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은 삶을 위한 것이었는데
다시, 삶은 모르고도 산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도 살아가지 않는가? 아기는 서서히 알아가기 시작한다. 낯선 세계를 손님 대하듯 친구로도 만들어간다. 안다는 것은 상아탑의 지적 유희가 아니라 이미 생존본능에 의한 것이었다. 삶을 ‘위한’ 것이었다. 알기 전에 이미 살고 있었고, 또한 살기 위해 알고자 하는 것이다. 앎은 삶을 살아내려는 가련한 노력이다. 앎이 삶을 옥죄기 전까지는….
―정재현, 『통찰』, 동연, 2021.
첫댓글 조용히 사색하는 가운데 떠오르는 생각은 현상을 진단하는데에만에도 벌써 소진이 되는 느낌입니다. 교황님 돌아가시고 한국에는 대선 준비가 한창이며 세계 어느 곳애서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고 지진이 발생했으며...주위를 돌아보는 데에도 지친 마음이 들지만 멈출 수 없는 이유는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정재현 교수는 종교철학을 하신 분입니다.
사람들의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의문 많이 제기합니다.
이제까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것들이
정교수님의 질문에 맞닥뜨리면
'아 그렇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우리가 알려하는 것들은
살아가면서 쓰기 위한 것이거든요
그런데 이 작업이 어느 정도 지나면
우리를 옭아맨다는 것입니다.
곰곰히 다시 생각해 볼만 하지 않습니까?
앎이 삶을 옥죈다는 말이 슬프게 들리는군요. 어린아이가 세상을 탐구하듯이 순수한 호기심만으로 앎을 추구하는 일은 그 어딘가에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