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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23:8-14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
히브리서 12:5-8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
베드로전서 1:6-7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
고난의 본질적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의 중요성
그리스도인이 인생을 살아가는 중에는 여러 가지 형태와 깊이의 다양한 고난을 만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대개는 고난이 없는 순탄한 인생을 살고 싶어합니다. 그렇지만 고난이 없는 그 자체가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적절한 예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태풍을 들어보겠습니다. 태풍이 지닌 비바람의 위력은 대단합니다. 대형의 경우 한반도 전체를 휩쓸고 가기도 합니다. 엄청난 재해를 가져와 재산과 인명 피해를 입습니다. 누구도 태풍의 위력 앞에는 무력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과학자들은 태풍이 상륙하기 전에 그 위력을 소멸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습니다. 대기의 공기를 따뜻하게 한다든지, 또는 태풍의 눈에 엄청난 폭발이 있게 한다든지 하는 과학적으로 가능한 방법을 연구하여 동원해 볼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성공한다고 합시다. 그러나 한편으로 태풍이 가져다주는 수치로 계산할 수 없는 무한한 자연적인 이득은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처럼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이 삶에 고통을 주고 괴로움이 되는 것은 틀림없지만, 한편으로 그 고난으로 오는 영적인 유익은 가히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실제로 고난이 없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크든, 작든 고난을 만납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없는 순탄한 인생을 살아 갈려고 하기보다는 고난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고서 고난을 인하여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고난을 의미하는 괴로움, 고통, 비탄, 고뇌 등의 히브리어 단어가 여러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들은 고난을 묘사함에 있어서 육체적 고통은 물론이요 정신적 고뇌까지도 포함합니다.
이스라엘은 모든 고난을 하나님의 형벌로 이해하였습니다, 어느 개인이 죄를 짓고 악을 행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징계로 형벌을 내리시므로 고난을 당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해한대로 고난은 일면 형벌의 성격을 띄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하여 선언하시기를 하나님을 순종하는 자에게는 축복을 베푸시고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벌을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 데 따라 하나님께 범죄한 자에게 '형벌'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라서 개인의 고난이 죄의 대가로 주어지는 형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형벌'의 경우에 있어서는 하나님께 죄인된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의 성격을 갖는 보편성을 띄는 전우주적인 경우와 하나님과 그의 택한 백성과의 관계성에 의해서 주어지는 특별한 경우를 구분하여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전우주적으로 미치는 고난
사실 인간이 당하는 고난의 근원은 죄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은 죄인을 저주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하는 특성을 띄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류의 시조 아담에게 죄에 대한 형벌로 죽음을 선고했고, 모든 후손은 그 죽음 아래 놓여졌습니다. 그 결과 아담 한 사람의 죄로 죽음이 모든 사람을 지배하는 왕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롬 5:15-17).
여기서 아담 한 사람의 죄로 죽음이 모든 사람을 지배하는 왕노릇을 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타락했을 때 죄의 영향력이 미치는 모든 곳에는 악이 성행함으로 사회질서는 왜곡되어서 죄가 지배하고 악이 성행하며 죽음의 형벌에 처하는 원리가 형성되어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 생활은 역시 죄인인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여러 가지 악을 초래하여 서로 고통을 당하고, 죽음을 당하는 고난을 받습니다. 바울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라고 말했습니다. 자연 재해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당하는 고난도 죄값임은 물론입니다. 자연 재해가 끼치는 폐해의 끝은 죽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받는 고난
하나님의 형벌은 모든 인류에게 주어지는 것이므로 어떤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삼으신 그리스도인에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도 가난, 질병의 고난을 당합니다. 그 외에도 견디기 힘든 여러 육체적, 정신적 고통의 고난을 당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서는 '하나님의 형벌'로 겪는 고난이 하나님의 백성된 그리스도인에게서는 더 이상 저주와 심판의 형벌이 아니라 '징계'로 주어집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악인이 그들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받게 되는 당연한 고난과는 달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에 개입하셔서 간섭하여 잘잘못을 가려 바로 잡아가시기 위해 징계로 고난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교정하시고 깨우치시기 위해서 베푸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5-8절을 보십시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여기의 '주의 징계하심'이라는 말은 '보응적인 징벌'의 의미와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교육적인 면을 가지고 임합니다. 그분의 징계는 벌주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교육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요 방법입니다. 따라서 이 말이 지니고 있는 의미는 보다 넓습니다. 그것은 '의로 교육한다'는 뜻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서 징계가 교육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또한 이 단어의 의미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 주어졌던 책망과 징계를 생각하면 됩니다. 저희를 향한 책망과 징계는 교정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9절 입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하나님의 징계는 자기 백성을 교육시키고 양육하시는 것으로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도록 교육하시며 키우십니다.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심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딛 2:12). 이때 때로는 징계도 베푸십니다. 징계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을 양육하시는 한 수단과 방법으로 사용됩니다. 하나님이 양육하시는 징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과 함께 정죄를 받지 않게 됩니다.
이런 원리를 이해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징계를 결코 불평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32절을 보십시요.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런 원리 안에서 이제 그리스도인이 받는 고난은 죽음을 당하는 형벌이 아닌 교정을 목적으로 한 교육의 효과를 지닌 징계임을 확신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받는 고난은 우선 보기에는 죽는 자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오히려 사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9절을 보십시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자요 죽은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히브리서 기자는 12장 5절에서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가볍게 취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이 임할 때마다 그 속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징계로 오는 고난을 무관심으로 대하는 것은 경솔한 짓입니다. 고난을 견디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찾아 알려는 것이 아니고, 단지 자신의 기질을 발휘하여 참아내는 것이어서는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또한 '낙심하지 말라'는 말씀도 크게 주목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항상 우리가 좋아하는 삶의 방식 속에서만 찾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환난과 역경을 통해서도 그의 자녀들과 동행해 주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의 독자들에게 이 사실을 잊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쉽게 낙심하지 말라." 우리가 감당치 못할 것으로 주어지는 시험이란 없는 법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경히 여기지 말며, 고난을 받을 때 쉽게 낙심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자기의 자녀들도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6장 4절을 보십시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징계라는 말이 '훈계'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왜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형벌이 징계하시는 고난으로 주어집니까?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에게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시는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위대한 일을 자기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셨습니다. 곧 십자가의 구속 사역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믿는 자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셔서 더 이상 죽음이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살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로부터 구원얻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죽음의 형벌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에게서 죽음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는 축복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이 죄로부터 구원을 얻어 죄와 상관없는 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지으며 살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결코 간과하시지 않습니다. 그냥 모른체 넘어가시지 않고 징계하십니다. 히브리 기자는 말하기를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 12:7-8)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이 범죄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징계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죄를 짓는 것에 대해 그 심각성을 모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를 책망하며 적절히 야단도 칩니다. 그래서 매를 때리기도 하고 벌을 주기도 하여 그의 죄를 깨닫게 합니다. 그러나 그 징계에는 아들에게 대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 징계를 통하여 하나님을 더욱 따르고 공경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받는 징계에는 스스로 고난을 자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징계하여서 받는 고난이라기 보다는 사실상 스스로 고난을 만든 데 따른 자연적 결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가령 일하지 않는 자에게는 굶주리는 고난이 뒤따르는 법입니다. 또한 베드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벧전 4:15)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고난은 하나님의 사랑의 간섭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 고난은 받지 않아도 될 것을 스스로 자초하여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도덕적 존재이시며 우주의 구조를 질서있고 조화있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에 선을 택하든 악을 택하든 그 대부분은 자연적 결과를 초래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경우도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자들이 죄를 깨닫고 돌이키게 하시는 징계의 방법으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찾아오는 징계는 그들에게 유익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실 때는 우리의 유익을 염두에 두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지는 고난은 세상에 속한 불신자에게 주어지는 형벌과 대등하지는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의도에 의해서 베풀어지는 고난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징계에 의해서가 아닌 다른 목적에 의해서도 주어집니다. 대표적인 경우로 구약의 욥을 들 수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손에서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욥은 하나님께 징계받을만한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욥에게 고난을 주어서 고통을 당하게 하신 것은 당신의 구속사적 섭리를 그에게 가르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고난의 방법을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모든 고난은 절대적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주권에 속합니다. 성경은 우연적인 고난, 즉 '운명'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당하는 고난은 징계로 받는 것이 아닌 한, 하나님의 계획된 손길에 의해 당신의 목적을 위해서 진행되는 것임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욥의 고난에서 우리는 이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서 고난은 자신이 과연 누구인가를 더욱 확인하는 기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처하는 사람으로서 세상의 자그마한 유혹과 핍박을 견디지 못하여 쉽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순결성을 상실해 버리고 마는 일이 빈번한 형편이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의 은혜를 얻은 사람입니다. 이 말이 지니고 있는 의미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육체의 정욕이 이끄는대로 살아오면서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았던 일체의 죄책이 사죄 받았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로 인해서 놀랍게도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져 그의 아들이 되는 영광된 신분을 수여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영광된 변화와 특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십자가의 형벌에 내어주신 대속물의 은혜에 근거합니다. 바로 여기에 세상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백성에게 은혜로 누려지는 진정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은혜를 입은 자가 마땅히 취해야 할 삶의 가치관이 있습니다. 더 이상 세상을 즐기는 식의 삶을 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해 나갑니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하면서 구원하신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삶이 육신적으로 평안할 때는 물론이지만, 고난이 밀어닥칠 때에도 여전히 유지될 수 있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욥처럼 하루 아침에 전 가족과 전 재산을 잃고, 심지어 자신의 몸이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발생함으로써 극도의 고통 속으로 빠져드는 데도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지킬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욥기는 이에 대하여 '그렇다!'라는 대답을 우리에게 줍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어 그 은혜를 아는 사람은 어떤 고난에 부딪치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순전함을 상실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는 욥기가 전체적으로 산문인 것처럼 나타납니다. 그러나 사실은 서두와 맺음말을 제외하고는 전체가 장문의 시로써 구성되어 있습니다. 논쟁 부분에서는 엘리바스와 욥의 대화를 시작으로 빌닷과 욥, 그리고 소발과 욥의 대화가 세번의 주기 - 4-14장, 15-21장, 22-27장 - 로 전개되게 됩니다. 욥기의 전체적인 구조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1부: 1:1- 2:13 사단의 참소와 욥의 고난
2부: 3:1-31:40 친구들과의 논쟁
3부:32:1-37:24 논쟁의 종결자 엘리후의 등장
4부:38:1-41:34 여호와의 자기 계시
5부:42:1-17 욥의 결말
잘 알려졌듯이 욥의 결말은 대단히 아름답습니다. 그는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서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실존성과 아울러 그것이 자신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의 자리에까지 이끌어 가고 계심을 온전히 증명해 보여 주었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은혜의 가치'는 어떤 고난이라 할지라도 충분히 받아낼 수 있을 정도로 가치 있는 보배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욥의 세 친구들은 전형적인 이스라엘의 고난관(苦難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든 고난을 하나님의 형벌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고난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에 의해서 징계가 가해짐으로써 발생하는 고난입니다. 이 경우는 주로 악인을 심판하는 것으로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이 현세에서 필연적으로 베풀어져야만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따라서 그들은 욥이 고난을 당하고 있는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결정적으로 실패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악한 자에게는 고난을 주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욥이 고난을 받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결코 까닭 없이 고난을 받지는 않는다고 하며 욥에게 숨겨진 악한 죄가 있다고 몰아 부쳤습니다.
이 순환논법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의 사고방식 속에서도 적지 않게 발견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증거로써 고난 없는 평탄한 삶을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사고방식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상선벌악', '인과응보'를 앞세워 상급신앙으로 살게 하는 참으로 위험한 결과를 낳습니다. 하나님이 악한 자를 징계하시는 것은 보편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그분만의 특별한 지혜와 의도에 의해서 악한 자가 계속해서 형통하도록 주권적으로 버려 두시는 경우도 상당히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시편 73편 1-5절에서 그것에 관한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이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악인의 번영과 그로 인해 제기되는 하나님의 공평에 대한 문제로 고민을 해왔습니다. 어째서 하나님께서는 선인은 고통을 당하게 하고 악인은 편안히 살게 하시는가? 이 문제는 욥이 제기한 바요(21:4-21), 시편 기자를 고뇌케 하고(73편), 선지자들을 당혹케 하였습니다(렘12:1-2 합2:12-17). 왜 악인이 죄를 지으며 악하게 살아가는데도 형통하고 번영하느냐 하는 문제는 간단하게 대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 문제를 다루는 대목이 많이 있습니다. 가령 시편 기자는 자기가 하나님과 맺은 관계를 회상하면서 악인의 운명을 볼 때에 절망감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는 번영이 악한 자에게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악인의 번영은 사실상 '미끄러운 땅'을 밟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결국은 졸지에 황폐되고 맙니다(73:17-21). 그들은 안락한 생활로 인해서 유쾌한 꿈에 빠집니다. 넘치는 부요로 인해서 생과 사의 기본적인 문제들을 외면하여 결국 가장 중요한 문제인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또한 그들은 얻을 것을 다 얻고서도 만족을 모릅니다. 그들의 탐욕은 어떻게 해서라도 재물을 더 많이 소유하고자 하는 불타는 욕망을 부채질할 따름입니다. 그러다 보면 평안을 빼앗기게 됩니다. 그들의 악함으로 불러일으켜지는 적대감은 그들이 파멸될 경우 모든 사람이 등을 돌리게 할 것입니다. 악인은 절대로 부러워할 존재가 못됩니다. 하나님이 악인을 심판하시는 과정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역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한편, 신약은 또 다른 각도에서 악인의 번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유보 이유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악인의 번영을 보시면서도 당장 심판하시지 않고 참고 계시는 것은 그들에게 이모저모로 회개할 기회를 주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입니다(롬2:4). 설사 그들이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며 하나님의 은혜 베푸심을 무시할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그 일로 자기의 선하심에 대해서 조롱 받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들의 악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더해 갈 뿐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세상 마지막 날은 악인이 더 이상 번영할 수 없음을 말해 줄 것입니다.
사명과 관련한 고난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는 고난에는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에 대해 확고한 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받는 고난도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확고부동한 사명으로 불의와 맞서서 분연히 항거하는 중에 받는 고난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레미야의 경우에서 그 고난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당시 하나님을 배교하여 극도로 타락해 가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세우는 일로 고난이 주어지자 기꺼이 감당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는 사역의 본질상, 자기의 모든 것을 사라져 가는 소리와 같이 의도적으로 날려버렸으며, 헤롯의 부도덕한 삶을 감히 지적하는 중에 순교자로 그 최후의 삶을 마쳤습니다. 사도 바울도 기꺼이 고난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통해 그의 몸된 교회를 세워 나가실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이 세상에 계셨을 경우에 여전히 가해졌을 세상의 박해를 생각하면서, 이제 그분의 일을 맡은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기꺼이 자기의 몸에 채워나갔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짊어지는 사람입니다. 이와 같은 고난은 고난 중에 참으로 귀한 고난입니다. 이때 그 고난은 그리스도인이 받고 있지만 사실은 그 자신이 아니라 그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요 15:1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받는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7)고 말하였습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참으면 복이 있음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는 고난은 그 성격상 때때로 '애매한 고난'일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받는 고난인데 이것이 애매하다는 것은 고난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그 원인을 쉽게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고난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만 위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욥이 받아야 했던 고난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욥은 아무런 흠을 찾을 수 없는 당대 최고의 의인이었습니다. 욥은 참으로 의인이었습니다. 물론 이 말은 그가 아담 안에 있는 죄인이 아니라는 뜻은 아닙니다. 인간은 모두가 아담 안에서 죄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하나님 앞에서 그분에 대한 경외심으로 충만하여 있는 의인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여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 그는 의도적인 죄는 생명을 걸다시피 하며 결코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만에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한 죄들이 있을 것에 대해서도 항상 고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그 소생은 남자가 일곱이요 여자가 셋이며 그 소유물은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므로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욥 1:1-5).
그런데 이상하게도 혹독한 고난이 그를 매섭게 내리쳤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욥 자신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극심한 고난 속으로 빠져 들어갔던 것입니다.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난이었습니다. 욥기 1장 13-19절은 욥이 당한 고난을 자세히 말해줍니다.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사자(使者)가 욥에게 와서 고하되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양과 종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갈대아 사람이 세 떼를 지어 갑자기 약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더니 거친 들에서 대풍(大風)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소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한지라." 여기에 보면, 욥은 스바 사람의 침략으로 모든 식물을 탈취 당하는가 하면, 하늘의 재앙으로 재물이 소실되었습니다. 또한 갈대아 사람의 침략으로 남은 재물마저 모두 탈취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재앙으로 10명의 자녀들이 한꺼번에 몰살되었습니다. 더구나 그의 몸에는 극심한 악질이 생겼습니다. 욥기 2장 7-8절입니다.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욥에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그런 욥을 두고 그의 아내는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고 저주하였습니다. 그래도 욥은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욥 2:10). 그러나 지속되는 극심한 고난은 욥을 참을 수 없는 큰 고통 속에 있게 했습니다. 그래서 욥은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며 탄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였으며, 자신이 모태에서 죽어 나오지 못했던 것을 한탄하였습니다(욥 3:1-26). 그렇지만 욥이 비록 고통을 참지 못하여 그와 같이 말하기는 하였을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았으며 도리어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받는 고난은 시험으로 오는 것임
이제 본문에 등장하는 욥의 고난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봄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받는 고난의 성격과 그 본질적인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도록 합니다. 욥은 그야말로 극심한 고난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자신이 고난을 받는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욥이 받은 고난은 자신에게서나 다른 어떤 사람에게 원인이 있지 않고 '하나님의 허용'에 의해 사단이 욥을 시험하기 위해 일으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욥으로서는 당연히 '까닭없는 고난'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고난이 욥에게 시험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고난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는 욥의 믿음을 더욱 연단하여 한층 그의 믿음이 강화되는 복이 되게 하였습니다.
사악한 사단은 욥을 참소 하였습니다. 그는 욥이 아무런 까닭도 없이, 어떤 얻어지는 유익도 없이 그처럼 여호와를 경외할 리가 절대로 없다고 참소 하였습니다.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 왔나이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욥 1:6-12).
사단은 하나님이 욥에게 복을 주셔서 그가 하는 모든 일이 잘 되게 하고 부요하게 하셨기 때문에 욥이 그에 대한 보답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또 그래야만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바라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참소 하였습니다. 먹고 마시며 입을 것들을 풍족히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참소한 것입니다. 즉 욥은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한 방편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주었던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리면 반드시 하나님을 욕할 것이라고 참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욥에 대한 시험을 허용하자, 갖가지 재난이 일거에 몰아닥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도리어 찬양하였습니다.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1-22).
욥을 향한 사단의 참소는 도리어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순전함으로 경외하는지를 입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러자 할 수만 있으며 택한 자까지라도 미혹시키기 위해 애쓰는 사단은 욥의 온몸에 악창이 생기는 고난을 추가시킴으로써 그를 타락시키려 하였습니다(욥 2:1-11).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여전히 욥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그는 더더욱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이로써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어떤 물질적인 소유를 풍부케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였던 것이 아니었음이 드러났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동기가 어느 정도의 수준까지 순수할 수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도전 받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욥의 경외심을 기복적 심리로 이용하여 하나님을 섬기려 합니다. 더 많은 물질과 소득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보려는 왜곡된 신앙입니다. 또한 치병적 심리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현대의 의학이 치료하지 못하는 자신의 병을 하나님의 도움을 얻어서 치료해 보려는 의도에서 하나님을 경외해 보려는 지극히 불순한 동기입니다. 과연 이런 식의 조건에 의해서 하나님을 섬긴다면 그 사람은 욥에게 주어진 것과 같은 고난이 찾아들 경우 필연코 하나님을 떠나 배교하고야 말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무속신앙을 기독교로 치장한 종교적인 사람일뿐입니다.
그리스도인과 세상 사람과의 차이점은 추구하는 삶의 목표를 점검하게 될 때에 가장 효과적으로 구별할 수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추구해 나갑니다. 심지어는 필요하다면 자기를 희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상 그것조차도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중생하지 않은 자가 그리스도인의 모임인 교회 속에 들어와 그리스도인의 행세를 하며 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설사 그리스도인과 같이 되어 본다고 할지라도 그의 속에 있는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일시 드러내지 않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은 결국 세상으로 다시 나가고 맙니다. 성경에는 그런 인물이 여럿 소개되고 있습니다. 후메내오, 알렉산더, 빌레도, 데마(딤전 1:20, 딤후 2:17, 4:10) 가 그들입니다. 그러나 중생한 참된 그리스도인은 오직 그리고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해 나갑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피조물로서 태초의 창조 목적이 회복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것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저희는 육신을 좇지 아니하고 영을 좇아 행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 나갑니다. 저희의 구원받은 영생의 증거가 그 삶에서 엿보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관점을 고려할 때 그리스도인의 삶에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어떤 교회에 속하였으며 얼마만큼이나 신앙생활을 오래하였는가 하는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무엇 때문에 그처럼 교회에 속해 있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자신의 삶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변화되고 있는가의 여부가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같은 삶의 변화의 실제적인 점검을 가장 효과적으로 할 수 있으려면 그 사람이 추구하고 있는 종교적 행위의 동기와 그 내용을 살펴보면 됩니다.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여잡는 확신의 근거는 성경적 근거에 입각한 합리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대충 알고 막연히 아는 가운데 억지 고집으로 자신의 구원을 강변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백해무익합니다.
종교적인 치장으로 자기를 꾸미는 자와는 달리 하나님은 욥의 경외가 이기적인 목적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단이 욥을 참소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시험하는 고난을 허용하였습니다. 결국 이 고난은 욥의 순전함을 증명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나게 하신 의도된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욥의 모든 것을 다 치게 하여 빼앗을지라도 그의 생명만은 결코 건드리지 못하도록 사단의 역사를 제한시켰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욥 1:1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만은 해하지 말지니라"(욥 2:6).
그리스도인이 욥이 겪어야 했던 까닭 없는 고난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사실을 유념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을 통하여 그에게 있는 믿음의 순수성을 드러내 보이고자 하였습니다. 실제로 이 고난을 통하여 더 더욱 욥의 순전성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흔히 일부에서 그렇듯이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을 매사에 죄의 결과에 의한 하나님의 형벌적 차원에서만 생각하는 것은 무리이며 잘못된 신앙입니다. 이것은 마치 육신에 찾아드는 질병을 매사에 귀신의 탓으로 돌리는 미신적인 신앙과 같습니다.
욥과 그의 친구들이 적절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오류 속에 빠져 허덕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저희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한 부족으로 말미암습니다. 저들은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고 있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욥이 고난받는 이유를 오직 죄의 결과로만 돌리려 하였습니다. 사실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을 변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희는 하나님에 관해서 가지고 있는 자기들의 생각을 변호한 것이었을 뿐입니다. 욥의 친구들의 신앙이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야만 했던 맹목적인 신앙이었음은 이후 욥기 42장 7--8절에서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리 너희의 우매한 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이해의 도움을 받아야 함이 필연적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해 그 자체에만 두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자신에다가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불완전한 신앙지식에 머물러 있었으면서도 욥의 친구들은 그의 고난의 의미를 욥이 은밀하게 범죄한 감추어진 죄들 때문이라고 편협한 생각으로 몰아부쳤습니다. 첫번째 논쟁자인 엘리바스는 고난은 악한 자가 당하는 법이라는 논리 속에 마음에 감추인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으라고 압력을 가하였습니다. 두번째 논쟁자인 빌닷은 만일 욥이 무죄한데도 억울하게 고난을 받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고난을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다는 것이냐?'라는 논리로써 역시 그를 몰아 부쳤습니다. 세번째 논쟁자인 소발도 욥에게 자기 변호를 그만두라고 엄중히 말하면서, 욥에게 일어난 고난 그 자체가 그의 감추인 죄를 폭로하는 것이 아니냐고 세차게 몰아 부쳤습니다. 이런 식이었기 때문에 참으로 욥의 친구들은 그에게 진정한 위로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한결 같이 욥에게 감추인 죄를 자백하라고만 윽박질렀습니다.
고난의 진정한 목적
욥은 자백할 죄가 없었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그는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그 앞에서 그는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의미를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은 이제까지 진실되게 의로운 삶을 살아왔다는 사실입니다. 욥기 23장 10절 상반절에서 그런 욥을 볼 수 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그런 욥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고난을 이해할 수 있기 전에는, 심각한 내적인 고뇌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 인생임을 생각하면서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며 아무런 범죄도 없이 의롭게 살아왔는데도 지금 자기가 고난을 받고 있는 것에 대해서 해명하여 자기의 친구들을 납득시킬 이유를 도무지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없는 죄를 억지로 있는 것처럼 고백할 수도 없었습니다. 혹 욥이 그런 식의 의식 없는 고백을 한다면 그것은 분명 고난의 문제를 푸는 열쇠가 되지 못할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의미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갈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 23:8-9)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그는 양심을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아님을 분명히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욥 23:11-12).
그리고 마침내 욥은 결정적인 해답을 발견하였습니다. 문제의 해결을 하나님의 고등하신 섭리라고 하는 차원에서 이해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이해가 아니라 확신이었습니다. 그의 고백을 다시 한번 봅시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 지금의 고난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이며, 그 결국은 자신을 정금 같이 만드시는 선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섭리적 확신을 가졌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섭리가 자신의 삶에 때로는 고난이라고 하는 부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할지라도, 끝까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나아가겠다는 강한 결심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면 욥의 그 확신은 과연 어디에서 왔습니까? 그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 실제로 살아왔던 순전하고 정직한 경외의 삶에 있었습니다. 만일 그가 이런 삶을 실제로 살지 않았다면 그처럼 단호한 확신을 토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동시에 욥의 이 확신은 하나님의 판단을 자기 양심의 판단 기준으로 삼은 데서 나온 담대함이었습니다.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욥 23:11-12). 그는 매사에 하나님의 판단을 염두에 두고 행동을 하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이제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언제나 바르게 살아왔음을 고백하면서, 이번에 자기가 당한 엄청난 고난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단련시키실 목적으로 주신 시련으로 주신 것임을 알기에 이 고난이 있은 후의 자기의 모습은 정금 같이 되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 욥은 고난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다 나은 소망으로 나아가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욥의 양심은 자기 확신에 의해서 작용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교훈과 인정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었습니다. 자기 스스로의 결정에 의한 확신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임을 생각할 때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그러나 욥의 확신은 신앙적 양심에 따른 확신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비록 지금 자기가 고난을 당하고 있는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것임을 이해하면서, 궁극적으로 최종적인 결과가 선을 이룰 것을 확신하였기에 자신의 보다 나은 상태로 회복될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그의 이러한 확신과 소망은 신앙적 양심에 부끄러움 없이 산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의로우심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가질 수 있는 신앙이었습니다.
여기에서 고난의 진정한 목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는 고난은 하나님의 선한 의도에 의해서 베풀어지고 있는 것으로서 그들을 신앙을 보다 상승시켜 나갑니다. 즉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합니다.
고난을 인내하여야 함
이제 욥은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그러나 참으로 담대함으로 고난을 인내합니다. 단순히 참아내는 인내가 아니었습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감당하는 인내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지혜와 의를 경외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끝까지 의인이 고난 속에 처해 있도록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허용하는 목적은 의인의 믿음이 연단되어 가는 것에서 온전히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언제까지 사단이 욥에게 고난을 주어 시험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욥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일정하십니다.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욥 23:13-14).
여기서 욥의 인내의 성격을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욥의 인내는 단순한 기질로 버텨내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어쩔 수 없어서 묵묵히 고난을 참아내는 피동적인 묵인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운명의 탓으로 돌리며 체념하는 숙명적인 소극성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은 어떤 위기의 고난과 맞부딪힐 때, 그야말로 마지 못하거나, 죽지 못해서 견뎌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 환경이 사람을 인내할 수 있게 만듭니다. 그러나 욥의 인내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무관심으로 애써 외면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람은 성격에 따라서는 자신이 받고 있는 참기 힘든 고난을 일부러 무관심으로 애써 외면하여서 고난에 매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보다는 긍정적이며 낙관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좋은 것을 생각하고 찾는 등 할 수만 있으면 고난을 잊고 넘어갈려고 합니다. 그러나 욥의 인내는 그런 차원의 인내가 분명 아니었습니다.
dyqdytq욥욥의 인내는 대단히 의식적(意識的)인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는 가운데 자신의 고난을 대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욥은 극심한 고난이 연속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욥은 고난을 적극적으로 인내해 갔습니다.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의식하는 것이 없이 그저 불가항력적으로만 받아들여서 참아내는 인내라면, 그것은 인간이 자기의 기질을 발휘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욥의 인내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자세를 지향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라면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적극성이었습니다. 욥의 이 확신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친구들처럼, "악인은 항상 실패하고 의인은 언제나 번성한다"는 사고방식으로 고난에 대처하지 않았습니다. 확실히 욥은 하나님의 고등하신 섭리 안에서 연단을 받고 있었습니다.
욥의 고난에서 보는 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연단받는 고난을 필연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그에 따라 이제까지의 논증을 다음과 같이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부터 그리스도인으로서 받는 고난은 분명히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언제나 어떤 목적이 있기 때문에 주어지며, 하나님께서는 선으로 이용하여 그리스도인에게 유익을 가져다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이 가진 믿음이 순전하게 존재하는 것을 보고자 하십니다. 과연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이 고난받는 삶 속에서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반짝반짝 빛나기를 원하십니다. 베드로전서 1장 6-7절은 고난에 담겨진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물론 고난을 견딘다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믿음의 유익을 위하여 고난을 허락하셨다는 것과 고난이 주어진 배후에는 하나님의 주장하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맹목적으로 환난과 고난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도리어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생명의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이유로 그리스도인은 주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왕적 권세에 의해 세상의 어떤 환난도 초월하는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 5장 1-5절에서 우리는 그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그러나 이 모든 사실은 한 가지 확고부동한 전제를 잊지 않고 있어야 하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 - 하나님의 뜻 안에 거하는 삶을 사는 것 - 을 행하는 데서 오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악을 행함으로, 혹은 하나님의 뜻 안에 거하지 않음으로 받는 고난은 악행에 대한 징벌의 의미밖에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기초하고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은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고난에 참여하였습니다. 사도들은 기꺼이 고난받는 것을 합당히 여겼습니다. 사도행전 5장 41절을 보십시오.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에서 진행되어 온전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후 1:3-6).
선을 행함으로 받는 고난의 유익
만일 그리스도인이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다면, 그는 자신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고 있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은 그분께서 당하신 고난에 기꺼이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 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받는 고난은 그것이 고난이기 이전에 사실상 우리 안에 참된 생명이 있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겪게 되는 것은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여 그분의 고난을 맛보는 것을 통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분의 부활을 맛보게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10-11).
또한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를 본받아 닮아갑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 13:12-13).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받는 것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관계와 그분 안에서 얻는 구원의 영광을 더욱 확실하게 인식해 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2-16).
욥의 고난이 주는 결론
우리는 지금까지 욥이 고난 당한 사실을 근거로 하여 고난이 주는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욥기를 통하여 내릴 수 있는 결론에 대하여 매우 진지한 자세를 가져야만 합니다. 욥기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실 경우, 그것은 어떤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온전케 하여 구원을 견인해 가시는 것임을 말씀해 주십니다. 이것이 욥기가 주고자 하는 교훈입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자라면 그 누구를 불문하고 보여줄 수 있어야 할 마땅한 도리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구원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리 극심한 고난이 몰려오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순전성과 정직성을 결단코 상실하지 않기 마련입니다. 고난은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의 진위성을 시험하는 매우 결정적인 저울입니다. 이 사실을 계시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진실로 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