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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火命堂 날짜 : 09-03-12 15:59 조회 : 94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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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에 영향을 미친 고대의 종교
메소포타미아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는 그 풍요한 지역적 조건으로 인해 외부의 침입에 노출되어 있었으므로 항상 변동이 일어났고, 모든 것이 일시적이었다. 도시들의 지속적 전쟁을 통해 신들도 싸우고 사랑하며 만신전을 형성했다.
수메르 - 아카드의 만신전
수메르-아카드의 만신전에서는 6개의 주요 신성이 대두했다. 각 신성은 커다란 도시의 신이었다. 안(아누)은 하늘의 신으로 우룩의 우두머리 신이었다. 명목상으로는 신들의 왕, 통치자였다. 엔릴(벨 Bel)은 공기의 신으로 후에 안을 밀어내고 지하의 신이 되었다. 왕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니푸르의 우두머리 신이며, 위대한 전사신이다. 난나(신 Sin)는 달의 신으로 우르를 통치했다. 우투(Utu)는 라르사의 태양신으로 라르사 멸망 후 시파르에서 태양신이 되었다. 후에는 샤마쉬라는 셈족의 이름으로 불리웠다. 엔키(에아 Ea)는 물의 신으로 에리두가 고향인 지혜의 신이었다. 닌후르삭(아루루 Aruru)은 닌투, 닌마아로 알려지기도 했는데 母神이며 키쉬에서 우세하게 숭배된 신이다. 여러 남성신들이 닌후르삭의 사원에 별도로 세워진 지성소에서 예배되기되 했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닌후르삭은 결혼을 안했고 안의 아내는 중시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딸이며 사랑의 여신이자 하늘의 여주인인 처녀 이난나(셈족에서는 이쉬타르라고 부름)가 그 위치를 차지했다. 이러한 신들끼리의 관계는 서로 상냥, 친절한 것이었기 때문에 도시의 신들은 자기 도시의 사람이 다른 신을 숭배하더라도 허용하는 관용을 보였다. 그래서 Sin이 하란에서 숭배받고, 우룩에서는 샤마쉬(Shamash)도 숭배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3개조의 神家系
Anu / Enril / Ea는 천상,지하계,땅 위와 땅 밑의 물을 지배하며 물리적 우주를 분할했다. Shamash(태양신) / Sin(달의 신) / Ishtar(풍요의 여신)는: 농업과 관련해서 중시되었다. Anunaki는 지하세계의 신들이다. 이들의 우두머리는 Nergal인데 그는 원래 태양신이었다가 전염병의 신이 되어 지하세계의 주인이 되었다. 그의 그의 배우자는 이쉬타르의 동생이자 죽음과 불모의 여신인 에레쉬키갈(Ereshkigal)이다.
가장 널리 숭배받은 신은 이쉬타르였다. 이쉬타르는 세속에 물들지 않은 순수함을 가지고 있었고, 봄 햇볕의 신이며 식물을 움트게 하고 가축을 풍성하게 하는 신 Tamuz에 대한 사랑 때문에 천부적인 위대한 연인으로서 사람들 마음 가운데 자라잡았다. 한편 이쉬타르는 풍요의 여신으로, 아이를 낳게 하며, 식물에 생명을 부여하는 신이었다.그러나 아카드인들 사이에서는 잔인한 전쟁의 여신으로 여겨졌다. 이쉬타르는 팔레스타인과 이집트까지 전파되고, 조로아스터교도들도 이쉬타르를 Anahita(흠없는 분)이라고 불렀다.
바빌론의 마르둑
처음에는 두드러지지 못했던 마르둑은 에리두의 에아를 아버지로 삼아 자기와 연결시키고(에아의 장남이자 생장과 전쟁의 신인 니누르타도 흡수) 바르시파의 신이며 불의 신인 Nabu를 자기 아들이자 신들의 서기로 만들었으며, 그들의 기능 중 일부(에아의 지혜, 나부의 운명에 대한 지배력)을 흡수했다. Nippur 시의 엔릴의 속성도 그에게 옮겨졌으며, 결국 하늘의 주인으로 인정받았다.
바빌로니아의 신화와 서사시
A. 창조
이 세상에 처음 존재하였던 것은 원초적인 바다(여신 남무와 관련)였다. 바다로부터 하늘 An과 땅 Ki 가 나타났고, 안과 키는 산처럼 뭉쳐있었고 그 속에 공기인 엔릴을 만들어냈다. 공기가 움직여 하늘과 땅이 분리된다. 그 다음 엔릴은 달의 신 Nanna를 낳았고 난나는 해의 신 Utu를 낳았다. 이때 세계가 나타났다. 공기의 팽창으로 하늘은 높은 꼭대기에 다다르게 되었고, 땅은 단단한 바닥을 밑으로 하게 되었고 해와 달은 빛을 비추었다. 공기와 물의 도움으로 식물, 동물이 나타났고, 인간은 원초적 바다 남무, 어머니 대지 닌마아, 물의 신 엔키의 공동노력으로 창조되었다. 다른 전설도 있지만 바빌론 사제들은 물려받은 어떤 자료든지 고쳐서 마루둑을 혼돈에 대항해 싸운 영웅으로 묘사하고 인간과 세계의 창조자로 만들었다.
물의 신 Apsu와 끝없는 소금물의 용(혼돈)인 Tiamat이 결합함으로 많은 신을 생산했으나, 젊은 신들의 활기로 인해 고요함을 원하는 압수는 그들을 없애기로 작정했다. 티아맛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추진하자 에아가 압수를 처치하자, 티아맛이 복수를 시작하고 에아는 도망간다. 티아맛의 복수는 마루둑이 나타나서 티아맛을 죽임으로 끝이 난다. 마루둑은 티아맛의 시체의 조개와 같이 벌어진 곳을 두 조각으로 잘라 하나로는 하늘 위의 물을 받치고 있는 天蓋를 만들고, 하나로는 땅 밑의 물 위에 놓여 있는 덮개를 만들었다. 에아의 도움을 받아 그는 티아맛의 두 번째 남편이자 동료인 Kingsu의 피로 인간을 만들었다.
B. 홍수
원래 홍수 이야기는 수메르인이들에게서 나왔다. 이 이야기는 실제 두 강의 범람으로 인한 경험에서 연유한 것이다. 여러 이야기중 길가메쉬 서사시의 흥미로운 삽화를 주목할 수 있다. 신들은 인간의 죄악에 분노하여 홍수로 처벌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선신인 에어는 우트나피쉬팀(Utnapishtim)을 측은히 여겨 그에게 결정을 알려주었고, 그는 곧 방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는 구약의 내용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C. 죽음의 나라로 내려간 이쉬타르
이쉬타르는 남편 탐무즈가 죽자 그를 되살리기 위해 지하세계로 내려가고, 일곱 대문을 지날때마다 보석과 옷가지들을 빼앗겨 결국 홀랑 벗은 몸으로 도착한다. 그곳에서 수많은 고통을 당하면서 지낸다. 흑사병의 신 남타르가 육십가지의 질병으로 괴롭혔기 때문이다. 그동안 땅 위의 인간과 동물들은 멍청하고 게을러졌으며 사랑과 풍요가 사라졌다. 신들은 실의에 잠겼다. 에어는 전령을 지하계 Hades로 보내기로 했다. 저승의 여신은 마지못해 남타르에게 명해 생명수를 이쉬타르에게 뿌리게 하고, 건강을 되찾은 이쉬타르는 땅위로 돌아온다. 돌아오면서 각 대문에서 옷과 보석을 되찾는다. 이 이야기는 생장의 여신이 겨울이 다가와 사라졌다가 봄이 되자 다시 돌아온다고 하는 시적 감각의 이야기이다.
D. 길가메쉬의 여행
원래는 수메르인으로부터 비롯된 길가메쉬의 이야기는 우룩(에레크)의 지배자인 길가메쉬와 야생인인 Enkidu의 우정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엔키뒤는 이쉬타르를 격노케 하여 죽게 된다. 길가메쉬는 불사불멸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그는 고생 끝에 서쪽 죽음의 바다 너머 저승에 이른다. 그곳은 신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은 우트나피쉬팀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길가메쉬는 고난 끝에 찾은 영원한 생명의 약초도 뱀에게 빼앗기고 쓸쓸히 우룩으로 돌아온다. 이 이야기는 죽음에 직면한 인간의 좌절에 대한 깊은 연민의 정을 다루고 있다. 바빌로니아인들은 모든 즐거움은 이 세상에서 누려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희생제의, 주술, 점성술
이 세상에서의 축복을 확인하기 위해 바빌로니아인들은 사제의 도움을 받아 희생제의를 행하고, 주문을 외며, 제의중에 기도를 드리고 별의 움직임을 읽었다. 사제들은 환자 몸속에 있는 악령을 쫓아내는 주문을 외었다. 사제들은 잘 조직된 과업을 지니고 바쁘게 지내며 고객들에게 봉사했고, B.C 3200년경에 이미 사원기구라 할 수 있는 법인체를 공영했으며, 점토판에 수입과 비용을 표시했다. 사원 구조는 인공의 산(지구라트)으로 그 정상에는 사당이 세워져 있었다. 이 사원의 구내에서 사제들은 긴 제의를 행하는데, 특히 신년축제의 열 이틀 동안 두 번째 날부터 다섯 번째 날까지 그런 제의를 행했다. 여기서 그들은 학교를 경영하며 읽기, 쓰기, 셈본등을 가르치기도 했다.
또 시간의 징후를 읽고 미래를 예견하려는 야심으로 점을 치기도 했다. 점은 꿈의 해몽, 자연의 징후 해석등을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었고, 특히 양의 간에 나타나는 징조 해석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가장 중요한 점치는 방법은 점성술로 후대 천문학의 출현을 예비했다. 점성술을 인간사에 미치는 천체의 영향력에 관한 정교한 이론으로 발전시킨 것은 헬레니즘 시대의 후기 그리스도인들이었다.
19세기에 그리이스 종교에 관한 기존 견해가 바뀌었다. 호머가 묘사한 신의 아름답고 균형된 모습은 사실상 잡다한 요소를 통합, 승화시키려는 노력에서 빚어진 결실로 재해석되었으며, 농민의 혼잡스럽고 거친 여러 가지 미신들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초기 그리이스의 신
초기 그리이스 종교 형성의 중요한 계기는 B.C 1200년경 북부인의 침입이었다. 그들은 인도-유럽어를 쓰는 아리아족 기마전사들로, 헬라딕 문명 사람들을 정복했다.
침입과 정복의 변동과정을 거치며 그리이스 도시국가가 형성되자, 그리이스 종교 형태가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종교는 많은 요소를 조합해서 이루어졌다.
하늘의 父神이며 비를 내리게 하는 우두머리 신 Zeus(인도-아리아 족은 디아우스 피타르, 로마인은 주피터라 부름), 땅의 모신인 Demeter, 제우스의 누이이자 난로의 처녀신인 Hestia가 그것이다. 다른 신들은 그리 연륜이 깊지 않았다. Rhea는 미노스 문명을 반영하며, Athena는 미케네 문명을, 헤르메스와 헤라는 에게 또는 헬라딕 문명을 반영한다. 아폴로는 이오니아에서 나타났으며, 아프로디테는 사이프러스나 사이테라에서, 그리고 디오니소스와 Ares는 테라스 출신이었다.
고전시대 그리이스인들과 그들 신과의 상호관계
고전 시대 그리이스인들은 자기들 주위에 많은 신이 존재하며, 인간의 여러 가지 목적을 성취하려면 신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다신론의 입장은 땅 속, 땅 밑에 살고 있는 여러 가지 정령 chthon 과 하늘이나 바다 밑에 살고 있는 여러 초자연적 존재들을 알고 있었고, 그런 존재의 수가 많고 종류도 다양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신들을 인간과 같은 모습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인간의 생활과 인격으로부터 유추된 개념과 상징을 가지고 신을 묘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이스인들이 많이 지지한 신들은 세상을 초월하며 멀리 떨어져 있는 신이 아니었다. 신들은 인간과 매우 가까이 존재하고 있는데, 예컨대 난로(헤스티아), 길가의 경계석이나 헤르마(헤르메스), 도로의 아폴로에게 바쳐진 집앞의 사원, 제우스 크테시오스를 모신 창고 속의 항아리 등 생활에 매우 밀접한 것과 관계되어 있었다. 모든 공식적 행사에서는 신에게 기도하고 원조를 바라는 절차가 있었다. 신의 승인없이는 농사도, 여행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들의 신에 대한 태도는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과 신이 긴밀하게 협동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신들도 인정하지만 그들에게 기도와 희생제물을 바치지는 않았다. 지하세계의 신인 하데스와 하늘의 신 우라노스에게 예배를 올리지 않은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러나 제우스에게는 종종 기도하는데, 그는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또한 가까이에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아폴로도 마찬가지이다.
신들의 복합적인 기능
지리적으로 조그만 골짜기와 평야로 분할된 그리이스는 사람들을 분리시켜 지역별로 여러 가지 정령을 숭배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북부에서 침입한 북방인들은 그리이스인들에게 새로운 언어와 낙천성, 신 명칭의 통일을 촉진했다. 각 지역의 정령과 초자연적 존재들은 북방인의 주요한 신이나 여신에 흡수되어 기존의 역할과 의례, 경력등을 넘겨주는 반면 그 고유한 성격을 부각시키기도 했다. 그 이후 종교의 발전은 주로 도시에서 이루어졌다. 위대한 신들은 시내에 실제로 살고 있다고 여겨졌고, 여러 신 및 초자연적 존재들과 뒤섞이게 되어 각 지방의 전통 안에서 외래의 신들과 고유한 신이 서로 융합하게 되었다. 제우스 신의 경우도 침입자의 신이 지방신의 의무를 양도받는 과정을 잘 드러낸다. 헤라는 토착신으로, 제우스와 헤라의 결합은 Jane Harrison에 따르면 "제우스와 헤라의 결혼은 북방인의 침입으로 원주민이 정복된 사건을 반영하고 있다.
... 제우스와 헤라의 갈등은 종족간의 갈등에서 찾아야 한다."
다른 해석은 헤라는 원 그리이스인의 모계출계전통을 유지하고 있던 산악 오지 주민의 여왕이고, 제우스는 부계출계 북방인의우두머리로, 제우스가 피정복민들 사이에서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헤라와 결혼하였다는 것이다.
아폴로는 원래 헬레네에서 탄생한 신이 아니다. 적어도 [일리아드]에서는 트로이 편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신화의 내용으로 볼 때 아폴로는 델로스 섬이나 소아시아 평원 출신으로 짐작된다. 처음에 그는 목축과 농사의 신이지, 처음부터 태양신은 아니었다. 후에 아폴로는 그리이스 파르나수스 산 언덕에서 피톤 Python을 살해하여 델피에서 피톤이 차지했던 자리를 차지했다. 이는 그리이스 종교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사건이다. 이로써 아폴로는 계시를 내리는 신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많은 지방신과 정령이 다른 신에게 흡수, 승화되었다. 오직 디오니소스만이 원래의 모습을 간직한 채 동화되지 않았다.
호머가 소개한 여러 신
호머가 이야기한 신들은 모두 올림푸스산의 높은 곳 아크로폴리스를 고향으로 한다. 호머의 신의 족보에 나오는 신들은 매우 귀족적인 성격을 가진다. 그들은 자연의 여러 가지 힘을 책임지고 있으나, 올림푸스에 오기 이전에 비하면 자연의 힘을 다루는 능력이 많이 쇠퇴했다. 즉 원시적 기능을 벗어버리고 보다 고상하면서도 단순한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미노스문명의 분위기를 담은 주물, 동물형태의 신, 모신등은 사라지고, 펠라스기아인이 동물과 인간의 풍요, 성장, 죽음, 지하세계에 대해 갖고 있던 관념을 그리이스인들에 의해 다시 정교하게 다듬어져서 받아들여졌다. 그리이스인들은 신을 애매모호하고 신비스러운 힘이나 불길한 징조를 나타내는 존재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신들은 대낮의 밝은 곳으로 나와 그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내며 서로 명백히 구별되었다. 신들은 지상의 남녀와 같은 모습으로 생각되어 사고와 욕망, 분위기, 열정이 모두 인간적이었다. 죽지 않는 존재이기는 했지만 알수 없고 예측불가능하며 무서운 존재는 아니었다.
미적으로 볼 때 신은 인간보다 매력적이었으며, 균형잡혔으며, 세련되고 아름다웠다. 이런 완전한 모습은 인간으로 하여금 신비로운 전율의 감정을 일으키게 했다. 신들은 인간의 생활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그리이스 신들은 근대적 의미의 정의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우선 자신의 권력, 힘 arete, 권위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신의 권한은 엄격히 제한되어 있다. 신보다도 강력한 것이 존재하는데, 제우스조차 그것을 어찌할 수 없다. 그것은 각 인간에게 자기 몫으로 할당된 것, 개인의 인생에 있어서 예정되고 약속된 부분, 즉 moira이다. 이 모이라와 함께 여러 가지 모호한 힘 - 맹목적 어리석음, 테러, 소동, 폭동, 루머, 죽음 -이 같이 움직인다.
따라서 신도 인간처럼 자연과 역사의 전체 틀 안에서 움직인다. 신이 초인간적이지만 그 힘이 무한정한 것은 아니다.
호머의 서사시는 그리이스인들은 문화적, 종교적으로 묶어 통일된 감정을 갖게 하는데 기여했다. 호머가 환영받은 이유는 종교적 이유보다 정치적 이유가 더 컸던 것이다. 그러나 호머의 시에서 묘사된 신들이 과연 실제로 각 지방의 종교생활에까지 침투해서 실질적 신앙심을 이끌어냈는지는 의심스럽다.
헤시오드의 神統記
헤시오드(B.C 8세기)는 신의 기원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신 사이의 관계를 정리하고 질서를 잡아보려는 시도를 했다. 그는 태초에는 혼돈 Chaos 만이 있었으나, 우주가 점차 진화하면서 대지(Gaea 또는 Ge)와 Tartarus(지옥), 그리고 Eros(사랑)로 바뀌었다고 했다. 카오스는 밤과 어둠으로 남고, 밤과 어둠은 다시 에로스의 힘을 통해 낮과 공기를 낳았다. 밤은 배우자없는 고독한 침실, 꿈, 죽음, 노년, 비참, 우정 그리고 불화를 만들었다. 불화의 여신도 남편없이 혼자 힘으로 기아, 노역, 살인, 전투 등 고통스럽고 투쟁적인 일들을 낳았다. 반면 땅은 우라노스(별로 뒤덮인 하늘)를 낳고 산과 바다도 낳고, 땅과 바다가 짝을 지어 각종 생물, 무생물을 만들었다. 그 다음 최초의 위대한 신들이 우라노스를 남편삼아 임신했지만 우라노스가 방해해서 아이가 탄생하지 못했다. 그러나 Kronos는 가에아의 도움으로 밖으로 나와 어머니가 준 낫으로 아버지를 거세한다. 우라노스에게서 흘러나온 피가 대지를 임신시켜 대지는 Erinyes(세 자매의 목수 여신), 타이탄 족(거인족), 그리고 님프(요정)을 낳았다. 한편 상처난 부위 주변에서 일어난 바다의 거품으로부터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나타났고, 승리한 크로노스는 뒤이어 태어난 Rhea와 결혼했으나, 자기 자식이 자기 자리를 빼앗을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여 아기가 태어나는대로 입속에 삼켰다. 그러자 레아는 할머니 대지의 여신의 도움을 받아 마지막에 태어난 제우스를 돌로 바꾸어놓아 크로노스가 그것을 모르고 삼키게 하였다. 제우스는 크레타의 동굴에 숨어 할머니 손에 자라, 마침내 아버지를 굴복시켰다. 그리고 크로노스가 삼킨 신과 여신들을 모두 토해내게 하여 신들의 왕이 되어 통치하였다. 헤시오드의 시도는 신학의 면에서는 그리이스인들을 만족시켰지만, 질서를 거부하는 일상의 종교생활에는 변화를 일으키지 못했다.
가정의 일상적인 종교생활
일반 그리이스인들의 종교생활은 대개 공식적 의례가 있을 때 가족이 참가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지방에 있는 사람들은 목동인 Pan, 지모신 데메테르, 헤르메스, Daimon(마나로 가득찬 것), 케르(복수), 복수의 여신, 모이라, 에린예스, 귀신, 반인반수, 영웅, 지하의 신들을 섬겼다. 이 외에도 그리이스인들은 타부, 주술, 점복등에 관심을 기울였다. 한편 도시인들은 가정의 종교와 주술외에도 그 도시의 신을 찬양하는 축제에 참가했다.
아테네의 축제
아테네인은 신을 계절과 연관시켜 성대한 제의를 수행했다. 이 축제에는 종교와 예술의 결합이 있었으며, 주술적 요소도 포함되어 있었다.
신비종교
그리이스인들은 이미 자기 자신안에서 신을 느끼고 신이 지닌 불멸의 본성을 자기도 공유하려는 욕구를 가지게 되었으며, 그것을 충족하기 위한 열광적 방법을 창조해냈다. 즉 대중이 공식적으로 치르는 희생제의만으로는 만족시키지 못할 개인적인 차원의 종교적 욕구를 갖게되었는데, 그것이 신비종교이다.
가장 오래된 신비종교는 엘레우시니아 의식이다.이 종교의 신자는 보다 나은 운명을 얻기 바랬으며 내세에서도 영원히 죽지 않는 영광을 염원했다. 그러나 스스로 덕을 쌓아 응분의 보상으로 영광을 얻기 보다는 데메테르, 코레, 그리고 디오니소스가 발휘하는 재생의 힘에 의지하려고 했다. 디오니소스 신비종교는 격렬하고 난폭했다. 이 종교는 타르고-피리기아에서 시작했으며, 디오니소스의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신에 잡혀서 도취상태에 빠진다. 오모파기아 의례는 호아소와 새끼염소를 실제로 갈기갈기 찢어서 사용하는 것이었다. 오르페우스 숭배는 보다 온건한 성향으로, 육식 금지, 성생활 금기 등을 지키는 금욕생활로 자신으로부터 악을 없애 죽은 후에 지옥에 가는 것을 피하려고 했다.
그리이스 철학은 이러한 관념에 힘입어 학파를 형성하기도 했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오르페우스 신비종교의 색채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영혼을 정화하는 것이 인간 생활의 주요임무라고 해서, 오르페우스(또는 아폴로)를 따름으로서 영혼의 평정과 이해를 도모하고 나아가 신과 같은 균형의 상태에 이르기를 바랬다. 그들이 의학, 천문학, 음악, 수학, 순수철학을 연구한 것은 자기 영혼속에 신과 같은 자질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윤회의 고통을 겪지 않고 통찰력을 갖춘 정결한 정신상태를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그리이스 종교와 비극 작가들
그리이스 비극의 주제는 인간의 재앙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이었다. 아에스퀼로스는 제우스를 우주적 정의의 집행자로 보아 도덕적으로도 고결한 위치에 올려놓았다. 소포클레스는 제우스에게 자비라는 요소를 부여해 엄격한 인상을 완화했다. 유리피데스는 신에게 회의의 목소리를 드높였다. 하지만 유리피데스가 신앙을 버린 것은 아니다. 그는 진정한 신의 개념을 바탕으로 신화와 전통의 잘못된 것을 제거하고자 노력했다.
철학자와 신
그리이스 철학은 일원론에서 시작했다. 우주의 모든 것은 어떤 하나의 근원적 실체가 이런 저런 형태로 나타난 것이었다. 탈레스는 그것을 물이라고 했고,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라고, 헤라클레이토스는 불, 아낙시만드로스는 정할 수 없이 무한한 어떤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것이 무엇이든 창조의 힘을 지닌 신적 존재라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했다. 크세노파네스는 창조의 힘을 가진 그 존재는 "신 가운데에 가장 위대한 신이며 형태와 정신 양면 모두에서 인간과는 다르다. 그는 모든 것을 바라보고 모든 것을 생각하며, 모든 것을 두루 듣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존재를 신인동형관의 오류로 이해했다고 비판한다. 플라톤은 호머의 신들과는 달리 신은 보다 높은 어떤 힘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 힘의 뜻에 따라 충실하게 움직이는 존재라고 보았다. 즉 신들 위에, 모든 존재와 사물의 배후에는 하나의 창조자 혹은 조물주가 있으며, 그 창조자는 모든 가치 가운데 최상의 가치인 선과 일치하는 존재였다.
로마
로마도 정치적 격변에 따라 토착종교와 외국의 제의 예배가 혼합되었다. 이러한 융합의 과정을 추적해본다.
초기 로마의 종교
주요한 성소는 처음에는 로마 영역 밖에 있었다. Diana 여신은 네미 호수가 아리시아의 작은 숲속에서 숭배되었으며, 그녀의 사원은 라틴 연맹 전체가 공유했다. 동쪽 알반 언덕 위에서는 주피터 라티아리스(Jupiter Latiaris)를 찬양하는 축제가 벌어지곤 했는데, 모든 라틴 세계가 참여했다. 후대에 로마인은 자기들의 초기 종교를 Numa의 종교라고 불렀는데, 법을 전해준 자가 종교도 규정해주었다고 믿었다. 그것은 주술과 가까웠으며, 엄격한 성직제도를 갖고 있었고, 주로 징조 해독, 부적, 타부에 주의를 기울였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numia(단수는 numen)라고 하는 초자연적 힘, 또는 효능에 관심을 두는 것이었다. 이는 마나와 비슷하지만 동일한 것은 아니다. 누멘은 일상적인 것을 넘어서는 일정의 효력을 의미한다. 신은 누멘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으며 신의 힘과 위대함도 누멘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그러나 누멘은 많든 적든 어느 사물, 어느 장소에나 있다. 인간도 누멘을 소유하며, 가족단위나 집단의 누멘을 중시했다. 이 누멘은 이전이 가능하며, 증대시킬 수도 있다. 그러므로 초기 로마인들은 신과 정령의 성격에 대해서는 그리 분명한 관념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로마인들에게는 인격신, 신화, 영웅숭배, 지하세계, 우주창생설도 존재하지 않았다. 로마인들이 신을 인격화하지 않은 이유는 numen의 여러 가지 다양한 기능을 분석하는 일에 더 관심을 쏟았기 때문이다. 신개념의 확대와 정교화는 사제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A. 가정과 농장의 종교
농사일을 위해 로마인들은 오래전부터 전해내려온 적당한 numen의 소유자에게 호소했다. 가사와 양육에 있어서도 numen이 있어야 할 장소에 신을 배정했다. 이런 모든 numen의 소유자들은 매우 다양한 의식과 축제를 통해 찬양하고 위무하곤 했다. 이 의식과 축제의 핵심은 말보다는 행위였다. 그 까닭은 종교가 주술이나 타부와 불가분의 관계였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은 애매모호한 감상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으므로, 제의의 특징은 매우 형식적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인격대 인격의 친밀한 관계는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형식적 엄격성은 사제를 필요로 했다. 사제들만이 전해내려온 의식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실수없이 실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B. 로마의 국가 종교
초기 로마의 국가종교는 가내 제례가 국가의 차원까지 확산된 것이다. 로마 국가종교 조직은 매우 잘 다듬어져 있었다. 종교적인 일은 대개 사제장의 소관이었다. 새해 시작후 104일째 되는 날은 공식적 제의의 날인데, 이 날에는 여러 신의 사제들이 긴 의식과 희생제의를 꼼꼼하게 수행했다. 그런데 국가 의식에는 특별한 신이 전혀 거론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지만, 제의를 받는 신의 이름을 분명하게 거론하는 경우도 많았다. 여러 신들이 언급되다가 사라졌는데, 도시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신은 오래도록 이름을 날렸다. 주피터는 인도-유러피안언족의 디아우스 피타르 또는 제우스 파터와 같은 신이다. 주피터는 이탈리아에 와서도 각 지방의 신의 역할을 흡수했다. 그에게 부여된 가장 고귀한 명칭은 옵티무스 막시무스 Optimus Maximus였다. 주피터는 천둥, 번개, 비, 빛의 신이었고, 인간사의 경로를 미리 정해놓고 다가올 사건을 하늘과 새를 전조로 얼핏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 사람들은 점복관으로 하여 그 징조를 해독했다. 마르스와 퀴리누스는 전쟁의 신이었다. 마르스는 원래 가축과 밭을 지키는 보호신이었다가 로마의 팽창에 따라 전쟁신으로 바뀌었다. 퀴리누스는 같은 전쟁신이어도, 수비적 성향을 나타냈다. 야누스와 베스타는 의식의 맨 처음과 마지막에 모셔지는 신이었다.
에트루리아인의 영향에 따른 변화
B.C 6세기 에트루리아인의 로마 지배를 통해 새로운 신들이 로마에 들어왔다. 주피터는 주노와 결혼하여 부부사이로 발전했고, 이를 통해 주노는 성별을 비롯 훨씬 더 분명한 인격성을 갖게 되었다. 미네르바는 에트루리아인의 신으로 지혜의 여신, 예술과 무역의 후원자였다가 후에는 전쟁터에 나타나기도 하면서 인간의 모습으로 시각화되었고, 신의 상을 만들게 되었다.
그리이스인으로부터의 영향
B.C 6세기에 걸쳐서 그리이스의 제의와 신들이 로마에 들어와 로마식으로 변했고, 특히 완전히 인격화된 신들로 인해 새로운 차원으로 로마 종교가 발전했다. 또한 메소포타미아의 점성술이 그리이스를 거쳐 로마로 들어왔고, 이러한 종교적 자극에 의해 로마인 자신이 만든 새로운 신(옛 전통으로부터 소생시킨)도 등장했다. 한편 그리이스 신화와 서사시에 대한 관심에 따라 이탈리아에 맞게 각색된 신화가 등장했다.
동방으로부터의 영향
로마제국의 팽창과 정복에 따른 경제적 삶의 풍요로부터 파생한 회의주의와 무기력함은 이방 종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동방으로부터 전래된 신비주의는 풍성한 정서적 만족감을 불어넣었다. Magna Mater 즉, Cybele 퀴벨레를 숭배하는 종교가 들어왔고, 박쿠스(Bacchus, 디오니소스)의 신비종교가 도입되어 널리 퍼졌다. 하지만 상류층은 신비종교들을 싫어했고, B.C 186년경에는 원로원에서 박쿠스 신비종교를 금지하는 법을 공포했다. 이외에도 카파도시아의 Ma, 시리아의 Adonis, 이집트의 이시스와 이스리스 세라피스, 페르시아의 Mithra 등의 신이 모두 들어왔다. 이러한 확산은 당시 로마국가종교가 불가지론자인 정치가 및 신앙심없는 사제들의 수중에 놓여 경직화된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로마 멸망기의 종교
공화정 마지막 백년(B.C 150-49)동안 로마의 종교는 원심성의 성격을 띠며 나아갔고, 국가종교는 형식주의로 타락해 공허해졌다. 그리이스 철학에 영향받은 지식인들은 에피쿠로스학파의 무신론이나 스토아 학파의 범신론을 따랐다. 아우구스투스 케사르는 국가의 복원을 위해 과거 로마 종교를 부활시키려고 했지만 미미한 반응을 일으켰을 따름이다. 한편 제국의 통합을 위한 정치적 이유로 황제들이 신격화되었다. 그러나 황제 숭배에는 사람들을 변화시킬 생동력 있는 힘이 존재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여러 신을 한곳에 모아놓은 로마 국가종교는 역동성을 잃고 말았다. 그것을 대체한 것이 기독교였다.
<참고문헌>
J.B Noss, 윤이흠 역, [세계종교사]
영지주의
개요
영지주의는 여러 전통 종교들로부터 영향을 받고 또 영향을 주었지만, 초대 그리스도교에 가장 심오한 영향을 미쳐 교회법·신조·주교조직이 생겨나게 했다. 영지주의라는 명칭은 그리스어 '그노스티코스'('그노시스', 즉 '비밀스런 지식'을 소유한 사람)에서 유래했다. 영지주의 사상에 반대한 교부들(185경 이레나이우스, 230경 히폴리투스, 375경 에피파니우스)의 글과 영지주의 저작들 자체에 소개되어 있는 영지주의 현상은 신학·윤리학·의식 등과 복합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엄격히 분류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영지주의 분파들은 교육이나 경험적 관찰이 아닌 신적 계시에 의해 얻어지는 비밀스런 지식의 구속능력을 공통적으로 강조한 듯하다.
학자들은 영지주의 세계관의 기원을 이란의 종교적 이원론, 중기 플라톤 철학자들의 알레고리적 이원론, 특정 유대교 신비주의자들의 묵시적 사상에서 찾는다. 이집트인들과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사상에서 기원을 찾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영지주의적 종교혼합주의가 충분히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리스도교가 등장하고 난 다음이었다. 최초의 영지주의자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시몬 마구스이다. 그는 악이 신성의 내적 분열에서 생겼다는 영지주의의 근본 개념을 소개한 1세기 유대교 이단자였다. 그러나 시몬의 '그노시스'는 〈신약성서〉 후반부에서 언급되는 영지주의 집단들과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유대교와 유일신교에 머물러 있었다. 이원론적인 관점은 영지주의가 널리 보급된 이후 헬레니즘 세계에서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아 확립되었으며, 플라톤 철학으로부터 하위의 신 데미우르고스(조물주)가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주장을 빌려왔다. 이러한 주장은 〈요한의 외경 Apocryphon of John〉(2세기초), 1940년대에 상(上)이집트 나지 함마디 근처에서 발견된 다른 문서들(통속적인 '영지'를 다루었음), 3세기 콥트어 영지주의 저서 〈신앙의 지혜 Pistis Sophia〉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발렌티누스, 바실리데스와 이들 학파가 제시한 지적인 '영지'론은 통속적인 '영지'를 전제로 삼았지만, 그것은 철저히 헬레니즘과 그리스도교로 채색되었으며, 때로는 중기 플라톤주의의 견해에 매우 가까웠다(→ 발렌티누스). 동방의 영지주의는 조금 다른 과정을 겪었다. 전통적인 이란 종교의 영향을 받은 반(半)영지주의적인 마니교는 영혼과 물질의 절대적인 우주적 이원론을 발전시켰다.
영지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의 무의식적 자아는 신성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지만, 불행히도 타락했기 때문에 진정한 본질과 완전히 동떨어진 세상에 던져졌다. 사람은 위로부터 오는 계시를 통해서 자신의 기원·본질·초월적인 운명을 알게 된다. 영지주의적 계시는 이성의 힘을 가지고서는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철학적 계몽과 구별되어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교 계시와도 구분되어야 한다. 영지주의적 계시는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으며, 성서에 의해서 전승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자아의 신비에 대한 직관이다. 영지주의자들에 따르면 하느님은 이름이나 설명을 초월하는 심연과 침묵이고, 절대자이며, '플레로마', 즉 빛의 영역을 형성하는 선한 영들의 원천이다. 2세기 영지주의 분파들은 히브리와 그리스도교 종교 저서들을 사용하면서도, 영지주의의 의미들을 그것들과 구분하기 위해 알레고리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영지주의 집단은 학파를 구성하여 권위 있는 가르침들을 전수하고, 해석하며 비밀을 보존한 듯하다. 의식도 분파에 따라 달랐다.
그리스도교 교리의 발전은 대체로 영지주의를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조를 작성하고, 〈신약성서〉를 정경으로 확정하고, 주교(감독)의 권위를 강조한 것은 영지주의의 주장에 맞서기 위해 필요했다. 영지주의자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최초의 신학자들이었으며, 그들의 사상체계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상이 체계화되도록 자극했다. 그외에도 그들은 자유·구속·은총 등 그리스도교 저자들이 한동안 잊고 있었던 중요한 주제들을 활성화시켰다. 훗날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은 그가 초기에 마니교도로서 경험한 것에 크게 힘입은 것이었다
영지주의(그노시스: gnosticism)
영지주의란 AD 1-3세기에 일어났던 헬라, 로마 세계에서 두드러졌던 철학적, 종교적 운동이다. 영지주의는 여러 전통 종교들로부터 영향을 받고 또 영향을 주었지만, 초대 기독교에 대해서 가장 심오한 영향을 미쳤다. 이 영지주의는 기독교의 이전에는 발견되어지지 않음으로 인하여, 기독교 이전부터 독자적으로 존재하던 종교는 아니라고 보여진다. 즉 기독교가 시작되면서, 그 당시에 존재했던 철학과 이방종교적 사상이 기독교와 접목하면서 발생한 혼합적 문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지주의라는 명칭은 헬라어 '그노스티코스'에서 유래했다. “그노시스”란 “비밀스러운 지식을 소유한 사람”을 의미한다. 즉 영지주의란 특별한 지식을 소유하여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소위 접신론적(接神論的)인 운동을 말하며, 초대교회 당시에 있었던 최초의 기독교 이단이다.
영지주의 사상에 반대하며 비판하는 교부들의 책(이레나이우스, 히폴리투스, 터툴리안, 클레멘트, 오리겐 등)이 소개됨으로서 초대교회에 영지주의가 존재하였음을 알게 되었으며, 또 발견되는 영지주의 저작에 소개되어 있는 영지주의 현상은 신학, 윤리학, 의식 등과 복합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엄격히 분류하기는 어렵다. 또 영지주의는 2세기 이후에는 서로 다른 다양한 형태로 분파되어 발전해 갔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영지주의 분파들은 사도들의 가르침 - 즉 성경적인 교육이나 체험적 관찰이 아닌, 소위 주관적인 신적 계시라고 불리는 특별함에 의해 얻어지는 비밀스런 지식의 구속능력을 공통적으로 강조한 듯하며, 알레고리적인 성경해석과 헬라적 철학의 혼합사상, 육체를 죄악시하는 금욕주의, 혹은 이원론(악한 신과 선한 신의 공존, 혹은 하나님과 물질세계의 분리적인 대립)을 주장하였다. 학자들은 이러한 영지주의의 근원을 네가지의 혼합적인 영향이라고 본다.
1) 헬라철학(프라톤주의, 스토아학파등) 2) 동방종교 3) 유대교 4) 기독교
즉 기독교가 전파되어짐에 따라, 그 당시에 상존하였던 유대교의 율법적인 전통사상과 이교도의 종교적 사상과 철학적 사상등이 기독교와 혼합되어지며 형성되었던 것이다. 영지주의의 핵심교리는 하나님과 물질계 사이의 존재론적 이원론(二元論)에 있으며, 악이 신성의 내적 분열에서 생겼다는 동방종교적인 신화의 근본 개념을 갖고 있다. 또 비록 다양한 형태였지만, 그들 집단의 지도자가 갖은 철학적 사상에 근거한 깨달음, 즉 그들이 신적계시라고 부르는 특별한 지식에 의한 구원을 주장하였으며, 예수의 성육신을 전혀 다른 개념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성경에서도 그러한 초기형태의 영지주의가 등장한다고 보여지는데, 사도들은 그러한 사상에 대해서 매우 비판하고 있었다. 바울은 영지주의의 혼합적인 거짓교훈에 대해서 경고하였다. 그는 지식으로 교만하게된 고린도교회의 대적들, 비교적(秘敎的)인 지혜를 강조하고, 엘리트 부류(고전2:6-7)로 자처하는 그들에 대해서 편지한다. 지식은 교만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세워주는 사랑이며(고전8:1, 13:8), 부분적으로 폐하게 되는 지혜는 십자가 앞의 어리석음이며(고전1:18, 2:7-8), 참지식은 영적우월주의가 아닌 그리스도의 마음(2:16. 빌2:5)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골로새서에서는 바울도 헬레니즘 철학과 유대교의 혼합사상을 환기시키려고 한다. 초등학문(스토이케이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수단으로서 금욕주의(골2:20-22,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는 사람의 가르침)를 가르쳤던 곳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자유케 하는 능력을 선포한다(골3:10)
목회서신이라고 불리는 디모데전서에서 유대인의 신화와 족보에 참념케 하는(딤전1:4, 4:7, 딛1:14), 거짓지식(딤전6:20)을 가르치는 율법교사를 비난한다. 그들은 신령한 부활이 이미 실현되었다고 선포하였다(딤후2:18) 또한 식물과 결혼에 대한 금욕주의(딤전4:3, 2:15, 5:14, 딛2:4)를 주장하였으며, 그것은 후기 금욕주의의 형태인 영지주의자를 반영한다.
특히 요한일서는 영지주의에 대항하여 그들을 비판하는 내용이며, 특히 사도요한은 거짓교사들의 이원론(빛과 어두움, 요일1:5-6)을 존재론적으로 비판한다. 그들은 성육신을 영적 그리스도로 대체하였고(4:2), 지식을 믿음으로 바꾸었으며(3:23, 5:20), 속죄와 상관없는 것으로 바꾸었다.(2:2, 5:6-10) 예수 그리스도안의 계시된 사랑의 하나님을 부인하면(4:8) 그들은 적그리스도의 영(3절)과 미혹하는 자(요이1:7)가 된다.
교회사에서는 2세기에 이르러 영지주의가 그 형체를 명확하게 드러내기 시작한다. 전승에 의하면, 최초의 영지주의자가 시몬 마구스(행8:9-24)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초대교부였던 이레니우스(Irenaeus)는 「이단들에 반대함」(Against Heresis)이라는 글에서 시몬 마구스(Simon Magus)를 향해 '모든 이단들의 아버지'라고 공격하였다. 이 사람이 사도행전 8장9절에서 24절에 나오는 인물과 동일한가에 대해서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이레니우스가 공박한 시몬 마구스라는 자는 사마리아에서 크게 위세를 떨쳐서 주후 150년경에는 큰 집단이 되었다고 한다. 시몬 마구스는 자칭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하면서 초월해 계신 하나님을 부인하였다. 따라서 성경을 거부하였고, 내재하는 영의 성육신을 강조하였다. 구원을 위해서는 '지식'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천지의 근원을 고요함에서 찾고자 하였다. 마치 신비적인 안개 속을 헤매면서 마음으로 그 속에 있는 진리의 빛을 찾아간다는 것이다. 특히 시몬 마구스는 훗날 양태론(Modalism)으로 불려지게 될 신론을 갖고 있었다. 그에 의하면, 예수님은 인간의 형태를 입은 사람으로서, 구세주가 아니요, 높으신 하나님도 아니다. 하나님과 구세주와(시몬 자신을 포함하여) 모두가 동격이다.
또 어떤 전승에 의하면, 케린투스라는 영지주의자가 사도요한과 동시대의 사람으로 존재하였다고도 한다. 그는 영이신 그리스도가 예수 안에 강림하였다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예수의 육체를 떠났다고 주장하였다고 하였다.
또 2세기 이후 가장 탁월한 영지주의 공동체로서, 발렌티누스파가 있었고, 또 말시온이란 영지주의자도 나타났다. 에비온파가 구약적 요소를 지나치게 강조한 이단이었다면, 그 반대로 말시온주의는 구약을 지나치게 배척한 이단이었다. 말시온은 흑해 남단에 있는 작은 마을 '시노피'(Sinope) 출신이었는데, 선박제조업으로 부를 누리던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비두니아지방의 감독이었는데, 아들 말시온의 부도덕한 행위를 보고 아들을 파문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서 말시온은 140년경에 로마로 이주하여 거액의 헌금을 로마 기독교 공동체에 제공하였다. 그러나 로마의 영지주의자였던 '세르도'(Cerdo)라는 사람의 영향으로 로마교회의 가르침과는 다른 교리들을 전파하기 시작했는데, 이로 인해서 그는 로마교회에서 파문당하였다고 전해진다. 144년경부터는 로마 교회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이단 집단 말시온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150년경에「변증서」라는 책을 쓴 순교자가 져스틴(Justin Martys)에 따르면 말시온파의 활동이 매우 활발했다고 한다. 이레니우스(Irenaeus)라는 리용의 감독은 150년대와 160년대에 말시온파의 확산이 급속했다고 말했다. 이레니우스에 따르면 서머나교회의 유명한 순교자 감독 폴리캅(Poly carp)이 말시온을 만나서 대화하고는 '사탄의 맏아들'이라고 공박했다고 한다. 말시온은「반대명제」라는 책을 저술했는데, 그 책 자체는 현존하지 않지만, 2세기 말과 3세기 초에 활동한 아프리카의 교부 '터툴리안'(Tertullian)이「말시온에 대항하여」라는 책에서「반대명제」의 내용을 대부분 수록하여 논박하였다. 말시온은 영지주의자로 불려지지만, 그러나 초기의 영지주의자들과는 차이점도 있기 때문에 독립적인 이단 집단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러나 말시온이 가르침을 받고 영향을 받은 세르도라는 사람은 명백한 영지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말시온의 이단사상은 기본적으로 그의 신관에서 비롯된다.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도무지 조화될 수 없는 별개의 존재라는 것이다. 이 사상은 '세르도'가 먼저 가르치기 시작한 것인데, 말시온이 더욱 발전시킨 것이었다. 그의 「반대명제」는 구약의 신과 신약의 신이 반대되는 점들을 열거한 것이었다. 구약의 신은 복수와 공의의 신이지만 신약의 신은 사랑의 신이라는 것이다. 구약의 신은 열등한 물질계 창조주로서 전지 전능하지 못하지만, 신약의 신은 전지 전능한 신이라는 것이다. 구약의 신은 유대인의 신이지만 신약의 신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로운 신이라는 것이다. 구약의 신은 알려진 신('데미우르게'라는 헬라철학의 신)이지만, 신약의 신은 원래 알려지지 않은 신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신약의 신은 구약의 신에게 얽매인 인간을 해방시키고자 예수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예수의 육신은 참된 육신이 아니라 환상적인 육신으로서 육신처럼 보였을 뿐이라고 했다(가현설). 구약의 신은 의인들만 받아주었지만, 예수는 모든 죄인들도 받아주고 심지어는 음부에 내려가서 구약의 신을 반대하는 영혼들을 구원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제 물질계를 벗어난 영혼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루고 있는데, 구약의 신은 다시 나타나서 지상에 천년왕국을 이루고 그리스도의 영적 왕국을 대적한다는 것이다.
말시온은 구약을 모두 거부하고 신약에서도 누가복음과 바울 서신 가운데, 열 개만을 정경으로 보았다. 이 가운데서도 구약의 인용 부분은 삭제해 버렸다. 게다가 자신의 저작인 댓구라는 책을 성경에 포함시켰다. 말시온은 바울을 좋아했고 바울 서신 중 사랑의 신에 대한 구절을 좋아했으며, 금욕주의적인 생활관을 가지고 있었다. 말시온으로 인해서 정통교회는 신약 27권의 정경화를 서둘러 추진하게 되었고, 구약의 신과 신약의 신의 관계를 더욱 깊이 연구하고, 묵상하게 되었다. 초대교회에서 이러한 이단들의 출현은 상대적으로 정통교회의 신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정리하는 계기가 되어졌다.
영지주의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창조교리를 변조시킨 초대교회 시절의 종교적 철학운동이었다. '지식'을 지나치게 숭상한 나머지, 실재에 대해서 이원론으로 치달았다. 영혼과 물질, 정신과 육체, 선과 악, 구약과 신약, 이스라엘과 교회, 하나님과 예수님, 율법과 복음, 심판과 칭의 등의 대립과 대결 속에서 만물이 형성되어 나간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을 '영적인 권능' 정도로 이해하였고, 물질 세계의 근원자가 될 수 없다고 격하시켰다. 성경과는 정반대로 물질 세계란 전혀 별개의 근원을 갖고 있다는 주장을 별개의 근원을 갖고 있다는 주장을 펴서 창조론을 거부하였다. 물론 성경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하나님 자신과는 완전하게 별도의 세계에 위치하고 있다. 하나님은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으며 영원히 창조주이시다. 그리고 세상은 그의 피조물이다. 이러한 구분을 영지주의자들은 부인하였다. 이들은 이 세상을 의미있는 곳으로 볼 수 없었다. 따라서 육체를 죄악시하고 엄격한 금욕주의에서 신앙생활의 이상을 발견하였다.
또 몬타누스라는 자도 있었다. 말시온과 몬타누스는 동일시대의 인물이다. 이들은 모두 안토니우스피우스 황제(Antonius Pius, 138~161 재위) 시대에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몬타누스는 새 예루살렘이 곧 임박했으므로 결혼은 금하고 말세를 준비해야 한다고 서둘렀다. 몬타누스는 자신에 대해 맹종을 요구하면서, "나는 특별한 예언적 은사를 받았다"고 확신시켰다. 자기가 받은 계시에 따르면 새로운 성령이 넘쳐흐르고 있으므로 곧 말세가 온다고 하는 종말론자였다. 몬타누스는 자신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소개하면서, 추종자들은 특별한 지식을 소유한 기독교의 영적 엘리트로 확신을 불어넣었다. 막시밀라와 브리스가라는 두 여제자를 두었고, 소아시아 지방에서 큰 세력을 확보하였다. 막시밀라는 남편으로 하여금 몬타누스를 따르게 하고 자신은 소아시아 프리지아 지방의 페푸자라는 동네에 새 예루살렘이 임한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세속적인 일을 중지하라고 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몬타누스가 받았다는 '새로운 계시'의 정체가 차츰 드러나면서 이단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몬타니스트들은 금욕주의적 생활양식과 순교에의 자발적 참여 등으로 인하여 정통교리가 체계화되지 못했던 초대교회 시대에 정통교회들의 반발을 무력화시키는 위세를 발휘하였다. 심지어 한 때 터툴리안 같은 교부마저도 그들과 잠시 관련을 가질만큼 큰 해독을 끼쳤다.
또한 영지주의자들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현설(Docetism)을 들고 나와서 육체적, 실제 예수의 존재를 부인하고 영적인 예수만이 있었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혼란을 초래하였다. 이 사상은 앞의 시몬 마구스가 선창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 없이 그냥 외형상으로 존재하였으며,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 아니요,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마술적 존재라는 것이었다. 가현설은 당시 헬레니즘의 합리적 사고와 부합하여 예수님의 탄생, 고난, 부활 등의 객관적 역사성을 모두 부인하기에 이르렀다. 트라얀 황제시대(Trajan, 98~117 재위)에 순교한 안디옥의 아그나시우스가 가현설의 오류를 간파하여 "예수님은 형상만 있던 분이 아니요, 참 사람이었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영지주의는 체계적인 기독교의 성경적, 신학적인 변증적 논리에 대해서 3-4세기 이후에는 급격하게 쇠퇴하며 무너지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 역사상 영지주의적인 사고방식은 성경에 근거한 기독교적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었으며, 최근에도 이단이라고 불려지는 곳에 의하여 아직도 계승되어지고 있다. 또 양태론적인 신론은 영지주의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며, 잘못된 기독론 역시 그 유래를 찾아 계속 올라가 보면, 결국 영지주의적인 영향에서 출발된 것이다.
지금도 신적계시 - 즉 자신들의 주관적이며 특별한 지식을 알아야만 거듭나며 구원을 받는다는 집단은 영지주의적인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부류의 이단들은 특히 창세기, 계시록등을 독단적으로 해석하면서 그것이 신적계시에 의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또한 인간의 육체를 물질화, 죄악시하여, 오직 영혼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금욕주의와 특별히 사람이 살아서도 육체와 영혼을 분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소위 영혼의 육체이탈설을 주장하는 일련의 주장등은 헬라주의적인 영지주의 견해와 유사하다. 인간은 그가 생명을 갖고 있는 한,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어지는 존재가 아니라, 전인적(全人的)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성경은 어떻게 쓰여졌는가?
성경은 언제,어떻게 쓰여졌는가 콘스탄티누스大帝(제위306~337)
개요
그의 개종에 힘입어 로마 제국은 그리스도교 국가로 변모하기 시작했으며, 그의 추진력 덕분에 형성된 그리스도교 문화는 비잔틴 제국과 서유럽의 중세 문화가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궁정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콘스탄티누스는 일련의 복잡한 내전을 거친 뒤 서로마 황제가 되었으며(312), 이어서 로마 제국 전체를 다스리는 단독 황제가 되었다(324).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성공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덕분이라고 평생 동안 믿었다.
그는 늦어도 313년까지는 개인적으로 그리스도교에 귀의했고,
그해에 밀라노 칙령을 발표해 그리스도교도에 대한 관용을 확대했으며,
신학 논쟁에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니케아 공의회(325)를 열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옛 이름은 비잔티움)을 재건하고 확장시켜 수도로 삼았는데,
이는 아마도 그가 거둔 마지막 군사적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 도시는 그후에도 1,000년이 넘도록 로마 제국 수도의 기능을 유지했다.
그의 개종은 그후 수세기 동안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자신이 하느님에게 선택받은 종복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자신의 교회를 잘 다스리는 것이 하느님에 대한 책무라고 생각했다.
일찍이 소수 종파였던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국교가 되었고, 콘스탄티누스와 후계자들의 후원으로 큰 발전을 이룩했다.
교회는 재산을 늘렸고 교회의 수도 늘어났다.
덕분에 교회는 배교자인 율리아누스 황제 시대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확고한 지위를 굳힐 수 있었다.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콘스탄티누스를 성인으로 추앙하고 있다.
콘스탄티누스는 육군 장교인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와 그의 아내(또는 첩)인 헬레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 집안은 3세기 후반의 전형적인 군사 지배 계급에 속해 있었다.
293년 그의 아버지는 부황제(caesar)의 지위에 올라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라는 칭호를 얻었고, 서로마 황제(아우구스투스)인 막시미아누스 밑에서 부황제로 일하기 위해 서로마로 갔다.
289년 아버지는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의붓딸과 결혼하기 위해 헬레나와 이혼했고,
어린 콘스탄티누스는 동로마 제국의 니코메디아로 보내져 황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궁정에서 자랐다.
카이사레아 주교 유세비우스는 어린 콘스탄티누스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함께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로 싸우러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콘스탄티누스가 동방 속주의 제국 궁정에서 겪은 경험은 그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동양의 여러 도시와 궁정에서 그리스도교와 접촉했다.
니코메디아의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정에서 비롯한 그리스도교도 박해가 제국의 동부 지역에서 특히 격렬하게 시행되고 있던 303년부터 그리스도교는 공공 정책의 주요쟁점이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일가가 그리스도교도였을 가능성도 있다.
305년 로마 제국을 공동으로 통치하던 두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퇴위하고, 그들의 부황제인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가 뒤를 이어 공동 황제에 올랐다. 그러나 얼마 후 동로마에서는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누스가 갈레리우스를 몰아냈고, 서로마에서는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세베루스가 콘스탄티누스를 무시하고 콘스탄티우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콘스탄티우스는 동로마에 있는 아들을 보내달라고 갈레리우스에게 요구했고, 콘스탄티누스는 적대적인 세베루스의 영토를 가로질러 게소리아쿰(지금의 프랑스 불로뉴)에 있는 아버지 곁으로 갔다.
이들 부자는 함께 브리튼 섬으로 건너가, 306년에 콘스탄티우스가 에보라쿰(지금의 잉글랜드 노스요크셔 주 요크)에서 죽을 때까지 브리튼 섬 북부에서 원정을 벌였다.
콘스탄티누스는 잇달아 일어난 복잡한 내전에 전념했다.
동로마의 갈레리우스는 콘스탄티우스를 몰아낸 세베루스를 서로마 황제로 선언했지만, 세베루스는 다시 리키니우스에게 쫓겨났고, 반란을 일으킨 막센티우스는 아버지 막시미아누스의 도움을 얻어 세베루스를 진압했다.
아들에게 버림받은 막시미아누스는 갈리아에 있는 콘스탄티누스와 합류했지만, 결국 콘스탄티누스를 배신하고 죽음을 맞았다(310).
307년 막시미아누스의 딸 파우스타를 2번째 아내로 맞이한 콘스탄티누스는 312년 이탈리아를 침략해 막센티우스를 무찔렀고, 리키니우스와 이미 맺고 있던 동맹 관계를 확인했다(갈레리우스는 311년에 죽었음).
콘스탄티누스는 서로마 황제가 되었고, 리키니우스는 경쟁자인 막시미누스를 무찔러 동로마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316년 발칸 반도의 영토를 빼앗았고 324년 아드리아노플(지금의 터키 에디르네)과 크리소폴리스(지금의 터키 위스퀴다르)에서 리키니우스를 패배시켜 동·서 로마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성공을 그리스도의 지원을 받은 덕분이라고 믿었다. 그가 막센티우스를 무찌른 뒤에 로마에 세운 개선문은 이 승리를 그 자신의 재능만이 아니라 '신이 준 영감' 덕분으로도 돌리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동상도 개선문과 동시에 세워졌는데, 콘스탄티누스가 십자가를 높이 쳐들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이 동상에는 "이 구원의 상징 덕분에 저는 당신의 도시를 폭군에게서 구했고, 원로원과 로마 국민에게 자유를 되돌려 주었습니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324년 리키니우스에게 승리를 거둔 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이 신앙심이 없는 자들을 진압하기 위해 신이 선택한 도구로서 브리튼 섬 북쪽 끝에 있는 해안에서 왔다고 말했으며, 페르시아의 왕 샤푸르 2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은 신의 신성한 힘의 도움을 얻어 이 지상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오기 위해 왔다고 선언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를 무찌른 직후에, 숱한 정치적 현안과 통치권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메디올라눔(지금의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리키니우스를 만났다.
이 회담에서 타협의 산물로 얻은 성과가 이른바 밀라노 칙령이다.
이 포고령의 골자는 그리스도교도에 대한 관용을 확대하고 그리스도교도를 박해하던 시절에 몰수한 사유 및 공유 재산을 모두 되돌려준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이 칙령의 사본은 사실상 리키니우스가 동로마 지역에 공포한 것들이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메디올라눔에서 리키니우스와 합의한 공동 정책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정책을 채택했다.
성 세바스티아누스 성당도 이 시기에 착공되었을 것이다.
콘스탄티누스가 교회와 성직자의 재정적·법률적 특권, 로마 시민이 마땅히 져야 하는 담세 및 부역의 면제 등에 관한 법률을 공포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였다.
그는 313년에 아프리카 속주 총독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리스도교 성직자는 '신에게 최고의 봉사를 자유롭게 바칠 수 있을 때 국가에 큰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들이 종교적 의무에 전념하는 것을 세속 관리들이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콘스탄티누스가 개인적으로 어떤 '신학'을 가졌는가는 313년부터 320년대 초까지 북아프리카의 도나투스파에 관해 쓴 일련의 편지에 특히 뚜렷이 드러나 있다.
도나투스파는 일단 그리스도교에서 일탈했던 신부와 주교를 다시 교회에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콘스탄티누스가 가장 걱정한 점은 교회가 분열하면 그리스도교 신이 화를 낼 것이고, 따라서 로마 제국과 콘스탄티누스 자신에게 신의 보복이 내릴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교회의 분열을 초래하는 것은 바로 악마라고 그는 생각했다.
평생 동안 콘스탄티누스는 잘못을 제거하고 진정한 종교를 전파하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이며 황제의 지위를 바람직하게 이용하는 길이라고 확신했다.
그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의 주교'임을 자처한 것도 이런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밖에 제국 관리들과 그리스도교 성직자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가 밝힌 견해들을 보면, 그리스도교에 대한 그의 헌신이 일부 사람들이 언급한 것보다 훨씬 확고하고 분명해졌음을 알 수 있다.
콘스탄티누스가 종교 문제에 2번째로 관여한 것은 리키니우스를 무찌른 뒤였다.
그러나 이단인 아리우스파는 삼위일체의 본질을 어려운 그리스어로 복잡하게 설명했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의 성급하고 직선적인 기질만이 아니라 그의 교육적 배경과도 동떨어져 있었다.
황제는 325년 초여름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기 전에 이미 알렉산드리아의 아리우스에게 편지를 보내, 분쟁을 조장하는 것은 한가한 사람들이나 하는 학문적 논쟁일 뿐이며 쟁점은 지극히 사소하기 때문에 쉽게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그의 낙관은 빗나갔다.
이 편지도, 니케아 공의회 자체도,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이라고 아리우스파에게 촉구한 2번째 편지도 모두 분쟁을 해결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했다.
신학적 쟁점이 미묘한 만큼, 분쟁 당사자들도 완고하게 자신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콘스탄티누스가 죽은 뒤 40년이 넘도록 아리우스파는 사실상 동로마 제국의 정통 교리로 공인되어 있었다.
니케아 공의회는 콘스탄티누스 즉위 20주년 기념 행사와 거의 같은 시기에 열렸다.
주교들은 황제가 공의회에 참석해 경의를 표시한 보답으로, 콘스탄티누스 즉위 2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하여 행사를 빛내 주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가 축하 행사를 로마에서 되풀이하기 위해 326년에 서로마를 방문한 것은 가장 큰 정치적 위기를 초래했다.
그는 동로마를 떠나 있는 동안 맏아들이자 부황제인 크리스푸스와, 크리스푸스의 계모이며 자신의 2번째 아내인 파우스타를 죽이게 했다(이유는 아직도 밝혀져 있지 않음). 로마 방문도 그리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교도의 행진에 동참하기를 거부해 로마인들을 화나게 했다. 그는 짧은 방문을 마친 뒤 로마를 떠났고, 두번 다시 로마를 찾지 않았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콘스탄티누스의 통치 말년의 방향을 설정해주었다.
그는 리키니우스를 무찌른 뒤 비잔티움을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는데, 서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오자마자 이 도시를 훨씬 확대된 도시 계획에 따라 그의 상설 수도이며 '제2의 로마'로 재건하기 시작했다.
330년 5월에 끝난 콘스탄티노플 건설은 1세기 전부터 진행된 로마와 황제들 사이의 분열을 확인해 주었다.
로마는 제국의 전략적 필요성에 적합하지 않은 지역이 된 지 이미 오래였다.
로마는 아직도 엄청나게 부유하고 유명한 도시이자 제국의 중심지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제한된 중요성밖에 갖지 못하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가 성지 순례를 떠난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326년 황실에서 일어난 비극을 속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헬레나는 여행중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고 깊은 신앙심에서 우러나온 종교 활동을 펼쳤으며, 특히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에 교회를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콘스탄티누스의 장모인 유트로피아도 맘레에 교회를 세웠는데, 〈창세기〉에 대한 콘스탄티누스와 에우세비우스의 공동 해석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이곳 맘레에서 처음으로 신의 모습을 인간에게 드러냈다고 한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예수가 부활할 때까지 누워 있던 성스러운 무덤이 발견되자 열광한 콘스탄티누스는 그 자리에 웅대한 교회를 새로 짓도록 선동했으며, 노동력과 물자를 무제한으로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설계와 장식에 대한 제안도 아끼지 않았다(→ 성묘교회).
콘스탄티누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교회 건축에 관심을 보였다.
그가 특히 관심을 쏟은 것은 하기아소피아와 사도교회였다.
로마에서는 320년대 후반에 산피에트로 성당이 착공되었으며, 콘스탄티누스는 이 성당 건축을 위해 많은 헌금을 했고 재산을 아낌없이 기부했다(→ 구성베드로 대성당). 한편 트리어와 아퀼레이아, 누미디아의 키르타, 니코메디아, 안티오크, 가자, 알렉산드리아를 비롯한 여러 지역의 교회들도 직접 또는 간접으로 그의 관심 덕분에 발전했다.
황제는 그리스도교를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기도 했다.
리키니우스를 무찌르기 전에도 그는 신학자이자 논쟁가인 락탄티우스를 트리어로 불러들여, 맏아들 크리스푸스의 가정교사로 임명했다.
말년에 그는 콘스탄티노플에서 갈수록 늘어나는 그리스도교도를 위해 성경을 새로 발간해 보급하도록 했다.
그는 군대를 위해 특별한 기도문을 만들었고, 원정중에는 막사 안에 이동 예배당을 설치했다. 그는 그리스도교 의식 및 그리스도교도가 특히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문제와 관련된 수많은 법률을 공포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기를 원했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세례식을 연기했다.
그가 헬레노폴리스에서 병에 걸린 것은 아마 페르시아 원정을 준비하던 중으로 추측된다. 치료에 실패하자 그는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려 했지만, 니코메디아 근처에서 몸져누울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콘스탄티누스는 세례를 받고, 황제의 자줏빛 옷 대신 세례받는 사람이 입는 하얀 옷을 걸쳤다.
그는 337년 5월 22일 죽었으며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사도교회에 묻혔는데, 무덤 주위에는 사방에 각각 6개씩 기념물이 늘어서 있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적 과대망상증을 표현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확신, 즉 자신은 사도들의 후계자로서 그리스도교 전파를 위해 인생과 공직을 바쳤다는 믿음을 표현한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의 통치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개인적 헌신이라는 배경에 비추어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황제로서의 활동과 정책에 불명확한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로마의 여론은 황제들에게 혁신이 아닌 전통의 보존을 기대했다.
콘스탄티누스는 기존 관행에 경의를 표하면서 급작스럽고도 전면적 변화를 이룩해야 했기 때문에 그의 공공 정책에 일부 불명확한 점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콘스탄티누스는 시골의 전통적 주술에 대해서는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
그에 못지않게 시민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지방 신관들도 콘스탄티누스보다 오래 존속했다.
콘스탄티노플 자체는 주로 그리스도교 도시였으며, 도시 건설이 끝났을 때는 그리스도교 예배를 통해 신에게 도시를 헌납하고 완공을 축하했다.
유명한 이교도 예언자인 소파트로스도 이 축하 행사에 참석했다.
콘스탄티누스의 세속적 업적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황제 자신이 통치에 주로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종교 정책이 지나치게 불안정하고 혁신적이라고 생각하여 그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동시대인들이 그의 세속적 업적을 해석할 때도 이런 종교 정책의 특징을 그대로 적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콘스탄티누스의 업적 가운데 일부는 마지막 반 세기의 경향 속에 이미 내포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가 재위하는 동안 궁정의 계급제도가 더욱 발전했고 변경에 수비대를 두는 대신 기동 야전군에 더 많이 의존하게 되었는데, 이것도 역시 그 시대의 흐름 속에 이미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콘스탄티누스가 주조한 솔리두스라는 금화는 그후 몇 세기 동안 비잔틴 제국의 기본 화폐 단위로 쓰였는데, 3세기의 무정부 상태 이후 그의 전임자들이 정치적·군사적 안정을 회복하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면, 콘스탄티누스가 새 금화를 발행하는 업적도 이룩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들 지방장관들은 민간 재정에 관해서는 여전히 최고의 권한을 갖고 있었지만, 군사 문제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통제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새로 창설된 기병대장과 보병대장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
장기적인 중요성을 가진 콘스탄티노플 건설은 콘스탄티누스의 개인적 업적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전임자들한테서 이미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가령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니코메디아를 로마의 지위에 도전한다고 여겨질 만큼 높은 지위로 끌어올렸다.
콘스탄티노플은 그리스 신전에서 약탈해온 예술품으로 가득 차 있어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종교적 탐욕'을 보여주었지만, 그 공공건물과 콘스탄티누스의 지지자들을 위해 지은 저택의 일부는 서둘러 건축한 흔적을 곧 드러냈다.
로마 원로원과 경쟁시키기 위해 창설한 콘스탄티노플 원로원은 오랫동안 로마 원로원과 같은 명성을 누리지 못했고, 명문 귀족의 혈통을 물려받은 원로원 의원도 부족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내전에서 거둔 승리에 더하여 프랑크족과 사르마티아인 및 고트족에게도 승리를 거두어, 군사정책에서는 완벽한 성공을 누렸다.
특히 내전에서는 대담하고 창의적인 전략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솜씨를 보여주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정적들에게 무자비했고, 그리스도교도에 대한 관용을 제외하고는 그가 제정한 법률들은 주로 그 잔혹성 때문에 유명하다.
이런 잔혹성은 그후 로마 법 집행의 특징이 되었다.
그의 주요한 정치적 업적은 제국을 세 아들에게 물려줌으로써 상속에 따른 제위 계승을 재확립했다는 데 있다. 그러나 그의 아들들의 제위 계승권은 그가 죽은 뒤 유혈 사태가 잇따른 뒤에야 겨우 확보되었다.
콘스탄티누스가 가장 큰 업적을 남긴 분야는 무엇보다도 사회사와 문화사 분야일 것이다.
그가 왕조 확립에 성공한 것과 더불어, 그리스도교화한 제국의 지배계급이 그를 본받아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스도교의 특권적 지위를 가장 확고하게 뒷받침해주었다. 그리고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화를 떠받친 토대는 법률 집행보다는 오히려 이런 유행의 흐름이었다.
4세기에는 이 흐름이 2가지 방향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것들은 비잔틴 제국과 서유럽에서 발달한 중세문화의 본질에 기본적으로 이바지했는데, 하나는 그리스도교 성서문화가 상류계층의 전통적인 고전문화와 나란히 발전한 것이었고, 또하나는 세속 지배계층과 주교, 그리스도교 지식인과 성직자들 사이에 새로운 형태의 종교적 후원 관계가 확대된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후계자들에게 할 일을 많이 남겨놓았지만, 312년에 로마 제국을 그리스도교 국가로 만들기로 결정한 것은 그의 개인적 선택이었다. 유세비우스가 콘스탄티누스의 통치를 신의 섭리가 실현된 것으로 본 이유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콘스탄티누스가 자신의 역할을 13번째 사도의 역할로 평가한 것도 충분한 설득력을 갖는다.
J. F. Matthews D. M. Nicol 글
지성인들이 본 기독교
<주인장 주 : 기독교를 지지하는 내용들은 "성경"을 포함해서 십수세기에 걸쳐 아주 많이 나와 있으므로 생략하였음. 오해 마시길.......단지 객관적인 호기심에서 옮겨옴 >
[니체] 『예수교는 인류에게 커다란 저주이며, 본질적인 타락이며, 영원한 오점이다. 기독교의 가치관이란 反인간적이고 또한 삶에 적대적인 것이다. 따라서, 예수교는 노예 근성의 소유자들, 나약한 자들, 그리고 무능한 자들에게만 적합한 것일 뿐이다』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1878)에서] 『 Christianity is the one great curse, The one intrinsic depravity, The one immortal blemish upon humankind, Christian values are anti-human and hostile to life. Being fit only for slaves or the weak and inadequate. 』 ~ Nietzsche (All Human, All Too Human 1878) [김용옥-사상가] 『기독교는 교리에 문제가 있다. 그 교리가 저급하고 유치하고 모순투성이며 독선적이며 배타적이다』 『오늘 우리 20세기를 회고해볼 때, 우리 20세기의 최대의 죄악은 바로 악마와 천사라고 하는 얄팍한 기독교적 사유 속에서 세상을 보았던 윤리적 이원성이다』 [이상봉-재미 철학자] 기독교도들은 이승도 모르면서 저승에 대해 다 알고 있는 듯이 설치고, 제 마음도 모르면서 하늘의 뜻을 다 알고 있는 듯이 설치고, 사랑이 뭔지도 모르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있다고 설치고, 같은 인간끼리 대화도 하지 못하면서 하느님과 언제나 대화를 하고 있다고 떠들고, 죄는 사람에게 저질러 놓고서 하느님 앞에 죄인이라고 떠들고, 이세상에 살고 있으면서 이 세상의 잣대로 자기를 판단하지 말라고 떠드는 자들의 집합체이다. [볼테르]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기독교를 공포의 눈으로 바라볼 것이다』 [쇼펜하우어] -인도의 「우파니샤드」를 읽고 나서 한 말 『아 이렇게 내 마음에 붙어 있던 유대인의 미신을 깨끗이 씻어 줄 수 있는가!』 [윌 듀란트] 『기독교는 틀림없이 신성하다. 악행과 넌센스로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170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슈바이처] 『예수는 머지않아 초자연적인 하나님 나라가 곧 출현하리라고 전했지만, 이 나라는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로서의 예수는 오류를 범했다』 [토인비] 『나는 신의 본질에 대해서 유태의 개념(구약의 하나님)을 믿지 않을뿐더러 그다지 존경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신의 전능함을 그럴듯하게 꾸미기 위해 악마도 신이 만든 것이라고 보고 있어, 그러면서도 신은 자기가 만든 악마의 행위에는 책임이 없다는 거야』 [루소] 『구원받기 위해서 신을 믿어야 한다. 이 그릇된 교리는 잔인한 불관용의 원리이다』 『만약 지상에 단 하나의 종교가 있어서, 그것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영원한 고통만 있다면, 그런 종교의 신은 가장 부정한, 또 가장 잔인한 폭군일 것이네』 [아인쉬타인] 『나는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의 많은 부분이 사실일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열정적인 자유 사상가가 되었고, 국가는 고의로 젊은이들을 기만하고 있다는 인상을 갖게 되었다. ‥‥‥ 이 태도는 근본적으로 내 일생을 통해 지속되었다』 [B. 러셀] 『나는 그의 창조물인 인간을 상벌한다는 신을 상상할 수가 없다』 『기독교의 근본 교리는 수많은 윤리적 오류를 범하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 『우리가 기독교를 지키지 않으면 모두 다 악한 사람이 된다고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기독교를 지켜온 사람들이 대개 매우 악했습니다. ....저는 많은 교회로 조직된 기독교도의 종교가 세계의 도덕적 진보의 제1의 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헬렌 켈러] 『천국은 우리 밖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내세 같은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믿는다면, 하나님이 노한다거나 변덕스럽다거나 쉽게 변하는 분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터무니없는 개념들은 <성경>이 쓰여졌던 시대의 미개한 야만주의를 반영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톨스토이] 『기독교인들은 야만적인 최면술과 기만 속에 있으면서, 자기들이야말로 진실한 종교의 파악자라고 자만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기독교의 기만적인 최면술에 사로잡힌 결과, 자기들에게 주입된 사이비종교를 진실하고 유일한 종교로 생각하고, 그 밖에는 어떤 종교도 없으며 또 있을 수도 없다고 생각하는 무지몽매한 대중들이 기독교도들이다』 [존 스튜어트 밀] 『지옥을 만들어 내는 존재를 생각해 보라. 인류의 대다수가 끔찍스러운 영겁의 형벌을 받도록 되어 있다는 것을 미리 분명히 알면서, 따라서 그렇게 할 의도를 가지고서 인류를 창조한 존재를 생각해 보라 ‥‥ 상상이 가는가?』 [라즈니쉬] 『이제 기독교 신학자들조차도, 기독교 복음서가 사도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 의해 쓰여졌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복음서에 서술된 산들은 실제 지명과 같지 않다. 강들과 호수들도 역시 실제지명과 같지 않다. 모든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 보지도 못한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것이다』 [니체] 『기독교는 야만적인 개념과 가치로 중무장하고 필요하다면 주위의 민족을 야만인이라 단정하고 정복하는 것을 하나님의 계시라고 선동한다』 『첫 자식을 재물로 바치는 것, 성찬식에서 피를 마시는 것, 이성과 지혜에 대한 경멸, 육체적, 비육체적인 것을 막론하고 온갖 종류의 고문 등등 이러한 것들이 기독교적인 것이다』 『아직 유럽은 불교를 받아들일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불교는 문명의 종말과 피곤함 때문에 생긴 종교이지만, 기독교는 문명의 맹아도 아직 보지 못했다. 기독교는 필요하다면 인류를 파멸시킬 것이다.』 출처 : Tong - 和而不同님의 종교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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