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 -86
“신경 써 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런데 굳이 조건까지 붙일 필요가 있을까요?”
“예?”
전화기 너머에서는 예상외의 대답이 흘러나오자 전화기를 든 WOC 종목채택위원장의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니 그렇게까지 WOC에서 신호를 보내면 멈추면 되지, 그걸 막겠다고 현장에서 선수등록을 하겠다니 포기를 모르는 군요. 그 열정이 대단합니다.”
“예, 맞습니다. 포기하지 않네요. 그렇다고 우리 WOC에서 무조건 경기를 중단하라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중단결정이냐 승인이냐 우리 위원들간에 의견충돌이 많았습니다. 결국 조건을 붙여 승인을 내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그래요? 나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조건이 뭡니까?”
“예, 일 주일이란 주어진 시간에 참가하는 모든 선수를 등록시키라는 거죠. 한국측에서는 현장에 키오스크를 설치해서 하겠다는데, 물리적으로 시간이 부족합니다.”
“예~ 괜찮군요. WOC도 필요한 명분을 얻을 수 있겠군요. 무조건 제재만 할 수는 없지요. 그러면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좋은 방법입니다.”
“예, 바로 그겁니다. 규칙을 어긴 건 한국입니다. 우리 WOC가 최소한의 배려를 하는 거죠.”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위원장님, 우리 측 요청에 따라 일이 벌어지지 않았습니까? 정식종목 채택은 이미 물 건너간 사안이고, WOC규정을 어기고 한국에서 열리는 전국대회도 막으려는 거죠.”
“예, 그렇죠. 그런데 왜 그러십니까? 조건이 너무 약합니까?”
“아닙니다. 좋습니다. 그런데 만약 한국이 조건을 맞춘다면 어쩌죠?”
“예? 그럴 리 없습니다. 제가 아는 한국족구협회가 그렇게 막강한 조직은 아닙니다. 자체적으로 키오스크 시스템도 확보하지 못 할겁니다. 한국체육회에서도 쉽게 지원하지는 못할 겁니다. 우리 WOC 눈치를 봐야 하거든요.”
“자신 하시는군요. 예, 위원장님을 믿습니다. 우리는 한편입니다. 아시죠?”
뼈 있는 한마디는 빼 놓지 않았다. 그들의 절대적인 지원은 반드시 필요했다. WOC도 굳이 조건까지 붙이며 한국을 건드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지금 통화하는 상대방은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굽히지 않고 있었다.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는 선례도 필요했다. WOC의 권위와도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했다.
“솔직히 우리는 이번 건에 큰 상관이 없습니다. 족구가 WOC 종목으로 채택되지만 않으면 됩니다. 하지 마라면 안 하면 되는 것을 물고 늘어지는 한국이 잘못된 거죠.”
“예, 맞습니다. 이번 건은 우리 WOC가 이대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런데 준비하시는 계획은 차질 없는 겁니까? 솔직히 족구의 종목채택은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조만간 발표를 할 예정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러시죠?”
“아니…… 예감이 안 좋아서요. 서두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계속 드네요. 한국은 마음먹은 일은 죽어도 해 내는 나라입니다. 그걸 아셔야 합니다. 내년까지 절대 기다리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이번 조건부 승인 건도 마음에 걸리고요.”
“예,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곧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때도 힘이 되어 주셔야 합니다.”
“그럼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WOC는 당신들 편입니다.”
전화기를 내려 놓은 위원장은 한 시름 놓은 듯 편하게 의자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하지만 걱정이 사라진 것만은 아니었다. 알 수 없는 저들의 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한국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사태는 겉 잡을 수 없이 커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국은 모르고 있었다.
□ D. -85
족구협회 임시 임원회의가 소집되었다. 형식적이지만 한국체육회에서는 WOC의 권고를 받아들여 예선전 중지를 요청해 왔다. 밀어 부칠 수도 있었지만 WOC의 관계를 고려한다면 한국체육회의 결정은 당연한 결과였다.
“회장님, 예선전을 중지하면 모든 스케줄이 엉망이 됩니다. 스케줄만 엉망이 되는 게 아니라 선수들에게도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도 예선전 스케줄보다도 선수들이 걱정입니다. 프로선수가 아니기 때문에 모두 생계활동을 하고 있어 일정변경은 벌어지면 안됩니다.”
기존의 선수들은 대부분이 동호인 모임이었다. 다른 스포츠의 프로선수들처럼 운동에만 전념하는 전문 선수들이 아니었다. 특히 마을단위 예선전을 펼치다 보니 그 문제는 더 심각하게 다가왔다.
“그러면 한국체육회의 권고를 무시하고 예선전을 그대로 진행하시겠다는 겁니까?”
집요한 질문들이 이어졌다. 한국체육회 산하단체로서 그들의 권고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예선전을 중단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결정을 지어야만 했다. 한국스포츠를 대표하는 한국체육회와 WOC의 갈등이라는 사상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사님들 그리고 지방 협회장님들, 그래서 지금 급하게 회의를 소집한 겁니다. WOC에서 예선전 중단을 요청해와서 우리 한국체육회에서 며칠 전 다시 의견을 보냈습니다. 지금 시간이 오후 4시니까 WOC가 위치한 스위스는 오전 9시입니다. 오늘 오전 중으로 최종 답변이 올 겁니다. 그에 맞춰 우리는 결정을 해야 합니다.”
“아니 그런데 왜 한국체육회에서 연락을 합니까? 물론 우리가 산하단체지만 우리가 직접 연락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맞아요. 우리 협회에서 직접 연락을 해야죠.”
지방 협회장들이 격앙된 목소리로 기찬을 조여왔다. 그들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족구협회에서 직접 그들과 소통해야 하는 것이 맞는 논리였다.
“맞습니다. 그런데 잘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 족구협회를 축구협회나 야구협회처럼 큰 조직으로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몇 명의 인원으로 꾸려 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해외부문을 담당할 새로운 임원이 필요하다고 전에 말씀 드렸고요……”
기찬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항상 미래를 준비해야 하지만 눈 앞에 보이는 것만 바라보는 태도에 큰 실망을 하고 있었다.
“아무튼 잠시 휴정하겠습니다. 제가 한국체육회와 통화해 보고 다시 열겠습니다. 밖에 커피하고 차를 준비해 놓았으니까 드시면 될 겁니다. 10분 뒤 다시 회의를 재개 하겠습니다.”
기찬은 회의실을 빠져 나왔다. 대외적인 업무도 중요하지만 내부 회의가 그를 더 지치게 하고 있었다.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지만 기찬은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이사님, 아직 연락 없습니까?”
“아직이야. 지금 시간이 오전 9시니까 곧 연락이 올 거야. 제발 좋은 소식이 와야 하는데……”
“그러게요. 그런데 왕인베스트 진 대표가 자신 있게 승인이 나올 거라 했는데, 분명히 그렇겠죠?”
“글쎄…… 중국 특징이 뻥을 잘 치는 거라 100% 신뢰할 수는 없지만, 진 대표는 우리한테 잘 보여야 하거든. 뻥은 아닐 거야.”
“알겠습니다. 소식 도착하는 대로 바로 연락 주십시오.”
기다림이 항상 힘들었다.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은 기찬은 다시 회의실에 들어섰다. 임원들과 지방협회 회장들은 삼삼오오 모여 그들만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 D. -84
“이사님, 공문이 도착했습니다!”
한국체육회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출력된 전자메일 사본을 들고 붉게 상기된 얼굴로 최 이사에게 다가왔다. 서둘러 사본을 받아 들고 읽어 내려가는 최 이사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게 뭐야? 일 주일 안에 선수등록을 마치면 대회를 승인 해 주겠다고?”
“예, 일 주일이란 조건을 붙였습니다. 그래도 다행 아닌가요?”
“글쎄…… 최악은 아니니까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지. 추가 내용은 없는 거야?”
“예, 없습니다. 그냥 형식인 거 같기도 하고……”
“그럴 수도 있겠지. 수고했어.”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최 이사는 곧 바로 기찬과 통화를 시작했다.
“그래, 최악은 아닌 거 같아. 일 주일이면 충분하잖아?”
“예, 다행이네요. 그런데 진 대표가 얼마나 빨리 단말기를 공급하냐가 중요하겠죠.”
“맞아. 그건 내가 확인해 볼게. 그리고 행정안전부하고 인증기관에 개인 인증에 협조해 달라는 공문을 우리 체육회 이름으로 발송할게. 족구협회가 하는 것 보다 우리가 하는 게 낫지.”
“예, 그러네요. 여러모로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 예선전은 계속 진행해도 될 거야. 체육회장님도 어떻게든 예선전이 진행되어야 하는데 걱정하시더라고. 내가 얘기하면 되니까 문제 없을 거야. 체육회도 족구협회 편이야.”
“예, 압니다. WOC와의 관계 때문에 그러신 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 고마워.”
“예, 예선전 현장에서 현장등록 마치고 바로 경기를 진행해야죠. 그런데……”
“그런데 왜? 다른 문제라도 있어?”
“그게 아니라, 현장에서 선수등록을 하잖아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래, 좋은 기회야. 다 알고 있는 사실 아니야?”
“예, 모두 알고 있죠. 그런데 이왕 선수등록 하는 거니까 참가선수만 할게 아니라 참관하러 온 사람들 모두다 선수로 등록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뭐? 모두다 선수로 등록한다고?”
“예, 선수로 등록하는데 조건은 없잖아요. 우리 협회에서 승인만 해주면 되는 건데요. 솔직히 무슨 일이든 등록절차가 어렵지 않습니까? 이번 기회를 활용해야죠. 한국체육회 입장에서도 큰 문제는 없겠죠?”
생각하지도 못한 발상이었다. 기찬은 많은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종목이 그렇지만 선수등록은 일부 제한된 선수들에게만 한정된 일종의 특권이었다. 이 특권을 모두에게 나누어 준다는 생각은 쉽게 할 수 없었다. 만약 이렇게 선수등록이 이루어 진다면 그 이후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다. 국민 대부분이 선수인 스포츠 종목이 탄생하며 기찬이 그토록 바라던 스포츠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만들어지게 된다. 세계 스포츠사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사건이 될 수도 있었다.
“하~ 미치겠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했어? 그런데 이건 내가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아. 내가 체육회장하고 논의해 볼게.”
경기를 치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에서 한 순간 반전이 일어났다. 뒤지고 있던 승부가 한 번에 뒤집어 지며 끝날 수도 있었다. 최 이사의 심장도 거칠게 뛰고 있었다. 그 누구도 생각해 보지도 못한 엄청난 시도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설 연휴 잘 마무리 지으시고, 내일부터 다시 시작입니다.
화이팅!!
넵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