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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부흥
성경본문 : 느헤미야 8: 5-6
5. 학사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저희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6.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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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이스라엘의 영적 대각성 운동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이 신약의 영적 대각성 운동이라면 본문은 구약의 영적 대각성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와 보니 성읍은 황무케 되었고, 성문은 불에 타버렸고, 성벽은 훼파되었습니다. 느혜미야를 중심으로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고, 또 훼방하는 세력도 많았지만 하나님의 기적같은 은혜로 오십 이일만에 완성되었습니다.
하지만 엄청난 위업을 달성했음에도 정작 더 중요한 것은 내적인 개혁, 겉으로 드러난 성공보다 심령의 부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겉으로 볼 때 아무리 화려하고 또 교인의 수가 아무리 많다고 할지라도, 교회의 진정한 부흥은 교인들의 심령의 부흥에 달려 있습니다.
계 3:1에 사데 교회를 향해 책망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우리의 중심을 보고 계시는 주님 앞에 우리는 무엇으로 자랑하겠습니까? 화려한 건물과 숫자의 많음이 교회의 부흥인 것처럼 착각한다면 그것처럼 위험하고 어리석은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대형교회에서 부목사 생활을 하면서 물론 열심이 특출난 사람들도 많지만 개중에는 그 속에서 안주하는 자들의 모습도 보았습니다.
이런 자들의 특징은 실제로는 자신의 신앙 성장을 위해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으면서 교회의 유명세를 타고 그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마치 자신의 신앙이 대단한 것처럼 착각하고, 신앙과는 전혀 상관없이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한 일을 마치 커다란 신앙의 업적을 이룬 것처럼 포장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런 자들을 향해 정확하게 지적하시는 주님의 음성은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내 속에 영적인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겉으로 치장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에 무슨 소용이 있는 것입니까?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내면에 일어난 영적 부흥에 대해“진정한 영적 부흥은 바로 이런 것이구나!”하는 것을 우리들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살펴보면서 성도님들의 내면에 그리고 안산경신교회에 영적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1. 심령에 사모함이 있을 때 영적 부흥이 일어납니다.
1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그 본성에 거하였더니 칠 월에 이르러는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라고 했습니다.
누가 그들을 모으게 한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모인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백성이 일제히 모인 것입니다.
시 137:에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로 시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탄식의 노래가 있습니다.
저희 어릴 적에 Boney M이라는 그룹이 이 시편의 내용을 인용하여 ‘Rivers Of Babylon’이란 제목으로 부른 것을 자주 들었는데 여러분 중에도 들으신 분들이 많이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다고 했는데 시온은 예루살렘의 다른 이름입니다. 70년간의 바벨론 포로 기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일한 낙은 바벨론 강변에 앉아 시온을 기억하며 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예전의 화려한 예루살렘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성을 재건하는 일에 하나가 되어 마침내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공허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 즉 예배를 통한 하나님의 관계의 회복입니다.
그래서 일제히 수문 앞 광장으로 모여든 것입니다.
영적 부흥이 일어나기 위한 제 1의 조건은 심령의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처럼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라고 고백한 시편 기자와 같이 주님의 은혜를 갈급한 마음으로 사모할 때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냉랭한 가슴에는 불을 지필 수가 없습니다. 불꽃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모여들어야 합니다.
히 10:24에 “서로 돌아 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같이 하여 온전히 하나님 앞에 모이는 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모이기 위해서는 자신의 사사로운 일로 핑계 삼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전에 모이기를 힘쓰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영적 부흥이 일어납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1절에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하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한 자리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한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럴때 영적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심령의 전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에스라에게 먼저 요구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모세의 율법책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심령의 전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세울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세울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은 벽돌로 쌓아 세울 수 있지만 살아있는 성전, 즉 우리 마음의 성전은 생명이 없는 벽돌로는 세울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십시오”라고 요청합니다.
은혜받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롬 10:17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을 최우선 순위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장애되는 것들을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지금 수문 앞 광장에 모여든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사모하는 자들입니다. 수많은 시간을 시온만 생각하며 울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까?
신앙생활은 자신의 생각대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은 신앙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살지 않으면서 자신은 바르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들입니까?
옛날에 어느 시골에 할머니들이 한 방에 모여 있는데 어떤 사람이 호도를 갖고 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방 안에 있는 할머니들이 전부다 호도를 처음 본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 할머니가 묻습니다. “그것이 뭐여?” 그러자 옆에 있던 할머니가 “이리줘봐, 무엇인지 모르겠네” 그러니 그 옆에 있던 할머니가 “눈으로 본다고 아나? 흔들어 보아야지” 또 그 옆에 있는 할머니가 “내가 한번 볼께(혀로 핥으며) 잘 모르겠네” 그러니 또 옆에 있는 할머니가 “(냄새를 맡아보며) 나도 잘 모르겠네”
그러자 호도를 가져온 사람이 호도를 문턱에 대고 재떨이로 깨 가지고 나눠줍니다. 그제서야 “왜 이렇게 꼬소하디야!”
이렇게 해서 할머니들이 호도가 어떤 것인지, 그 맛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것인지, 그 맛이 어떤 것인지는 먹어본 사람만이 아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자세를 보십시오. 5절에 “학사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저희 목전에서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섰다”고 했습니다. 3절에 새벽부터 오정까지 읽었다고 했습니다.
새벽을 6시라고 잡아도 6시간 동안을 읽은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서서 들었습니다. 다른 시간에는 활발하게 움직이다가 기도 시간만 되면 하품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내내 정신이 또렷하다가도 설교 시간만 되면 조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자세를 우리는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6절에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고 계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자기 가치는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귀하다고 여김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그렇게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히 11:4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둘이 똑같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창 15:6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듣고 계시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여러분의 자세는 수문 앞 광장에 모인 자들과 비교할 때 어떤 모습입니까?
하나님 앞에 스스로 귀하다고 여김을 받을 수 있는 행동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3. 회개할 때 영적 부흥이 일어납니다.
7절에 보면 에스라가 율법책을 낭독했을 때에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율법책은 히브리어로 되어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로 있던 바벨론에서는 아람어를 썼기 때문에 히브리어로 읽어줄 때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았고, 그래서 레위인들이 아람어로 통역을 하며 그 뜻을 설명하니까 백성들이 울기 시작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자신을 바라보게 되고 그래서 울기 시작하는데 이 눈물은 회개의 눈물입니다.
영적 부흥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심령 속에 파고들어 우리의 영혼을 수술할 때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히 4:12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회개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순간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 알게 되고, 하나님 앞에 섰다는 것이 너무나 두려운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 청중들이 가슴을 치며 “형제여 어찌할꼬?”하며 외치는 장면이 있습니다. 영적 부흥은 참된 회개를 동반하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느 1:에 보면 느헤미야가 기도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 주의 종 모세에게 주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성경에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영적인 지도자가 누구입니까?
먼저 죄를 깨달은 자입니다.
그래서 오래 전에 그 죄 때문에 울며 금식했던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성도들에게 가장 큰 힘입니다.
이제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느헤미야가 뭐라고 합니까?
9절에 “오늘은 너희 하나님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12절에 이 말을 들은 모든 백성들은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주며 크게 즐거워하였다”고 했습니다.(12)
회개할 때는 물론 울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성도의 삶 자체는 기뻐하는 삶입니다.
주일이 왜 주일입니까?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러니 적어도 주일 만큼은 기뻐해야 합니다. 주일에는 성도의 얼굴에 밝은 빛이 감돌아야 합니다. 축제 분위기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 장로님의 장례식에 간 적이 있는데 보통 장례식 분위기가 어둡지 않습니까? 그런데 유족들이 하나같이 손님들을 웃으며 맞는 겁니다. 그리고 영정 사진은 항상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장로님의 영정은 환하게 웃는 사진을 걸어 놨습니다. 처음에는 이상했는데 이 분의 유언이 그렇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보니까 장례식에 참석을 해도 기분이 좋습니다. 그 사진을 보면서 “아! 이 분은 웃으면서 천국에 가셨구나”하는 느낌이 드는 겁니다.
장례식 사진도 웃는 얼굴로 걸어 놓을 수 있는 사람, 그게 바로 성도 아닙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어느 때나 기뻐할 수 있고, 세상 것 때문에 울고 웃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할 수 있는 그런 성도가 되시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교회도 본문에 기록된 영적 부흥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 늘 주님의 전을 사모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일 줄 아는 성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추어 늘 회개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인하여 참된 기쁨을 소유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