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수행이야기]〈81〉수행자에게 어찌 타인의 허점이 보이겠는가
출가자의 본분사
자기 자신이 명리를 추구하니
가진 자의 그릇됨이 보이는 것
“우리들의 일상 행위를 돌이켜 보라. 불법을 빙자하여 ‘나다’, ‘남이다’하는 상(相)을 내고, 명예와 이익만을 쫓으며, 욕망의 풍진 속에 빠져 도와 덕은 닦지 않고 옷과 밥만 축내고 있으니, 이런 그대들이 어찌 출가자라고 할 수 있으며, 출가의 무슨 공덕이 있겠는가? 슬프도다. 삼계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면서 속세를 벗어날 수행은 하지 않으니 육신은 한갓 남자 몸일 뿐, 그 뜻은 장부의 기개가 아니다. 위로는 진리의 길을 벗어남이요, 아래로는 중생을 이롭게 하지 못하는 것이며, 네 가지 은혜를 저버리고 있으니 진실로 부끄러운 일이로다.”
위 내용은 12세기 보조 지눌(1158~1210년)이 지은 <정혜결사문>의 일부분이다. 수백여 년이 흐른 즉금의 불교계를 따끔히 일갈하고 있는 말씀이다.
고려불교가 정치 사회와 밀접하며, 명리(名利)만을 탐할 때, 지눌이 당시 일으킨 정혜결사는 선종 입장에서 자각한 운동이다. 지눌은 우리나라에서 원효에 버금가는 분으로 그의 선사상이나 수행 가풍은 한국불교 선사상의 근간이요, 조계종의 연원을 이룬다. 그의 선사상은 800여년이 흐른 오늘날까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보조 지눌이 활동하기 이전이나 당시는 시대적으로나 불교사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고려 초기부터 승통이나 국사가 왕실의 가족이나 문벌귀족 출신들이 많았다. 비근한 예로 문벌귀족 출신 혜덕왕사 소현(韶顯, 1038~1096)은 왕권 사찰인 현화사 5대 주지였다. 이외 왕권 귀족과 친분 있는 교종 승려들은 세금을 면제받고, 토지와 농노를 겸병하며, 노비를 사유하다보니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에 무신들은 왕권과 문신들에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자연히 기득권의 옹호를 잃었던 승려들은 무신 정권에 반대하면서 살해당하는 일이 빈번했다. 한 마디로 승려들이 정치적인 노선을 걷고 있었다는 뜻이며, 승풍은 해이했고, 이권 다툼으로 부패한 승가였음을 반증한다.
인도 아쇼카왕 때도 출가 승려들이 계율을 함부로 하고, 안이하게 생활할 때, 교설의 확장과 승가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왕의 도움을 받아 장로들이 고군분투하였다. 중국에서 일어난 법난도 대체로 승려 내부에서의 자정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부처님 열반 후, 불교사를 볼 때, 어느 나라 어느 시대고 위기감에 처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그 원인은 승려들 각각이 자신의 본분사를 잊었기 때문이다.
지눌은 스스로 호를 목우자(牧牛子)라 하였다. 목우자란 '소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십우도에서 네 번째에 해당한다. 선사께서 스스로 목우자라 칭했던 것은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을 길들이고자 했던 구도심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수행자로서 본분사를 지킨 귀감이다.
승려로서 출가 본분에 충실하다면 어찌 타인의 허점이 보이겠는가? 자신이 명리를 추구하니까 명리를 가진 자의 그릇됨이 보이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서로를 헐뜯고 비방하는 것만은 아니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결국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승가 모두를 욕보이는 일이라는 점만 기억해두자.
명나라 때, 운서 주굉(1535~1615)도 당시 승려들이 명리를 탐하고, 수행을 멀리하는 이들을 경계하는 글들을 많이 남겼다. 주굉이 당시 승려들에게 일침 했던 내용 가운데 한편이다.
“명리를 면할 수 없는 것임을 알면 무엇을 기뻐할 것인가? 또한 자신이 얻었다고 해서 기뻐할 것도 없고, 남이 얻었다고 해서 시기할 것도 없다. 명리를 면할 수 없는 것임을 알면, 무엇을 시기하랴? 모두 숙생의 깊은 인연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니, 일체의 바깥 경계가 허공과 같은 줄을 알아서 이기고 지는 것, 영리하고 둔한 것에 마음을 담박히 하여라.”
정운스님… 서울 성심사에서 명우스님을 은사로 출가, 운문사승가대학 졸업, 동국대 선학과서 박사학위 취득. 저서 <동아시아 선의 르네상스를 찾아서> <경전숲길> 등 10여권. 현 조계종 교수아사리ㆍ동국대 선학과 강사.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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