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필의 개념과 특성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들어가며
수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개념을 정리하는 것에서 그 답을 찾아나가는 것이 타당하리라 본다. 왜냐하면 수필의 개념은 수필의 특성을 가장 간단하고 분명하게 말로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필의 개념을 규정하는 것은 수필의 정의를 내리는 것이다. 정의의 방법 중에서 가장 엄격한 것은 분류적 정의다. 분류적 정의는 정의되는 말, 정의되는 말의 상위 개념, 정의되는 말의 동위 개념과 특성을 포함한다. 수필의 개념을 분류적 정의에 따라, 정의하면, '수필은, 내용을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하는(지은이와 작품 속의 말하는 이가 일치하는), 제재 또는 주제 중심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지금까지 내려진 어떤 수필의 정의보다 정의로서의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본고의 목적은 수필의 개념을 바르게 정립하는 데 있어서 걸림돌이 되고 있는 수필에 대한 기존 개념을 비판적으로 살펴보고, 수필의 개념이 성립되는 과정과 수필이 주는 기능을 살핌으로써 수필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데 있다.
II. 펼치며
신라시대 설총이 쓴 한문수필 「화왕계」를 효시로 하는 수필은 지금껏 그 개념이 명확하지 않았다. 1930년대 발표된 수필 이론에 의거해서, 모호하게 정의되어져온 수필에 대한 개념으로 수필은 문학이면서 문학의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것은 한마디로 제대로 된 이론체계가 서 있지 않은 탓이었다. 수필을 일컫는 개념부터 잘못되어 있었으니, 이론이 제대로 정립될 수 없었고, 따라서 수필을 문학으로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흔히 인용되는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는 정의와 '수필은 형식이 자유로운 글'이라는 정의는, 수필의 특성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주지 못하며, 수필을 다른 종류의 문학과 구별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떤 이는 수필이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란 비유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글자 그대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이런 정의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수필을 잘못 쓰고, 잘못 쓰면서도 누구나 쉽게 쓰겠다고 나서고 있기 때문에 이런 정의를 내린 사람은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까지 금과 옥조처럼 여겨온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는 정의의 잘못된 점을 지적해 보자. '붓 가는 대로 쓴 글'이란 한문의 '수'와 '필'을 번역한 것으로 뜻이 불분명한 정의다. 정의는, 정의되는 말을 모든 사람에게 같은 의미로 이해되도록 진술되어야 한다. 따라서 올바른 정의는 비유로 표현되지 않아야 한다.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는 정의는 의미가 불분명한 비유적 정의다. 이러한 정의는 수필에 속하는 작품과 수필에 속하지 않는 작품을 구별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수필을 써본 사람이면, 이런 안이한 수필관에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 작품이란 소재와 주제가 겸비되어야 하고 또 매끈하게 다듬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형식과 내용이 조화되고 통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수필도 하나의 작품이라면, 이것을 붓 가는 대로 써 버릴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흔히 한국 문학자들은 위와 같은 정의를 내리면서, '수필'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중국 남송 시대 홍매의 말을 인용한다. 그러나 홍매가 사용한 수필의 뜻은 문학의 한 종류를 뜻하는 수필의 뜻과 같지 않다. 홍매는 수필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였으나, 이 말을 문학의 한 종류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다음으로 '수필은 형식이 자유로운 글'이라는 정의를 살펴야 하는데, 이러한 정의를 내리는 사람들은 '형식'이 무엇을 뜻하며, '자유롭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밝히지 않는다. 그러므로 '형식'이라는 말이 무엇을 가리키며, 형식이 자유롭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따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언어로 구성되는 작품에서 형식이라는 말은 작품 쓰기의 규칙을 가리키는 수가 있다. 평시조는 네 음보가 한 행을 이루고, 세 행이 한 연을 이룬다. 평시조를 쓰는 사람은 이 규칙에 따라서 작품을 짓는다. 그래서 평시조의 형식은 네 음보가 한 행을 이루고, 세 행을 한 연으로이루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공식적인 설명문은 서론, 본론, 결론으로 구성된다. 이것이 공식적 설명문 쓰기의 규칙으로서의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필은 형식이 자유롭다'는 말은수필에는 쓰기 규칙이 없으므로, 쓰기 규칙에 따라 쓰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현대시 중에는 일정한 쓰기 규칙에 따라 쓰지 않는 것이 많고, 현대 소설도 대부분 정해진 규칙에 따라 창작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현대시나 현대소설 중에는 형식이 자유로운 부분이 많다. 그러므로 '형식이 자유롭다'는 정의는 수필을 현대시나 현대소설과 뚜렷하게 구별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는다. 다른 편으로 잘 쓰여진 수필은 작가가 설정한 규칙에 따라 작품의 의미가 발전하도록 구성되기도 한다. 이러한 수필을 형식이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수필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점에서 '수필은 형식이 자유로운 글'이라는 정의도 수필과 수필이 아닌 것을 구별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정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붓 가는 대로 쓴다'는 것을 아무렇게나 써도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지만, 그렇게 받아들여진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애시당초 분명치 못한 정의 자체가 우리 수필을 오도해 온 결과로 오늘날 수필을 문학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세력들에게 좋은 빌미를 제공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수필이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거나 '수필은 형식이 자유롭다'는 정의는 반드시 수정되어져야 할 것이다. 글은 붓이 쓰는 것이 아니다. 작가가 어떤 사상과 느낀 감정이 있어 그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써지는 것이다. 그 의도를 표현함에 있어 수필은 일정한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쓸 수 있으며, 그 형식은 어디까지나 작가 자신이 갖고 있는 성격과 품격에 의해 이루어짐을 말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작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인 주제가 반드시 있는 것이다. 그래서 수필은 필자와 작품 속의 화자가 일치하는 주제나 제재 중심의 문학으로 정의된다고 하겠다. 수필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수필에서의 주제는 작품 속에 내면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수필에 대한 개념이 정리되었으니, 이번에는 수필을 통해 무엇을 배우는가에 대해 살펴보자. 시나 소설과 달리 수필은 여러 가지 특성을 지닌다. 무엇보다도 수필은 삶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안식을 줄 수 있는 문학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수필은 인간치료제다. 감동을 생명으로 삼고 있는 수필이 작가의 인품과 융화되어 문학성을 가질 때 한 편의 시보다 한 권의 소설보다 더 진한 감동을 독자에게 안겨줄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수필만이 갖는 매력이다. 수필은 허구 세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진실의 세계를 다룬다는 측면에서 어느 문학보다 감동의 전달력이 강한 문학이라는 데 이견을 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인간이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 답은 생각할 수 있다는 사유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생각할 수 있다는 이 자연스러운 지각, 과학적이고 실용적이면서 미각적 감각에서 오는 진 선 미 이런 것들로 인간이 살아 있다는 존재를 인정받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안다. 생명은 원색의 덩어리다. 반짝반짝 광채가 나고 살아 움직이는 색깔을 지니고 있다. 눈동자는 검고 푸른 빛나는 색깔을 지니고 있으며 머리카락 또한 흑색이나 황금색의 싱싱하고 윤기 흐르는 생명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 생명이 식어가고 있을 때 그 광채를, 그 색채를 점점 잃어간다. 나무를 불태우면 회색 빛으로 남듯이 수필은 이러한 인간의 식어 가는 생명을, 잃어 가는 정신을 보충하여 주는 끝없는 인생의 이정표다.
인간이 살아가는 가운데는 헝클어진 많은 사상들이 널려 있다. 그 가운데 인간은 희비가 엇갈리며 고뇌하고 번민하면서 우리 조상이 살아간 그 길을 살아간다. 경우에 따라 이 말을 듣고 저 말을 들으면서 어느 쪽의 말이 옳은지 자기 충돌을 빚으면서 수많은 날들을 고뇌의 사슬에 매일 때도 있다. 수필은 이러한 인생의 진로를 빠져나가도록 안식을 주는 문학이다. 물론 소설이나 시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오늘날 사람들은 간편한 것을 좋아한다. 씻어서 만들어 먹는 식품보다는 물만 붓고 끓여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 식품을 찾고, 오랜 시간을 두고 읽을 수 있는 소설보다는 안락의자에 앉아서 즐길 수 있는 텔레비전을 선호한다. 더욱이 시는 독자를 외면한 지 이미 오래다.
문단의 어느 대가는 <시는 너무나독자가 없다. 그건 시대 감정을 붙잡지 못한 탓이다.> <자기가 써서 자기가읽는 게 시다.>라고 시의 독자가 없음을 통탄했다. 그것은 시가 어렵다는 것이다. 독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말의 유희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인 것이다. 이처럼 오늘의 시는 새가 노래하듯이 물이 흐르듯이 노래 불리어지지 않는다. 옛날의 시는 한 줄만 건드려도 감흥을 일으키고 촌부가 읽어도 그 맛에 저절로 엉덩이 가락이 나왔다. 이러한 시를 대신할 문학이 현대 수필이다. 현대 문명이 가져온 사상의 혼란과 상상력의 약탈에 현대시를 빼앗겼다면 수필은 그것으로써 독자를 빼앗아와야 하는 것이다. 수필은 짧으면서도 난해하지 않다. 그것은 이치를 이야기하며 사리의 핵심을 찌르는 빈틈없는 글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기계처럼 움직인다. 어제가 오늘이 아니며 오늘이 내일이 아니다. 시간마다 변하고 날마다 달라진다. 그 속에 살아가자니 인간이 기계화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수필가는 그 속에서 변하지 않는 선량한 시민으로 남는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은 지루한 시간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추억하게 된다. 때문에 오늘과 내일의 시공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새롭게 창조된 세계를 만나는 것에는 언제나 설레임이 따른다. 수필의 감동이 주는 파장은 오래토록 영향으로 남게 된다. 그래서 독자들은 이 시대의 애절하면서도 간절한 인간 희구의 노래를 듣길 원한다. 이러한 욕구에 화답할 수 있는 문학이 바로 수필이라는 것이다. 수필은 우회와 왕복의 난해성보다는 솔직함과 유창함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메마른 지성에 더욱 높은 차원의 정서를 부여해야 하는 시대적 요청의 문학이 수필이다. 그러므로 수필은 미적 차원이 높은 문학적 예술로 더욱 승화될 것이다. 리처드의 말을 빌리면, 예술로서의 수필은 독자에게 생활에 대한 지배력, 통찰력, 생활의 가능성에 대한 식별별을 증진시킨다고 하겠다.
III. 나오며
이상에서 수필의 개념과 특성을 정의와 기능의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수필은 주제와 제재 중심의 문학으로서, 위에서 살핀 특성을 밑거름으로 하여 피어난 꽃이라 할 수 있다. 문학가는 인류의 교사여야 한다는 말이 있다. 수필이 안식의 문학이라는 것은 수필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이 삶의 정도라는 것이다. 수필가의 사명은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길인지 그 길을 밝혀주는 것이다. 꽃도 생태에 따라 향기를 달리하듯 수필 또한 어느 특성에 치중했느냐에 따라 성격을 달리한다. "위대한 작품은 우리를 가르치지 않고 우리를 변화시킬 뿐이다"라고 말한 괴테의 말은 드킨시가 말한 '힘의 문학'이 갖는 감동을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감동은 쾌락이며 일종의 카타르시스다.그것은 갈등의 해소요, 욕구의 실현이다. 이와 같은 감동을 우리는 수필을 통해서 만날 수 있다. 우리가 수필을 읽는 이유는 그 속에서 고상한 쾌락을 만나기 때문이다. 수필가가 얼마나 진실하게 자신의 삶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해서 참신하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수필의 향기와 질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수필의 특성을 본질적으로 재인식하면서 수필을 고급문학으로 발전시켜 가는 일이다. 수필이 문학적 미에 의한 문학적 진리에의 작업을 떠나는 순간 그것은 무용의 공염불이요, 불로의 사막으로 변하고 말기 때문이다.
지라르의 <욕망이론>으로 본 수필의 구성 전략
- 주제의 간접화 -
중국에는 시법이 있어, 모든 문필가들이 창작에 앞서, 이 시법을 읽는다고 한다. 필자는 수필을 공부하면서 수필 창작의 핵심적 원리가 없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수필의 문학적 위상이 약화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문학 창작에 어떤 틀이 있다면, 그 하부 구조에 속하는 수필의 장르에도 무슨 법이 있을 것이다. 필자는 수필을 쓰면서 '수필다운 수필이 되려면 어떤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가' '수필의 문학성은 무엇인가'하는 문제에 골몰하면서, 수필유삼의 법칙을 정립하고, 다시 ‘수필유법불가 무법역불가‘의 의미를 찾아 이번에는 구성 전략을 탐색해 보았다. '이것이 수필이다'했을 때, 적용될 수 있는 기준이나 요건이 이론적으로 뒷받침되어야 우리 수필이 문학의 자리에 당당히 설 수 있을 것이란 가정에서 지라르의 욕망이론을 바탕으로 수필 주제의 간접화 구성 전략을 수립해 보고자 한다.
먼저 수필의 출발점이 어디인가를 살펴보자. 수필은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인식은 현상이나 사물의 연관성을 파악하는 데서 시작한다. 수필의 구성 전략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대상과 주제를 가장 함축적으로 포괄하고 있는 객관적 상관물을 발견함과 동시에 수필은 고급화 내지는 본격화의 길에 들어선다고 할 수 있다.
수필은 내용을 독자에게 직접 전달하는 주제나 제재 중심의 문학이다. 그래서 내용은 직접화하되, 주제는 간접화해야 한다. 그것이 본격수필의 구성 전략이다. 결국 수필의 문학성은 제재와 주제의 상관화에 이르러 완성된다. 상관화란 제재를 의미화하여 주제를 간접적으로 구현하는 단계를 말한다. 독창적으로 대상을 분석하고 해석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이때 착상과 상상 그리고 연상의 기법이 요구된다. 수필 창작의 구성적 틀과 품격을 나타내 보여주는 상관화의 과정을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도"에 비추어 설명해 보겠다.
“프랑스의 문학평론가이자 사회인류학자인 르네 지라르는 현대인들의 욕망이란 욕망의 주체, 대상, 중개자가 각각 꼭지점을 이루는 삼각형의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욕망은 원하는 대상으로부터 바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금 소유하고 있는 중개자(모델 또는 라이벌)에 의해 간접적으로 잉태된다는 것이다.”
“주체는 어떤 대상을 자발적으로 원하는 것 같으나 사실은 그 사이에 매개자가 있다. 주체는 이 매개자의 욕망을 모방한다. 그러기에 대상은 결코 주체의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스스로가 진정 원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인생의 목표는 충족되는 순간 저만큼 물러나고 저만큼 물러나기에 우리는 가고 또 간다. 이것이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구조, 모방적 욕망, 대상의 허구성, 욕망의 허구성 metaphysical desire이다.”
“프로이트와 지라르의 근본차이는 욕망을 정의내리는 서로 다른 입장에 있다고 보여진다. 프로이트는 욕망을 자연발생적인 것, 즉 탐나는 대상을 보고 주체가 자연스레 느끼는 자발적 산물로 보는 반면, 지라르는 욕망을 중개하는 매체가 있어 그 매체를 모방함으로써 욕망이 생겨난다고 본다.”
"그러므로 지라르가 밝혀낸 욕망의 구조는 삼각형을 닮을 수밖에 없다. 주체는 대상을 직접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욕망한 것을 통해서만 욕망할 수 있으며, 욕망의 기본구조는 욕망 주체와 욕망 대상 사이에 욕망의 중개자가 존재하는 삼각형 모양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욕망이란 늘 모방된 욕망이며, 타자의 욕망을 모방하려는 욕망 모방의 결과물이다.“
-<103인의 현대사상>중 ‘르네 지라르’ 편에서
르네 지라르는 프랑스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에서 주로 활약한 철학가이자 문학평론가다. 지라르는 고전 문학작품에 대한 해설을 통해 우리가 익히 아는 프로이드의 심리학을 변형시킨 심리학을 펼쳤다. 욕망은 주체가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을 발견하고 이를 모방하는 것이라는 심리론이다. 즉, 내가 무언가를 욕망하는 것은 내 욕망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가 욕망하는 것을 보고 따라서 욕망하는 것이다.
얼핏 궤변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우리 주변에서 이런 경우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팬덤” 문화다. 소녀들이 팬클럽을 결성해 연예인을 좋아하는 현상 이면에는 일종의 거울효과가 숨어있다. 누군가를 열렬히 열망하는 타인의 모습에서 자신이 깨닫지 못하던 욕망을 발견하고, 경쟁적으로 열망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학창시절 몰랐던 음악이나 소설을 좋아하게 되는 데는 꼭 중간에서 이를 소개한 친구가 숨어있다. 그 친구가 욕망 주체인 나와 욕망 대상인 음악 또는 소설을 중개하는 욕망의 중개자인 셈이다.
지라르는 이 욕망의 중개자가 나와 매우 근접한 위치에 있는 사람일 경우 은연중 경쟁관계가 생겨난다고 설명했다. 질투와 원한, 부러움과 같은 감정을 일으키는 이런 욕망의 중재자를 지라르는‘짝패’라고 불렀다. 짝패는 나의 욕망을 촉발시키는 동력인 동시에 그 실현을 가로채는 경쟁자 또는 방해자다. 나와 짝패 사이의 한없는 욕망 모방과 모방 경쟁은 상호 상승작용을 일으키고 필연적으로 짝패를 죽임으로써 이 경쟁에서 이기려는 폭력을 낳게 된다. 이것을 문학이론에 적용시켜 보면, 소설에서는 중개자를 이용해서 주제를 드러내는 것이 되고, 수필에서는 작가가 제재를 활용해서, 대상을 간접화하고 주제를 의미화하는 것을 말한다.
이 이론을 수필 작품에 적용시켜 보면, 여러 작품들의 구성 전략을 분석할 수가 있다. 먼저 강숙련의‘본격수필’<나비>에 적용시켜보자. 이 수필에서 욕망의 대상은 이승희이다. 작가는 이승희를 그려내고자 욕망한다. 작가 강숙련은 욕망의 주체이고, 나비는 욕망의 짝패다. 짝패는 수필 창작에서 중개자 역할을 한다. 대상과 중개자는 큰 상관이 없는 듯보인다. 그러나 수필을 감상하다 보면, ‘나비’에 주제가 함축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수필에 애정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주체가 이승희와 나비의 상관성을 발견하면서부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승희와 나비는 이미 비슷한 욕망의 대결을 펼친 바 있다. 욕망의 주체가 평소 관심이 없던 이승희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나비라는 짝패를 발견하면서부터라는 것이 중요하다. 주체 즉 작가가 이승희에게 눈길을 준 것도 나비와 이승희의 관련성을 의식하면서부터라는 것이다.
이 이론으로 분석 가능한 작품을 생각나는 대로 예를 들어 보면, 안명수의 ‘돌담’, 정경의 ‘킬리만자로의 눈’, 박윤희의, ‘합죽선’, 박양근의 ‘두레박’, 성낙구의 ‘내 밭은 만다라’, 정성화의 ‘가오리 연’,‘버드나무’,윤자명의 ‘남포로 건너기’,‘띠’,‘개구리 울음소리’, 김종희의 ‘쌈’,‘정자’, 노현희의 ‘인큐베이트’, 강숙련의 ‘참빗’ ‘빈 집’, ‘서랍’, 박영선의 ‘등대’, ‘현무암’,‘못’, ‘노을’,‘바람’,‘암탉’ 서채영의 ‘서비스 공간’, ‘에스카르고’, ‘호랑이발톱가시나무’, 송명화의 ‘야인시대’, ‘여인의 날개’, ‘밤’, 장미의 ‘영점사격’, ‘보자기’ ‘항아리 비우기’,‘후진 기어’,‘초승달’, 차말숙의 ‘하루살이’, 최순덕의 ‘누워있는 옷’,‘캡슐’, 홍영순의 ‘날개’, ‘레미제라블’,‘지하철 풍경’, 김성리의 ‘젓가락’, 오귀옥의 ‘보약론’,‘창’,‘사인’ 전이숙의 ‘사이렌 소리’,‘꽃신’,‘제랴늄’, 정문자의 ‘신호등’,‘계단’,‘우산’, 조경래의 ‘무임권’, 김경숙의 ‘서 있는 사람들’, 허현숙의 ‘반지’, 석명희의 ‘광’, ‘늪’, 손수영의 ‘빨간 구두’ 송연희의 ‘아들의 방’, ‘물독’, 안귀순의 ‘라스베가스’, ‘은자의 연인’, 김임선의 ‘빈 자아’, ‘느티나무’, 정선모의 ‘거리의 악사’, 정태귀의 ‘그믐달, ’맛‘,’용‘, 하현숙의 ’석양‘, 우희정의 ’자라지 않는 아이들‘, 김원순의 ’시래기‘, 박성숙의 ’빈 들‘, 윤희아의 ’무언 부르스‘, 정일야의 ’뜨개질 하는 여인‘, 남지은의 ’흑자‘,’탁족‘ 김원순의 ’소파‘, 최향란의 ’군소‘, ’선녀탕‘, 박능숙의 ’보‘, 장광자의 ’제기를 닦으며‘ 등 많다.
주체의 욕망은 주제 자체에 대한 순수한 욕망보다는 대상과 중개자 서로간의 상관 관계에서 촉발되는 측면이 크다고 하겠다. 중개자는 주체가 상대를 욕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주제를 간접화하는 것이다. 이 수필은 나비의 '허물 벗는다'를 통해 욕망의 대상을 '의미화'하고 있다. 지라르가 말했던 욕망의 삼각도를 욕망의 대상과 중개자라는 '상관화'를 통해 여실히 보여주는 셈이다. 이 수필의 제목이 ‘나비'란 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나비는 곧 주체의 의도를 숨기고 있는 제재이기 때문이다. 이 수필의 제재이자 제목인 ’나비‘는 이 수필의 주제를 함축하면서, 작가가 그리고자하는 대상인 이승희를 이미지화해서 예술의 목적인 사물의 감각을 알려진 것으로서가 아니라 감지되는 것으로 전달한다. 이런 과정에서 상상과 연상이 일어나 바슐라르의 이야기처럼 감동이 생겨난다.
무엇인가를 욕망하고 있다면, 다시 말해 어떤 주제로 나타내보고 싶다면, 그리고자 하는 대상의 주위를 한번 둘러보아야 한다. 나를 눈 뜨게 해준 욕망을 그대로 내보여주기보다는 간접화해서 보여줄 수 있는 중개자를 찾아보아야 한다. 내 마음 속에 녹아 있는 경험 즉 대상은 주제보다는 대상과 연관된 중개자를 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수필의 구성 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중개자로서의 제재라고 할 수 있다. 본격수필의 창작 과정에서 중개자는 제목으로 나타나고, 제목은 주제를 함축하고 있어야 하며, 그것은 수필의 제재가 되어야만 정확히 ‘제재와 주제 중심의 문학’이라는 수필의 개념에 맞아떨어진다는 점이다.
수필의 멋과 맛 그리고 향
1. 들어가기
중국에는 시법이 있어, 모든 문필가들이 창작에 앞서, 이 시법을 읽는다고 한다. 황산은 우리 나라 문인들이 시법도 모르고 글을 쓴다고 질타한 바 있다. 문학 창작에 어떤 틀이 있다면, 그 하위 부류에 속하는 수필 장르에도 무슨 법이 있음직해서 고민해 본 결과, 수필은 세 가지가 삼위 일체를 이루어 문학의 품격, 즉 문학성을 갖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는 어디까지나 필자의 가설에 불과하다. 필자는 오랫동안 수필을 쓰면서, ‘수필다운 수필이 되려면 어떤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가’ ‘수필의 문학성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골몰하게 되었다. ‘이것이 수필이다’ 했을 때, 적용될 수 있는 기준이나 요건이 이론적으로 뒷받침되어야 우리 수필이 문학의 자리에 당당히 설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수필다움의 평가 영역을 설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를테면 수필은 세 가지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름하여 <隨筆 有三>이다. 하나는 글맛<향>이요, 두 번째는 손맛<멋>이요, 마지막으로 눈맛<맛>이다. 흔히 수필 작품을 감상하거나, 해설하면서 향기가 있다느니, 맛이 있다느니, 멋이 있다고들 하는데, 정작 향기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냐고 물으면, 우물쩍거리게 되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용어 하나라도 제대로 정확히 알고 사용해야 함이 마땅할 것 같아 그 근거를 마련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본고의 목적은 수필문학의 문학성을 보다 확실하게 구축한다는 차원에서, <수필 유삼>을 수필 창작에 있어서 일종의 <필법>으로 정착시켜, 창작 이론 모형으로 발전시켜 보자는 데 있다.
2. 수필의 <향>
수필에 있어서 <향>이 있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함의하는가. 꽃도 향기를 갖고 있고, 사람도 그 나름의 향기를 낸다. 과연 수필의 향기, 아니 수필다운 수필이 내는 향기는 어떤 것일까. 향기는 정서적 감화를 이끄는 모든 문장에 두루 통용될 최대공약수다. 수필에 있어서 문장과 함께 생명적이며 매력적 요소라 할 수 있다.
수필에 있어서 <향>은 수필 내부에 있는 번득임이다. 외부에서 나타나는 번득임은 <향기>가 아니라 호기심을 자극하는 연기일 뿐이다. 명수필의 향기는, 그래서 일생 동안 가슴의 내부에서 번득이는 영원한 메아리에 있을 것이다. 여자의 향기는 절반이 속임수라고 한 사람이 있다. 이는 외부의 번득임이 내부의 번득임에 미치지 못한 데 대한 실망의 푸념일 것이다. 향기 있는 문장, 향기 있는 수필은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진실>이 있으면 그만이고, 타고난 <소박>이 깃들였으면 그만이고, 독자와 손 마주 잡을 <눈물>이 있으면 그만이다. <진실>, <소박>, <눈물>이 내는 휴머니즘을 능가할 향기가 어디 있겠는가. 여기서 김소운의 육성을 들어보자.
어느 문학 작품에서도 작자 자신의 모습은 풍기게 마련입니다마는 그 중에서도 수필은 가장 직접적으로 그 “사람”을 느끼게 하는 문학 작업이라고 하겠습니다. 인생이나 자연을 주제로 삼은 경우에도 수필은 가차없이 필자 자신을 드러내고 맙니다.
“나”와의 거리가 이렇게 가까운 수필이니만큼 가차하면 여기에는 위험한 함정이 따르기 쉽습니다. 학식이나 안목을 자랑하는 ‘페던티즘’, 저도 모르는 사이에 붓대가 빗나가 버리는 자기 선전과 자기 변호, 어떤 이득을 계산에 넣은 완곡한 포석, 이런 것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경계해야 할 <터부>요, 수필의 품위를 스스로 저해하는 독소라고 하겠습니다. 한 자루의 펜은 내게 부여된 무슨 특권이 아니요, 하물며 제 자신의 편익을 위한 사유물이 아니라는 것. 이것은 하필 수필에만 한한 것이 아니라 가장 기본적인 글의 상식이기도 합니다.
위 예문은 ‘수필의 문학화’를 위한 기본 자세라고나 할까, 수필의 향기, 즉 인간애를 강조한 글이라 볼 수 있다. 지나친 화장은 오히려 역겨움을 주듯, 수필도 ‘이끌리게’를 너무 의식한 나머지 주제를 너무 과장하거나 호들갑을 떠는 기교를 부린다면 품위 없는 문장으로 전락한다. 어디까지나 ‘진실’과 ‘소박’과 ‘눈물’을 바탕으로 해야 할 것이다. 아름다운 조화에는 나비가 안 가도, 쓴 냉이꽃에는 나비가 앉는다. 수필의 생명은 감동이다. 휴머니티야말로 감동의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가슴 찡한 사연은 이미 표현 이전에 감동의 씨앗을 잉태에 있다고 할 것이다.
3. <수필>의 멋
수필에 있어서 <멋>이란 어떤 것을 의미할까. 수필에는 <멋>이 우러나야 한다. 여기서 멋이란 정서의 문학적 형상화를 의미한다. 이렇듯 같은 이야기라도 그것을 어떻게 형상화시키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의미는 달라진다. 하나의 대상이나 사건은 작가의 손에 의하여 형상화되는 과정에서 내용이 변질된다. 그것은 작가의 세계관에 따라 그 관점이 달라질 수 있지만 그보다는 작가의 기교가 무엇보다도 큰 자리를 차지한다. 이것이 창작의 특수성이다. 수필은 주제 전달의 과정, 즉 형상화에서 문학성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마음의 눈이 밝은 정서적인 사람만이 수필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정서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바로 "멋"이다. "멋있는 사람"이란 정서가 풍부한 사람을 일컫는다. 언어를 감정 그대로 노골적으로,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부드럽고 윤택하게 각색해서 함축성 있게 표현하는 데서 풍기는 분위기, 그것이 곧 멋이다.
어떻게 하면 멋진 언어가 저절로 구사되고, 멋진 행동이 저절로 나올까? 마음 속에 맑고 깨끗한 거울을 달아 두어서, 언제나 자신의 영혼을 가만히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마음 속에 해맑은 옹달샘을 파두어서 넘쳐흐르는 물로 마음에 묻은 얼룩과 때를 말끔히 씻어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깊고 은은한 소릴 내는 종을 달아 두는 것도 잊지 않아야 한다. 양심의 종을 스스로 울릴 줄 아는 사람이라면, 마음의 눈도 밝아질 것이다. 마음 속에 작은 꽃씨를 가져서 항상 자신의 주변을 아름답게 가꿀 줄 아는 지혜도 <멋>을 내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주제의식의 전달방법, 즉 대상이나 사건의 형상화 기법을 살펴보는 것이 곧 수필의 <멋>을 창출하는 일이다. <멋>을 내는 기법에는 네 가지가 있다.
1) 주제의식의 의미화
의미화란 주제의식을 구체화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자기화의 수법이다. 기법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작가 자신의 독창적인 수법인 것이다. 때문에 그 의미화 작업은 틀에 매인 방법이나 요령으로서는 절대 불가능한, 작자 나름의 인생관이나 가치관으로 주어진 제재를 분석하는 개성이요, 이해하는 마음인 것이다.
(a) 격정의 밤이 깊어 한 줄기 밧줄 같은 소나기라도 쏟아져 보라. 바람도 자고, 맑게 갠 이튿날 아침, 하얀 모래밭에 흩어진 짤간 꽃잎들이야 말로 임을 그리다 지쳐 병실의 하얀 침대요 위에 쏟아 놓은 30대 여인의 각혈이 아니겠는가.
(a)는 오창익의 <해당화>란 수필의 종결구다. 주제는 ‘열애’다. 바다 건너 멀리 떠나간 임을 그리는 여인을 해당화에 비유하고, 그를 기다리다 지친 여심을 비바람에 진 빨간 꽃잎으로 의미화하여 “30대 여인의 각혈”이라 했다.
2) 종결어미의 회화화
정적인 이미지를 동적 이미지로 바꾸어 놓으면 수필어가 된다. 시각어를 통해 종결어미를 설명보다 묘사를 하면, 더욱 효과적이다. 서술어를 회화화한다는 것은 상투적이고 진부하고, 이미 눈과 귀에 익은 표현을 되도록 피하기 위해 설명적인 정적 서술어를 동적으로 영상화한다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언어들이 엮어내는 이미지를 새롭게 창출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서술어에 힘을 실어주면 언어는 활기를 띠게 된다. 이런 표현은 아주 재미있는 특질이 있어 산 언어를 접한 듯한 느낌을 준다.
(b) 요란한 뻐구기 소리가 창가에까지 들려왔다. <c> 요란한 뻐꾸기 소리가 창을 흔들고 있었다. (b) 단풍이 온 산에 붉게 타오르고 있기에 발이 절로 멈춰졌다. <c> 붉게 타오르는 단풍이 발을 붙들고 놔 주질 않았다. (b)월남의 더위, 그것은 하늘에 불화로를 달고 지상으로 내쏘는 용광로였다. <c> 월남의 더위, 아스팔트 길에 군화 자국이 5cm나 되게 박혔다.
<c>는 (b)의 서술어를 동적으로 회화화한 문장이다. (b)보다 훨씬 더 <c>가 감각적 구체성을 띠면서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3) 수필문장의 함축화
문장이 비유를 만나면 멋을 내면서 더욱 진솔해지고, 참신성을 띠게 된다. 수필 문장은 다른 산문어와는 달리 본질적으로 함축성이 담겨야 하는 것이다. 비유는 필자의 느낌이나 생각을 독자에게 더욱 정확하게, 참신하고 생동감 있게 진실하게 전달하는 구실을 한다. 추상적이고 복잡한 사상을 표현할 때, 비유를 쓰면 구체적이고도 간결하게 나타낼 수 있다. 사람들은 구체적이고 단순화된 것을 더 오래 기억하는 법이다.
(d)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세상은 온통 불바다, 거기에 데일세라 몸을 움츠리고/ 아, 그의 정열은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기둥이었다./ 유리컵이 얼음 같다./ 아버지의 노기에 찬 음성이 나무에 얹힌 눈조차 떨어지게 울려왔다.
(e) 산골의 날씨는 무섭게 추워지려는데 짝을 버리고 혼자 남쪽으로 갈 수 없었던 애절한 황새의 정, 조류에 따라서는 암수의 애정이 별스런 놈도 있지만, 그것이 모두 그들의 본능이라 했다. 그러나 어쩐지 그들의 하찮은 본능이 오늘 따라 인간의 종교보다 더 거룩하고, 예술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 김규련의 <거룩한 본능>, 결말 부분 -
(d)는 문장을 비유나 상징을 사용하여 문장을 함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e)는 작품의 주제를 드러나지 않게 함축해서 문장의 분위기 속에 깔아두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이미지를 창조하는 작업인 것이다. 수필에 있어서 함축은 문학성과도 밀접히 관계한다.
4) 중심사상의 상상화
주제단락의 상상화, 즉 문장을 통한 중심사상의 상상처리는 바로 그 주제의 효과적이고도 원활한 의미전달을 위해서다. 수필의 주제 전달은 정서의 구체화로서만 가능하기에 그 방법은 지적이기보다는 정적이어야 하고, 직접적이기보다는 간접적이어야 효과적이다. 다시 말하면, 그 내용이 설사 교훈적인 것, 비평적인 것, 지시적인 것이라 해도 그 전달은 어디까지나 독자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 느끼게 하고, 공감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심사상의 상상화는 미적 감동과 충격을 주기 위한 필수적 전략이다. 주제의 전달 방법은 어디까지나 상징, 암시, 생략 등 상상적일 수밖에 없다.
(e) 어떻든지 그믐달은 가장 정 있는 사람이 보는 중에 또한 가장 한 있는 사람이 보아주고, 또한 가장 무정한 사람이 보는 동시에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 많이 보아준다. 내가 만일 여자로 태어날 수 있다면 그믐달 같은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
(e)의 마지막 주제문, “그믐달 같은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는 문장은 ‘고독’이란 글의 주제의식을 의미화한 것이다.
3. 수필의 <맛>
수필은 삶의 체험에서 우러난다. 지식과 체험과 사상이 용해되어 예술적인 문장으로 표현될 때, 한 편의 멋진 수필이 탄생된다. 수필의 <맛>은 대상을 어떻게 인식하느냐 하는 데서 나온다고 하겠다. 수필 창작에 있어서 중요한 사고 유형은 창의적인 사고와 비판적인 사고다. 두 사고 유형은 맛있는 글을 쓰는 데 바탕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정재호는 <수필의 맛>에서 “설익은 설교나 어설픈 철학으로는 수필의 참맛이 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수필의 맛은 담담하지만 무미건조해서는 안 되며 시적 향취도 있어야 하지만 시처럼 난해해서도 안 되고 소설 같은 재미도 있어야 하지만 속되어서도 안 되고 철학성이 있어야 하지만 현학성이 짙어서는 안 된다. 송엽차는 솔잎의 까칠한 지성과 물의 무기교의 맛과 쾌감을 주는 설탕이 녹아서 한 잔의 차로 승화된 것이다"고 하면서 맛있는 수필을 송엽차에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다.
독창성과 비판성을 가져오면서 수필의 고고하면서도 담박한 맛을 주는 양념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그렇다고 모든 수필에 반드시 위트, 유머, 새타이어, 아이러니, 파라독스가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장르의 특수성으로 보아 수필은 그런 점을 쉽게 수용할 수 있는 친화력을 가지고 있는 만큼 그것들이 수필문학의 맛을 낸다는 것이다. 수필의 오미라 불리는 이들은 글에 생동감을 주고, 재미나 흥미를 북돋아 주고, 웃음을 선사하며, 긴장감과 놀라움을 제공해 준다.
여기에는 관습적인 불문율이 있다. 처방에 있어서도 조제의 원리와 배합의 원리가 있듯이 그 친화성의 원리가 있다. 바꾸어 말해서 비상이 들어가야 할 약이 있고, 감초가 들어갈 약이 있다는 논리다. 풍자와 반어, 그리고 역설은 비상에 비유해 보고, 기지와 해학을 감초에 비유해 본다면, 중수필에는 비상이 들어가야 제격이고, 경수필에는 감초가 들어가야 그 맛과 효능이 배가된다.
1) 기지(위트)
‘기지’는 영어로 위트라 번역되는데, 우리말 사전의 뜻으로는 “그때 그때의 경우에 따라 재치있게 변통하는 슬기”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문학적 용어로는 “짧고 교묘하여 놀라움을 일으키도록 계획적으로 고안된 일종의 언어적 표현”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지만 꼭 언어적 표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기발한 판단이나 어떤 사물에서 기발한 아이디어나 의미를 도출해 내는 능력도 기지의 소산이라고 볼 때, 판단이나 해석적 능력의 기지도 있을 수 있다.
똑 같은 새소리였지만 서구인들이 그것을 즐거운 노래소리로 들어 ‘새가 노래한다’고 표현한데 반하여 한국인들은 슬픈 울음으로 들었기에 ‘새가 운다’라고 표현했다는 발상, 그리고 물에 빠지거나 혹은 뜻하지 않은 조난을 당했을 때, 한국 사람은 ‘사람 살려’라고 하지만, 영국 사람들은 ‘핼프 미’라고 한다는 대비를 통해서 한국인의 의타성을 도출해 낸 해석력, 우리는 배고픈 민족이기에 미각어도 발달되었고, 그래서 더위도 ‘먹고’, 나이도 ‘먹고’, 욕도 ‘먹고’, 심지어 사람의 성격을 평가할 때는 ‘싱거운 놈’, ‘짠 놈’, ‘매운 놈’이라 했다는 해석 등은 기지에서 나온 발상이고 해석이라 하겠다.
2) 해학(유머)
생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에 의하면 유머란 긴장의 돌연적인 해방, 신경의 휴양이라고 한다. 바로 여기에 유머의 진수가 있다. 울음이란 모든 동물의 공통 분모요, 웃음이란 유인원의 특징이라고 임어당은 그의 <동서양의 해학>에서 말한다. 그 점에서 보면 유머는 인간 정신의 개화다. 그러기에 최고의 유머란 사려 깊은 웃음으로 인간의 힘을 조장하는 청량제요, 수필의 맛을 한껏 우려내는 조미료다. 그것은 우주적인 연민의 정에 의해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말하자면 모든 인생에 대한 슬픔과 동정에 찬 통찰 속에서 드러난다.
유머는 대개 우스갯말이나 우스운 외양이나 우스운 행동양식에서 나온다. 그러면 수필에서 유머를 어떻게 도입할 것이며 또 어떤 종류의 수필에서 수필가의 유머 감각이 필요한지를 살펴보자. 먼저 우스개 말일 경우는 수필 작품에 부분적으로 끼어 넣어 분위기를 우선 재미있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유머러스하게 꾸미려면 우스운 외양이나 행동에서 그 소재를 구하면 된다. 이런 것에 걸맞는 소재라면 인물스케치, 성격상의 결점, 신체상의 특징 내지 결점, 상대방이나 나의 특이한 버릇, 무지나 오만, 건망증에서 나온 어처구니없었던 실수담, 음이나 뜻으로 말미암아 이상한 해프닝이 일어난다는 성명수필 등을 들 수 있다.
장자는 어느 과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느 날 장자가 산책을 나갔다가 아주 슬픈 얼굴로 돌아왔다. 제자가 그 까닭을 물은 즉 장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길을 가다가 웬 상복을 입은 부인을 남났는데 땅에 꿇어 앉아 축축한 무덤을 부채질하고 있지 않는가. 왜 그러느냐고 물었지. 그랬더니 그 여자 왈, ‘저는 사랑하는 남편에게 생존시 그의 무덤이 마르기 전에는 재혼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지요. 그런데 이 고약한 날씨 좀 보세요’라고 하지 않겠어.”
위와 같은 유머가 없었다면, 중국에도 신경쇠약자가 많았을는지 모른다는 말이 있다. 중국의 병서인 <삼략>에는 부드러운 것으로서 억센 것을 제어한다는 “유능 제강”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대자연의 진리를 꿰뚫는 말이다. 그러기에 최고의 유머란 사려 깊은 웃음으로 인간의 힘을 조장하는 청량제다. 그것은 우주적인 연민의 정에 의해서 더욱 두드러진다.
3) 풍자(새타이어)
수필에서 풍자가 지니는 뜻의 비중은 크다. 풍자를 글자풀이대로 보면, 풍은 빗대서 바른 말을 한다는 뜻이고, 자는 찌른다는 뜻이다. 남의 결함이나 결점을 직선적으로 말하지 않고, 돌려서 말하거나 다른 말로 빗대서 말하는 것을 이른다. 따라서 풍자는 사회 죄악이나 사람들의 옳지 못한 것을 대상으로 한다.
풍자는 재치가 있되,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 냉소, 조소, 자학, 야유, 독설, 희롱, 빈정거림, 비난, 비평, 비꼬는 따위의 개념이 담긴다. 수필이 아닌 다른 장르에 있어서는, 남을 헐고 찌르는 표현 방법에 별로 어려움이 따르지 않는다. 그러나 직간접으로 작자가 드러나는 수필에 있어서는, 남의 결점이나 결함을 다룬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수필은 작자의 품격이 바탕에 깔려 있는 까닭이다. 따라서 수필에서의 풍자는 그만큼 표현상의 기술이 따른다. 풍자는 솜방망이 속에 들어있는 송곳 같은 것이라고 한 말이 있다. 북송의 문장가 구양수가, 사회를 어지럽히고 해치는 간사한 무리들을 빗대서, ‘증창 승부’라는 글을 쓴 것도 그런 것이다.
4) 역설(파라독스)
역설은 처음에 듣거나 읽을 때 정상적인 경험과 보편적인 지식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거나 거짓처럼 보이지만, 한참 따져보면 참을 뜻하는 표현이다. 파라독스는 사실과 모순되는 듯하기 때문에 독자를 당황하고 긴장하게 한다. 그리하여 주의를 끌고 의미를 강화하는 기능을 한다.
다음은 이대규의 <수필의 해석>에서 인용한, 수필에 나타난 파라독스의 예다.
(1) 성인의 가르침은 알기 쉽다. (2) 그런데 성인의 가르침을 연구하는 학자가 성인의 가르침을 어렵게 한다. (3) 학자는 성인의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연구하지 않고, 성인의 가르침을 나타낸 말을 복잡하게 따지기 때문이다.
위의 예문에서 (2)가 역설이다. 영구는 연구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을 알아내려는 활동이다. 알기 쉬운 것을 모르게 하는 활동은 연구의 원래 목적에 어긋난다. (2)와 같은 활동은 독자의 상식이나 기대에 어긋나기 때문에 (2)와 같은 말은 거짓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1)과 (3)의 문맥에 의하여, 거짓 같은 (2)의 말이 참이 되므로, (2)는 파라독스다.
5) 반어(아이러니)
아이러니는 표현된 말과 그 뜻, 한 인물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의 사실, 인물의 동기와 행동의 결과가 반대인 것을 뜻한다. 아이러니에는 언어적 아이러니, 극적 아이러니, 사건의 아이러니가 있다.
이대규는 <수필의 해석>에서 ‘언어적 아이러니는 반대되는 표현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것, 즉 말하는 것과 의미하는 것이 반대되는 것’이라 하였다. 언어적 아이러니는 전달되는 의미를 강화하거나 상황의 심각성을 강조한다.
(1) 혜월 선사는 흉년에 굶는 사람들에게 버려진 몇 백 평의 땅을 개간하게 하여 논을 만들었다. (2) 그 논을 개간하는 데 든 비용은, 같은 논을 사는 데 드는 비용의 몇 곱이 더 들었다. (3) 선사는 참으로 어리석은 일을 한 것이었다. (4) 그러나 선사는 많은 사람이 굶주림을 면하고, 새 논이 생긴 것을 기뻐했다.
바로 위의 예문의 (3)은 아이러니다. (3)을 보통말로 바꾸면, ‘(3.1) 선사는 참으로 슬기로운 일을 한 것이었다’로 될 것이다. (3.1)과 같이 평범하게 표현하지 않고, (3)과 같이 아이러니로 나타나면, (3.1)의 의미가 강화된다.
극적 아이러니는 작품 속의 말하는 이나 어떤 인물이 아는 것을 또 다른 인물이 모르는 것이다. 이것은 한 어리석음과 다른 인물의 슬기로움이나 훌륭함을 강조한다.
1.나는 기차 탈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늙은 방망이 장수에게 방망이를 깎아 달라고 부탁했다. 2.노인은 오래도록 방망이 깎이를 계속했다. 3.기차 탈 시간이 가까워 오자 나는 빨리 깎으라고 재촉했다. 4.재촉하면 방망이를 팔지 않는다고 노인은 화를 냈다. 5.나는 불쾌하고 화가 났다. 6.노인은 일을 멈추고 담배를 피웠다. 7.나는 불친절한 노인에게 중오심을 느꼈다. 8.한참 후 노인이 나에게 방망이를 주었다. 9. 집에 돌아와서 아내에게 방망이를 주었다. 9.집에 돌아와서 아내에게 방망이를 주었다. 10.아내는 요즘 사기 어려운 좋은 방망이를 사왔다고 기뻐했다. 11.나는 그 노인이 좋은 방망이를 만들려고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12.그리고 훌륭한 노인을 멸시한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이 예문의 극적 아이러니는 3에서 7까지 지속된다. 이 아이러니는 11과 12에서 작가가 새롭게 깨달은 것은 강조한다. 사건의 아이러니는 동기 실현을 위한 행동의 결과가 동기와 반대가 되는 것이다. 사건의 아이러니는 비합리적이고 어리석은 동기와 비참한 결과를 강조한다. 박문하의 ‘잃어버린 동화’에 사건의 아이러니가 있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공허한 마음에 위안을 얻으려고 ‘초가’를 찾는다. 그러나 그는 초가가 헐린 빈터를 보고 상실감에 젖는다. 그리하여 그는 초가를 찾기 전보다 더 큰 공허감을 맛본다. 이 아이러니는 작가의 공허감을 강조하는 효과를 낸다.
4. 나오며
지금까지 필자는 수필 창작의 이론 모형 연구 차원에서 필법, <수필 유삼>에 대하여 고찰해 보았다. 숙명 같은 수필의 잡문성을 나름대로 극복해 보고자 했으나 본고의 내용은 부족한 점이 많다. 좋은 수필의 요건에 세 가지가 전부일 수 없다. 한 편의 문학수필을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주제, 제재, 문장, 구성 등 구성적 요건 뿐만 아니라 주제의 의미화, 문장의 개성화, 구성의 다변화 등 기능적 요건의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필자는 수필문학의 발전을 위해서 부족한 분야에 대해서 차근차근 연구하고 또는 하나하나 보완해 나갈 것을 약속한다. 특히 수필의 <향기> 부분은 계속 연구 검토함으로써 이론 모형을 보다 구체화해야 할 것이다.
진정 좋은 수필은 진통과 고뇌 속에서 태어난다고 했다. 그래서 수필을 창작함에 있어 필법에 대한 진통과 고뇌는 좋은 수필을 낳는 씨앗이요, 어머니다. 수필은 언어를 부리는 역량에 따라 작문이 되기도 하고, 잡문이 되고, 작품이 되기도 한다. 작문과 잡문의 수준에서 벗어나 작품의 수준에 든다는 평가를 받으려면, <수필 유삼>의 필법을 수필 창작시 기법으로서 활용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끝으로 롤랑 바르트의 육성을 들으며 본고를 마무리 짓고자 한다. 그는 ‘글쟁이’와 ‘작가’를 확연히 구별하라고 했다. 이 말은 ‘글쟁이는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언어를 이용하는 사람이고, 작가는 전달 차단적 언어를 재료로 쓰는 사람이다. 작가는 말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어떤 언어적 물질을 만들어내는 거인이다‘고 정의하고 있다. ’수필 유삼‘의 차원에서 곱씹어 보면, 더욱 의미심장한 말이다. 본고가 창작 활동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좋은 수필의 조건
I. 서 론
- 좋은 수필이란, 관조의 눈으로 본 것을 철학의 체로 걸러낸, 산문으로 쓴 시다.
- 정재호(수필가) -
- 좋은 수필가란, 마음 속에 마르지 않는 옹달샘을 가지고 있는 사람, 아름다운 종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 자신을 비춰 볼 수 있는 거울을 가진 사람, 다른 사람의 밭에 옮겨 심을 꽃씨를 가진 사람이다.
- 권대근(수필평론가) -
‘관조의 눈’이란 예술적 심미안이요, ‘철학의 체’란 옥석을 구분한 삶의 진실이요, ‘산문으로 쓴 시’란 마부 작침의 고뇌 끝에 빚어지는 문장의 어려움이라 하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1) 주제의 문학적 차원으로의 승화 여부, 2) 화제의 효과적 선택, 배열 3) 함축된 표현 기법 - 이 세 가지로 얼마만큼 ‘작품’으로, ‘문학적 가치품’으로 끌어올려 지었느냐에 있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문학에서 명작이라고 하면 시대를 초월하여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애독되고 또한 사랑을 받아온 작품을 말한다. 이러한 작품은 오래 오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변치 않는 인생의 궁극적 진리와 좌표, 그리고 쾌락적이며 유희적인 인생의 참 즐거움이 있어야 하고, 감동적인 교훈성이 작품 속에 내재되어야 한다. 명작이 탄생되는 데에는 작가의 역량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겠으나 대체적으로 다음 10 가지 공통된 조건을 갖추고 있다.
II. 좋은 수필의 조건
1. 승화된 주제의 설정
주제는 작가가 한 작품을 통하여 나타내고자하는 중심사상이다. 그리고 작품의 핵심이며 뼈대다. 주제를 보다 효과적으로 살리기 위해서는 (1) 자신 있는 문제 (2) 관심과 흥미 (3) 좁고 깊게 (4) 시공 초월 (5) 통일된 인상, 이 다섯 가지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정의와 불의, 사랑, 희생, 봉사, 진리, 충과 효, 화해와 용서, 돈, 명예, 권력, 욕망 같은 것들을 수필가는 자신의 사상과 철학으로 용해시켜 예술미학으로 형상화시켜야 한다. 정비석의 <산정무한>, 이은상의 <해운대에서>, 윤오영의 <방망이 깍던 노인>은 위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명수필이다.
2. 참신한 제재의 선정
제재란 주제가 성립된 다음에 주제를 살리기 위한 자료, 즉 이야기거리를 말한다. 제재는 주제를 뒷받침하고 설명해주는 보충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서 독자에게 얼마나 실감나고 재미있는 이야기거리를 제공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리 주제가 훌륭하다 하더라도 제재가 충실치 못하면 속빈 강정이 되고 만다. 따라서 제재를 선정할 때는 (1) 풍부 다양 (2) 명확 근거 (3)관심 흥미 (4) 연관 긴밀, 이 네 가지에 유의해야 한다. 이희승의 <딸깍발이>의 경우, 작가는 전혀 남이 생각하지 않은 기발한 아이디어로서 “딸깍발이‘란 제목으로 독자의 관심을 끌게 한다.
3. 인상적인 구성
작가가 글을 쓸 때, 구성상의 기법 운용 능력은 작가의 요령이며, 기본이다. 같은 주제, 제재라 하더라도 작가가 내용과 사건을 어떻게 서술하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줄거리를 보다 감동과 감흥의 정점을 향해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수필은 다른 모든 글과 같이 구성의 기술과 운용이 철저하게 요구되는 문학이다. 아사코를 모델로 한 피천득의 <인연>을 보면, 그는 시간과 공간을 병행하여 아사코의 성장, 변모하는 모습을 어린 소녀 시절, 여학생 시절, 남의 아내가 된 때의 모습 등을 구분하여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수필에서 제일 중요시되는 구성상의 기본적인 정신은 문맥의 통일성과 긴밀성과 강조성이다.
4. 서정성의 묘사
수필문학뿐 아니라 모든 문학에서 서정성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서정성은 문학에 있어서 문학이냐 아니냐 하는 문학 본질 문제까지 좌우할 수 있는 것이다. 수필의 매력은 은은한 정서적 분위기에서 수필의 미적 감흥을 맛보게 하는 데 있다. 특히 수필문학에서 서정성이 결여되면 수필은 신변 잡담이나 평범한 이야기가 되고 만다.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면서>라든가 윤오영의 <달밤> 같은 작품은 서정성의 묘사가 돋보인다. 이효석은 낙엽 타는 냄새에서 인간과 자연에 대한 동화된 자연합일 사상과 자연에 대한 순수를 잘 표현하고 있다. 윤오영은 <달밤>에서 한국적인 정서로 시골 달밤의 풍경을 잘 묘사하고 있다.
5. 적절한 제목
수필에서 뿐 아니라 모든 문학에서 이름은 참으로 중요하다. 왜냐 하면 이름과 그 이름의 대상의 개체는 동일시되어 그 개체를 대신하거나 대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필에서 작품을 이름짓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퍼스트 임프레이션이며, 명함이라 할 수 있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압축이며 개념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그러므로 제목은 (1) 상징성 (2) 매력적 (3) 사회와 연관 (4) 기대감과 호기심 (5) 주제의식을 구체화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세익스피어 같은 대가도 작품을 완성해 놓고도 표제를 달지 못해 몇 달을 고민했던 것이다.
6. 매력적인 서두
명수필이 되기 위해서는 서두가 짧고 간결하며 매력적이어야 한다. 작품의 서두는 대부분 작품의 성격과 분위기를 대변하는 것으로써 매우 인상적이어야 한다. 독자에게 강한 인상과 함께 호감을 주고 이른 바 흡인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관심을 갖도록 제시해야 한다. 육상경기의 출발점과도 같은 것이 글의 서두이고 보면, 단거리 경주에 해당하는 수필의 서두는 그 글의 성패를 좌우하는 운명적 부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수많은 수필가들이 첫 줄, 첫 머리의 단 한 줄을 끌어내기 위해 피나는 산고를 겪는 것이다. 한흑구는 수필 한 편 쓴 데 5년을 소요했다.
7. 문체의 선택
문장은 작가의 품격과 인생관을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글 속에는 작가의 사상과 철학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인격화된 사고에 의한 달관과 통찰력이 풍겨나와야 한다. 천박하거나 경망스럽지 않아야 한다. 도한 수필은 작가 자신의 고백적인 글이기 때문에 인생의 풍류와 낭만이 풍기는 여유 있는 문장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민감한 감각력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문체야말로 각인 각색의 개성을 표출하기 때문에 자기의 독특한 이미지를 나타낼 수 있는 스타일을 구축해야 한다. 현대의 수필에서는 간결한 문체, 부드럽고 온화한 내용과 정서의 표출에 적합한 우유체, 화려체가 주로 많이 쓰인다.
8. 개성적이며 고백적 정신의 내재
수필은 형식에 제약을 받지 않고 작가의 속마음을 적나라하게 들어내는 글이기 때문에 뚜렷한 개성에 바탕한 자기를 고백하도록 해야 한다. 일찍이 김진섭은 “수필만큼 단적으로 쓴 사람 자신을 표현하는 문장은 없을 것이다.”라고 하여 한 작가의 투철한 사상과 인생관의 투영을 강조한 바 있다. 고백의 정신의 자조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김광섭은 “수필은 진실한 태도에서 인생을 관조하는 격”이라고 했다. 수필이 엄정하게 객관적인 문제를 다룬다 하더라도 그 수필가의 가슴에는 어딘가 한 가닥 토로하지 않고는 못 견딜 고백적 정서를 가지고 글을 쓰게 된다. 그 고백 속에는 인생의 진실과 미적 정서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9. 함축성과 오묘한 여운의 내재
이는 표현상의 기술과 문장 꾸밈의 수사와도 관계가 된다. 향기가 있고, 산뜻한 문장으로 여운이 있는 청아한 내용과 느낌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수필은 소설처럼 서사적인 사건 내용을 전개해 내는 것이 아니며, 시처럼 압축적인 정서를 표출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표현하고자 하는 정서를 감성의 미학으로 형상화하는 것이다. 수필에서의 함축성과 오묘한 여운은 소설에서의 사건이나 내용 미해결의 앤딩처리도 아니요, 시에서의 감정 노출 직전이나 어떤 내용이나 사상을 상징하거나 암시하는 그런 의도적 표현수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사상과 영혼의 조용한 독백으로 끝을 맺을 때 탄생된다.
10. 유머
유머는 문학에서 약방의 감초 같은 역할을 한다. 수필이 비록 짧은 문장이나 유머가 절실히 요구된다. 현대인처럼 심각한 사색이나 고뇌를 싫어하고 심오한 인생관이나 철학을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문학에서의 유머는 글의 내용에 있어서 빠르고 명확한 판단력을 제공해 주며, 명석한 해석을 내리게 한다. 또한 유머는 지루함을 없애주고 분위기 전환이나 신선한 감각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작품에서 만인이 즐거워 할 유머는 예술의 세계에서 공통적으로 제공하는 쾌락의 미를 제고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III. 결 론
이상으로 좋은 수필이 될 수 있는 조건 열 가지를 제시해 보았지만 이 외에도 명수필이 요구하는 조건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위 열 가지가 좋은 수필이 갖추라고 요구하는 절대의 범위도 아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1) 승화된 주제의 설정, 2) 인상적인 구성, 3) 함축된 표현 문제에 주안점을 두고 글을 써 나가고 관심을 두고 수련해 나가다 보면, 좋은 수필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나머지 일곱 가지는 결국 위의 세 가지 요소를 뒷받침하는 부수적 조건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수작을 쓰기 위해서는 수필을 많이 써 보고, 명작수필을 많이 읽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수필의 문학성과 수필어
문장은 문학의 생명적 요소다. 이 말은 수필에 그대로 적용된다. 특히 수필은 문장이 그 문학성을 결정짓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필의 문학성은 글의 아름다움에 있다. 글의 아름다움은 내용의 진실됨, 구성의 탄탄함, 표현의 참신함에서 나온다는 게 일반적인 정설이다. 수필의 문학성은 이 세 요소가 합해졌을 때 나오는 것이다. 어떤 옷이 작품의 수준에 이르기 위해서 좋은 디자인, 좋은 옷감은 기본이다. 문제는 그 옷의 색깔과 문양이다. 좋은 옷감으로 잘 디자인된 옷에 어떤 색깔의 문양을 샛길 것인가가 작품의 종합적인 품격을 결정하는 것이다.
문예 창작에 있어서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문장의 연마일 것이다. 조금 심한 말일지는 모르지만 필자는 문장들을 음미하는 맛으로 수필을 읽는다. 언어를 사용하여 문장을 가장 멋지게 표현할 수 있는 장르가 있다면, 아마 수필일 것이다. 아무튼 수필은 문장이 요체가 된다.
그러면 어떤 문장이 수필 문장으로 좋은 것인가? 그 물음은 대단히 쉽지만 파고 들어가면, 이 물음보다 더 어려운 것은 없다. 과연 어떻게 쓴 문장이 수필 문장으로 좋다고 평가할 것인가. 얼마나 난감하고 얼마나 막연한 질문인가를 우리는 느끼게 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수필을 비롯해서 모든 문학 작품에 쓰이는 문학 문장은 일반 문장과는 달라야 한다는 점이다. 관조를 통해 걸러진 대상이나 체험은 예술적으로 형상화된 정서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말이다. 정서를 물화하거나 감각화하면 문장은 더욱 맛날 것이다.
수필문장도 위의 대원칙에서 벗어나 존재할 수 없다. 문예 창작적으로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수필 문장은 감동적인 문장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수필의 생명은 감동에 있다. 남에게 감동을 줄려면 먼저 작가 자신이 감동하고, 독자와의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문장을 감동적으로 써야 한다. 감동은 설득으로부터 피어난다. 말 한 마디가 천냥 빚을 갚는다고 했다는 속담은 수사법의 끗발을 여지없이 표현한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쓰는 글이 감동적인가? 진솔하고, 함축적이고, 암시적인 문장들은 문장의 향기를 느끼게 한다. 이것들이 비유를 만날 때면 문장의 맛을 내면서 더욱 진솔해지고, 참신성을 띠게 된다. 그렇다면 수필 문장의 본질은 명백해졌다. 수필어에는 다른 산문어와는 달리 본질적으로 함축성이 담겨야 하는 것이다. 수필어는 함축성을 생명으로 하여, 영상적 이미지를 독자에게 전달한다고 하겠다. 함축성을 구축하는 데 적합한 어휘를 수필어로 불러 봄이 어떨까.
(ㄱ) 역사란 인간이 인간을 학살해 온 기록이다.
(ㄴ) 흑산도, 숙명처럼 발목을 매어잡는 이름이었다.
(ㄷ) 눈이 개구리 뱃가죽 모양으로 부어 늘어졌다.
(ㄹ) 두고 온 행복 같은 군가를 가늘게 부르고 있었다.
(ㅁ) 까막 조개 등잔에서, 뱀 혀끝 같은 심지가 빠지작빠지작 타 들어 갔다.
(ㅂ) 인간이라는 병균에 침범 당해, 그 피부가 는적는적 썩어 들어가는 지구덩어리
(ㅅ) 사과 한 알이 떨어졌다. 지구는 부서질 정도로 아팠다.
* 1. 심상으로 사용되는 구체어가 수필어다. 비유를 하면 더욱 효과적이다.
1) 구체어에 의한 표현은 감각적 경험을 상상케 하며, 현실 세계에서 대상들을 감각하는 것 같은 생동감을 준다. 그리하여 구체어로 자세히 묘사되는 것은 상상을 풍부하게 자극하고 생동감을 준다. 구체어를 비유적으로 쓰면 더욱 효과적이다. 감정이나 기분 같은 객관화되기 어려운 마음의 상태를 독자에게 눈에 보이듯이, 손에 잡힐 듯이 느끼게 하고 싶을 때, 비유라는 표현 기교를 쓸 수 있다.
첫째, 심상은 기억되거나 상상되는 감각을 뜻한다. “바위, 달, 절, 느티나무, 종달새, 여인”과 같은 말들은 그것들이 의미하는 시각을 떠오르게 한다. “졸졸, 철썩, 꽝,”과 같은 말들은 청각을 떠오르게 하고, “달다, 쓰다. 시다, 짜다”와 같은 말들은 미각을 떠오르게 한다.
a. 이지러진 초가의 지붕, 돌담과 깨진 비석, 미루나무가 선 냇가, 서낭당, 버려진 무덤들, 잔디, 아카시아, 말풀, 보리밭
a의 예문은 심상을 지닌 구체어들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은 빨리 지나가는 차창 밖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1960년대 초기의 시골을 상상하게 하고, 마치 그런 광경을 직접 보는 것 같은 생동감을 준다.
b. 현대인들은 자기 행동은 없이 남의 흉내만을 내면서 살려는 데에 맹점이 있는 것이다. 사색이 따르지 않는 지식을, 행동이 없는 지식을 어디에 쓸 것인가.
b의 예문은 심상이 없는 추상어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글은 아무 것도 상상하게 하지 않는다.
둘째, 심상은 어떤 말이 본래의 의미를 가리키지 않고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을 뜻한다. 새벽이 “밤과 아침 사이의 시간”을 뜻하지 않고,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뜻하고, “까치”가 새의 한 종류를 뜻하지 않고, “반가운 소식”을 뜻한다. 이 때 ‘새벽’이나 ‘까치’라는 말은 심상이다. 이 경우에 심상은 직유나 은유와 같은 비유로 사용된다.
우리는 인형이나 끌려가는 짐승이 아니라, 신념을 가지고 살아야 할 인간이다.
위의 예문의 ‘인형’과 ‘짐승’은 본래의 의미를 가리키는 데 쓰이지 않고, 다른 것을 의미하는 데 사용된 말이라는 점에서 심상이다. 이 글에서는 ‘인형’과 ‘짐승’이 아는 것을 살리지 못하는 인간, 이웃과 기쁨과 아픔을 나누지 못하는 인간, 신념이 없는 인간,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인간, 남의 말과 행동을 모방하기만 하는 인간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 비유로서 심상이다.
‘외로움’이란 객관화되기 어려운 마음의 상태로서 이를 글로 표현할 때에는 이 말만 쓰면 그 뜻이 선명히 잡히지 않는다. 이 경우 ‘외로움은 석양을 등지고 서 있는 산마루의 전신주’와 같이 다른 구체적 정경을 끌어다가 이 말을 도와주면 우리는 ‘외로움’을 확실히 바라보거나 느낄 수 있다. 비유는 필자의 느낌이나 생각을 독자에게 더욱 정확하게, 참신하고 생동감 있게, 진실하게 전달하는 구실을 한다. 추상적이고 복잡한 사상을 표현할 때, 비유를 쓰면 구체적이고도 간결하게 나타낼 수 있다. 사람들은 구체적이고 단순화된 것을 더 잘 파악하고 더 오래 기억하는 법이다.
수필어는 잘 활용할 때,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수필어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려면, 어떤 내용을 그와 유사성이 있는 다른 사물에 비겨 보면 된다.
더 분명하게, (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더 멋지게, (나) 세상은 온통 불바다, 거기에 데일세라 몸을 움츠리고,
더 감동적으로 (다) 아, 그의 정열은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기둥이었다.
* 정적 이미지를 동적 이미지를 바꾸어 주는 것이 수필어다. 설명보다 묘사를 하면 더욱 효과적이다.
2) 시각어를 통해 문장을 감각적으로 묘사하여 회화화한다. 다시 말해 상투적이고 진부하고, 이미 눈과 귀에 익은 표현을 되도록 피하기 위해 설명적인 정적 서술어를 동적으로 영상화한다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언어들이 엮어내는 이미지를 새롭게 창출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서술어에 힘을 실어주면 언어는 활기를 띠게 된다. 이런 표현은 모두 선명하고 아주 재미있는 특질이 있어 산 언어를 접한 듯한 느낌을 준다.
a. 단풍이 온 산에 붉게 타오르고 있기에 발이 절로 멈춰졌다. <설명적>
b. 붉게 타오르는 단풍이 발을 붙들고 놔 주질 않았다.
a. 요란한 뻐꾸기 소리가 창가에까지 들려 왔다. <설명적>
b. 요란한 뻐꾸기 소리가 창을 흔들고 있었다.
a. 무심한 나무도 조석으로 대하면 정이 드는 것일까?
b. 무심한 나무도 조석으로 대하면 정이 묻어 오는 것일까?
a. 창밖으로 눈을 돌리니, 눈물이 나왔다.
b. 창밖으로 눈을 돌리니 창문이 뿌옇게 흐려졌다.
a. 월남의 더위, 그것은 하늘에 불화로를 달고 지상으로 내쏘는 용광로였다.
b. 월남의 더위, 아스팔트 길에 군화 자국이 5cm나 되게 박혔다.
a. 지독히 추운 아침이었다.
b. 아침 유리창엔 얼음꽃이 피었다. 물기 묻은 손으로 문고리를 잡은즉 쩍쩍 붙는다.
a. 숨이 막히도록 가슴이 아팠다.
b. 질근질근 묻어나는 심장의 피가 손 끝에 매만져지는 듯했다.
* 상징으로 사용되는 어휘가 수필어다. 추상적 어휘보다 구체어로 암시하면 더욱 효과적이다.
3) 상징어를 통해 암시되는 언어는 구체어들이며, 그 언어가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대체로 추상적 관념이다. 문학 작품은 상징에 의하여 감각적 체험과 생동감과 풍부한 상상을 자극하면서 넓고 깊은 관념을 전달한다.
어떤 말이나 언어적 표현이 본래의 의미를 지니면서 다른 여러 가지를 의미하는 것이 상징이다. 한 작품에 되풀이되는 상징은 작품 세계의 중요한 의미를 나타내므로 주제를 암시할 수도 있다.
‘낙엽을 태우면서’에서 ‘낙엽의 재’는 지은이가 뜰에서 태운 낙엽의 재 자체를 가리키면서, ‘사라진 희망’도 뜻하므로 상징이다. 윤오영의 수필 ‘동소문턱’에는 동소문턱을 지나가는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온다. 젊은 시절 걸어서 지나갈 때에는 그곳에 동소문의 성루와 성문이 있었고, 문턱을 나서면 한적한 길이 있었다. 그러나 늙은이가 되어 차를 타고 지나갈 때에는 그곳에 성문이 없었고, 문턱을 나선 곳에는 높은 건물이 늘어서 있었다. 이 작품에서 ‘동소문턱’은, 작가가 실제로 지나간 공간을 가리키면서, 세월과 함께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과 인생을 뜻하는 상징으로 사용된 것이다.
a. 찬란한 밤 하늘은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무관심할 뿐이다. 지나가는 바람이 우리의 부르짓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쏟아지는 비는 우리의 슬픔을 씻어 주지 않는다. <상징으로 사용된 구체어>
바로 위의 예문 속의 ‘찬란한 밤 하늘, 지나가는 바람, 쏟아지는 비’는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이 말들은 모두 심상을 가진 구체어들이다. 이 말들은 본래의 의미를 지니면서 또 다른 추상적 의미를 가리킨다. 위의 예문에서 상징으로 사용된 구체어들을 아래와 같이 추상어로 바꾸면, 생동감이 사라진다.
b.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나 우주는 우리와 아무 관계도 없고 우리에게 무관심하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무한한 고독에 사로잡힌다.
결론적으로 수필어라 함은 함축적이고 정서에 호소하는 것으로서 시적 방법으로 쓰여지는 정서적인 산문어며, 표현기법상 그것은 주로 묘사와 서술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연구에 의하면, 현대수필의 문장은 운율의 조직, 이미지의 조성, 비유, 상징 등 시적 방법을 도입하거나 적어도 거기에 민감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너무 상투적인 비유를 쓰면, 오히려 문장의 맛과 그 효과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걸 명심하자. 소설 같은 작품, 특히 문학상 수상 작품이나 신춘문예 당선작의 경우, 구체어를 비유와 상징으로 사용하여 풍부하고 깊은 의미 즉 향기를 전달하는 작품이 많다. 그러나 수준 높은 비유와 상징이 사용되는 수필을 자주 볼 수 없다는 것은 아타까운 일이다.
수필의 사다리 타고 오르기
- 본격수필 창작의 5 단계 결속원리 -
I. 열며
본격수필 창작의 5차원 단계적 원리는 따로 학문적으로 정립된 항은 아닙니다. 이는 다만 제가 이제껏 강의해온 수필창작 과정을 다섯 단계로 정리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좀더 쉽게 말하면 좋은 수필이 갖추어야 할 내적 요건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본격수필이 되기 위해서는 내적인 자질로서 다섯 가지 개념이 단계적으로 결속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루이스란 비평가는 시 창작의 과정을 1.시의 씨앗을 얻는 단계, 2.씨앗의 성장과 발전의 단계 3.구체적 표현을 찾는 단계로 나누었는데, 저는 여기에 두 가지 과정을 더 첨가해서 다섯 단계로 정리한 것입니다.
이는 수필문학창작론 교재에서 밝힌 바 있지만 정답일 수 없습니다 수필을 쓰는 사람마다 수필 창작 과정이나 그 방법은 천차만별이며 천인천색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각양각색의 수법이 모두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것’이란 전통적 수필론에 따른 변형 또는 모방이라는 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문학이 갖추어야 할 외적 조건과 동시에 수필의 내적 요건들이 구조적으로 통일성을 이루어야 본격 수필로서의 특성을 유지하게 된다는 차원에서 이번에 수필창작의 5단계 결속원리를 정리해 보았던 것입니다.
II. 펼치며
1) 발견의 원리
김소월은 그가 죽던 해, 1925년 <개벽>지에 “시혼”이라는 시론을 발표했는데, 그 가운데에는, ‘평범한 가운데서 사물의 정체를 보지 못하고, 습관적 행위에서 진리를 발견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발견의 차원에서 상당히 공감이 가는 대목입니다. 루이스는 시 창작의 첫 단계를 시의 씨앗을 얻는 단계로 말하고 있습니다. 시의 씨앗 얻기를 가리켜 "그것은 어떤 감정, 어떤 체험, 어떤 관념, 때로는 하나의 이미지나 한 행의 구절일 수도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불현듯 스쳐오는 영감, 무의식 속에서 툭 하고 떨어져 나온 하나의 생각, 강력한 심리적 충격이나 어떤 인상들일 수 있겠습니다. 또는 일상생활 속에서 뭔가 모를 충동에 의하여 시를 쓰고 싶다는 욕구를 생기게 하는 것들이 모두 시의 씨앗이 될 것입니다.
수필 창작에서는 이것을 ‘발견’이라고 말합니다. 원래는 인식 작용이란 개념을 도입했습니다만 이해하기 쉽도록 ‘발견’이란 용어를 썼습니다. 인식은 개념이 복잡하고, 다양하기 때문에 다른 의미로 오용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쉬운 말로 ‘발견’이라고 했습니다. 문학을 형상과 인식의 복합체라고 했을 때, 발견은 인식의 파트입니다. 아시다시피 인식이란 모르고 있는 진실을 발견하는 정신적 행위입니다. 일차적으로 수필은 무엇을 발견했느냐에 수필의 성공이 달려 있습니다. 문학은 발견된 것을 제시하면서도 독자가 그것 이상의 것을 상상할 수 있도록 형상화해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수필을 한 편 보고 살펴볼까요? 최시병은 <진열장 속의 왕세자>란 작품을 썼습니다. 우연히 길을 걷다가 이 사진관, 저 사진관에 진열된 아이들의 돌 사진 속의 아이들은 전부 임금님의 용포를 입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그는 남들이 보지 못한 어떤 것을 알아내었습니다. 돌 사진의 용포에서 우리 한국 어머니들의 자식에 대한 지나친 기대심리가 숨어 있었던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면 최시병은 어떻게 이 수필의 씨앗을 얻었을까요? 이렇듯 수필의 씨앗은 우리가 실제적으로 체험한 데서 얻을 수 있긴 하지만,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적으로 생기는 경우도 있긴 하겠지만, 좀더 의도적이며 집중적인 태도로 씨앗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어떤 모임에서 산행을 하더라도, 그저 옆 사람과 재잘재잘 이야기만 하고 올라가거나, 이야기도 하지 않고 앞만 보고 올라갔다가 밥 먹고 술 먹고 그냥 내려와서는, 수필을 쓰기 위해 고민하며 무엇인가 떠올리려 해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지만 훌륭한 수필가는 구경꾼이요, 방랑자요, 게으름뱅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반드시 메모할 만한 연필과 노트를 가지고 가서 작은 풀꽃의 이름을 동행에게 물어서 적고, 그것들의 상태도 메모하는 것이 좋습니다. 고목에 왜 꽃이 피었을까라든지, 봄도 아닌데 새잎이 나타났을까라든지, 꽃 향기가 천리는 갈 것 같다든지, 꽃 이름을 모르면 그려 가지고라도 오는 것이 좋습니다.
혹시 절에 갔다하면 약수나 마시고 대웅전 부처나 보고 오는 것보다는 절의 내력을 적고, 부처님이나 문의 무늬, 풍경의 소리, 노거수의 내력, 절에 있는 전설, 절의 뜰에 자라는 꽃들, 기타 우리가 그냥 흘러 지나가버리는 여러 가지 메모장을 빽빽히 채울 수 있을 것입니다. 전혀 부끄러워할 것 없습니다. 집 안에서 일을 하다가도 문득 창 밖을 내다보다가도 정말 갑자기 수필의 씨앗이 툭 튀어나오면 바로 적어놓으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즉시 수필을 쓰기 시작하면 좋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엔 곧바로 메모해 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금 있다 써야지 하고 일이 끝난 다음엔 이미 기억은 사라지고, 내가 무엇을 수필로 쓸려했더라 아무리 생각해도 이미 늦습니다.
그런데 그 발견은 단순한 의미를 알아내거나 남들이 알고 있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 아닌 자기만의 발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늘 보는 것일지라도 애정을 가지고 갖고 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달리 보이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애정 부여가 스파크를 일으키게 되면 이것이 글감이라는 감이 오게 됩니다. 송명화는 단 한 줄짜리 대학생이 굶어 죽은 사건에 관한 신문기사를 놓치지 않고 작품에 대한 착상을 얻게 됩니다. <고도>라는 작품입니다. 몸은 움직일 수 없는데, 아무에게도 요청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다가 눈물만 흘립니다. 이런 상상이 작가에게 방 안은 물이 흥건한 바다가 되고 죽어버린 시신은 움직일 수 없는 섬이 되어 나타납니다. 이웃과 단절된 현대 사회의 모순과 비정함을 ‘고도’라는 제재로 잘 형상화하게 되었습니다.
2) 상관화의 원리
제재와 주제의 상관성이란 사물을 바라보는 주체적 수필가가 나타내려는 주제의식과 대상 사이에 얼마나 참신한 유사성이 있느냐를 말합니다. 한마디로 제재는 주제가 요구하는 적재여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유추 능력과 관련이 있는데, 주제의식을 나타내는 데 관련된 재료와 유사한 재료를 선택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주제를 미루어 헤아리게 하는 것입니다. 주제의식을 유사성에 근거한 재료를 통해 말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나타내면 작문이 되고 맙니다.
이 과정은 부단히 인식적 사고를 가짐으로서 쉽게 해결할 수가 있지요. 중국의 시법에 ‘이단불심’이란 게 있지 않습니까? 제재와 주제의식의 관계를 연상 관계로 이어가기 위해서는 깊이 있는 사고가 필요합니다. 좋은 글을 쓰는 데 삼다를 주장했던 구양수는 다독, 다작보다 다상량을 가장 중요하다고 하였는데, 다상량은 생각을 깊고 풍부하게 많이 하라. 사유를 많이 하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젊은 학생들이 구양수더러 묻기를 나랏일에 그렇게 바쁜데 무슨 틈을 타서 그렇게 훌륭한 글을 줄줄 써느냐하니, 나는 정말 시간이 없다. 나의 시간은 전부 억지로 짜낸 시간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어 어떻게 시간을 짜내는가 묻는 학생들에게 아주 솔직히 대답합니다. 첫째는 말을 탈 때, 둘째는 잠 잘 때, 셋째는 화장실에서 일 볼 때 시간을 짜낸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업무외의 시간은 모두 체험과 사물을 연관지우는 데 썼던 것입니다. 우리도 수필을 쓰는 데 따로 조용히 눈을 감고 기다리는 것이나 책상 앞에 백지를 펴놓고 시험 보는 듯하는 것은 오히려 생각을 막는 일입니다. 정말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수필을 생각해야 합니다. 저도 어딜 가나 메모지를 들고 다니며, 다른 사람들이 흉을 보던, 손가락질을 하던 일일이 메모하곤 합니다. 자다가도 발상이 떠오르면 얼른 일어나서 단 한 줄의 아이디어라도 적어놓고 잠을 잡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 그 아이디어의 연상 작용으로 수필평론을 쓰곤 하였습니다.
평론에는 관점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제목이 대충 관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좋지요. 이를테면 엉터리 수필을 ‘벼’와 같은 ‘피’로 의미화하기도 하고, 명수필과 맹수필의 대비라든지, 누구나의 문학에 누군가의 문학으로 대비시킨다든지 하는 건 꾸준한 사물의 연상 작용의 결과입니다. 이런 상관적 사고는 무수한 체험들과 상상력이 가장 큰 힘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부분입니다. 조태일에 의하면 "과거의 체험들이나 또는 앞으로 겪게 될 체험들이 적당한 햇빛과 물, 바람이 되어 문학의 씨앗들에 싹을 틔우게 하고 성장하게 하며, 상상력은 여러 체험들을 유기적으로 조직하면서 질서를 부여하고 구체적인 이미지들을 만들게 한다.“ 고 하였습니다.
집 잃은 아이를 달팽이와 연결시킨 서채영의 <에스카르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바뀌어졌던 장롱의 변천사를 인생의 역사와 접목시킨 정문자의 <장롱>, 삼대에 걸친 여자의 운명을 가늘지만 참을성을 갖고 때로 굽이치는 강물처럼 절박하게 이어가는 실에 비유한 손수영의 <실>, 잘못을 수정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을 때 삶의 목표에 영점사격을 가하고 싶다고 장미의 <영점사격>, 사회적 냉대와 무관심 속에 살아가는 거리의 사람들을 뮤지컬 ‘레미제라블’에 결부시킨 홍영순의 <레미제라블>, 정이 필요한 인간 세계를 인큐베이트에 비유한 노현희의 <인큐베이트>, 인간불가지론의 비애와 안타까움을 최후의 순간에도 기록을 남기는 비행기 ‘블랙박스’에 결부시킨 박영란의 <블랙박스>, 자신의 것이긴 하나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다리 때문에 절망하는 사람들의 비애를 소금쟁이에 비유시킨 정성화의 <소금쟁이>와 장인정신의 가치와 긍정적 측면을 야인정신과 매치시킨 송명화의 <야인시대>는 주제의식과 대상 그리고 제재가 절묘하게 상관화된 작품이라고 하겠다.
3) 동화의 원리
동화란 물아일체의 동질화 현상입니다. 사물을 바라보는 수필가와 사물 사이의 교감이 있어야 함을 말합니다. 주체와 대상 사이에 동질의 요소가 내재되어 있어서 상호교호 작용이 전개된다고 하는 상사성의 법칙입니다. 물아일체를 노리는 수법은 원래 시적 법칙입니다. 그러나 서정의 세계를 다루는 수필 쓰기에도 주제를 내면화하고, 인간화하는 데 있어서 세계의 자아화가 필요합니다.
수필적 자아와 세계가 만나면서 서정이 꽃을 피웁니다. 그 만남은 아주 특별한 만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만남의 반응을 시적 접근이요, 언어화되면 시적 표현이 됩니다. 수필을 잘 쓰려면 반은 소설가가 되어야 하고, 반은 시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수필 쓰기에서 동화의 원리가 적용되기 때문에 그렀습니다. 외부 세계에 반응하는 유기체의 반응이 단순한 수동적인 반응이 아니라 그 외부 세계를 자기가 갖고 싶어 하는 세계로 변용시켜 자아와 세계가 동일성을 이루게 할 때, 수필에서 동화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수필의 문장에서, “내가 여자로 태어난다면 그믐달 같은 여자로 태어나겠다”(나도향의 그믐달), “나는 죽어서 나무가 되고 싶다. 무슨 나무가 될까? 이미 나무를 뜻하였으니 진달래가 될까. 소나무가 될까는 가리지 않는다”(이양하의 나무), “시간을 잘게 채 썰어놓고, 채 한 조각에 자장면을 비벼 넣고, 또 한 조각엔 저녁밥을 짓고, 또 다른 몇 조각에다는 파트 타임 일을 하는 이런 숨찬 생활에서 벗어나고자 할 때, 나는 가오리연이 되고 싶다”(정성화의 가오리연), “현무암의 탄생은 거와 같은 과정을 겪음 직하다. 숱한 우회와 굴절과 난파가 빚은 삶의 변증법을 안고 살아가는 내 모습과 무엇이 다르랴. 짐짓 진지성으로 세상을 무겁게 보다가 흉터가 많이 생겼다.”(박영선의 현무암) 등의 사상과 감정이 동화된 문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필적 자아가 세계와 만나는 태도와 논술적 자아가 세계를 만나는 태도는 다릅니다. 논술적 자아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응시하며 객관적으로 반응할 뿐입니다. 그 결과 최대한 객관적으로 세계를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필적 자아는 세계를 극히 주관적으로 반응하며 만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세계는 수필가와 영적 교감을 나누는데, 이때 제재적인 재료들이 수필가의 생활 속에 여과되어 사람의 냄새를 풍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필가의 체취랄까 내면 풍경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자기 노출의 진솔성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물상을 사랑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객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수필가는 삶에 대한 자유로운 사유, 내밀하고도 다채로운 정신의 정경을 독자들로 하여금 흠뻑 맛보게 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4) 의미재구성의 원리
문장은 흔히 두 가지 기능을 합니다. 전달 기능과 표현 기능이지요. 문학 문장은 표현 기능이 우세한 반면 상대적으로 전달 기능은 약합니다. 시와 거의 마찬가지이지요. 수필에 있어서의 표현 기능은 주로 주제의식의 구체화나 의미화 과정에 필요합니다. 소주제를 나타내거나 글의 전체 주제를 나타내어야 할 경우에는 표현 문제가 더 중시됩니다. 시적 표현과 좀 다른 것은 시를 쓸 때는 시인이 독자에게 메시지가 잘 전달되도록 친절을 베푸는 따위의 일은 하지 않습니다. 시인의 의도는 표현하는 것이지 그것이 전달되는 것에는 그렇게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수필은 언술적 표현으로 하되, 비유를 써서 대충 의미재구성을 통해 그 자리에서 약간의 고민으로 독자가 언표 내적 의미를 파악해 줍니다.
의미재구성의 원리는 문학의 속성 중에 하나인 형상성과 밀접하게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형상성은 쉽게 말해서 ‘산’이나 ‘옷차림’처럼 움직이지 않는 대상의 모습이 ‘어떠하냐’라는 물음에 대하여 ‘이러저러하다’고 대답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즉 형상화는 사물의 모습으로부터 받은 인상이나 느낌 등을 감각적으로 가능한 한 생생하게 재현함으로써 대상을 파악하게 하는 방식입니다. 주로 사물에 대한 공감에 역점을 둔 것으로 심미적인 태도가 요구되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허공에 머물고 있는 햇살은 봄기운을 머금고 나뭇가지와의 입맞춤을 시도하고 있다. 그 입맞춤이 무르익으면 나목의 뿌리는 펌프질을 더욱 부지런히 해야 하리. 펌프질의 밑바탕에 깔린 힘이 나에게 보이지 않는 용기가 되어준다. 그러고 보니 나무가 벗고 있는 이유를 이제야 할 것 같다.”(남지은의 나목)
수필어는 형상화를 위해 사용된다는 점에서 서투른 말장난이나 일상어와 구별되며, 정서를 나타낸다는 점에서는 지식을 습득하는 데 사용되는 과학어와 구별됩니다. 형상이란 존재하지 않는 무엇을 만들어 보여주는 것으로서 형상화 작업은 실제로 살아가는 현실에서 벗어난 안도감과 즐거움을 갖게 합니다. 하지만 형상만 중요시하면, 언어 유희에 빠지고 수필은 문자놀이에 그쳐버리고 말겠지요. 형상화 작업에는 반드시 인식이 숨겨져 있어야 합니다. 형상과 인식 작용이 동시에 되어야 좋은 문장이 생성되는 것입니다.
5) 결속성의 원리
수필은 결속성의 원리에 의해 구성되는 글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수필의 완성도에 있어서 제일 마지막 요건으로 결속성의 원리를 들고 나왔습니다. 결속성이란 일정한 길이로 통일된 전체를 이루는 의미단위로서의 구조를 단순한 문장들의 연쇄가 아니라 유기적 총체로서 기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결속성이 있는 작품과 그렇지 못한 작품을 직관적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왜 그러한가를 설명하는 것은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결속성은 단순히 있다 없다의 문제라기보다는 어느 정도 있는지에 대한 정도성에 기초한 개념입니다. 결속성의 여부 기준은 다음 열거하는 요목에 대한 존재나 수용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ㅁ 주제의식의 구현에 이바지하는 각 단락의 종속주제의 존재 여부
ㅁ 문단의 예시와 일반화, 일반화와 예시 구조 존재 여부
ㅁ 스토리 전개와 전개부 결미 또는 결미에서의 주제의미화 존재 여부
ㅁ 내용과 주제 사이의 일관성에 대한 독자 수용 여부
결속에는 외적 결속과 내적 결속이 있습니다. 외적 결속은 작품을 이루는 관점으로서 수필을 이루는 제재와 주제의 응집력을 말합니다. 반면 내적 결속은 작품의 구조적 질서를 말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단순한 나열된 것이 아니라 유기적 총체라는 것입니다. 수필의 구성 요소가 전체의 일부로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결속성을 가능하게 하는 세 가지 상호 작용적 특질을 세 가지로 요약하면 1)주제의 내외면화 여부, 2)종족 주제와 제재 사이의 관계, 3) 작품 내용과 주제의 독자 수용성 여부가 있습니다.
결속성의 원리에 따라 주제를 찾아나가고, 작품의 구조를 이해하고, 내용이나 작가의 정신적 반응에 발전적으로 대응해가도록 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들이 있으니, 이런 것을 우리는 결속의 브레이크라고 합니다. 브레이크를 자꾸 밟아야 하는 상황이 전개되면 제대로 운전을 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작품을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브레이크’가 자꾸 걸리면, 결국 독자가 꼭 찾아야 하는 수필의 주제를 찾지 못하고, 그래서 결국 상상과 연상 작용에 의한 마음의 움직임이란 감동의 순간을 놓치고 맙니다. 무엇보다도 기본적으로는 바른 문장을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III. 닫으며
수필을 잘 쓰려는 사람은 수필가가 되기보다는 문장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이제는 수필을 학적으로, 예술적으로 접근하는 아카데믹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수필은 ‘누구나’의 문학이 아니라 ‘누군가’의 문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논고도 그런 차원에서 작성되었습니다. 경험을 펼쳐 놓는다고 결코 수필 창작이 되지 않습니다. 고도의 세련된 지적 성찰이 수반되는 품격 높은 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위에서 말한 5단계 결속원리가 창작 과정에 적용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수필은 함부로 쓸 수 있는 글이 아닙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