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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 하나님의 사랑을 바로 알고,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자!
분류 : 하나님의 사랑
지구에는 수십 억이 되는 많은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동양인, 서양인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마는 이들은 모두 다, 나라가 다르고 사용하는 언어도 다릅니다. 비록 그들의 인종과 언어가 다르다 할지라도 세계가 통할 수 있는 마음의 공통어 하나가 있다고 합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인종과 언어의 장벽을 넘어 인류를 하나로 묶어 주는 위대한 힘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사용하고 있는 말 중에 사랑이라는 말보다 더 좋고 아름다운 언어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랑을 그저 좋기만 하고 달콤하기만 한 것인 줄 알고 있지만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누군가 이런 사랑을 원한다면 그 사람은 이기적인 사랑을 가지려는 사람이요, 온전한 성서적 사랑은 아닙니다.
온전한 사랑이란 어떤 것입니까? 때로는 슬픈 눈물을 흘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아픈 마음의 상처를 입을 때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버리는 희생이 있어야 하고 고통이 있어야만 합니다. 희생이 있되 조건 없는 희생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실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그 중에 우리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은 정말로 위대합니다. 먹을 것이 생기면 당신은 배가 고파도 자식의 입에 넣어 주고, 혹 남편은 버릴 수 있어도 자식만은 버리지 못하는 것이 어머니의 사랑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1985년 3월 17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중학교 3학년 [경애]라는 학생이 엄마 아빠와 함께 도봉산에 등산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디선가 소스라치는 긴급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바위가 굴러 온다." 얼핏 뒤를 돌아본 어머니는 깜짝 놀랐습니다. 거대한 바위가 자기 딸 경애를 향해 마구 굴러 오고 있었습니다.
그 때 어머니는 자기의 온 몸을 날렸습니다. 연약한 몸으로 딸의 방패를 삼고 딸을 힘껏 밀쳤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어머니는 바위에 눌려 그 자리에서 운명하고 말았습니다.
한 어머니의 고귀한 사랑은 딸의 생명을 건져 주었고, 사랑하는 딸을 위해 대신해서 목숨을 버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어머니의 사랑을 보십시오.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은 끝이 없고 한이 없으며, 목숨도 주저하지 않는,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어머니의 사랑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사랑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 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어머니가 젖 먹는 자식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 어머니가 자식을 잊는다 해도, 나 여호와는 너희를 결단코 잊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사랑을 어머니의 사랑과 비유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아가"서는 '노래 중에 노래'라는 뜻으로,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의 사랑을 노래한 책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술람미 여인은 성도를 의미하고, 솔로몬은 하나님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8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라고 했는데, 이것은 나를 찾기 위한 애절한 주님의 음성입니다.
아 2:8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 오는구나"
아 2:9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 바로 예수님은 노루처럼, 사슴처럼 산을 넘어 내게로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을 '노루'와 '사슴'으로 비유했고, 성도 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는 나의 비둘기'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노루같이, 사슴같이 급하게 뛰어 오셨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에게로 말입니다.
아 2:9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고 슬퍼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만나기 위해 급하게 달려오신 주님을 우리가 창살로 막아 버렸다는 말입니다. 이 때, 우리 주님은 애절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 5:2 .....,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밤새워 너를 만나기 위해 산 넘고 바다 건너 달려왔기에, 내 머리에는 이슬이 가득하였고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구나. 그러나 창살로 가로막혀 만날 수가 없으니 나의 사랑, 나의 사랑하는 자야 문을 좀 열어 다오." 그런 뜻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토록 애절하게 부르짖고 계시는데, 우리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나는 네 안에, 너는 내 안에' 거하며 맘껏 먹고 마시기를 원하여 찾아오신 주님, 그 주님을 밖에 버려 두고 우리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만 창살로 막아 버리지 않았습니까?
아 2:9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겨울엔 춥다고..., 여름엔 덥다고..., 피곤하다고..., 시간이 없다고...,
이런저런 핑계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더니, 이제는 나를 찾아오신 주님을 창살로 가로막았습니다. 이때부터 하나님의 짝사랑은 시작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가리워 진 창살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바로 죄악을 말합니다. 사 59:1-2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 59:1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사 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죄악의 철창이 주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나도 큰 죄악과 많은 허물 속에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 죄가 나와 주님과의 교제를 가로막는 창살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으며, 주님의 마음에 못을 박은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이토록 무서운 죄를 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 2:10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우리에게 함께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11-13절에,
아 2:11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아 2:12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아 2:13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비록 주님을 철창 밖으로 쫓아 버린 죄인이지만, 사랑의 주님은 그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젠 차가운 겨울도 지났단다. 아름다운 꽃이 피고 철새들이 노래하고 있단다. 나무마다 풍성한 열매가 익었고 아름다운 향기를 토하는 축복의 땅이 있으니, 나와 함께 가자꾸나! 나의 사랑아! 나와 함께 가자꾸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축복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 시골에 가면 씨암탉이 있습니다. 하루는 큰아들이 와서 "어머니, 저놈을 잡아서 몸보신 좀 할까요?" 했습니다. 어머니는 "안 된다"라고 한 마디로 거절하셨습니다.
둘째아들이 와서 입맛을 다시며 이야기했지만 그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번엔 집을 떠나서 공부하느라 수척해진 막내아들이 왔습니다.
"어머니, 저놈 맛있게 생겼는데 좀 잡아 주세요."
그런데 어머니는 막내에게 마저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약이 될 만큼 잘 자란 씨암탉을 큰아들에게도 안주고, 귀여운 막내아들에게도 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 씨암탉을 누구에게 잡아 줍니까?
사위가 오면 잡아 줍니다. 옥이야 금이야 키운 딸까지 주었는데 그까짓 씨암탉을 사위에게 못 줄 것 없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사위에게 다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독생자까지 주신 분이십니다. 독생자까지 주신 분이 무엇을 아까워하겠으며, 무엇인들 안 주시겠습니까? 있는 것 다 주시는 것입니다. 주시되 아낌없이, 남김없이 주시는 분이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꽃이 피고 철새가 노래하며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풍성한 곳, 포도나무가 꽃을 피어 향기를 토해 내는 축복의 땅으로 함께 기자!"(11-13)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께 우리는 또 한 번 슬픈 일을 저지르고 맙니다. 14절에 보면,
아 2:14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속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 은 아름답구나“하고 말씀하십니다.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속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전에는 철창으로 주님을 가로막아 버리더니, 이제는
깊은 낭떠러지에 숨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여기서 하나님의 짝사랑이 또 한 번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젖과 꿀이 흐르며 철새가 지저귀고, 꽃향기가 풍기며 푸른 열매가 풍성한 축복의 땅으로 함께 가자고 호소하시는 주님을 이 시간 영접합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신 사랑을 짝사랑으로 만들지 말고, 이제는 온전한 사랑으로 승화시켜야 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철창을 부숴 버리고 깊은 낭떠러지에서 올라와야만 합니다.
● 여러분! 회개하십시다. 죄악의 철창이 무너질 것입니다.
● 여러분! 사랑의 하나님을 부르십시다.
낭떠러지 속에 있던 나의 손을 잡아 주시고 새들이 노래하고 꽃향기가 날리며 풍성한 열매가 맺힌 축복의 땅으로 나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한 남자가 어느 여인을 무척이나 사랑했습니다. 여인이 죽으라면 죽는시늉이라도 할 그 청년은 짝사랑하던 여인이 별 관심을 가져 주지 않자 그만 상사병이 나서 식욕도 잃고, 의욕도 잃고, 시름시름 아팠습니다. 그가 아픈 것은 어떤 병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그 여인을 향한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마음에 병이 든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여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고 합시다.
"지금 내가 서울에 있는데 올라와 줄 수 있겠느냐?"고 말한다면 달려가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서울이 아니라 제주도라도 달려 갈 것이 아닙니까?
나를 죽도록 사랑하시는 주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리고 사랑을 드린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실 까요? "주님, 이제는 주님만을 의지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주님, 이제는 주님을 사랑하며 믿음으로 살아가겠습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한다면 주님에서 나를 어떻게 맞아 주실 까요? 예수님께서는 노루와도 같고 사슴과도 같이, 밤이슬을 맞으며 지구 끝까지라도 찾아오실 줄 믿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제 문을 열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문밖에 계신 주님을 내 안으로 모셔들여야 하겠습니다.
※ 여러분의 가정마다 하나씩 걸려 있을 법한 그림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등불을 들고 큰 문 앞에 서 계신 그림에 관한 일화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림 전시회를 감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림 앞에서 한 참을 감상하다가 서서히 인상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화가 양반이 큰 실수를 범하고 말았군!" 그는 그 그림을 그린 화가에게 연락을 취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쩌다가 그 큰 실수를 범하셨습니까? 예수님이 서 계신 대문을 자세히 보십시오. 당신은 그 문에 손잡이를 그리지 않았어요!"
이 말을 듣고 있던 화가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잘 보셨습니다. 그 문에는 손잡이가 없습니다. 그 문은 마음의 문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문은 안에서만 열 수 있답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의 문은 손잡이가 없습니다. 스스로 열지 않으면 열 수도 없을 뿐더러, 주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실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문밖에 세워 두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주님의 크신 사랑을 짝사랑, 반쪽 사랑으로 만들지 말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영접함으로 반쪽이 아닌 온전한 사랑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성도가 되십시다.
주님 앞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성도가 됩시다. '할렐루야'를 외치며 십자가를 붙드는 성도가 됩시다. 그러면 주님의 풍성한 은혜 가운데서 새로운 축복의 삶이 펼쳐질 것입니다.
출처:은혜목회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