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남터는 본래 노들 혹은 한자로 음역해서 사남기(沙南基)라고 불리었다. 새남터는 본래 서울시 용산구 이촌동의 철도 공작창 인근으로, 새남터 성당 남쪽 150~200m지점에 있었다. 일부에서는 그 위치를 원효로 4가 부근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새남터는 이 지역이 북쪽 한강변의 노들 나루터 인근에 위치한 낮은 모래 언덕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조선 초기부터 군사들의 연무장과 국사범과 같은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이용되어 왔다.
새남터가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로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1801년의 신유박해 때부터였다. 즉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야고보) 신부가 의금부에서 군문효수형의 판결을 받고 이곳으로 옮겨져 5월31일(음 4월 19일) 처형당함으로써 이곳의 첫 순교자가 된 것이다. 당시 주문모 신부의 머리는 장대에 매달렸고, 그 시신은 닷새 동안 백사장에 버려졌다가 군사들에 의해 몰래 이장됨으로써 찾을 길이 없게 되었다.
이후 새남터는 성직자들을 비롯하여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신자들의 처형장이 되었다. 우선 1839년의 기해박해 때는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Imbert, 范世亨, 1796~1839, 라우렌시오) 주교, 모방(Maubant, 羅伯多祿, 1803-1839, 베드로)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1803~1839, 야고보) 신부가 9월 21일(음 8월 14일)에 주문모 신부처럼 군문효수형을 받아 순교하였고, 이어 1846년 병오박해 때는 한국인 최초의 성직자 김대건(金大建, 보명 芝植, 1821~1846, 안드레아) 신부가 9월 16일(음 7월 26일)에, 현석문 가롤로가 9월 19일에 역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리고 1866년의 병인박해 때는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1814~1866, 시몬) 주교를 비롯하여 브르트니에르(Bretni´eres, 白, 1838~1866, 유스토), 볼리외(Beaulieu, 徐沒禮, 1840~1866, 루도비코), 도리(Dorie, 金, 1839~1866, 헨리코),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德老, 1828~1866, 미카엘), 푸르티에(Pourthi´e, 申妖案, 1830~1866, 가롤로) 신부 등이 정의배(丁義培, 1795~1866, 마르코)와 우세영(禹世英, 1845~1866, 알렉시오)과 함께 3월 11일에 군문효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처럼 새남터에서는 모두 14명의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또한 새남터는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순교한 성직자 14명 중 11명이 순교하신 곳이며, 이 11명 중 8명과 교회의 지도급 평신자 3명 모두 11명이 1984년 5월 6일에 시성됨으로써 이곳은 한국의 대표적 순교 성지가 되었다.
■ 순교자
성모상 위치가 주문모 흉상 옆으로 옮겨져 있었다.
새남터 기념관 입구
새남터 기념관으로 내려가는 계단
기념관 내부는 사진 촬영 금지구역이다.
◆ 새남터 기념관(2006. 9. 3 축성)
서울 새남터 성당은 2006년 9월 3일 교구장 정진석 추기경 주례로 ‘천주교 순교성지 새남터 기념관’ 축복식을 가졌다. 새남터 성당 지하 100여평 공간에 마련된 ‘새남터 기념관’은 4개 공간으로 나눠 꾸며졌다.
○ 도입공간 및 상징의 장 : 새남터 성지 역사와 103위 성인 성화 등 전시
○ 추모의 장 : 새남터에서 순교한 김대건 신부 등 성직자 11인의 흉상과 부조 설치
○ 전시 공간 : 천주교 수용과 창설, 박해, 순교의 과정을 그래픽과 유물 등을 통해 전시
○ 체험 및 교육공간 : 조배실과 다목적 영상실을 설치, 신자들이 순교 성인에 대해 묵상 기회 제공
야외 구유
새남터 성지 전경
글 / 홈피에서 옮김
찾아가는 길 - 왕십리역에서 중앙선으로 환승 서빙고역에서 하차
1번 출구로 나와 2016번, 3012번 버스를 타고 이촌2동 대림아파트, 새남터 성지 앞에서 하차
성지에 갈 때 도곡역에서 3012번 버스를 타고 가도 됨
첫댓글 수고많았습니다.
고맙습니다. 갯벌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