 정영선사 역시 참선 정진만이 이 신생종단의 미래를 밝히는 길임을 잘 알고 있었다. 부소대를 떠나 도봉산에서 정진하던 도반(제선선사)이 무문관 건립을 제안하자 정영선사는 ‘바로 이것이다’며 무릎을 쳤을 것이다. 그리하여 두 도반은 도봉산 천축사에 부처님의 6년 설산 고행을 따라하는 6년 고행 정진하는 (무문관) 선원을 만들게 된다. 한국불교사 아니 세계 불교사에 일찍이 유래를 찾기 힘든 대역사였다.” (본문 86p)
《무문관 수행의 전설 석영당 제선선사》는 한국 무문관 수행의 창시자로서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 6년 결사 후 홀연히 사라진 석영당(夕影堂) 제선(濟禪, 1912~?)선사의 삶과 구도기를 탄생 100주년을 맞아 처음으로 발굴ㆍ추적한 책입니다. 일타 큰스님께서도 생전에 법문과 책자에서 자주 인용한 제선선사의 ‘가야산 호랑이를 감화시킨’ 발보리심 이야기, ‘개가 아들로 태어난 인과응보’ 출가인연 이야기 등은 불자들에게도 전설처럼 회자되는 일화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비범하면서도 도전적인 제선선사의 구도심과 인과응보, 출가인연, 초인적인 수행 이야기가 불교신문 박부영 기자의 다양한 수행현장 탐방과 증언 채록, 관계자 인터뷰 등을 통해 되살아난 것입니다. 박부영 기자는 이 책의 집필 의도를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올해 탄신 100주년을 맞아 제선선사의 삶과 행적을 처음으로 소개했다. 이는 100주년을 맞는 기념비적 의미에다 선사의 삶을 문자로 남김으로써 공부인들에게 귀감이 되고자 하는 바람에서다. 오늘날 한국불교의 발전은 수많은 고승들의 생사를 건 공부와 끝없는 정진 덕분이다. 그 가운데서도 제선선사의 수행력은 추종을 불허하고 동서고금에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극적이며 인간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정진력을 보여준다. 많은 공부인들에게 가장 큰 장애는 의심이다. 인간이 할 수 있을까, 과연 깨달음의 경지를 성취할 것인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에 의심을 한다. 그 점에서 선사의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선 경지는 모든 공부하는 수좌들에게 희망과 등불을 밝혀준다.”(133p)
더불어 이 책에서는 문을 자물쇠로 채우고 수년간 독방에서 목숨을 걸고 용맹정진 하는 ‘무문관(無門關) 수행’의 의미와 역사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원철스님(前 조계종 불학연구소장)의 무문관 수행에서 바라본 명쾌한 간화선 담론과 김성우 비움과소통 대표(前 현대불교신문 기자)의 무문관 수행의 현장을 조명한 알찬 이야기도 소개됩니다. 한 구도자의 끊없이 초월하는 향상일로(向上一路)의 목숨을 건 구도행은 삶의 전환기에 목적의식이 희미한 중ㆍ장년층은 물론 원력도 없고 정신이 나약한 이 땅의 아들, 딸들에게 분명한 인생관과 세계를 향한, 일체 중생을 향한 큰 원력과 도전정신을 일깨우리라 확신합니다.
석영당 제선선사 행장(行狀)
탄생 -1912년 제주도 제주시 연동(蓮洞) 312번지에서 부(父) 이계춘, 모(母) 부호인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 속명은 이기부(李奇富).
학력 -1920년 4월 제주 보통학교 입학 -1926년 3월 제주 보통학교 졸업 -1926년 4월 일본 오사카(大板) 명성중학교(明星中學校) 입학 -1931년 3월 명성중학교 졸업 -1931년 일본 도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입학
득도(得度) -세상의 무상(無常)을 느끼고 출가, 금강산 묘향산 지리산을 거쳐 해인사에 입산. -1937년 5월15일 경남 합천 해인사에서 윤포산(尹飽山) 화상을 은사(恩師)로 득도(得度). 당호(堂號)는 석영(夕影), 법명(法名)은 제선(濟禪).
수계(受戒) -1938년 4월 8일 해인사에서 백경하(白景霞) 화상을 계사(戒師)로 사미계(沙彌戒) 수계(受戒) -1941년 4월 8일 해인사에서 백경하 화상을 계사로 비구계(比丘戒) 수계 -1941년 4월 8일 해인사에서 백경하 화상을 계사로 보살계(菩薩戒) 수계
수행이력(修行履歷) -1938년 8월~1940년 10월 해인사 강원 사교과(四敎科) 수료 -1940년 10월~1944년 3월 해인사 강원 대교과(大敎科) 수료 -1937년 5월부터 해인사에서 수선안거하여 12안거(安居) 성만(成滿) -1949년 4월부터 전북 진산(鎭山) 태고사에서 수선안거 5안거 성만 -1954년 4월부터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 북대에서 수선안거 2안거 성만 -1957년 10월부터 충남 논산 관촉사(灌燭寺)에서 수선안거 5안거 성만 -1957년 논산 관촉사 주지 부임, 정화 불사 총력. -1962년 조계종 중앙종회 초대 중앙종회의원 -1963년 경남 남해 보리암 좌선대 안거, 부소대에서 법왕대 토굴 건립 정진. -1965년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無門關)에서 6년 결사(結社). -1971년 5월 5일 6년 결사 해제(解制) 후 무문관 퇴관(退關) 하시고 지금까지 선삼매(禪三昧) 행각.
본문 중에서…
◇… “1942년 늦가을. 백련암에 안거하며 정진했던 제선스님은 공무로 관청에 갔다가 밤늦게 백련암으로 귀사(歸寺)하던 길에 큰 호랑이가 자신의 갈 길을 막고 있었다. 잠시 깜짝 놀라 어쩔 줄 모르다가 바로 정신을 가다듬고는 대호(大虎)와는 불과 한 칸을 사이로 마주앉아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가야산 주인이 너인가, 나인가!’ 좌선삼매에 몰입하였다. 한참 뒤 살펴보니 앞다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잡아먹을 듯 무섭게 앉았던 대호가 참회하듯 앞 다리를 꾸부리고 꿇어 앉아 있었다. 스님의 수행력에 축생의 사나운 짐승도 감화되어 심성이 맑아진 것일까! 대호의 선근을 확인한 스님은 가까이 가서 대호의 등을 어루만지며 ‘발보리심(發菩提心) 하라.’는 설법을 하고는 유유히 백련암에 도착하였다.” -〈해인사지(海印寺誌)〉 (7p)
◇… 동네 사람들이 부친의 마지막 모습을 전해주었다. 부친은 ‘일본에 있는 기부를 보기 전에는 절대 갈 수가 없다’고 해서 염(殮)을 하지 않고 오랫동안 병풍 뒤에 시신을 모셔놓고 있던 차였다. 대문을 박차고 들어온 기부는 병풍을 제치며 “아버지 기부가 돌아 왔습니다” 하며 울면서 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믿지 못할 일이 일어났다. 병풍 뒤에 누워 있던 부친이 벌떡 일어나 앉으면서 아들에게 말을 하는 것이었다. “잘 왔다. 지금 내 머리 위에 두 사자가 와서 빨리 가자는 것을 자식 보고 가겠다며 내가 통 사정을 해서 이렇게 버티고 있었다” 하니, 기부는 “어떤 놈이 우리 아버지를 데려가려 왔느냐” 하고 호통을 쳤다. 기부를 본 아버지는 “이제 나는 여한이 없다” 하며 편안히 눕고는 세상을 떠났다. 이 일화는 부친의 자식에 대한 사랑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초인적인 정신력을 보여준다. (21p)
◇… 남들은 그토록 집착하는 생(生)을 미련 없이 던져버렸는데, 그것도 천길 낭떠러지 위에서 떨어졌는데, 적어도 목숨을 부지하더라도 어딘가 깨지고 부러져 제대로 사는 것이 불가능해야 하는데, 띠끌만큼도 손상을 입지 않았다. 웃는 수 밖에…. 새롭게 놓인 삶을 마주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웃음 밖에 없는지 모른다. ‘아, 이런 운명을 갖고 태어났구나. 이왕 살려고 나왔으니 멋지게 살아보자’는 생각을 갖고 기부는 몇 시간이 걸려 산을 내려왔다. (32p)
◇… 마지막 날이었다. 사시(巳時)에 회향하는데 그 날 아침까지 아무런 일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사시마지를 올리고 염불을 하면서 앉아있는데 잠깐 사이 비몽사몽(非夢似夢)의 경지에 젖어들었다. 광야를 걷고 있는데 아주 위험한 바위굴이 나타났다. 어떤 동자가 한 명 구름 속에서 나타났다. 분명 아들이었다. 이름을 부르면서 달려갔다. 하지만 달려가면 그 만큼 물러나고 더 빨리 가면 또 더 빨리 물러나기를 거듭하다 결국 굴에 다다랐다. 아들의 모양이 확실하게 나타나는 듯 하더니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뒷모양이 변하더니 개꼬리 모양을 하고 있다. 일본에서 버렸던 그 개다. 홀연히 사라졌다. 그랬다 개가 원귀(寃鬼)가 되어 아들로 환생해서는 온갖 애를 태우고는 간 것이다. 이 무슨 인연인가. 기부가 일본 유학 때 삼촌의 명으로 그가 버렸던 개가 그토록 사랑했던 아들로 인연을 맺어 가슴에 대못을 박고는 떠났다 한다. (37p)
◇… 윤치영이 비서실장 시절 이승만 대통령에게 산중에서 생활하는 조카가 있는데 범상치 않다며 슬쩍 면담을 권한다. 그렇게 해서 경무대에서 이승만을 만난다. 포산은 이 대통령을 만나는 자리에 주머니가 큰 조끼를 입고 갔다. 이 대통령이 젊은이가 무슨 큰 조끼를 입고 있는가 의아해 하자 조끼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서 “이 주머니에 역대 조사와 삼세제불을 다 집어 넣고 한 주머니에는 천하 영웅을 넣었는데 각하도 내 주머니에 있습니다” 하고 일갈한다. 그러자 이 대통령의 안색이 싹 변했다고 한다. 대통령과 헤어지고 나오면서 포산은 “아이구 이승만도 안되겠다”며 실망했다고 한다. (44p)
◇… 제선선사는 생각했다. ‘법상에 앉아 천하를 호령하더라도 실질적으로 얼마나 힘을 갖췄는지 테스트 해보자.’ 그러고는 쌓아놓은 나무위에 올라가 자화장(自火葬)을 했다. 불은 맹렬이 타올랐지만 선사를 태우지는 못했다. 그가 생각한 대로 물에 들어가도 물에 빠지지 않고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 그런 경지를 보였다. 정말 믿을 수 없는 광경이다. 어떻게 불에 타지 않을 수 있는가. 그런데 아차 하는 순간 마음이 열리고 말았다. 불현듯 ‘아, 내가 불구덩이 위에 앉아 있는데 왜 뜨겁지 않은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바로 그 순간 마음이 열렸다. 일심삼매(一心三昧)로 앉아 있어야하는데 생각이 열리면서 곧바로 불길이 휘감은 것이다. (64p)
◇… “중국에 사관(死關)이라는 데가 있어서 한번 들어가면 거기서 견성을 해서 나오든지 죽든지 자기 관을 만들어 놓고 정진하는 곳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는 그런 곳이 없는데 우리나라에도 그런 식으로 공부하는 사람이 많아요. 효봉스님도 금강산 신계사 미륵암에다 못을 쳐놓고 출입을 안 하고 3년동안 수행하셨고 경허스님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고 영원 조사도 상좌를 제도하려고 금강산 영원암에 가둬놓고 밥을 갖다 주고 그리했다는 말이 있거든요. 그런 것으로 보아서 스님들이 그런 곳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희망을 더러 해요. 누가 그런 곳을 만들었으면 좋겠는데 하는 사람이 없어서 할 수 있다면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런 것을 구상하게 된 것이죠. 그래서 중국의 사관 같이는 할 수 없고 우리는 부처님의 6년 고행과 같이 6년을 수행하자 했죠.” (88p)
◇… “근세 선지식이 법상에 앉아 타불(打佛) 타조(打祖)하는데 실제의 힘이 있어야지 말로는 누가 못하나. 중생이 궁금해하는 것을 부처님은 다 보여주셨다. 극락이 있는가 물으면 있다 하며 손으로 허공을 가리키며 극락을 보라 하셨다. 지옥이 있느냐 하면 지옥을 가리키며 지옥고를 받는 중생을 보여주셨다. 실제로 보고 듣고 체험을 느끼니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이것이 부처님의 힘이다. 부처님과 같은 실제 힘을 기르기 전에는 중생에게 나서지 않겠다. 이것을 왜곡한 이는 (부처님께서) 신통과 조화를 부리는 것으로 착각한다. 이사(理事)에 걸림이 없는 실력을 갖추는 것이 부처님 제자이다. 그 힘을 기르기 전에는 나오지 않겠다.” (104p)
저자 소개
박부영 한국외국어대 서반아어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를 수료했다. 불교신문 편집국장을 역임하고 현재 불교신문 전략기획실장을 맡고 있다. 저서에 《불교풍속고금기》 《조계종단 50년사》가 있다.
원철스님 해인사로 출가했다. 해인사 은해사 실상사 법주사 동국대 등에서 경전과 선어록을 연구하고 강의했으며, 문수법회 등 각종 법회를 통해 경전의 대중화 현대화에 일조하였다. 또 각종 언론매체에 대중성과 전문성을 갖춘 글쓰기를 통해 대중과 소통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해인사 문수암에 머물고 있다.
김성우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졸업. 현대불교신문 취재부장을 역임하고 현재 도서출판 비움과소통 대표를 맡고 있다. 넷선방 구도역정(cafe.daum.net/kudoyukjung)을 운영하면서 페이스북(ID: 김성우)과 트위터(ID: kjk5555) 등 SNS를 통한 전법에도 힘을 쏟고 있다. 저서에 《문 없는 문 빗장을 열다》 《선답(禪答)》 《저 건너 산을 보라》 《선(禪), 있는 그대로 내려놓아라》 등이 있다.
목 차
발간사 : 생사거래(生死去來)가 여여하니 발보리심 하라
제1부. 《무문관》의 관점에서 바라 본‘조주무자’ 1. 프롤로그 2. 다시 왜 무문관 인가 3. 무문관의 현대적 부활 4. 과거 무문관 관련의 기록 몇 가지 5. 근대 효봉스님은 전형적인 무문관의 모범사례를 보이다. 6. 벽으로 막힌 수행공간 무문관, 그리고 공안집 《무문관》 7. 무문혜개 선사 행장 8. 공안집 《무문관(無門關)》 9. 무문관은 삼중의 관문이다 10. ‘조주무자’ 공안의 탄생 배경 11. 무자 공안의 탁월성 12. ‘무자’에 대한 몇마디 사족(蛇足) 13. 《벽암록》의 모순을 척파하다 14. 맺는 말 참고문헌 및 관계논문
제2부. 석영당(夕影堂) 제선선사(濟禪禪師)의 수행과 삶 1, 선사의 삶과 수행 1) 제주에서 가야산까지 - 출가 전후(前後) 제주에서 태어나다 일본 유학 부친의 죽음과 초인적 경험 개를 버리고 떠나온 일본… 결혼 아들의 죽음과 방황 금강산에서 생사(生死)를 초탈하다 인연(因緣)을 보다 2) 출가와 끝없는 정진 지리산 칠불암에서 포산 노사를 만나다 백련암, 태고사에서 수행 정진하다 오대산에서 자화장(自火葬)을 하다 관촉사 주지를 맡다 남해 보리암으로 가서 법왕대 토굴을 짓다 3) 무문관 결사 1964년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 개설 홍근ㆍ관응스님 함께 입방 문정영선사의 지원과 잇따르는 무문관 지원 수좌들 혜원 사제의 헌신적 후원 경산 총무원장의 무문관 입방 4) 선사(禪師), 홀연히 떠나다 1971년 도봉산을 떠나다 남은 사람들 무문관(無門關) 그후 2. 제선선사를 위한 이해 1) 생사초탈한 진정한 도인 2) 무문관 수행 전통 마련 3) 홀연한 떠남, 입전수수(入廛垂手)? 4) 선시(禪詩)를 통해본 선사의 사상 3. 글을 맺으며 석영당(夕影堂) 제선선사(濟禪禪師) 행장(行狀)
제3부. 생사해탈의 관문, 무문관 현장 엿보기 1. ‘문이 없는 관문’이란 무엇인가 2. 선(禪)의 출발점, 달마대사의 벽관(壁觀) 3. ‘나홀로 정진’의 원형, 토굴수행 4. 생사해탈의 관문, 사관(死關) 5. 우리 시대의 무문관 선원들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 계룡산 대자암 삼매당 제주 남국선원 설악산 백담사 무금선원 천성산 조계암 감포 무일선원 6. ‘지금 여기’ 삶의 터전이 무문관이다 관계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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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움과소통 원문보기 글쓴이: 푸른바다 김성우
첫댓글 종교의 좋은글 감사 합니다^^
아름다운 행복님 추운날이지만 마음은 따뜻한 주말되셨음 좋겠네요.
또한 내가 누구로부터 정말 필요한 사람. 그리고 괜히 생각나게 하는 사람.
언제나 활기참과 웃음을 주는 사람이 되시길 바라며 오늘도 행복 하십시요..
줄거운 토요일 오후 행복님 오늘도 좋은날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