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해방의 공간 인천에서 그때까지 주인으로 살아왔던 일본인들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일본 외무성 종전 연락중앙사무국의 자료에 따르면, 1945년 8월 패전 당시 한반도에 살고 있었던 일본인은 총 97만7천970여 명이었다. 조선총독부 공식 인구조사(1944년 5월 簡易國勢調査)에 따르면 한반도 거주 일본인 총수는 71만 2천583명이고, 인천부의 총인구 21만 3,833명 중 일본인은 2만 1,740이었다. 이들은 세화회를 통해 일본으로 송환되었다.
식민 1세대 고타니 마스지로(小谷益次郞)가 회장에 추대
재인천 일본사회는 일본인들이 본국 송환을 위해 세화회를 만든다. 세화회는 이름 그대로 일본인들의 무사 귀환을 돕기 위한 조직으로 일본인과 한국인, 미국인 사이에 두루 평판이 좋은 고타니 마스지로를 회장으로 추대했다.
고타니 마스지로(小谷益次郞)는 1889년 4살 무렵 어머니의 품에 안긴 채 인천에 건너와 살다가 일제 패망 후 일본으로 철수해간 식민1세이다.
그는 고베(神戶) 출신으로, 개항 초기 가족 단위로 이주해온 드문 경우에 속한다. 고타니의 본격적인 사회 진출은 일본 감리교 신자로서 기독교청년회 주사의 직함을 갖고 인천 일본 기독교청년회 활동을 하면서부터다. 그는 1926년경 당시 새로이 등장한 ‘사회사업’을 결합한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인천에 그 이름을 알렸다.
이후 고타니는 인천 제2공립보통학교와 인천중학교 설립에 큰돈을 기부함으로써 일본천황의 감수포장을 받는 등 인천 사회의 유력자로 부상했다. 1935년 5월 인천부회의원에 당선되었는데 그의 직업은 대가업자(貸家業者 : 부동산임대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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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타니 마스지로(小谷益次郞)
고타니 마스지로는 1931년 6월 ‘인천부사’ 편찬자로 위촉되었고, 편찬의 총괄책임을 맡았다. 편찬과정에서 축적된 고타니의 조선학과 인천에 대한 지식과 이해는 패전 후 미 군정청 장교들과 교류할 때 매우 유용했던 것 같다. 게다가 기독교 신자이고 영어로 대화가 가능했으므로 고타니는 미군들에게 상당한 신뢰를 받았다. 고타니는 “일본인으로서 조선학이나 취미를 기초로 교우할 수 있었던 일은 일본 동포들이 미군 친구를 가진 것과 다를 바 없었다”고 표현했다.
고일 기자는 “패망한 일본인들이 인천에서 가장 최선의 대우를 받고 한 치의 부자유 없이 무사히 귀국을 하게 된 것은 고타니의 힘이었다.”고 말했다.
▲1980년대 전동의원 시절의 안경수 저택
![안경수-집이-아리지-타운-연립으로.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enews.incheon.go.kr%2Fupload%2Feditor%2F20180813%2F8239ac03-2a4a-4372-827a-4c8d001ce427.JPG)
▲안경수 집 자리는 아리지 타운 연립으로 바뀌었다.
‘인천부사’ 편찬 시점에 고타니는 전환국 방판 안경수(安駉壽)의 별택을 자택으로 살면서 1932년 말에 인천제2공립보통학교 설립기금으로 20원을 기부했고, 2년 뒤 1934년 4월에는 인천중학교 설립기금으로 5만원을 내놓았다.
고타니 마스지로는 1947년 모리타 요시오(森田芳夫)의 권고를 받아 ‘인천 인양지’를 집필했고, 재인천 일본인 모임인 ‘후쿠오카 인천회’의 지원을 받아 1952년 5월 단행본으로도 출간했지만, 고타니 자신도 “흥미 위주의 철수 이야기를 쓰고 싶은 어렴풋한 생각에 작은 고리짝 하나 분량”의 관련 자료를 챙겨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인천석금’의 저자 고일 기자의 회고에 따르면, 그 집의 응접실에는 웬만한 도서관에 비길 만큼 많은 장서가 있었고, 그의 젊은 아내가 남편의 원고정리를 돕거나 남편의 구술에 따라 대신 원고를 집필하기도 했다고 기억한다.
![전동일대2.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enews.incheon.go.kr%2Fupload%2Feditor%2F20180813%2Fd10d2dec-3931-4dd4-9d18-5402b891a60a.jpg)
▲1906년 전동 안경수 저택 일대 사진
![그림2.jpg](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enews.incheon.go.kr%2Fupload%2Feditor%2F20180813%2F267bf58e-6937-427f-b991-86d06bbbc33f.jpg)
▲안경수 저택이 헐린 공터. 아직 연립이 들어서기 전이다.
1945년 8월 15일 패전 후에는 인천부회 부의장으로서 인천 세화회를 조직하여 일본인들의 철수작업에 헌신했지만 처음부터 그의 목표는 철수가 아니라 조선에 잔류하는 것이었다. 한국 강제병합 이전의 거류민회와 같이 해외 거류민 자격으로 ‘미래의 거류민회’를 만들겠다는 구상이었다. 그는 1889년 이주해 와서 1910년 강제병합 되기까지 20여간 거류민으로 살았던 기억과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해방된 조선 땅에서도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거류민회를 이끌어갈 자신도 있었기에 8월 20일 밤 식민 2, 3세들에게 연락하여 모이기를 청했다. 이들은 조선출생자로서 일본에 별 연고가 없으므로 자신이 태어나서 자란 조선 잔류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러나 10월 13일 재조 일본인 전면 철수가 확정되었고, 그는 ‘깨끗하고 멋진 퇴각’을 외치며 인천을 떠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일본에 돌아간 후에도 재인천일본인 세화회를 유지했고 ‘후쿠오카 인천회’의 고문을 맡았다. 고타니는 자신을 “조선의 풍토와 자연에서 키워진 인천아 (朝鮮風土と天惠にはぐくみ育てられて來た仁川兒です)” 라고 칭했다.
1946년 3월 이별가로 ‘사요나라 인천’ 불러
1946년 3월 2일 인천을 마지막으로 떠나던 날, 고타니 일행은 인천역 플랫폼에 마중 나온 미군정창 장교들 앞에서 ‘사요나라 인천’을 노래했다.
후일 고타니는 재인천일본인 철수를 이끈 인천세화회 회장으로서 자신의 활동을 “인천의 임종을 지키고 그 장례를 치른 것”이었고, 인천 인양지는 인천에 대한 ‘조사(弔詞)’라고 술회했다.
경제적 약탈에 충실했던 식민지 한국에서 철수하면서 일본인들은 그들의 식민지에서의 기억을 구술로 남겼고, 해방과 철수의 공간에서 모아진 기억들은 지금까지도 1년에 한권씩 책으로 엮어 출판되어 그 자금은 식민지 경영에 참여했던 모임들이 그 후대에 이르기까지 일본 내에서 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小谷益次郞, 仁川引揚誌:元仁川在住者名簿 , 大起産業, 1952. 표제지에 수록된 노래 “さらば仁川”.
이 책은 「인천철수지」(윤해연 역)라는 제목으로 번역, 황해문화 2001년 봄호와 여름호에 나눠 실렸다.
이 글에서는 대개 번역본 「인천철수지」에 의존했으나, 원서에서 인용할 경우 인천인양지 로 표기했다.
글·사진 장회숙 도시자원디자인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