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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 속이 상할 때
본 문 : 시 143: 1-6
요 절 : 시 143: 4
“그러므로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내 마음이 속에서 참담하니이다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묵상하며 주의 손이 행사를 생각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셀라)”
짧은 인생 길에 왜 이렇게도 고난이 많은가? 그저 눈만 뜨면 근심과 걱정이 밀려옵니다. 내가 잘못해서 생기는 고통,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억울하게 당하는 괴로움, 태산 같은 근심 걱정, 한가지 문제를 겨우 해결하고 한숨을 돌리는가 싶은데 해결된 문제 보다 더 큰 문제들, 마치 바다에 파도가 밀려오듯 쉴새없이 고난과 고통의 문제가 밀려오는 게 인생살이가 아닌가 싶습니다. 도무지 고생을 하기 위해 사는 것인지, 행복을 위해 사는 것인지 모를 일입니다. 아깝고 소중한 인생살이가 어려운 문제를 피해 가고 도망쳐 가는데 모두 희비가 되는 것 같습니다. 평탄한 길같이 보였는데 갑자기 절벽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앞으로 나갈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는 뒤돌아 갈 수도 없고 앞으로 계속 나아가자니 소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내 맘대로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실망과 좌절감으로 인하여 얼마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고통을 당하는지 모릅니다. 우리 학생들의 입시, 사업하는 사람들이 받는 스트레스, 가장이 받는 긴장, 가정 주부들이 만나는 허무감------ 아무도 인생의 고민과 고통과 괴로움에서 피할 자가 없습니다.
이렇게 마음 상하는 일만 생각하고 산다면 조금도 살맛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생의 의욕마저 상실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셨고 백성들이 존경하였던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도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당대의 의인으로서 의와 선을 힘써 행하였던 욥도 많은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주님이 사랑하셨던 베드로도 바울도 숫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왜 나만 이렇게 어려움을 당해야 하는가? 왜 나만 이런 고통 때문에 속이 상해 울고 있어야 하는가? 반문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종류가 다를 뿐이지 어려움과 고통은 누구나 다 당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도 속상하는 일이 조금도 없는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최근 모 잡지에서 독자들을 대상으로 일상 생활에서 오는 나뿐 감정들을 어떻게 처리하는가를 묻는 의견 조사를 한 일이 있습니다. 즉 ‘속이 상할 때 어떻게 하는가?’하는 질문입니다.
20대들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잔뜩 취하게 술을 마신다.
2) 디스코텍에 가서 진땀날 때까지 흔든다.
3) 노래 방에 가서 목이 쉬도록 소리지른다.
4) 문 걸어 잠그고 두문불출한다.
5) 친구들에게 전화 걸어 만난다는 것 등이었습니다.
30대나 40대들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술을 마신다.
2) 무조건 집을 뛰쳐나간다.
3) 드라이브를 한다.
4) 책을 본다.
5) 친구를 만난다.
6) 노래 방에 간다는 것 등입니다.
20대나 40대가 노래 방에 가서 주로 불렀다는 노래는 ‘소양강 처녀’가 제일 많았습니다.
그 다음 질문은 ‘당신이 선택한 그 방법으로 속상한 게 풀렸느냐’는 것입니다.
단 한 명도 속이 풀렸다든지 상한 감정이 그런 방법으로 치유됐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밤새도록 술 마시고 속 쓰려 죽을 뻔했다’
‘밤새도록 술 마시고 그 다음날 해장국 먹느라고 돈만 들어갔다’
‘차 몰고 집 나갔다 교통사고로 돈만 손해봤다’
‘노래 방가서 소리지르고 노래부르다가 이비인후과 신세졌다’는 등 자신들의 선택한 방법들이 자신의 마음을 치유하는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응답했습니다.
그 다음 질문은 ‘당신이 선택한 방법 가운데 어느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대한 대답은 ‘나를 이해해 주는 친구를 만나서 속을 털어놓고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 질문은 ‘당신은 그런 친구를 가지고 있느냐 있다면 몇이나 있느냐’라는 것이었는데 92.5%가 그런 친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더욱 속상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일들, 입시 문제, 직장 문제, 배우자, 자녀들의 문제, 병, 상대적인 박탈 감, 경쟁에서 뒤쳐지는 것 같은 기분, 다른 사람은 벤쳐 기업에 투자를 해서 엄청난 돈을 벌었다는데---- 생활 문제든 속상하는 일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여러분은 어떻게 문제를 풀어 가십니까?
오늘 봉독한 말씀 가운데 나오는 시인의 대답이 우리들이 어떻게 인생이 문제를 풀어야 할지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주님을 바라보고 거기서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아이들 보면 밖에 나가서 놀다 항상 얻어맞고 들어오는 애가 있습니다. 이 어린아이의 사정을 생각해 보면 딱하기 그지없습니다. 싸울 용기도 없고 힘도 없고 해보자니 도저히 안됩니다. 속이 상해 견딜 수 없습니다. 견디다 못해 한번 용기를 내어서 해봤는데 진탕 얻어맞고 말았습니다.
돌아오면서 그저 돌아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큰 소리로 악을 쓰며 온 동네가 떠나가라는 듯이 울면서 돌아옵니다. ‘엄마, 엄마’부르는 그 소리에는 한과 억울함과 갈망이 다 들어 있습니다.
한이 맺혀 돌아오는 그 아이의 어머는 그 속이 오죽하겠습니까? 이때 보면 어머니의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어떤 어머니는 ‘야 이 녀석아! 어쩌자고 그렇게 항상 얻어맞고만 들어오냐....이 못난 새끼야, 너도 이제는 이렇게 두들겨 패 주란 말이다“하고 속이 상해서 죄없는 자기 새끼만 두들겨 팹니다. 이 어린것은 자기가 누구 새끼 인줄도 알지 못하고 얻어맞습니다. 동네 애들한테 매맞은 것도 분한데 엄마까지 야단입니다. 어린것의 속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이는 울고 돌아오는 아이를 꼭 안아 주고 치마 자락으로 눈물 콧물을 닦아주시면서 위로해 줍니다. ‘같이 때리는 것은 나쁜 일이지. 남을 때리는 것은 못된 짓이란다. 우리 예수 님은 왼쪽 뺨을 때리거든 오른 쪽 뺨을 내밀라고 하셨지.....내 아들 참 잘 했어, 그렇게 울고 나니 시원하겠다’ 그 때 어린것은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속상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시편 기자와 같이 하나님 앞에 찾아 나와야 합니다. 다른데 찾아가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찬송가 474장에 보면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참 평안을 몰랐구나 내 주 예수 날 오라 부르시니 곧 평안히 쉬리로다.
이 세상에 곤고한 일이 많고 참 쉬는 날 없었구나 내 주 예수 날 사랑하사오니 곧 평안히 쉬리로다.
이 세상에 죄악된 일이 많고 참 죽을 일 쌓였구나 내 주 예수 날 건져 주시 오니 곧 평안히 쉬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 찾아 나와 우리의 사정을 아뢸 때에 참 평안과 위로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4절에 보면 다윗은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내 마음이 속에서 참담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속상할 때에 어떻게 하였는가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1. 그는 먼저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모든 형편과 처지를 하나님께 아룁니다. 자신이 부족하고 연약한 죄인임을 먼저 하나님 앞에 고백합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어려움과 고통이 다 자신의 부족으로 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부족을 먼저 시인 할 때에 억울함이 사라집니다.
사람들은 속 상한 일이 생기면 “나는 이렇게 속 상하지 않아도 되게 되어 있는 사람인데 왜 이런 일이 내게만 생기는 것일까? 억울하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속상한 일에 더 속이 상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런 보통 사람처럼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당하는 고통은 마땅히 당해야 하기 때문에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윗의 생각이 2절에 있습니다.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다 죄인이고 자기도 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죄인이 고통을 당하고 사는 것은 당연한데 그걸 억울하다고 기분 나빠하고 속 상하면 더욱 더 나빠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증권에 투자를 했다가 엄청난 손해를 보았습니다. 그는 너무 화가 나 식사도 안하고 고민을 하다가 견디지를 못하고 권총으로 자살을 해 버렸습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아버지의 병원 비를 벌려고 동분서주하던 두 딸아이가 여의치 않자 아파트 옥상에서 나란히 떨어져 자살을 해 버렸습니다. 얼마 전 우리 나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병 치료가 문제가 아닙니다. 속이 상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손해를 보았다고 이런 식으로 일을 벌리면 잃어버린 것을 찾기커녕 더 큰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고 남은 가족들까지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원한을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그런데 사실 알고 보면 문제를 이런 막가파식으로 해결하려 드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아니라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중국 무술 소설에서 복수가 복수를 낫고 또 다른 복수 극이 벌어지는 것을 봅니다. 아까운 일생을 오로지 원수 갚는데 다 써 버리고 원수 갚음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통쾌감을 느끼고 정의감을 느낍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심리에도 이런 어리석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다윗은 그런 식으로 자기의 억울함과 고난을 해결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긍휼에 호소합니다. ‘주여, 심판을 행치 마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처참한 모습을 그대로 하나님께 아룁니다. 3-4절에서 그는 원수들로 인하여 죽은지 오래된 자 같다고 말합니다. 이제는 자기 힘으로는 다시 일어날 수 없는 자가 되었다고 진술합니다.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심령은 멍들대로 멍들고 상할 대로 상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세상에 그 무엇으로도 치료받을 수 없는 참담한 모습을 하나님 앞에 고합니다.
이 기도들은 다윗이 지금 자기가 당하고 있는 정신적인 고통과 심리적인 괴로움과 육체적인 어려움과 환경의 난관들을 하나님께 자세히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왜 이런 태도를 취했을까요? 하나님께서 자기의 억울함과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의 긍휼을 믿고, 하나님의 능력 있으심을 믿었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형편이 좋을 때는 잘 믿는 것 같은데 어려워지면 언제 하나님을 믿었느냐는 식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습니다. 도무지 어쩌자는 것인지----- 그건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의 긍휼을 믿고, 하나님의 능력 있으심을 믿었습니다.
어려울 때 기도합시다. 기도하되 자세히 말씀을 드려야 합니다. 몸이 아픈 사람은 몸 아프다는 말을 하게 되고, 속이 상한 사람은 속 상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합니다. 그걸 사람에게 하지 말고, 아니 사람에게 하듯 하나님께 하자는 것입니다. 내 속 상한 이야기를 속에 두고 참으면 병이 됩니다. 중권에 투자했다가 손해를 본 것을 사람들에게 자꾸 말하고 다니면 사람들이 나를 경계하고 멀리합니다. 하나님께 말씀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 하여 선이 되도록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결국 때가 되면 “그 때 돈 잃어버린 것이 참 잘된 일이야”라고 말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걸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괜히 우리 아버지입니까? 우리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손해 본 것도 보상해 주시고 얻어맞은 것도 위로해 주시고 죄도 용서해 주시고 약한 것도 강하게 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복음 송에 ‘기도는 우리의 안식 빛으로 인도하리. 앞이 캄캄할 때 기도 잊지 마시오’기도할 때에 위로와 사랑의 빛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2. 주님을 깊이 생각했습니다.
5절에 보면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묵상하며 주의 손의 행사를 생각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주께서 행하신 일들을 깊이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지난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언제나 복되고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신 일들을 생각합니다.
애급의 노예 생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신 일이며, 깊은 홍해를 가르시고,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 가나안 복지로 인도해 주신 일과 그리고 자기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행사를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나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상한 마음과 곤경을 다 해결해 주실 것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또 과거에 그런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속상할 때 떠들고 폭음하고 설치지 않고 ‘묵상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출14장에 보면 애급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앞에 이르렀을 때 바로가 보낸 기병대의 추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황한 이스라엘 백성이 소란을 버리며 지도자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행하신 구원의 역사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모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에게 행하신 구원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이 모세의 말 한마디가 모세의 인간 됨됨이 즉 위대한 인 간됨을 너무 잘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모세는 사람이 달랐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다른 사람 보다 달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사랑하시고 그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말 보다 침묵이 무섭습니다. 이것은 명상이 아닙니다.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주님을 생각하고 그 행하신 능력을 기억해야 합니다.
영국의 ‘화이 클락’이란 이가 크롬웰의 특사로 스웨덴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가는 도중에 조국의 불안을 생각하고 불면증에 걸렸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 사환이 그 옆방에 있다가 ‘화이 클락’경이여 당신이 이 세상에 나시기 전에도 하나님은 이 세상을 잘 다스렸지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물론이지....”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나신 후에도 잘 다스리시겠지요?” “물론이지..”. “당신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잘 다스리실 줄로 믿습니까?” “물론이고 말고..”.그는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행하신 역사를 묵상하는 동안 마음에 평안히 깃들이며 조용히 잠들었다고 합니다.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공했을 때나 실패했을 때나, 기쁠 때나 속할 때, 그 때마다 주님을 생각하고 묵상하는 것이 상한 영혼이 치유 받는 비결입니다.
3. 주를 향하여 손을 폈습니다.
6절에 보면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땅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앞에서 생각하고 묵상했다고 하는 것은 내적 행동이며, 정신적인 태도입니다. 그러나 6절에서 손을 폈다는 것은 외적 행동이며 결단을 무엇을 결단했다는 말입니다.
손을 폈다는 것은 자신의 무능력을 의미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도 아무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저는 가진 것도 없고, 저는 힘도 없습니다’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 솔직히 보여 드리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세상에 태여 날 때 주먹을 쥐고 한갓 힘을 쓰며 울며 태여 납니다. 살기 위한 힘이 넘치며 생존을 위한 의욕이 넘칩니다. 그 힘으로 엄마의 젓을 얼마나 힘껏 빨아 대는지 실험을 해 보니 가는 빨대로 3미터 정도되는 물을 빨아올리는 힘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을 때는 반드시 손을 쫙 폅니다. 이제는 끝났다는 것입니다. 자기 몸도 스스로 주체를 못합니다. 전적으로 다른 사람이 그를 처리해 주어야 합니다. 죽었습니다.
다윗이 손을 펐다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전적인 의탁, 전적인 의존, 절대적인 신뢰 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심리학들은 말하기를 ‘못난 척하고 사는 사람, 없는 척하고 사는 사람, 모르는 체 하고 사는 사람보다 잘난 체 하고, 있는 체 하고, 아는 체 하는 사람이 10배 이상 스트레스 증후군에 시달리게 된다’고 합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나는 믿음이 부족해, 나는 믿음이 모자라’하며 사는 사람보다 ‘나는 믿음이 좋아, 나는 신앙이 제일이야’라며 사는 사람이 훨씬 더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손을 펴 보인 것입니다.
현대인은 자신의 손으로 과학 문명이라는 거대한 바벨탑을 쌓아 올리고 있습니다. 사람이 분수를 알지 못하고 생각한 대로 다 될 것으로 착각하고 살면 무슨 일이 안될 때마다 좌절과 공허에 빠지게 됩니다. 원망과 불평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은 점점 상하고 병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사모하며 손을 펼 때에 우리 하나님께서는 울고 돌아오는 아들을 엄마가 품에 안고 위로해 주시듯이 진정한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을 얻게 해 주실 것입니다.
속상한 사람들, 참담한 아픔으로 한숨 짓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능력의 한계 때문에 번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리고 자신의 체면과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아픔이나 상한 심정을 노출시키지 못한 채 가슴앓이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렇게 살지 마십시오.
탕자처럼 살지 마십시오. 사랑과, 은혜와 용서와 위로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풍성한 아버지가 계시지 않습니까? 나는 아버지 집에 종이라고 해도 그걸 인정하시지 않고 아들이라고만 우기시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할 짓이 없어 하나님을 믿는다고 여기 와 앉아 있는 것입니까? 정말 잘 믿어 봅시다. 진짜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난날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얼마나 많은 은혜를 주셨습니까?
은혜를 받은 일이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추운 겨울에 노점에서 장사를 아줌마들을 복 오십시오. 종합 병원에서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제활 원에서 좋아 벙싯 거리며 작은 선물에도 눈물 나리만큼 고마워하는 장애인들을 보십시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주님을 향하여 손을 폈던 시편 기자처럼 나의 필요를 채우시고 내 마음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믿고 기도하며 찬양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할 것입니다.
349장에 보면 ‘내 힘과 결심 약하여 늘 깨어지기 쉬우니
주 형상대로 빚으사 날 받으옵소서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노래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향하여 손을 들고 찬송하는 심령을 우리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위로하시며 치료하여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마음 상할 때마다 겸손히 나의 모든 형편을 그대로 하나님께 아뢰며, 주님을 생각하고, 특히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깊이 생각하고, 주님을 향하여 손을 펴고 ‘주님을 사모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 나에게 긍휼을 베푸시옵소서’하고 기도하며 찬송하십시오. 뭐가 문제가 됩니까?
여러분 심령 속에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양로원 갑천뉴스타트 글쓴이: 엘리야
(2) 속상할 때 어떻게 하십니까?
요즘 속상하는 일이 있습니까? 없는 분들도 과거에 속상한 일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앞으로도 속상할 일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속상할 때 어떻게 하십니까? 이게 중요합니다. 속상한 일들은 누구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미국 교포 중에 내과 전문의 한 사람이 자살했습니다. 이민 가서 내과 전문의가 되었다면 상당히 성공한 사람입니다. 이민자들의 말을 들어보니까 이민자 가운데 약 2% 정도만이 성공한다고 하더군요. 그 사람은 성공한 교포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는 집사였습니다. 최근 들어서 자살한 연예인들을 보니까 모두가 교인이더군요.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들은 속상할 때 어떻게 푸는 것인지 몰랐던 것입니다.
속상하다는 말은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속상하다는 것을 분통이 터진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분통이 터진다는 말은 통을 누르고 누르다가 그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통이 터진 것입니다. 이 때 조심해야 합니다. 잘 못 터지면 자기도 죽고 다른 사람도 죽입니다.
목사가 속상하다고 하면 “목사님도 속상하나요?”라고 묻는 경우가 있는데 당연한 것입니다. 목사도 사람이고, 속상한 일을 만나게 됩니다. 성경에 보니 다윗도 상당히 속이 상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3-4절에 보니 다윗은 사람들 때문에 특히 원수 때문에 너무나 속이 상했습니다. 심지어 참하다는 표현까지 사용했습니다. 참담하다는 것은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심장이 꽉 막히고 비참하고 속상하다는 것입니다. 지금으로 하면 스트레스를 받아서 죽을 지경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다윗도 속상했다는 겁니다. 다윗은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었을까요? 그가 모범 답안지입니다.
다윗이 어떻게 했는지 보기 전에 일반적인 방법과 심리학적인 방법을 살펴봅시다.
1. 일반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어느 회사에서 [속상할 때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하고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설문에서 21세부터 30세까지의 젊은이들은 첫째로 술을 잔뜩 취하도록 마신다. 두 번째로는 디스코텍에 가서 진땀이 날 때까지 춤을 춘다. 세 번째는 노래방에 가서 목이 쉬도록 노래를 부른다. 네 번째는 문을 걸어 잠그고 두문불출한다. 다섯 번째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만난다는 순서로 대답을 했습니다.
40대부터는 대답하기를 첫째로 술을 마신다. 두 번째로 무조건 집을 뛰쳐나간다. 세 번째로는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한다. 네 번째 책을 본다. 친구를 만난다. 노래방에 간다는 순서였습니다. 이것을 보니 일반적인 방법은 취할 것이 못되더라는 겁니다.
설문조사에서 이어 [노래방에 가면 주로 무슨 노래를 부르십니까?] 하고 물어봤더니 20대, 30대, 40대 모두 소양강 처녀를 부른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스트레스가 풀립니까?] 하고 물었더니 대답한 사람들 모두가 스트레스가 풀리지 않는다고 대답했습니다. 풀리지도 않는 스트레스 해결방법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어떤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까?] 라는 질문에 한결같이 나를 이해해주는 친구를 만나서 속을 털어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2. 심리학적 방법은 무엇입니까?
심리학적으로 보면 잘난 체 하고 있는 체 하고 아는 체 하는 것이랍니다.
잘난 체 하고 있는 체 하고 아는 체 하는 사람과 못난 체 하고 없는 체 하고 모르는 체 하는 사람을 비교했더니 잘난체 하는 사람이 더 많이 속상하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잘난 체하고 있는 체 하고 아는 체 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열 배나 더 속상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되도록 살 때 믿음은 없어도 못난 체 하고 죽은 체 하고 없는 체 하고 모르는 체 하고 사는 게 속이 편합니다.
3. 다윗이 취했던 방법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성경적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일반적 방법이나 심리적 방법은 도무지 쓸데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방법, 성서적 방법은 무엇일까요? 다윗은 속상할 때 어떻게 했습니까?
1) 하나님 앞에 기도하십시오(1절).
1절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속이 상한데 왜 기도해야 합니까? 속이 상하면 첫째로 그것을 풀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병에 걸리게 됩니다. 한국 사람들만이 가진 병이 있다고 하던데 그게 화병입니다. 울화가 쌓인 것입니다. 속상한 것을 풀지 않고 쌓아두어서 생긴 병입니다. 어제 최복순 집사님 병원 심방을 갔다 왔는데 제가 볼 때는 최복순 집사님이 걸린 병이 화병입니다. 이 분은 쌓인 게 많아요. 풀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병에 걸린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속상하면 어디에다가 풀어야 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아내나 남편, 자녀 등 가족들에게 풀어 가족들을 우울하게 만듭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말 못하는 강아지에게 푸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십시오. 하나님 앞에 속상한 것 말씀드리세요.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동네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자기보다 더 힘센 사람에게 얻어맞았을 때 그 속상함을 어디에다 풉니까? 어린아이들은 집으로 달려 들어와 엄마 하면서 어머니 품에 안깁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눈물을 닦아주시고, 맞은 상처에 약을 발라주시고 위로해주시고 또 격려해 주십니다. 그때 상처받은 아이의 마음은 풀어지고 평안을 얻게 됩니다.
어린 때는 그렇게 했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어디서 풀겠습니까? 어릴 때 어머니 품에 안겨서 풀었던 것처럼 풀 수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 찾아보기가 쉽지 않잖아요. 믿고 말했다가 뒤통수 맞는 경우도 흔하니까 아무에게나 말할 수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마음에 상처를 받으면 제일먼저 교회로 달려와 주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주여" 이 한마디 속에는 나의 억울함, 원통함이 다 들어있습니다. 기도를 하고 나면 속이 시원해집니다. 속만 시원해지는 것이 아니라 소망이 생깁니다. 어떤 소망입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문제를 해결해주신다는 소망입니다.
저는 과거에 속상할 때는 “아시지요, 아시지요”라고 한참을 부르고 나면 마음이 시원해지고 풀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하나님은 도와주십니다. 6절에 보니까 다윗은 기도할 때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행위의 시적인 표현입니다.
미국에 사시는 분의 말을 들어보니까 미국거지와 한국거지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많이 있겠지만 미국거지는 영어로 구걸을 하고 한국거지는 한국말로 구걸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미국거지와 한국거지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구걸할 때 손을 펴고 구걸을 한다는 것입니다. 주먹을 쥐고 구걸하는 거지는 한사람도 없습니다. 만일 거지가 주먹을 쥐고 구걸을 하면 한 푼도 동냥을 받을 수가 없게 됩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손을 폈다고 했습니다. 왜 주를 향하여 손을 폈습니까? 주님은 전능자이시고 나를 도우시는 분이시고 그리고 다윗은 주님만이 나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주를 향하여 손을 편 것입니다.
시146:3-4에 보면 성경은 말씀하기를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고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 당하실 때, 속상하실 때 사람을 의지하지 마시고 또한 사람들에게 손을 펴지 마시고, 주님을 의지하시고 주님께 두 손을 펴시기고 부르짖어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2) 과거를 회상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생각하고 좋으신 하나님을 입으로 고백하십시오(5절).
우리가 하나님께 나와 기도 하고 나면 곧 모든 것이 좋아질 것 같다가도 기도가 끝나고 나면 다시 염려가 찾아오고 상처가 되살아나기도 합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5절에 보니까 다윗은 기도한 후에 주님이 과거에 행하신 일들을 회상하면서 주님이 어떤 분인가를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입으로 그분이 하신 일을 고백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슨 일이 있으면 자기 조상들에게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서 믿음의 고백을 하는 습관들이 있었던 같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축복하신 일들 그리고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세를 통해서 해방시키신 일들, 10가지 재앙, 유월절 사건, 홍해를 가르신 기적 등. 그리고 광야 40년 동안 먹이시고 입히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손길 또 요단을 가르시고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셨고, 여리고를 무너뜨리시고 연합군을 물리치셨으며 태양을 멈추게 하시는 기적들을 통해서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셨던 일들을 회상하며 감사했습니다. 다윗도 보통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과거에 자기 민족 가운데 역사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더듬어보았던 것입니다.
또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고 묵상했습니다. 자신이 들에서 양을 칠 때 사자와 싸워서 이겼던 일 또한 사울 왕이 자신을 죽이려고 찾아다닐 때 사울 왕의 손에서 자신을 구원해 주신일 또한 블레셋 군대의 장군 골리앗과 싸울 때 자신과 함께 하시어서 그 큰 용사 골리앗을 죽인 일들을 묵상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주님의 하신 일들을 묵상함으로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나와 함께 하시고 도와주시어서 승리하고 기쁨을 얻게 된다는 믿음과 확신을 가지게 되어 속상한 마음이 오히려 소망과 기쁨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상한 일을 만날 때 세상 사람들처럼 두려워서 숨는다든지,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한다든지 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하신 일들을 묵상하시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생각하시고 입으로는 하나님이 일하실 것을 고백하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려고 하십시오.
하나님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던 것처럼 지금 이 시대에도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다윗은 시 23편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평상시에는 하나님의 인도를 잘 받는 것 같은데 마음이 상할 때, 너무나 속상해서 마음이 참담해 질 때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생각을 하지 않고 감정대로 반응해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감정대로 반응하면 더 어렵고 힘든 지경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아무리 속상하고 마음이 참담한 지경이 되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려고 하십시오.
그럼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며 우리는 어떻게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까요?
첫째,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으십시오(8절).
8절에 보니까 다윗은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라고 기도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자기가 다녀야 할 길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의 길에 빛이 되시고 발에 등이 됩니다. 어두운 밤에 등불을 밝히면 갈 길이 보이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암송하고 고백하면 말씀 속에서 길이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모교회 선배들과 함께 삼각산에 기도하러 갔을 때 산에서 한 선배가 길이 없는데 길이 있는지 알고 걸어가다가 실족한 일이 있습니다. 그 선배가 실족한 이유는 빛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빛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빛이 없으면 인생이 실족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비춰주시는 빛인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으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의 길을 잘 그려놓은 지도와 같습니다. 정확한 지도가 있으면 자기 위치를 알고 자기가 가야 할 길이 보이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까이 하십시오. 설교를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은 말씀 속에서 길을 보여주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둘째,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으십시오(10절).
10절에 보니까 다윗은 “주의 영은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자신을 인도하시는 분이 성령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롬8:14에 보면 사도 바울은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네비게이션이 있어서 길 찾기가 좋습니다. 주소를 입력하고 네비게이션에서 말하는 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듯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데 그분이 말씀하시고 감동하시는 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속상한 일을 만날 때 성령님을 찾으십시오. 그분은 보혜사이십니다.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롬 8:26에 보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속상할 때 성령님을 부르면 그분은 때로는 위로자로 나를 위로해주시고 때로는 인도자로 나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4) 자기정체성을 분명히 하십시오(12절).
12절에 보면 다윗은 자신이 주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인자함으로 자신의 원수를 끊어달라고 부탁하는데 부탁하는 이유가 자기가 주의 종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속상한 일을 만났을 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분과 내가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어떻게 도움을 구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평상시에는 신앙이 좋은 것 같은데 속상한 일을 만나면 신앙을 내동댕이쳐버리고 주님 곁을 떠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반면 다윗은 아무리 속상한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떠나거나 하나님께 원망하지 않고 믿음의 고백을 드렸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기가 누구인지, 자기정체성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정체성이 약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인가? 나는 누구인가? 에 대한 확신이 약합니다. 이게 약하면 신앙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조금만 고난이 찾아와도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신앙이 흔들흔들 하는 것입니다.
독일의 염세철학자, 쇼펜하우어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고민을 하면서 길을 가는 도중, 옆에 사람이 있는 줄도 모르고 걷다가 그만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은 쇼펜하우어에게 “당신은 도대체 누구인데 길도 보지 않고 다니는 거요?”라며 화를 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잠시 명상에 잠긴 채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도 내가 누구인지 알았으면 참 좋겠소.” 많은 사람들이 좌절하고 방황하며 사는 것은 이처럼 “내”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은 부와 명예가 있어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면 고독과 절망에 빠집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내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확실하면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럼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나는 누구입니까? 성경에는 많은 답이 있지만 여기서는 몇 가지만 소개하겠습니다.
첫째, 나는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듯, 진화의 결과로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이 직접 생각하시고, 직접 손으로 만드신 존재입니다(시 139:13-14). 성경은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엡 2:10)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만세 전에 나를 아셨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존재로 우리를 구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다”(렘 1:5)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나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걸작품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셨다면, 실수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미모, 학벌, 지식, 물질 등 세상의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솔로몬의 모든 부귀영화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한 송이 꽃에 비교할 수 없다고 말씀 하셨습니다(마 6:29). 하물며 우리는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나는 천하보다 귀한 존재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우리는 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로 종에서 자유로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갈 5:1). 루케이도 목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둔 것은 못이 아니라 사랑이다”라고 했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은 우리를 복주시고 번성케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히 6:14)고 약속하십니다. 나는 실패한다 해도, 나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은 실패할 수 없습니다(사 14:24).
셋째,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하나님은 놀랍게도 피조물 된 우리를 동역자로 인정하십니다. 성경은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 3:9)고 증거 합니다. 우리를 동역자로 인정하신다는 것은 우리 없이는 일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나 한 사람 빠져도 상관없겠지”라고 생각하면 큰 잘못입니다. 셀 리더, 차량 봉사자, 화장실 청소하는 분, 찬양단, 목사 등 모두가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그러므로 나로 인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충성하는 사역자가 됩시다(고전 4:2).
넷째,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란 하나님 아버지의 것이 전부 나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4:7)고 증거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순간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존재입니다. 결코 모자람이 없는 하나님의 부요가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에서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서도 하나님의 부요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 하다가 속상한 일이 있을 때 “나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고 자기를 함부로 내둘러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속상한 일이 있어도 나는 하나님의 작품이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나는 하나님의 동역자이며, 나는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라는 확신을 가지시고 모든 시험을 이기시기를 바랍니다.
속상할 때 술 먹지 마세요. 춤추러 가거나 노래방에 가지 마세요. 소양강 처녀 부른다고 풀리는 것 아닙니다. 다윗이 취했던 방법을 사용해 보세요.
1) 하나님 앞에 기도하십시오(1절). - 손을 펴고 기도했듯이 도움을 구하는 기도
2) 과거를 회상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생각하고 좋으신 하나님을 입으로 고백하십시오(5절).
3)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려고 하십시오.
첫째,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으십시오(8절).
둘째,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으십시오(10절).
4) 자기정체성을 분명히 하십시오(12절).
첫째, 나는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넷째,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입니다.
출처: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