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랫말에서 친구들은 아주 많았던 것 같다.
아직도 만나는 소맨을 비롯하여, 호철이 태석이, 장철(콜킵퍼 하던 친구) 누군가?, 돼지, 성남 중학교 친구들 , 영웅이와 또 한명이 있는데 아버지가 큰 고물장사하시던, 영웅이집 가출 할때 같이 같이 가출한 친구.... 소맨님 연락 좀줘요....
영등포 국민 학교에서 체력장 연습 할때 소맨님 말로는 당시 스케이트 선수 이영하가 소맨님과 스파링 파트너로 하였다고,하더군요...
당시는 고등학교 입시때 체력장 시험이 있었다.. 국가에서는 공부를 먼저 하고 체력도 보강하라는 취제인데, 우리는 공부보다는 체력을 더욱 열심히 한 것 같아요...
그렇게 시간을 흘러 고등학교 입학시험 철이 돌아 왔다.. 그당시 몇군데를 시험을 보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모두 떨어지고는 갈때가 없었다.. 그래도 자존심은 있어 재수 하겠다고, 큰 소리를 치었지만, 하루는 어머님께서 고등학교가면 입으려고 미리 사둔 교복을 챙겨 주시며 같이 가자고 했다.. 아니 검정 교복에 아무것도 붙어있지 않은 교복을 입고, 뱃지 없는 모자는 가방에 찔러 놓고 집을 나와 철도 건널목을 건너 문래동에서 오류동 가는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같었다..
항상 문래동을 나오면 서울로 가는 방행이었지 이렇게 아버지와 낚시가는 방향은 어무이랑은 처음 타보는 시간 이었다..
함참을 가서 종점에서 내려 하염없이 걸어서숲속에 이상한 학교를 가는것 이 아니겠는가.
그곳에서 교장이란 사람이나와 우리 모자를 마중 하면서 칙사 대접을 하고, 배웅까지 하는게 아니겠는가.
다음날부터, 어제와 같은 복장으로 그곳을 다닌 기억이 난다.. 지금생각 해보면 오류동 지금 우신고등학교 근처에 있는 전수 학교엿든 모양이다. 한 일주일을 다니것 같은데 도저히 달닐수없어 그냥 나가질 않았다... 그당시 나의 기분도 그리 좋치 않았을 것이고, 집인분이기도 영 아니었을것으로 생각 된다. 나중에 듣기로는 1년치 등록금을 모두 미리 선납 하였나 그렇타고 들었다.
그곳의 분이기를 말하면 아침에 등교길은 생각이 나지 않치만.. 오후에 통학길에는 길가에 담배 피우는놈 연애 짖하는 여자아이며, 당시 시골의 학생들과 아주 똑같은 생활을 볼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 된다.
그래도 난 서울 놈인데....
형이 있다는것은 같은 같은 나이의 동료들과는 옷을 입고 다니는 것부터 다르게 입는다.
대게 형 있으면 2년에서 3년 터울이 있기 마련이다. 연년생이라면 동생이 형의 혜택을 그다지 보기가 어려울것이다.
나에 이야기를 먼저 하겠습니다.. 중학교시절 방과후나 휴일날 사복을 입을 때면, 대게 형으로부터 물려 받은 옷들을 입고 다녔다.
나또한 형님과는 2년의 터울이 있어 형님들의 패션을 그대로 사용 하는것이 아주 많은 사례이다.
막말로 사복을 입으면 같은 나이에 친구보다는 노숙하게 보였죠. 또한 형님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라므로 또레보다 아는것도 많아진다.
나의 친구들도 거이가 형님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소맨님의 형님은 모랫말의 엘비스 라고나 할까 할정도로 패션 감각이 뛰어낮다. 소맨을 처음 만난 인상은 당시로는 굉장히 멋진 패션이었다.
여름에 만난 패션을 보자. 하의는 학생복을 입긴 입었는데 무릅을 꽉끼고 종아리는 헐렁 하다 못해 휘감길정도의 바지통을 가진 판다롱 바지를 입구 있었고, 상의는 날씨가 더운 관계로 긴팔 런링구에 머리는 박박, 그위에 성남중 뱃지가 달린 모자를 쓰고 다녔다.
모자를 얼마나 풀을 매겼서 다리미질을 하였는지 이해를 돕고자 한다면, 요즘 남북회담에서 나오는 북한군 장교 모자와 흡사 하였다.
그를 놀려 줄려구 모자를 머리에서 떨어트리면, 굉장이 화를 내었고. 그 모자를 신주 단지 처럼 모셨다.
그러한 패션은 해남이 형에서부터 이어온것이라 생각 된다..
당시로 돌아가보면 해남이 형이 지금에서야 환일 고등학교 당시는 배명고등학교였든가 기억이 잘 안나네...신촌과 아현동 그곳에가면 고삐리 여러시 모여서 담배 꼬나물고 서있는 모습을 종종 보개 된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바지는 학생복에 상의는 사복 입고 가방을 엽구리에 끼고 있거나 상위사복에 학교 모자를 아주 걸레처럼 만들어 쓰고 있는 친구 아주 천태만상을 볼수 있다...
첫댓글 글을 보니 곧 3편도 올라올 기세인데 주우욱 재미게 써주세요...ㅎㅎ
골키퍼 하던 친구는 꽃집하던 태식이 였을껄 태석이가 아니고 태식이.. 약간 발달 장애가 있던 친구...
기왕에 메주님이 글을 썼으니 나도 많은 생각이 나네요..
우린(나, 메주, 미국간 영웅이) 셋이서 고등학교 입학원서 가지고 어지간히 돌아다녔던 기억이새록새록
마지막 3차 시험은 성남에 있던 성남 서 고등학교 정말 비참한 생각이 많이들었던 혼자라면 절대
보내기 힘든 시절... 세상은 왜이렇게 삭막할까? 인생최초의 큰 좌절을 격었던 시절 성남 공사장 함바에서
사먹던 국수는 왜이렇게 맛있었을까?
그 후 우린 모두 재수생의 길로 접어들었지만..
메주군과 영웅인 종로의 고입재수학원으로 난 개인교습하는 과외공부집으로..
약 일년을 각자의 길로 걸었습니다 어쪄다 몇달에 한번씩 얼굴보는 정도로 그렇게
우리들의 암흑기는 점점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그후 각자의 학교로 진학..조그만 꿈을 이루었습니다
그즘 메주네집은 모랫말에서 등촌동으로 이사를 하게 되어
자주 만나기가 어려워 졌지만 우린 매주 토요일 방과후 광화문
금잔디 분식에서 만남을 갖지요.. 그리운 그 시절...
아버지의 타계로 우울해하던 소뒷다리맨, 매주 토요일 메주님과의 만남이
어떤 돌파구가 아니였나 생각이 드네요.. 그후 공부에 소홀해지기 시작하던
시기도 그때부터였던것 같아요..
지난일년은 참 열심히 공부만 했었는데..
고부완 담쌓고 친구들과 그 시절 서울의 고등학생들 마냥 종로니 명동이니
뻘뻘거리고 쏘다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