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수필- 형효순 2편
가족 백일장
형효순(수필가)
막내손녀가 태어 날 때부터 꿈꾸어 오던 바램이 하나 있었다.
손자손녀 백일장을 여는 것이다. 아이들의 생각을 읽어보고 싶은 할머니의 소박한 행복이기도 하다. 솔직히 말하면 혹여 작가의 소질이 있는지 시험해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드디어 오늘, 그 꿈을 이루는 날이다. 장마로 어수선 하기는 하지만 우리 집으로 내려온 아이들은 천방지축 즐거우니 열어도 괜찮을 것 같아 공고장을 거실에 내걸었다.
갑자기 나붙은 방을 본 에미들이 손자들 보다 더 따지러든다.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 적어도 며칠 전 언제 백일장을 연다는 것은 미리 알려주어야 되지 않느냐며 항의 했지만 뭐 주최 측 마음이니 지들이 어쩔 것인가. 거기다 두둑한 상금?이 걸려 있으니.
원고지를 나눠주고 제목은 하늘, 땅, 꿈 중에서 산문 운문 공통으로 자유롭게 쓰라고 했다. 사회인이 된 큰손녀와 중학생이 된 손녀는 온라인으로 접수를 받았다. 싫다는 아이들이 없는 것을 보니 상금의 위력인가 자신감인가. 아무튼 재미가 솔찬하다.
세 시간 뒤 원고가 들어왔다. 남편과 심사를 시작했다. 한데 왜 이렇게 설렐까 가슴까지 두근거렸다. 마치 백일장에 원고를 제출하고 기다릴 때처럼. 이럴 때는 손자들이 열 명이면 더 좋겠다. 다섯 아이들 중 ‘꿈’ 둘, ‘하늘’ 셋 글속에는 아이들의 심성이 그대로 들어나 있다.
율이는 하얀 구름 몽실몽실 한 ‘하늘’은 재미없는 것이 없단다. 하늘을 훨훨 날아보고 싶은 마음, 밝아서 좋다. 지호의 ‘꿈’은 논리적이다. 꿈을 꾸지 않으면 게을러지고 하고 싶은 의욕도 사라지니 꿈이 마땅하게 있어야 한단다. 승훈이의 ‘하늘’은 재미있지만 변덕스럽기도 하단다. 아이들의 감정처럼 제법 하늘을 의인화 했다. 서린이의 ‘꿈’은 다정하다. 또 다른 내가 나를 살포시 잡아준다니 그 꿈은 조심스럽지만 확실히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은경이의 하늘은 무지개였다. 빨,주,노,초,파, 남,보 우리가족이 무지개란다. 어느 방향에서 보건 언제 어디서나 눈부신 무지개라니 참 좋다. 두 딸들도 참여를 했다. 둘 다 주최 측을 비판 했다. 상금으로 아이들 마음을 다치게 한다며 그 중 막내딸이 이렇게 세게 때렸다.
꿈
모두가 꿈을 꾼다.
형효순배 백일장 행운상
백일몽.
상금이 행운상, 행복상, 사랑상, 믿음상, 으뜸상, 순으로 쓰인 탓이다. 누구에게 행운상을 줄지 머리가 조금 많이 아프다. 발표는 개별통지에 상금은 계좌이체를 한다고 했다. 하루 동안 아이들은 행운상의 상금을 더 탐을 냈지만 제1회 백일장은 무사히 끝이 났다. 제2회 백일장은 어른들도 참가 시킬 참이다. 잠깐 햇살이 밝게 빛이 났다. 장마 중에 드러난 햇빛이 찬란하다. 아이들도 이렇게 내 인생에 빛이 난다. 이 세상에 살다간 흔적이 이만하면 장땡이다.
장 날
형효순
쪽파 달래가 머리를 빗고 단장을 했다. 두릅도 가지런하다. 여린 쑥을 다듬는 할머니의 거친 손이 더 없이 섬세하다. 오늘 저녁 누군가는 쑥국을 끊이고 도란도란 쑥으로 만든 음식 이야기도 한 상 차려지겠다.
곡물 전이 시끄럽다. 정작 살 사람은 가만히 있는데 팥이 좋네 안좋네 공연히 삼자가 끼어든 탓이다. 난전 옷가게 바지들이 봄바람에 춤을 춘다. 일 할 때 이 바지 하나만 입으면 바람이 저 알아서 다 지나 간다는, 아저씨의 너스레에 바람보다 나비가 먼저 따라올 것 같은 꽃무늬 바지 하나를 담아 넣는다. 아까부터 눈길을 주던 파프리카, 브로콜리, 체리도 샀다. 채소나 과일도 국적이 없어졌다. 하긴 베트남 댁이 오이를 사면서 덤을 얻는 애교가 나보다 더 능숙하다.
도다리 쑥국을 끓여 볼까 하고 어물전 앞에 섰다. 할머니는 여전히 걸걸한 목소리로 반기신다. 30대 후반이었다. 좁은 시장 길에 할머니의 점심 국수사발이 내 발에 걸려 엎어졌다.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는 할머니를 모시고가서 국밥 한 그릇을 사드렸었다. 그래서 단골이 되었고 가끔 국수를 함께 먹는 사이까지 되었다. 비가 억수로 내리던 어느 여름 장날, 할머니의 인생별곡을 듣게 되었다.
“열일곱 살에 지금 광한루 조짝 끝 그쯤에 찢어지게 가난헌 집으로 시집을 왔었제. 새엄니는 입 하나 던다는 식이였고, 허긴 우리 집도 쎄 빠지게 가난 혔으니께.”
가난은 친정보다 더했다. 시장 옆인지라 배추 잎을 주워 국을 끊여 먹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런데도 속없이 자식은 다섯이 생겨 그냥 저냥 살아가던 봄, 서방님이 공사판에서 사고가 나 손 써 볼 새도 없이 죽고 말았다. 남편 실수라고 보상도 받지 못하고 초상 치루고 난 뒤에 쌀은 딱 한말 남았는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만 바라보는 어린 자식들과 노망들어 똥을 싸는 시아버지가 저승사자보다 더 무서웠다. 차라리 죽어버릴까 하고 무작정 집을 나왔는데 어디선가 애기 우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어 돌아와 두 어 되 남은 쌀을 몽땅 물에 담가 그렇게 시장 한 귀퉁이에 떡 함지박을 놓았다.
“그려도 이듬해 시아부지가 돌아가셨지. 내게 다행인 것이 딱 둘 있었는디, 하나는 시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것이고 하나는 8살 딸이 맏이였던 것이었어. 고것한데 기어댕기는 막둥이까지 맺기고.”
장터 좋은 자리 차지하려고 머리끄덩이 잡는 것도 다반사였다. 그래도 살기가 팍팍하여 생선을 이고 시골로 돌아다니며 행상을 시작 했다. 앉아서 떡을 파는 것 보다 벌이는 좋았지만 시골행상은 돈이 아닌 곡식이 나오기 때문에 무거운 곡식자루를 이고 다니다 보니 관절에 무리가 와 다시 장으로 돌아와 생선을 팔게 되었는데 그게 벌써 50년이 훌쩍 흘러갔단다.
“책으로 꾸미만 열권도 더 쓸 말이 있제. 서방 죽던 날도 이렇게 비가 왔어. 실삼스럽게 오늘 따라 더 영감이 불쌍허고, 시아부지 돌아가셨을 때 얼매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던 내가 시아부지 보다 이십년도 더 살았응깨 저승에 가먼 빌고 또 빌 것이그만!”
살기위해 시아버지 죽음을 반겨야 했던 지난날들이 어찌 회한으로 남지 않으랴. 고생한 보람으로 잘사는 자식들은 제발 생선 장사를 그만 두라 말리지만 아직은 그러기 싫단다. 내가 97세가 되신 친정어머니에게서 호미를 빼앗지 못했던 것처럼 할머니의 자식들도 생선 함지박을 빼앗지 못하리라. 그것은 굴곡진 세상을 살아갈 힘 자체이니….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할머니의 이야기는 잦아들었다. 그 옛날 영화 같은 세상을 살았던 사람들 어디 이 할머니 혼자뿐이랴. 저마다 가슴 열어보면 소설책 서너 권 사연 안고 살리라.
오일장의 역사는 조선시대 말 삼남지방에서 생겨난 것으로 성종(1년)흉년으로 전라도 농민들이 흉년을 이겨내기 위해 각자의 물건들을 가지고 나와 장을 열었던 것이 시작이었다고 한·다. 당시 오일장은 경제적 해결을 위를 한 것이기도 하지만 서민문화의 집산지였다 만남과 정보제공의 장소였으며 그로 인해 다양한 장터 문화가 생겼다. 약속도 없이 고향사람, 친구를 만나 국밥 한 그릇, 막걸리 한 사발을 먹으면서 안부를 묻고 정을 풀어놓기도 했다. 남이 장에 간다고 하니까 씨나락 지고 따라간다고 할 만큼 어려운 생활에 꼭 필요한 물건들이 많았던 오일장.
우리도 장날이 좋았다. 아버지의 주머니에서는 큼지막한 줄무늬 알사탕이 나왔고 예쁜 꽃고무신도 나왔다. 해 저무는 냇가 방천길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던 기억이 아련하다. 큰애를 임신했을 때 남원 장에서 제일 큰 사과를 사왔다며 시아버님이 슬그머니 식구들 몰래 건네주시던 날도 남원장날이었다.
세월이 지나 이제는 풍속도 변하고 사고 파는 물건도 달라졌지만 나도 우리 부모님들처럼 여전히 장을 보러 나온다. 삶이 질박한 장터, 촌스런 것들의 다정함, 사람냄새 폴폴 나는 장날이 좋아서다. 어느새 장 가방이 무겁다. 돌아와 사온 물건들을 주섬주섬 풀어놓고 저녁준비를 했다. 쑥국 냄새가 진동을 한다. 한 숟가락 입에 넣자 도다리가 끌고 온 바다냄새까지. 시원하다.
*형효순 수필가는
전북 남원 출생. 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수필과 비평 으로 등단(2008년), 농어민신문사 편지부문동상수상. 남원생활개선연합회장,남원 향토문화 연구회장, 한국 농어촌여성문학회장 역임. 남원문학, 춘향문학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